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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버지는 1900년 5월 5일에 전북 남원군 금지면 임압리에서 태어나셨다. 그러나 아버지를 아껴주시던 아버지의 조부모님과 부모님의 사랑은 몇 년 가지 못했다. 아버지의 아버지는 할아버지도 1912년에 돌아가셨다. 그 때 큰아버지가 15살, 아버지는 12살이었다. 아버지 형제는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대신하여 농사를 지었다. 아버지가 불우한 유년을 보내던 1910년은 일제가 조선에 대한 식민정책을 법률적으로 완결 짓고 본격적인 수탈을 위한 행정. 경제, 사회, 문화적 기반을 마련해가던 시기였다. 1910년부터 1918년까지의 토지조사사업은 지주의 소유권을 승인하고 다수 소작인의 경작권을 전면 부정함으로써 수많은 농민의 몰락을 초래했다.
나의 아버지도 예외일수는 없었다. 아버지는 어린 나이에 집안의 가장이었던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주변의 친척들이 알려주지 않아서 상속권을 이어 받지 못했다. 아버지가 농사를 짓는 땅은 4대째 내려오는 땅이었지만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상속 등기이전 신고를 하지 않은 관계로 일본인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등기권리증을 챙기지 못했기 때문에 송곳 꽂을 땅뙈기 하나 없는 거지가 된 아버지 형제는 분하고 억울하였지만 하소연 할 곳이 없었다.
1919년 남원군 덕과면 주민들은 일본의 식목일인 4월 3일을 기해 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하고, 군내 19개 면의 면장들에게 독립만세를 부르도록 통고했다. 면장들이 이에 적극 호응하여 수만의 면민들을 동원, 만세운동을 일으켰다. 일본헌병들은 시위 군중을 진압하기 위해 지원병을 불러들었다. 일본군은 평화적 시위를 벌이는 군중을 향해 무차별 총격을 가해 11명을 살해하고 수십 명의 부상자를 내는 만행을 저질렀다. 당시 남원군 금지면장은 아버지의 사촌형이었는데 현장에서 총을 맞고 사망하였다. 아버지역시 그 사건에 가담하였기 때문에 검거를 피해 산속에서 숨어서 지냈는데 아무것도 먹을 것이 없었다. 얼마 후 아버지가 산속의 생활을 청산하고 내려온 후 조심하면서 살고 있었다.
집안 어른들은 아버지를 불쌍하게 생각해서 결혼을 시키러고 했다. 때마침 어머니는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외삼촌과 단둘이 살고 있었다. 결혼식이라기보다는 물 한 그릇 떠놓은 형식만 치린 절차였다. 결혼하고 바로 큰언니가 태어났는데 이때가 1920년이었다.
큰언니가 열 살 무렵인 1930년대는 일제가 31년 만주사변, 37년 중국침략, 41년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던 시기로 1929년 세계공황 이후 심각한 위기를 맞은 식민지수탈경제를 타국의 침략을 통해 모순을 해결하려는 때였다. 한반도는 일제의 식량공급지이자 동시에 전쟁자원 조달처로서, 조선의 청, 장년들은 강제징용이나 징병으로 처녀들은 정신근로대로 위안부로 끌러갔다. 남자들은 광업부분과 철강 산업에, 여자 정신근로대는 군인들의 군복을 담당하는 일에 동원되기도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공장에서 장시간 노동과 저임금으로, 각종 노역과 군사훈련 및 강제동원에의 희생을 강요당했던 시기였다. 큰언니는 그냥 있다가는 근로정신대로 끌려갈 것이 확실했다. 특히 우리집안은 1919년 4월 3일사건 이후 감시가 너무 심했고 늘 불안한 상태었다. 결국 큰언니는 부모님 했던 것처럼 물만 놓고 결혼식을 하는 것으로 정신대에 끌러 가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징용을 피해갈 수 없어서 철도사업의 근로자로 징용을 가게 되었다. 징용으로 간 아버지는 계약기간이 1년이 지나고도 집에 가는 것이 불가능했다. 3년이 지나도 아버지는 돌아오지 못했고 아버지의 젊은 몸도 망가져갔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는 큰 사고를 당했다. 그러나 보상은 물론 치료조차 받지 못했다. 명목상은 월급이 있었지만 이것저것 제하고 나면 아무것도 없었다. 아버지가 힘들게 일을 했지만 그것은 조선을 위한 것이 아니고 순전히 일본을 위한 것일 뿐이었다.
둘째 언니는 1945년 4월 2일에 태어났다. 몇 달 지나자 해방이 되었다. 언니는 ‘해방둥이’라 불리며 귀여움을 독차지 했다. 그러나 1949년 4월에 태어난 셋째언니는 전쟁이 나서 먹을 것은 물론이고 피난을 가야 하는데 언니가 태어나 아직 돌도 지나지 않았으니 집안에서는 이유 없이 미움을 받기도 했다.
1948년 정부는 국가보안법을 제정했다. 제주 4,3항쟁과 여순사건이 있었다. 그런 분위 기었기에 마을 안에서도 좌대 우파로 파벌이 일어나기 시작하면서 분위기가 살벌하기 시작했다. 1950년 모두들 피난을 서둘렀지만 우리 식구들은 피난을 가지 않았다 전쟁의 광풍은 우리 집에도 몰아쳐 둘째 오빠가 전쟁에 동원되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되고 군대에 갔던 오빠가 돌아왔다. 그러나 돌아온 오빠는 걸을 수 없는 환자가 되어 있었다. 그 당시 그렇게 많던 상이군인 중에 한명이 틀림없으나 무슨 까닭인지 오빠는 보훈 혜택을 받지 못했다.
10월 1일에는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되었다. 빨치산 토벌을 맡은 11사단(사단장 최덕신)에 의해 전남 함평, 전북 고창 등에서 주민이 집단 학살되었다. 휴전 뒤에도 지리산 자락을 중심으로 한 빨치산의 저항이 활발했고 그것은 남원인 내 고향에도 영향을 미쳤다. 아침에 일어나면 고구마가 줄어있고 마당의 닭도 한 마리 한 마리 줄어들기 시작하여 나중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처음에는 언니가 산사람들이 가져간 줄 몰랐다. 아버지도 처음에는 언니가 계란을 먹은 줄 알고 의심받기도 했었다. 만세 사건으로 산속생활을 체험해본 아버지는 산사람들에게 호의적이었다. 음식을 일부러 툇마루에 놓아두기도 했던 기억이 있었다.
1954년 막내인 나를 낳을 때는 이미 40대 중반이던 어머니는 건강이 좋지 못했다. 우리부모님은 이미 아들셋 딸셋을 두고 있었다. 무엇보다 전쟁직후의 궁핍으로 제대로 영양섭취를 할 수 없었다. 더구나 상이군인이 된 오빠는 아무런 경제활동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이런 시기에 태어난 나도 셋째 언니처럼 결코 환영할 수 없는 아이가 될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의 건강이 좋지 않은 상태에서 태어났으니 젖도 제대로 얻어먹을 수 없었다. 둘째 언니가 밥물을 받아 먹이면서 나를 키웠다고 한다. 징용후유증으로 아버지도 병상에 계시고 둘째 오빠도 다쳐있는 상황에서 가족의 생계를 이끌던 어머니의 건강을 기대한다는 것은 무리였을 것이다. 이런 시골생활은 늘 배가 고팠고 어쩌다 동네잔치가 있는 날에는 잔치 집에 아이들의 줄이 이어졌다. 초등학교 입학할 때 사친회비라는 것이 있었다. 그것마저도 낼 형편이 되질 않았다.
1961년 5.16 쿠데타로 박정희가 집권함으로써 군사독재가 시작 되었다. 선 성장, 후 분배 정책을 펼침으로서 부익부 빈익빈의 상대적 빈곤 속에서 허덕이는 민중이 대다수였다. 우리 가족처럼 배우지 못한 노동자들은 경제성장의 혜택과는 거리가 너무 멀기만 하였다. 이 시기 농업은 점차 쇠퇴하고 산업화가 시작되어 도시에는 높다란 굴뚝이 하나 둘 올라갔다. 주로 수도권에 발달한 공장을 쫓아 많은 농촌사람들이 무작정 서울로 상경하였다. 1960년 당시 통계에 따르면 서울 인구 절반이 농촌에서 올라 온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이 대열에 우리가족도 끼여 이었다.
1965년 봄, 우리식구들은 먼저 상경한 큰 오빠부부가 살고 있는 서울로 이사했다. 큰오빠가 생활하고 있는 곳은 중량교 뚝방의 무허가촌에 방 한 칸, 그것도 남의 셋집이었다. 방 한 칸에 오빠와 올케언니, 조카, 아버지, 엄마, 셋째오빠, 셋째언니, 나 이렇게 8명이서 함께 생활해야 했다. 당시에는 자고나면 무허가 집들이 들어서 있었다. 잠잘 곳도 없이 서울로 올라온 시골사람들은 집이라기보다는 그냥 거지 생활이나 다름없는 움막 같은 것을 짓고 살았다. 낮에 구청 철거반원들이 와서 부수면 밤에 다시 움막 같은 집을 짓곤 했다. 선거철에는 그나마 철거반원들이 동원되지 않았다.
1971년 3선에 성공한 박정희 대통령은 그해 6월의 8대 국회의원 총선거까지는 철거반원을 보내지 않았다. 이때가 집이 철거당하지 않은 유일한 기간이었다. 1972년 아버지는 그래도 이제는 철거반원들이 집을 부수지 않으니 살 것 같다면서 이제는 마음 편히 살아보자고 약속하시고 며칠 지나지 않아 돌아가셨다. 등기권리증이 없는 무허가촌도 오래가지 못했다. 1970년부터 무허가 주택 철거사업에 돌입하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지역도 1974년부터 무작정 철거되기 시작하였다. 우리 집도 예외일수 없었다. 중량교 뚝방의 철거 이주지역은 지금의 성남시 은행동이었다. 당시의 성남은 생활권이 형성되어있지 않았다. 성남에 도착하여보니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는 버려진 땅에 천막을 치고 살라고 하는 것이다. 같은 천막이지만 중량천의 천막은 주변에 대중교통 수단이 되어 있었고 불편했지만 주변에 공동수도라도 있어서 해결할 수 있었다. 성남은 당장 먹을 물도 없었다. 이곳에서 살라는 말은 마치 가난한 사람들은 현대판 노예로 취급하는 것이었다. 그곳에서 죽든지 살든지 알아서 하라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생활권이 서울인 사람들이 성남에서 서울까지 출퇴근 할 수 있는 교통편이 제대로 되어있지 않아 성남에서 아침에 서울까지 출근하려면 2시간을 일찍 서둘러도 버스가 없었다. 등기권리증이 없다는 이유로 철거당한 사람들에게 ‘우리도 인간’이라는 징표가 나타난다. 아무런 준비 없이 허허벌판에 그저 사람만 우글거렸다. 상하수도는 물론이고 화장실 하나도 없었다. 땅은 향상 질퍽거렸다. 발이 빠져서 걸어 다닐 수 없었다. 마치 늪을 걸을 때처럼 어쩌다 생각 없이 한쪽 발을 옮기면 신발은 그곳에 있고 발만 나올 때도 있었다. 오죽하면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산다.”라는 말이 유행했다.
대표적인 사건이 광주대단지 사건이다. 성남뿐 아니라 어디도 등기권리증이 없다는 이유로 철거당한 뒤의 대접은 똑같았다. 광주대단지 사건은 일어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경제개발 목표를 내세워 경공업부분의 수출을 주도한다. 그곳에 일하는 사람은 대부분 나이 어린 여공으로 하루 12-18시간씩 일을 해야 했다. 조금 더 허리띠를 졸라매자면서 30분 일찍 출근하기, 근로자는 공장 일을 내일처럼, 사장은 근로자를 가족처럼, 구호를 내세웠다. 경제성장이란 명목으로 저임금 저곡가 정책을 실시해서 수출을 증대하고 외화 획득을 하려고 했다. 이런 경제성장정책의 밑거름은 제조업에 종사하는 여성노동자들이었다. 농민들과 노동자들은 열심히 일을 하지만 먹고 살 수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전태일이 분신하였다. 전태일은 평화시장에 일하는 노동자들의 근로조건과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면 분신자살을 했다. 이 사건 이후 평화시장에는 전국연합노동조합 청계피복지부가 생겼다 1965년 서울로 상경한 나는 1966년, 당시 12살에 평화시장에서 하루 12-18시간 고된 노동을 했다. 그리고 청계노조를 알게 되었고 열성적인 조합원이 되었다.
1977년 9월 9일 청계노조 산하 노동교실을 정부가 강제로 폐쇄하자 노동교실찾기 일환으로 농성을 벌였다. 이 사건으로 조합원 5명이 구속되었다. 그 속에 나도 포함되었다. 약 1년 후 출소 하여 다시 노조활동을 열심히 했다. 당시 사무실에서 근무 할 때는 중부경찰서 담당이 나를 미행했고 집으로 돌아가면 청량리 경찰서에서 나를 감시했다. 그때는 셋째 오빠와 함께 살고 있었는데 오빠 직장까지 경찰이 쫒아 다니면서 압력을 넣었다. 오빠가 더 이상 이렇게 못살겠다고 하자 나는 엄마와 단둘이 살겠다고 하고 동대문구 이문동에 이사를 했다. 경찰들은 그것으로 끝을 내지 않았다. 집주인에게 압력을 했었다. 집주인이 엄마에게 “당신 딸이 빨갱이라는데 우리 집에서 당장 이사 가라” 고 하면서 전세금 7만원을 엄마에게 던졌다. 그 사건으로 엄마는 충격을 받아서 쓰러지고 말았다. 막내딸이 노동운동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빨갱이라는 말에 충격을 받아 몸져누우신 뒤 결국 1979년 1월 18일에 돌아가시고 말았다. 2007년, 과거의 청계노조 활동을 했던 사람들은 청계노조의 역사를 우리의 시선으로 쓰기 위한 준비를 했고 그것은 『청계 내 청춘』이라는 책으로 발간되었다. 노조활동을 하면서 많은 동료들이 힘들었지만 나는 그 힘듦에 어머니의 죽음까지 더해져 있었다. 그 때 나와 어머니가 살던 그 집이 등기권리증이 있는 ‘우리 집’ 이었다면 어머니는 그렇게 충격적인 말을 들은 필요도 없었을 테고 아마 그렇게 일찍 돌아가시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나의 죄책감과 상처도 덜 했을지도 모른다. 등기권리증이 없다는 이유로 받은 대가가 너무 컸다. http://blog.daum.net/me6840/category/그룹명/나의%20이야기?page=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