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토방위의 신성한 의무 수행할 사명’…
유구히 이어져 내려오는 ‘헌법상 국군의 핵심 가치’
입력 2023. 09. 26 15:05
업데이트 2023. 09. 26 15:28
국군의 날 - 헌법과 법률로 살펴본 국군의 역사
1948년 제헌헌법 초안은 ‘국방군’ 표기
최종 심의과정 3독회서 ‘국군’ 변경 제안
국방군 의미 포함하는 포괄적 총칭 이유
재석의원 161명 중 125명 찬성 가결
우리 군의 이름은 언제부터 ‘국군’이었을까? 처음부터 그랬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하지만 1948년 제헌 헌법 초안에 적힌 대한민국 군대 이름은 ‘국방군’이었다. 그런데 1948년 제정된 제헌 헌법에서부터 계속 사용됐던 이 표현이 1962년 개정된 헌법 총강을 기점으로 일정 기간 사라졌다. ‘국군’이라는 용어 자체가 총강에서 없어진 것이다. 건군 75주년 국군의 날을 맞아 헌법·법률과 관련된 국군의 역사를 살펴본다. 이주형 기자
1945년 8월 15일 광복 후, 미 군정기를 거쳐 1948년 5월 10일 국회의원 선거를 통해 5월 31일 198명의 국회의원으로 구성된 제헌국회가 개회됐다.
제헌국회는 헌법기초위원회를 조직해 당시 유일한 헌법학자라고 할 수 있는 유진오의 안을 원안으로, 권승렬의 안을 참고안으로 해 헌법 초안을 작성했다. 초안은 일부 수정을 거쳐 전문과 10장 103조의 형태로 7월 12일 국회에서 통과됐고, 5일 뒤 서명·공포·발효됐다.
제헌헌법 제6조에는 ‘대한민국은 모든 침략적인 전쟁을 부인한다. 국군은 국토방위의 신성한 의무를 수행함을 사명으로 한다’고 명기되어 있다. 그러나 초안은 달랐다. 유진오 박사의 1회 초고(1948년 4월)는 이러했다.
‘제6조 조선민주공화국은 국책(國策)의 수단으로서의 모든 침략적인 전쟁을 부인하고 포기한다. 국방군(國防軍)은 국토방위의 신성한 의무를 수행함을 사명으로 한다.’ 국군이 아닌 국방군으로 표기됐던 것이다. 이 문구는 수정과정에서 조선민주공화국은 한국으로, 다시 대한민국으로 바뀌었지만, 국방군이라는 표기는 사법부에 제출한 초안(1948년 5월)은 물론 국회에서의 최종 의결 직전까지 유지됐다.
국방군은 당시에 자주 쓰인 말인 듯하다. 1940년 9월 17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발표한 ‘한국광복군총사령부 성립보고서’에도 ‘정미년(1907년) 8월 1일 국방군(대한제국군) 해산의 날이 곧 광복군이 창립된 날이라 할 것’이라는 내용이 담겼다.
1948년 백범 김구가 유엔한국위원단에 보낸 편지에서도 ‘즉시 국방군을 조직하게 하고’라는 글귀가 나온다. 즉 국군의 전신이 광복군이다 보니 당시 사람들은 국방군이라는 말이 더 친숙했고, 그런 분위기 속에서 자연스럽게 국방군이 대두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1948년 7월 12일 최종 심의과정인 헌법기초위원회의 3독회(요약 법률안을 신중히 심의하기 위해 단계적으로 심의하는 과정)에서 국방군은 국군으로 바뀐다. 윤치영 의원이 심의 도중 국방군을 국군으로 고치자는 의견을 제출한 것이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는 이러한 당시의 상황이 잘 기록돼 있다.
윤치영 의원=제6조에 국방군으로 하는 것을 국군으로 고치고자 동의합니다.
백관수 의원=시방 동의는 동의 안됩니다.
윤치영 의원=동의를 문서로 제출한 것이 있습니다. 의미를 바꾸는 것이 아니고 문자를 바꾸는 것입니다.
의장(이승만)=국방군이라는 것을 잠깐 내놓고 국군이라고 하는 데 동의했는데 아마 국방군이라고 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을 것 같습니다. 좌우간 재청이 있으면 동의가 성립되는 것 같습니다.
장면 의원=재청합니다.
백관수 의원=제3독회에서는 글자를 바꿀 수 없습니다. 문구만 수정하게 됐습니다.
의장(이승만)=동의에 재청이 있어 국방군이라는 방을 내놓고 국군이라는 것에 재청있으니까 여기에 대해서 더 토의를 말고 가부를 하자는 것입니다.
서상일 의원=윤치영 씨로부터 수정 동의안이 있습니다.
의장(이승만)=그러니까 지금 동의재청을 들으니 길게 토의할 여지가 없으니까 가부를 물을 것입니다.
문시환 의원=이유를 설명한 뒤에 가부를 물어주시기 바랍니다. 국방군을 국군으로 고친다는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이유를 들어야 할 것입니다.
의장(이승만)=이유 말씀하시오.
윤치영 의원=이유 설명하겠습니다. 한 전문술어에 있어서 국군이라 할 것 같으면 전부 우리의 군사에 대한 총칭입니다. 그러므로 국방군이라는 이름을 둔다면 이다음 총사령관이 지휘할 때 대외적 국내적으로 좁은 것이 되고 국군이라 할 것 같으면 자연 국방군은 거기에 포함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명사에 대한 글자 하나 고친다고 하는 것은 특별한 이유가 없고 국방군을 그만두고 국군이라 하면 여러 가지 참고가 생기게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것을 고치고자 제안합니다.
의장(이승만)=여기에 대해서 다 물으셨습니까. 국방군이라고 하는 것을 국군이라고 고치자는 그 동의올시다.
그리고 이 안에 대한 거수표결 결과 재석의원 161명 가운데 찬성이 125명, 반대가 12명으로 가결됐다. 국방군이 국군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이후 국군이라는 명칭은 믿음직하고 친숙한 모습으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국군 관련 총강 5차 개정 때 사라져…당연한 사명이라 명시 안한 듯
1980년 8차 개정서 부활…1987년엔 군 정치적 중립 내용도 포함
국가의 안전보장과 국토방위의 신성한 의무 수행. 헌법 제4조 2항에 적시되어 있는 이 문구는 창설이래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국군의 존재 가치다. 사진은 지난 5월 경기도 포천시 승진과학화훈련장에서의 연합·합동 화력격멸훈련 모습. 양동욱 기자
헌법 총강에서 국군이 제외됐다?
우리 헌법은 전문(前文)과 본문 130개조, 부칙 6개조로 구성돼 있다. 이 가운데 국가의 구성원리가 담겨 있는 제1장 총강편 제5조는 국군 관련 사항을 아래처럼 2개 항에 걸쳐 기재하고 있다.
① 대한민국은 국제평화의 유지에 노력하고 침략적 전쟁을 부인한다.
② 국군은 국가의 안전보장과 국토방위의 신성한 의무를 수행함을 사명으로 하며, 그 정치적 중립성은 준수된다.
이 가운데 2항은 1948년 제헌헌법에 규정된 이래 지금까지 유구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국군 존재의 핵심 사항이다. 그런데 영원히 명시된 줄로만 알았던 이 문구가 뜻밖에도 헌법 조문에서 빠진 적이 있다. 그것도 약 18년간에 걸쳐 그랬다.
우선 제헌 헌법을 살펴보자. 제6조에는 ‘대한민국은 모든 침략적인 전쟁을 부인한다. 국군은 국토방위의 신성한 의무를 수행함을 사명으로 한다’고 규정했다. 이 내용은 1952년 7월 1차 개정 이후 1960년 11월 4차 개정까지 변함 없었다.
하지만 1962년 12월 26일 5차 개정에서는 이 문구가 ‘제4조 대한민국은 국제평화의 유지에 노력하고 침략적 전쟁을 부인한다’로 바뀐다. 그리고 1972년 12월 7차 개정까지 쭉 이어진다.
어떻게 된 것일까? 국가재건최고회의는 1962년 7월 11일 산하에 헌법심의위원회와 전문위원회를 발족하며 헌법 개정 착수에 들어갔다.
이후 8차에 걸친 헌법심의위원회 전문위원회의와 2차례 진행된 헌법심의위원회 9인 소위원회의, 전국 각지에서 진행된 헌법공청회 속기록에서도 이와 관련된 내용은 나오지 않는다. 국회기록보존소의 국회회의록도 마찬가지다.
다만 국가기록원의 콘텐츠 ‘국무회의록으로 보는 우리나라 개헌의 역사 : 헌법개정(5차)편’에서는 이 해 10월 12일 전체회의에서 재심의가 이뤄졌고, 10월 27일 조문화가 완료됐다고 기록하고 있어 9월 또는 10월 초·중순 사이에 논의되고 확정된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제외 이유는 무엇일까? 아쉽게도 명확한 사유는 찾아볼 수 없어 추론만 가능할 뿐이다. 국가의 안전보장과 국토방위의 의무는 너무나도 국군의 당연한 사명이기에 굳이 명시할 필요가 없어서 그랬을 수도 있다. 아무튼 연구가 더 필요한 부분이다.
국군이 총강에 다시 등장한 것은 1980년 10월 제8차 개정부터이다. 제4조 2항에 ‘국군은 국가의 안전보장과 국토방위의 신성한 의무를 수행함을 사명으로 한다’는 내용으로 되살아났다. 이 사실은 1980년 1월 18일 열린 국회 헌법개정심의특별위원회 회의록 제103회(8차)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당시 회의에 공술인으로 참석한 김계환 청주대 법대 교수는 이렇게 발언했다.
“이 순간에도 김일성이 쳐들어올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마는 이를 튼튼하게 하기 위해서는 국방력을 강화시켜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보겠습니다. 우리 현행 헌법 제4조에 ‘대한민국은 국제평화 유지에 노력하고 침략적인 전쟁을 부인한다’는 규정에다가 제2공화국 헌법에서 규정한 것과 같이 ‘국군은 국토방위의 신성한 의무만을 수행함을 사명으로 한다’하는 규정을 반드시 넣어야 되겠다고 보겠습니다. 이것은 왜냐하면 국군의 방어력을 국내외적으로 과시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러면 국군의 방어력을 국내외적으로 과시하게 되면 자연 북한도 떨어서 침입을 못 합니다. 그리고 이번 기회에 말씀드리지만 국군과 공무원과 중앙정보부는 반드시 정치에 간섭해서는 안 되며 정치에 개입을 해서는 안 된다는 규정을 넣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하는 바입니다.”
김 교수의 의견은 이견 없이 받아들여졌다. 모두가 공감한 것이다. 다만 그가 제시한 국군의 정치적 중립은 여기에서 제외됐다. 그러나 군의 정치적 중립에 관한 사항도 1987년 10월 29일 9차 개정된 현행 헌법에 반영됐다. 군의 정치 관여에 대한 뼈아픈 반성과 이에 따른 문민통제의 원칙에 의거한 것이다.
공군 창설을 알리는 당시 주요 일간지 기사들을 스크랩한 모습. 공군역사관리단 제공
항공기·조종사 부족으로 공군은 뒤늦게 탄생
창설 시 육·해군만…공군은 1949년에
정부는 1948년 10월 4일 총 23개조(부칙 2개조 포함)로 구성된 국군조직법을 국회에 제출했다. 초안은 제1장 총칙, 제2장 국방부, 제3장 육군, 제4장 해군, 제5장 군인의 신분, 제6장 기타, 제7장 부칙으로 편성되어 있다. ‘공군’은 독립된 군으로 편성되지 않았다.
법률안 심의를 위한 독회는 11월 10일부터 시작됐다. 국방부 책임자를 비롯한 군 현직자 및 재야의 군 경험자들을 초청해 수차례에 걸쳐 의견 청취가 이뤄졌다.
이런 가운데 공군의 독립을 요구하는 의견도 있었다. 최태규 의원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 의하면 그는 독회에서 국군조직법에 육·해군만 조직하고 공군은 빠져 있다고 의문을 제기했다. 또한 한미 협정에 있어서 공군은 독립시키지 말라는 군사협정이 돼 있는지 그렇지 않으면 국제정세에 있어 어떤 이유로 제외했는지를 질문했다.
당시 항공인들은 미 군정 및 통위부(현 국방부)에 항공부대 창설을 건의, 1948년 3월 ‘경항공기부대’ 창설을 승인받아 5월 5일 통위부 직할부대로 항공부대가 창설돼 있었다. 1948년 9월에는 미군으로부터 L-4항공기를 인수해 한국군 최초로 항공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 답변에 나선 채병덕 참모총장대리는 “항공이 생겨서 겨우 석 달밖에 되지 않고 인원은 100명에서 500명밖에 되지 않고 비행기는 열아문(10이 조금 넘는 수) 대가 있다”고 전제했다. 그러면서 “우수한 항공을 독립시키는 것을 대단히 원하지만 비행기를 탈 줄 아는 사람은 십여명 밖에 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이어 “여기서 항공을 독립시키고 차관까지 나오고 하면 교육할 때 학생은 있고 교육할 사람은 하나도 없게 된다”며 “(공군)참모총장 이하로는 다른 사람을 두면 좋지 않으냐 하겠지만 결국 모르는 사람을 두면 방해만 되지 일은 아무 것도 안된다”면서 공군이 제외된 이유를 밝혔다.
결국 같은 해 11월 30일 제정과 동시에 시행된 국군조직법에서 공군의 창설은 이뤄지지 않았다. 단 부칙으로 ‘제23조 본법에 의하여 육군에 속한 항공병은 필요한 때에는 독립한 공군으로 조직할 수 있다’는 조항을 달아 독립의 근거를 마련했다.
이후에도 항공부대의 계속된 발전과 함께 공군의 창군 필요성은 지속적으로 대두됐다. 그리고 마침내 1949년 10월 1일 대통령령 제254호(공군본부직제)에 의거해 공군이 탄생하며 현재의 육·해·공 3군 체제가 정립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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