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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여행 장두이 문화국장(연극배우)
극단 역사가 무려 340년이 넘는다!
그 극단의 본거지, 보금자리로 1668년에 설립된 극장.
이름하여 ‘코메디 프랑세즈(Comédie-Française)’.
이 극장은 프랑스의 천재 희극작가 ‘몰리에르(1622-1673)’의 이름을 붙여,
‘La Maison de Molière(몰리에르의 집)’이라 불리기도......
가장 프랑스 문화를 대변한다는 자부심의 ‘코메디 프랑세즈!’
지금도 상설배우들을 단원으로 가지고 있는 프랑스의 자긍심, 코메디 프랑세즈 국립극단이다.
사진: 코메디 프랑세즈 공연포스타
파리 ‘Rue de Richelieu’에 자리 잡고 있는 ‘코메디 프랑세즈’극장은 1680년 8월 8일 루이14세 칙령에 의하여 설립되었다. 몰리에르가 사망한 7년 후에 극단이 지금의 극장을 갖게 된 셈이지만, 몰리에르의 작품과 코르네이유 등, 정통 프랑스 극작가들 중심 공연과 외국 작가들의 작품이 지금도 끊임없이 공연되고 있는 장수극단(長壽劇團)과 극장이다.
사진: 프랑세즈 공연1(시라노 벨주락)
당시엔 티켓 값이 워낙 비싼 관계로 일반 대중보다는 귀족들이 주 관객층을 형성하고 있었다. ‘코메디 프랑세즈’는 역사적으로도 공연장이 격변의 토론장 구실을 담당하기도 했는데, 1789년도 작품, ‘샤르르 9세’ 공연 때엔 관객들 사이에 작품에 대한 비평이 좌.우익으로 갈라져 격렬한 정치적 잇슈의 토론장으로 바뀔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1789년 9월 3일엔 공연 'Pamela'가 ‘프랑스 국가 안전위원회’에 의해 공연이 정지되고, 배우들이 한꺼번에 투옥되는 사건도 일어났다. 국립극단이 국가 정책만을 추종하고 신봉해야 하는 것에 당당히 맞선 프랑스 국립극단의 곧추선 예술적 항변의 목소리가 아닐 수 없다.
사진: 코메디 프랑세즈 공연3
300년 넘는 극단의 역사는 3,000여 편의 작품 공연과 3개의 부속 극장을 가진 유럽 최고의 국립극단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20년을 기준으로 활동하는 정단원(正團員)과 일정기간 동안에 준한 활동을 계약한 준단원(凖團員) 체재로 운영, 일체의 공연에 전념하도록 최상의 질적 공연을 만드는 시스템으로, 많은 나라 ‘국립극단’ 모델이 되는 곳이 ‘코메디 프랑세즈’다.
사진: 코메디 프랑세즈 극장 모습
사진: 코메디 프랑세즈 무대
프랑스 국립 ‘코메디 프랑세즈’의 명칭이 ‘코메디’로 또한 극장 이름을 ‘몰리에르의 집’이라 불리는 까닭은 역시 프랑스가 낳은 최고의 희극 극작가 'MOLIERE(본명:Jean-Baptiste Poquelin)에 대한 헌정(獻呈)임은 물론이다. 몰리에르는 국내에서도 자주 공연되는 인류 문학사상 최고의 작가. 그 자신이 극작가, 배우, 시인으로 영국의 셰익스피어 못지않은 세계문학사상 가장 위대한 작가 중의 한 사람이다.
현존하는 그의 희곡은 첫 작품 1645년 <Le Medecin Volant>로부터 마지막 작품 1673년 2월 10일의 <La Malade Imaginaire>를 포함해 31편 정도가 현존,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공연되고 있다. 셰익스피어가 영어 단어 확장에 큰 역할을 한 것처럼, 몰리에르는 프랑스 언어를 ‘몰리에르의 언어’라고 할 만큼 커다란 영향을 끼친 大作家다.
사진: 코메디 프랑세즈 공연4
비교적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몰리에르는 12년 동안 순회공연배우로 활동하면서 극작 본능과 재능을 키웠고, 특히 이태리의 'Commedia dell arte' 코메디의 즉흥연기와 극적구성 작법(作法)을 참조, 매우 세련된 그만의 독특한 코메디 극본을 쓰는데 성공한다. 그의 명성이 알려지면서 루이14세 동생, 필리프1세 등이 후원을 맡아, 마침내 루이14세 앞에서 성공적 공연을 거두면서 ‘왕정극단’의 책임자가 된다. 일련의 초기 작품, <사랑에 빠진 의사>, <남편을 위한 학교>, <아내를 위한 학교> 등으로 몰리에르는 계속된 성공가도를 달린다.
사진: 코메디 프랑세즈 공연5
초창기 다소 저급한 코메디를 쓴 몰리에르는 차츰 인간세상을 꿰뚫어 보는 교훈을 담는 희극정신을 바탕 한 희극을 쓰고자 하는 진심에, 왕정극단을 떠나 자유로운 활동을 꾀한다. 그의 후기 작품, <Tartuffe>, <Dom Juan> 등은 연극사상 희극의 예술성과 역할을 반석위에 올린 뛰어난 명품명작으로 추앙받고 있다. 궁정에서의 좋은 조건의 연극 생활을 뒤로 하고, 계속 새로운 코메디의 세계에 심혈을 기울이던 그에게 폐결핵은 찾아왔고, 마침내 1673년 그의 작품 <Le Malade Imaginaire>에 배우로 출연하던 도중, 무대 위에서 심한 기침과 각혈로 쓰러져 숨을 거두었다.
사진: 코메디 프랑세즈 공연6
파리에서 태어난 몰리에르는 태어났을 때, 유난히 큰 코를 가지고 태어나서 'Le Nez'라고 불리기도 했다. 10살 때 어머니를 여의었고, 아버지가 루이13세에 의해 왕궁하인으로 발탁되어, 몰리에르 역시 같은 직책에 책봉된다. 그러나 몰리에르 나이 21세에 관료의 직급을 버리고 배우가 되기로 결심, 당시 여배우 Madeleine Bejart와 함께 극단 'Illustre'를 창설한다. 그러나 2년 후에 극단은 파산. 많은 빚을 감당하게 된다.
사진: 코메디 프랑세즈 공연8
사진: 코메디 프랑세즈 공연10
그가 본명을 버리고 ‘몰리에르’란 가명을 사용한 것은 가족 가운데 배우가 없는 가계(家系)에 수치가 될 것이란 생각으로 그랬다고 전해진다.(유럽 사회에서도 당시 배우는 그냥 웃음을 주는 어릿광대 엔터테이너로 인정됐던 것)
1664년 공연된 <Tartuffe>는 몰리에르를 최고의 희극극작가로 인정받게 만들었으니, 지배계급 권력을 가진 인간세태의 위선을 통렬히 비판한 풍자희극(諷刺喜劇)으로 당시 공연금지까지 받는 명작이 됐던 것이다. 본격적인 희극정신이 무엇이며 연극이 무엇인가를 보여준 또 하나의 명작 <Le Misanthrope> 역시 최고의 작품 중 하나로 차원 높은 도덕적 잣대로서의 내용을 가지고 있는 걸작.... 그렇지만 이 작품 역시 당시에 인정받지 못하는 수모를 겪는다.
사진: 코메디 프랑세즈 공연12
1668년 이후, 병에 시달린 몰리에르는 마지막 그의 후반기 작품에 열정을 쏟는다. 그 시기에 나온 명작 가운데 하나가 <수전노/L'Aare>다. 1672년 아내 ‘마들렌 베쟈르’가 세상을 떠나자 깊은 상실감에 빠진 몰리에르는 지병이 악화된다. 그런 가운데 마지막 무대에의 열정은 계속해서 명작 <스카펭의 간계/Les Fourberies Scapin>, <학식있는 숙녀/Les Femmes Savantes> 등, 걸작품(傑作品)들이 탄생한다.
사진: 코메디 프랑세즈 공연13
사진: 코메디 프랑세즈 공연14
몰리에르가 희극작가로 알려져 있지만, 그는 비극 작품 외에 또한 ‘코메디 발레’라는 당시 새로운 공연예술 형태를 창안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1661년 루이14세 궁정극장 프로시니엄 무대에 연극과 무용이 접목한 ‘무용음악연극’의 출연이 그것이다.
춤을 추는 무용수와 배우가 모두 대사를 하며, 극적 이야기를 진행하는 이 새로운 장르의 공연은 루이14세를 비롯해 당시 궁정 귀족들에게 큰 호응을 얻어, 몰리에르는 무려 12개의 ‘코메디 발레’ 작품을 만들어달라는 요청을 받게 된다. 무용이 있으니 자연히 음악 또한 곁들여지는 공연형태로서 단순한 발레 이외의 오페레타적 공연 형식으로 발전돼 나갔다. 루이14세 역시 몰리에르의 '코메디 발레' 작품 <Le Marriage Force>에서 이집트인, 그리고 <Les Amants Magnifiques>에선 넵튠 역할과 아폴로 역으로 출연하기도 했을 정도.....!
사진: 코메디 프랑세즈 공연15
1673년 2월 17일 몰리에르는 그의 마지막 작품 <상상병 환자/Le Malade Imaginaire>에 출연, 공연 도중 무대에서 쓰러진다. 그러나 그는 공연을 끝까지 마쳐야 한다며 다시 공연을 감행, 극심한 각혈로 쓰러졌고, 급기야 한 많은 연극인생(演劇人生)을 마감한다. 당시 배우로 출연하며 그가 입은 의상이 초록색이었는데, 그후 배우들이 초록색 의상 입기를 거부하는 미신(迷信)으로 남게 됐다.
당시 배우는 프랑스 법에 의해, 소위 귀족들이 묻히는 신성한 땅에 안장될 수 없어, 몰리에르는 세례를 받지 않은 유아들을 위해 마련된 묘지에 묻힌다. 그러다가 1792년 유해는 ‘프랑스기념물 박물관’으로 이전되었고, 1817년 마침내 파리의 ‘Pere Lachaise 묘지’로 이장되었다.
사진: 코메디 프랑세즈 공연16
연극 저술가 ‘Martha Bellinger’가 말한다.
“몰리에르! 그는 일관되고 유기적인 문체를 갖지 않으면서 문법에 구애받지 않고, 은유를 과감히 섞고, 불필요한 단어를 만들어 사용한다는 비판을 받았지만, 연극에서 가져야 하는 캐릭터의 풍요로움과 뛰어난 재치와 유머, 공연에서 드러나는 지능적이고 즉흥적인 희곡작법은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최고의 작가다. 그의 작품을 대하면 놀랍게도 무궁무진한 환희와 의기 충만한 쾌활함을 갖게 되는, 결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매우 긍정적인..... 역사상 최고의 코메디 작가라 하겠다.”
뛰어난 예술가들이 그러하지만, 몰리에르 역시 살아생전 그의 작품은 웃음 이외에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20세기 들어서 많은 학자들과 평단 그리고 관객들은 그의 희곡에 깃들어 있는 철학적, 종교적, 도덕적, 연극적 깊이를 이해하고 열애하게 되었으니, 천재는 죽어서 그 가치가 증명 된 셈인가?
사진: 코메디 프랑세즈 공연2
“희극이 곧 깨우침의 교훈이다!”
웃는 가운데 비애(悲哀)를 그리고 삶의 통찰력(通察力)을 갖게 하는, 코메디의 진정한 의미를 실천하고 각인시킨 극작가 몰리에르! 그는 프랑스 국립극단을 ‘몰리에르의 집/코메디 프랑세즈’란 제하(題下)로 간단없이 증명해 대변한다.
1983년 필자가 파리에 있는 ‘피터 브룩’ 극단에서 작업할 때, ‘코메디 프랑세즈’ 극단 공연을 여러 번 관람했지만, 유서 깊은 극장과 몰리에르의 후광은 왜 프랑스가 세계 5大 연극강국(演劇强國)에 속하는지를 뼛속 깊이 느끼게 해주었다.
사진: 코메디 프랑세즈 공연9
1978년 프랑스 ‘태양극단’을 창단한 '아리안느 무쉬킨(Ariane Mnouchine)'이 감독한, 런닝타임 4시간 장편영화 'MOLIERE'는 지금도 필자 뇌리에 강렬하게 각인된 전기영화(傳記映畵)다. 2023년에 공연된 뮤지컬 'MOLIERE'도 몰리에르의 단순한 삶의 조명 뿐 아니라, 그의 작품 속에 내재된 인간 탐구의 새로운 보물찾기 일환이 아닐까 쉽다......
사진: 코메디 프랑세즈 공연6
어느 해보다 유독 힘들고 고난(苦難)한 지금, 2024 年末과 2025 年始.....!
세상의 잘못을 깨닫게 하고 희망의 웃음을 주는 한국판 코메디 공연이 우리에게 새로운 에너지를 줄 수 있기를 염원하며, 명품연극을 소원(所願)해본다. 결국 진정한 참 예술은 달콤한 캔디가 아닌, 쓰고 매운 진심의 약(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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