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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소망의 동산 원문보기 글쓴이: 끄싱개
고난은 은혜의 통로
창세기 41장 48-52절
찬 송 : 46장(아 날은 주님 정하신). 368장(주 예수여 은혜를).
365장(마음속에 근심 있는 사람). 430장(주와 같이 길 가는 것).
48) 요셉이 애굽 땅에 있는 그 칠 년 곡물을 거두어 각 성에 저장하되 각 성읍 주위의 밭의 곡물을 그 성읍 중에 쌓아 두매
49) 쌓아 둔 곡식이 바다 모래 같이 심히 많아 세기를 그쳤으니 그 수가 한이 없음이었더라.
50) 흉년이 들기 전에 요셉에게 두 아들이 나되 곧 온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이 그에게서 낳은지라.
51) 요셉이 그의 장남의 아들을 므낫세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내게 내 모든 고난과 내 아버지의 온 집 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 함이요.
52) 차남의 이름을 에브라임이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나를 내가 수고한 땅에서 번성하게 하셨다 함이었더라.
성경에 나오는 “고난”이라는 말의 뜻은 여러 가지입니다. 대표적인 용어를 꼽으면 다음과 같습니다. “누르다”(아나), “비좁은 장소”(짜드), “꺽쇠로 죄다”(짜라르).
무거운 돌이 누르고, 짐이 누르고 질병과 고통에 눌린 상태를 고난이라고 보았습니다. 움직이기조차 힘들고 옹색한 비좁은 공간에 갇혀 있는 상태를 고난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꺽쇠로 죄는 것처럼 꺾이고, 조이고, 그래서 겪는 고통을 고난이라고 보았습니다.
고난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 고난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남자, 여자, 노인, 청년, 어린이, 재벌회장, 공장근로자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억눌리는 일, 조이는 일, 꺾이는 아픔이 있습니다.
둘째, 고난은 피할 수 없습니다. 피하면 따라오고, 빨리 피하면 더 빨리 앞을 가로막습니다.
예를 들겠습니다. 죽음을 고난의 끝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무섭고 두려운 고난은 바로 죽음입니다. 그런데 그 죽음의 고난을 아무도 피할 수 없습니다.
셋째, 고난은 끝이 있습니다. 참고 견디기가 어려워 그렇지 언젠가는 끝나기 마련입니다. 길고 지루해서 그렇지 고난은 물러가기 마련입니다.
십자가의 고난도 부활로 끝나고, 바울의 고난도, 베드로의 고난도, 우리네 고난도 끝날 때가 있습니다. 아니 설령 고난이 한평생 계속된다 하더라도 영원한 천국의 기쁨과 영광이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욥의 경우를 보면 견디기 어려운 고난을 겪었습니다. 십남매가 모두 사고로 죽었습니다. 집은 무너져 폐허가 되었습니다. 재산을 불타고 약탈당했습니다. 아내는 욥이 겪는 불행과 고난이 꼴도 보기 싫다며 곁을 떠나 버렸습니다. 욥 자신은 불치의 피부병에 걸려 고통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욥은 여기서 “하나님이 내리신 고난이라면 반드시 큰 뜻이 있으리라”는 믿음으로 참고 견뎠습니다. 그 결과는 이전보다 더 크고 좋은 은혜를 받게 되었습니다.
요셉 역시 고난의 사람이었습니다. 형들의 시기와 질투로 애굽에 팔려갔습니다. 평소 흑심을 품었던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에게 치근거리다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되자 요셉을 고발해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주변을 살펴보면 미운 사람들뿐입니다. 형들도 밉고 보디발의 아내도 밉고, 그러다보면 온통 세상이 미워지고, 성격장애가 오고, 공격적이고, 방어적이 되어서 인간관계가 망가지게 됩니다. 그런데 요셉은 그 고난을 하나님의 섭리로 수용했기 때문에 결국 국무총리가 될 수 있었습니다.
요셉이 고난 속에서 받은 은혜를 셋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1. 감옥 속에서 받은 은해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억울한 누명으로 감옥에 들어간 요셉은 그곳에서 두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하나는 바로왕의 떡 맡은 장관이고 다른 하나는 술을 맡은 장관이었습니다. 투옥된 이유는 자세하지 않지만 모종의 사건에 연루되어 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었습니다.
만일 그때 요셉이 감옥에서 잡범들을 만났다던지 폭력조직의 두목을 만났다면 요셉의 인생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비록 억울한 죄로 투옥되었을망정 바로를 섬기는 신하들을 만났기 때문에 요셉의 길이 달라진 것입니다.
어는 날 포도주를 맡은 장관이 꿈을 꾸었습니다. 포도나무에 세 가지가 있고 싹이나 꽃이 피고 포도송이가 익었습니다. 그가 그 포도를 따서 그 즙을 바로애게 드리다가 꿈을 깼습니다.
요셉의 해몽은 “지금부터 사흘 안에 바로가 당신을 용서하고 직위가 회복되어 출옥하게 될 것이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요셉은 당신이 출옥하고 복직되면 바로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해 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떡 맡은 장관도 꿈을 꾸었습니다. “흰떡 세 광주리가 내 머리에 있고 그 윗 광주리 안에 바로를 위한 각종 식물이 있는데 새들이 내 머리의 광주리에서 그것을 먹더라”
요셉의 해몽은 “삼일 되는 날은 바로의 생일인데 사흘 안에 바로가 당신의 머리를 끊고 당신을 나무에 달 터인데 새들이 당신의 고기를 먹게 될 것이다.”라는 것이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해몽대로 하나는 복직이 되고 하나는 처형당했다는 것입니다.
술 맡은 장관을 만나지 못했다면 요셉의 고난은 더 길게 이어졌을 것입니다. 복직된 그 사람이 바로가 꿈 때문에 고민하는 모습은 곁에서 지켜보다가 자기 꿈을 해몽한 요셉을 추천했던 것입니다.
만남이 중요합니다. 부모를 만나고, 자녀를 만나고, 부부가 만나고, 형제와 친구, 이웃과 동료를 만납니다. 잘못만나면 인생도 망가지고 길도 꼬이게 됩니다.
좋은 만남과 은혜로운 만남을 위해 기도합시다. 그리고 내가 좋은 만남의 사람이 되도록 합시다. 나를 만나는 사람들이 나 때문에 행복해질 수 있도록 합시다. 나를 만나는 사람들이 나 때문에 위로 받고, 희망을 찾고, 도움을 받을 수 있게 합시다. 나를 만나는 사람들이 나 때문에 상처받고, 고통 받고, 시험받는 그런 사람이 되지 맙시다.
2. 바로를 만난 은혜입니다.
요셉의 인생은 바로를 만났기 때문에 180도 바뀐 것입니다. 감옥에서 포도주를 책임진 장관을 50명 만났더라도 바로를 만나지 못했다면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최고의 통치자인 바로 왕을 만났기 때문에 하루아침에 국무총리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린 여기에서 하나님의 절묘하신 섭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요셉이 가나안 땅 아버지 집을 떠나지 않았더라면, 형들이 요셉을 애굽에 팔지 않았더라면,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에게 치근대지 않고 요셉을 감옥에 집어넣지 않았더라면, 요셉이 감옥에서 포도주 장관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이런 식으로 상상의 날개를 펴나가노라면 끝이 없습니다.
그리고 바로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요셉은 그냥 야곱의 11번째 아들로 귀염 받고 자라서 가까운 친척 색시와 결혼해 아들 딸 낳고 살다가 회갑잔치 하고, 칠순잔치하고, 그리고 가나안 땅에 묻혔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요셉을 계속 고난의 궁지로 몰아넣으셨습니다. 빠져나갈 길도 없는 고난의 계곡으로 굴러 떨어지게 만드셨습니다.
지금 처해 있는 위치나 상황이나 조건이 어려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을 생각한다면 그 사건, 그 사람, 그 문제가 하나님의 섭리이며 계획임을 깨닫고 감사해야 합니다.
3.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창세기 41장 51∼52절을 보면 요셉이 두 아들을 낳고 이름을 므낫세와 에브라임이라고 정했습니다.
그런데 ‘므낫세’라는 이름의 뜻은 “하나님이 나로 나의 모든 고난과 나의 아비의 온 집 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므낫세란 ‘잊어버린다.’는 뜻입니다. 과거의 상처, 아픔, 고통, 감정, 원한을 하나님이 잊어버리게 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자난 일을 잊어버리시기를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너희 죄악을 도말할 것이며”, “너희 죄를 기억치 아니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목할 것은 요셉이 지난날의 아픈 상처와 원한을 잊어버릴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뇌는 두 가지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기억력과 망각력입니다. 고주알 메주알 어렸을 때 일에서 엊그제 일까지 하나도 빼지 않고 기억하는 능력, 그 가운데 특별히 나쁜 기억들, 상처 입은 사건들을 기억하는 능력이 있는가하면 어렸을 적 일은 물론이고 조금 전까지 있었던 일조차도 기억 못하는 건망증이 있습니다. 둘 다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기억할 건 기억하고 버릴 건 버리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요셉의 고백은 하나님이 지난날의 상처와 아픔을 잊게 해 주셨다는 것이고 그런 의미를 드러내기 위해 큰아들 이름을 므낫세라고 지은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므낫세가 필요합니다. 잊어버려서는 안 될 것들이 있습니다. 잊어버릴수록 좋은 것이 있습니다. 두 가지를 조종하고 통제하는 힘은 하나님이 주십니다.
창세기 27장을 보면 아니 많아 눈이 어두워지고 기억력이 약해진 이삭이 에서와 야곱에게 축복한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27장 18절을 보면 이삭이 야곱에게 “네가 누구냐?”라고 했고, 23절에 보면 “능히 분별치 못하고 축복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되면 곤란해집니다. 큰아들과 둘째 아들도 구분하지 못해 ‘네가 누구냐’라고 물을 정도면 보통일이 아닙니다.
우리들의 경우 선과 악, 의와 불의, 하나님과 세상, 주의 일과 세상일, 바른 길과 그른 길을 구분 못해 ‘어떤 것이 좋은가’라고 묻는다면 그야말로 영적 치매가 아닐 수 없습니다.
므낫세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자난 날을 잊게 해주시려고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요셉이 받았고 그 사실을 간증한 것입니다.
둘째 아들 이름은 에브라임입니다. 그 뜻은 이중결실, 즉 곱빼기 결실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받은 복 위에 복이 겹쳤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로 나의 수고한 땅에서 창성케 하셨다.”고 했습니다. 창성이란 위아래로 뻗고, 옆으로 앞으로 뒤로 뻗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마디로 성공적 삶, 성공적인 인생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창성케 하셨다”는 점입니다. 요셉의 경우는 고난도, 성공도, 아픔도, 은혜도 하나님이 주셨다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선후배 두 사람이 강가에서 낚시를 하고 있었습니다. 둘 다 교인이었습니다. 후배가 말했습니다. “선배님 저는 교회를 다니긴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찾을 수 있는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지 전혀 모르겠어요.”
선배가 말했습니다. “정말로 그 비결을 알고 싶은가?” “네,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가까이 오게”
후배가 가까이 오자 “강물을 들여다보게”
후배가 얼굴을 강물에 가까이 대고 들여다보려는 순간 뒷머리를 손으로 눌려 강물 속에 얼굴을 쳐 박았습니다. 갑자기 놀란 후배는 머를 들기 위해 허욱적거리고 얼굴을 흔들며 소리쳤습니다.
손을 놓은 선배가 “미안하이, 바로 이렇게 하면 된다네. 소리를 지르고, 허욱적거리고 입을 열어야 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찾고 구하게 그러면 하나님이 만나주실 걸세.”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고….
누구에게나 고난은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고난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대면하느냐, 맞서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집니다. 비극으로 끝날 수도 있고, 영광으로 발전할 수도 있습니다.
요셉처럼 하나님과 함께하면 하나님도 함께 하십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을 떠나면 하나님도 나를 떠나십니다.
역대상 28장 9절을 보면 “여호와께서는 모든 마음을 감찰하사 모든 의도를 아시나니 네가 만일 그를 찾으면 만날 것이요 만일 네가 그를 버리면 그가 너를 영원히 버리시리라”고 했습니다. 또한 28장 20절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사 네게서 떠나지 아니하시고 너를 버리지 아니하시리라”고 했습니다.
결론은 분명해졌습니다. 영광의 고난의 열매입니다. 고난은 은혜의 통로입니다. 고난 없는 영광은 허약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으면 고난 때문에 울거나 절망하거나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유는 고난은 은혜와 축복을 실어 나르는 수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크고 작은 고난을 당할 때 거기서 주님의 뜻을 깨닫고 감사하고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 풍랑 인연하여 더 빨리 가게 하옵소서. 고난이 은혜가 되게 하옵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