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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장고등학교 본관 건물. '말할 수 없는 비밀' 첫 장면에서 인상적인 부감 쇼트로 등장했다. ⓒ 이동진닷컴-이동진 |
두 줄로 곧게 야자수가 심어져 있는 사이로 뻗은 길을 걸었다. 수업 시간이라 아무도 없는 교정은 비둘기 세상이었다. 본관 현관에는 ‘방문객 출입금지’를 뜻하는 팻말이 놓여 있었지만, 그 위에까지 비둘기 세 마리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지은 지 83년이 된 그 건물의 복도를 거닐었다. 피아노 연습실에서 처음 마주친 상륜과 샤오위는 이 복도에서 다시 만나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한다. 샤오위가 “내가 보고 싶었니?”라고 묻는다. “그래”라고 얼른 대답한 상륜은 “너 연주하는 거 말야”라고 살짝 덧붙여 속마음을 감춘다. 그러자 샤오위가 말한다. “난 보고 싶었는데.” 상륜이 그런 자신을 바라보자 그녀 역시 슬쩍 같은 말을 끼워넣는다. “네가 연주하는 모습 말이야.” 그리곤 두 사람은 눈부신 교정을 바라보며 별 관심도 없는 날씨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첫사랑은 터뜨리고 난 후에야 뒤늦게 주워담는다. 풋사랑은 대답하고 싶은 말을 오히려 질문한다. 그리고 어린 연인들은 가장 중요한 순간에 딴청을 피우는 척 한다.
둘이 대화하던 그 복도의 옆 교실은 어학실습실이었다. 무척 높은 기온 때문에 활짝 열어놓은 문 사이로 수업 내용이 고스란히 흘러나왔다. 우주 탐사의 역사에 대한 원어민의 녹음 내용을 틀어주던 선생님이 다음 주 월요일까지 영작 숙제를 제출하라고 하자 학생들이 특유의 감탄사를 동시에 내뱉으며 엄살을 떨었다.
피아노 연습실에서 연주에 몰두하고 있는 소녀. ⓒ 이동진닷컴-이동진 |
극중 졸업식이 열렸던 강당은 굳게 문이 잠겨 있었다. 들어갈 방법이 없는지를 묻기 위해, 점심 시간을 맞아 그 앞 연못에서 쉬고 있던 두 소녀에게 말을 걸었다. 현재 내부 수리중이어서 불가능하다는 설명이었다. 둘 중 한 명은 ‘말할 수 없는 비밀’을 보았지만 영어가 서툴렀고, 다른 한 명은 영어가 능숙했지만 그 영화를 보지 못했다.
분주한 대화 끝에 학생들은 극중에서 시간 여행을 가능하게 만드는 피아노 방의 바깥 건물 장면을 찍은 곳으로 직접 안내해줬다. 교정의 외진 자리에 있는 그곳은 단장고등학교 안에 따로 자리잡은 아담한 초등학교 건물이었다. (피아노 방 자체는 인근 전리(眞理)대학 정문 앞의 예배당에 있다는 이야기가 많았지만, 직접 가서 직원을 만나 확인해보니 사실이 아니었다.)
소녀들과 헤어져 교정을 돌아 나오는 길에 피아노 소리를 들었다. ‘말할 수 없는 비밀’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는 장소지만, 그 연주가 어디서 흘러나오는지 궁금해졌다. 그곳은 ‘피아노 룸’이라고 쓰인 아주 작은 방이었다. 노크를 했더니 그 안에서 연습하고 있던 여학생이 문을 열어주었다. 이곳에 오게 된 목적을 설명하고 양해를 구한 뒤 문턱에 걸터앉아 소녀가 연주하는 소품 몇 곡을 들었다. 피아노 위에 잔뜩 늘어서 있는 귀여운 봉제인형들과 잘 어울리는 음악이었다. 한 두 차례 틀리긴 했지만, 음표를 따라 떠난 여행 길에서 마주친, 충분히 맑고 사랑스러운 연주였다. 여행에서 음악은 언제나 작은 기적을 선사했다.
벽돌 벽의 십자 무늬 너머의 신랑신부. ⓒ 이동진닷컴-이동진 |
이 영화에서 샤오위는 상륜에게 “너를 만난 것 자체가 내게는 기적”이라고 고백한다. 그를 만날 때마다 시간의 벽을 뛰어넘어야 하는 샤오위에게 그 사랑은 말 그대로 기적이었다. 비록 그녀가 과거에서 왔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그때의 상륜은 그 말을 사랑의 달콤한 수사(修辭)로 받아들였겠지만.
그러나 세월 앞에서 좌절하고 퇴색하며 산화하는 것이 사랑이지만, 결국 시간의 벽을 뛰어넘을 수 있는 것 역시 사랑이 아닐까. 맺히자마자 곧바로 바스러지는 현재의 수많은 점들 중 하나에서 우연히 교차하며 만난 연인들은 공유하게 된 과거를 그 사랑의 정체성 삼아 미래를 앙망한다. 시간의 벽을 뛰어넘는 동안에만 유효하다고 해도, 적어도 그 순간 그 모든 사랑은 기적이 된다.
주걸륜과 계륜미가 주연한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의 첫 장면 |
단장고등학교에서 나와 단수이의 근처 언덕 길들을 거닐다가 ‘말할 수 없는 비밀’에 등장했던 골목길을 발견했다. 십자 모양이 나도록 빈 공간을 남기면서 붉은 벽돌을 쌓아 올린 벽이 인상적인 이곳은 갑자기 내린 비를 피하던 샤오위를 발견하고 상륜이 자전거 뒷자리에 태워주던 장소였다.
십자 무늬의 붉은 벽돌 벽은 예쁘고 낭만적이었다. 그러나 좁은 골목을 사이에 둔 그 건너편 시멘트 벽의 일부에는 못과 깨진 병 조각들이 날카롭게 박혀 있었다. 행인이나 도둑이 담을 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마련된 지극히 현실적인 방편이었다.
붉은 벽돌 벽 너머의 잘 가꿔진 뜰에서 신랑신부가 결혼 기념 앨범 촬영을 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삶의 정점 하나를 앞에 둔 남녀는 카메라 앞에서 갖가지 포즈를 취하며 마음껏 웃었다. 나도 사진기를 꺼내 들고서 벽에 바짝 다가서서 셔터를 누르기 시작했다.
벽돌 벽의 무늬가 자연스레 십자(+) 모양의 틀을 이루어 피사체를 담아냈다. 만일 벽을 45도 기울일 수 있다면, 그 틀은 부정을 뜻하는 엑스(X) 모양이 될 것이다. 게다가 맞은 편 벽에는 못과 병 조각이 흉하게 곤두서있지 않은가. 그러나 나는 플러스 무늬 틀에서 카메라를 고정시킨 채 꼼짝 않고 계속 셔터를 눌렀다. 그 남자와 그 여자를 온전히 더해서 그 사랑을 찍고 싶었다. 그러는 동안 샤오위를 태운 상륜의 자전거가 내 뒤를 스쳐 지나갔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 글의 후반부는 9월16일자 ‘이동진의 영화풍경’에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