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랜드의 현재를 만든 1990년대의 성장 비결은 수도 없이 많지만 네 가지로만 간추려 보자. 우선 교육이다. 1985년만 해도 18세 이하 아일랜드 청소년들의 40%만이 초·중·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었을 정도로 자녀 교육은 먹고살기 바쁜 아일랜드인들에게는 관심 사항이 아니었다.
1960년대에는 아일랜드 인구 280만명 중 대학생 수가 2만명이 채 되지 않았다. 그러나 1995년이 되면서 아일랜드 대학생과 졸업생 비율이 전체 인구의 48%가 될 정도로 늘어났다. 이 시기 영국과 독일은 대학생과 졸업생 비율이 25%가 채 안 되었다. 영국의 경우 지금도 이 비율은 변화가 없다. 1960년 2만명이던 것이 1995년에는 6배가 늘어 무려 11만2000여명이 대학을 다니게 됐다는 얘기다. 특히 1995년 아일랜드 대학생 중 과학 관련 전공을 하는 비율이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30개 국가 중 가장 높았다. 결국 이런 장기투자가 아일랜드 경제 발전의 기초가 되었다.
다음은 EU와 미국의 투자였다. EU 회사들은 아일랜드의 풍부하고 저렴한 인적 자원을 이용하려고 투자를 했다. 특히 독일이 가장 큰 투자자였다. EU는 14억달러를 원조해 아일랜드가 도로, 항만, 철도 등의 사회간접자본을 개발하게 만들었다. 영국인 다음으로 많은 미국 이민의 역사를 가진 덕분에 미국의 투자도 컸다. 미국 인구 중 거의 4000만명이 아일랜드와 직·간접으로 혈연관계가 있다. 미국은 미국보다 인건비가 싸고 영어를 모국어로 하는 고급인력이 풍부한 아일랜드가 최적의 투자처였다. 고등교육을 받은 아일랜드인의 1990년 연봉이 1만9000달러였을 때 미국 평균 연봉은 4만달러였다.
법인세 인하와 미국의 투자
세 번째로는 아일랜드 정부의 개방 정책이다. 1999년 OECD 기준으로 아일랜드는 세계에서 경제활동 자유 수치가 3위였다. 1위 홍콩, 2위 싱가포르 뒤를 이어 기업하기 좋은 나라였던 셈이다. 현재 헤리티지재단 통계에 의하면 아일랜드의 경제활동 자유 수치는 1위 싱가포르, 2위 스위스에 이어 아직도 3위이다. 같은 통계에서 한국은 19위로, 6위인 대만에 이어 아시아 3위이다. 영국은 24위, 미국은 25위, 일본은 35위이다. 아일랜드는 IMF순위로는 192개국 중 3위, 세계은행 순위는 187개국 중 4위일 정도로 거의 정부규제가 없다고 보면 된다.
거기에 더해 정부가 앞장서 1987년 구성한 ‘사회적협력증진책(Social Partnership)’이 해외기업들을 끌어들이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정부·기업·노동조합 삼자가 협의체를 구성해 원활한 임금 조정과 노사문제를 해결하는 제도다. 여야 대표들도 협의체의 일원으로 참가해 거당적인 협조를 아끼지 않았다.
네 번째로는 2003년부터 법인세가 12.5%로 인하됐다는 점이다. 미국 회사들로서는 당시 4억7000만명의 EU 시장에 관세 없이 제품 판매를 할 수 있게 된 아일랜드가 법인세까지 EU 최저로 낮춰버리니 투자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90년만 해도 1만1000여개의 미국 회사가 아일랜드에서 제품을 수출했지만 2002년에 들어서는 7만여개로 비약적으로 늘어났다. 미국의 국제적인 제약회사 10개 중 9개가 아일랜드에 공장을 가지고 있을 정도였다. 당시 미국의 전체 EU 투자 중 4분의1이 아일랜드에 집중되었다. 그 결과 당시 아일랜드의 소프트웨어 수출은 미국을 앞섰다. 당시 아일랜드의 인구는 400만여명에 불과했음에도 불구하고 제조대국으로 성장한 것이다.
이런 외국인 투자를 성공적으로 유치한 주역은 아일랜드 투자개발청(IDA Ireland)이었다. 1969년에 개설된 IDA는 시작부터 미국 회사들을 공략했다. 그 결과 미국의 컴퓨터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 제약, 전자, 의료기기 등의 제조 회사 중 아일랜드에 생산기지를 가지지 않은 회사는 거의 찾아볼 수 없을 정도가 됐다. IDA의 투자자를 위한 원스톱 서비스 수준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대단했다.
한국보다 10년 늦게 들이닥친 외환위기
켈틱 타이거의 기적이 현재까지 쭉 이어진 것만은 아니다. 정말 극적인 추락을 했다가 부활했다. 10년 이상 호황을 누리면서 승승장구하던 아일랜드도 호황의 절정인 2007년, 한국보다 딱 10년이 늦게 외환위기가 찾아왔다. 당시 켈틱 타이거를 만든 국내 요인 중 하나는 주택을 비롯한 각종 건축 경기였다.
아일랜드 정부는 경기를 부추기기 위해 신축건물에는 각종 세금을 대폭 인하하거나 면제해 주었다. 정부의 꼬드김에 올라탄 탐욕스러운 주택개발업자들은 아일랜드 곳곳에 주택과 건물 건설을 서둘렀다. 거기에 더해 유럽과 미국 은행들은 아일랜드인들의 묻지마 주택 구입에 무분별한 융자를 해주었다. 물론 이런 사태는 굳이 아일랜드에서만 벌어진 게 아니었다. 당시 아이슬란드를 필두로 거의 모든 유럽국가들이 대동소이한 수준의 위기를 맞았다. 그러나 아일랜드의 경우가 특히 심했다.
경기를 살리려고 무조건 건설 경기를 불러일으킨 정부, 자신의 지역구에 보다 많은 주택개발을 유치하려고 날뛴 정치인, 무분별하게 주택구입자금을 융자해 준 은행, 앞뒤 생각하지 않고 주택구입 붐을 일으킨 탐욕스러운 주택개발회사, 그리고 무조건 집값이 오른다는 착각에 빠져 정말 묻지마 주택 구입을 한 구매자들이 합작으로 일으킨 초대형 사고였다. 이자가 오르면 당장 터질 부동산 거품의 경고를 애써 무시한 결과였다.
당시 건설 붐이 아일랜드 경제의 20%나 차지했지만 2007년 미국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라는 초대형 경제난이 터지자 거품이 바로 터지고 말았다. 국제금융이 말라버리자 수출은 줄고 건설은 모두 중단되었다. 부동산 가격은 곤두박질을 쳤다. 결국 아일랜드 은행 모두가 예외없이 부실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자신의 상환능력은 무시하고 영끌로(영혼까지 끌어들여) 무리해서 주택을 구입한 아일랜드인들은 융자금이 쌓여 결국 주택을 뺏기고 길거리로 나앉게 되었다.
당시 아이리시타임스는 “재정흑자는 빛의 속도처럼 줄고, 국가부채 비율은 금방 하늘로 치솟았다”라고 표현했다. 이를 일러 아일랜드 언론은 ‘이카루스(Icarus)’를 연상시킨다고 자학하곤 했다. 하늘을 날려고 양초로 날개를 달아 날던 이카루스가 자만해서 너무 태양 가까이 가는 바람에 날개를 붙였던 양초가 녹아 바다에 떨어져 죽은 그리스신화 말이다.
비극적 사태가 시작된 2008년부터 사태가 진정된 2011년까지 3년 동안 아일랜드 국가수입은 17%가 하강했고, 실업률은 20%를 넘어섰을 때도 있었다. 2010년 아일랜드 정부 재정적자가 14.3%로 그리스보다 높았다. 당시 아일랜드 은행들은 960억달러(약 122조원)의 악성대출을 지니고 있었다. 이는 당시 아일랜드 GDP의 50%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그렇게 해서 아일랜드는 유로존에서 가장 먼저 불황에 들어선 국가가 되었다. 팔리지 않는 주택과 상환금을 못 내 은행에 뺏긴 빈집들이 아일랜드 도처에 즐비했다.
당시 아일랜드 언론은 이를 유령주택단지(Ghost Estate)라고 불렀다. 아일랜드 전국적으로 600여개의 단지에 30만채가 비어 있었다. 17만명이 대출보다 낮은 가격으로 떨어진 부동산을 안고 살았다. 당시 아일랜드는 유럽에서 네 번째 높은 평균 실업률(13.4%)을 기록하고 있었으며, 43만2500명이 실업수당을 받고 있었다. 30세 이하 노동가능인구 3명 중 1명이 실업자였다.
‘가학적 긴축재정’으로 살아나다
결국 아일랜드 정부가 사태에 직접 개입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돈을 풀기 시작하고 얼마 안 되어 결국 아일랜드 정부의 공공부문 부채비율은 GDP의 130%가 되면서 급기야 유럽중앙은행에 손을 내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아일랜드는 1100억달러의 구제금융을 받고 유럽중앙은행과 IMF에 국가재정을 넘겨줬다.
10년 전인 1997년 한국이 받은 IMF 구제금융 20억달러와 비교하면 얼마나 천문학적인 금액인지 알 수 있다. IMF의 강요에 의해 당연히 아일랜드는 사회복지 축소, 임금동결, 세금인상, 이자율 인상 같은 극단의 긴축재정 조치를 강요받았고, 아일랜드인들과 기업들은 엄청난 고통을 겪게 되었다. 당시 뼈를 깎는 긴축재정을 아일랜드인들은 ‘가학적(masochistic) 긴축재정’이라고 불렀다. 가장 지출이 많았던 공공부문 지출을 삭감하고 복지혜택부터 줄였다. 공공부문 지출을 15% 줄였고, 아동수당 10%, 실업수당 4.1%를 줄였다. 총 37억파운드의 예산을 줄이고 향후 3년간 GDP의 10%에 해당하는 금액을 삭감했다.
혹독한 시련을 맞아 2008년 4월과 2009년 4월 사이 2만명이 이민을 갔고 그 이후 10만여명이 더 이민을 갔다. 감자대기근의 악몽을 되살리는 기억이 아일랜드를 괴롭혔다. 그러나 이는 양날의 칼이었다. 경제난국을 겪으면서 켈틱 타이거의 기적을 일으켰던 고급인력들이 기술과 영어를 무기로 대거 해외로 직업을 찾아 나간 것에 대해 BNP파리바은행의 한 전문가는 “이들의 이민이 역설적으로는 아일랜드 사태에 일종의 안전밸브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국내에서 무직 상태로 있으면서 사회를 불안정하게 하지 않고 해외로 나가 수입을 다시 아일랜드로 돌려보내는 이중의 역할을 하면서 국가의 부담을 줄여줬다는 뜻이다.
역설적으로 본다면 1845년의 감자대기근을 겪은 이민의 후손들이 아일랜드의 국력이라는 말이기도 하다. 현재 전 세계에 흩어져 살고 있는 아일랜드인들은 8000만명. 모국의 인구보다 해외 동포가 더 많은 국가여서 국력이 보기보다 크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IMF는 당시 아일랜드 정부의 ‘극도로 야만적인 긴축재정 정책(pretty savage austerity program)’이 아일랜드를 다시 살렸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덕분에 아일랜드는 사태 3년이 채 안 된 2012년부터 다시 살아나기 시작한다.(한국은 IMF 사태 때 단 1년 만에 20억달러의 긴급자금 중 18억달러를 갚았다.) 2009년 GDP 4만2875달러로 최저점을 찍은 뒤 2010년 4만3918달러, 2012년 4만6335달러로 천천히 회복을 시작했다. 2014년 경제성장률 4.8%에 힘입어 GDP 5만1032달러를 찍었고 다음해인 2015년 6만8918달러로 사태 이전 수준 이상으로 회복한다.
유럽의 어떤 국가도 아일랜드 같은 드라마틱한 경제부흥, 침체, 회복을 겪은 적이 없다. 켈틱 타이거는 이렇게 해서 이제는 켈틱 불사조(Cetic Phoenix)라고도 불린다. 2014년 독일 재무장관은 “아일랜드의 부활에 질투를 느낀다”고 말할 정도였다. “덕분에 유로화의 안정에 아일랜드가 기여한 것은 아무리 칭찬해도 과함이 없다”고도 했다.
이렇게 해서 아일랜드는 세계 최고의 부국이 되었고, 자신들의 역사에서도 가장 잘사는 나라가 되었다. 세계 유수의 거대테크 회사 GAFAM(구글, 애플, 페이스북, 아마존, 마이크로소프트) 중 구글, 애플, 페이스북의 유럽 본사가 아일랜드에 있는 걸로 봐서 아일랜드의 경제는 상당 기간 강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