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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사상최대의 작전 ]
이 영화는 1962년 20세기 폭스사가 제작하고, 영국의 켄 아나킨, 미국의 데릴 F 자눅, 앤드류 마턴, 제드 오스왈드, 독일의 베른하르트 비키가 공동으로 감독했다.(사진, 오마하 해변을 향하는 상륙정)
존 웨인, 로버트 미첨, 헨리 폰다, 리처드 버튼, 숀 코네리 등의 대배우들을 비롯해서 43명의 국제적인 배우들이 출연하였다. 미국 자본으로 제작된 영화이지만, 출연진은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에 걸쳐있으며, 이들 배우들은 각자 출신국의 배역을 맡았다. 즉, 미국 배우는 미국 측 인물을, 독일 배우는 독일 측 인물을 맡은 식이었다. 감독 또한 미국, 영국, 독일 감독이 자국 장면을 담당하여 나누어서 촬영했다.
폭스사를 세운 전설적인 프로듀서인 데릴 F 자눅이 총 제작을 맡아 그의 집념과 능력으로 완성한 대작이었다. 제작 당시 <클레오파트라> 다음으로 많은 제작비가 들어 폭스사가 휘청거릴 정도였지만 다행히 <틀레오파트라>와는 달리 흥행과 비평 면에서 좋은 결과를 낳았다. 우리나라에서는 1965년 대한극장을 비롯해서 전국 6개 도시에서 절찬리에 상영되었다.영화는 당시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종군기자였던 아일랜드 출신의 코넬리어스 라이언이 쓴 동명의 다큐멘터리 소설 <가장 긴 날, The Longest Day>을 원작으로 해서 만들었다.
로메인 게리 등이 각색하였고 저자인 라이언도 이 작업에 참여하기도 했다. '가장 긴 날'이라는 제목은 연합군의 유럽 침공 작전에 대비하던 독일군의 롬멜 원수가 상륙 개시 24시간이 승패를 좌우할 것이라고 예상하면서(사진, 캉에서 교량확보를 위해 전투중인 영국군 공수부대)
그 날이 연합군과 독일군 모두에게 가장 긴 날이 될 것이라고 말한 데서 따온 것이다.
이 영화는 당시로서는 엄청난 제작비인 1,200만 달러를 투입, 부지기수의 액스트라들과 항공기, 선박을 동원하면서 만들어졌다. 그야말로 연합군의 사상최대의 상륙작전을 재현했는데 전쟁 세미 다큐멘터리 영화의 원조라고도 일컬어진다. 방대한 스케일에 걸맞게 당대의 유명 배우들이 다수 등장하지만 이 영화에서 배우들이 차지하는 몫은 크지 않다. 이 영화의 진정한 주인공은 상륙작전 자체인 것이다. 영화는 작전이 펼쳐진 처음 몇 시간을 재현하는 데 주력하였다. 실제 격전지에서 열 달 동안에 걸쳐 촬영했다.
전반적인 음악은 <아라비아의 로렌스>, <닥터 지바고> 등으로 유명한 영화음악의 거장 모리스 자르가 맡았다. 가장 인상적인 주제곡은 가수 폴 앵커가 작곡했고 직접 부르기도 했으며 영화에도 잠깐 비치기도 했다.(사진, 오마하 해변에서 전투를 지휘하는 코터 준장, 로버트 미첨이 역을 맡았다)
흑백으로 제작되었으나, 노르망디 상륙작전 50주년을 기념하여 미국과 프랑스가 공동으로 1,200만 달러를 들여 6개월이 넘는 작업 끝에 컬러로 복원하였다. 1963년 제35회 아카데미상에서 흑백 촬영상과 특수효과상을 받았으며, 골든글로브상 흑백 촬영상을 받았다.
제2차 대전 당시 병역을 미필했다고 천하가 다 아는 존 웨인은 엔딩 크레딧에 자신의 이름을 가장 먼저 올려 줄 것을 제작진에게 요구했다가 비웃음만 샀다. 실제 그의 이름은 맨 마지막에 나온다. 그래서 그랬는지 존 웨인이 연기한 공수부대 연대장인 벤자민 밴더부트 중령은 존 웨인이 자신을 연기하는 것을 싫어했다고 한다. 영화에서 유타해안 상륙작전을 지휘한 *시어도어 루스벨트 3세(준장) 역의 헨리 폰다와 오마하 해안 상륙작전을 지휘한 노먼 코터(준장) 역의 로버트 미첨은 모두 실제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었다.
* 시어도어 루스벨트 3세
시어도어 루스벨트 미국 제26대 대통령의 장남이다. 양차 세계대전에 모두 참전했다. 해군성 차관, 필리핀과 푸에르토리코 총독을 역임한 거물급 정치가였다. 2차 세계대전에 대령으로 참전, 북아프리카와 시칠리아 전투를 거치며 준장으로 진급했다. 상륙 33일 만에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말기에 접어들면서 연합군은 독일과의 전쟁을 종결시키기 위하여 북프랑스의 해안가인 노르망디에 극비의 상륙작전을 계획한다. 연합군의 침공 작전에 대비하는 독일군은(사진, 상륙이 성공한 후 다음날)
노르망디 지역의 경계를 강화하여 검문검색을 철저히 하는 한편 전력을 해안에 집중시킨다. 독일군의 경계 태세를 혼란에 빠뜨리기 위한 레지스탕트의 활약도 시작된다. 마침내 1944년 6월 6일 새벽에 연합군의 육해공군 전력을 총동원한 사상 최대 규모의 상륙작전이 펼쳐지고 길고 긴 하루가 시작된다.
[ 상륙작전 - Overload(대군주) 작전 ]
인류 역사를 돌아보아도 그 유례가 없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노르망디 상륙작전 계획인 ‘오버로드’는 1943년 4월로 런던의 세인트 제임스 광장의 육군성의 작은 부속건물 노포크 하우스에서 태어났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일명 전격전이라고 부르는 독일의 전광석화 같은 침공이 서부전선을 유린하던 1940년 5월, 독일군들에 의해 지리멸렬 쫓기던 영국군과 연합군은 덩케르크로부터 철수한 그날부터 “우리는 반드시 유럽대륙으로 돌아간다.”라는 각오를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이후 프레데릭 모건 중장을 우두머리로 하는 영미 합동참모본부인 ‘코삭(COSSAC)’이 설치되면서 유럽침공 계획은 점차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시칠리아 상륙 작전도 입안한 경험이 있는 모건은 유럽대륙 상륙계획이야말로 결코
간단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단숨에 알아차렸다. 이것은 수백만 명의 병사들과 막대한 양의 물자를 적의 필사적인 저항을 뚫고 바다 건너로 수송해야하는 지극히 험난한 작전이었다. 인류사에 전무후무한 그야말로 지상최대의 작전 계획을 수립해야하는 것이다.
모건과 그의 참모들은 1943년 한 해 동안 꼬박 이 작전을 짜는 데 매달렸다.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상륙지점과 상륙 개시일을 결정하는 것이었다. 작전의 성공을 위하여는 맨 먼저 항공기의 지원이 필수적이고 또한 아군기가 작전지역에서 활동할 수 있는 시간을 최대한 확보하려면 영국에서 가급적 가까워야 한다. 무려 300만 명의 병력을 유럽대륙에 쏟아 넣고 나서부터가 진짜 문제였다. 지속적으로 물량을 하역할 만한 항구를 찾아내는 일도 만만치가 않았다.
아울러 상륙지점 후방에 위치한 내륙의 여건도 고려해야 한다. 일단 최초 부대가 상륙했더라도 빠른 시간 내에 내륙으로 진출해서 해안을 비워 주어야만 후속부대가 계속 상륙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자면 산지가 아닌 넓은 평원과 잘 완비된 도로망이 구비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여러 난제들을 끌어안고 고심에 고심을 거듭한 끝에 드디어 문제의 해결에 실마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프랑스의 칼레 해안과 노르망디 해안이 가장 최적의 후보로 떠오른 것이다.
둘 중에서 칼레는 근접성 등 여러 가지 면에서 노르망디 보다는 훨씬 안성맞춤의 상륙지였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독일군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그런지 이미 칼레 지역은 독일군이 건설한 대서양 방벽의 모든 구간 중에서도 가장 철통같이 방벽이 구축되어 있었다.
이리저리 고심한 끝에 결국 최종 상륙지점이 결정되었다. 9세기와 10세기부터 멀리 북쪽 스칸디나비아에서 내려 온 바이킹의 후손들이 살고 있는 땅인 노르망디 반도가 바로 그곳이었다. 상륙지점이 결정되자 작전개시일(D-데이)도 결정되어야 했다. 계절에 따라 변하는 바람과 조류의 흐름도 고려해야 하고 무엇보다도 거칠기 짝이 없는 영불 해협의 파도가 잔잔해야 한다. 아울러 항공기들이 마음껏 활동할 수 있는 화창한 날을 골라야 한다. 지난 10년간의 통계 수치로 볼 때 년 중 그런 날들은 6월의 첫째 주이고 그 중에서도 6월 5일이 가장 최적의 날짜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 기만작전 - 포티튜드Fortitude >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성공시킨 요인 중 큰 작전 중의 하나가 바로 독일군들을 끝까지 기만한 포티튜드 작전을 빼놓을 수가 없다. 상륙지점과 날짜를 결정한 모건과 참모들은 이제 곧 연합군이 유럽대륙에 침공할 것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독일군을 완전히 속여야하는 문제가 남았다. 문제의 해결은 당연히 한 가지 방법밖에 없었다.(사진, 오마하 해변에서 고전하고 있는 미군들)
즉 상륙 작전이 다른 장소에서 벌어질 것처럼 독일군을 기만하는 것이었다. 바로 이런 배경에서 ‘오버로드’ 작전이 무색할 만큼 방대한 규모의 ‘포티튜드’ 작전이 입안된다.
독일군의 첩보망은 갑자기 폭발적으로 입수되는 정보량을 처리하는데 정신을 못 차리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에서 지금까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새로운 부대가 나타났다 싶으면 곧 사라지기도 하고 그 부대의 움직임을 죽어라하고 추적해보면 영국의 동남부 해안에 떡 하니 나타나 있었다. 잉글랜드 동남부 해안이라면 바로 칼레 해안의 건너편이었다.
독일군 참모진에서는 “역시 추측대로 놈들은 칼레를 노리고 있다”라고 예측했다. 실제로 연합군이 노르망디 해안에 상륙한 후에도 한참 동안 연합군의 주력은 칼레로 본격적으로 상륙할 것으로 철썩 같이 믿고 있었다. 기만작전을 담당하고 있는 연합군 담당부서에서는 가짜 무선통화와 거짓 작전계획서의 유출과 동시에 유언비어를 마구 퍼뜨리고 독일군의 이중첩자를 이용하는 등 별별 수단을 동원하여 진실과 허위가 마구 뒤섞인 가짜 정보를 쉴사이 없이 날려보냈다.
재미있는 것은 시칠리아 전투 당시 병사의 뺨을 때렸다는 이유로 지휘권을 빼앗긴 패튼 장군을 가짜부대인 제3군의 사령관으로 임명한 것이다. 이어서 그로 하여금 영국 여기저기를 왔다갔다하게 하면서 유럽 대륙 침공군을 이끄는 최고 사령관으로 계속 연막작전을 폈다. 패튼을 연합군 최고 장군으로 알고 있는 독일군은 당연히 이를 곧이곧대로 믿었다.(사진, 독일군 벙커)
독일군은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완료된 뒤에도 패튼이 이끄는 제3군이 칼레로 상륙하는 것으로 계속 오인하고 있었다. 실제 제3군은 패튼의 지휘 하에 상륙작전 한 달이 경과한 후에 노르망디 반도 아래쪽에서 질풍처럼 독일군을 유린하기 시작한다.
연합군의 이런 기만작전은 그럴 듯 하게 보이기 위해 실제로 상당한 인원과 물자를 동원하기도 했다. 영국 동남부 지역에는 각종 물자가 산더미처럼 쌓였고 해안에는 각종 선박들이 가득히 메워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 모두는 빈 짐짝들이었고 항구의 가득찬 배들도 노후하기 짝이 없는 어선들 투성이었는데 독일군 스파이들은 이에 깜박 속아 넘어간 것이다.
1944년 5월의 마지막 주. 독일군 참모부의 정세 분석 보고서는 이렇게 판단을 내리고 있었다. "한주일 동안 이상한 징후가 보이지 않음. 연합군의 포티튜드 작전은 7월 중에 칼레를 목표로 반드시 실시될 것으로 판단됨." 독일군은 연합군에 기만작전에 완전히 놀아나고 있었다.
< 작전 개시 >
5월 13일까지 18만 5천명의 대병력이 승선을 완료했다. 이제 상륙날짜만 기다리면 되었다. 그런데 연합군 지휘부는 아주 난감한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기상관측에 의하면 영불해협은 6월 17일까지 비바람을 동반한 강풍이 불고 하늘은 짙은 구름에 휩싸일 것으로 예보했다. 구름도 해상 150m 정도로 낮게 깔릴 예정이어서
이런 악천후에는 정찰 비행은 물론 공수 낙하는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상륙작전에 필수적인 함포사격과 공중폭격도 불가능할 것이 뻔했다.
그리고 상륙작전 날짜를 며칠 연기한다면 이 작전의 성공은 기약을 할 수가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맨 먼저 기밀의 누설을 보장할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또한 간조시의 수위, 달빛, 구름 등 제반 날씨 여건도 장담할 수 없게 된다. 더구나 이미 승선한 장병들이 현재 세찬 파도와 뱃멀미에 시달리고 있지만 당장 하선시킬 수도 없다. 그들이 떠나고 난 빈 막사에는 이미 제2진으로 출발할 병사들이 꽉 차 있었고 또한 이미 배에 실은 막대한 양의 장비와 물자를 모두 제자리에 되돌려 놓는다는 것은 실로 지난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연합군 총사령관 아이젠하워의 입술이 바짝바짝 마르기 시작했다. 6월 4일 밤 9시, 기상관측의 총책임자인 스태그 대령이 연합군 수뇌들이 앉아있는 회의실로 들어왔다.(사진, 공수부대원들을 격려하고 있는 아이젠하워 총사령관)
그리고 희망적인 한마디를 던졌다. 6월 5일부터 6월 6일까지의 악천후 가운데 잠깐이나마 맑은 날씨가 반짝 선보일 것이라는 것이었다. 회의실은 한동안 침묵에 빠졌다.
설사 잠시의 순간을 이용해서 병력 1진을 노르망디 해안에 상륙시킨다 하더라도 악천후가 다시 지속된다면 후속부대를 계속 투입할 수 없을 것이 확실한 것이다. 그러면 최초의 상륙부대는 해안에서 통째로 독일군의 밥이 되어버릴 것이라는 생각에 모두들 섬찟했기 때문이었다.(사진, 전투중인 셔먼 전차)
그러나 이 상태에서 또 미루면 7월까지는 공격이 어려울 것이고, 그때가 되면 독일군의 방어 태세는 더욱 경고해질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하지만 무리한 상륙은 18만 여명의 병력을 개죽음 시킬 수도 있는 중요한 사안이었다. 일단 회의를 연기한 뒤 6월 5일 새벽 4시 15분 다시 회의가 개최되었다. 모두들 스태그 대령의 입술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지난밤에는 큰 변화는 없었습니다. 단지 영국과 해협 전역을 덮고 있던 폭풍우가 멈출 것이 거의 확실해졌습니다. 모두의 얼굴에 안도의 미소가 번져 나갔다. 잠시 있다가 아이젠하워 총사령관이 단호한 목소리로 외쳤다. "오케이! 작전 개시, 렛츠 고우!!"
[ 상륙작전 경과 ]
1944년 6월 초, 롬멜 원수가 이끄는 서부 전선의 독일군은 대서양 방벽 건설 공사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제공권과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는 연합군이 곧 전면적인 상륙에 임할 것은 삼척동자라도 아는 사실이었다. 롬멜은 강고한 해안 방어 체계를 완성하여 연합군의 상륙을 첫 24시간 내에 내륙이 아닌 해안에서 반드시 막아야만 한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연합군의 상륙이 곧 도래할 것이라는 증거는 도처에서 나타났다. 독일군 정보부는 연합군이 프랑스 내의 레지스탕스들에게 전하는 암호문을 탐지, 24시간 내에 연합군의 상륙이 에상된다고 상부에 보고한다.(사진, 글라이더기에 탑승중인 병사들)
하지만 오래전부터 비슷한 내용의 암호가 거듭 전해지는데다가 시속 50km의 강풍을 동반한 악천후 때문에 독일군 지휘부는 그 정보를 무시해버렸다.
대서양 방벽 건설 공사를 독려하던 롬멜 원수조차도 아내의 생일을 축하한다고 선물을 사 들고 6월 5일 독일 본토로 휴가를 떠나버릴 정도였다. 하지만 연합군 사령관인 아이젠하워 장군은 6월 6일 아침에 잠시 기상이 쾌청해질 거라는 기상관측대의 보고에 따라 역사적인 상륙 명령을 내린다.
주력부대의 상륙에 앞서 적 후방을 교란하기 위해 미군 제82공수사단과 제101공수사단, 영국군 제6공수사단이 한발 앞서 프랑스로 출격하고 아울러 독일군을 혼란에 빠뜨리기 위해 자동으로 총을 쏘아대는 가짜 공수부대 인형 ‘루퍼트’까지 강하시킬 예정이었다.
이윽고 6일 0시 11분 영국군 공수부대는 독일군과의 격전 끝에 캉 다리를 점령하고 생 메르 에글리스에도 미군 공수부대가 강하하고, 잇달아 1시 7분에는 캉에도 가짜 공수부대가 투입되었다. 한편 노르망디 인근지역에서 암약하던 레지스탕스들도 전화선과 철도를 폭파하는 등 일제히 활동을 개시했다. 상황이 이렇게 긴급히 돌아가고 있었지만 독일군은 연합군의 정확한 상륙 지점이 정확히 어디인지 알지 못한 채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그들은 여전히 칼레에 연합군이 침공할 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고 노르망디에 상륙하리라고는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것이다.
이 때 독일군 최고 통수권자인 히틀러 총통은 깊은 잠 속에 빠져있었다.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어도 천하의 독재자인 그의 잠을 깨울 인물은 아무도 없었다. 아무튼 히틀러의 명령이 있어야만 출격할 수 있는 후방에 대기하고 있던 독일군 전차들은 발을 동동 구르면서 모조리 발이 묶여있었다.
마침내 6일 새벽 6시 32분, 드디어 오마하 해안에 미군이 상륙하는 것을 시작으로 유타, 골드, 주노, 스워드 다섯 개 해안에 연합군의 상륙이 시작되었다. 예상대로 독일 지상군의 반격은 격렬했고, 특히 오마하 해안에 상륙한 미군은 괴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었다. 낮게 깔린 구름 때문에 독일군 진지에 대한 항공기들의 폭격이 여의치 않았고 함포 사격도 탄착지점을 확인하기가 어려워 효율적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다른 지역에서의 상륙은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오마하에서도 간신히 돌파구를 마련하면서 상륙작전은 성공리에 진행되었다.
연합군의 상륙을 저지할 독일 공군의 전력은 요제프 프릴러 소령과 그의 부하 조종사가 몰고 온 전투기 2대가 해안에서 벌인 기총소사뿐이었다. 노르망디 상공은 온통 연합군의 항공기 투성이이었다.(사진, 방비중인 독일군)
연합군의 맹폭격으로 후방에서 해안으로 이동하던 독일군의 증원부대는 지리멸렬한 상태에 빠졌다.
이 상륙작전으로 연합군은 다소 희생을 치렀지만 롬멜의 철통같은 대서양 방벽을 뚫고 유럽 대륙에 발을 내딛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노르망디 상륙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진 이후 연합군은 독일군의 결사적인 저항으로 간신히 노르망디 반도를 빠져나와 프랑스 내륙으로 진공을 시작한 것은 거의 두 달이 지나서 부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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