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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724. 묵상글 ( 연중 제17주일. - 사람들이 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힘.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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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724. 연중 제17주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사람들이 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힘」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우리를 위한 주님의 사랑은 넓고 깊고 높은 사랑입니다. 때로는 품으시고 때로는 침묵하시며 기다리시고 마침내 우리의 청을 들어주십니다. 이시간 우리가 바라는 것보다 훨씬 더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는 주님과의 만남을 이루시기 바랍니다.
“기도는 사람들이 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힘입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도 양보하는 힘, 견줄 바 없는 특권, 하늘의 창고는 기도로 열리며 믿음은 열쇠를 돌리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늘의 열쇠이며 세상의 기둥이고, 지혜의 창고이며 영혼의 힘입니다. 낙심의 치료제이며 슬퍼하는 사람들의 위로이며 의로운 사람들의 승리입니다. 하늘의 삶을 미리 맛보는 것입니다.” 매 순간 기도하며 주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시길 희망합니다.
오늘 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기도하고 계실 때 제자 중 한 사람이 “저희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십시오”(루카11,1)하고 말하였습니다. 그 제자는 지금까지 기도를 안 하고 살았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회당의 집회와 가정의 부모로부터 기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배우면서 자랐습니다. 유다의 아이들치고 그런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당시의 율법교사들은 기도에 대하여 매우 자상한 규칙과 절차를 만들어서 어린 자녀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보면 기도하는 생활에 젖어 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왜 새삼스레 기도하는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하였을까요?
자기들이 하는 방법과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방법이 분명 달랐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형식적이고 틀에 박힌 기도가 아니라 삶으로, 전인격적으로 아버지 하느님과의 만남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아버지와의 관계를 확인하는 작업이 기도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주님께 기도를 배워야 합니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를 입으로 수없이 외우는 것으로 족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형식적으로 주기도문을 외운다면 기도하고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여라.”(루카11,2)하고 기도하는 방법을 모범으로 보여 주신 것이지 그 기도문을 외우고 있으라고 가르쳐 준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께서는 뼈대가 되시고 거기에다 살을 붙이는 것은 우리가 해야 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인 삶의 행동은 주님께서 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일용할 양식을 주시길 청해야 하고 죄를 용서하시고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 달라’ 고 청하되 거기에 걸 맞는 삶의 태도는 우리의 몫이란 말입니다. 사실 “기도의 목적은 많이 생각하는 데 있지 않고 많이 사랑하는데, 그리고 의지의 실천에 있습니다”(예수의 성녀 데레사). 기도하는 바를 행동으로 옮길 때 기도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도를 잘 하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기도하십시오. 기도는 기도하면서 배웁니다. 피아노를 잘 치려면 피아노를 자꾸 쳐야 합니다. 인내를 가지고!
예수님께서도 한밤중에 기도하시고 때로는 이른 새벽 동이 트기 전, 그리고 음식을 잡수실 겨를도 없이 활동하시면서도 한적한 곳을 찾아 기도하셨는데 하물며 우리가 기도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얼마나 건방진 삶을 사는 것인지요?
우리는 기도를 ‘하느님과의 대화’로 정의합니다. 대화는 일방적이 통보가 아니라 주고받는 것입니다. 서로 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기도한다는 것이 기도문을 외우는데 급급해 하고 자기의 바람을 청하는데 그치고 맙니다. 주님의 뜻을 찾는다고 하면서도 나의 욕심이 앞서고 떼를 쓰며, 침묵하시는 주님께 투덜대기 일쑤입니다. 때로는 거지처럼 달라고만 하고, 때로는 흥정하고 심지어 협박하기도 합니다. 대화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서로의 소통을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만남과 관계의 회복을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느님과의 관계회복이요 만남입니다.
주님께서는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루카11,9-10). 하셨습니다. 그러나 진심으로 청하지도 않고 받길 원하고, 찾지도 않고 얻길 기대하며 두드리지도 않으면서 열리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실패를 맛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혹 청하는 것을 얻지 못했다면 야고보서의 말씀을 묵상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욕심을 부려도 얻지 못합니다. 살인까지 하며 시기를 해 보지만 얻어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또 다투고 싸웁니다. 여러분이 가지지 못하는 것은 여러분이 청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청하여도 얻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욕정을 채우는 데에 쓰려고 청하기 때문입니다”(야고4,1-4). 사실 이럴 때는 구한대로 응답되지 않는 것이 더 고마운 응답입니다.
기도할 때는 믿고 바라고, 믿고 감사하고, 믿고 기뻐하고, 믿고 사랑하십시오. 주님께서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다 내가 이루어 주겠다”(요한14,12).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들어주신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하느님께 청하는 것은 이미 다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1요한5,14)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내가 느끼지 못해도 나와 함께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믿고 인내하면서 갈구해야합니다. 벗을 찾아가 귀찮게 해서라도 빵을 얻어내듯 우리도 참고 기다리며 매달려야 합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하게 되는 상황 안에서 아브라함이 간절한 청을 통해서 하느님의 자비를 얻어냅니다. 이렇게 끈질기게 기도해야 합니다. 하느님은 줄 수 있는 모든 능력을 가지고도 우리에게는 한없이 약하십니다.
어떤 아가씨가 기도를 하였습니다. “하느님, 제발 신랑감을 보내주세요! 제가 혼기가 꽉 찼습니다. 제발!” 그러나 도대체 응답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친구를 찾아가 하느님께 기도를 해도 소용이 없다고 사정을 얘기하였습니다. 그러자 친구가 말하였습니다. “자기 자신을 위한 기도는 응답이 잘 안 되는 거야!” 그래서 그 아가씨는 기도의 방법을 바꾸었습니다. “하느님, 우리 엄마가 딸을 시집을 보내야 된다고 안달을 하십니다. 제발 사윗감을 보내주세요!” 과연 우리는 어떤 유형으로 기도하는지 점검해 봐야겠습니다.
우리는 기도를 ‘영혼의 숨결, 호흡’이라고도 합니다. 사람이 숨을 쉬지 않으면 죽습니다. 마찬가지로 믿는다고 하는 사람이 기도하지 않는다면 그 믿음은 죽게 마련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기도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여러분은 항구하게 인내를 가지고 기도하기를 바랍니다. 혹시 “잘못에 떨어졌다 할지라도 기도하기를 그쳐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그 잘못됨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는 유일한 힘은 꾸준히 계속되는 기도를 통해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예수의 성녀 데레사). 숨은 한꺼번에 쉬고 안 쉴 수는 없는 것입니다. 꾸준히 고르게 쉬어야 합니다. 기도는 일정하게 해야 합니다. 하루의 좋은 시간을 하느님을 위한 시간으로 내 놓으시기 바랍니다. 자투리 시간을 내놓지 말고, 시간 뿐 아니라 공간도 내 놓으십시오. 나를 위한 공간 꾸미기에 급급해 하지 말고 기도할 장소를 마련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구하는 이 앞에서 결코 등을 돌리시지 않습니다. 빈손으로 돌려 보내지 않으시고 더 좋은 것으로 채워주십니다. 그러므로 간절히 청하십시오. 옛 말에도 “울어야 젖 준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누울 자리를 보아가며 다리를 뻗어라” 라는 말도 있습니다. 형편과 결과를 생각하며 일을 처리한다는 뜻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께서 보시기에 청하는 대로 주면 그 사람에게 도움이 되지 않거나 화가 될 수 있는 것은 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조급해 하며 답답해하여도 안 주시는 것이 아니라 못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청하는 것이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것인지를 점검하시기 바랍니다.
사실 우리는 ‘올바른 방식으로 기도할 줄 모릅니다.’(로마8,26) 그래서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우리의 필요를 아시고 영적으로 채워주시기 위해서 성령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우리가 원하는 때에 우리가 원하는 방법으로 채워주시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원하시는 때에 원하시는 방법으로 그리고 더 좋은 것으로 채워주십니다. 반드시 채워주십니다. 믿으십시오. 응답되지 않는 기도는 없습니다. 다만 잠시 늦춰질 뿐입니다.
마더 데레사 수녀님께서는 기도를 ‘심장과 심장의 만남’으로 표현하셨습니다. “하느님은 저에게 이야기 하고 저는 그분께 이야기 합니다. 그것이 기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심장의 고요함 안에서 말씀하시고 우리는 귀 기울여 듣습니다. 그다음에 우리 심장이 충만해진 채 우리가 말하고 그분은 귀 기울여 듣습니다. 그것이 기도입니다.” 자동차에 기름이 없다면 달릴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기도가 없다면 영혼은 죽습니다. 기도는 우리에게 순결한 심장을 줍니다. 그것은 우리의 심장을 정화합니다. 그리고 순결한 심장만이 하느님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말하게 됩니다. “당신이 저에게 바라시는 일이 무엇인지 알려 주십시오. 저는 제 뜻을 접고 당신의 뜻에 저의 뜻을 맞추겠습니다”(성 알폰스).
우리가 많은 경우 우리의 바람을 청하고 있지만 사실은 주님께서 먼저 우리의 원의를 먼저 알고 계십니다. 묵시록을 보면 주님께서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묵시3,2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우리가 그분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마음의 준비를 해야 그분의 마음에 드는 기도를 할 수 있고 또 우리의 청원에 대한 응답의 열매를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의 모든 기도는 주 하느님께서 듣고 계시고 우리의 기도가 미약하다고 생각될 때에도 여전히 듣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이다. 내가 살아있는 한, 너희가 내 귀에 대고 한 말에 따라, 내가 반드시 너희에게 그대로 해 주겠다”(민수14,28). 그러므로 열매 맺는 기도를 할 수 있는 한 주간되시기 바랍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의 기도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전능하신 하느님, 주님은 우리가 아뢰기도 전에 우리의 필요를 아시며, 우리가 미처 구하지 못하는 것까지도 알고 계십니다.
주님의 종들이 내일에 대한 걱정과 염려로부터 자유롭게 하소서.
주님의 귀한 선물로 만족하게 하소서.
먼저 주님의 나라를 구할 때,
주님께서 모든 좋은 것으로 더하시리라는
우리의 믿음을 더욱 굳건히 하여 주소서.
우리 주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총알택시기사와 신부님이 같은 시간에 죽게 되어 하느님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택시기사는 천국으로 가고 신부님은 연옥에서 기다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신부님이 “아니! 하느님의 일을 해도 내가 더 많이 하였는데 너무하네요!”하고 투덜댔습니다. 그러자 그 옆의 천사가 말하였습니다. “저 총알택시 기사는 손님들을 정신을 바짝 차리고 기도하게 만들었고, 당신의 강론을 듣는 신자들은 다 졸고 있었는데 누가 천국에서 더 큰 상을 받아야 하겠느냐?”
“인생이 짧든, 길든 무엇인가에 성공한 것이 있다 하더라도 기도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알베리오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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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724. 연중 제17주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220722. 묵상글 말미 **
당분간 강론을 올릴 수 없겠습니다.
아마 8월 2 일이나 3 일에 다시 뵙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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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724. 연중 제17주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오늘의 에페소 평화기도 다락방 말씀 기도와 지향✝️
2022년 7월 24일 연중 제 17주일
고 도미니코 ofm
오늘은 연중 제17주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기도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기도의 신학이라 일컫는 루카 복음은 어떻게 기도해야 하며 기도의 참된 의미가 무엇인지를 우리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기도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의 중심은 주님의 기도입니다. 이 기도는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름으로써 시작하는데 이 표현은 시편에서 볼 수 있는 하느님과 인간의 친밀감을 그대로 보여주면서도(시편 27,10; 103,13; 참조: 이사 63,16; 64,7) 이것을 초월하며 심화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태도 그 자체가 기도하는 사람의 자세를 전적으로 결정짓고 믿음과 사랑으로써 자신을 온전히 봉헌하게 됩니다.
주님의 기도는 성서의 전통적인 기도의 기본 사상을 이어받아 하느님의 이름과 하느님 나라 그리고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 지는 것 등 하느님의 계획이 성취되는 것이 최대의 관심사입니다. 기도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기도에서 청한 것은 반드시 얻게 된다는 확신이 기도의 근본이며 기도를 바치는 조건이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이러한 확고한 믿음을 갖게 되는 이유는 기도가 자기자신이 아니라 하느님께 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속으로 의심하지 않고 말하는 대로 그대로 이루어 진다고 하느님을 향해 있는 사람에게는 그대로 이루어 집니다. 그래서 믿음과 기도는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믿음이란 기도의 조건일 뿐 아니라 기도에서 얻어지는 결과이기도 합니다.
빈말을 되풀이 않는 기도의 내면성은 마음속에 감추어진 것까지 환하게 들여다 보시는 아버지께서 늘 함께 계시다는 하느님을 향한 믿음의 기반 위에 두고 있습니다. 기도는 확고한 믿음을 지니고 중단없이 바쳐야 합니다. 기도를 통해서 항구한 인내심이 드러나고 영혼이 늘 깨어 있게 됩니다. 이런 기도를 통해서 인간의 헛된 세속적 욕망은 정화됨과 동시에 승화됩니다.
주님의 생애에 기도는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습니다. 우리에게 기도가 절대 필요하다는 것을 이보다 더 현실적으로 일러주는 가르침은 없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당신을 찾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산 위에서 혼자 외딴 곳에서 자주 기도하셨습니다. 이렇게 기도하신 이유는 당신의 사명을 완수하시기 위함이었고, 제자들에게 모범을 보여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루가 복음에서만 수록되어 있는 네 번에 걸친 기도가 이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세례 때(루가 3,21)와 제자를 뽑기 전(루가 6,12), 영광스럽게 변모하신 때(루가 9,29), 그리고 오늘 복음에 나오는 주님의 기도를 가르치시기 전(루가 11,1)에 기도를 바치셨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제자들을 끌어들이는 비결이었으며 제자들은 이 비결에 의해 기도하는 스승과 점점 더 깊은 친교를 나누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기도를 바치는 것은 주님의 첫째가는 계명인 사랑을 일상 안에서 실천하고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이야 말로 기도의 모든 것이며 기도의 조건이며 기도의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기도하면서 더 사랑하고 사랑하면서 더 기도하는 신앙인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주님의 은총을 청하도록 합시다.
✝️ 에페소 평화기도 다락방 7월 영적 수련 성월 4주간 성화/일치✝️
금주간 성서읽기 콜로 1-4장 / 필레 1장 / 1베드 1-2장
✝️ 일요일 성체의 날✝️
<세계 도처에 일어난 성체의 기적(마리아 헤젤러)>
첫영성체 날에 성체를 축복함으로써 이루어진 갑작스런 치유
스위스 -1923년
스위스 서쪽 도시인 프리보르그(Fribourg) 의 작은 산 위에는 보르귈론뷰르글렌(Bourguillon Bürglen) 의 순례성당이 우뚝 솟아 있다. 이 곳에 있는 사랑스러운 성모상은 13세기경에 이곳 나병환자 수용소에 수용되어 있던 조각기술이 뛰어난 한 나병환자가 조각한 것이다. 온갖 큰 불편을 겪으며 고생하는 사람들이 전국 곳곳에서 몰려와 기꺼이 이 산에 올라갔다. 그들은 슬픔에 빠진 사람들을 항상 도와주시는 위로자이신 성모님을 찾아 뵙고 소망을 간구하였다.
평화를 애호하는 가톨릭 도시인 프리보르그는 16세기에 들어와 종교분열의 혼란 때문에 신앙면에서 심한 핍박을 받았다. 이 때 책임을 의식한 시(市)당국은 모든 은총의 중재자이신 성모님께 거국적으로 가톨릭 신앙을 지켜 주시기를 간구하고, 배교(背敎)로부터 우리 신자들을 지켜 주시도록 시민들이 14일 동안 매일 다함께 뷰르글렌의 성모님께로 순례를 가야 한다고 명령했다. 특히 뷰르글렌의 우리 성모님께 열심히 기도드리고 날마다 순례를 하는 사람은, 예수회 소속의 성 베드로 카니시우스(Petrus Kanisius) 신부였다. 그는 수년 동안 프리보르그에서 활동을 했고, 그곳 신학교의 성 미카옐 성당에 묻혀 있다. 신앙의 수호자이신 사랑의 성모 마리아께서는 이 사제와 모든 사람들의 간절한 청원을 들어 주셨다. 프리보르그 시(市)는 오늘날까지도 가톨릭 도시로 남아 있다. 헤아릴 수 없는 이런 저런 소원들을 들어 주시는 성모님께 감사하기 위해 프리보르그 시민들은 1923년 8월 8일에 뷰르글렌의 성모상에 성대하게 왕관을 씌워 드렸다. 그리고 하늘의 여왕께서는 성대한 9일 기도와 병자들의 긴 행렬로써 나타내는 이러한 공식적인 성모님 공경에 대해 어머니로서의 고마움을 표시하려는 것처럼 여러 날 동안 수차례의 갑작스런 치유를 이루어 주셨다.(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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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수도회 한국관구
에페소 기도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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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724. 연중 제17주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준 것처럼,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주십시오.”(루카 11,1)
연중 17 주일입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기도에 대한 말씀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를 구하기 위해 하느님과 벌이는 공방전을 감동적이고 신뢰에 찬 극적 장면을 통해 서술하고 있습니다. 이 탄원과 중재기도를 통해 선한 사람의 성성(聖性, santita)이 얼마나 위대한 지를 말해줍니다. 여기서는 의인 열 사람이 없어서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하게 되지만, 예언자 예레미아는 예루살렘을 구하기 위해서는 죄 없는 한 사람으로 족하리라고 말하며(예레 5,1), 에제키엘도 예루살렘이 구원을 위한 조건으로 죄 없는 사람 한 명을 요구합니다(에제 22,33). 그리고 이사야는 ‘야훼의 종의 넷째 노래’에서 죄를 짊어지고 가는 죄 없는 사람을 노래합니다. 그 한 사람의 역할은 기다리고 있던 유일한 중재자 예수님의 몫이었습니다. 그래서 <제2독서>에서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인하여 얻어지는 은혜를 찬양하고 있습니다.
<복음>에서, 기도의 원형이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주십니다. 흔히 ‘주님의 기도’로 불리는 ‘예수님께서 가르쳐 준 기도’를 전해줍니다. 기도를 가르쳐주시기 전에, 먼저 이 기도의 두 가지 배경을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곳에서 기도하고 계셨다. 그분께서 기도를 마치시자 제자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준 것처럼,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루카 11,1)
<첫째 배경>은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모습이 제자들에게 충격을 주었음을 말해줍니다. 그분의 기도하는 모습 속에서 지금까지 유대인들에게서 보지 못한 새로운 모습을 보았던 것입니다. 사실, <마태오복음>의 병렬복음에 따르면, 그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은 주로 회당이나 한길 모퉁이 서서 위선자들처럼 드러내 기도하기를 좋아했고, 또 빈 말로 많은 말로 되풀이하며 이방인들처럼 기도했던 것입니다(마태 6,5-8).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와는 반대로, 골방에 들어가 숨은 일도 보시는 아버지께 기도하라 하시고, 또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를 아시는 아버지시기에 빈 말이나 길게 기도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러니 그들의 관습적이고 의례적인 기도와는 그 모습이 달라도 너무도 달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 중의 하나가 ‘예수님께서 기도를 마치시자’ 묻게 됩니다.
<또 하나의 배경>은 당시 로마의 억압과 과도한 새금 징수와 종교인들의 부패 속에서 종교적이고 민족적인 메시아 대망사상을 담은 부흥운동 그룹들이 나타나 그들의 열망을 담은 기도문들을 가르쳤고, 세례자 요한도 그러했습니다. 그래서 제자가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준 것처럼 기도를 가르쳐주십시오.”라고 청합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이러한 배경에서 ‘주님의 기도’는 탄생되었습니다. 곧 새 공동체의 원리와 삶과 질서를 담은 새 기도문이 요청되었던 것입니다. 이는 새로운 나라, 새로운 공동체로를 향한 강령을 말합니다. 그래서 이 기도는 <마태오복음>에서는 새로운 하느님 나라의 윤리와 삶을 이야기 하고 있는 “산상설교”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 기도는 “저희에게 가르쳐주십시오.”라는 청에 대해, 예수님께서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여라.”라 하고 모범으로 제시된 기도이며, 동시에 개인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들의 공동체에 주어진 기도입니다.
그런데, 이 기도는 시작부터가 충격입니다. 하느님을 단지 ‘아버지’라 부르는 것이 아니라, “압바”(αββα)라는 친밀함으로 부르시며, 당신의 영광을 우리에게 건네주십니다. 곧 인간인 저희를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고귀한 신원과 지위로 들어 올리십니다. 저희가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하시어, 당신과 함께 아들인 성자의 반열에 들게 하십니다. 이로써,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영광을 우리에게 건네주십니다. 그리하여 우리를 하느님 되게 하시고, 우리를 당신과 하나 되게 하십니다. 우리는 이 특권을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님을 통하여 받았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시는 이 기도의 열쇠 말을 “아빠” 입니다. 결국, 이 기도는 “아빠”, 아버지이신 그분의 현존 앞에서 벌어지는 기도입니다. 곧 그분을 대면하는 면전에서 벌어지는 기도입니다.
그런데 또 하나의 충격은 그냥 “압바”인 것이 아니라, “우리 압바”인 것입니다. 곧 복수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한 형제’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 ‘우리’에는 시제가 없으니, 이는 과거의 선조들과 예언자들을 포함하여 미래의 하느님의 자녀들까지를 포함하여 “우리”라는 형제 가족을 만듭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로서의 삶의 원리가 기도로 주어집니다. 곧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르는 이들에게 걸 맞는 자녀로서의 삶이 소명으로 주어집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다름 아닌 ‘자녀의 길’을 걸어갑니다. 오로지 아빠 아버지께 속해 있는 아들, 딸로서, 언제 어디서나 아버지의 뜻을 따라 길을 걸어야 할 일입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는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넉넉히 주시는 분이심을 가르쳐주십니다. 그것을 두 가지 비유, 곧 ‘한밤중에 찾아온 벗에 대한 비유’와 ‘세상의 아버지에 대한 비유’를 통해서 가르쳐주십니다.
<첫 번째> 비유를 통해서는 잠을 자던 사람도 벗의 끈질긴 간청에는 마지못해 들어주거늘, 하물며 주무시지도 않으며 오히려 잠든 우리를 깨워 간청하게 하시는 아버지께서야 더 좋은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겠는가를 들려주십니다.
<두 번째> 비유를 통해서는 세상의 아버지들도 제 자식들에게는 세상의 좋은 것을 주거늘, 하물며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께서야 어련히 하늘의 좋은 것들을 주시지 않겠는가를 들려주십니다. 그러니, 그토록 넉넉히 들어주시는 아버지께 청하라 하십니다.
“청하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루카 11,10)
그러면,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청한 것보다도 좋은 것, “성령”(루카 11,13)을 주실 것입니다. 당신의 영을 주실 것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루카 11,2)
주님!
당신께서는 저희를 성자의 반열로 들어 올리시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고귀한 지위에 들어 올리셨습니다.
이제는 제 자신이 아니라,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소서.
제가 바라는 나라가 아니라, 아버지께서 바라시는 나라를 이루소서.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소서.
생명의 빵이신 아드님을 양식으로 삼아 당신 안에서 영원히 살고, 당신과 한 몸이 되게 하소서. 다름 아닌 용서를 통하여 그러하게 하소서.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처럼, 자비로운 사람 되게 하시어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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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724. 연중 제17주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창세기에 ‘노아’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느님께서는 타락한 세상을 물로 심판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마음에 들었던 노아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사람들은 방주를 만들고 있던 노아를 비웃었습니다. 때가 되어 비가 40일 동안 내리고 물의 심판은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노아와 가족들은 방주에서 비를 피할 수 있었고,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였습니다. 만일 사람들이 구원의 방주를 만들었다면 물의 심판을 피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우리는 소돔과 고모라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타락한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께 몇 번을 청하였습니다. 의로운 사람이 50명만 있다면, 45명만 있다면, 30명만 있다면, 20명만 있다면, 10명만 있다면 심판을 하지 않도록 청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10명만 있어도 심판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의로운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심판을 받았습니다. 노아가 구원의 방주를 만들어서 새로운 세상을 만났듯이, 소돔과 고모라에 단 한명의 의로운 사람만 있었어도 하느님께서는 심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임진왜란 때입니다. 일본의 침략으로 나라는 백척간두의 위기를 겪었습니다. 일본의 침략을 예견하고 10만 명의 군사를 길러야 한다고 했지만 외면했습니다. 일본이 곧 침략할 것 같다는 의견은 묵살되었습니다. 절체절명이 위기 상황에서 이순신 장군은 ‘신에게는 아직 배가 12척 있습니다.’라는 글을 왕에게 올렸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죽고자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라는 각오로 우리의 바다를 지켰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노아의 방주를 만들었고 나라를 위기에서 구할 수 있었습니다. 이순신 장군과 그를 따르는 군사들은 의로운 사람이 되어서 나라를 지킬 수 있었습니다. 외부의 침략이 있을지라도 의로운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1997년 ‘IMF’의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국가는 깊은 수렁 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많은 기업들이 문들 닫아야 했고, 실직자들이 넘쳐났습니다. 그때 우리는 ‘금모으기’를 하였습니다. 우리는 다시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2007년 태안에 기름유출 사고가 났을 때입니다. 많은 사람이 자원봉사로 기름을 닦아 냈습니다. 20년이 넘어도 오염은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했지만 2년 만에 청정한 바다로 만들었습니다. 위기는 파도처럼 늘 찾아오기 마련입니다. 그것을 극복하려는 노력이 있다면 위기는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문득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본당이나, 시설에서 사목을 하는 신부님들이 사목적인 비전을 제시하면 좋겠습니다. 사목의 결실을 나눌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한 것들이 통합되는 시스템이 구축되면 좋겠습니다. 세상에서 이야기하듯이, 무한 경쟁을 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이윤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자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열정, 신념, 헌신으로 당면한 교회의 문제들을 풀어나갈 수 있는 지혜를 모았으면 좋겠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야기한대로, 열정적인 사목자가 50명만 있어도, 45명만 있어도, 20명만 있어도, 10명만 있어도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교회에 더 많은 축복을 내려 주실 것 같습니다. 참된 신앙인이 50명만 있어도, 45명만 있어도, 20명만 있어도, 10명만 있어도 세상은 좀 더 환하고, 밝아지리라 생각합니다. 냉담하는 신자들은 다시금 주님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는 활력이 넘쳐나고, 젊은이들은 다시금 교회의 그늘에서 위로와 용기를 얻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구하여라. 받을 것이다. 찾아라,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구하면 받고 찾으면 얻고 문을 두드리면 열릴 것이다. 생선을 달라는 자식에게 뱀을 줄 아비가 어디 있겠으며 달걀을 달라는데 전갈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너희가 악하면서도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구하는 사람에게 더 좋은 것, 곧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여름이 지나면 입시철이 다가옵니다. 그러면 전국의 사찰과, 교회, 성당에는 많은 분들이 치성과 정성과 기도를 드립니다. 자신들의 간절한 소망을 자신들이 믿는 절대자에게 매달리고 청하는 것은 참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가 다르다고 입시철이 끝나면 그 많은 사람들이 볼일 다본 것처럼 자기 자리로 돌아가고, 사찰과 교회 그리고 성당은 피서 끝난 바닷가처럼 썰렁함을 봅니다. 매달림과 청원의 기도가 있다면, 감사와 찬미의 기도도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경우를 봅니다.
무엇이 참다운 기도의 태도인가! 저는 아브라함 링컨의 다음 말이 참다운 기도의 태도를 잘 말해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지금 하느님이 우리 편이 되어 주시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과연 하느님의 편에 서 있는가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월드컵 경기에서 두 팀 모두 성호경을 그으며 게임에 임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참다운 기도는 하느님을 내 편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아리라, 내가 하느님 편으로 방향을 전환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때로 외롭고 힘든 골고타 언덕길이라도 주님 가신 그 길을 기쁨으로 따라나서는 것이 참다운 기도의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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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724. 연중 제17주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기도와 삶
-사랑, 항구한 기도, 주님의 기도-
참 빠르게 강물처럼 흐르는 세월입니다. 벌써 7월도 막바지입니다. 오늘은 연중 제17주일이자 제2차 세계 조부모와 노인의 날입니다. 특별히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관심과 배려가 주효했던 기념일입니다. 교황님은 “늙어서도 열매를 맺으리라”(시편92,15)는 주제로 아름답고 깊은 담화문을 발표하셨고 그 일부를 인용합니다.
“조부모와 노인은 이 세상에서 ‘온유의 혁명’을 이루는 장인匠人이 되라는 부름을 받았다. 노년은 항해를 포기하고 돛을 접어야 하는 때가 아니라, 여전히 열매를 맺는 시기이다. 그러니 우리가 지닌 가장 소중한 도구이며 가장 어울리는 일인 기도를 더욱더 언제나 잘 활용할 수 있도록 배워 이 혁명을 이뤄가자. 그리하여 기도의 시인이 되고, 고유의 말을 찾아 나가는데 맛들이고, 하느님 말씀의 가르침을 다시 한 번 잘 받아들이자.”
누구나에게 어김없이 찾아오는 노년에 죽음입니다. 어떻게 아름답고 품위있는 노년과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 참으로 중요한 문제입니다. 기도가 답입니다. 기도뿐이 답이, 길이 없습니다. 온유의 혁명을 이루는 것, 기도의 시인이 되는 것은 바로 기도의 은총입니다.
기도와 삶은 함께 갑니다. 기도하는 대로 살고 사는 대로 기도합니다. 기도없는 삶은 공허空虛하고 삶이 없는 기도는 맹목盲目입니다. 아름답고 품위있는 삶의 꼴을 형성해 주는 것이 바로 간절하고 항구한 기도입니다. 끊임없는 회개를 이뤄주는 끊임없는 기도입니다. 제가 아름답고 품위있는 노년을 위해 강조하는 것이 셋이 있는데 바로 1.하느님 믿음, 2.건강, 3.돈입니다. 반드시 우선순위가 지켜져야 합니다. 바로 첫째인 하느님 믿음이요 이를 위한 기도입니다.
그러니 우리 삶은 기도의 여정이자 회개의 여정입니다. 진정 회개를 통해 자기를 아는 겸손과 지혜입니다. 기도와 회개를 통해 날로 주님을 닮아 우리의 궁극 목표인 성인聖人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 남는 얼굴은 둘중 하나입니다. 기도한 얼굴인가 기도하지 않은 얼굴인가, 우리가 하느님 앞에 갔을 때 주님은 당신을 닮았나 우리 얼굴을 검사하실 것입니다. 과연 날로 주님을 닮아가는 모습인지요.
그러니 말 그대로 제대가 없는 평생 현역의 주님의 전사로, 기도의 전사로 사는 것입니다. 졸업이 없는 사랑의 인생 학교에서 평생 주님의 학인으로, 기도의 학인으로 사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봉헌회 형제자매님들의 신원이요 정체성입니다.
기도하고 일하라, 바로 베네딕도 수도회의 모토이자 봉헌회 회보, 첫표지의 글자입니다. 마침 2022년 7월, 220번째 회보를 읽어봤습니다. 알찬 내용, 꽃같이 환한 얼굴들로 가득한 사진들이 참 아름답고 풍요로웠습니다. 1면 ‘여름휴가’라는 서경윤 알베르트 신부님의 컬럼 마지막 말마디에 전적으로 공감했습니다. “매일 열심히 성무일도를 바치는 봉헌회원 여러분, 존경합니다.” 저는 이에다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두 말마디를 덧붙이고 싶습니다.
어떻게 기도해야 할까요? 오늘 말씀을 바탕으로 참 좋은 기도와 삶을 위한 방법을 소개합니다. 참으로 기도만이 인간의 고질병인 무지無知와 허무虛無에 대한 궁극의 답이기도 합니다.
첫째, 사랑입니다.
기도는 테크닉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기도를 잘하는 비결은 사랑뿐입니다. 사랑하면 할수록 기도하게 됩니다. 기도와 더불어 순수와 열정도 샘솟습니다. 참으로 기도를 잘해 주님을 닮아 성인이 되고 싶은 깨끗한 욕심, 청정욕淸淨慾은 얼마든지 좋습니다. 그러니 주님을, 우리의 영원한 주님이자 스승이시며 도반이신 그리스도를,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사랑의 대가, 기도의 대가가 바오로 사도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묻혔고, 하느님의 능력에 대한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과 함께 살아났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분과 함께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잘못을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대로 세례의 은총이요,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바로 이런 하느님을, 그리스도 예수님을 열렬히 항구히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래야 우리도 죽으시고 부활하신 파스카의 주님을 닮아 파스카의 신비, 파스카의 기쁨, 파스카의 삶을 살 수 있고, 저절로 사랑 안에서 기도와 삶은 하나가 됩니다. 정말 주님을 사랑하는 이들은 항구히, 간절히 기도합니다. 바로 이런 사랑만이 성덕의 잣대입니다.
둘째, 기도입니다.
기도는 항구하고 간절해야 합니다. 원하는 것을 청하는 것이 아니라 꼭 필요한 것 하나인 성령을 청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이런 항구하고 간절한 기도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오늘 복음의 주님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벗이라는 이유 때문에 일어나서 빵을 주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가 줄곧 졸라 대면 마침내 일어나서 그에게 필요한 만큼 다 줄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참으로 권위있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바로 기도와 믿음, 삶에 대한 자세를 가르쳐 줍니다. 결코 좌절하거나 절망함이 없이 끊임없이 청하고 찾고 두드리라는 것입니다. 이래야 백절불굴, 칠전팔기 영적탄력 좋은 파스카의 삶입니다.
바로 이런 전설적인 인물이 바로 창세기의 아브라함입니다. 흡사 하느님과의 줄다리기 싸움처럼 참 집요한 아브라함입니다. 이처럼 주님과 신뢰와 사랑의 관계가 참 깊고도 깊은 아브라함입니다. 이래서 아브라함을 일컬어 하느님의 벗이라 하는 것입니다.
무려 여섯 번의 반복된 물음에서 불쌍한 중생들을 살리려는 아브라함의 간절하고 절박한 기도가 말그대로 감동입니다. 의인 50명에서, 45명, 40명, 30명, 20명, 10명까지 내려옵니다. 마지막 주님의 대답입니다.
“그 열명을 보아서라도 내가 파멸시키지 않겠다.”
열명의 의인이 없어 멸망한 소돔과 고모라입니다. 항구하고 간절히 기도하는 아브라함이 바로 의인입니다. 이번 피정에 참여한 50명 봉헌회원님들이 바로 의인들입니다. 가라지밭같은 현실에서도 세상이 존속하는 것은 세상 곳곳에 의인들이, 성인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아쉬워서가 아니라 우리가 아쉬워서 하는 기도입니다. 참으로 항구하고 간절한 기도를 통해서 무지의 눈이 열릴 때 비로소 무엇이 필요하고 본질적인지 깨달아 압니다. 바로 성령의 선물입니다. 성령 선물 하나 받으면 필요한 선물들이 줄줄이 따라오기 마련입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우리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는지요.
셋째, 주님의 기도입니다.
기도중의 기도가 주님의 기도입니다. 전 성경의 요약이자 예수님 삶의 요약이 주님의 기도입니다. 기도를 가르쳐 달라는 제자들의 요청에 예수님은 당신의 노하우 기도방법을 전수하십니다. 예수님의 단순소박한 본질적 깊이의 삶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마태복음보다 두 청원이 빠졌지만 충분합니다. 아버지라는 정다운 호칭으로 시작되는 주님의 기도입니다.
1.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드러내시며, 2.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3.날마다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4.저희에게 잘못한 모든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의 죄를 용서하시고, 5.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주님의 기도는 일방적인,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는 무책임한 기도가 아닙니다. 우리 삶은 은총의 선물이자 분투의 노력을 다해야 하는 평생 숙제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주님의 참 좋은 선물입니다. 참으로 우리의 삶을 단순소박하고 투명하게 해줍니다. 참으로 오늘 지금 여기서 본질적 깊이의 관상적 삶을 살게 해주는 주님의 기도입니다.
이런 주님의 은총의 선물에 응답하여, 하느님 아버지 중심의 삶을 위해, 날마다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 또 이웃을 용서하기 위해, 유혹에 빠지지 않기 위해, 우리는 진인사대천명의 노력을 다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삶은 선택이자 훈련입니다. 행복도 선택이자 훈련이고, 특히 기도도 선택이자 영적훈련입니다. 그러니 하느님 은총의 선물에 대한 응답으로 날마다 평생 끊임없이 기도를, 주님의 기도를 선택하여 훈련하듯 끊임없이 바치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대로 살고 사는 대로 기도합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간절히 항구히 바치는 사랑의 기도가 우리를 주님을 향한 부단한 자아초월의 삶으로 이끌어 주어 나날이 주님을 닮게 합니다. 기도의 시인으로, 온유의 혁명을 이루며 살게 합니다. 바로 주님의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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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724. 연중 제17주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어떻게 지내세요?”라는 질문을 받으면, 농담조로 “잘 먹고 잘 자고 잘 싸고 합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기본이라 할 수 있는 먹고 자고 화장실 가는 것이 최고로 잘 사는 것 같습니다.
몇 달 전에 장염으로 고생했던 적이 있습니다. 우선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더불어 시도 때도 없이 화장실에 가야만 했습니다. 그러니 밤에 잠도 제대로 잘 수 없었습니다. 가장 기본이라 할 수 있는 세 가지를 못하니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일주일 동안 5kg 이상이 빠졌습니다.
기본이 제일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기본보다 특별한 것만을 청하고 있습니다. 기본은 당연히 주시는 것이고, 사랑한다면 특별한 것을 주셔야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감사의 순간인데도 이 기본에 감사함을 갖지 못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에도 우리는 특별함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먼저 기본에 충실해야 합니다. 사랑의 길을 따르는 그 기본에 충실할 때, 주님 뜻과 함께 하늘 나라를 향해 힘차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가장 기본이 되는 주님의 기도를 통해 기도의 형식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가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 같아도 항구하게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한밤중에 잠자는 친구 집에 빵을 달라고 요청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서 하십니다. 이것이 기본이라는 것이지요.
이스라엘 지역에서는 흔히 밤에 여행합니다. 도보로 여행하는데, 더운 낮에는 뜨거운 태양에 도저히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행하는 친구가 찾아든 시각은 늦은 밤이었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보통 해 뜨기 전에 그날 먹을 빵을 굽기에 한밤중에는 빵이 떨어지기 일쑤였지요. 그래서 친구 집을 찾아갔습니다.
아마 문을 두드렸을 것입니다. 당시에는 손바닥으로 문을 두드리거나, 돌멩이를 집어서 문을 두드리면서 큰소리로 집주인을 불렀다고 합니다. 온 가족이 깨기에 충분합니다. 화가 나지 않겠습니까? 여기서 우정과 귀찮음의 갈등이 보입니다. 웬만한 우정이 아니면 귀찮음을 극복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집요하게 졸라대는 귀찮음에 화를 내지 않고 우정을 발동하여 필요한 것을 줍니다.
이처럼 끝까지 청하고, 끝까지 찾고, 끝까지 문을 두드리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해야 할 기본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가 청하기 전에 미리 주시는 사랑이지만, 우리의 간절함이 더 빨리 하느님의 사랑을 이끌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얻기 위한 우리의 노력은 어떠한 것일까요? 가장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이행하고 있었을까요? 간절한 기도를 통한 기본에 충실한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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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이겨낸 유혹의 기억보다 더 만족스러운 기억은 없다(제임스 브랜치 캐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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