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056
3월6일 [사순 제1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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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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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a54xk3boEK0
(이성구 사도요한 신부님 집전)
**서울주보**
http://pf.kakao.com/_xhGxjBxb/93439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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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세상 유혹 앞에 설 때마다 예수께서도 유혹을 받으셨음을 기억합시다!>
심한 식중독에 걸려 호되게 고생하던 때가 기억납니다.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꼬박 일주일간 링거주사에만 의지한 채 단식을 했습니다. 담당 간호사님은 매정하게도 제 침대 앞쪽에 '절대 금식'이란 팻말을 달아놓았지요.
그리고 매서운 눈초리로 제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기 시작했습니다. 한 이틀간은 그런대로 견딜 만했습니다만 사흘이 지나면서 정말 미치는 줄 알았습니다. 매끼 식사 시간은 제게 그야말로 지옥이었습니다.
옆 병상에 누워있는 환자분이 병원밥 투정을 하면서 딱 한 숟가락만 뜬 식판을 물리며 '그냥 내어가라' 할 때 저도 모르게 제 입에서는 '저런저런!'하는 탄식이 흘러나왔습니다. 배가 출출해지는 9시 뉴스시간 때마다 통닭이다, 족발이다 몰래 야식을 즐기는 '날라리 환자'들이 얼마나 얄미웠는지 모릅니다. 어찌 그리도 야속한 사람들이 다 있던지요.
당시 제 머릿속은 온통 평소 제가 좋아하던 음식으로 가득 찼습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떡라면, 푹 고아서 얼큰한 우럭찌개, 매콤한 갈치조림, 그리고 소주 한 잔. 닷새가 지나가면서 헛것이 다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누군가 가져온 꽃바구니는 싱싱한 사과가 가득 담긴 과일바구니로 보이면서 입에 침이 다 돌았습니다. 창밖에 흘러가는 뭉게구름을 보니 달콤한 솜사탕 생각이 나더군요.
인간 생리구조상 하루 세끼 식사는 지극히 기본적인 것입니다. 단식은 인간이 지니고 있는 가장 기본적 욕구인 식욕에 통제를 가함으로써 나름대로 의미를 추구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다이어트나 건강진단, 질병 치료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단식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단식은 하나의 목적성을 지닙니다. 사순시기 동안 그리스도 신자들은 작은 몸짓이지만 단식을 통해서 예수님 수난에 상징적으로 참여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은 40일간 단식해 오신 예수님께서 악마로부터 유혹받으시는 장면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신성을 지니신 하느님이기도 하셨지만, 다른 한편으로 우리와 똑같은 육체 조건을 지니셨던 인간이셨습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느끼는 고통과 배고픔을 똑같이 겪으셨던 참 인간이셨습니다.
휴가지에서 40일은 눈깜짝할 사이에 지나가겠지만, 단식하면서 보내는 40일은 정말 지옥 같은 나날입니다. 허기가 져서 거의 탈진상태에 도달한 예수님 앞에 악마가 나타납니다.
갖은 감언이설과 달콤한 유혹거리를 미끼로 내세우며 예수님을 현혹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모든 유혹들을 의연히 이겨내십니다. 허탈해진 악마는 힘을 잃고 떠나갑니다.
예수님께서 악마의 유혹 앞에 끝까지 굴하지 않을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일까 묵상해봅니다. 아버지께 대한 항구한 충실성과 철저한 순명, 아버지를 향한 지속적 신뢰와 끊임없는 자아포기, 그 결과가 유혹의 극복이란 결실을 가져왔으리라 저는 믿습니다.
우리는 부족하지만 아버지와 연결된 끈을 끝까지 놓지 않음으로 인해 우리는 강합니다. 우리는 나약하지만 아버지 현존 안에 뿌리내림으로 인해 우리는 강합니다. 세상 유혹 앞에 설 때마다 예수께서도 유혹을 받으셨음을 기억합시다. 아버지께 대한 간절한 기도를 통해 그 모든 유혹들을 물리치셨음을 기억합시다.
우리가 걸어가는, 사순절이라는 광야 여정에는 악마에게서 유혹도 많겠지만 그 여정이 든든하신 우리 주님께서 언제나 동행하고 계심을 기억하는 은혜로운 나날이 되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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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묵상 동영상)
https://youtu.be/pZ7vJVdZIK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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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이지 못하면 사랑이 아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40일 동안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시는 내용입니다. 정말 잘 알아두어야 할 것은 예수님을 광야에서 악마에게 유혹을 당하도록 이끄신 분은 ‘성령’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가득 차 요르단강에서 돌아오셨다. 그리고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시어, 사십 일 동안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루카 4,1-2)
다시 말해 성령께서 오지 않으시면 누구도 광야에 나가지도 않고 유혹과 싸우지도 않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유혹과 싸우게 만드시어 주님께 더 합당한 사람으로 만드십니다. 유혹과 싸우면 그 사람 안에는 반드시 성령께서 함께하십니다. 자신과 싸운다는 말은 자아의 세속-육신-마귀와 싸운다는 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귀가 세상을 섬기라고 유혹한 것이 세속이요, 돌을 빵으로 만들어 보라고 한 것이 육신이며, 성전에서 뛰어내려 보라고 한 것이 마귀입니다. 세속-육신-마귀와 싸우고 있음이 성령께서 함께하신다는 뜻입니다. 성령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반드시 죽입니다. 죽이지 못하면 사랑이 아닙니다.
JTBC, ‘내가 키운다’에서 ‘ADHD 솔루션 중단 위기?! - 다시 시작되는 우경이와의 전쟁’이 방영되었습니다. 이지현 씨의 아들 우경이는 정말 숨이 막힐 정도로 엄마를 몰아붙입니다. 전문가들이 여러 해결방법을 알려주고 지현 씨도 노력했지만 잘 먹히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그는 엄마 앞에서 집을 나가겠다고 하고 죽어버리겠다고 합니다. 이에 이도 저도 안 되는 상황 때문에 지현 씨는 주저앉아 눈물을 흘립니다.
사랑은 분명 상대를 죽이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니 지현 씨 사랑은 우경이를 죽이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모르나 분명 지현 씨가 하는 것은 참으로 사랑이 아닙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성령을 부를 때, ‘사랑’(Amore-Persona)이신 한 인격체로 규정합니다. 성령께서 사랑이시기에 사랑과 반대되는 생존 욕구와 싸움을 일으킵니다. 그리고 결국엔 죽입니다. 가리옷 유다처럼 다 성장하여 본인 의지로 성령을 거부하면 모를까 아이들은 100% 부모님 사랑이 참사랑이라면 반드시 자아가 죽습니다. 이것이 사랑의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아이는 엄마가 사랑이 아닌 집착을 하고 있음을 알고 그것을 이용하여 자신이 얻고 싶은 것을 얻어내려 떼를 쓰는 것입니다.
영화 ‘몽골’(2007)을 보니 세계 절반을 차지했던 칭기즈 칸이 그냥 싸움만 할 줄 아는 사람이 아니라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람을 지키기 위해 자신과 싸움으로 그토록 강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여러 부족의 세력 다툼이 끊이지 않았던 12세기 몽골. 훗날 대륙의 지배자로 불리게 될 대 몽골 제국의 창시자, 테무진이 태어납니다. 테무진의 아버지는 자신의 부족을 지키기 위해 아들 테무진을 경쟁 부족과 혼인시키러 갑니다. 그런데 잠깐 들린 곳에서 테무진은 보르테라는 여자아이에게 한눈에 반해버립니다. 그러나 그 부족은 큰 부족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테무진의 선택을 존중하여 돌아갑니다. 그러다 결국 아버지가 경쟁 부족에 의해 살해당합니다.
어쩌면 자신의 잘못된 선택으로 아버지를 잃은 테무진은 그 탓을 자신의 마음을 빼앗은 보르테에게 돌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테무진은 그럴수록 더욱 보르테를 사랑하였습니다. 아버지를 잃고 집으로 돌아온 테무진은 자기 부족 이인자의 반란으로 자신의 목숨까지 위태롭게 됩니다. 수레바퀴보다 키가 작은 아이는 죽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다행히 어린 테무진은 살아남게 됩니다. 그러나 항상 쫓겨 다니며 조금씩 성장합니다. 이때 테무진을 도와준 것은 이웃 족장 아들 쟈무카였습니다. 그리하여 테무진은 쟈무카와 의형제를 맺습니다.
쟈무카 덕분으로 무사히 어른으로 성장한 테무진은 어렸을 때 결혼을 약속한 보르테를 찾아가 혼인을 청합니다. 하지만 복수의 씨를 없애려는 자신의 아버지를 배신한 이인자에게 보르테를 납치당합니다. 보르테는 화살에 맞은 테무진을 살리기 위해 자신이 대신 납치당한 것입니다.
테무진은 자신의 의형제이자 이젠 어엿한 한 부족의 수장이 된 쟈무카를 찾아가서 도움을 청합니다. 쟈무카는 한 여자 때문에 전쟁해 달라는 테무진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거의 조롱을 합니다. 그리고 보르테가 아니면 안 된다는 테무진을 도와주기로 합니다. 테무진은 보르테를 위해 자기를 낮추는 수모를 감수합니다. 전쟁에서 승리하여 보르테를 찾은 테무진은 보르테가 원수의 아이를 배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테무진은 그동안의 보르테의 고통을 생각하고 원수의 아이도 자신의 아이로 받아들입니다. 원수의 아이를 키워야 하는 테무진이지만 그냥 보르테가 자신의 아내가 된다는 것만으로 만족합니다.
쟈무카는 테무진을 이인자로 임명하려 합니다. 그러나 보르테는 한 우리에 두 이리가 살 수 없다고 테무진을 설득합니다. 테무진은 쟈무카에게서 벗어나 자신의 세를 늘립니다. 이젠 쟈무카와 원수지간이 됩니다. 테무진은 지금까지 자신을 돌봐준 의형제와 갈라지게 했지만 여전히 보르테를 사랑합니다. 쟈무카도 점점 세력이 커지는 테무진을 그대로 놓아둘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전쟁을 일으켜 테무진을 생포합니다. 테무진은 자신이 잡히는 대신 보르테와 가족들을 피신시켰습니다. 테무진에게 영예로운 죽음을 선사할 수 없었던 쟈무카는 테무진을 누구도 찾기 힘든 아주 먼 곳의 노예로 팔아버립니다.
감옥에 갇힌 테무진이 미래에 세상을 통치할 인물이 될 것을 알아본 한 스님이 있었습니다. 테무진은 그 스님에게 보르테를 찾아가게 합니다. 멀리 달려온 스님은 보르테에게 테무진이 살아있음을 알리고 지쳐 죽습니다. 한 여자가 아이를 데리고 그 먼 길을 혼자 가는 것은 불가능해 보입니다. 이에 보르테는 테무진이 살아있는 곳으로 가는 상인 대열에 끼여 그들에게 몸을 팝니다. 그러다 보르테는 또 테무진의 아이가 아닌 상인의 아이를 낳습니다. 테무진은 보르테의 기략 덕분으로 감옥에서 탈출합니다. 그리고 상인의 아이를 보며 보르테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생각합니다. 보르테도 테무진 때문에 순결을 잃고 남의 아이를 여러 차례 낳아야 했지만 불평하지 않습니다.
마지막 몽골의 통일을 두고 이제 테무진은 쟈무카와 격돌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여전히 쟈무카의 군대가 더 강력하였습니다. 그러나 때마침 천둥과 번개가 쳤습니다. 몽골인들은 번개를 무서워하여 번개가 치면 땅에 주저앉습니다. 더는 물러설 곳이 없었던 테무진은 덕분에 땅에 웅크린 쟈무카의 군대를 일망타진합니다. 그렇게 몽골을 통일시키고 이제 세상을 정복하는 칭기즈 칸이 됩니다. 그는 끝까지 보르테를 존중했고 가장 사랑하고 아꼈으며 그녀의 조언을 귀담아들었다고 합니다.
사랑은 이토록 자신의 모든 것을 잃게 만듭니다. 우리 안에 들어오신 성령께서도 그러하십니다. 성령은 “가난해져도, 먹을 것이 없어도, 멸시를 당해도 주님을 사랑할 수 있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사순 때 이 연습을 하는 것입니다. 내 모든 것을 잃어도 상대의 존재만으로 행복할 수 있어야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17살 고등학생이 된 홍원기는 소아조로증을 앓고 있습니다. 국내에 유일한 프로제리아라는 이 조로증은 어린이에게 조기 노화 현상이 발생하는 유전질환입니다. 아빠는 강연과 글로 돈을 벌었는데, 코로나로 이것이 잘 안 돼서 “원기야, 아빠 이제 뭐 하지?”라고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원기는 아빠에게 “오늘도 최고의 하루를 사는 거야. 한 번뿐인 인생 후회하지 않도록”이라고 말해줍니다.
원기의 시간은 남들보다 7배나 빠르게 흐릅니다. 그러나 지금 나에게 없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만으로 ‘최고의 하루를 살겠다’라고 말하는 원기가 참 대단해 보입니다. 그리고 사순을 지내는 의미가 원기처럼 주님만 있으면 상황이 어떻든 오늘 하루를 최고로 행복하게 보낼 수 있다는 믿음을 키우는 것임을 되새기게 합니다. 그의 부모가 준 사랑은 분명 원기의 자아를 죽였기 때문에 진짜입니다.
하느님은 사탄을 시켜 의로운 욥의 재산, 자녀, 자신의 건강과 명예까지 다 빼앗으십니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게 하십니다. “벌거벗고 세상에 태어난 몸, 알몸으로 돌아가리라. 주께서 주셨던 것, 주께서 도로 가져가시니 다만 주님의 이름을 찬양할지라.”(욥 1,20)
우리 안에 들어오신 성령은 돈이 없어도, 먹을 게 없어도, 멸시받아도 최고로 행복한 하루를 살 수 있음을 매일 우리에게 일깨워주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창조해주신 분을 향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유혹의 궁극적인 목적은 불만으로 내일을 희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지금, 이 순간 충분히 감사하고 행복할 수 있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기도, 자선, 단식하며 고통을 받는 것이 사순이 아닌, 그런 것을 통해 고통 가운데서도 행복할 수 있는 훈련하는 것이 사순입니다. 성령은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 우리 자아를 죽이는 하느님이 보내신 불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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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3월6일 [사순 제1주일]
우리 교회 안에 파스카 축일보다 더 중요한 의미를 지닌 날은 없다. 파스카 축일이야말로 다른 모든 축일을 거룩하게 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승리와 구원의 신비를 드러내는 파스카 축일의 신비에 합당하게 참여하기 위하여 40일간을 준비한다는 것은 당연하다. 즉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에 충만히 참여하는 데 필요한 기간으로 사순절을 살고 있다. 오늘의 성서 대목들은 이 파스카라고 하는 목적지를 향해 가는, 피곤하지만 기쁨에 차 있는 우리 여정의 의미와 방향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내용을 내포하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께서 마련해주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신명 26,9)에서 수확한 첫 결실을 봉헌하면서 하느님께 감격에 찬 신앙고백을 하고 있다. 그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하느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다. 그들은 첫 결실을 바치면서 자신들을 구원하신 역사를 고백하고 있다.(참조: 신명 26,5-9)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들어가기 위해 오랫동안 시험과 단련을 받았다. 우리도 약속의 땅인 파스카의 영광에 참여하기까지는 많은 어려움을 이기고 거기에 도착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이 사순절을 지내는 의미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파스카의 신비는 약속의 땅보다 더 의미가 깊다.
복음: 루카 4,1-13: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신 예수
오늘 복음을 통해 우리는 사순절의 의미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오늘 복음은 단순히 유혹의 내용이 아니라 이 사순절을 통하여 우리의 정신이 단련되고 또 여러 가지 사건들을 통하여 하느님의 뜻에 온전히 따르게 하고 있다. 복음을 체험 중심으로 보면 도움이 될 것이다.
첫째, 오늘 복음에 나타나는 유혹은 예수님의 수난까지 계속된다. 즉 예수님의 전 생애에 걸쳐 계속되는 유혹이다. 즉 예수께서는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시어, 사십 일 동안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1-2절) 하고 있고, “악마는 모든 유혹을 끝내고 다음 기회를 노리며 그분에게서 물러갔다.”(13절) 그 ‘다음 기회’란 ‘수난의 때’이다. 그 악마는 유다의 배반과(루카 22,3) 예수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폭력으로 나타난다.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둠이 권세를 떨칠 때다.”(루카 22,53)라고 당신을 잡으러 온 사람들에게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둘째, 이 유혹은 예수께서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선포한(루카 3,22) 세례 후에 나타난다. 사탄은 아주 고도의 수법으로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사명을 세속적 권세와 명예와 영광에 결부시켜 세속주의적인 ‘메시아’로 만들려고 한다. 사탄은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주장하면서 유혹을 한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더러 빵이 되라고 해 보시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여기에서 밑으로 몸을 던져 보시오.”(3.9절)
이러한 유혹은 계속 예수님께 그분의 공생활 중에도 나타났던 것이었다. 군중들(14,15; 19,11)과 고향 사람들(4,23) 그리고 사도들(10,20)로부터도 나타났다. 십자가 밑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 자가 다른 이들을 구원하였으니, 정말 하느님의 메시아, 선택된 이라면 자신도 구원해 보라지.”(23,35) 사탄의 말을 그대로 반복하는 것 같다. 이 유혹은 바로 예수께 하느님의 뜻에 맞는 메시아로서보다도 인간들이 바라고 원하는 그런 메시아가 되라는 무서운 유혹이다. 즉 현세적 메시아가 되라는 유혹이다. 이것이 또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을 동요시키는 유혹이다. 우리 신앙인들은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이 보여주신 것을 통해 원하시는 것과는 달리, 즉 하느님의 뜻보다는 다른 사람들의 기대나 눈치에 자신을 맞추라는 유혹이다.
이것이 예수님께는 성공하지 못하고 우리에게는 성공하는 영원한 유혹이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의 표현인 ‘말씀’에 당신 자신을 완전히 일치시키고 계시기 때문에 예수님께는 성공하지 못한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는다.’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4절)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8절)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 하신 말씀이 성경에 있다.”(12절). 즉 예수님은 ‘말씀’의 식별력에 따라 행동하고 판단하신다는 명확한 의지의 표명이다. 하느님만이 우리가 받들어 모셔야 하는 유일한 주님이시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신앙이란 우리를 당신의 나라로 인도하시어 구원해주실 수 있는 그분께 도움을 청하며 의탁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는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해주신 것과 비교하여 그리스도의 구원행위를 말하고 있다. 그 구원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며 그리스도 자신과 모든 인류를 위해 죽음의 멍에까지도 없애셨다. 이제는 그 구원에 이르기 위해 그 구원을 갈망하며 하느님께 호소하여야 한다고 한다.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는 모두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로마 10,13)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이 여정도 그리고 그 도착지도 모두 하느님의 은총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볼 때, 이 사순절은 파스카와 함께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마련해 주신 은총이다. 이제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따라 우리의 삶을 변화시켜 감으로써 말씀을 실현해 가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예수님께 성공하지 못한 것처럼 하느님의 뜻보다는 사람들의 호감을 사라고 더 애쓰는(갈라 1,10) 예수님께서 공생활 전체를 통해 받으셨던 유혹을 우리도 이길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 나를 하느님의 뜻으로부터 멀리하고 인간적인 원의를 이루도록 끊임없이 나를 붙들고 늘어지는 유혹은 어떤 것인가? 그리고 나는 그것에 대해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지 살펴보고 좀 더 나 자신을 이길 수 있도록 노력하는 사순절이 되도록 사순 오늘이 되도록 하여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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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유혹>
예수님은 ‘유혹이 가득한 광야’로 우리를 초대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가 기도하면서 유혹을 물리치려고 애쓸 때, 그 광야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우리를 도와주시는 분입니다. “그분께서는 고난을 겪으시면서 유혹을 받으셨기 때문에, 유혹을 받는 이들을 도와주실 수가 있습니다."(히브 2,18)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가득 차 요르단 강에서 돌아오셨다. 그리고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시어, 사십 일 동안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그동안 아무것도 잡수시지 않아 그 기간이 끝났을 때에 시장하셨다. 그런데 악마가 그분께,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더러 빵이 되라고 해 보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는다.'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루카 4,1-4)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악마의 말 속에 숨어 있는 진짜 의도를 알 수 있습니다. 루카복음에는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는다.”라는 말씀만 기록되어 있는데, 마태오복음을 보면,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마태 4,4) 두 복음서의 기록을 합해서 생각하면, “하느님의 말씀을 버리고 빵을 선택하여라.”가 악마의 유혹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악마의 말을 겉으로만 보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증명해 보아라.”라는 유혹으로 생각할 수도 있는데, 그런 유혹이었다면 예수님께서는 “내가 나라는 것을 너에게 증명할 이유가 없다.”라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는다.”라는 말씀은, “빵도 필요하지만 하느님의 말씀이 더 필요하다.”라는 뜻입니다. 사람이 생명을 유지하려면 빵이 필요하지만, 그 생명은 지상에서의 육신의 생명일 뿐입니다. ‘영혼의 생명’을 유지하려면 하느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합니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요한 6,27ㄱ)
그래서 예수님께서 악마의 첫 번째 유혹을 물리치신 일은, 영혼보다 육신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라는 유혹을 물리치신 일입니다. <하느님의 아들로서 지니신 신적 특권을 포기하고 인간의 길을 선택하신 일이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게 되는 유혹을 단호하게 물리치는 모범을 보이신 일입니다.> 그런데 사실, 사람의 ‘몸’도 하느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부러 자기 몸을 학대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입니다. 몸이 병에 걸렸다면 치료해야 하고, 배가 고프면 먹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사람들의 ‘몸의 병’을 많이 고쳐 주셨고, 또 사람들의 배고픔을 당신이 먼저 걱정하셔서(마태 15,32)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마태 15,36-37) 그러나 ‘몸’에 대해서만 집착하지 말고 영혼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힘쓰라고 가르치셨습니다.(루카 9,24) (몸의 건강도 중요하고 필요합니다. 그러나 영혼을 잊어버릴 정도로 몸에 대해서만 집착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러자 악마는 예수님을 높은 곳으로 데리고 가서 한순간에 세계의 모든 나라를 보여 주며, 그분께 말하였다. ‘내가 저 나라들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당신에게 주겠소. 내가 받은 것이니 내가 원하는 이에게 주는 것이오. 당신이 내 앞에 경배하면 모두 당신 차지가 될 것이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루카 4,5-8)
여기서 악마의 유혹은 “나에게 경배하고 나만 섬겨라.”입니다. 세속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주겠다는 말은 ‘미끼’입니다. “내가 받은 것이니”라는 악마의 말은 거짓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어떤 것도 악마에게 주신 적이 없습니다. 따라서 “내가 원하는 이에게 주는 것이오.”라는 말과 “당신이 내 앞에 경배하면 모두 당신 차지가 될 것이오.”라는 말도 거짓말입니다. 악마의 것이 아니니 악마가 자기 마음대로 줄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세속의 권세와 영광을 차지하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혀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악마에게 경배하고 악마를 섬기는 일을 해서라도 그것을 차지하려고 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악한 방법’을 사용해서라도 갖고 싶은 것을 가지려고 하는 모습이 바로 악마를 섬기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아무것도 차지하지 못하고, 악마와 함께 멸망하게 될 뿐입니다. 사실 세속의 권세와 영광 자체가 허무한 것입니다.> 하느님께 경배하고 하느님만 섬기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게 되고,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게 됩니다.
“그러자 악마는 예수님을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운 다음, 그분께 말하였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여기에서 밑으로 몸을 던져 보시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지 않소? 그분께서는 너를 위해 당신 천사들에게 너를 보호하라고 명령하시리라. 행여 네 발이 돌에 차일세라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쳐 주리라.’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 하신 말씀이 성경에 있다." 하고 대답하셨다. 악마는 모든 유혹을 끝내고 다음 기회를 노리며 그분에게서 물러갔다."(루카 4,9-13)
여기서 악마의 유혹은 “하느님을 시험해 보아라.”입니다. 이 유혹은, “너는 정말로 하느님께서 항상 너를 보살펴 주신다는 것을 믿는가?”라는 질문이고, 많은 신앙인들이 자주 마주치는 의문이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 정말로 내 기도를 듣고 계시는가? 정말로 나를 사랑하시는가?” 끈질기고 간절하게 기도하는데도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을 때, 기도가 이루어지기는커녕 더 나쁜 상황이 되기만 할 때, 그런 의문과 의심이 생기는데, 바로 그때가 악마가 우리를 유혹하려고 노리는 때입니다. 구약성경 욥기를 보면, 모든 것을 잃은 뒤에 욥의 아내가 욥에게, “당신은 아직도 당신의 그 흠 없는 마음을 굳게 지키려 하나요? 하느님을 저주하고 죽어 버려요."(욥 2,9)라고 말하는데, 이 말은 ‘심각한 유혹’입니다. 그런데 욥은, “우리가 하느님에게서 좋은 것을 받는다면, 나쁜 것도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소?(욥 2,10)” 라고 대답합니다. 이 말은, “하느님은 나쁜 것도 주시는 분”이라는 뜻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이라면, 우리 눈에 나쁜 것으로 보인다고 해도, 그것은 나쁜 것이 아니라고 나는 믿는다.”라는 뜻입니다. 의심이 들 때에는 더 열심히 기도하고, 더 굳게 믿으려고 노력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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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그러자’라는 말을 주로 하는 사람과 ‘왜’라는 말을 주로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번 주일에 ‘인왕산에 갈까?’라고 물으면 ‘그러자’라고 대답하는 친구가 있습니다. 그 친구가 이번에는 ‘내려와서 칼국수 먹으러 갈까?’라고 물으면 ‘그러자’라고 대답하는 친구가 있습니다. 서로에 대한 신뢰가 있기에 상대방이 하는 말에 ‘그러자’라고 대답합니다. 이번 주일에 ‘미술관에 갈까?’라고 물으면 ‘왜’라고 대답하는 친구도 있습니다. ‘저녁에 중국집 갈까?’라고 물으면 ‘왜’라고 대답하는 친구도 있습니다. 이유를 설명해야 하는 친구입니다. ‘왜?’라는 말이 필요한 경우가 있습니다. 과학, 문학, 예술은 ‘왜?’라는 질문이 필요합니다. ‘그러자’라는 말이 필요한 경우가 있습니다. 지금 슬픔에 겨워하는 사람에게, 지금 고통 중에 있는 사람에게, 헤어짐의 아픔을 참고 있는 사람에게는 ‘왜?’라는 말보다는 ‘그러자’라는 위로가 필요합니다. ‘그러자’라는 ‘공감’이 필요합니다. 주님의 수난을 기억하고, 주님의 수난에 동참하는 사순시기입니다. ‘왜?’라는 질문대신 ‘그러자’라는 응답으로 주님의 수난에 함께하면 좋겠습니다.
거지 할아버지가 상자에 앉아서 구걸을 하였습니다. 30년 넘게 구걸을 하였습니다. 어느 날입니다. 한 사람이 지나가면서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저는 돈이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앉아 있는 것은 무엇인가요? 할아버지는 대답했습니다. ‘예전부터 앉아 있던 상자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지나가던 사람이 말했습니다. ‘상자 안에는 무엇이 있나요?’ 할아버지는 대답했습니다. ‘글쎄요. 잘 모릅니다.’ 지나는 사람이 말하였습니다. ‘상자 안을 열어보세요.’ 할아버지는 ‘예?’라고 대답했습니다. 한 번도 상자 안을 열어볼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할아버지는 상자 안을 열어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안에는 할아버지가 그렇게 원하던 ‘황금’이 가득 들어 있었습니다. 신앙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원합니다. 그런데 신앙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밖에서 찾으려고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율법과 계명을 통해서 얻으려고 합니다. 성공, 명예, 권력을 통해서 얻으려고 합니다. 어쩌면 우리가 원하는 영원한 생명은 우리 마음이라는 상자 안에 있는 것인지 모릅니다. 우리가 사순시기를 지내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내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을 찾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3가지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재물, 명예, 권력에 대한 유혹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유혹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물리치셨습니다. 저는 재물, 명예, 권력에 대한 유혹보다는 다른 유혹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바로 우리의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유혹들입니다.
첫 번째 제게 다가오는 ‘유혹은 다음에 하지’입니다. ‘사랑하자, 내일이 없는 것처럼’이라는 말을 마음에 담아야 하는데 저는 늘 내일을 생각하면서 오늘 꼭 해야 할 일들을 미루곤 했습니다. 유명한 사상가도 자기의 묘비명에 이렇게 적었다고 합니다. ‘너 그럴 줄 알았다.’ 매번 내일로 미루더니 오늘 땅에 묻혔다는 의미입니다. 담배를 끊겠다고 하는 것도, 평일 미사를 가겠다고 하는 것도, 부모님께 전화하겠다고 하는 것도, 사과의 문자를 하겠다고 하는 것도, 다음에 하지라는 유혹에 넘어가곤 합니다.
두 번째는 ’남들도 그렇게 하는데‘입니다. 나의 잘못과 허물을 남들에게 떠넘기는 것입니다. 저도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 앞의 차가 빨간 불인데 갔습니다. 저도 따라갔습니다. 경찰이 저만 잡았습니다. 앞의 차도 갔다고 말을 했지만, 변명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남들도 그렇게 하는데’라는 표현은 나보다 더 영적으로 뛰어난 사람을 따라갈 때 사용하면 좋을 것입니다. 저는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이태석 요한 신부님을 따라가면서 그런 표현을 해야 할 것입니다.
세 번째는 ‘나는 안 돼’라는 열등감입니다. 베드로 사도와 유다 사도는 똑같이 예수님을 배반하였습니다. 그러나 두 사도의 삶은 달랐습니다. 유다 사도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지 않았습니다. ‘나는 안 돼’라는 열등감에 사로잡혔습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나는 안 돼’라는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을 3번이나 모른다고 하였지만, 회개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회개한 베드로 사도에게 천국의 열쇠를 맡겨 주셨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지 못하는 것은 죄가 크기 때문이 아닙니다. ‘나는 안 돼’라는 열등감에 마음을 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자비로우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뉘우치기만 한다면, 우리가 돌아오기만 한다면 언제든지 우리의 허물을 용서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마음으로 믿어 의로움을 얻고, 입으로 고백하면’ 구원을 얻는다고 이야기합니다. 저는 ‘마음으로 믿어 의로움을 얻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는 우리의 신앙은 우리들의 삶을 통해서 완성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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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김기용 도미니코 신부님]
<우리도 예수님처럼 유혹을 이길 수 있을까?>
인생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크고 작은 유혹들과 마주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유혹을 이기지 못해 낭패를 본 경험도 있으실 것입니다. 그래서 유혹은 이기는 것이 아니라 피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정말로 유혹을 이길 수 없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 말씀을 통해 사순시기 첫 주일을 맞이하는 우리에게 유혹을 대하는 법에 대해 알려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요르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신 후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가셨고, 그곳에서 40일 동안 단식하며 악마의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악마는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과 하느님의 권능이 예수님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악마는 예수님을 유혹합니다. 예수님께서 유혹에 넘어가지 않으실 거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예수님을 유혹하는 악마의 모습은 악마가 얼마나 집요한 존재인지를 보여줍니다.
악마는 인간의 본능과 욕망을 자극하며 예수님을 유혹합니다. 식욕, 명예욕, 그리고 초자연적인 욕구들을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악마의 유혹에 응하지 않으시고, 성경 말씀으로 악마를 물리치십니다.
하느님 말씀은 악마를 물리칠 강력한 힘이 있습니다. 복음의 맨 마지막 구절은, “악마는 모든 유혹을 끝내고 다음 기회를 노리며 그분에게서 물러갔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번 물러간 악마는 예수님 주위를 배회하며 예수님을 시험할 기회를 노립니다.
신앙인으로서 우리는 여러 가지 유혹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은 본인이 어떤 유혹에 약하고, 어떤 유혹에 잘 넘어가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이번 사순시기를 시작하면서 예수님의 수난에 동참하는 의미로 여러 다짐을 하셨을 텐데 그 다짐들 앞에 유혹이 떡하니 버티고 있을 것입니다. 유혹 앞에서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것처럼 단호해야 합니다.
유혹과 흥정해서는 유혹을 물리칠 수 없습니다. 나 스스로 유혹을 이길 수 있다는 교만한 마음을 내려놓으시고 하느님의 보호와 말씀의 도움으로 유혹에서 멀어지시기를 바랍니다.
사순시기는 회개와 은총의 시기입니다. 이번 사순시기는 유혹에 휘둘리지 않고 주님 수난의 참 의미를 되새기는 은총의 사순시기가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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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장재봉 스테파노 신부님]
<사랑을 알 만큼 아는 그리스도인>
사순 시기, 사제는 보라색 제의를 입고 참회의 미사를 거행합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희생제물이 되신 은혜에 감사드리며 온 인류가 순결한 영혼으로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는 은총이 있기를 기도드립니다.
아직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는 세상입니다. 팬데믹이 언제 끝날지 요원하기만 하니 교회의 청원이 더욱 간절하고 간곡하고 깊습니다. 제발 주님의 극심한 고통을 보라색 제의로 기리는 교회의 모습이 주님께 사랑스럽기를 청하며 “초록에 핏물이 들어야 보라가 될 수가 있다. 고통의 단련을 거쳐야만 도달할 수 있는 보라. 보라는 삶을 알 만큼 아는 사랑의 색, 사랑을 알 만큼 아는 자의 색이다”(장석주, 「색채의 향연」)라는 글로 세상에 위로를 건네봅니다.
오늘 제1독서는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지 말고 순명하여 살아갈 것을 당부하는 모세의 길고 긴 이별사의 일부분입니다. 그때 모세의 이별사를 들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찌 이런 일이…!” 싶었을 것도 같고 눈앞이 캄캄해졌을 것도 같은데요. 모세야말로 하느님과 얼굴을 맞대고 대화를 나누는 유일한 사람이었으니 말입니다.
이제 더 이상은 모세와 함께하지 못하는 현실이 혼란스럽고 막막했을 것이 뻔하니 말입니다. 어쩔 줄 모르고 안절부절하고 있는 그들이 눈에 밟혀서 모세의 이별사가 이리도 길고 섬세했으리라 짐작해 봅니다.
이별이라는 단어를 적고 보니 불현듯 신학원장의 소임을 맡아 예상보다 빨리 본당을 떠나오던 날이 기억납니다. 매서운 ‘대한’ 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중에도 따뜻이 제 길을 배웅해주셨던 월평성당 신자분들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마지막 열흘, 작별 인사를 겸해서 매일 신자분들을 뵈었는데요. 마지막 주일 강론을 하다가 목이 메었습니다.
새 본당에서의 새 생활을 기대하며 희망에 부풀어 세웠던 많은 계획들이 무산되었고 서로 약속하고 함께 다짐했던 일들을 맥없이 놓아 버리며 허탈했던 얼굴들이 떠올랐습니다. 결국 저는 팬데믹을 핑계 삼아서 마냥 ‘먹고 놀다가’ 떠나는 꼴이었습니다.
수고도 사랑도 한참 미진했다는 생각에 아팠습니다. 그럼에도 사랑으로 품어주신 본당 가족분들께 감사가 차올랐습니다. 지면을 빌어 고마움을 전해 올리며 사순 제1주일에 선포되는 입당송 “나를 부르면 나 그에게 대답하고 그를 해방시켜 영예롭게 하리라…”는 축복이 그곳에 고스란하기를 손 모아 기도드려봅니다.
더러 성경에 기록된 내용이 너무 직설적이고 솔직하며 담백하다는 점에 놀랄 때가 있는데요. 오늘 복음이 더욱 그렇습니다. 사탄이 감히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마저도 유혹했다는 사실을 전하면서 사탄의 물불 가리지 않고 덤비는 뻔뻔함을 폭로하고 있기에 그러합니다.
상대가 누구든지 가리지도 않고 갖은 수를 써서 유혹하려 드는 건방지고 돼먹지 않은 사탄의 술수에 걸려들지 않는 방법은 오직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무장하는 것뿐임을 콕 짚어주고 있기에 그렇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백번천번 아니 일평생 한결같이 “주님의 훈육을 하찮게 여기지 말고 그분께 책망을 받아도 낙심하지 마라”는 권고를 기억해야겠습니다. 그렇게 우리를 위해서 사순의 고난을 마다하지 않으시는 주님의 은혜를 예사로 여기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최종 목적지는 ‘아버지 집’입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그곳에 도착하는 그날까지 예수님 사랑을 예수님처럼 살아야 하는 사명이 주어져 있습니다. 그러기에 온 삶과 온몸으로 예수님의 생명을 드러내는 참믿음을 채워 지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이 은혜가 아무 조건 없이 일방적으로 주어졌기 때문일까요? 전혀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공짜로 그저 쏟아주셨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세상의 방법처럼 자신의 역량으로 쟁취한 성취물이 아닌 까닭일까요?
말할 수 없이 큰 하느님의 은총을 가벼이 여기고 허투루 받아들이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도대체 주님께서 일러주신 말씀을 지켜 따를 생각이 없어 보이기까지 합니다. 어쩌면 그분의 명령을 ‘따로 저장’해 두었다가 필요할 때마다 꺼내 쓸 작정을 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니 민망하기 그지없습니다.
이 모두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본이 되기는커녕 세상을 쫓아가느라고 숨이 가쁜 이유일 것입니다. 세상에 덕을 끼치기는커녕 외려 세상 덕을 보려 하는 못난 삶을 살아가는 까닭일 것입니다. 슬프고 슬픈 일입니다. “예수님은 주님이시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이러하니, 낯뜨겁습니다. “그를 믿는 이는 누구나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으리라”라는 성경 말씀이 얼마나 무색할지요?
지금 우리가 누리는 구원의 은혜는 공짜가 아닙니다. 인간의 언어로 감히 표현될 수 없을 만큼 벅찬 사랑의 결실입니다.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모르고 지내는 사람들보다 훨씬 더 삶을 고민해야 합니다. 아주 사소한 만남에서도 주님의 복음을 실천하면서 살아가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주님으로부터 생성되어 영혼을 채우는 축복을 놓치지도 잃지도 않아야 옳습니다.
복된 사순 내내, 그분 사랑과 접속하여 사랑의 은혜에 감전되어 지내면 좋겠습니다. 주님 사랑을 ‘알 만큼 아는’ 지혜자가 되시면 좋겠습니다. 하여 초록색 마음에 희생의 핏물을 들인 사랑의 진수를 살아내시면 정말로 좋겠습니다.
사순의 시작, 온 세상을 위하여 기쁨과 감사로 고통당하시는 주님께 힘을 보태드리기 위해서 희생하고 봉사하며 헌신하는 축복의 주인공이 되시길 바라고 원하며 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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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지정태 요한보스코 신부님]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신 주님>
“2022년 사순절”이 시작되었습니다. 생전 처음 맞는 사순절이고,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사순절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이 다할 때까지 다시는 반복될 수 없는 유일한 2022년 사순절입니다. 해서 이번에는 관점을 조금 바꾼 사순절을 보내자고 권하고 싶습니다.
전통적으로 사순절은 절제와 금욕 그리고 극기를 해야 하는 신앙의 시기입니다. 왠지 머리에 재가 얹어져 있는 것 같아서 어느 때보다 죄에 민감하고 마음도 무겁게 보내야 하는 시기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관점을 바꿔 1년 중에 가장 많이 웃고, 가장 많이 배려하고, 따스한 말로 연대와 지지를 가장 많이 표현하는 시기가 되면 어떨까 제안합니다.
몸에 힘을 빼면 유연해지고, 생각에 힘을 빼면 자존감이 꽃핀답니다. 자존심에 꽃이 떨어져야 인격에 꽃이 핀다고 합니다.
성전에 홀로 인상 쓰고 앉아있기보다 누군가를 만나 사랑과 정을 나누고 삶을 공유한다면, 그 어느 때보다 기쁜(?) 사순절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이는 사순절을 지내면서도 이미 부활의 씨앗을 피운 복된 사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받으신 유혹은 그 누구도 쉽사리 거절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극복하기가 불가능에 가까운, 인간의 본성을 자극하는 강렬한 유혹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유혹을 물리치는 방법을 알려주셨습니다. 어떤 유혹이라도 주 하느님의 권능과 말씀에 기댄다면, 그것을 이겨낼 수 있다는 사실을 몸소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주 하느님께 온전히 의지하며 지내는 기쁜 사순절을 보낼 수 있기를 바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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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도회(부산 분도명상의 집) 박재찬 안셀모 신부님]
<악마는 가장 하느님 비슷하게 다가와 유혹한다>
지난 수요일 우리는 머리에 재를 얹고 주님의 파스카 신비에 동참하기 위해 40일 간의 긴 피정을 시작했습니다. 사순 제1주일인 오늘, 우리 피정의 주제는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말씀의 힘으로 40일간의 광야에서의 모든 유혹들을 물리칠 수 있으셨듯이, 우리 역시 이 사순 시기 동안 하느님의 말씀의 힘으로 일상에 찾아오는 모든 유혹들을 이겨낼 수 있도록 이 미사 중에 특별히 주님의 은총과 자비를 청하도록 합시다.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악마의 세가지 유혹을 받았습니다.
1) 빵을 통한 생존의 유혹
2) 하느님 이외에 다른 것을 섬기려는 유혹
3) 하느님을 시험하려는 유혹
첫째, 빵을 통한 생존의 유혹에 대해 묵상해 봅니다. 우리가 한끼만 단식해도 음식 생각이 간절한데, 40일동안 단식하신 예수님께 이것은 큰 유혹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사람이 빵만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강조하시며 단호하게 이 유혹을 이겨 내십니다.
사실 음식이 없으면 우리는 죽고 맙니다. 음식은 생존과 친교를 나누기 위해 꼭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빵과 포도주로 성체 성사를 제정하셨습니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은 아무 것도 속되다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이것에 과하게 집착할 때 우리를 죽이는 도구가 되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빵만으로 충분하다고 여기며 영적인 것을 찾지 않을 때 우리는 병들게 됩니다.
나아가 탐식에 대한 묵상은 우리의 영성 생활에서 더 확장되어 집니다. 우리가 먹는 빵, 음식은 다르게 표현하면 식물이나 동물의 살이라는 것을 생각하다 보면 식탐은 남의 살을 탐하는 것과도 연결이 되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비단 음식뿐만 아니라 사람과의 관계 안에서도 다른 사람의 살을 그릇되이 탐하거나 사랑하는 사람을 집어삼킬 듯이 몰아붙이며 집착하는 경우, 혹은 다른 사람의 마음과 살에 상처를 주고자 하는 것도 악마가 우리를 유혹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사랑해야 할 사람을 자유롭게 해 주는 것, 사랑하는 사람이 진정 참된 사랑으로 성장하기를 기다리며 내 뜻대로 비틀려고 하지 않는 것도 “빵의 유혹” 앞에 우리가 가져야 할 자세가 아닌가 싶습니다.
예수님의 두 번째 유혹은 무엇이었습니까? “하느님 외에 다른 것을 섬기려는 유혹”이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날마다 깊은 절을 하며 찬미와 찬양을 드리지만 동시에 우리는 예수님 외에 다른 것을 섬기며 살고 싶은 유혹이 찾아옵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때때로 재물의 우상, 권력의 우상, 사람의 우상, 자아의 우상은 참된 예수님의 섬김과 멀어지게 우리를 유혹합니다. 때때로 하느님께 예배 드리며 주님을 날마다 입술로는 찬미하지만 마음으로는 자기 자신을 섬기를 경우도 있습니다. 조금만 자신의 뜻에 맞지 않으면 미사도, 기도도 거부하고 하느님을 찾지 않기도 합니다. 자신을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때로는 사람 때문에 하느님을 섬기는 척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남들의 눈에 좋게 보이기 위해, 혹은 아내의 잔소리 때문에, 혹은 그 신부님이 너무 멋져서 성당에 나오는 경우도 있습니다(다행히 저는 멋지지 않아서 저 때문에 명상의 집에 오는 분은 없는 것 같습니다^^). 하느님 때문에 사람을 사랑해야 합니다. 사람 때문에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그 사람이 없으면 하느님도 떠나게 된다면 그것은 하느님이 아니라 그 사람의 우상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악마의 유혹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세 번째 유혹은 “하느님을 시험하려는 유혹”이었습니다. 높은 곳에서 떨어지면 다치거나 죽습니다. 결과를 알면서 떨어지는 이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영적인 삶 속에서 잘못된 줄 알면서도 계속 그것을 합니다. 고해소 앞에서 우리는 늘 지난 달과 같은 죄를 고백하고 있지 않나요?
우리가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때때로 그곳으로 뛰어내립니다. 우리가 예수님 때문에 자신의 뜻을 포기하고 모욕과 박해를 견디어 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열등의식과 낮은 자존감의 유혹은 자신을 무시하거나 존중하지 않는 이들에게 '참을 수 없는 분노와 닫혀진 마음'이라는 나락으로 스스로를 던져 넣곤 합니다. 알면서도 우리는 왜 그 유혹에 너무도 쉽게 빠지게 되는 걸까요? 늘 같은 죄를 반복하며 하느님의 자비에만 의탁하려고 하는 걸까요? 이제는 하느님을 시험하는 우리가 아니라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우리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그것이 죄가 되는 줄 알면서도 계속 반복하며 죄 속으로 뛰어드는 자신을 다시금 객관적으로 바라보며 "이제 그만"하고 단호하게 그 유혹에서 벗어 날 수 있는 결단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요! "이제 그만!!!!!"
자매 형제 여러분, 결국 이 세가지 유혹은 “하느님께 온전한 믿음을 두지 못하게 하려는 유혹”이었습니다. 현실의 고통이나 이익 앞에 하느님의 더 큰 섭리를 믿지 못하고 인간의 논리를 찾으려는 유혹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모든 유혹을 어떻게 이겨내셨습니까! 바로 하느님의 말씀과 순종의 힘이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의 말씀에 불순종했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께 신뢰를 두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심으로써 우리 모두를 죄와 죽음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광야에서의 유혹과 말씀을 통한 극복은 그분과 같이 40일간의 광야의 여정을 시작하는 우리에게 좋은 본보기가 됩니다.
구약 성경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40년 동안 다양한 유혹을 받았지만 동시에 시나이 광야에서 하느님의 백성이 되었듯이, 거친 광야는 온전히 하느님께 모든 것을 의존하게 하여 우리를 하느님의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장소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전통 안에서 많은 은수자들과 수도자들이 하느님과의 특별한 만남의 장소인 사막과 광야로 자진해서 들어갔습니다.
비단 공간적이고 물리적인 사막이 아닐 지라도, 우리 역시 영적인 삶 안에서 사막과 광야가 필요합니다. “아무 것도 없음”, “텅 비어 있음”으로 오히려 하느님의 충만한 사랑으로 “채워짐”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아니 진정 하느님과 함께 한다면 텅 비어 있으면 어떻습니까! 아무 것도 아니면 어떻습니까! 아무도 옆에 없어도 어떻습니까! 오히려 그것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유혹을 받으실 때도 악마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면”이라고 단서를 붙여 유혹을 하였듯이, 악마는 교묘한 방법으로 우리를 유혹합니다. 악마는 머리에 뿔을 달고 무서운 얼굴을 하고 “나 악마다! 으아~~ 무섭지~~” 하고 다가오지 않습니다. 가장 하느님 비슷하게 우리의 가장 약한 부분으로 다가옵니다.
예수님과 같이 단호하게 그 모든 유혹들을 물리치기 위해서 무엇보다 자주 그분의 말씀을 맛들이고 묵상하며 우리 자신이 말씀으로 변화되어 갈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버리고 비우고 그리고 그분의 말씀으로 우리를 채워갈 때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힘이 아니라 그분의 말씀의 힘으로 모든 유혹을 물리치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으로 굳건히 무장하여 하느님의 사람을 빵과 같은 선물로 유혹하거나 관심을 갖기 위한 글과 감정적 소모로 시험과 유혹하지 말고, 오히려 말없는 기도와 드러나지 않는 협력으로 광야의 여정을 잘 마칠 수 있도록 도와 주어야 할 것입니다. 때로는 그저 지켜 봐 주는 것이 사랑일 때가 있습니다. 판단과 심판은 하느님의 몫입니다. "아무 것도 없이" 홀로 광야에 머무시는 예수님을 닮고자 하는 그들에게 그저 지켜 봐 주는 것이 오히려 더 큰 것을 해 주는 것입니다.
광야는 그 자체로 "아무 것도 없음"을 상징하기에 우리는 이 사순 시기를 시작하며 이스라엘 백성의 40년의 광야 체험처럼 40일간의 광야의 여정에서 다가오는 다양한 유혹들을 하느님의 힘으로 극복함으로써 “하느님 이외에 내 안에 아무 것도 없음”, “하느님 한 분만으로 충분한 상태”를 체험할 수 있게 되기를 빕니다.
“하느님 아버지, 이 사순절의 광야의 여정을 시작하는 저희에게
당신 말씀을 향한 열정과 갈망을 더해 주시어
당신 말씀으로
당신과 친밀한 사랑의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도와 주소서.
당신 말씀으로 우리 마음을 채워주시어
마주 오는 모든 일상의 유혹들을 이겨내며
당신 빠스카의 신비에 동참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우리 자신에 대해 죽고
당신과 함께 부활하는 삶을 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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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는다.”
사순 첫째 주일을 맞았습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두 개의 ‘신앙고백’과 함께 ‘참된 신앙’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제1독서>는 선택받은 백성의 신앙고백이요, <제2독서>는 그리스도 신자들의 신앙고백입니다. 곧 전자는 이스라엘 백성이 햇곡식을 봉헌하면서 주님께서 자신들을 이집트 땅에서 해방시키고 좋은 땅을 주셨다는 신앙고백이요, 후자는 우리의 구원이 ‘바로 우리 곁에 우리의 입과 마음에 있다’는 <신명기>(30,14)의 말씀을 통해,율법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거저 주신 은총을 통해 구원이 온다는 신앙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복음>은 예수님께서 광야에서의 유혹받으신 장면을 통하여, 앞의 두 독서에서 고백하고 있는 ‘신앙’의 핵심을 보여주십니다. 곧 오로지 아버지께만 신뢰와 의탁을 두는 신앙의 행위를 통해서, 믿는 이들이 어떠한 처지에서도 구원의 길을 갈 수 있는 해답으로 제시해줍니다. 곧 유혹을 이기신 인간 예수님의 모습은 모든 인간이 닮아야 할 가장 모범적이고 완전한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사실, “광야”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의 백성으로 선택되고, 하느님의 백성으로 살겠다고 약속한 곳이요, 오롯이 하느님을 만나는 곳이요, 사랑을 속삭이는 장소이기도 합니다(호세 2,16-18). 또 불모의 황폐한 사막이요 유혹받은 장소이기도 하지만, 야곱을 아껴주신 곳이요(신명 32,10), 이스라엘 백성을 보살펴주고 인도하신 곳이요(신명 2,7;8,15; 느헤 9,18-19), 시험의 장소이기도 하지만(신명 8,2), 예언자들이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요(1열왕 19,4), 사랑을 알게 하시는 장소이기도 합니다(예레 2,2-3). 또한, 광야는 현실적으로 우리 삶을 뒤흔드는 위협이 도사리고 있는 우리가 살고 있는 바로 지금의 이 세상이요, 우리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40일간 단식하시며 기도하셨습니다. 마침내 허기지셨던 예수님은 쇄약해지셨고, 유혹에 넘어가기 쉬운 상태에 처했습니다. 가장 허약한 순간을 노려 악마의 끈질긴 유혹은 시작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유혹을 피하시지 않으시고 정면으로 돌파하십니다. 아니, 역설적으로 말하면, 오히려 유혹은 하느님의 뜻을 적극적으로 실천하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더러 빵이 되라고 해 보시오”라는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곧 물질적 유혹, 빵에 대한 유혹, 필요와 효용성, 소유와 능력에 대한 유혹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는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루카 4,4)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육신을 살리는 물질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는 말씀을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저 나라들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당신이 내 앞에 경배하면 모두 당신 차지가 될 것이요.”라는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곡 영적, 신앙적 유혹, 권력에 대한 유혹, 지배와 권위, 존경에 대한 유혹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루카 4,8)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우상을 믿고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속한 이로서 그분만을 섬기고 믿으라는 말씀, 곧 믿음과 사랑과 희망을 하느님께 두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다시 “성전 꼭대기에서,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밑으로 몸을 던져 보시오. 그분께서 당신 천사들에게, 너를 보호하라고 명령하시리라.”는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곧 정신적 유혹, 영예에 대한 유혹, 과시와 인기, 교만과 허영, 영웅주의에 대한 유혹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주 너희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루카 4,12)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자신을 드러내는 허영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희망을 하느님께 두고 그분의 뜻 이루어지기를 바라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 유혹은 궁극적으로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대체, 악마는 무엇을 노리고 다가왔던 것일까?
그것은 궁극적으로는 예수님을 하느님에게서 떼어놓으려고 했던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시어 이루어야 할 사명을 방해하고자 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를 위하여 온전히 헌신하셨습니다.
이토록, 광야에서의 유혹은 하느님께 대한 신앙의 삶을 제시해줍니다. 곧 이 사건은 우리를 하느님께 대한 신앙의 신비로 이끌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술이나 기적으로 이 세상을 구원하지 않으시고, 말씀을 통해서 믿음으로 유혹을 이기시고, 사랑으로 사명의 길을 가셨으며, 아버지의 뜻에 희망을 두셨습니다. 그리하여, 이제 우리도 예수님의 이 헌신에 힘입어, 결코 그 누구도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사랑에서 떼어 놓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자 누구입니까? 환란입니까? 궁핍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이 모든 일에서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에 힘입어 이기고도 남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생명도 천사도 주권도 다른 어떤 피조물도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갈라놓을 수 없습니다.”(로마 8, 35-3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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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는다.”(루카 4,4)
주님!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것으로 살게 하소서.
나의 필요보다 타인의 필요를 먼저 헤아리고
소유하기보다 소유당할 줄을 알게 하소서.
무엇이 유익한가보다 그것이 사랑인가를 보게 하시고
능력을 가지기보다 가진 능력을 사랑으로 쓸 줄을 알게 하소서.
당신으로부터 떼어 놓는 모든 것으로부터 떨어져 있게 하시고
당신의 사랑에 힘입어 말씀으로 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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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느님의 아드님과 유혹하는 이>
루카 4,1-13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가득 차 요르단 강에서 돌아오셨다. 그리고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시어, 사십 일 동안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그동안 아무것도 잡수시지 않아 그 기간이 끝났을 때에 시장하셨다.
그런데 악마가 그분께,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더러 빵이 되라고 해 보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는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자 악마는 예수님을 높은 곳으로 데리고 가서 한순간에 세계의 모든 나라를 보여 주며, 그분께 말하였다. “내가 저 나라들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당신에게 주겠소. 내가 받은 것이니 내가 원하는 이에게 주는 것이오. 당신이 내 앞에 경배하면 모두 당신 차지가 될 것이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그러자 악마는 예수님을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운 다음, 그분께 말하였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여기에서 밑으로 몸을 던져 보시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지 않소? ‘그분께서는 너를 위해 당신 천사들에게 너를 보호하라고 명령하시리라.’ ‘행여 네 발이 돌에 차일세라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쳐 주리라.’”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 하신 말씀이 성경에 있다.” 하고 대답하셨다.
악마는 모든 유혹을 끝내고 다음 기회를 노리며 그분에게서 물러갔다.
<하느님의 아드님과 유혹하는 이>
밥으로
유혹하는 이는
밥을 결코
건네지 않습니다
밥으로
유혹하는 이를 물리치는
단 하나의 길은
서로가 서로에게
밥으로 건네지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늘 그러하시듯이
권세와 영광으로
유혹하는 이는
권세와 영광을 결코
나누지 않습니다
권세와 영광으로
유혹하는 이를 물리치는
단 하나의 길은
서로가 서로에게
권세와 영광을 나누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늘 그러하시듯이
하느님으로
유혹하는 이는
하느님을 결코
모시지 않습니다
하느님으로
유혹하는 이를 물리치는
단 하나의 길은
서로가 서로에게
하느님을 모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늘 그러하시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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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유혹을 물리치는 방법>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를 구원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죽기까지 아버지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셨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셔서 우리에게 부활의 희망을 안겨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 안에 머무는 동안 악마의 유혹을 받으셨고 그 유혹을 물리침으로써 우리에게 악의 유혹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하셨습니다. 이 시간 유혹에 관해 묵상하는 가운데 악을 지배할 수 있는 주님의 힘과 능력을 입으시길 기원합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아무 근심걱정이 없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어떤 유혹도 없이 평온한 상태로 하루하루를 보낼 수 있다면 모두가 행복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믿는 우리는 근심걱정이 없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도 악의 유혹을 받으셨고 더군다나 악의세력이 뜻을 이루지 못하자 “다음기회를 노리며”(루카4,13) 물러갔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도 이러한 어려움이 생겼는데 하물며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유혹이 있고 우리의 마음을 흔들어 놓겠습니까? 그러므로 근심 걱정이 없기를 바랄 것이 아니라 어떠한 유혹과 시련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키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실 근심과 곤란이 없으면 자만하는 마음, 남을 업신여기는 마음, 사치한 마음이 생기는 법입니다. 따라서 근심과 곤란으로써 마음의 회초리로 삼아 살아갈 수 있는 삶의 지혜를 갖추어야 하겠습니다.
한 젊은이가 여행을 떠났다가 다 허물어져 폐허가 된 성터를 보게 되었습니다. 안내문을 보니 그곳은 한때 그 권세와 덕망이 사방천리를 갔었다고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지경이 되었을까? 궁금해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곳을 청소하는 할아버지 한 분이 그 답을 알려주셨습니다. 이 성이 이렇게 된 것은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했기 때문이란다.” 젊은이가 놀라서 “네? 그건 잘한 일인데 어째서?”
그러자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선을 좋아했지만 실천하지 못했고, 악을 미워했으나, 제거하지 못했다네!” 그렇습니다. ‘나쁜 일은 멈추고 좋은 일만 해야 합니다.’ 누구나 다 아는 얘기지만 실천하기는 너무도 어려운 일입니다.
유혹을 물리치는 길을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친히 “고난을 겪으시면서 유혹을 받으셨기 때문에, 유혹을 받는 이들을 도와주실 수가 있습니다”(히브 2,18) 그러나 그 길을 따르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겪은 첫째 유혹은 생계문제입니다. 먹고 사는 문제입니다. (쓰리고의 문제입니다. 먹고 마시고 즐기고)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는다.’ ”고 성경에 기록 되어 있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가난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을 도와주려면 무엇보다도 돈이 필요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돈이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나누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마더데레사 수녀님의 말씀대로 “사람들이 기아로 죽어가는 것은 하느님께서 그들을 돌보시지 않아서가 아니라 바로 여러분과 내가 너그럽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손 안에 있는 그 사랑을 나누어 주는 도구가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분명, 빵이 중요하지만, 빵보다 사랑이 중요합니다. 물질적인 것 위에 영적인 것이 있습니다.
두 번째 유혹은 권력에 대한 유혹입니다. 사탄을 경배하면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를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는 성경말씀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사실 상대방을 더 많이 지배하고픈 마음,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면 불의와 타협하고도 싶은 마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순교자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많은 성인 성녀들이 하느님을 따르기 위해 세상의 부귀영화를 버렸습니다. 박해 시절에 그들이 세상과 타협했다면 목숨을 건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느님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래서 모두를 얻었습니다. 우리도 지상의 조그마한 유익함 때문에 하느님을 버리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정치에 발을 디뎠던 분이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정치를 하려니 “얼굴에 철판을 깔아야 하고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해야 하며 소신이 없어야 하더라.” 만약 우리가 불의와 타협한다면 그것이 사탄을 경배하는 일이 된다는 것을 잊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 유혹은 명성에 대한 유혹입니다. 악마는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 세운 다음 성경의 ‘천사들이 너를 보호하고 받쳐주리라.’ 하는 말씀을 들먹이며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여기에서 밑으로 몸을 던져 보시오.”(루카4,9) 하고 말하였습니다.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도 살 수 있다는 것은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하느님의 능력인 기적을 남용하라’는 요구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 하신 말씀이 성경에 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남의 눈에 띄고 인정받으며 찬사를 받고 싶어 하는 것이 우리의 마음에도 있습니다. 그러면서 일상의 십자가는 남몰래 지기를 싫어합니다. 그러므로 생색내기의 유혹에서 벗어나기를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부, 권력, 명예의 3가지 유혹을 보았는데 결국 예수님께서는 모든 유혹을 하느님의 말씀, 곧 성경 말씀에 대한 기억을 통하여 물리쳤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주님의 말씀으로 무장하는 것입니다.
에페소서 6,10. 17절을 보면 “주님 안에서 그분의 강한 힘을 받아 굳세어지십시오. 악마의 간계에 맞설 수 있도록 하느님의 무기로 완전히 무장하십시오.” “구원의 투구를 받아쓰고 성령의 칼을 받아 쥐십시오. 성령의 칼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모든 유혹에서 자유로워지려면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어떤 피조물도 감추어져 있을 수 없습니다. 그분 눈에는 모든 것이 벌거숭이로 드러나 있습니다. 이러한 하느님께 우리는 셈을 해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히브 4,12) 따라서 말씀에 나를 비추어 새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 마지막을 보면 “악마는 유혹을 끝내고 다음 기회를 노리며 그분에게서 물러갔다”(루카4,13)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도 유혹은 끊임없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유혹이 없었으면 하고 바라는 것이 아니라 유혹을 이겨낼 힘과 능력을 키워야 합니다. 그 힘과 능력이 어디 있습니까? 하느님의 말씀 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유혹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유혹을 통해 인격을 연마하고 우리의 믿음과 사랑을 증명할 기회로 삼으십시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이 지상 순례생활에는 유혹이 없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성장은 유혹을 통해서 이뤄지고, 유혹을 당하지 않고는 아무도 자신을 완전히 알지 못합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사실 부와 권력과 명예의 유혹을 받지 않을 만큼 거룩하고 완벽한 사람은 없습니다. 어찌 보면 거룩한 삶을 살려고 하는 사람일수록 더 큰 유혹을 받게 마련입니다. 하느님의 뜻대로 살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세상과는 동 떨어지는 느낌이 듭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잘 못사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그만큼 어두워졌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내가 더 빛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세상을 밝히 비춰야 합니다. 유혹과 시련에서 지면 보통인물이 되고 유혹을 이기면 하느님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유혹이란 넘어가면 달콤한 죽음이요, 넘기면 쓴 보약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죽음의 문턱에서도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너 자신이나 구해 보아라. 네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아라.”(마태27,40) 하고 말하였습니다.
율법학자들도 “다른 이들은 구원하였으면서 자신은 구원하지 못하는군. 이스라엘의 임금이시면 지금 십자기에서 내려와 보시지. 그러면 우리가 믿을 터인데”(마태 27,42) 하였습니다.
죽음을 앞둔 최후의 순간에 십자가에 같이 못 박힌 강도까지도 “당신은 메시아가 아니시오? 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 보시오.”(루카 23,39) 하며 조롱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침묵하셨습니다. 그러고는 큰 소리로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루카 23,46).하시며 숨을 거두셨습니다. 결국 당신의 죽음을 통하여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우리에 대한 사랑을 온전히 드러내셨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한 백인대장과 그와 함께 예수님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두려워하며 말하였습니다. “참으로 이분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마태27,54).
예수님의 처신이 바보같이 보였지만 결국 침묵이 모든 것을 말해주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러저러한 소리가 나면 반박해주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확인해서 콧대를 꺾어주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이 유혹의 순간임을 잊지 마십시오! 그리고 어떤 유혹도 주님의 힘을 입어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유혹을 이겨내는 방법을 알려주기 위해서 유혹을 허락하셨습니다. 이번 한 주간 유혹을 통해 내 자신을 볼 수 있고 더 큰 성숙의 기회로 만드는 은총의 날들 이루시기를 기원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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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수원교구 정진만 안젤로 신부님]
루카 복음서의 저자는 예수님의 공생활을 전하기에 앞서 준비 기간에 대하여 이야기합니다. 성령의 힘에 이끌려 광야로 가신 예수님께서는 사십 일 동안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악마는 세 번에 걸쳐 예수님을 유혹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굶주린 배를 채울 수 있는 유혹, 세상 통치의 힘을 쥘 수 있는 유혹, 그리고 천사들에게 보호받으며 신성을 알릴 수 있는 유혹을 받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시기 때문에 그분께서 부여받으신 신적 능력으로 악마가 요구하는 모든 것을 보여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들’로서 지니신 신적 특권을 포기하시고, ‘인간의 길’(배고픔, 고통, 죽음, 약함 등)을 선택하십니다. 인간의 운명을 피하는 것은 예수님께 큰 유혹이었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행위이며, 하느님에게서 멀어지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악마에게서 유혹을 받으시지만 극복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악마의 유혹을 이겨 내실 수 있었던 힘은 ‘하느님 말씀’에서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시나이 광야를 떠돌던 시기에 하느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어두운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말씀을 통하여 악마의 유혹을 이겨 내시어 당신 스스로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사시는 분(신명 8,3; 루카 4,4 참조), 하느님을 경배하시고 섬기시는 분(신명 6,13; 루카 4,8 참조), 하느님께 모든 것을 내맡기시고 그분을 시험하지 않으시는 분(신명 6,16; 루카 4,12 참조)이심을 증명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광야’로 초대하십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유혹을 끊임없이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곳에서 하느님과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의 힘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같이 유혹을 받으셨지만 물리치심으로써, 우리에게 유혹을 이겨 낼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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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주보》 생명의 말씀
[서울대교구 손희송 베네딕토 주교님(서울대교구 총대리)]
<광야에서도 우리 곁에 계시는 주님>
호사다마(好事多魔)란 말이 있습니다. 좋은 일에는 방해가 많이 따른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경우도 예외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40일 동안 단식하시면서 인류 구원의 길을 준비하셨는데, 악마가 다가와 방해 공작을 편 것입니다.
먼저 악마는 예수님께 돌을 빵으로 바꿔보라고 요구합니다. 물질로 백성의 마음을 얻으라는 유혹입니다.
‘하느님은 모세의 백성에게 빵을 내려주시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시지 않았던가? 메시아라면 백성에게 먹을 빵과 살땅을 보장해 줘야 하지 않는가?’
의식주는 중요합니다. 하지만 빵이 절대화되고 물질이 모든 것을 해결한다는 생각, 경제 제일주의의 유혹은 경계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빵만으로 살지 않고,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신명 8,3)
이어서 악마는 자신에게 엎드려 절하면 세상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주겠다고 약속합니다. 막강한 세상 권력과 눈부신 영화로 백성의 마음을 휘어잡으라는 유혹입니다. ‘다윗과 솔로몬은 강력한 군사력과 경제적 번영으로 부강한나라를 만들지 않았던가? 다윗의 후손인 메시아라면 마땅히 그런 권세와 영화를 갖춰야 하지 않는가?’
하지만 세속권력과 영화를 절대시하면 반드시 큰 폐해를 낳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응대하십니다. “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예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신명 6,13 참조)
마지막으로 악마는 성경까지 유혹의 도구로 삼습니다, 시편 91편 11절-12절에서 하느님께서 천사들을 시켜 의인을 보호해 주신다고 했으니,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고 요구합니다. 하느님의 능력을 빌려 메시아임을 공개적으로 입증하여 백성의 마음을 사로잡으라는 유혹입니다.
‘엘리야 예언자가 하늘에서 불을 내려오게 함으로써 참된 하느님을 드러냈듯이(1열왕 18,20-40), 메시아도 그래야 하지 않는가?’ 하지만 내 명예와 이익을 위해 하느님께 기적을 요구하는 것은 신앙을 거스르는 짓입니다.
하느님의 일꾼이 되어 그분의 뜻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하느님을 나의 일꾼으로 삼아 내 뜻과 욕망을 채우려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유혹도 단호하게 물리치십니다. “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떠보지 마라.”(신명 6,16 참조)
우리 인생 여정에는 광야처럼 힘든 시간이 종종 있습니다. 그때마다 유혹의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하느님보다는 재물과 권력에 의지하고 싶은 마음, 나의 명예와 이익을 위해서 하느님까지 이용하고자 하는 욕심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유혹에 너무 겁먹을 필요는 없습니다. 광야에서도 그분은 우리 곁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몸소 유혹을 당하고 극복하셨던 그분은 우리도 하느님의 말씀에 의지해서 유혹의 목소리를 떨쳐버리도록 도와주고 격려해 주실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는 모두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제2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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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시어, 사십 일 동안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루카4,1-2)
<말씀의 힘!>
사도 바오로는 믿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압니다."(로마8,28)
이 말씀은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기쁜 일이든, 아픈 일이든 할 것 없이 모든 움직임들은 선을 향해 있고,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는 움직임들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악마의 유혹을 받으십니다. 그것도 세 번에 걸쳐 사십 일 동안 유혹을 받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의 힘으로 이 악마와 싸워 이기십니다.
'사십 일과 세 번'이라는 의미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수난과 죽음을 상징하는 '유혹'을 이겨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참모범'이십니다.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도 세 번씩이나 악마의 유혹을 받으셨는데, 우리는 더한 유혹을 받지 않을까요?
오늘 복음(루카4,1-3)은 우리가 이 악마의 유혹을 어떻게 이겨내야 하는지에 대한 '모범 답안'입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태4,4)
말씀이신 그리스도이십니다. 말씀은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는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니 말씀을 가까이 하고, 말씀 안에 머무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제1독서(신명26,4-10)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베풀어 주신 하느님의 은총을 기억하라고 말합니다.
지금 여기에 서 있기까지 나에게 베풀어 주신 하느님의 은총에 깊이 감사드리고, 함께 작용하여 선으로 이끄는 모든 움직임들을 '말씀의 힘으로' 기쁘게 받아들이면서 이겨냈으면 좋겠습니다.
"그대가 예수님은 주님이시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셨다고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로마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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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9년 한국직업사전에 등재된 우리나라 직업의 수는 1만 6,891개였습니다. 정말로 다양한 직업이 있구나 싶었습니다. 그런데도 ‘일할 곳이 없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실제 우리나라 실업률은 3.10%(경제활동인구 중에서 실업자가 차지하는 비율)으로 전 세계 실업률 평균보다는 낮지만,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지 않는다며 ‘일할 곳이 없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아 보입니다.
직업의 수는 일본의 경우 2만 5,000개로 우리보다 훨씬 많고, 미국은 3만 654개가 된다고 합니다. 선진국으로 갈수록 직업의 숫자도 늘어납니다. 계속 발전해나가는 우리나라이기에 직업의 숫자도 계속 늘어나겠지요. 따라서 ‘일할 곳이 없다’라고 말하기보다 새로움을 두려워하지 말고 도전에 임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단정을 짓는 순간, 미래로 나아가는 길이 닫혀버립니다. 열린 가능성을 보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주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다.’라고 단정 지으면, 전지전능하신 주님의 다양한 활동을 볼 수가 없게 됩니다. 악마의 유혹도 그런 것이 아닐까요? 세상의 눈으로 단정 짓게 만들어서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못하게 합니다.
광야에서 예수님을 유혹하는 악마도 이 방식을 썼습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40일을 보내십니다. 광야란 세속과 완전히 분리된 곳으로, 사람을 만나기도 힘들고 먹을 것을 찾기도 힘든 곳입니다. 따라서 이곳은 오로지 하느님만을 떠올리며 하느님과 함께하는 공간이지요.
하느님과 함께하기에 정신적으로는 풍요롭겠지만, 육체적으로 아주 힘든 상태였을 것입니다. 하루만 굶어도 힘든데, 자그마치 40일을 굶은 상태였으니 말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악마의 유혹을 받으십니다.
첫 번째 유혹은 40일 동안 굶은 상태에서 먹을 것을 만들라는 것이었습니다. 허기진 사람이 먹을 것을 찾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아들이라면’이라는 말로 자격 운운하며 기적을 하라는 유혹합니다.
두 번째 유혹은 자기 앞에 경배하면 세상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이 땅에 이루시려는 예수님의 일을 더 수월하게 할 수 있는 유혹입니다. 솔깃합니다.
마지막 유혹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당시 모든 사람의 눈이 바라보는 구원의 장소로, 많은 사람이 드나드는 곳입니다. 이제 공생활을 시작해야 하는데, 이곳에서 멀쩡하게 뛰어내릴 수 있다면 사람들의 관심은 엄청날 것입니다.
이 모든 유혹을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기준이 아닌 하느님 말씀을 통해 이겨내십니다. 우리가 받을 유혹 역시 하느님 말씀을 통해 이겨낼 수 있음을 직접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세상의 눈으로 단정 짓지 마십시오. 하느님 말씀만이 모든 유혹을 이겨내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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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영적 승리의 삶>
-우리는 ‘주님의 평생 전사들’이다-
이번처럼 사순시기가 간절하고 고맙기는 처음입니다. 일년 영적 농사의 성패가 달린 사순시기 초반입니다. 삶은 간절해야 합니다. 영적전쟁에서도 간절한 쪽이 승리합니다. 우리는 죽는 그날까지 제대가 없는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평생 전사들입니다. “더불어together” 영적전쟁을 치러야 하는 주님의 영적 전우戰友들인 우리들입니다. 참으로 영적 전우애戰友愛가 절실한 시절입니다. 그러니 우리 모두 영적 승리의 삶을 위해 삶은 한결같이 절실切實하고 진실眞實하고 성실誠實해야 합니다.
사순시기 교회의 전례가 참 고맙습니다. 방금 부른 화답송 후렴도, 아침 새벽 기도 초대송과 찬미가도 참 아름답고 간절하여 마음에 깊은 울림을 줬습니다.
“하느님, 환난중에 저와 함께 계시옵소서.”-화답송
“우리를 위하여 유혹과 수난을 당하신 그리스도께 어서 와 조배드리세.”-초대송
“어느덧 세월흘러 봄이 돌아와 사십일 재계시기 다가왔으니
교회의 신비로운 전통에 따라 마음을 가다듬어 재를 지키세.
마시고 흥청대던 경망한 행동 늦은잠 육신쾌락 절제하면서
흩어진 우리마음 바로잡으며 엄격히 우리자신 다스려보세.”-찬미가1,3절
사순시기는 바로 오늘 복음에서 보다시피 주님께서 광야로 가시어 사십일 동안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며 영적전투를 치르신 것처럼 우리 역시 악마와의 영적전투를 치러야 할 시기입니다. 아니 사십일의 사순시기가 아니라 평생 광야 인생 여정중 악마와 영적전투를 치러야 할 우리들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한평생이 인생 광야에서 영적전투를 치러야 할 사순시기라 함이 맞습니다. 어제 복음 나눔중 언급했던 내용을 다시 나누고 싶습니다.
1.악마는 존재한다.
2.악마의 유혹의 공격은 살아있는 그날까지 계속될 것이며 악마와의 영적전투도 죽는 그날까지 계속될 것이다. 그러니 유혹이 없게 해달라 기도할 것이 아니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달라 기도해야 할 것이다.
3.사람은 분명 악마가 아니다. 그러나 악령이 들리면 악마가 될 수 있다. 이념이든 사상이든 종교든 극단주의에 빠진 완고하고 무자비한 광신자들이 바로 악령이 들린 악마가 된 사람들이요 우리 모두의 가능성이다. 악령에 들렸으면서도 악령에 들린 줄 모르는 참 무지한 사람들이 널려 있는 세상이다. 그러니 은혜로운 사순시기는 참된 회개를 통해 참사람이 되기 위한 참으로 절박한 절호의 시기이다.
4.악마는 두려워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경멸해야할 대상이다. 사람을 경멸해서는 안되지만 악마는 무시하고 경멸해야 한다.
우리는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에덴 동산에서 사탄을 상징하는 뱀의 유혹이 없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오늘 광야에서 예수님께 악마의 유혹이 없었다면, 우리 광야인생여정중 악마의 유혹이 없다면 얼마나 좋을까? 한마디로 어리석고도 짧은 생각입니다. 창세기 악마의 유혹에 빠지 아담과 하와와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영적 승리의 빛나는 모델이 예수님과 마리아 성모님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전사로 영적 승리의 삶의 영원한 모델이 예수님과 성모님입니다. 또 영적 전쟁의 대가이자 영적 승리의 삶의 빛나는 모범이 3-4세기 옛 사막교부들입니다. 어제 사막 교부들의 언행록을 읽으며 ‘유혹temptation’에 관한 일화들 여러편이 참 유익하다 싶어 나눕니다.
1.안토니오 압바의 말씀이다. “유혹을 체험하지 않는 자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그 누구도 유혹없이는 구원받지 못한다.”
2.헤라디우스 압바의 말씀이다. “유혹을 치워버려라. 그러면 그 누구도 구원받지 못할 것이다.”
3.테오도라 암마의 말씀이다. “좁은길로 들어가도록 노력하라. 겨울 폭풍을 견디지 못한 나무들이라면 열매를 맺을 수 없으니 우리도 그러하다. 작금의 시대는 폭풍의 시대다. 우리가 천국의 유산을 획득할 수 있는 것도 오직 많은 시련과 유혹을 통해서다.”
4.포멘 압바의 말씀이다. “수도승의 특징적 모습은 유혹들을 통해서 분명해진다.”
5.포멘 압바가 전해준 안토니오 압바의 말씀이다.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일은 주님 앞에 자신의 과오를 쏟아놓는 일, 그리고 마지막 숨쉬는 순간까지 유혹을 기대하는 것이다.”
6.오메가 압바의 말씀이다. “온갖 유혹들 가운데 아무에게도 불평하지 말고 스스로에게 말하라. 이것들은 내 죄들로 인해 일어난 것들이다.”
시공을 초월하여 영적전쟁중인 오늘 우리 모두에게 공감을 주는 사막교부들의 유익한 가르침입니다. 파도를 거슬러 뱃길을 가는 배처럼 유혹에 빠지지 않고 지혜와 인내로 유혹을 통과해가면서 영적성장에 성숙입니다. 유혹이 없는 무미건조한 무기력한 삶이라면 결코 영적성장도 성숙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저는 오늘 광야에서 악마의 유혹을 3차례에 걸쳐 KO승을 거두는 예수님 모습이 참 상쾌하고 통쾌하고 유쾌했습니다. 악마의 수준이 참 저급하고 유치하다 싶었습니다.
주님과의 수준차로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는 악마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런 저질 수준의 유치한 악마들의 유혹에 빠지는 사람들도 참 많은 현실입니다. 간혹 유혹에 빠져 죄를 저지른 후 “무엇인가 씐 것 같았다”란 말을 들은 적이 있을 것입니다. 방심으로 무지의 탐욕에 빠져 눈이 멀었을 때 누구나의 가능성입니다.
그러니 깨어 있어야 하고 성령과 말씀으로 완전무장하여 성령의 전사, 말씀의 전사로 살아야 합니다. 하느님 성부를 배경으로 성령의 도움과 말씀자체이신 성자 예수님으로, 즉 삼위일체 하느님으로 무장할 때 완전 영적 승리의 삶입니다.
영적 승리를 위한 필수적 도움이 성령과 말씀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에서 보다시피 예수님 영적 승리의 비결입니다. 예수님이야 말로 영적 승리의, 영적 전사의 영원한 모델입니다. 복음 서두는 성령으로 완전 무장한 성자 예수님의 면모를 보여줍니다. 바로 성부 하느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가득 차 요르단 강에서 돌아오셨다. 그리고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시어, 사십일 동안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성령聖靈으로 충만한 예수님을 악령惡靈이 이기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니 성령으로 충만한 우리들의 삶이라면 악마는 경멸할 대상이지 결코 두려워할 대상은 아닙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분별력의 지혜가 악마의 유치하고 저급한 그러나 간교한 계략을 꿰뚫어 보게 합니다.
성령에 이어 말씀입니다. 하느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습니다. 말씀은 생명과 빛이자 영입니다. 말씀은 그대로 주님의 현존이자 주님의 힘입니다. 예수님은 세 차례에 걸쳐 말씀의 무기로 악마의 유혹을 보기 좋게 물리칩니다. 40일 단식으로 시장하셨지만 성령 충만한 주님의 전사, 예수님의 영적 힘은 참으로 막강합니다.
첫 번째, 돌더러 빵이 되게 해보라는 악마의 유혹에 “‘사람이 빵만으로 살지 않는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한 말씀으로 단숨에 “식욕食慾”으로 유혹하는 악마를 물리칩니다.
두 번째, 나에게 경배하면 세상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주겠다는 악마의 유혹에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단호히 한 말씀으로 “권력욕權力慾”으로 유혹하는 악마를 격퇴시키는 참으로 지혜로운 주님의 용사, 예수님입니다. 권력욕이 얼마나 무서운지 자식과도 나누지 않으며 2인자를 허용하지 않는 독재자들입니다. 참으로 국민을 위한 “공복公僕”의 심부름꾼이 되려는 사람인지, 또는 국민의 “왕王”이 되려는 권력욕의 사람인지 눈을 크게 뜨고 지도자를 잘 선택해야 할 것입니다.
세 번째,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려 보라는 허영심을 부추기는 유혹인데 더구나 악마는 성경의 예까지 인용합니다. 이런 허영의 유혹을, 헛된 욕망인 “허욕虛慾”을,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 하신 말씀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한 말씀으로 예수님은 악마를 패퇴시킵니다. 그러나 복음의 마지막 말마디가 긴 여운을 남깁니다. 결코 죽는 그날까지 끝나지 않고 계속되는 악마와의 전투를 암시하는 말씀입니다.
‘악마는 모든 유혹을 끝내고 다음 기회를 노리며 그분에게서 물러갔다.’
참으로 와신상담臥薪嘗膽, 권토중래捲土重來를 꿈꾸는 악마의 집요한 유혹입니다. 말씀의 위력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합니다. 무지의 어둠을 몰아내는 말씀의 빛입니다. 말씀의 빛은 하느님의 빛이며 말씀의 힘은 하느님의 힘입니다. 어둠이 빛을, 거짓이 진리를 이길 수 없듯이, 무지의 어둠이, 악의 어둠이 말씀의 빛을 이길 수 없습니다.
말씀 공부에 말씀을 통한 믿음 고백이 참으로 영적승리의 삶에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우리가 미사시 사도신경을 고백하듯이, 신명기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수확의 맏물을 바칠 때 자기를 이끌어 구원해준 하느님을 장엄하게 고백하며 구원의 역사를 렉시오 디비나 하며 자기의 현주소를 확인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역사 공부에 소홀한지 반성하게 합니다. 역사의 뿌리를 잃으면 민족의 정체성을, 나라 공동체의 정체성을 잃습니다.
“저희 조상은 떠돌아 다니는 아람인이었습니다.---주님께서는 저희를 이곳으로 데리고 오시어 저희에게 이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셨습니다. 주님, 그래서 이제 저희가 주님께서 저희에게 주신 땅에서 거둔 수확의 맏물을 가져왔습니다.”
이런 고백과 더불어 맏물을 바치는 정신으로 미사예물을 바치면 얼마나 바람직하겠는지요! 바오로 사도가 소개하는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그리스도 신자의 신앙고백도 참 은혜롭습니다.
“유다인과 그리스인 사이에 차별이 없습니다. 같은 주님께서 모든 사람의 주님으로서, 당신을 받들어 부르는 모든 이에게 풍성한 은혜를 베푸십니다. 과연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이는 모두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이 아름답고 거룩한, 진실한 신앙고백들 모두가 말씀의 위력을 보여줍니다. 이들 말씀의 은총이 우리 모두를 더욱 말씀의 전사, 성령의 전사, 주님의 전사가 되어 살게 합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사순 제1주일 미사은총으로 인생 광야 여정중에 있는 우리 모두를 예수님처럼 성령충만한 말씀의 전사, 주님의 전사가 되어 영적 승리의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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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말씀 기도♡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이런저런 유혹에 시달립니다.
남보다 더 잘 먹고 더 잘 살고싶은 유혹,
남들로부터 더 존경받는 위치에 오르고 싶은 유혹,
심지어 나를 하느님 자리에 올려놓는
영적인 교만의 유혹...
이런 유혹의 본질은
나를 하느님께로부터 멀어지게 만들고
하느님과 떼어놓으려는 악임을
잘 알고 있음에도
쉽사리 그 유혹을 이겨내기가 힘듭니다.
오, 나의 주님!
우리를 위해 유혹을 받으시고
십자가의 수난을 감수인내 하셨으니
우리를 이 유혹에서 건져주소서.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는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 하신 말씀이 성경에 있다.”
그렇습니다, 주님!
답은 성경 말씀에 있습니다.
이 유혹과 악의 세력을 물리칠 수 있는
유일한 힘은 바로 '말씀'입니다.
그러니 저로 하여금
늘 말씀에 충실한 삶을 살게 하시고
모든 유혹과 어려움 앞에
성경 말씀에서 그 답을 찾게 하소서.
그리고 유혹과 악의 세력에서 구해 주신 주님께
내가 거둔 영적인 수확의 맏물을 봉헌하며
주 하느님께 경배드리게 하소서.
오, 나의 하느님, 나의 전부시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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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kjpYAvYjX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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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광야로 가시어, 사십 일 동안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루카 4,1-2)
우리가
살아있으니
삶의 광야가
있다.
삶이란
안전지대를
찾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광야를
은총으로
받아들이는
복음의
삶이다.
고향 산천에
붉은 화마가
또 아프게
지나갔다.
아직도
광야처럼
산불은
현재
진행중이다.
예수님께서도
광야를
향하신다.
광야에서
하느님의
일을
시작하신다.
광야가
사람을
만든다.
사랑과 유혹을
깨닫게 하는
사람의
광야이다.
광야가
우리의 욕망을
비추어준다.
회개로
정화되어야 할
우리들 욕망이다.
광야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다.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자신을
파괴하지 않는다.
광야안에도
사랑이 있고
광야 밖에도
사랑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멈추지
않으시는
하느님의
사랑이다.
빵만 있고
말씀이 없다면
소유만 있고
나눔이 없다면
기도만 있고
실천이 없으면
삶은 선물일 수
없다.
사순은 광야가
가리키고 있는
하느님을 만나는
시간이다.
하느님과의
만남으로
살아있는
사랑의
시간이 된다.
사랑은
사랑으로
우리 자신을
사랑이
되게한다.
삶 안에
광야가 있고
사랑 안에
고통이 있다.
광야에서
삶의 길을
만난다.
말씀 안에
유혹을
봉헌하는
시간이다.
말씀과
유혹 사이에
사람의 삶이
있다.
유혹 속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먼저
받아들이시는
예수님이시다.
오직
하느님만을
만나는 되는
우리 자신의
광야이다.
유혹은
하느님 사랑을
이길 수 없다.
하느님과
함께 하는
광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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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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