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2년 5월 5일)
오늘은 어린이날이자 절기상 입하(立夏)이다. 들어갈 입(入)자를 쓰지 않고 설입(立)자를 쓴다. 한문의 입(立)자가 '곧', '즉시'라는 뜻도 있어 이제 곧 여름라는 것을 의미하며, 여름이 시작됐다는 의미이다. 1년을 24개로 구분한 24절기 가운데 일곱 번째이다. 곡우(穀雨)와 소만(小滿) 사이에 들어 있다. 입하 지난 오월은 폭풍 성장하는 사춘기(思春期)기 아이들과 비슷한 계절이다. 4월이 ‘아프릴리스(아프로디테)', 즉 개화(開花)의 달이라면 5월은 ‘마이아', 즉 성장의 달이다. 그런 만큼 5월이 되면 봄은 성큼 성장하여 여름을 대비한다. 5월은 또한 분주함의 계절이다. 추위는 물러나고 그렇게 덥지도 않아 밝고 따뜻한 햇살 아래 나들이나 여행하기에 딱 좋은 계절이다. 유럽에서 5월에 여행과 상업을 관장하는 헤르메스의 어머니 ‘위대한 여신’ 마이아의 이름을 붙인 것이 새삼스레 의미심장하다.
오월이 지나면 화사한 봄꽃들이 거의 다 지고 신록의 부드러운 잎들도 짙은 녹색으로 단단해 진다. 점차 뜨거워지는 햇빛을 조금이라도 더 받기 위해서다. 겨울잠에서 깨어난 식물들의 왕성한 성장은 열매 맺힘, 즉 ‘열음’의 계절에서 절정을 이룬다. 고대 로마인들에게 여름의 첫 번째 달인 6월은 제우스의 아내 헤라에 해당하는 유노의 달이었다. 유노는 결혼과 가정의 수호여신이다. 인간의 생애주기에서 6월 초여름은 청년기에 해당한다. 고대에는 대개 청년기의 모든 남녀가 결혼으로 맺어졌다. 그리고 그 결혼의 가장 큰 결실은 무엇보다 아이들이었다. 사람 뿐만 아니라 모든 살아있는 것들은 성숙한 후 때가 되면 알아서 짝을 짓고 후손들을 생산한다. 그리고 이러한 삶의 순환주기는 계절의 순환주기와 많이 닮아 있다. 계절의 주기에서 신생의 봄은 성숙의 여름을 지나 결실의 가을과 쇠락의 겨울을 지나 또 한 번의 주기가 완성될 때까지 우리 모두를 다그치고 몰아간다. 이런 순환 속에서 나의 <인문 일기>는 시간 여행자인 내가 잠시 머물고 있는 그 시대와 어떻게 만나고 있는지를 기록하는 일이다. 당시의 상황이 내 영혼에 어떤 공명을 일으켰는지를 기록하는 일이다. 글은 편지를 병에 담아 바다에 띄우는 일이다. 이 이야기가 누구를 향해 흘러갈지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삶을 순례로 생각한다. 먹고 사는 일과 주어진 시간을 살아내는 일에는 엄정하다. 현실에 투항한 채 되는 대로 살고 싶지 않다는 말이다. 창문을 열어 환기하듯, 후덥지근한 일상 속에 영원을 새기는 일이 순례이다. 순례자는 순례하는 사람이지만, 나는 구도자(求道者)로 본다. 삶은 '모른다'에서 시작한다. 내가 왜 지금 하필 여기에 던져져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래서 삶은 무지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앎을 향한 여정이다. 그런 점에서 모든 존재는 태어나는 순간 이미 구도자(求道者) 가 되는 거다. 길을 찾는 사람이다. 그리고 인류의 역사도 어떤 점에서 모든 걸 다 알고 싶다고 하는 지식의 여정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삶을 이끌어 가는 건 질문이다. 질문이 사라지는 순간 우리는 좀비가 된다. 노인은 '꼰대'가 된다. 꼰대는 똑같은 대답을 반복하는 것이다. 반복은 반 생명, 즉 생명과 완전히 반대이다. 반복되는 대답을 하지 않으려면 계속 질문을 던져야 한다. 오늘도 질문을 던지며, 한 가지 더 잘 구분하고 분류하며, 알아간다.
자신의 본모습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사람은 감동 그 자체다. 그는 무엇을 억지로 드러내려고 치장하지 않는다. 요란한 치장은 부담스러운 옷과 같다. 그것은 자신이 진부하고 천하고 공허하다는 증거다. 그것은 내면의 공허를 외면의 요란으로 감추려는 열등감이다. 이런 시끄러운 열등이 우월이라고 광고하는 세상에서, 내면의 아름다움을 가꾸는 일은 영웅적이다. 카리스마가 있는 자는 구도자다. 그는 자신이 가야 할 곳을 안다. 그곳을 향해 그 누구의 눈치로 보지 않고 정진한다. 그는 마치 졸졸 흘러가는 개울물과 같다. 개울물에 방해란 없다. 커다란 바위, 작은 나무, 약간의 늪지대 등등, 이 모든 것은 오히려 그에게 유일한 길이다. 이것들은 개울물을 정화시켜주고 속도를 북돋아 주는 도움일 뿐이다.
내가 말하는 순례자의 길은 타인들을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깊은 내면과 만나고, 자신의 마음을 해방시키는 길이다. 노예였다가 철학자가 된 에픽테토스(50-135년)의 다음 말은 나에게 마음을 챙기는 데 큰 힘이 된다. "세상에는 우리가 마음먹기에 달려 조절할 것들이 있고, 우리가 아무리 마음을 먹어도 조절할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조절할 수 있는 것은, 만사에 대한 의견, 삶의 목적, 욕망, 혐오 같은 것으로 우리의 행위로 결정하는 것들입니다. 우리가 조절할 수 없는 것은 재산, 명성, 권력과 같은 것으로 우리의 행위로 결정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어제는 동네에서 쓸데 없이 '꼰대 질'을 했다. 오늘부터는 사람들에게 더 친절하자.
그러면서, 이젠 내가 할 수 있는 것만 하는 것이다. 내가 조절할 수 있는 것은, "만사에 대한 의견, 삶의 목적, 욕망, 혐오 같은 것으로 우리의 행위로 결정하는 것들"이다. 나머지 돈, 명예 그리고 권력 등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다. 배철현
교수도 이렇게 말한다. "지혜는 이 둘을 구분해 조절할 수 있는 것들을 수련해 평정심과 행복을 찾는 것이다." 사실 살다 보면 뜻대로 안 되는 일들이 많다. 그래서 어리석은 자는 자신이 조절할 수 없는 것을 소유하려고 일생 수고하다 십중팔구 씁쓸한 최후를 맞이한다. 인생에서는 자신이 조절할 수 없는 것들, 예를 들어 갑작스러운 사고나 코로나-19와 같은 감염병, 혹은 홍수나 가뭄과 같은 자연재해가 일어나기 마련이다. 인생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그 사고 자체가 아니라 그 사고를 대하는 나의 태도다.
어제는 미국 작가 루이스 쌔커(Louis Sacher)의 <<구덩이>>를 다 읽었다. 이젠 적어도 한 달에 두 권 이상의 문학 작품을 읽기로 했다. 그 이야기는 내일 한다. 오늘 고유하는 시는 여러 번 읽어야 이해가 된다. 도움이 되도록, 이 시를 소개한 김정수 시인 덧붙임을 한께 공유한다. "이 시는 좀 느닷없다. 밑도 끝도 없이 '죽어야 겨우 그 죽음만큼의 다리가 생긴다'고 선언한다. 이는 개울이나 계곡에 띄엄띄엄 돌을 놓아 건널 수 있는 징검다리가 아니라 삶에서 죽음 이후 보이지 않는 길에 놓인 ‘존재의 다리'라는 뜻이다. 생의 순간마다 많은 다짐을 하면서 생겨난 징검돌을 “다짐이 희미해질 즈음” 하나씩 내려 놓는다. '가슴속에 품은 돌덩이'는 욕망이나 책임, 자책 같은 것이다. 품고 있으면 무거운 돌덩이지만 내려놓으면 징검돌이 된다. 징검돌의 다른 말은 비석(飛石) 이다. 손에 든 돌을 앞으로 던지는 행위 때문에 생겨난 말이리라. 징검다리를 만들 때 되돌아가 돌을 가져올 수 있지만, 우리 삶은 되돌릴 수 없다. 하여 많은 돌을 품고 가면서 차례차례 내려놓아야 한다. 누구도 도와줄 수 없는 '곧고 외로운 자신만의 길'이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길인지라 시행착오를 겪을 수밖에 없다. 징검돌이 되지 못하고 평생 가슴에 품고 있는 돌도 있다. 품는 것보다 내려놓는 타이밍이 중요하다." (김정수 시인)
'징검다리' / 김완
죽어야 겨우 그 죽음만큼의 다리가 생긴다
다짐은 스스로에게 놓은 징검다리 같은 것
다짐이 희미해질 즈음 가슴속에 품은 돌덩이
하나씩 내려놓고 딛고 가는 게 인생인지 모른다
놓은 돌들이 하늘로 날아 올라가고 되돌아온다
걷고 또 걸어 도착한 곧고 외로운 자신만의 길
거짓말처럼 생은 한순간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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