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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례, 그 능동적 참여] 신화적 접근과 실화적 접속
어느 시인의 시에 “한 사람이 다가오는 것은 그 사람의 온 역사가 지금 내게 오는 것이다!”라는 말이 기억난다. 우리가 우리의 어머니시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이신 마리아의 사건과 그 사건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우리는 너무나 쉽게 신화적 접근을 통해 이기적인 기복주의가 만연하지 않았는지 반성해야 한다. 또한 한국교회는 이러한 성모 마리아에 대한 신화적 접근을 바로 잡아야 한다.
지난 5월호에서 성모성월은 북반부의 싱그러운 오월의 계절 축제로서 마리아의 공경예식이 아니라 성령강림 사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신 교회의 어머니에 대한 실화적 존재감, 그리고 십자가상에서 당신 모친에 대한 유언을 기억하는 실화적이며 역사적인 의미를 전례주년에 그 사건에 맞추어 배치한 교회의 오랜 전통임을 밝혔다. 이로써 우리는 신화적 접근에서 실화적 접촉으로의 전환을 통해 올바른 마리아에 대한 구원사적이며 교회론적인 이해의 지평을 넓혀 보았다.
성모 마리아에 대한 정체성 즉 성모 마리아가 누구인가에 대한 복음의 결정적이며 역사적인 증언은 바로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과 서로를 칭송하는 노래를 통해서이다. 그 노래들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성부의 구원방식을 인류는 알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만남이었다. 사랑의 방법은 만남이며 더 적극적 의미에서 다가감이요 하나됨이었다. 하느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우리와 같은 인간이 되셨다. 그것은 이성을 뛰어넘는 사건이다. 아무도 반려견이 사랑스럽다고 하여 강아지가 되고 싶어 하지 않는다.
더 큰 존재가 아주 작은 존재를 사랑하여 그 작은 존재가 됨으로써 하나 되고 그러한 방식으로 작은 존재는 더 큰 존재가 누리는 능력과 사랑을 공유하게 되는 방식이 하느님 구원방식이다. 그러나 더 나아가 하느님은 이러한 방식을 대화와 동의를 통한 협력을 통해 이루시고자 하였다. 일방적인 추진력을 발휘하지 않으셨다. 그러기에 인간의 측면에서는 이성적인 부분이 아닌 믿음의 부분이 된다.
성모님은 우리와 다른 수퍼 히어로가 아니야
인간은 자신이 작은 존재이지만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고, 원죄에 물들었지만 하느님의 사랑으로 당신을 알아 뵙고 기도할 수 있는 신앙이라는 힘을 주셨다. 그 신앙의 힘이 어떻게 하느님을 깨닫고 하느님은 어떻게 인간을 구원하셨는가를 기록한 책이 바로 성경인 것이다.
마리아는 구세주가 올 것임을 구약의 예언서를 통해 익히 알고 있었고 기도하고 있었다. 마리아가 성모가 된 것은 바로 소설 “큰 바위 얼굴”의 주인공처럼 자기가 살고 있는 고을을 가난과 정체에서부터 구원할 저 뒷산의 큰 바위 얼굴과 같은 위대한 영웅을 기다리다가 결국 그 큰 바위 얼굴이 자신임을 결국 깨닫게 되는 과정과 같다.
성모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하였을 때 엘리사벳은 이미 마리아의 잉태 소식을 알고 있었다. 인간의 관점에서 남자를 알지 못한 상태에서의 잉태라는 사건을 받아들이며 마리아를 안아준다. 배척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객관적인 정황을 보면 엘리사벳은 누구나 바라는 명문 대사제 집안의 부인으로 아이를 잉태함으로써 두 여인은 극명한 대조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믿음의 두 여인은 이해와 상식을 초월한 삶의 방식을 따른다. 그것은 사랑과 믿음이며 바로 사랑과 믿음의 힘은 만남과 칭송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성공한 이들의 땀과 신념을 모를 때가 많다. 유독 금메달만을 추앙(?)하는 한국의 문화를 보면 더 그렇다.
엘리사벳이 홀로 찾아온 마리아를 받아주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많은 이들은 마리아와 엘리사벳이 우리와 다른, 이미 선택되어 구원사건에 걸맞게 창조된 수퍼 히어로로 생각한다. 남이 무엇을 잘하는 것을 너무나 자연스럽게만 받아드린다면 우리는 그를 결국 신화적으로만 받아들이는 것이다.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다는 마리아의 노래는 우리 각자에게 해당
마리아의 기도에서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라고 첫 문장을 장식하는 말씀 ‘내 영혼’! 즉 사도신경의 첫 마디는 바로 “나”이다. 내가 믿는 것이다. 그러기에 마리아는 내 영혼이라고 말한다. 엘리사벳 역시 마리아에게 “내 주님의 어머니”라고 하며 ‘내 주님’이라는 단어를 썼다.
자신을 제대로 인지하며 자신에 충실하면서도 당당히 하느님의 것을 인정하고 동의하는 마음이 바로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대화 안에 담겨있다.
이 세상살이에 주눅 들고 우울해하지 않을 인간은 없다고 생각한다. 자신을 잃어버려 가는 세상이다. 스마트 폰과 인터넷의 볼거리에 빠져 우리는 하루에 정말 나와 상관없이 제공된 어지러움과 혼란스러움에 중독되어 간다.
무분별한 세상이 주는 접촉으로 우리는 자아의식이 빼앗기며 내 영혼이 무엇을 통해 진정한 기쁨을 누리는지 알지 못한다. 이 세상이 하느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졌고 하느님의 사랑과 활동으로 구원되어 가며 세상의 모든 악이 그분 십자가의 빛으로 사라짐을 관심조차 갖지 않는다.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다는 마리아의 노래는 우리 각자에게 해당한다.
사람은 태어나지만 되는 존재라고 한다. 성령은 새롭게 하며 성장시킨다. 마리아는 성령의 짝이라고 한다. 세례와 견진을 통해 우리 역시 성령을 받았다. 마리아를 좋아하나 닮지 않으려 하고 마리아께 기도하지만 마리아가 어떤 분인지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마리아를 한 명의 희랍의 여신으로 숭배할 따름이다.
믿는 만큼 알고 아는 만큼 믿게 되며 그렇게 사랑하게 된다. 우리가 마리아에 대해 성경에서 또한 묵주기도의 각 신비를 바칠 때 성경을 천천히 그분의 입장에서 관상하는 태도가 절실히 필요하다. 즉 신화적 접근에서 실화적 접속이 필요하다.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기획] 성찬례 재료인 ‘빵과 포도주’
순수 밀로만 빚은 누룩 없는 빵, 포도로만 만들어진 순 포도주
예수 그리스도는 제자들과 나눴던 최후 만찬에서 “이는 내 몸이다. 이는 내 계약의 피다”(마르 14,22-26)라고 하시며 빵과 포도주를 나누셨다. 이처럼 식탁 위에서 세우신 성체성사는 사도 시대부터 오늘날까지 행해져 왔고 교회생활의 중심이 되고 있다. 성체성사의 제정과 그 은총을 기념하는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을 맞아 성찬례 재료인 빵과 포도주에 대해 살펴본다.
빵
예수 시대에 지중해 문화권에서는 빵이 주식이었다. 지중해 연안 민족들과 중동 민족들은 식사 중 큰 빵을 손으로 쪼개서 여러 개 덩어리로 나누는 생활 풍습을 지니고 있었다. 갓 구운 큰 빵을 식구들에게 나눠주는 것은 동방 민족들의 풍습이었다고 한다. 이스라엘 민족은 식사 때 감사와 찬미 기도를 드린 후 가족들에게 떼어 주고 먹도록 했다. 예수도 이런 관습을 따라 최후 만찬 때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고, 그것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셨다.(마르 14,22)
‘누룩 없는 빵’은 최후 만찬이 파스카 만찬이었다는 해석에 배경을 두고 있다. 성경에는 단순히 ‘빵’이라고 언급되지만, 당시 히브리인들은 파스카 만찬에 누룩 없는 빵을 먹었다.
초기교회에서는 신자들이 집에서 만든 빵을 가져와 예물로 바쳤다. 누룩 없는 빵이 서방교회에서 쓰인 것은 9세기 무렵이고 거의 의무로 굳어진 것은 11세기다. 1570년 비오 5세 교황의 「로마 미사경본」은 “라틴교회 관습에 따라 누룩 없는 빵을 써야 한다”고 규정했다. 동방교회는 효모를 넣고 발효시킨 빵을 쓴다.
「교회법」 제926조는 “사제는 성찬 거행 때에 어디서 봉헌하든지 라틴교회의 옛 전통에 따라 누룩 없는 빵을 사용해야 한다”고 밝힌다. 또 제924조 2항에서는 “빵은 순수한 밀가루로 빚고 새로 구워 부패의 위험이 전혀 없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성체로 축성되는 빵을 ‘제병’(祭餠, Host)이라 하는데 이 말은 ‘희생’, 즉 우리의 희생 제사이신 그리스도를 뜻하는 라틴어 ‘Hostia’에서 유래한다. 현재와 같은 제병은 12세기에 나타났다. 한국교회는 누룩이나 다른 첨가물을 섞지 않은 순수한 밀로 만든 제병을 사용한다. 대부분 가르멜여자수도원에서 우리밀로 구워 공급한다.
포도주
미사 때에 쓰이는 포도주는 일반적인 포도주와는 다른 방법으로 숙성시키고 오직 미사에만 사용하기에 ‘미사주’라고 부른다. 예수가 행하신 당시 관습대로 적포도주가 처음부터 자연스럽게 미사주로 쓰였으나 16세기부터 성작 수건 사용이 일반화되면서 백포도주가 널리 이용됐다. 상대적으로 성작 수건에 물든 표시가 잘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포도’는 그리스도인들이 믿고 따르는 참된 포도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상징(요한 15,1-6)한다. 성찬전례에서의 포도주 역시 의미가 크다. 성체성사를 통해 새로운 계약을 맺기 위해 흘리시는 그리스도의 피에 대한 성사적 표시이면서, 그리스도의 사랑에 참여하고 그분 안에 머무르게 하는 요소로 작용한다.
미사 중 포도주에 물을 섞는 것은 인간과 예수 그리스도와의 일치 의미를 지닌다. 본래 그리스인이나 로마인이 포도주 농도를 낮게 하거나 맛이 더 나도록 한 것이 유래이지만, 이것이 전례에 도입되면서 깊은 상징적 뜻을 갖게 됐다. 카르타고의 성 치프리아노(?~258)는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피를, 물은 그리스도교 백성을 가리킨다”고 말했다.
「로마 미사 경본 총지침」에 따르면, “성찬례 거행에 쓰일 포도주는 포도나무 열매로 빚은(루카 22,18 참조) 것으로, 다른 물질이 섞이지 않은 순수한 천연 포도주여야 한다.”(322항) 아울러 포도주는 완전한 상태로 보존하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포도주가 시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로마 미사 경본 총지침」 323항 참조) 다른 열매나 곡물로 만든 술이 미사주가 될 수 없는 근거라 할 수 있다.
교황청 경신성사성은 2017년 7월 8일 「성찬례에 쓰는 빵과 포도주에 관하여 주교들에게 보내는 회람」을 발표하고 “성찬례에 쓰는 빵과 포도주는 품질을 감독하고 이런 재료들을 마련하는 사람들에게 주의를 기울일 것”을 요청한 바 있다.
한국교회 경우 미사주는 주교회의 전례위원회 감독 아래 롯데주류가 경북 경산공장에서 단독 생산한다. 순 국산포도만 사용해 만들며 ‘마주앙’ 상표에 한국천주교회가 인정한 ‘미사주’가 표시돼 있다.
[전례 영성 - 파스카 신비] 병자성사, 병고를 통해 참여하는 파스카 신비
병자의 특별한 임무
‘죽을 고생’이라는 말도 있지만 아파서 죽을 지경이면 인간은 정말 괴롭다. 하지만 그리스도 신앙을 고백하는 병자라면 똑같은 어려움을 겪어도 “신앙의 빛으로 도움을 받아 고통의 신비를 깨닫고 그 고통을 더 굳건히 견뎌 낼 수 있다”(「병자성사 예식 지침」, 1항).
사실 그에게는 병마와 싸움으로써 교회 안에서 수행할 특별한 임무가 주어져 있다. “곧 다른 사람들이 본질적이고 천상적인 것을 잊지 않게 하며, 우리의 죽을 인생은 오직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신비를 통하여 구원된다는 것을 보여 주는 임무이다”(「병자성사 예식 지침」, 3항).
육신과 영혼의 의사이신 주님
죽을 인생이라고 육체를 돌보지 않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다. 오히려 “힘을 다하여 온갖 질병에 맞서 싸우고 건강이라는 선을 열심히 추구하는 것”(「병자성사 예식 지침」, 3항)이 하느님의 섭리 계획이다.
“육신과 영혼의 의사”(전례 헌장, 5항)이신 주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마음이 부서진 이들을 고쳐 주셨다. 특히 병자들에게 특별한 관심과 사랑을 쏟으셨으며, 고통을 겪는 모든 이를 자신과 동일시하셨다. “너희는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다”(마태 25,36). 이렇게 “주님께서는 병자들의 영혼과 육신을 다 돌보시며 당신을 믿는 이들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명령하셨다”(「병자성사 예식 지침」, 5항).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 주었다
주님의 명령을 따른 제자들은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 주었다”(마르 6,13). 기름은 성경에서 축복과 하느님 사랑의 상징으로, 상처를 치유하는 약으로도 널리 쓰였다. 여기서 기름이 성령의 치유와 정화라는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병자의 육신과 영혼을 치유하고자 기름을 바르는 행위가 바로 칠성사가운데 하나인 ‘병자성사’이다. 이 성사는 주님의 형제인 야고보 사도의 서간에 잘 드러나 있다.
“여러분 가운데에 앓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교회의 원로들을 부르십시오. 원로들은 그를 위하여 기도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그에게 기름을 바르십시오. 그러면 믿음의 기도가 그 아픈 사람을 구원하고, 주님께서는 그를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또 그가 죄를 지었으면 용서를 받을 것입니다”(야고 5,14-15).
마지막 도유, 종부 성사
병자의 거룩한 도유(Sacramentum Unctionem Infirmorum)는 신약 시대 때부터 지금까지 동서방을 막론하고 교회의 거룩한 전례 전통으로 보존되어 왔다. 이 성사의 효과가 중세기에 오면서 신자들은 점차 질병의 치유보다는 영혼의 치유, 곧 죄의 용서에 있다고 보기 시작했다. 나아가 병자성사를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받는 고해성사로 여겼다.
병자성사를 지난날에 ‘마지막 도유’(Extrema Unctio)라는 뜻으로 ‘종부성사’(終傅聖事)라고 부른 것도 이 때문이었다. 세례, 견진 때 도유를 처음 받았고, 이제 병자성사에서 마지막으로 도유를 받는다는 의미였지만, 여기서 ‘마지막’이란 말이 인생의 마지막이란 뜻으로 오해되어, 신자들은 병자성사를 마치 ‘죽음의 선고’처럼 여겼다.
트리엔트 공의회도 병자성사에 대해 ‘삶의 마지막 순간’, ‘임종’ 등의 말로 죽음과 연결시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 도유는 병자들, 특별히 삶의 마지막 순간에 이르렀다고 보이는 위독한 병자들에게 집전해야 한다. 그러므로 임종자들의 성사라고도 한다”(「종부 성사에 관한 교리」, 제3장; DS 1698항).
‘병자의 도유’, 병자성사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전례 개혁을 통하여 병자성사에 대한 옛 전례 전통을 복구시켰다. 무엇보다 먼저, 이 성사를 ‘종부 성사’ 대신에 ‘병자의 도유’라는 이름으로 부르면서, 죽음을 준비시키는 성사가 아니라 죽을 위험이 엿보이는 사람들을 치유하는 성사로 소개한다. “‘종부 성사’는 또한 더 적절히 ‘병자의 도유’라고 할 수 있으므로, 이는 생명이 위급한 지경에 놓인 사람들만을 위한 성사가 아니다. 그러므로 분명히 이 성사를 받는 적절한 시기는 이미 신자가 질병이나 노쇠로 죽을 위험이 엿보이는 때로 여겨진다”(전례 헌장, 73항).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기억하는 믿음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예식에 관련된 기도문의 개정을 요구하면서, 이와 더불어 고해성사, 병자성사, 노자 성체로 이어지는 연속 예식을 마련하도록 명령하였다.
1972년 바오로 6세 교황이 승인한 「병자성사 예식: 병자의 도유와 사목적 배려 예식」은 이 성사의 거행에서 무엇보다 신앙이 드러나야 함을 강조한다. 왜냐하면 “사실 병자의 믿음이, 그리고 이 성사가 지닌 효력의 원천인(야고 5,15 참조)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기억하며 성사로 보증하는 다가올 하느님 나라를 바라보는 교회의 믿음이 병자를 구원하는 것”(「병자성사 예식 지침」, 7항)이기 때문이다. “분명한 중죄 중에 완강히 머물러 있는 자들에게는 병자 도유를 주지 말아야 한다”(「병자성사 예식 지침」, 15항)고 말하는 것도 같은 이유이다.
그리스도의 고난을 채울 자세
병자성사는 질병과 고통의 문제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대답이 되어야 한다. 병자를 돌보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명령하신 복음 말씀을 따르는 것이고, 육체적 치료와 영적 위로를 동시에 해줌으로써 인간 전체를 돌보는 것이다(「병자성사 예식 지침」, 4항 참조).
따라서 병자성사는 의학 치료의 대체물이 아니며 병원 치료와 경쟁하지도 않는다. 환자가 의사한테 가지 않고 먼저 사제에게 달려오거나, 사제가 환자의 육체적 치유를 전혀 기대하지 않고 기도문만 외우는 것도 문제이다.
사실 사제와 “병자들만 질병에 맞서 싸우는 것이 아니다. 의사들과 병자를 돌보는 모든 이도 병자들의 정신과 육체에 이롭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시도하고 연구하고 실험하는 일을 결코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병자성사 예식지침」, 4항). 비록 육체의 치료가 성과 없이 죽음으로 끝난다 해도, 병자와 함께 교회 공동체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신비, 곧 파스카 신비 안에서 인간의 질병과 고통의 문제에 대한 응답을 찾는다.
“우리는 언제나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울 자세를 갖추고, 피조물인 우리가 마침내 해방되어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에 들도록 기다려야 한다”(콜로 1,24; 로마 8,19-21 참조; 「병자성사 예식지침」, 4항).
예수 성심 성월 - 예수 성심 신심의 역사와 의미
예수 성심은 인간에 대한 끝없는 사랑
교회는 6월 예수 성심 성월을 보내고 있다. 6월 한 달간 미사 전후로 예수 성심 성월 기도(예수 성심께 천하만민을 바치는 기도)를 바치고 성시간과 성체강복, 성체현양대회 등 신심 행사를 연다. 예수 성심이란 무엇이고 교회는 언제부터 예수 성심을 특별히 공경하기 시작했을까.
심장은 몸에서 생명의 원천이다. 심장이 없으면 살아 숨 쉴 수 없다. 심장은 인간의 마음과 정신을 뜻하기도 한다. 예수 성심은 인간이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마음, 사랑을 가리킨다. 예수 성심에는 강생의 신비와 수난, 죽음, 성체성사 등을 통해 보여준 하느님의 사랑이 담겨 있다. 인간에 대한 지극한 사랑으로 당신 외아들마저 기꺼이 내어주신 하느님 사랑의 표현이 바로 예수 성심이다.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 말씀대로 ‘그 속에서부터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올 것이다.’”(요한 7,38-39) “군사 하나가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자 곧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요한 19,34)
예수 성심을 공경하는 신심은 이 성경 말씀과 관련이 깊다. 교부들은 예수 성심을 모든 은총의 근원으로 해석했다. 예수의 마음에서 구원의 생명수가 흘러나온다고 생각했다. 창에 찔린 예수의 심장에서 물과 피가 나오는 걸 천상 보화의 창고에서 무수한 은혜가 쏟아져 나온 것에 비유했다. 심장에서 흘러내린 물은 세례성사를, 피는 성체성사를 상징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심장에서 교회가 생겨났다고 생각했다. 비오 12세 교황(재위 1939~1958)은 회칙에서 “구세주의 상한 성심에서 구원의 성혈을 나누어 주는 교회가 탄생하였다”고 표현했다.
예수 성심에 대한 공경은 중세기까지 주로 개인적이고 주관적 차원으로 머물렀다. 17세기 성모방문수녀회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 수녀(1647~1690)의 환시가 교회로부터 인정되면서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알라코크 수녀는 1673년 말부터 1675년까지 수십 번에 걸쳐 예수 성심 발현을 체험했다. 주변 사람들은 이를 악마의 활동이라 수군거렸다. 하지만 예수 성심은 수녀를 통해 △ 예수 성심은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의 상징임을 알릴 것 △ 특별히 예수 수난을 묵상하는 성시간을 갖고 상처 입은 성심을 위로할 것 △ 예수 성심을 기리는 특별한 축일을 지낼 것 등 계시를 전했다. 수녀가 계시를 세상에 알릴 수 있었던 것은 환시의 진실성을 믿어줬던 고해 사제 콜롱비에르 신부의 도움이 컸다. 알라코크 수녀와 콜롱비에르 신부는 각각 1920년, 1992년 성인품에 올랐다.
비오 9세 교황(재위 1846~1878)은 1856년 예수 성심 축일을 보편 교회 축일로 확대했고 비오 12세는 예수 성심 성월을 중요하게 여기며 신심을 적극적으로 권장했다. 오늘날 예수 성심 신심은 인간을 사랑하는 예수님처럼 이웃을 사랑하는 자세로 나타난다.
[성모동산의 꽃과 풀들] 성령강림절 장미, 작약, 삼위일체 꽃 삼색제비꽃과 자주달개비
그리스도인들은 일찍부터 주변에서 자라고 피어나는 꽃들과 식물들을 보면서 특정한 축일을 맞으면 그 축일에 걸맞은 상징성을 읽어냈다. 그리하여 작약은 성령강림대축일과 관련해서 ‘성령강림절 장미(pentecost rose)’라고, 삼색제비꽃과 자주달개비는 삼위일체대축일과 관련해서 ‘삼위일체 꽃(Trinity flower)’이라 이름 지어 불렀다.
작약(peony)
사람들이 그 모양을 보고 구별하기 어려워하는 꽃 중에 모란과 작약이 있다. 아무튼 꽃의 모양은 매우 비슷하지만, 모란과 작약은 다른 식물이다. 작약은 초본 식물, 곧 풀이고 모란은 목본 식물, 곧 나무다. 그리고 잎의 모양도 서로 다르다.
모란은 중국이 원산인데, 우리나라에서도 오래전부터 화려한 꽃을 보기 위해 화단에 심어 길렀다. 신라 선덕여왕의 일화 때문에 모란은 향이 없는 꽃이라고 아는 사람도 있을 테지만, 부귀화(富貴花)라 불리며 귀한 대접을 받아 온 모란에서는 그 이름에 걸맞은 은은한 향이 풍겨 나온다.
그리고 모란의 꽃잎이 뚝뚝 떨어져 버리고 나면, 모란을 쏙 빼닮은 풍만한 꽃이 또 피어난다. 겨울이면 줄기가 모두 죽고 뿌리만 살아남았다가 봄이면 다시 새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는 여러해살이풀 작약이다. 작약도 오래전부터 모란처럼 관상용으로 화단에 심어 길렀는데, 작약의 향기는 모란보다 좀 진한 편이다. 또한 뿌리를 약재로 사용하기 위해 재배하기도 한다.
작약은 독일어로 핑스트로스(pfingstrose)다. ‘성령강림절(또는 오순절) 장미’라는 뜻이다. 추측해 보자면, 우리나라에서는 작약이 비교적 이른 시기인 4,5월에 꽃을 피우지만 예전에 유럽에서는 아마도 성령강림절 무렵에 꽃을 피웠던 모양이다. 그래선지 작약이 성모 동산에서는 ‘성령강림절 장미’ 또는 ‘성모님의 장미(Mary’s rose)’라고 불린다.
그런데 작약이 이렇듯 거창한 이름으로 불려 왔음에도, 교회에 전해오는 작약에 관련된 이야기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 대신 서양에 이런 이야기가 전해 온다.
옛날에 페온(Peon)이라는 공주가 이웃 나라의 왕자와 사랑에 빠졌다. 그런데 왕자가 먼 나라로 전쟁하러 가야 했다. 왕자는 공주에게 자기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했고, 공주는 늘 기도하며 왕자를 기다렸다. 전쟁이 끝나서 다른 사람들은 거의 다 돌아왔지만, 왕자는 돌아오지 않았다. 사람들은 모두들 왕자가 전사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공주는 왕자가 반드시 살아서 돌아올 거라 믿고 기다렸다.
여러 해가 지난 어느 날, 궁궐의 담 너머로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소경 악사가 부르는 구슬픈 노래였다. 왕자가 공주를 그리워하다가 죽어서 모란이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공주는 악사가 부르던 노래에 나오는 나라를 찾아갔다. 과연 모란꽃이 피어 있었다. 공주는 그 앞에서 “사랑하는 왕자님 곁을 다시는 떠나지 않게 해 주소서.”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공주의 정성에 감동한 신들은 공주를 모란 옆에서 탐스런 작약으로 피어나게 해 주었다(Peon → peony). 그리하여 모란이 피고 나면 으레 작약도 뒤따라서 피게 되었다고 한다.
삼색제비꽃(viola tricolor)과 자주달개비(spiderwort)
- 삼색제비꽃.
삼위일체 교의는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그리스도교의 진리다. 어쨌든 우리에게는 하느님께서 펼치시는 사랑, 부양, 보호, 용서, 치유, 정의, 평화의 경륜이 절대로 필요하다. 그리고 우리는 삼위일체 하느님을 상징한다고 여기는 식물이며 꽃들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어렴풋하게나마 성부, 성자, 성령이신 하느님에 대해서 알아듣는다. 그리고 하느님을 흠숭하고 찬미하며 우리의 행위들과 일들과 고통들에 영적인 지향을 얹어서 그분 앞에 오롯이 봉헌한다.
이러한 상징성을 가진 식물들 중에 우선 친숙한 것은 토끼풀(shamrock)이다. 아일랜드의 수호성인인 성 파트리치오는 소년 시절에 잡혀가서 종살이하던 아일랜드를 빠져나오면서 언젠가 다시 돌아오게 되기를 염원했다. 그러고는 마침내 선교사가 되어 다시 그곳을 찾아가 켈트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그때 성인은 잎이 3개인 토끼풀을 이용하여 삼위일체 교리를 설명했다고 한다.
이밖에 삼위일체를 나타내는 식물로 삼색제비꽃과 자주달개비가 있다.
삼색제비꽃은 유럽에서 ‘삼위일체 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야생 팬지’라고도 불리는 이 꽃은 한 송이에 3가지 색, 대개는 보라색, 흰색, 노란색이 들어 있다. 오늘날에는 변이종들이 생겨서 꽃잎이 더욱 커지고 색깔은 1가지나 2가지인 신품종들이 널리 퍼져 있는데, 흥미롭게도 신품종 팬지들에서 어느 한 가지 색이 우세를 보이는 경우에도 꽃의 중심부에는 나머지 두 색깔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각각의 꽃에서 우세를 보이는 색과 그 중심부에 늘 공존하는 다른 두 색이 어우러진 가운데, 이를테면 노란색이 주도적인 꽃은 성부 하느님의 영광을, 보라색이 주도적인 꽃은 강생하신 성자 하느님의 고통과 슬픔을, 흰색이 주도적인 꽃은 교회와 함께하시는 성령 하느님의 빛을 나타낸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 사랑으로 한 몸을 이루시는 가운데 세 위격 중 어느 한 위격으로 현존하시더라도 항상 다른 위격들과 더불어 현존하신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삼색제비꽃은 ‘성모 마리아의 기쁨’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뜁니다.”(루카 1,47)라는 ‘마리아의 노래(마니피캇)’와 관련되어 오래전에 지어진 이름이다.
- 자주달개비.
한편, 꽃잎이 3개인 꽃을 피우는 자주달개비는 독일에서 ‘삼위일체 꽃’이라고 불린다. 북아메리카 원산인 이 식물은 달개비(닭의장풀)보다 꽃의 색이 짙은 데다 자주색 잎에 얼룩무늬까지 있어서 관상용으로 선호된다. 그런데 이 식물은 ‘방랑하는 유다인’이라는 다소 뜬금없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예수님께 불친절했던 어느 유다인에 대한 전설에서 유래하는 이름이다.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 언덕으로 가시던 예수님께서 지치신 나머지 어느 집 처마 아래서 쉬고자 하셨다. 그러나 집주인은 목이라도 축이시라며 물 한 모금을 드리기는커녕 심한 욕설과 돌팔매질로 예수님을 쫓아버렸다. 예수님은 그곳을 떠나시며 “내가 이 세상에 다시 올 때까지 너는 이 세상을 방랑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그 후로 이 유다인은 보이지 않는 누군가에게 쫓겨서, 죽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는 채로 끊임없이 세상을 방랑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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