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알고 있는 “리콴유”는 솔직히 기억에 없고, “이광요”는 상당히 희미한 기억으로 싱가포르의 독재자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1970년대 우리나라 뉴스에도 자주 나오던 싱가포르의 수상 이름은 ‘이광요(李光耀)였고, 그가 싱가포르를 철권으로 통치한다는 얘기와 싱가포르의 사회 질서에 관한 것은 자주 회자되었기 때문입니다.
리콴유(李光耀) : 싱가포르의 정치가이자 초대 총리, 독재자. 영국령 싱가포르 자치정부 총리, 말레이시아령 싱가포르주 총리를 거쳐, 독립 싱가포르의 초대 총리로 취임하여 31년간 장기 집권하였다. 1990년 총리직 퇴임 이후에도 후임 고촉통 내각에서 2004년까지 국무자정(Senior Minister)을 지냈고, 아들 리셴룽이 총리에 취임한 2004년부터 2011년까지는 고문장관(Minister Mentor)을 역임하면서 정계 막후에서 계속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싱가포르의 국부로 불리며 싱가포르를 동남아시아 제일의 경제 강국으로 성장시키는 데 기여한 지도자이지만, 재임 기간 중 권위주의적 개발독재 정치체제를 확립하고 언론통제와 검열 등 사회 탄압이 이뤄졌다는 점 때문에 평가가 엇갈리는 인물. 한국으로 따지면 박정희와 비슷한 포지션을 갖고 있다.(나무위키)
싱가포르국민들이 리콴유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제가 잘 알지는 못하고 다른 나라 사람들이 그를 평가한 것에 보면 ‘독재자’, ‘인권 탄압자’가 확실한 것 같습니다. 다만 그가 자신을 위해 부정축재를 했다는 얘기는 없습니다.
벌써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난 리콴유를 다시 상기하게 된 것은 ‘나 죽거든 살던 집을 허물어 버리라’, ‘나에 대한 평가는 내가 죽은 뒤에 하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해서입니다.
<국가 지도자의 마지막 말이 이 수준은 돼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 이유는 얼마 전 책방을 개업한 한국 대통령 때문이었을 것이다.
리콴유 싱가포르 전 총리(1923~2015)는 생전 ‘나 죽거든 살던 집은 허물어버리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는 ‘싱가포르 국민에게 물려주고 싶은 유산은 튼튼하고 청렴하고 효율적인 정부’라고 했다. 리콴유와 오랜 교분을 나눈 헨리 키신저는 최근 ‘아버지 뜻이 분명한데도 자식들이 티격태격하고 있다’며 아쉬워했다.
리콴유는 빛과 그림자가 같이 따르는 지도자다. 그는 1959년부터 1990년까지 싱가포르를 다스렸다. 그 기간 싱가포르는 마약굴·매음굴이라는 더러운 이름을 벗고 국민소득 6만 달러를 넘는 나라로 성장했다. 기자는 1993년 싱가포르 기적을 취재하러 갔다가 경제 기적의 그늘을 체험했다.
귀국 후 5회 분량 시리즈 기사의 2회째가 나가자 싱가포르 대사관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다음 주 고촉통 총리가 한국을 방문하니 단독 인터뷰를 하자는 내용이었다. 며칠 후 다시 전화가 왔다. 인터뷰 약속이 취소됐다는 것이다. ‘지금이 싱가포르 야당(野黨) 전성기다. 의석 81석 중 4석을 차지했다. 야당 의석이 1석 아니면 1석도 없던 시대가 끝나간다’는 대목이 문제였다.
리콴유는 박정희 대통령을 존경했다. 정치 스타일도 비슷했다.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박정희)’ ‘내 관(棺) 뚜껑이 닫히거든 나를 평가하라(리콴유)’는 말도 닮았다. 리콴유는 영국 국기·일본 국기·말레이시아 국기 아래 살다 어렵게 제 나라 국기를 갖게 됐다.
그는 대한제국 국기·일본 국기·미국 국기를 거쳐 태극기를 되찾은 박 대통령에게 동류의식(同類意識)을 느낀 것 같다. 그는 ‘실천이 아니라 말[言語]로 국민을 배불리 먹일 수 있다’는 정치인을 경멸했다. 10·26 열흘 전 박 대통령 마지막 정상회담 상대가 리콴유였다.
미·중 대결이 깊어가자 미·중 관계 변화가 아시아 중견 국가들 처지를 위태롭게 할 것이라고 한 리콴유 안목(眼目)이 재평가되고 있다. 그는 미·중 대결만을 염려하지 않았다. 미·중 화해에도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코끼리들이 싸울 때만 잔디밭이 망가지는 게 아니다. 그들이 요란스럽게 사랑을 나눠도 잔디가 상한다”고 했다. 그가 살았다면 대만해협에서 서로 으름장을 놓는 가운데 이뤄진 미국 국무장관의 중국 방문을 예사로 넘기지 않았을 것이다.
리콴유는 ‘중국은 패권을 추구하지 않겠다’던 중국 지도자 말을 한때 믿은 미국처럼 순진하지 않았다. ‘중국에 진짜 패권을 추구할 마음이 없다면 왜 듣는 사람이 질릴 정도로 그 말을 되풀이하겠는가’ 그는 미국 대응책으로 ‘중국에 세계 회의실 의자를 제공하되 중국이 선량한 세계 시민 규범을 따르지 않을 때에 대비해 조용히 후방 진지(陣地)를 구축하라’고 조언했다.
인구 600만 명의 도시국가 지도자 리콴유는 세계 최강국 미국 대통령의 아시아 정책 논의 상대였고, 13억 중국 지도자 덩샤오핑에게 근대화로 가는 길을 안내한 가이드였다. 리콴유는 ‘지금은 근대화 문제 이외에는 생각할 겨를이 없다’는 덩의 말은 믿었지만, 그의 후계자들은 믿지 않았다.
중국 지도자들에게 대놓고 말했다. “여러분 할아버지 세대는 대약진운동·기근·문화혁명이란 지옥을 건너왔다. 손자들은 할아버지 말을 듣지 않는 법이다. 힘이 생겼으니 힘을 과시해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중국이 세계에 하나뿐인 중심이던 시대로 돌아갈 수 없다. 중국은 세계 여러 세력 중 하나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라.”
30년 전 싱가포르를 처음 찾았을 때 싱가포르 정부 관계자는 ‘우리 자랑’이라며 창이공항으로 안내했다. 10년 넘게 ‘세계 최고 공항으로 선정된 긴 리스트를 보여줬다. 인천공항은 창이공항을 밀어내고 2005년부터 2016년까지 세계 최고 공항 자리를 지켰다.
이 사이 정치는 뒤로 전진(前進)했다. 국회 절대다수 의석을 가진 야당 대표는 교도소 담장 위에서 후쿠시마 괴담(怪談)을 밑밥으로 뿌리며 궐기를 호소하고 있다. 태평양 국가 가운데 이런 정치 지도자는 중국과 그를 따르는 좁쌀만 한 일부 국가 이외에는 없다.
1863년 12월 조선에서 12세 고종이 왕으로 즉위했다. 그 한 달 전 미국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은 게티즈버그에서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라는 2분 연설을 했다. 한국 야당을 보면 이 격차는 여전히 좁혀지지 않은 것 같다.>조선일보. 강석천 고문
출처 : 조선일보. ‘코끼리가 싸워도 사랑 나눠도 잔디 망가진다’
우리나라 대통령 중에 죽은 뒤에 자기 집을 허물어 버리라고 했던 분은 없었습니다. 퇴임하기 전부터 엄청 호화스런 집을 구축해 놓은 분이 있는가 하면, 자기 고향을 무슨 성지로 만들고자 했던 분들도 있는 것으로 기억합니다.
싱가포르는 말레이시아에서 독립한 뒤에 리콴유의 31년 통치로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국민들의 고통도 따랐을 것입니다. 하지만 국제 정세를 제대로 읽고 판단한 그의 능력은 우리나라 대통령들이 따라가지 못하는 몇 단계 위에 있었다는 생각입니다.
리콴유는 “한국인은 일본이 한국을 통치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저항을 멈추지 않았다. 일본은 한국인의 풍습, 문화, 언어를 말살하려 했지만 민족적 자부심을 갖고 있었던 한국인은 굳은 결의로 야만적인 압제자에게 항거했다. 일본은 수많은 한국인을 죽였지만 그들의 혼은 결코 꺾지 못했다.” 며 그의 자서전에서 우리 대한민국 국민에 대해 경의를 표했고, 박정희, 등소평에 대해 아시아의 최고 지도자라고 평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리콴유 같은 지도자가 필요한 시기도 있고, 그렇지 않은 시기도 있겠지만 그런 지도자를 가졌던 싱가포르는 지금도 그를 자랑스럽게 추앙하고 있다니 부러울 뿐입니다.
時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