原石/정진규
사람들은 슬픔과 외로움과 아픔과 어두움 같은 것들을 자신의 쓰레기라 생각한다 버려야 할 것들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그것들을 줍는 거지 사랑하는 거지 몇 해 전 집을 옮길 때만 해도 그들의 짐짝이 제일 많았다 그대로 아주 조심스레 소중스레 데리고 와선 제자리에 앉혔다 와서 보시면 안다 해묵어 세월 흐르면 반짝이는 별이 되는 보석이 되는 원석原石들이 바로 그들임을 어이하며 모르실까 나는 그것을 믿고 있다 기다리고 있다 나는 슬픔 부자富者 외로움 부자富者 아픔의 어두움의 부자富者 살림이 넉넉하다
※거지…걸인(乞人)
<시 읽기> 原石/정진규
위 시는 정진규 시인의 시집 『연필로 쓰기』 속에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위 시의 제목으로 나오는 ‘원석原石’을 아시는지요? 원석이란 말 그대로 가공하기 이전의, 땅속에서 캐낸 그대로의 돌을 말합니다. 그 원석이 우수한 가공의 과정을 통하여 우리 앞에 드러낸 보석들을 보면 화려하기 그지없습니다. 금, 은 등과 같은 흔한 이름은 물론, 루비, 사파이어, 진주, 다이아몬드 등의 화려한 이름을 달고 그들은 세상 사람들이 눈과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그러나 원석은 너무나도 거칠고, 투박하고, 제멋대로 생긴 바람에 보는 사람마다 저것을 어찌하면 좋을까 하고 난감한 상태에 빠지도록 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원석은 희망의 원천입니다. 그 원석을 귀한 손님처럼 대접하는 긴 인내와 정성의 시간을 갖는다면 원석은 우리에게 결코 후회하지 않을 빛나는 세계를 가져다 줄 것입니다.
정진규 시인은 위의 시에서 인생 속에 파고드는 슬픔, 외로움, 아픔, 어두움 등과 같은 부정적 감정과 상황들을 원석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들은 모두 인생의 그림자들이지요. 그 어두운 그림자들을 피하거나 이기지 못하여 때때로 우리의 삶은 얼마나 무겁고 혼란스럽고 무기력해지곤 하던가요? 그러나 우리의 생이란 조금 잔혹한 것이어서 제아무리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내딛어도 그 속엔 언제나 지뢰처럼, 돌부리처럼 그런 그림자들이 숨어 있는 것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어두운 그림자들이 없는 우리의 생을 상상할 수조차 없을 만큼 그림자는 우리들 생에 바짝 붙어 동행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쓰레기라고 부르며 버리려 하거나 사갈시蛇蝎視하는 그것들을 위 시의 정진규 시인은 ‘원석’이라고 다른 이름을 불러주며 긍정했습니다. 그리고 긍정에서 더 나아가 그것들을 소중히 다루고 대접하였습니다. 그리고 긍정에서 더 나아가 그것들을 소중히 다루고 대접하였습니다. 남들은 모두 쓰레기라고 치부해버리는 것을 그는 이렇게 원석이라고 부르면서 자발적인 넝마주이처럼, 아니 아무도 모르게 눈빛을 은은히 발하며 산속을 헤매는 심마니처럼 열심히 줍고 찾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의무나 탐욕이 아니라 그들에 대한 믿음과 사람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원석만이 아니라 그 어떤 것도 그에 대한 ‘긍정’과 ‘믿음’ 그리고 ‘사랑’이 없으면 빛을 내며 보석처럼 살아날 수가 없습니다. 그는 남들이 쓰레기라고 부르는 이 인생의 어두운 그림자들을 ‘긍정’과 ‘믿음’과 그리고 ‘사랑’의 힘으로 포용하고 그것이 창조해내는 빛으로 그의 삶과 우리들이 삶 속에 ‘아름다운 가게’를 만들어보고자 한 것입니다. ‘재활용의 기적’을 이룩해내는 ‘아름다운 가게’는 우리들이 사는 이 땅에서 존재의 재생과 중생과 부활을 시사하는 이정표입니다.
쓰레기와 원석 사이는 이처럼 멀고도 가깝습니다. 버리는 쓰레기를 주워서 원석으로 긍정하는 순간 우리의 눈엔 그 원석의 갈피마다 숨어 있는 보석의 빛과 향과 소리가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그 느낌 속에서 우리는 더욱더 부지런한 원석발굴자가 되고 보석세공사가 되고자 애를 씁니다.
이런 원석발굴자이자 보석세공사와 같은 정진규는 그의 이삿짐 속에 이 원석들의 짐짝이 제일 많았다고 위의 시에 썼습니다. 원석들은 그가 닦아서 보석으로 꽃피워낼 원천입니다. 이 원석들은 그의 말대로 세월이 흐르면 그 스스로 성장하여, 아니 주인의 무한한 포용과 인내와 배려 속에서 반짝이는 별들처럼 그 나름의 빛과 색을 발하는 생과 존재의 신비를 만들어낼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월과 노력 , 시간과 인간이 빚어내는 이 신비를 다른 근사한 말로 표현할 수는 없을까요? 바로 이런 물음 앞에서 ‘발표’의 신비와 ‘연금술’의 기적과 ‘승화’의 예술이란 말을 써도 좋은 것 같습니다. 발표, 연금술, 승화, 방금 사용한 세 가지 말은 모두가 우리들이 사는 세상을 높이 들어 올리는 말들입니다. 그 말들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방향의 유혹에 이끌려 우리의 생은 언제나 새로운 결의의 아침을 맞이하고 남다른 성찰의 저녁을 맞이합니다.
세월과 노력, 시간과 인간이 빚어내는 이 신비를 다른 근사한 말로 표현할 수는 없을까요? 바로 이런 물음 앞에서 ‘발표’의 신비와 ‘연금술’의 기적과 ‘승화’의 예술이란 말을 써도 좋은 것 같습니다. 발표, 연금술, 승화, 방금 사용한 세 가지 말은 모두가 우리들이 사는 세상을 높이 들어 올리는 말들입니다. 그 말들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방향의 유혹에 이끌려 우리의 생은 언제나 새로운 결의의 아침을 맞이하고 남다른 성찰의 저녁을 맞이합니다.
발효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썩힘’의 과정을 거쳐 ‘삭힘’의 세계로 나아가는 일입니다. 인간의 미각이 최고로 치는 맛이 바로 이 발효의 과정에서 창조된 ‘삭은 맛’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 맛에 비한다면 단맛이니 짠맛이니 신맛이니 쓴맛이니 하는 것은 급수가 좀 낮다고 할 수 있지요. 물론 이들도 다 그 나름의 매력과 색채를 갖고 있지만, 그 깊이가 덜하다는 것이지요. 된장, 간장, 고추장, 김치, 젓갈 등은 모두 발효의 신비가 빚어낸 삭은 맛의 대명사들이지요. 그런 맛을 가리켜 소설가 김동리는 “심각深刻”하다고 썼습니다. 그 “심각”한 맛, 그것이야말로 썩힘이라는 어두운 그림자의 과정을 온몸으로 건너뛰지 않고 빠듯이 거쳐야만 우러날 수 있는 맛입니다. 그 맛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러나는 것이라고 말해야 보다 적합합니다. 이런 발효의 신비 속엔 세상을 간과하며 다니는 유쾌한 사람들은 알 수 없는 포용, 인내, 기다림, 다스림, 어루만짐 등의 시간과 노력이 숨어 있습니다.
연금술이란 무엇입니까? 비금속卑金屬을 귀금속貴金屬으로 변화시키는 화학적 기술을 말합니다. ‘비卑’가 ‘귀貴’가 되는 비밀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 연금술의 비밀을 터득하게 되면 쓰레기와 같았던 어둠의 그림자들이 화학적, 질적 전변을 통하여 보석과 같은 빛을 발하게 됩니다. 방금 연금술을 두고 기술이라는 말을 썼습니다만, 연금술은 기교라기보다 물질에 대한 지극한 애정과 세계의 아름다움에 대한 간절한 소망이 창조해낸 기적입니다. 존재에 대한 지극한 ‘애정’과 아름다운에 대한 간절한 ‘소망’은 ‘비천한 것’을 ‘귀한 것’으로 전변시킬 수 있는 원천입니다.
승화에 대해서는 아주 짧게 말하렵니다. 누구나 알고 있을 터이니까요. 마이너스의 세계를 플러스의 세계로, 아두운 그림자를 흰그림자로 끌어올리는 심리적 예술이 승화이지요. 이 예술을 익힌 사람에겐 쓰리게도 원석도 모두 재산이 될 수 있습니다. 승화의 예술 앞에서 재생하지 않는 것은 없으니까요. 승화의 예술이 발휘되면 죽음까지도 재발견되는 생의 원석입니다.
정진규 시인은 위 시에서 생의 슬픔, 외로움, 아픔, 어두움 같은 것들을 집 안 가득 원석으로 품고 사는 그 자신을 “부자富者”라고 규정하였습니다. 그러고 보니 부자에는 종류도 많습니다. 돈 부자, 땅 부자, 자식 부자, 지식 부자, 친구 부자, 보석 부자, 옷 부자 등 얼마든지 머뭇거리지 않고 이런 이름들을 나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정진규 시인은 그 자신을 슬픔 부자, 외로움 부자, 아픔 부자, 어두움 부자라고 불렀습니다. 그런 것들을 원석이라고 전변시킬 수 있는 그에게, 그 속에서 보석을 볼 수 있는 그에게 이런 것들은 누구와도 구별되는 자신이었던 것입니다. 남들이 버리는 것들을 새로운 눈으로 줍는 사람은 무한에 이르는 자산가가 될 수 있습니다. ‘견자見者’라고 불리는 시인들은 그런 점에서 보이지 않는 무한의 부자 반열에 끼일 수 있는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가 봅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했다 하더라도, 슬픔, 이로움, 아픔, 어두움 등과 같은 생의 어두운 그림자들을 선뜻 줍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가능하다면 그것들을 피하거나 못 본 척하고 싶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인간다운 반응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그 어두운 그림자들이 버리고 싶은, 그러나 버릴 수 없는 우리들의 생의 유산이라면, 그것을 따뜻이 품어 안아 부화시키는 길을 가보는 것도 현명한 일이 아닐까요? 이런 점에서 발효는, 연금술은 승화는 인간들이 현명함을 알려주는 소중한 말들입니다. 정진규는 이 점을 아는 시인입니다.
그가 이런 시인이라는 사실은 발효의 신비를 이야기할 때 제가 즐겨 인용하곤 하는 그이 작품 <축이법鱁鮧法>을 보면 아주 잘 알 수 있습니다.
우리네 젓갈을 한자말로 축이鱁鮧라 쓴다. 그 글자에도 무슨 내력이 있기야 하겠으나, 버린 물고기들을 거두
어 먹을 수 있도록 한 우리네 조상들의 무슨 가여운 뜻이 거기 숨이 있기야 하겠으나 그 젓갈의 곰삭은, 심각
한 맛을 지닌 여자女子가 하나 내 곁에 있음을, 지금 함께하고 있음을 나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그 자체이
기 때문이다. 심각深刻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생선회가 생선 중의 생선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인생 초단初段
이다. 날것을 날것 자체로 익혔다는 것 그것도 못쓰게 될 것들을 살려냈다는 것 그것도 소금이 쓰라림만으로
익혀냈다는 것 그게 심深刻이다 나는 기쁘다 싱싱한 상처라는 말을 이제 쓸 수도 있겠다
못쓰게 된 생선들, 못난 생선들을 소금이 쓰라림만으로 익혀내서 만든 축이(젓갈), 그것을 정진규 시인은 위 시에서 “싱싱한 상처”라고 부르며 사랑하는 것입니다. 잘난 것과 날것 위에 이런 못난 것과 곰삭은 것을 올려놓고 그는 바로 발효, 연금술, 승화의 길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길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세상은 흩겹이 아니라 언제나 무한으로 열릴 수 있는 여러 겹의 세계임이 분명합니다.
―정효구, 『시 읽는 기쁨』, 작가정신,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