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유아는 민준의 연락을 받고 병원으로 허겁지겁 달려갔다.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싶다. 탈진할 정도로 촬영에 몰두한 그가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병원에 도착한 유아는 가쁜 숨을 헉헉 내쉬며 민중이
알려준 병원호실로 들어서는 복도를 걸었다.
그가 입원한 병실 문에는 당분간 관계자 외 출입금지라는 팻말이 걸려있었다.
그래서 기자들은 헛걸음을 하고 돌아가야만 했다.
그녀는 과감하게 병실 문손잡이를 돌렸다. 끄떡도 하지 않는 채 돌아가지
않는 손잡이. 문은 굳건히 잠겨져 있었다.
문을 두드리는 수밖에.
탕!탕!
너무 힘차게 두드렸나, 소리가 우렁차다.
“인터뷰는 현수씨가 안정을 찾으면 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만 돌아가 주십시오.”
“저 유아에요. 문 열어주세요.”
안에서 들려오는 매니저의 목소리에 유아는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은 열리지도 않을뿐더러 매니저는 벙어리가 되어버렸는지
대답조차 없었다.
“저 오빠 봐야겠어요. 문 열어주세요.”
유아가 사정하듯이 말하자 매니저는 갈등 끝에 문을 열었다.
“어떻게 알고...”
그녀가 병실 안으로 들어서자 매니저는 난감한 눈빛을 지으며 말했다.
유아는 매니저가 왜 문 열어주기를 망설였는지 알 수 있었다.
팔에 링거를 꽂은 채 잠들어 있는 그의 옆에는 이연이 간호를 하고
있었다. 유아보다 이연이 빨랐다.
이연은 물수건으로 현수의 얼굴을 닦아준 뒤 일어나 유아에게 손 내밀었다.
“서이연이라고 합니다.”
경계하는 눈빛을 보내며 악수를 청하는 그녀의 손을 유아는 할 수 없이 잡았다.
그녀는 5년 전 처음 사진으로 봤을 때처럼 여전히 아름다움 여인이었다.
“하유아라고 합니다.”
바보같이 목소리가 기어들어가고 말았다.
병실에 그녀가 와 있으리라곤 상상도 못했다.
이제 그녀와 현수는 아무관계도 아니라고 믿고 있는 유아에게는 당황스럽고
힘 빠지는 일이었다.
“현수씨는 제가 간호할게요.”
이연의 차분한 말에는 단호함이 묻어있었다. 그 단호함에 유아는 서서히 열이
올랐다.
“간호를 하던 뭘 하든 마음대로 하세요. 전 아픈 오빠를 보러 왔으니까요.”
유아가 현수에게 가까이 가려하자 이연이 가로막았다.
“나가서 얘기 좀 할까요?”
장미에 가시가 없으면 그 꽃이 장미가 될 수 있으리?
이연은 유아에게 그런 느낌을 주는 여자였다.
“왜들 그럽니까, 아픈 현수 앞에서.”
매니저가 중재에 나섰다. 유아는 이대로 가만히 있자니 못 올 데를 온 것처럼
기분이 나빠졌다.
“좋아요. 나가죠.”
두 사람은 사람들이 없는 복도 끝으로 걸어갔다. 복도 벽에 붙어있는 간이 의자에
조금 떨어진 채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은 얕을 한숨을 내쉬었다.
“앞으로 현수씨 일에 신경 쓰지 말아주세요. 두 사람은 법적으로 인정된
남남입니다.“
단독 직입적이고 차가운, 거의 명령이나 다름없는 이연의 말에 유아는
주먹을 꽉 쥐었다.
“누구 때문에 오빠와 제가 이혼을 했는데요? 바로 당신 때문이잖아요.”
유아는 화를 내지 않으려고 허파를 진정시켜야 했다.
적방하장은 이럴 때를 두고 하는 말이다. 감히 명령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건지.
“현수는 영화 촬영 끝나면 저와 결혼하기로 했어요. 현수에게는 핏줄인
지은이가 유아씨보다 더 소중해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지은이를 현수의 딸이라고 말하는 것이 어이가 없는
유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이연을 내려다보며 섰다.
“딸이라구요? 저 이제 다 알아요. 당신 딸은 당신 딸일 뿐이에요.”
흥분한 유아가 우스워 보이는지 이연은 피식 웃으며 팔짱을 꼈다.
“현수는 지은이를 자신의 딸로 키우기로 했어요. 아빠 없는 지은이가
애처롭다면서. 자기 밑으로 호적까지 올렸어요. 믿지 못하겠다면 보여 줄 수도
있어요. 그리고 저에게 프러포즈까지 했어요. 제 손에 낀 반지 보이죠?
이게 현수가 저에게 준 반지에요.“
이연이 왼손을 펼치며 유아에게 보였다. 그녀의 왼손 약지 손가락에는 화려하게
빛나는 다이아몬드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다이아몬드가 자신을 비웃는 것 같이
빛나 보이는 유아는 머리끝이 곤두섰다.
“오빠 깨어나면 직접 확인 할 겁니다. 그때까진 아무 말도 안 믿을 겁니다.”
유아는 휙 몸을 돌려 현수가 있는 병실까지 성큼성큼 사라졌다.
유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연은 미안한 감정을 무언의 시선으로 보냈다.
‘유아씨...미안해요.. 저 현수를 아직은 보낼 수 없어요...현수에게 물어도
현수는 그렇다고 할 거예요.‘
유아가 병실로 들어가자 현수는 막 잠에서 깨어나고 있었다.
“오빠!!”
안도하면 현수에게 다가서자 현수는 유아를 한 번 쳐다본 뒤 매정하게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렸다.
“오빠.........”
현수의 냉대에 유아는 감정이 복받쳐 올라 울음 터트리기 일보직전이었다.
가슴이 미어터지는 유아가 보이지도 않는지 현수는 팔에 꽂힌 주사바늘을
사정없이 확 뽑아버리고 침대에서 내려오려 했다.
“안돼, 오빠! 왜 이래!”
“야! 이현수!”
유아와 매니저가 그를 말리려 해 보았지만 오히려 그를 자극하는 꼴이 되어버렸다.
“나 건드리지 마.”
현수는 현기증을 느끼면서 유아에게 약한 모습 보이지 않으려 꿋꿋이 두 다리로
몸을 지탱하고 있었다.
“오빠....”
그녀가 애원 섞인 눈빛으로 불러보아도 그는 싸늘했다.
“유아, 너! 내 말 뭘로 들었어! 내 눈에 띠지 마. 내 곁에는 더더욱 오지 마.
알았어!?“
자꾸만 그녀를 밀어내려는 현수였다. 병실을 감도는 공기가 싸늘하다 못해 냉하다.
“내가 그러면...내가 그렇게 하면..오빤 행복해? 지금 오빠 눈앞에 있는 내가
어떤지 안 보여? 난 내 눈앞에 있는 오빠가 어떤지 눈 감고도 훤히 보이는데
오빠는 안 보여?“
유아는 결코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울먹거리지도 않았다.
“그딴 거 보고 싶지 않아.”
그는 강력한 펀치와도 맞먹는 말을 내뱉고 그녀의 옷깃을 스치며 병실을
빠져나갔다.
아무 생각도 느낌도 들지 않는 유아는 인형이 되어버린 듯 가만히 서 있었다.
그딴 거....그딴 거....
사람의 마음이, 감정이 한 순간에 변해버리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닌가보다.
오빠는 이제 날 보기 싫어한다....날 떼어놓아야 편한가 보다.
오빠의 아름다운 사랑 느껴보지도 못한 채 또 쓸쓸히 살아가야 하는
운명인가 보다. 삶의 낙이 사라진다. 검은 암흑 속으로 천천히 빨려 들어가는 것
같다. 세상의 신들은 날 사랑할 수 없는 여자로 찍었나 보다.
난 이제 무얼해야 하나....
유아의 두 볼에 쓸쓸한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새로 시작하는 기분으로 들떠있었던 그녀는 초라하게 희망을 잃어버렸다.
유아에게 모진 말을 하고 돌아선 현수는 가슴이 아파와 한 손은 벽을 짚고
다른 한 손으로 가슴부위를 문질렀다.
‘이현수...참아야 돼...’
뒤따라오던 매니저와 이연이 양쪽에서 그를 부축해 주었다.
“못난 놈.”
매니저는 화가 나서 안타깝게 말했다. 맞는 말이었다.
그는 오직 유아만을 위한 길이라며 못난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연은 현수가 죽을 것 같이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면서 생각을 고쳤다.
사랑은 자신만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 어리석게도 지금에서야 깨달았다.
사랑하는 사람의 웃는 얼굴만 보아도 행복해 질수 있는 것, 그것이 사랑이라는 걸.
“현수 부탁합니다. 전 유아씨한테 가 볼게요.”
이연은 현수를 두고 홀로 마음정리를 하고 있을 유아에게 다시 발걸음을 힘차게 돌렸다.
그녀는 지금 걷고 있는 이 발걸음이 일생 중 가장 가벼운 발걸음이었다고 장담했다.
**
“지은아, 이거 누가 줬어?”
어린이집에서 돌아온 지은의 팔에는 노란색 곰 인형이 안겨져 있었다.
지은이는 입만 벙긋거리고 있었다.
“선생님이 선물로 주신 거야?”
이연이 차근하게 묻자 지은은 아니라고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럼?”
이연은 꺼림칙하고 수상한 기운을 느꼈다. 지은이 며칠째 아빠보고 싶다는
말을 입에 달고 지냈다. 이연은 당연히 현수를 두고 하는 말이겠거니 지나쳤었다.
“지은아, 말해 봐. 괜찮아.”
지은이 편하게 대답할 수 있도록 다독거려 주었다.
“아빠가....사줬어..”
이연은 현수가 지은이에게 인형을 사줬을 리 없다는 걸 알고 있다.
현수는 병원에서 무단퇴원한 후로 눈코 뜰 새 없이 영화촬영에만 혼신의 힘을
기울이고 있으므로.
이연은 지은이 놀라지 않도록 질문을 계속했다.
“지은아, 아빠가 어린이집에 자주 와?”
“매일 와.”
사슴 같은 눈망울로 지은은 즐거운지 눈웃음 지었다.
생각만으로도 지은을 웃게 해주는 남자가 승철 일거란 불안한 예감이 들자
이연은 눈앞이 아찔해졌다.
‘승철이 알아버린 걸까?’
필연적으로 얽힐 수밖에 없는 부녀지간을 그녀가 무슨 수로 막으리.
지은이 승철을 아빠라고 따르는 것을 보니 무작정 막을 수만도 없는
일이었다.
**
잡지책에 실린 어릴 적 사진을 보고 기겁한 태호가 잔뜩 먹구름 낀 얼굴로
유아 앞에 나타났다.
“이게 뭔지는 잘 알겠지?”
태호가 잡지책을 활짝 펼쳤다.
“오! 이거 나왔네! 기사 어떻게 썼는지 보자.”
유아는 오로지 기사 내용에만 관심이 있었다. 허파 뒤집어지는 건 오직
태호일 뿐.
“누나! 이건 초상권침해라고!”
“웃기네. 야! 엄한 사진 실린 것도 아닌데 왜 그래?”
“내 엉덩이가 다 보이는 데 이게 엄한 사진이 아니면 뭐가 엄한 사진이야!?”
“어머! 진짜네! 한 장 아무거나 선택하라 하고 신경 안 썼는데 이 사진 가져갔었네.”
유아는 비로소 태호에게 미안한 눈빛을 보냈다.
“나 다시 누나 부탁 생각해 봐야겠어! 도저히 이 기분으로는 누나의 그 부탁
들어줄 수가 없어!“
단단히 삐친 태호를 보고 유아는 빨리 사태수습에 나서야 했다.
“태호! 내가 잘못했어. 니가 해 달라는 거 다 해줄게. 그러니 그 부탁은 꼭
들어줘야해 응?“
유아는 두 손을 모으면서 최대한 불쌍하고 애처로움을 느끼게 만드는 표정을
지었다. 말이 좋아 누나지, 태호에게 유아는 어쩌지 못하는 애물단지였다.
“아휴! 진짜...누나의 태풍 같은 애정전선에 나만 이리저리 휘날리지.
두고 봐. 나도 똑같이 만들어 줄 테니까.“
잡지책을 보기도 싫다는 듯 침대위로 내팽겨 치고 태호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태호야...역신 넌 내 하나뿐인 남동생이야..
누난 니가 날 얼마나 생각하는지 다 알아.. 누난 너 힘들 때 위로조차 제대로
못해 줬는데...니 말대로 꼭 똑같이 만들어 줘. 신세진 건 보답해야지...
고맙다. 하태호.
**
어김없이 어린이 집을 찾은 승철은 지은을 데리러 온 이연과 마주쳤다.
지은은 승철을 보자 반가움에 이연의 손을 놓고 승철에게 뛰어갔다.
“아빠.”
스스럼없이 승철을 아빠라 부르며 안기는 딸의 모습에 이연은 착잡한 심정이었다.
승철은 지은이를 번쩍 안고서 이연에게 다가갔다.
“미안해. 사실을 알고서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었어.”
승철은 진심으로 말했다. 그녀가 앞으로 지은이를 만나지 말라는 말만은 안 해주기를
간절히 바랬다.
“설날에 떡국 먹으러 와. 지은아, 엄마랑 집에 가야지.”
이연은 무뚝뚝하게 말을 툭 내뱉고는 지은이를 안았다.
“그렇다고 안심하지는 마. 널 용서한 건 아니니까.”
승철은 감정 없는 이연의 말 한마디에도 기뻐서 춤을 추고 싶을 지경이었다.
어린이집 놀이터를 지나는 이연과 딸을 바라보며 승철은 참회의 기회를 준
모든 것에 감사해 했다.
‘우리..이렇게 차츰차츰 가족이 될 수 있는 거지?......
이연아...지은아...사랑한다..‘
푸른 하늘 전깃줄에 나란히 내려앉은 두 마리의 까치가 기운차게 지저귀고 있었다.
26.
대한민국 최대의 명절인 설날의 아침이 밝았다.
이날 유아가 잠에서 깨어나 본 세상은 온통 설원이었다.
하얗게 치장한 바깥 풍경은 감상적이었지만 늦겨울에 찾아온 눈 때문인지
아침부터 콧물이 막 나왔다.
과도하게 성대를 사용한 탓에 목소리도 꽉 잠겨 있었다.
“오늘 한서방이 온다고 하던데 예쁘게 하지 않고서.”
차례상 예의에 어긋나지 않게끔 단정하게만 하고 나온 유아를 어머니는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엄마....한서방이라고 하지 말라고 몇 번을 부탁해...나 목 아파서 말도 잘 안 나와..
한서방이라고 하지 마세요....“
“한서방보고 한서방이라고 부르지, 그럼 뭐라고 부르니?”
아휴....졌습니다요...
점심 무렵 민준이 손에 한우불고기 선물세트를 들고서 유아의 집을 방문했다.
그녀의 부모님은 마치 민준을 사위라도 된 것 마냥 대접하며 연신 하하 호호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겨우 민준을 부모님으로부터 탈출시킨 유아는 지치다 못해 탈진할 것만 같았다.
“유아씨, 많이 아파 보이는 데 괜찮아요?”
의사인 직업관으로 민준은 유아를 환자 다루듯 이마를 짚어보고 입술을 강제로
벌려 편도선 쪽을 살펴보았다.
유아는 그가 한 손으로 자신의 양 볼을 눌러 입술을 벌릴 때 힘이 없어 막지도
못했다.
“목젖이 축 내려앉았고, 편도 쪽이 많이 부었어요. 적당히 해요.”
“적당히 할 수 없다는 거 잘 아시잖아요.”
그들은 대화를 멈추고 테라스 창가에 서서 설원의 풍경에 조용히 빠져 들었다.
**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설 특집 톱스타 가요제에 가수대표와 연기자 대표에
각각 태호와 혜은이 속해 있다.
“오랜만이다?”
혜은이 먼저 태호를 발견하고 말을 걸었다.
“너도 여기 나오냐? 그럴 줄 알았으면 안 나오는 건데.”
태호의 반감서린 말에 혜은의 표정이 굳어졌다.
“방송 들어가기 10분 전입니다. 준비들 하시구요. MC들이 커플댄스를
무작위로 시킬 때 열심히 해주시길 바랍니다.“
담당PD가 직접 나서서 출연자들에게 당부의 말을 전했다.
‘커플댄스? 큰일이네! 노래만 하면 된다고 해서 출연하기로 한건데....’
안 그래도 굳어진 혜은의 얼굴이 댄스를 춰야 되는 걱정으로 인해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지금와서 출연번복을 할 수 도 없었다.
혜은의 표정이 어두운 걸 본 태호는 웃을 듯 말 듯 눈짓을 지으며 무대에 오를
준비를 했다.
MC들의 현란한 소개로 무대에 오른 혜은은 근심걱정을 뒤로 감추고 카메라 앞에서는
영화배우답게 금방 표정관리에 들어갔다.
혜은의 뒤를 이어 마지막 가수대표로 태호가 불리어졌다.
가수와 연기자들은 그동안 보여주지 않았던 특별한 무대를 선보이며 시청자들을 즐겁게
해주려고 자신이 그동안 쌓아온 이미지를 뭉개는 일도 망설이지 않았다.
이윽고 MC들이 무작위로 가수팀과 연기자팀에서 남녀를 각각 한명씩 지명해
커플댄스를 추게 하는 순서가 되었다.
혜은은 자신이 지명되지 않도록 고개를 푹 숙였다.
“강혜은씨, 그렇게 고개 숙이고 있으면 더 튀어 보입니다. 강혜은씨 나와 주시죠~!”
혜은은 짓궂은 메뚜기MC의 지명에 눈을 꽉 감으며 웃고는 있지만 팔다리가
후들거려 제대로 걸을 수도 없을 것 같았다.
“우리 가수팀에서는....어! 태호씨가 자진해서 나오는 군요. 이 두 사람 나이도 동갑이죠?
상당히 기대가 되는 무대입니다.“
가수팀에서 태호가 나오자 혜은은 망연자실했다.
최고의 춤꾼과 최대의 몸치가 커플 춤을 추게 될 상황이었다.
혜은은 태호의 속셈을 알 것 같았다.
‘하태호! 아무리 내가 싫어도 그렇지...이건 정말 너무한다...’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돼지도 이런 기분은 아닐 것이다.
무대 정중앙에 서자 음악이 흘러나왔다. 그것도 섹시 춤을 요구하는 음악이.
어찌할 바를 몰라 박수만 치고 있는 혜은의 손을 갑자기 태호가 덥석 잡으며
윙크를 했다.
“긴장 풀고 나한테 집중해.”
지금껏 볼 수 없었던 태호의 따사로운 눈빛과 진지하게 자신을 위하는 모습에
혜은은 태호가 한 순간에 믿음직한 남자로 보이기 시작했다.
혜은은 태호의 눈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몸을 맡겼다. 그가 이끄는 대로 몸이 자유자재로
움직여졌다. 허리가 유연하게 꺾여짐은 물론이고 한바퀴 턴하는 동작도 오로지 태호의
감각적인 손놀림에 의해 연출되었다.
주위에서 부러움에 떠는 탄성들이 터져 나왔다. 미소를 잃지 않으며 리드를 하는 태호의
박력과 가쁜 숨소리를 가까이에서 느낀 혜은은 가슴속으로 밀려드는 아찔함에
숨이 멎을 듯 했다.
보통 짧게 끊어 치는 게 커플댄스인데 담당 PD는 음악이 끝날 때까지 Q사인을 보내지
않았다. 무대위에 선 그들에게 모두 매료되어 음악이 끝나고도 좀처럼 흥분이
가라앉지 않았다.
음악이 끝나고 춤을 멈춘 태호는 혜은을 향해 싱긋 웃어주고는 손수건으로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주는 자상함까지 보여줬다.
그야말로 보는 사람들 뒤로 넘어갈 상황이었다.
혜은은 두 다리로 버티고 서 있는 것만 해도 대견스러웠다.
미친 듯이 심장은 고동치고 점점 태호라는 아주 멋진 한 남자에게 빠져 들어가
헤어 나오질 못할 것 같았다.
제자리로 돌아가며 한 순간일 뿐이라고 자신을 타일렀지만 자꾸만 가수팀에
앉은 태호에게 시선이 가는 건 부정할 수 없었다.
**
설날인데 그리운 가족들 얼굴도 보지 못한 강영은 가족들과 통화를 끝내고
친구와 통화를 하고 있을 때였다. 서로 안부를 물으며 이런저런 얘기를 하던 중
갑자기 친구의 하이톤 같은 감탄사에 강영은 궁금해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 그래?“
“어머! 지금 나 설 특집 톱스타 가요제 보고 있는데 세상에 태호가 스스로
나와서 강혜은 하고 커플댄스 추네. 웬일이야! 저 둘이 사귀는 건가?“
태호 소식에 두 귀가 확 열린 강연은 자세하게 듣고 싶었다.
“수정아, 처음부터 자세하게 얘기 해봐. 어떻게 된 거니?”
“어...잠깐만...우와! 장난 아니다! 아- 태호 왜 저래! 어머머! 강혜은 얼굴
빨개졌다. 나 같으면 터진다. 태호야-아...그러지마. 가슴 아프다.“
친구는 감탄사만 연발하며 설명은 뒤로 제쳐두었다.
“야, 이런 말 하긴 싫지만 태호랑 강혜은 진짜 커플 같다. 우와! 미쳤어!
미쳤어! 손수건으로 땀까지 닦아주네! 태호야아-“
실시간으로 중계되는 친구의 감탄사와 넋두리 같은 말에 강연은 속이 쓰렸다.
안 봐도 영상이 훤히 보였다.
“태호 여전히 멋있어?”
강영이 일부러 쾌활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의 친구는 강영이 태호와 커플이었다는
사실을 모른다.
“멋있다 뿐이겠냐? 나 오늘 태호한테 뿅갔다. 강혜은은 남자 복이 터 졌어 터졌어!
이현수도 부족해서 태호까지. 아- 부럽다 부러워.“
“그래....나도 부럽다..”
“너 언제 한국에 올 거야? 휴가 없어?”
“당분간은 한국에 안 갈 거야. 너 프랑스로 여행 한 번 와. 파리 세느강이 아주
낭만적이야. 특히 밤에.“
“오우~! 너 애인이랑 밤에 세느강 갔었구나?”
“그래 갔다. 후....연락자주하게.”
강영은 통화를 끝내고 태아가 든 배를 어루만졌다.
‘아가야...엄마가 잘 하고 있는 건지 요즘 들어 회의가 들어....
잘 견딜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하루하루 날이 갈수록 너의
아빠가 그리워지고 이렇게 아빠소식 접할 때마다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어져....‘
**
“하태호”
생방송을 무사히 마치고 아니, 감동의 도가니로 만들고 세트장을 빠져나가는
태호를 혜은이 붙잡았다. 주위에 사람들이 많은데도 혜은은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모습이 오해를 덜 불러들이는 법이다.
“왜?”
다시 본래의 싸가지 어투로 돌아온 태호였지만 이미 태호에게 귀와 눈이 멀어버린
혜은은 그저 다정스럽게 들려올 뿐이었다.
“지금 저녁밥 먹으러 갈 거지?”
“그런데?”
“내가 저녁 살게. 오늘 일부러 나 창피하지 않도록 같이 춤 춰준 거 알아. 고마워서
그래.“
혜은은 한 마리의 순한 양이 되어 버렸다.
“야, 신경 쓰지 마. 다른 여자들이랑 추면 너무 들이대서 널 택한 거니까.”
“그래도 고마워. 고마움을 보답할 기회를 줘.”
어떻게든 태호를 붙잡고 싶었다. 태호를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기분이
좋아지는 혜은이었다.
콩깍지가 제대로 씌어졌다.
“강혜은, 오바 좀 하지 마. 으이구.”
태호는 혜은의 이마를 손끝으로 툭 치고는 매니저에게로 달려갔다.
태호의 손끝이 머문 이마를 만지며 혜은은 머쓱하게 웃었다.
**
기나긴 겨울이 문을 닫고 향긋한 봄의 문이 열렸다.
강산에는 얼음이 녹아 흐르고 나뭇가지마다 봄옷으로 갈아입기 바빴다.
유아도 봄의 기운을 받아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다.
“민준 오빠 고마워요.”
유아는 환자복을 돌려주며 말했다.
민준과 가깝게 지내다 보니 유아는 어느새 민준씨에서 민준오빠라고 호칭을
바꿨다.
“내가 뭘 대단하게 도와준 게 있나요...다 유아씨 아이디어인데.”
“아니에요. 병실 쓰게 해 주시고 인터뷰까지 해 주셨잖아요. 그것만 해도
대단하게 도와주신 거예요.“
“그렇게 느끼니 내가 더 고맙네요.”
두 사람은 병원 휴게실에서 커피를 마시며 환하게 웃었다.
**
“누나, 이거 CD. 원본은 약속장소에 있어. 장소는 서울 시네마고 3시니까
늦어도 2시 50분까지는 와 있어야 해. 오늘 실수하지 말고 잘해.
이번이 내가 누나의 애정전선에 마지막으로 참여한다는 걸 잊지 말고.“
태호는 선물상자를 유아에게 건네며 말했다.
아무데나 담아서 주면 되는데 예쁜 선물상자에 CD를 넣어서 준 태호의 세심한
마음씀씀이가 전해졌다.
“너 올 거지? 와야 해.”
“나도 가고 싶은 마음은 우주 같은데 강혜은 때문에 안 가. 설특집 때 커플 춤 춘
이후 애가 이상해졌어.“
“강혜은이?”
“나랑 밥 한 끼 못 먹어서 환장한 애 같다니까. 마주칠 때마다 밥 먹자고 노래를 불러.”
“치, 난 또 뭐라고. 그까짓 밥 한 끼 같이 먹어줘라.”
“싫다. 밥 한 끼가 두 끼 되고 밥 먹으면서 만나면 정들어.”
지독한 연인과의 이별이후 연애하기를 돌보듯 하는 태호였다.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고 했는데 태호는 아픈 만큼 마음의 철장을 굳건히
닫고만 있다.
사랑하는 법도 핏줄끼리 닮는가?
어떻게 해서 자신과 똑같이 한 사람만 지고지순하게 사랑할 수 있는지
유아는 신기했다.
“그 여자 못 잊겠으면 하루빨리 다시 찾아. 날 봐, 이렇게 생고생 하잖아.”
말은 생고생이라고 하지만 유아는 준비하는 내내 즐겁고 잘하고 있는 거라고
느꼈었다.
“난 누나처럼 이런 유치한 방법은 안 쓴다.”
“뭐? 유치해? 이게 뭐 유치하냐? 얼마나 감동적인데.”
“감동? 훗, 두고 보자구요. 늦지 말고 가.”
“야! 너 정말 안 올거야?”
“보고.”
태호가 가고나자 유아는 선물상자 안에 든 CD를 꺼내 틀고 약속장소로
가기 전 마지막 예행 연습을 했다.
오빠 기다려. 내가 갈게.
연습을 끝낸 유아는 오디오에서 CD를 꺼내 다시 상자 속에 넣고 상자를
화장대 서랍 속에 넣기 전 상자에 입맞춤을 했다.
몇 년이 지난 후 이 CD를 보면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민망해질지도
모를 일이지만 난 후회하지 않아.
나의 마음이 이 안에 담겨져 있어. 이 마음이 오빠에게 전해지지 않아도
괜찮아. 나의 사랑이 부족해서 그런 것일 테니까.
오늘 그 동안 오빠가 얼마나 어리석은 행동을 했는지 깨닫게 될 거야.
27.
독하다는 소리까지 들어가며 영화에만 전념한 현수는 첫 시사회 현장에
함께 하지 못하는 유아가 떠올랐다. 유아를 생각하면 당장 달려가 먼발치에서
뒷모습이라도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사랑하는 사람과 떨어져 있는 것은 최악의 고문이 따로 없다.
영화는 단기간 촬영임에도 불구하고 짜임새를 갖췄다는 호평과 아울러
불미스런 스캔들에도 꿋꿋이 훌륭하게 연기한 현수를 전문가들이 높이
평가해 주었다.
그는 영화가 더 이상 영화관에서 상영되지 않을 때 잠시가 될지 몇 년이 될지
기간이 정해지지 않는 여행을 떠날 계획이다. 유아를 잊을 수는 없겠지만 열병은
다스릴 수 있으리라.
그는 가끔 민준을 통해 유아에게 더 이상 승철이 접근하지 않는지 확인을 하곤
했었다. 민준은 그를 안심시키려 했는지 아니면 정말 승철이 유아를 단념한
것인지 더 이상의 접근은 없다고 알려주었었다.
그리고 한 번은 현수가 그에게 유아와 결혼 할 것이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그 질문에 민준은 첫 시사회를 마치면 대답해 주겠다고 대답을 피했었다.
곧 그의 대답을 들을 수 있으리.
“떨려요?”
무대에 오르기 전 혜은이 현수에게 물었다.
“약간 떨리네요. 혜은씨는요?”
“태호를 볼 때 만큼은 안 떨려요. 오빠, 태호가 절 볼 때마다 피해 다녀서 속상해요.
저 이참에 성질나서 가수로 확 나가 버릴까 봐요. 그럼 빈번히 마주칠 테고
그럴수록 알게 모르게 태호도 절 여자로 볼 수 있잖아요.
현수는 어쩌다 태호에게 눈과 마음을 줘버린 혜은이 마냥 귀여워 보였다.
태호와 예전 같은 사이라면 두 사람 사이를 이어주는 메신저가 되 줄 수도
있겠지만 태호는 현수와 마주쳐도 말 한마디 건네지 않고 냉정하게 스쳐
지나갔었다.
태호의 심정도 충분히 이해가 되기에 현수는 서운해 하거나 미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죄인 된 심정으로 미안할 따름이었다.
**
극장 안을 꽉 채운 관객들의 열렬한 환호와 박수가 터지자 현수와 혜은은
시사회 무대에 올라섰다.
무대 아래에서 치열한 취재경쟁을 벌이는 카메라 기자들이 연신 카메라
플래쉬를 터트렸다.
현수는 관객들의 성원에 환하게 미소 지었지만 그 미소 속에는 쓸쓸함에
배어있었다.
“네, 이렇게 많은 분들이 와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촬영 중에 갖가지
스캔들이 터졌었던 거 여기계신 여러분들도 잘 알고 계실 겁니다.
그 스캔들에 관해서 지금 이 자리에서 진심으로 죄송한 마음을 전합니다.
결혼한 사실을 지금 이 자리에서 떳떳하게 밝히려고 했었는데 일이 이렇게
되어서 안타깝습니다. 저의 아내였던 그녀에게 이 영화에 깃든 저의
혼을 바칩니다.“
그의 시사회 소감을 들은 사람들이 엄숙해졌다. 그는 엄숙해진 분위기에
약간 당황하며 마이크를 혜은에게 넘겼다.
“먼저 이 자리를 빛내 주시는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촬영 내내 친오빠 같이, 때론 친구같이 대해주신 이현수씨와 감독님, 수많은
스텝진들 감사합니다. 저는 지금 이 자리에서 이현수씨께 묻고 싶습니다.
당신이 사랑했던 아내, 하유아씨를 아직도 혼자 두실 겁니까? 대답은 영상을
보신 후에 듣겠습니다.“
혜은의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영화영상이 나와야 할 대형 스크린 화면에
유아의 모습이 나왔다. 그것도 병원환자복 차림에 병실침대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머리카락은 길게 늘어뜨려져 있고 얼굴은 몹시 창백해 병약해
보인다는 걸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유아야...’
현수는 대형 스크린 화면으로 보이는 병약한 유아의 모습에 불길한 마음이
들었다.
자신이 유아를 못 본 사이에 유아가 어딘가 많이 아팠다는 느낌에
현수는 그만 힘이 빠져 무릎을 꿇고 말았다.
그동안 잘 있다는 민준의 말은 몽땅 거짓말이었다는 충격까지 더해져
무섭기까지 했다.
그는 아픈 유아를 바라볼 수 없어 고개를 숙였다.
[오빠]
영상으로 보는 유아가 애뜻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유아의 부름에 그는
고개를 들 수밖에 없었다. 유아는 큰 병에 걸린 환자 같아 보였다.
[오빠, 영화 성공적으로 마친 거 축하해.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을지 잘 알아.
내가 이렇게 오빠에게 인사하는 건 첫 시사회 때 아마도 같은 하늘아래
없을 것 같아서 미리 인사하는 거야.]
‘!!! 같은 하늘아래...없을 것 같아서....?!!!’
[오빠, 내 마음속에 다른 사람이 들어오기 전에 내 곁에 와 줘서 고맙고
지금도 내 마음속에 있어줘서 고마워. 오빠와 함께 한 이 세상 죽어서도
영원히 잊지 못할 거야.....날 사랑하고....나를 위해...오빠의 아픔까지 감수한
그 사랑을 내가 어떻게 잊어.... 5년 전 유학길에 올랐을 때도 다 날 위한
길이었잖아.... 오빠는 무조건 내 행복만 생각했지만 난 오빠 없이는...한 순간도
행복하지 않아....오빠, 다음 생에서는 날...절대 놓지 마... 함께 한다는 게 행복인거야.
난 다시 태어날 거야...오빠를 위해서. 그땐 오빠 마음 편히 웃으며 유아야 하고...
내 이름 힘차게 불러줘야...돼? 자-..약속.]
유아는 오른손 새끼손가락을 들며 약속하는 동작을 했다.
현수는 스크린으로 보여 지는 유아의 모습이 꼭 죽기 전 마지막 인사 같아
심장이 마구잡이로 덜컹거렸다.
‘뭐야! 이게 뭐냐구!’
그가 무릎을 펴고 벌떡 일어났다.
[오빠, 마지막 내 선물 끝까지 보기 전에 화면에서 눈 떼지 말아줘.
오빠....안녕]
유아의 모습이 사라지고 다음화면으로 의사인 민준이 등장했다.
현수의 눈동자는 민준에게 집중했다. 자신의 예감이 제발 틀리기를 간절히 바랬다.
[현수씨, 그동안 유아씨 잘 지내고 있다고 말은 했었지만 사실 심장이 급속히
안 좋아져서 병원 치료 중이었습니다. 앞서 보신 화면은 유아씨가 숨을 거두기
일주일 전에 녹화한 것입니다. 유아씨는 현수씨가 영화촬영에 몰두 할 수
있도록 자신의 병을 알리려 하지 않았습니다. 기쁜 날 슬픈 소식 전해드려서
저로서는 가슴 아프고 안타까운 일이지만 유아씨의 마지막 부탁이었기에 이렇게
화면으로나마 유아씨를 보여 드립니다.]
얼이 빠진 현수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유아가...죽다니...지금 그걸 나보고 믿으라고?’
그가 영상을 끝까지 보지 않고 뛰쳐나가려 하자 태호가 무대위로 휙 올라
현수 앞을 가로 막았다.
“누나 말 벌써 잊었어? 끝까지 봐.”
“말해봐...유아...죽은 거야?...”
현수는 유아의 묘 앞에 서기전까지는 절대 믿을 수도 없는 일이며 따라서 눈물도
흘리지 않으리 다짐했다.
태호가 묵묵부답을 하는 사이 화면은 바뀌고 병실에 있는 유아가 다시 나타났다.
[오빠, 지금 불러주는 노래는 내 마음을 가득 담은 곡이야. 노래가 흘러나가면서
오빠와 내가 만들었던 추억의 사진들과 오빠에게 해주고 싶었던 나의 소망들이
보여 질 거야. 오빠, 내 선물 기쁘게 받아줘...음!..]
유아는 노래 부르기 앞서 목을 가다듬었다.
‘유아야...뭐 하자는 거야....정말...왜 이래.....’
현수는 극도로 불안해졌다. 유아가 없는 현실이 이처럼 끔찍스러울 지는 애초에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유아와 헤어졌어도 유아는 어딘가에서 살아 숨쉬고 있으니
그리움과 가슴 저며지는 것만 참으면 되는 것이었는데 죽음은 차원이 달랐다.
영영 두 번 다시는 볼 수 없는 이별이란 뜻이다.
유아의 노랫소리가 선율을 타고 시사회현장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의 귀에 닿았다.
영상은 그와 유아가 함께 했던 추억들이 담긴 사진들이 한 장씩 보여 주고 있다.
[보이지 않아도 너를 느낄 수가 있어서 니 사랑도 니 행복도
결국 내가 또 너를 배웅하네 서운하게 서운하게 이러기니
아무 말도 없이 떠나가는 게 미워하고 미워하게 매일 기도하지만
내내 너만 떠올라 십년이 지나도 백년이 지나도
천년이 지나도 나는 너를 못 잊어 십년이 지나도 백년이 지나도
너를 기다리는 게 내겐 가장 쉬운 일이니까]
현수는 서글프게 들리는 유아의 노랫소리를 들으며 화면으로 보이는 영상을
놓치지 않았다.
함께 즐겼던 시간, 추억을 기억하는 사진.
그 사진속의 그들은 해맑음을 가지고 있었다. 눈물, 불행, 어둠은 얼씬도 하지
못할 정도로.
그는 유아가 꼭 갖고 싶어서 미리 준비해 놓은 것이라는 자막이 뜨고
해바라기가 수놓아진 아기 베넷저고리를 보고 입을 틀어막았다.
구슬픈 뜨거운 눈물이 얼굴로 녹아내리고, 주저 않아 엄마 잃은
어린아이 같이 목 놓아 울고 싶었다.
‘유아야....이러지마...오빠가 잘못했어..유아야...’
보다 못한 혜은이 손수건을 현수에게 건넸다.
그는 손수건을 받고 꽉 쥐고만 있을 뿐 눈물을 닦지 않았다.
자신은 눈물 닦을 자격도 없다고 보았기에.
1절이 끝나고 간주가 조용히 흘렀다. 모두 숨죽이며 헛기침소리 한번 내지 않는다.
“안부라도 안부라도 막연하게 혹시 전해질까 기도하지만
미워하고 미워하게 매일 기도하지만 내내 너만 떠올라
십년이 지나도 백년이 지나도 천년이 지나도 나는 너를 못 잊어“
2절을 노래하는 유아의 목소리가 마치 옆에 있는 듯 생생하게 들려오자
현수는 고개를 소리가 나는 쪽으로 돌렸다.
“십년이 지나도 백년이 지나도 너를 기다리는 게 내겐 가장 쉬운 일이니까
사랑할 시간이 너무 모자랐던 우리 그때 지우고 또 지워도 넌 아직
남아있는데 도대체 어쩌란 말야 내가 참 미련한거야 다시는 안 오는 거야
바보처럼 기다릴 꺼란말야 십년이 지나도 백년이 지나도
천년이 지나도 나는 너를 못 잊어 십년이 지나도 백년이 지나도
너를 기다리는 게 너 하나 기다리는 게 웃고 있어도 되려 눈물이 나“
유아, 그녀가 순백의 천사처럼 하야웨딩드레스를 입고 한손에는 해바라기 꽃다발을
다른 한 손에는 마이크를 든 채 노래를 부르며 그에게로 한걸음 한걸음 걸어가고
있었다.
그는 그녀를 본 순간 풀뿌리처럼 움켜잡고 있던 미련한 다짐을 일순간에 날려버렸다.
승철이 죽을 때까지 유아에게 접근하면 자신은 죽을 때까지 유아를 지킨다는 간단한
사랑법칙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그가 눈물 가득 고인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며 울 듯 미소 지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유아도 울면서 노래를 끝까지 불렀다.
그녀가 그를 마주보고 섰다.
사랑할 수밖에 없는 남자가 바로 눈앞에 있다.
“오빠.”
그는 그녀를 바다 속 보다 깊은 가슴으로 와락 끌어안았다.
앞으로는 빈 가슴 게워내는 일 따윈 두 번 다시 없으리. 천지가 뒤집히더라도 그녀의
손을 놓지 않으리.
“잘못했어......잘못했어.....”
그녀는 그의 가슴에 얼굴을 기대며 반짝 빛나는 진주알 같은 눈물을 떨구었다.
**
현수와 취재팀을 제외한 사람들이 알고 있었던 유아의 이번 계획이 연예계에
유례없는 특종으로 기록되었다.
현수는 시사회 현장을 유아와 함께 빠져나오면서 민준과 마주쳐 감쪽같이 어떻게
그럴 수 있었냐며 의사하지 말고 연기자로 직업 바꿔라고 농담을 건넸다.
“얼마 전에 현수씨가 질문한 답변 할까요?”
민준이 두 사람을 진정으로 축복해주는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안 됩니다. 제 아내를 누구에게 줍니까?”
현수는 유아의 어깨를 감싸며 경계하는 태세를 갖췄다. 그러면서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하다.
아마 그는 오늘 하루 종일 웃어도 성에 차지 않을 것이다.
“오빠, 또 민준 오빠한테 나랑 결혼하라는 말 했구나?”
유아가 현수를 흘겨보았다.
“그땐 내 영혼이 잠깐 외출 중이었지.”
그는 타협점을 찾으려 혼잣말로 변명을 하며 스스로 생각해도 그 말이 정답이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외출 두 번 했다가는 길 잃고 영영 헤맬 수 있다는 걸 명심하라구.”
“이미 자물쇠로 꽉 잠가져서 나갈 수도 없어.”
이렇게 웃으면서 얘기하는 게 얼마만인지 모를 만큼 우리는 먼 길을 돌아왔어.
오빠, 내 남편 이현수!
우린 드디어 사랑, 그 곳으로 들어가는 거야.
그 곳에서 오빠와 나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우리 아이 따뜻하게 보듬어주자.
알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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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제 끝이 얼마 남지 않았군요.
마지막까지 함께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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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 소설 1.
[ 중편 ]
사랑, 그 곳으로 [25-27]
천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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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9.13 2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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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유아 깜직하다. 사랑을 찾았으니 행복할 일만 남았네.... 이연이는 찐짜 아빠를 지은이에게 찾아 주는것이 맞는거에요. 승철이도 사랑하고 있잖아요. 이연이랑 지은이를....
님~! 제 글에 꼬릿말 감상 달아주신 거 저에게 큰 힘이 되었답니다. 정말 고마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