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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 5년 동안 크게 유행한 퍼스널 컬러 진단이나, 세계적인 색채전문기업 팬톤이 매해 발표하는 ‘올해의 컬러’에 쏟아지는 뜨거운 관심 등이 이를 입증한다.
그리고 올해의 컬러는 ‘클래식 블루’라고들 한다. 그래서인지 요즘 들어 유독 많은 연예인들이 파란색으로 머리를 물들이는 것 같다. 그들의 머리색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색깔은 한 해의 트렌드를 이끌며 우리 주변을 장식할 것이다. 이 ‘올해의 컬러’는 패션뿐만 아니라 인테리어나 출판 등 색깔이 개입하는 수많은 분야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처럼 색의 역할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이는 단순히 공신력 있는 기업 팬톤에서 발표한 올해의 컬러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색은 단순히 채도와 명도와 같은 수치, 혹은 시각적인 인상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수많은 의미를 갖는다. 색은 다층적인 상징체계를 품고 일정한 도상적 장치로 이용되어 왔는데, 이는 꽤나 흥미롭다.
푸른색 - 청금석에서 시작된 고귀함
먼저 올해의 컬러인 '클래식 블루'와 같은 푸른색의 대표적 의미는 '고귀함'으로, 그 색을 만들어내기 위한 화학적 과정에서 가치가 부여된 경우에 해당한다. 오래 전 푸른색 안료를 만드는 데 필요했던 청금석은 그 어떤 원료보다도 귀하고 비싼 것이었다. 그래서 중세 교회들은 화가들에게 그림을 의뢰할 때 푸른색으로는 성모 마리아만을 그리도록 지시했다. 그래서 이 시기부터 르네상스 시대까지 이어진 수많은 종교화에서 성모 마리아는 푸른색의 망토를 걸친 모습으로 등장한다.
<성모 마리아와 아이>, 두초 디 부오닌세냐, 1290-1300, 템페라, 16,5cm x 23.8cm
또한 푸른색은 이러한 안료의 희소성과 더불어 하늘이나 바다 등 무한한 자연물을 대표한다는 점에서 자연적이고 광활하며, 때로는 숭고한 색으로 인식되어 왔다. 그리고 이러한 푸른색을 즐겨 사용한 화가로는 김환기를 빼놓을 수 없다.
그가 즐겨 사용하는 특유의 푸른빛은 ‘환기블루’라 불리는 그의 트레이드마크이다. 그가 사용한 수많은 푸른색 중에서도,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나 <우주> 등에서 만나볼 수 있는 푸른 점들은 고요하고 명상적이면서도 경건하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김환기, 1962, 캔버스에 유채, 159cm × 89cm, 국립현대미술관
그중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의 제목은 시인 김광섭의 시 ‘저녁에’의 마지막 구절을 인용한 것이다. 시의 내용처럼 화폭을 가득 채우는 짙푸른 점들은 배경에 스며들어 밤하늘에 수놓인 별들처럼 저마다 반짝이는 듯하다. 이 작품은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진행중인 <광장 The Square> 2부 전시에서 만나볼 수 있다.
저렇게 많은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서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 「저녁에」, 김광섭 -
붉은색 - 피에서 비롯된 희생과 폭력
푸른색처럼 안료 그 자체의 가치가 색의 이미지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실존하는 사물의 색을 통해 의미가 생성되는 경우도 있다. 피의 색깔인 빨간색, 황금과 태양의 색깔인 노란색 등이 그러하다. 그리고 이러한 색들의 특징은 주로 사물의 속성에서 멈추지 않고 관념적 차원까지 확장된다.
그 대표격인 붉은색은 ‘피’를 떠오르게 하는 가장 강렬한 색이다. 붉은색은 피의 원천인 심장과 결부되어 정열과 사랑을 의미하거나 희생이나 폭력을 동시에 상징하기도 한다. 그래서 붉은색은 숭고한 희생과 잔인하고 선정적인 폭력을 동시에 표상하는 역설적인 색이기도 하다.
그리고 붉은색 사물과 관련된 이야기들 중에서 특히나 인상적인 것은 투우와 관련된 비화이다. 사람들은 흔히 투우사가 사용하는 붉은색이 소를 자극시킨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소는 색맹이기 때문에 색을 분간하지 못하고 천의 움직임에만 반응한다. 즉 붉은색은 관객을 더욱 흥분하게 만들기 위한 수단일 뿐, 소와는 관련이 없다.
이처럼 생기와 활력을 온몸으로 표출하는 붉은색은 식욕을 돋우고 시각적으로 우리를 자극하며 강한 인상을 남긴다. 빨간 경고판이나 주의 신호, 심판의 레드카드나 조교의 빨간 모자 등에서도 알 수 있듯이 붉은색은 그 어느 색보다도 강력한 힘을 지닌다. 그래서 붉은색은 사회주의를 대표하는 색이기도 하다.
그 시작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사회주의 운동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들이 주도한 제1차 인터내셔널은 붉은 깃발을 사회주의 노동운동의 상징으로 삼았다. 붉은색은 자본주의 사회에 반기를 들어 저항하는 혁명 정신으로 치환되었으며, 이후로 붉은색은 혁명, 좌파, 사회주의의 상징이 되었다.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 외젠 들라크루아, 1827, 캔버스에 유채, 4,9m x 3.9m, 루브르 박물관
그리고 붉은색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던 프랑스의 낭만주의 화가 들라크루아는 색채화가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능수능란하게 다채로운 색상들을 활용했다. 그의 화풍이 보는 이의 인상에 깊이 각인되는 이유는 거칠게 휘몰아치는 필치와 더불어 강렬한 색감이 화면의 역동성을 만들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짙은 주황에 가까운 붉은색은 들라크루아의 작품 속에서 주인공이 되기도 한다.
이것이 잘 드러나는 그의 대표작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은 전쟁에서 참패한 앗시리아의 왕 사르다나팔루스가 자살하기 전 자신의 애첩과 말, 병사 등을 모두 죽이는 고대 전설 속 한 장면을 주제로 한 작품이다. 고대 오리엔트를 시대적 배경으로 삼는 만큼, 당시 유럽인들이 동양에 대해 가졌을 법한 스테레오타입이 짙게 드러나는 작품이기도 하다. 당시 유럽 화가들은 오리엔트 지역을 야만적이며 음란한 문화가 만연한 낭만적인 이국으로 상상하였다. 그래서 이 작품 속에서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는 짙은 붉은빛은 선정적이고 폭력적인 장면과 어우러져 그림 속 분위기를 주도적으로 이끌어 내고 있다.
노란색 - 황금 혹은 모멸
그렇다면 노란색은 어떤 의미로 작용해 왔을까? 노란색은 황금이나 빛에 결부되어 부와 지위를 상징하는 한편 ‘황색언론’이나 겁쟁이를 뜻하는 속어 ‘yellow’ 등처럼 지극히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기도 했다. 노란색은 이렇게 상반된 의미를 동시에 갖는다는 점에서는 붉은색과 흡사하다. 그러나 붉은색이 갖는 폭력과 희생은 공통적으로 ‘피’의 속성에서 유래된 반면 노란색의 부정적 의미들은 노란색을 띈 사물과는 관련이 없다.
나치가 유대인들에게 달고 다니기를 강요했던 '다윗의 별'
그렇다면 왜 노란색은 억울하게도 부정적 의미를 뒤집어쓰게 되었을까. 독일의 사회심리학자 에바 헬러는 저서 <색의 유혹>에서 노란색은 어두울 때나 밝을 때나 가장 눈에 잘 띄는 색이기 때문에 경고의 의미를 담는다고 밝혔다.
이는 스쿨버스의 노란색과 같이 긍정적인 의도로 사용될 수도 있지만, 역사 속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15세기와 16세기에 걸쳐 유럽 사회에서는 창녀들에게 노란 두건이나 겉옷, 신발끈 등을 착용하도록 규제했다. 그리고 널리 알려져 있듯이, 나치는 유대인들에게 노란 ‘다윗의 별’을 달고 다니도록 강제했다.
<노예선>, 윌리엄 터너, 1840, 캔버스에 유채, 122.6cm x 90.8cm, 보스턴미술관
그리고 노란색을 즐겨 사용했던 화가로는 반 고흐를 빼놓을 수 없지만 영국의 대표적인 풍경화가 윌리엄 터너 역시 독특한 방식으로 노란색을 이용했다. 터너는 빛과 어둠의 대립 속에서 색채가 발현된다는 괴테의 색채론에 크게 영향을 받아 찰나의 순간에 포착되는 빛의 색채에 주목하였는데, 그중에서도 그가 중시했던 것은 노란색이었다.
그는 노란색이야말로 빛의 본질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가 즐겨 사용한 노란 광선이 잘 드러나는 작품은 <노예선>이다. 그림 속의 배는 아프리카와 미국을 중개하며 노예 사업을 벌였던 영국의 노예선으로, 병든 노예들은 보험금을 이유로 바닷속에 버려지고 있다.
이 그림이 그려진 시기는 이미 영국에서 노예제도가 폐지된 1833년이 지난 뒤였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러한 그림을 그린 이유는, 여전히 노예 매매 제도가 성행하고 있는 현실을 비판하기 위함이었다. 그래서인지 그의 작품 속 태양 주변을 휘돌고 있는 짙은 노란색은 노란색의 양면성을 담고 있는 듯하다. 터너의 노란색은 태양의 무한한 광휘를 표현함과 동시에 자연의 절대적인 힘을 빌려 당대 사회에 만연했던 반인륜적 행위들을 향해 경고의 메시지를 던지는 듯하다.
모든 색은 저마다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이는 자칫 각 색들이 정형화된 방향으로만 해석될 우려를 낳기도 하지만, 심리학적이고 시각적인 여러 요소를 고려했을 때 여러 색들이 각자만의 독특한 무언가를 표출하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다. 그리고 어떤 색이 자신의 개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지에 대한 관심이 점차 커져 가는 만큼, 더욱 다양한 색들이 우리와 마주하며 더 큰 시각적 즐거움과 풍부한 감정을 선사하기를 바란다.
유수현 에디터
자료출처: 허브닷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