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쓰는 글은 예술과는 거리가 멀다. 기존의 문학과도 비교하기 싫다.
20 여년 전, 소설집 한권을 냈지만, 그것은 실로 우연일 뿐이었다.
나는 내 글을 굳이 이야기 한다면 雜文이라고 말하고 싶다.
엉망진창이다. 자유롭다. 형식이 없다. 맞춤법도 무시한다. 누구라도 쓸 수 있는 글이다. 누구라도 읽을 수 있다.
나는 글쓰기를 빙자한 제조업자가 된 기분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를 닮았다는 생각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작가가 있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을 ‘특수한 기능인’으로 일컫습니다.
어떤 기능을 갖고 있냐 하면, 평범한 사람들은, 지하 1층까지밖에는 접근하지 못하지만, 자신은 지하 2층까지 내려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하 2층에 내려가면 거기에는 태고적부터 연면히 흐르는, 지금도 온 세상에 펼쳐져 있는 ‘수맥’같은 것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수중에 가지고 있는 도구로 무언가 여남은이나마 건져서는 갖고 올라옵니다. 지하 2층은 인간이 오래 있기에 위험한 곳이므로, 일을 보고 난 뒤에는 재빨리 현실 세계로 돌아오는데, 그렇게 지하 2층에서 경험했던 것을 서사의 형식으로 이야기해오는 것을 직업으로 삼고 있다고 말합니다.
다만, 이 작업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게 아니고, 이러한 분야의 기능을 습득한 소수의 인간이 있습니다. 하루키 자신이 종종 스스로 그런 인간이라고, 이런저런 문학론에서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제가 봤을 때 이건 문학적 메타포가 아니고, 사실 그대로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경계선 저편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것’.
무라카미 하루키가 쓰는 소설들은, 따지고 보면 죄다 그런 것들뿐입니다.
누군가가 경계선 너머로 사라져버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이야기, 경계선 저편으로부터 위험한 무언가가 내습하는 탓에, 그것을 되돌려보내는 이야기입니다.
이 두 테마가 반복됩니다. 둘 다 경계선, 그러니까 피안과 차안을 왕래하는 이야기입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쓰는 거의 대부분의 이야기에는 ‘유령’이 등장합니다. 이게 ‘유령’이라고나 할까, ‘이 세상 것이 아닌 것’이 등장해서는, 주인공은 그걸 어떻게 맞이할지를 이래저래 궁리합니다.
<겐지모노가타리>에는 생령이 나옵니다.
로쿠조노 미야스도코로의 생령이 ‘아오이노우에’나 ‘유가오’에게 저주를 걸어 목숨을 앗아갑니다.
생령이나 악령에 의해 사람이 죽는다는 개념은, 헤이안 시대 때는 그냥 현실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무라카미 하루키는 커다란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 자기 자신의 문학적 계보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우에다 아키나리’에 이르게 된다고 그는 스스로 밝힙니다.
개화기 때부터 시작된 근대 문학을 전부 부정하고 보니, 생각지도 못하게 훨씬 이전의 우에다 아키나리가 나타났던 겁니다.
그리고 우에다 아키나리가 쓴 이야기들은 죄다 ‘이 세상 것이 아닌 것’이 인간을 죽인다거나, 인간이 그것으로부터 도망다닌다거나, 그것과 어떻게든 해보려는 이야기입니다.
평이하고 친숙한 문장은 하루키가 데뷔 당시부터 의식하고 있던 점으로, 하루키에 따르면 "낮은 문턱"으로 "마음에 호소하는" 문장은 미국 작가인 브로티건과 보네거트에게서 받은 영향이라고 한다.
"글에선 리듬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도 하루키가 곧잘 하는 말인데, 그는 이렇게 생각하게 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하여튼 7년가량 아침부터 밤까지 재즈 가게를 운영했는데, 머릿속에서 계속 엘빈 존스의 하이햇이 울리더라구요."
하루키가 구사하는 은유의 정교함에 대해 사이토 다마키는
"은유 능력을 서로 다른 두 이미지 사이의 점프력이라고 생각할 때, 하루키만큼 멀리까지 점프할 수 있는 일본 작가는 없다“
고 평가한다.
반면 문장은 평이한 데 반해 작품의 스토리는 흔히 난해하다는 지적을 받는다. 하루키 자신은 이러한 "스토리의 난해함"에 대해서 독자들에게 "논리"가 아닌 "이야기"로 텍스트를 이해해 달라고 촉구한다.
이야기 속의 이해하기 어려운 사건이나 현상들을 하루키는 "격렬한 은유"라 칭하면서, 영혼의 깊은 부분에 있는 어두운 영역을 이해하려면 밝은 영역의 논리로는 부족하다고 설명한다.
이처럼 평이한 문체로 고도의 내용을 다루고, 현실 세계에서 비현실의 또 다른 세계로 완벽하게 이동하는 작풍은 일본 국내만 아니라 해외에도 소위 "하루키 칠드런"이라 일컬어지는 바 하루키의 영향을 받은 작가들을 배출하고 있다.
또 하루키의 작품은 기존의 일본 문학과 대비해 종종 미국적이고 무국적적이라는 평가를 받으면서 세계적인 보편성이 높이 평가되고 있는데, 하루키 본인은 자신의 소설이 어디까지나 일본을 무대로 일본어로 쓴 "일본 문학"이며 무국적적인 문학을 지향하는 것은 아니라고 밝힌다.
덧붙여서 하루키가 즐겨 사용하는 모티프는 "연인이나 아내, 친구의 실종"으로, 장단편을 막론하고 거듭 쓰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