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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올워드 밴 플리트(James Alward Van Fleet, 1892년 3월 19일 ~ 1992년 9월 23일)
는 제2차 세계 대전과 한국 전쟁에 참전한 미국 육군 장성이며
제임스 밴 플리트는 뉴저지주 포트 리의 Coytesville 지역에서 태어났지만
유아 시절 부모가 플로리다로 이사갔다.
밴 플리트는 플로리다주 Bartow의 Summerlin Institute 고등학교를 다녔다.
1911년 졸업 후 밴 플리트는 뉴욕주 웨스트 포인트의 미국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웨스트 포인트에서 육군을 대표하는 미식 축구 팀원이었으며
1914년 무패로 팀을 이끈 탁월한 풀백이었다.
밴 플리트의 1915년 미국 육사 졸업생 동기 가운데
장군이 된 사람들이 여럿 나왔기 때문에,
후일 역사가들은 이들을 "별이 쏟아진 학번"이라고 불렀다.
동급생 가운데 후일 미국 34대 대통령이 된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와
5성 장군이 된 오마르 브래들리 (Omar Bradley)이 있다.
졸업 후 그는 미 육군 보병 소위로 임관했다.
육사 졸업 후[편집]
제 1 차 세계 대전 중,
그는 존 J. 퍼싱 장군하에 미국 원정군의 일원으로 대대 지휘관을 지냈다.
밴 플리트는 미국 플로리다 대학(University of Florida)의
미 육군 ROTC 프로그램의 선임 장교로 근무하면서, William G. Kline을 돕기 위해
1923년과 1924년에 플로리다 대학 게이터스 축구 팀의 수석 코치로 일했다.
게이터스 축구 팀은 12-3-4 (.737) 기록을 세워 전국적으로 알려졌다.
제 2 차 세계 대전
제 2 차 세계 대전 중 밴 플리트는 제 8 보병 연대를 3년간 지휘하면서 유럽 전선에 참여, 1944년 6월 D-day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유타 해변에 연대의 상륙을 지휘했다.
미 육군 참모총장 조지 마샬 (George Marshall) 장군은
밴 플리트와 비슷한 이름을 가진 유명한 알코올 중독자였던 다른 장교와 잘못 혼동하여, 이 탁월한 장교의 승진을 저지했다.
유럽 통합 지휘관으로 임명된 아이젠하워가 마샬 장군에게 그의 실수를 알렸고,
얼마 후 밴 플리트는 사단장 및 군단 지휘관으로 승진했다.
1945년 3월 17일 George S. Patton 장군의 3군에 속했던
미 육군 3군단장으로 John Millikin 장군의 후임 사령관이 되었다.
제 2 차 세계 대전 이후
1946년 밴 플리트는 트루만 독트린의 집행자로 그리스에 파견되어,
그리스 정부와 250명의 군사 고문단에 조언했고,
4억 달러의 군사원조를 관리하여 그리스 내전 종식에 기여했다.
그리스 북부 도시 카스토리아 (Kastoria)의 중앙 광장에 여러 해
밴 플리트 장군의 흉상을 볼 수 있었고, 2007년 흉상은 새 동상으로 교체되었다.
밴 플리트는 1950년 8월 10일부터 1951년 4월 11일까지
미 육군 제 2 군 총사령관을 지냈다.
한국 전쟁 참전
한국전 당시에는 미국 제 8 군 사령관으로 유엔군 사령관을 겸했다.
1951년 4 월 14일 밴 플리트는,
맥아더 원수가 미국으로 귀임하게 되면서
맥아더의 후임이 된 매슈 리지웨이 장군의 후임으로,
8 군과 유엔군 총사령관으로 한국전에 참가하게 된다.
그는 리지웨이의 전략을 이어 받아 숫적으로 우세였던
중국 공산군과 북한군에 맞서는 작전에서 미 8 군을 지휘했다.
(유엔군 사령관 매슈 리지웨이 장군의 후임은 클라크 장군입니다)
현리 전투와 한국군의 작전지휘권
오마치고개가 중공군에게 점령당해
현리전투에서 당시 유재흥이 지휘하던 대한 육군 제3군단은 전체가 포위되었다.
이에 군단장 유재흥은 부군단장을 군단장 대리로 지정한 후
경비행기를 이용해 포위망 밖으로 도주,
3군단은 지휘통제가 불가능해져 와해 상황이 되었다.
이에 따라 3군단은 사단장 이하 지휘관들이
지휘를 포기하고 계급장을 제거한 후 전체 병력이 개별적으로 무질서하게 후퇴했다.
현리전투의 결과, 3군단은 병력의 30%와 중장비의 70%를 잃었고,
이로 말미암아 한국군 장성의 작전지휘 능력은 철저하게 불신받게 되었다.
당시 유엔군 사령관이었던 밴플리트 미8군사령관은
한국군의 제1군단을 제외한 모든 군단 사령부를 해체하고
일체의 작전지휘권을 미군 장성들에게만 부여하는 특단의 조치를 하였다.
1군단 또한 미군 사령부로부터 직접 지휘를 받도록 해
육군본부를 지휘선 상에서 제외하여 이 시점부터
모든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이 상실되었다.
휴전과 전역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자 미국 정부는 협상을 통한 전쟁 종식을 발표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단호하게 휴전을 거부했다. 밴 플리트 장군도 같은 생각이었다.
“만약 이번에 공산주의자들이 대가를 치르지 않고 휴전에 성공하면 민주국가들,
특히 미국은 수 세기 동안 악몽에 시달리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밴 플리트 장군은 자신의 힘으로 전쟁의 양상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전역을 결심했고 2월 12일 한국을 떠났다. .
한국에 대한 기여
한국 재임 중 1952년 4월
미국 공군 장교로 B-26 폭격기 조종사였던 외아들 제임스 밴 플리트 2세 대위가
작전 중 실종되었고, 2년이 지나 전사자로 처리되었다.
재임 기간 중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의 설립과 건물을 신축하는 등,
4년제 육군 사관학교를 통해 대한민국 육군의 전력 강화에 기여했다.
현재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에는 밴 플리트 장군의 동상이 서 있고
, 육사 박물관에는 한국 육군 사관학교의 발전을 바란다는
장군의 개인 편지가 전시되어 있다.
전역 이후 및 사후에 미친 영향
1953년 3월 31일 벤 플리트 장군의 전역식에서
해리 트루먼 전 대통령은 "밴 플리트 장군은 지금까지 내가 본 가운데
가장 최고의 장군이었다 ... 나는 그를 그리스에 보내 그 전쟁에서 승리했다.
나는 그를 한국에 보내 그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말했다.
일생동안 밴 플리트에게는 3 개의 Distinguished Service Crosses (용감한 전투에서 2 번째로 높은 상) 훈장, 8 개의 은성 훈장, 3 개의 동성 훈장, 3 개의 (전투에서 받은 부상으로 받는) Purple Hearts 훈장이 수여 되었는데,
이때 밴 플리트는 일반 보병 병사라면 누구나 가슴에 가지고 있는
전투 보병 배지를 가장 소중한 소유물로 여겼다.
그는 1953년 7월 26일, What 's My Line의 에피소드에 출연했다.
1954년 7월 28일 미국을 국빈 방문한 이승만 대통령은
대한민국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미 상하원 양원 회의에서 영어로 연설하면서,
"1951년, 밴 플리트 장군이 미 제8군을 지휘하기 위해 한국에 왔다...
그는 한국 청년들을 제주도, 광주, 논산, 기타 여러 곳에 모으고
주한 미 군사고문단의 장교들을 보내 주야로 훈련시켰다.
수개월도 지나지 않아 한국 청년들은 전선에 보내졌으며 경이로운 성과를 올렸다.
오늘날 이렇게 훈련받은 군대는 아시아를 통틀어 최강의 반공군으로 알려졌으며
한국 전선의 3분의 2 이상을 담당하고 있다.
그래서 한국인은 밴 플리트 장군을 '한국군의 아버지'라고 부른다"고 말했다.
1957년 밴 플리트는 "양국의 문화, 목적, 이상, 예술, 과학 및 산업에 대한 정보를 이해와 공감을 통해" 미국과 한국 두 나라 국민의 우애 증진에 헌신할
코리아 소사이어티를 뉴욕 시에 설립하는데 깊이 관여 했다.
밴 플리트는 1992년 9월 23일 플로리다주 포크 시티 근교에 있는
목장에서 잠을 자다가 사망했다. 1992년에 100 번째 생일 축하 몇 달 후였다.
사망 당시 미국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장성이었던 그는
알링턴 국립 묘지 7구역에 안장되었다.
그의 사후 얼마 되지 않아 코리아 소사이어티는제임스 A 밴 플리트 상을 제정하여,
매년 한 - 미 관계를 더욱 공고히 한 사람에게 표창해 왔다.
또 그를 기념하기 위해, 플로리다 포크 시티에서 마블로 연결되는 트레일이 제임스 밴 플리트 장군 주 트레일로 명명되었다.
플로리다 대학(University of Florida)은 1946년 장군에게 명예 박사 학위를 수여했고,
미 공군, 육군 및 해군 ROTC 프로그램이 있는 군대 과학 건물을 밴 플리트 홀로 명명했다. 밴 플리트는 1971년 "명예 우승자"로 플로리다 체육 대학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렸다. 1998년에 플로리다 역사가 및 다른 컨설턴트 패널은 밴 플리트를
20 세기의 가장 중요한 플로리다 주민 50명 가운데 한 사람으로 지명했다.
밴 플리트 사후 조지 C. 마셜 재단 (George C. Marshall Foundation)은 장군의 기록물을 기증 받았으며, 마셜 장군의 기록물에 이어 두 번째로 큰 재단 소유의 논문 컬렉션이다. 한편 밴 플리트 장군은 미술 수집가이기도 했는데, Samuel P. Harn 미술박물관에 많은 희귀하고 예외적인 아시아 예술품들을 기증했다.
밴 플리트와 그의 부인 헬렌 무어 밴 플리트(1892-1984) 부부 사이에
3명의 자녀, 8명의 손주 및 12명의 증손자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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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어머니에게;
눈물이 이 편지를 적시지 않았으면 합니다.
어머니 저는 자원해서 전투비행훈련을 받았습니다. B-26 폭격기를 조종할 것입니다.
저는 조종사이기 때문에
機首에는 폭격수, 옆에는 항법사, 後尾에는 기관총 사수와 함께 있습니다.
아버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두려움 없이 살 수 있는 권리를 위해
지금 한국에서 싸우고 계십니다.
드디어 저도 미력한 힘이나마 아버님에게 힘을 보탤 시기가 도래한 것 같습니다.
어머니 저를 위해 기도하지 마십시오.
그 대신 미국이 위급한 상황에서 조국을 수호하기 위하여 소집된
나의 승무원들을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그들 중에는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아내를 둔 사람도 있고,
애인이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는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그것은 언제나 저의 의무입니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아들 짐 올림
이 편지는 워커 장군의 후임이었던 릿지웨이 장군이 맥아더 장군이 해임됨에 따라
UN군 총사령관으로 영전한 뒤
그 후임으로 부임한 밴플리트 미 8군 사령관의 외 아들 지미 밴플리트 2세 공군 중위가 이제 막 해외 근무를 마쳐 한국전에 참여할 의무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원해서 아버지가 사령관으로 있는 한국전에 참여하면서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이다.
그리고 그것이 마지막 편지였다.
1952년 4월 2일. 이 훌륭한 군인은 압록강 남쪽의 순천지역을 폭격하기 위해 출격했다가 새벽 세시 김포 비행단의 레이더와 접촉한 후 표적을 향해서 날아가더니 레이더에서 사라진 뒤 소식이 끊겼다.
즉시 수색작전이 시작된 것은 물론이다. 4월 4일 아침 10시 30분 8군 사령관 밴플리트는 미 제5공군 사령관 에베레스트 장군으로부터 지미 밴플리트 2세 중위가 폭격비행 중 실종 되었고 지금 수색작업이 진행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는 묵묵히 듣고 있다가 담담하게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고 한다.
“지미 밴플리트 2세 중위에 대한 수색작업을 즉시 중단하라. 적지에서의 수색작전은 너무 무모하다.”
라고 아버지가 아들 구출작전을 무모하다고 중지시킨 것이다.
이것은 인접 한국군 부대장으로서 회의에 참석했던
전 주월 한국군 사령관 채명신 장군의 증언이다.
며칠 뒤 부활절을 맞아 그는 전선에서 실종된 미군 가족들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저는 모든 부모님들이 모두 저와 같은 심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아들들은 나라에 대한 의무와 봉사를 다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말한 바와 같이
벗을 위해서 자신의 삶을 내놓는 사람보다 더 위대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가 말한 벗이 곧 한국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알 것이다.
밴플리트 미 8군 사령관은 한국을 벗이라고 생각했고,
그 벗을 위해 자기 자식을 희생시킨 것이었다.
이런 강직하기 짝이 없는 군인 앞에 뜻밖의 손님이 찾아와 놀라운 부탁을 하였다.
1952년 12월, 대통령 당선자인 노르만디의 영웅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가
한국 전선을 살피기 위해 방한하여 8군 사령부를 찾은 것이었다.
8군과 한국군의 고위 장군들과 참모들이 모두 참석하고
전 세계의 기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밴플리트 사령관이
전선 현황에 대해서 브리핑을 끝내자 조용히 듣고 있던
차기 미국 대통령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당선자가 느닷없는 질문을 하였다.
“장군, 내 아들 존 아이젠하워 소령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얼마 안 있어 대통령에 취임할 당선자의 전투 사령관에 대한
첫 질문 치고는 너무나 대통령답지 않은 사적인 질문이기도 했지만
상대가 아들을 잃고도 꿈쩍하지 않은 밴플리트였기에 모두들 무슨 일이 벌어질까 바짝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아이젠하워 소령은 전방의 미 제3사단 정보처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라고 밴플리트 장군이 사무적으로 짤막하게 대답하자
아이젠하워는 그야말로 참석자 모두가 놀라자빠질 사적인 부탁을 공공연히 했다.
“사령관, 내 아들을 후방 부대로 배치시켜 주시오.”
참석자들이 모두 서로 두리번거리면서 웅성거리고
밴프리트 사령관도 언짢은 표정으로 아이젠하워를 응시하면서 의아해 하자
당선자가 조용히 말했다.
“내 아들이 전투 중에 전사한다면 슬프지만
나는 그것을 가문의 영예로 받아들일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존 아이젠하워 소령이 포로가 된다면 적군은 분명히 미국 대통령의 아들을 가지고 미국과 흥정을 하려 들 것입니다.
나는 결단코 그런 흥정에 응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사령관이 잘 알다시피
미국 국민은 대통령의 아들이 적군의 포로가 되어 고초를 겪는 것을 용납하지 않고
‘대통령의 아들을 구하라’ 고 외치며
나와 미국에게 적군의 요구를 들어주라고 압력을 가할 것입니다.
나는 그런 사태를 원치 않습니다.
그래서 나는 사령관이 즉시 내 아들이 포로가 되지 않도록 조치를 취해 주실 것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멋진 장면인가! 순식간에 두리번거리면서 의아해하던 분위기가 반전되어
모두들 고개를 끄덕이며 웃는 표정이 되고 곧이어 “즉각 조치하겠습니다.
각하!” 라는 밴플리트 장군의 우렁찬 목소리가 장내에 울려 퍼졌다고
이 자리에 참석했던미 2사단 72탱크 대대의 대대장 T.R Fehrenbch 중령이 전역 후 쓴 This kind of war(한국 전쟁)이라는 책에서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페렌바하는 전역 후 유명한 역사 저술가와 칼럼니스트가 되었다.)
마지막 UN군 사령관인 마크 클라크 대장의 아들 클라크 대위도 금화지구의 저격능선에서 중대장으로 싸우다가 세 번에 걸친 부상으로 전역을 했으나
결국 그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한국전에 참가한 미군 장성의 아들들은 모두 142명, 그중 35명이 전사하였다.
한국전에서의 미군 전사자는 모두 54000여명 부상자는 10만 명이 넘었다.
밴 플리트 장군의 외동아들인 제임스 A. 밴 플리트 주니어는 신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를 돕기 위해 미 공군 대위로 한국전쟁에 참전하였다가 1952년 4월에 전사했다.
밴 플리트 장군의 아들은 B-26기를 조종하여 북한군의 야간 철도 보급을 공격하는 위험한 임무를 맡고 있었는데, 이 와중에 추락하여 유해조차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이 사례는 전선의 최고사령관인 아버지가 자신의 아들이라고 편애하지 않고 전선에 내보내는 솔선수범의 사례로 자주 언급되곤 한다. 진정한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실현이고, 미군이 어째서 세계 최고, 최강의 군대인지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이후 밴 플리트 장군은 1953년 1월 말 미국 육군 제8군 사령관의 직위를 맥스웰 테일러 중장에게 이임하고 미국 본토로 돌아왔으며 2달 후인 3월에 38년간의 군생활을 끝으로 전역했다. 한국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1953년 3월 31일에 군에서 퇴역했다.
밴 플리트는 1957년에 미국 최초의 한국 관련 비영리단체인 '코리아 소사이어티'를 설립하였으며, 이후 미국과 한국 사이의 우호증진에 큰 기여를 하였다.
창설자 밴 플리트 장군을 기리는 의미에서 코리아 소사이어티는 한미관계의 우호증진에 기여한 사람에게 '제임스 A. 밴 플리트 상'을 수여하고 있다.
밴플리트 장군 아들의 戰死
6.25 남침 전쟁 때 유엔군의 주력이던 미8군 사령관 밴 플리트 장군은 그의 아들이 폭격기 조종사로 참전한 경우이다. 그의 아들 지미는 그리스에서 근무하다가 본국에 돌아와 있었다. 그는 해외 근무를 한 직후라 다시 해외근무를 할 자격이 없었지만 굳이 자원을 하여 한국 전선을 택했다. 그는 한국 전출 명령을 받자 어머니에게 이런 요지의 편지를 썼다.
<사랑하는 어머니에게: 이 편지는 군인의 아내에게 바치는 편지입니다. 눈물이 이 편지를 적시지 않았으면 합니다만...저는 자원해서 전투비행훈련을 받았습니다. 저는 전투중에 B-26 폭격기를 조종할 것입니다. 저는 조종사이기 때문에 機首엔 폭격수, 옆에는 항법사, 후미에는 기관총 사수와 함께 있습니다. 우리는 야간비행을 할 것입니다. 아버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두려움 없이 살 수 있는 권리를 향유할 수 있도록 싸우고 있으며 드디어 저의 미력한 힘이나마 보탤 시기가 도래한 것 같습니다. 저를 위하여 기도하지 마십시오. 그 대신에 미국이 위급한 상황에서 조국을 수호하기 위하여 소집된 나의 승무원들을 위해서 기도해주십시오. 그들 중에는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아내를 둔 사람도 있고, 아직 가정을 이뤄본 적도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는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그것은 언제나 저의 의무입니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아들 짐 올림>
지미는 한국으로 부임하자 동료 승무원들을 데리고 미8군 사령부를 찾아가 아버지를 만났다. 1952년3월19일 밴 플리트가 만60세 생일을 맞은 날이었다. 며칠 뒤 父子는 서울 북쪽의 갯벌로 기러기 사냥을 나갔다. 4월2일 밴 플리트 장군은 아들과 통화를 했는데 아들 짐이 그즈음 북한 지역으로 출격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1952년4월4일 오전 10시30분, 밴 플리트는 미 제5공군 사령관 제임스 에베레스트 장군으로부터 아들 지미가 야간 출격을 한 뒤 귀환하지 않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지미와 두 승무원은 압록강 남쪽에 위치한 순천 지역을 정찰 폭격하기 위하여 출격했었다. 지미로서는 네번째 출격이자 최초의 단독 비행이었다. 새벽 1시5분에 이륙한 그는 새벽 3시 김포 비행단의 레이다와 접촉했다. 지미는 主표적이 구름에 가려져 있다면서 예비 표적을 요구했다. 예비표적을 향하여 날아가던 지미의 폭격기는 레이더에서 사라진 뒤 소식이 끊긴 것이었다. 그에 대한 구출작전이 진행되었다.
밴 플리트 장군은 아들에 대한 공군의 수색작업이 도를 넘지 않도록 했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 이제 구출 작전을 중지하라"고 명령한 것도 그였다. 그 후로도 그는 가끔 아들이 실종된 지역의 지도를 물끄러미 바라보곤 했다고 한다.
그해 부활절 밴 플리트는 한국 전선에서 실종된 군인 가족들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저는 모든 부모님들이 저와 같은 심정이라고 믿습니다. 우리의 아들들은 나라에 대한 의무와 봉사를 다하고 있었습니다. 오래 전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벗을 위하여 자신의 삶을 내놓은 사람보다 더 위대한 사랑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