고방서예[3398]가전충효(家傳忠孝) 세수청백(世守淸白)
가전충효(家傳忠孝) 세수청백(世守淸白)
가정에서는 충효의 법도를 전승하고
사회에서는 맑고 밝은 마음을 지키도록 하라.
청도지역 서원•재실•고택 탐방(89)
가전충효(家傳忠孝) 세수청백(世守淸白),
허병 선생의 오우재(五友齋)
행전(杏田) 박영환(朴永桓)
청도문화연구회 회원. 前 교장
청도군 금천면 김전2리 배산임수(背山臨水) 마을 뒷산 기슭에 병풍처럼 펼쳐진 대숲 앞에 자리 잡은 오우재(五友齋)를 찾았다
김전리는 옛날 절터에서 금불상(金佛像)이 발견되어서 김전(金田)으로
불렀다고 한다. 또 밭에서 사금(砂金)이 나와서
김전(金田) 또는 금평(金坪)이라고도 한다.
이곳의 배향 인물은 석간공(石澗公) 허병(1805~1871) 선생으로
본관은 양천(陽川)이다. 공의 시조는 가락국 김수로왕의 비 허황후
보주태후(普州太后) 허황옥(黃玉)의 30세손인
장경공 허선문(許宣文)이며 파조(派祖)인 승문원교감(承文院校勘)
집(輯)의 29세손이다. 공은 조선 후기 순조 때 김해에서 청도로 입향했다. 처음에 터를 잡은 곳은 금천면 소천1리 석현마을이었지만 뒤에
이웃 마을인 김전리로 이거하였다.
평소 남이 모르게 많은 은덕을 베풀었으며 슬하에
돈(墩), 용(墉), 도(燾,) 육(堉), 식(埴) 다섯 아들을 두었다.
5형제의 장남인 돈(1827~1891)은 자가 회원(晦元)이고
호는 돈계(遯溪)였다. 일찍이 부친의 가르침을 받았고 그 뒤
성재 허전(性齋 許傳, 30세손, 김해 부사로 선정을 베풀고
향약을 정리하는 등 공적을 남김)의 문하에서 학문을 수학하여
생원시(生員試) 초시(初試)에 합격 했다.
그는 소천리 재실에서 후학을 양성했으며 또 김전리의 정도재(凈淘齋)와
추모재(追慕齋)에서도 다년간 후학들을 가르첬다.
둘째인 도계(道溪) 용과 셋째인 심재(心齋) 도 역시 형님과 함께
성재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혀 덕행이 높았으며
다른 형제들도 학문에 진력했다.
아무튼 5형제 모두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의
오상지도(五常之道) 속에 형제간에 우애가 남달리 두터웠다.
그 뒤 후손들 중에도 학문과 사회적 업적이 빼어난 분이 많이 배출되었다.
금은 운(琴隱 運, 32세손)은 시문(詩文) 수백 편을 남겼는데
둘째 아들 영회(英會, 33세손)와 손자 일행(一行, 34세손)이
인암 박효수(忍庵 朴孝秀)의 서문을 받아 금은유고(琴隱遺稿)로 편집했다.
원사공(圓史公) 순회(淳會, 33세손)는 금천면 농협조합장(선출직)을
7년 동안 역임했으며 51세 때 순직(殉職)했다.
명회(明會, 33세손)는 한국가스기술공사 사장을 역임하였고,
연회(連會, 33세손)는 부산문화방송국(주) 부산MBC 사장을 지냈다.
그리고 신행(信行 34세손, 청도 향교 이사)은 오우재 보수를 위해
물심양면으로 크게 노력했다.
오우재는 팔작지붕 목조 와가 정면 4칸 전퇴 구조이다.
소천리 석현(石峴)에서 5형제가 창건하여 종사 및 서당으로 활용했다.
김전리에 거주를 옮겨온 뒤 주손인 운(32세손)을 비롯하여 종형제가
재실도 이건하기 위해 터를 마련하고 기문을 받는 등 준비했다가
1980년에 정(遉, 32세손)을 중심으로 문중 일원이 합심하여
새로 중건하게 되었다. 그 뒤 2022년에 모경문(慕敬門) 및
조상의 신주를 모신 감실(龕室)을 새로 짓고 본당 등을
대대적으로 중수했다. 마루에는 김재화(金在華)가 짓고
장병훈(張炳壎)이 근서(謹書)한 오우재 중건기가 있다.
이곳에서 후손들은 선조유교(先祖遺敎)인
가전충효(家傳忠孝) 세수청백(世守淸白)
-가정에서는 충효의 법도를 전승하고
사회에서는 맑고 밝은 마음을 지키도록 하라.-
는 가르침을 새기며 유대를 돈독히 하고 있다.
‘오우재’란 시제로 글을 올렸다.
행복마을 김전리 대숲 앞 오우재
선대의 유훈은 충효와 청백이라
받들어 문행과 명망, 우뚝 선 양천 허씨
선조 유교인 '가전충효, 세수청백'
오우재 중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