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두 ( 제7회 총회장) 1918년
【본문】 「저희가 조반을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사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양을 먹이라 하시고 또 두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세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 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 가리라」(요 21:15∼18)
예수님은 죽음에서 다시 사셨건만 그에게서 인간적 요구의 만족을 얻지 못한 제자들은 다시 금 옛 생활로 돌아가고 싶어 베드로는 선봉에 서서 다른 여섯 제자와 함께 아름다운 갈릴리 바다로 고기 잡으러 갔으나 이들을 못 믿어하시는 우리 주 예수님의 심정은 그들로 하여금 이 땅위에 역사의 사실을 이루려고 이른 새벽 갈릴리 바닷가로 그들을 찾으셨다. 요21:15∼18을 보면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향하여「네가 나를 사랑하느냐?」하고 물으심에 깊이 베드로의 심중을 찔렀으며 잠재하였던 사랑의 강렬한 움직임을 일으켜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하는 진심의 고백이 있었다. 참 사랑의 고백에는 의심이 없고 두려움이 없으며 외형적이 아닌 깊은 마음의 고백이 있을 따름이다. 예수님의 세 번이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신 물음에는 크고도 깊은 오의가 참재하여 있고 감격한 움직임이 있어 약하고 근심에 쌍인 베드로의 신앙과 사람으로 하여금 불타게 하여 그는 일생을 주 위하여 받은 어려운 박대와 고난을 참으며 나중에는 순교의 거룩한 죽음으로 후세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믿음의 깊은 자리로 나아가게 하며 신앙생활에 큰 힘과 교훈이 됨을 느낀다. 오늘 위기에 직면한 사회에서 오는 여러 가지 시유(試誘)와 어려운 고난에 어쩔 줄 모르는 교회와 떨어지고 식어가며 냉랭한 신앙으로 옛 생활로 발길을 돌이키려는 그리스도 인들을 향하여 주 예수님께서 눈물겨운 음성으로 「네가 나를 세상의 모든 것보다도 더 사랑하느냐?」하시는 말씀을 성서를 통하여 얼마나 귀 아프게 들었느냐? 이 가증스러운 인간들은 옛날의 바리새 교인보다 더한 외식과 외형으로는 예수를 사랑한다고 하며 말로는 가장 예수를 사랑하고 위한다고 하나, 그의 나타내는 생활과 심령은 회칠한 무덤과 같고 비 없는 구름과 같다. 오늘 교회의 분규내용을 드려다 보면 말로 가장 주님을 사랑한다는 이들이 물고 뜯고 싸우고 있으며 교회의 어려움이 올 때 외형으로 지위로도 윗자리요, 가장 주님을 사랑하는 체 하던 그들이 먼저 피할 곳과 절대 진리와 죄와 타협하려는 비겁쟁이가 많음을 볼 때 서럽다. 동양 성현의 말씀에도 하루에 세 번 생각하라 하였다. 오늘의 신자는 하루에 세 번보다 열번, 수무번의 깊은 생각으로 어떻게 하면 이 어려운 시대에서 예수님을 더 사랑하고 위하고 그 영광을 나타내기 위하여 살 수 있을까를 느껴보아 더 높고 깊은 신앙생활로 나아감이 있기를 바라와 이제 예수님을 사랑하는 삼대 계단에 대하여 말씀하려고 한다.
1. 예수를 좀 더 깊이 이해하자
우리가 주 예수님을 진정으로 살아하고 위하여 살려고 할 때 처음로 그 예수를 좀 더 깊이 이해(理解)하여야 하겠다. 예수를 사랑한다고 말로 떠드는 것보다 그를 알아주는 이해가 오늘 인간에게 참말로 있었다면 얼마나 고마운 일이겠는가 남이 나를 진심으로 이해하여 줄 때 내 마음이 기쁘고 즐거움을 느끼듯 보통 흐르는 일시의 감정적 사랑보다 피동적 동정심보다 생명 없는 속회된 시와 노래로 찬양함보다 하나님의 고귀한 영광보좌를 버리고 죄의 인간을 구원키 위하여 어린양 같이 순종으로 천한 사람의 몸을 입으신 예수님의 사랑의 깊은 심정을 알아주는 이해가 있을 때 우리의 신앙이 한 걸음 더 주님의 기뻐하시는데 나아갈 줄 안다. 앞에 오는 십자가의 수난과 인간 구원의 쓴잔을 마시려고 고민하시던 예수님이 어두운 밤 제자들을 다리시고 겟세마네동산 깊은 숲 속을 찾아 나아가 피땀을 흘리며 시도하시는 예수의 간절한 심정을 알아야 되겠다. 삼십 삼년의 괴로운 생활 비참한 십자가의 죽음 통쾌한 부활의 승리를 알아야 되겠고 귀하신 보혈을 흘려 멸망의 인간심령을 구원하시는 거룩한 찰나의 숭엄한 사실을 깊이 알아야 되겠다. 오늘 한국 교회는 예수님을 깊이 이해하는 심령이 없고 부족하며 우리의 생명과 산 사실로 물들어 일어나는 신앙의 뜨거운 불길이 없어져 간다. 그럼으로 그리스도인들은 먼저 무엇보다도 예수님을 참으로 살아하는 첫 계단에 나아가고 또 좀더 깊은데 나아가야 되겠다.
2. 내가 사랑하는 것을 너희도 사랑하느냐
너희가 서로 사랑하기를 내가 너희를 살아하는 듯 하라. 이것이 나의 계명이니라(요15:21) 사람이 만일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나니라(요1 4:20)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것을 네가 사랑하며 예수님께서 미워하는 것을 너도 미워하느냐? 고 신령한 음성으로 물으실 때 우리는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 인간을 위하여 피 흘리는데 까지 이르며 사랑하시나니 우리도 이 땅의 인간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며 주께서 사랑하신 것을 나도 사랑한 것임을 믿는다. 예수님께서는 세상 사람을 사랑하되 부귀영화와 교루거각에 사는 부자와 고관 권세자가 아니었고, 과학(科學) 철학을 말하는 학자가 아니었고, 종교의 의식을 잘 지키는 바리새교인 서기관이 아니며 가엾이 피땀으로 근근히 사는 노동자와 자유의 권세와 지위 아무 것도 없는 귀먹고 눈먼 소경, 반신불수 병자, 음녀, 창기, 버림을 받은 죄인들에게 자비와 사랑을 베풀었다. 그러므로 우리도 돈 있고, 권세 있는 자를 사랑하고, 아첨하려 하며, 지위와 학식 있는 자를 애써 사랑하려하고 사귀려하는 비열한 생각과 태도에서 떠나 이 땅의 불스러운 농민과 어민의 가난한 미들을 위하여 예수님의 자비와 사랑을 베푸는데 이르러야 하겠다. 예수님은 세상인간과 반대를 사랑하며 외식과 간사 형식을 제일 싫어하신다. 오늘 우리에게서는 주께서 사랑하고 기뻐하시는 의와 경건함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 자비 화평 양선과 풍성은 찾을 길이 없고, 주께서 싫어하시며 금(禁)하는 교만과 시기 분쟁과 작당 비방과 훼방 남을 중상하여 매장하는 것을 일삼는 것은 언제나 찾을 수 있으니 이러고서야 어찌 주님의 살아하는 것을 사랑한다 할 수 있으며 주 위해 산다고 하리까? 예수님의 교훈과 우리의 실제 생활은 너무도 천양의 차를 갖고 있으며 잠꼬대 같은 공상과 심현된 이상의 차이를 갖고 있다.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라야 들어간다고 하였다. 우리는 예수를 아는 것과 사랑이라는 생각 만에서 떠나 이 생명불의 움직이는 실행 생활에 나타나게 하여 주의 행하신 것을 사랑하는 믿음의 깊음으로 나아가야 되겠다.
3. 예수를 위하여 몸을 바치자
예수 말씀하시기를 요15:31에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사랑이 없나니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며 곧 나의 친구라 하였다. 오늘 자기 가정과 사회와 국가를 위하여서는 사랑을 아낌없이 바치고 몸을 바쳐 죽은 사람도 많으나 영원한 영혼의 생명을 구원하여 준 예수님을 위하여서는 아낌없이 사랑과 몸을 바치는 사람이 적음을 탄 한다. 참 사랑은 희생이요, 자기의 몸을 바치며 참사랑은 나보다 다른 사람을 위하여 나보다 주님을 위하여 손해보는 것이다. 예수님을 사랑한다 사랑한다고 말로는 떠드나 한번 값있게 희생한 적이 없고 손해본 적이 없이 오히려 날마다 주님을 더 희생시켜 다시 십자가에 못박으며 예수로 더 이익만 보려고 애씀이 이 심사들이 아닌가? 예수의 사랑에 깊이 감격한 사람은 그 몸을 바치지 않을 수 없거늘 우리도 베드로와 같은 진심의 고백인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지 않는가」하는 참 믿음 참 사랑의 고백이 있어야 되겠다. 내가 나를 중히 여기고 생각하는 것에서 떠나 주를 중히 여기고 생각하여야 되겠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복종함은 영원한 멸망의 인간을 깊이 이해함이었고 죽음의 나를 위하여서임을 깊이 느껴야 될 것이다. 하나님과 예수님보다 나를 더 중히 생각할 때 나는 죽을 수밖에 없고 이 몸 바쳐 주님을 사랑하고 더 중히 여겨 살 때 내가 살수 있음을 깊은 산 사실의 체험으로 느껴야 되겠다. 이 몸들은 죄인으로 예수님을 깊이 이해할 수 없고 사랑할 자격도 없고 힘도 없는 무자격자이니 오직 하나님의 은총과 성인의 능력으로 이루는 일 인줄만 믿고 기도로 몸바칠 때 은총으로 주시는 거룩한 힘을 힘입고 나아가 주 예수를 완전히 좀더 깊이 이해하자. 예수의 사랑하신 것을 사랑하자. 예수를 위하여 몸바치자 아비나 어미 사랑하기를 나보다 더 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 살아하기를 나보다 더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제 목숨을 아끼는 자는 장차 잃어버리고 나를 위하여 목숨을 잃어버리는 자는 장차 찾으리라(마10:37∼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