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과 새벽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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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어정리
주화파 - 평화를 주장,청나라와 전쟁을 일으켜서는안된다고 주장을했다
선조의 손자,익히들 알고있듯이 인조반정으로 즉위하였다
인조는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고,이는 임진왜란 당시 정원군 가족이 해주로 피난 가 있을떄
인헌왕후 구씨가 그곳에서 인조를 출산한것이다.
실록에 실린 인조를 높이는 기록을 보면 마치 한 고조 유방처럼 넓적다리에 무수한 사마귀가있어
할아버지 선조가 이걸보고 이거 한 고조랑 같은 상이니 누설해서는 안된다라고
정원군에게 당부했다고한다.선조는 인조의 이름을 직접지어줄정도로 총애했다.
선조때 능양군으로 봉해졌고,집에 왕기가 있다는 설로부터 시작된 광해군의 경계 때문에
동생을 잃었고,아버지는 홧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집은 헐려 경희궁이 지어졌고,결국 인조는 광해군에 대한 복수를 계획하게 되었고
서인들과 함께 반정을 꾀하여 결국 왕위를 얻게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정통성이 약했고,이에따라 반정 세력인 서인들의 의견에 휘둘리기도했었다.
하지만 인조반정때 군사적 지휘에 중요한 역할을 한 이괄이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있다가
재반정을 시도하여,이괄의 난을 일으킨다.
이괄은 반정의 동료들이 자신의 아들을 역모혐의로 하옥하자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
여진족을 막기위해 조련한 군사 1만을 끌고 내려와 안주 평양 황주 개성을 함락하고
수도 한성까지 접수했다.
내부반란으로 한성을 점령당한 반란은 이 반란이 최초이다
인조는 역시나 공주로 피신하였으며,이괄은 흥안군을 임금으로 추대하였다.
파죽지세로 진격하던 그의 군대는 안령에서 장만이 이끄는 토벌군에게 패하였고
이천으로 퇴각하다가 살해되었다. 이로인해 조선 북방의 방위 체게가 거의 완전히 붕괴되어
이후 청나라가 조선을 침공할때 쉽게 진격할수있게된다.
하지만 비극은 끝나지않았다,바로 정묘호란인데.
서인정권은 친명배금 정책을 명분으로 이를 강력히 고수했던것으로 알려져있지만
이와달리 인조반정을 일으킨 세력 내부에서 인조가 중용한 인사들은 주화론자였고
병자호란직전까지 인조정권이 적극적인 반청정책을 일으킨 적은 없다.
오히려 일각에선 광해군 대외 외교적 성과를 인정하고 적극적으로 계승했다는 연구도있다.
애초에 반정 세력의 주요인물인 이귀나 최명길 등은 주화파에 접근했다.
그럼에도 청을 되도록 자극하지않고자하는 의도는 있었을지언정 쓰러져가는 명을
꿋꿋이 상국으로 섬기며 정권의 정통성을 인정받기위해 친명배금 표방은 버리지못했다.
병자호란의 원인은 1차적으로 누르하치와 청태종의 대조선 정책에 대한 의견차이와 경제적 원인이컸다
애초에 청이 기세등등하게 일어났다고는 하나 산해관을 넘는데는 실패했으며
누르하치가 조공무역을 독점하여 쌓아올린 경제력이 청태종때는 상당히 소진되어가고있었다.
여기에 내몽골을 평정한 이후 만주에 기근이 닥치면서, 청 또한 많은 경제적 어려움이 있었다.
이런 시점에서 산해관 너머로 들어갈 국력을 유지하기 위해 청은 지속적으로 조선에게 공격적인
요구를 했고,조선은 이를 대부분받아들였다.
그러나 조선이 줄곧 청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고 적대적으로 일관하다 병자호란 직전에
결정적 빌미를 제공했으며 이 상황에서 김자점의 매국행위에 조선 속오군의 낮은 훈련도가
환상적으로 결합하여 피해가 엄청나게 커진것이다.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도망친 이유중 하나가 자국군을 못믿어서였으니까 말다했다.
전쟁이 임박한 시점에선 광해군때의 중립정책을 폐기하자는 척화론이 강하게 대두됐으나
정권 내부에선 사실상 무시되었다. 그러나 알맹이는 실속도 명분도 챙길 수 없는 어중간한것으로
확실한 화친정책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막장으로 접어들고있는 명에게 도움을 기대할수있는 처지도아니었다.
격동하는 주변 정세 속에서 이렇듯 갈피를못잡는 마당에 인조는 꿋꿋이 친명배금을 표방했으며
때마침 누르하치 사후 조선에 대해 강경파였던 후금의 태종 홍타이지의 등극이라는 악재를
연타로 맞이하여 결국 정묘호란을 겪게 된다.
당시 부덕하게 권력을 찬탈한 인조 정권을 부숴버릴작정으로 후금은 천천히 진격하였으며
그 피해를 극대화했고 조선군은 장기간 방비도 헛되어 파죽지세로 털렸다.
결국 강화도로 도망쳤던 인조는 직접 형제의 맹세를 맺는 단에 나갔고
스스로 피를 마시지않고 신하가 대신 마시는 선에서 후금과 형제국으로 관계를 재정립했다.
조선은 이후 후금에 조공을 보내느라 온갖 공물을 보내는바람에 백성들은 등골이 휠지경이었고
조정에서는 대충대충 엄어가며 그렇게 8년이 흘렀다.
인조는 이시기에 왕권 강화한답시고 자기 아부지를 왕으로 추숭하는 일에 빠져있었고
여기에 후금과의 사이는 다시 나빠져서 인조는 국교단절까지 생각하게된다.
그리고 정묘호란으로부터 8년이나 지나 인렬왕후 한씨가 사망했다
이에 후금은 조문단을 보냈으나 이와함께 홍타이지를 황제로 함께 추대하자는 의견도 보냈다
후금은 나름 형제국이니 의논하지 않을 수 없다는 주장이었으나
상당한 무례함을 보였고 인조는 논할 수 없다며 돌려보냈다.
물러가는 후금의 사신단에게 백성들이 돌을 던졌다는 이야기도있다.
당연이 이러한 태도에 홍타이지는 부들댔다.
하지만 친명배금을 지향했던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해서 사대주의를 지향하는 인조정권의한계이기도했다
결국 부들대던 홍타이지는 스스로 황제에 즉위하여 국호를 청으로 바꾸었다
앞서 조선의 태도에 뒤통수가 불안해진 청의 황제는 조선이 신하되기를 강박했고
인조도 화가나 국서를 투하 동시에 팔도에 교서를 내려 방비를 분부한다
최명길의 산소에 다시 화친으로 정책을 바꿨지만 사신이 도착하기전에 병자호란이 터졌다.
조선은 외침에 장기간 대비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잘 싸우지못했다
인조가 임명한 지휘관들 태반이 이괄의 난에서 공을 세운 장군이나
김자점등에 사람들이였기때문에 지휘관 그릇이 되질 못하여 제대로 지휘하질 못한데다
후금의 전략이 워낙 탁월했던탓에 간단하게 한양까지 털렸으며
인조는 이틀전에야 모든 소식을 알았다(답이안나온다)
결국 인조는 미처 멀리 피하지도 못하고 남한산성에 갇혀버리고만다.
남한산성에서는 한동안 버텼지만 전쟁전에 식량을 죄다 바깥으로 빼놓아서
결국 식량과 물자가 바닥낙되고 각지의 군대마저도 고질적인 훈련도 및 조직력 부족을 드러내며
전투에서 청군에게 각개격파 되었다.
얼척없게도 강화도마저 함락당해 강화도에 주둔하던 세자들까지 포로로 붙잡혔다.
수도한양과 강화도가 청군수중에 떨어지는 지경에 이르러서도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의병의 구원을 바라면서 40일동안 악으로깡으로버텼으나
각지의 근왕군마저도 청군에게 탈탈털리던중이였다 한마디로 더이상 희망이없는상황.
도저히안되겠으니 신하들도 나가봐하고 청하고 소현세자도 스스로 가서인질이되겠다고청하자
결국 항복하여 청태종에게 삼배고구두의예(세번절하고 9번 머리를찧는것)를 취하고
군신의 의를 맺는 굴욕을 당한다
청은 왕에게 굴욕을 주는것에 그치지않고 왕자들을 비롯한 여러인물을 볼모로잡아갔으며
조선으로 하여금자신들이 당한 굴욕을후세에 길이남기도록 비를세우게지시했다
이에따라 삼전도청태종공덕비를줄여서 삼전도비가세워지게된다.
비록 전하의 자식은 아니지만 빈으로있을때 소현의 배필이였으니 전하의 자식이 아닙니까라하며 선처를 바라자
인조가 강빈이 모욕했다며 개새끼같은것을 억지로 이금의 자식이라고칭하니 이것이 모욕이아니고
무엇인가라 언급한것에 조선왕조실록에 실려있다.
조선왕들중에 자식을 개새끼라고 표현한 최초이자 최후의왕이다
덕분에 송시열등 예법을 중시하던 서인들은 정통이아니라고 주장하여
이후 예송논쟁이 벌어지게하는 근본적인원인이 됐다
원래 세자가 죽을경우 세자의아들이있는경우 그러니까 세손이 있다면 ,세자의아들이 다음세자가되어야하는데!
인조는 그걸 개썅 박살내버리고 차남인 효종을 세자자리에앉혔단소리야
그러니까 효종같은경우 정통성이 매우 미약한왕인거지
예송논쟁이 효종과 효종의비가죽었을때 자의대비가 상복을얼마나입느냐라는 예를둘러싸고 벌어진 논쟁이잖아?
효종이 첫째가아닌데 왕이되었으니 상복입는기간을 몇달로하고 효종이 어쨋든 왕이니까
예법에따르자이렇게나눴잖아. 적장자가 왕이되지않으면 이런일이벌어질수도있어
어쨋든 삼전도의 굴욕이란 국가적 굴욕 외에도 왕좌를 지키기위해 아들인 소현세자를 독살했다는
의문 제기도 심심치않게 제시되는등 여러모로 좋은평가를받지못하고있다.
이부분에 관해 실록을 보면 사관들의 비판으로 가득할정도..(한숨)
또 소현세자에게 벼루를던져죽였네하는등 야사의이야기에서도 좋은소리못듣는임금중하나다;
설령 직접 죽이진 않았더라도 소현세자가 부왕의핍박을많이받았고 죽기도 일찍 죽은것자체는 사실이다.
그래서인지 조선관련 음모론가운데 드물게도 정설에 준할 정도로 인정받는다.
호란이후 성리학이 교조화되면서 치욕을씻자며 북벌론이 산당등을 중심으로 나오기 시작했지만
이미 대세도 결정난 상황에서 그럴 이유가 없었던 인조는 김자점과같은 친청파를중용하였다
하지만 인조도 소현세자 일가 대부분이 박살난후 몇년이지나지않아죽었다
인조시대는 신하들도 무능했고,자신도 저러한 정국의 소용돌이에서 헤처나갈만한 재주도없었다.
보통 반정에는 명분이 중요한법인데 명분중 하나인 사대주의 문제에서 정작 명나라는
광해군은 우리한테 협조적인데 너는 뭐하고있냐?이런반응이었다.
이때문에 외교에서도 문제가 있었고,거기다가 광해군을 몰아내는 중요한 명분중 하나인 인륜적 문제도
광해군은 선조의 선조의 차남이며,인조는 선조의 5남인 정원군의 아들이므로
인조야 말로 동생들과 짜고처서 자신의 삼촌일가를 조졌다.
거기에 신하 관리 잘못해서 반란이 일어났지,성지키랬더니 피난갔지
외적들이 처들어와 2번이나 나라가 쑥대밭이되었지,외적앞에 나아가 무릎꿇고 기념비도 세워주고
소현세자를 미워하고 결국 독살했다는 배후로도 지목되고 거기다가 생트집을 잡아서
며느리와 손자일가까지 박살내버렸다(한심)
* * *
봐주셔서 감사해요
계속 재업할게요~
첫댓글 개인적으로 인조랑 선조 매우 싫습니다만...!
광해군을 몰아냈으면 소현세자라도 세웠어야지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소현세자 ㅠㅠㅠㅠ ㅠ짠내난다 오늘도잘봣엏ㅎㅎ 혹시 계백에대한 글써줄수잇어?ㅎㅎㅎㅎ 내동생이름 계백이라! 저번에 독립운동가집안이라햇던 반디얌..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