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사이 벌써 9월 !
어제 서둘러 출근하니 우리 과 서무직원이 창가 벽면에 걸려있는
캘린더를 떼어내고 있었다.
녀석의 손에 의하여, 팔월 한달동안 괴암괴석 저 너머 쪽빛물감으로
출렁이던 망망대해가 스러져가고, 온통 안개꽃처럼 점점이 피어있는
메밀꽃 물결이 펼쳐진다.
그 하얀 물결의 끝에 빠알간 지붕의 농가 한 채가 야트막한 산자락을
베고 있는 정경이 아늑한 평화로움을 자아내게 한다.
가만히 턱을 괴고 물끄러미 바라다보노라니, 문득 이효석님의 고향인
봉평 일대에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메밀꽃 밭이 떠올랐다.
우리 문학사에 참으로 가슴 절절히 와 닿는 아름다운 싯귀와
빼어난 표현이 많다지만 그래도 언뜻 꼽으라면,
정지용 님의 시 ‘향수‘의 첫째 연에 표현된 “얼룩배기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이란 싯귀와
단편소설의 백미인 이효석 님의 ‘메밀꽃 필 무렵, 속의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란 표현이 단연 압권이
아닌가 싶다.
메밀꽃 !
지금은 강원도 봉평 일대에 주로 관상용으로 재배되지만
우리 어릴 적만 해도 빙 둘러 산자락 여기저기에 하얗게
피어있는 메밀꽃밭을 흔히 볼 수 있었다.
특히 비탈진 척박한 학교길 주변에 많았던 걸로 기억되는데,
가을초입이면 등교 길 고개 너머엔 으레 영롱한 햇살이 부챗살처럼
퍼져 나가고, 그러면 미처 다 가시지 않은 산안개의 잔영 속에
숨어있던 은은한 메밀꽃의 향기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고개에
오른 우리들의 코를 찔러 왔다.
한 십이삼여년 전이던가.
이효석님의 묘지 이장문제로 유가족과 평창군간의 갈등이 표면화되어
심심찮게 신문지상에 오르내리던 그 해에‘메밀꽃 필 무렵‘의 무대인
봉평을 찾았다.
그해 9월 어느 일요일 아침, 조간신문의 화보에 담긴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메밀꽃을 보고 불현듯 와락 옛 향수와 가슴 시린 그리움이
밀려와 서둘러 장평행 버스를 탔다.
장평에서 봉평까지 한 삼십여리 실히 되는 길을 하천을 따라 걷기도
하고, 논둑길을 가로지르며, 소위 트레킹을 하면서 봉평엘 도착했다.
‘충주댁‘이 주모로 있던 주막집터와‘허생원‘의 하룻밤 풋사랑이
서려있는 물레방아간, 그리고 그 뒤편으로 주욱 펼쳐진‘그야말로
소금을 뿌려 놓은 듯한‘ 메밀꽃밭, 그 이랑 사이사이로 호젓이
거니는 연인들,
거기에서 이효석님의 생가는 장마로 패인 길을 따라 냇가를 건너서
한 오리 길을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따라간 아들 녀석이 걷는데 싫증난 표정이었지만, 생가를 꼭 보고 싶어
내친걸음을 계속했다.
그런데 막상 생가엘 도착하니 저으기 실망이 일었다.
일자 두 칸 집 전체가 메밀국수 영업장으로 변해 생가라는 푯말 외에는
그 어디에서도 한 시대를 풍미한 뛰어난 문학가의 체취는
찾을 수 없었다.
아무리 이효석님이 일곱 살까지 밖에 살지 않아 이렇다 할 흔적이
없다손 치더라도 적어도 생가를 원형대로 보존하는 성의 정도는
보여야 하는 것이 대문호에 대한 기본적 예의가 아닐까 싶었다.
정읍의 전봉준선생 생가에도 선생의 이렇다 할 흔적하나 없었지만,
그래도 고즈넉이 보존되어 있어 어떤 경건함이 배여 있지 않았던가.
수년전 다녀온 상트 페테르 부르크의 경우 심지어‘푸시킨’시인이
즐겨 찾던 찻집마저 온통 푸시킨의 흔적을 강조하며 존경심을 표하던
것을 감명 깊게 바라봤었다.
그렇게까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영업장소로는 활용하지 말아야 했다.
정 영업을 하려면, 생가와 조금 떨어진 곳에다 가건물이라도 짓고
하면 될 것을 굳이 생가를 송두리채 국수집으로 만들었어야 했는지
몹시 서운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 후 몇 년 후 평창군청에 공식출장을 갈 일이 있었다.
이에 대한 내 소견을 필요이상 강하게 피력한 일이 있었고
이삼년 후 다시 찾았을 때는 기대한 것보다는 못 미치지만
생가만은 국수국물이 흐르는 수모를 면할 수 있었다.
재작년에도 어머니를 모시고 메밀꽃 축제에 갔었다.
메밀묵 한 그릇을 맛나게 드시고는 흐드러지게 핀 메밀꽃 밭 어귀에
걸터앉아 잔잔히 웃으시는 어머니의 잔상이 아련하다.
아마도 흘러간 젊은 날의 당신의 모습을 메밀꽃에서 찾았을 수도.
지금은 고향 산비탈 어디에도 메밀꽃을 찾아볼 길 없다.
메밀꽂이 숨이 막히게 피어있던 그 자리엔 한 움큼씩 제멋대로
한 길이나 웃자란 개망초가 메밀꽃을 흉내 내어 하얗게 피어 있을 뿐.
첫댓글 추억으로만 간직해야 할 일들이 넘 많아지는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