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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미향 사태, 양비론(兩非論)적인 현상을 결코 용인(容認)해서는 안 된다.
적반하장(賊反荷杖)으로 기회를 잡아 몰아가는 극우주의자들,
일본의 한국사회 선과 악 양진영으로 작전을 걸어놓은 것
윤미향은 우리사회 욕구를 충족시킨 악역으로 사용되어져 온 세포,
이런 시시비비(是是非非)거리의 배역으로 사용되어져
일본과 맥을 같이 하는 극우들에게 공격 기회 제공 역할
민주당이 잘 못 처리한 연대 책임 발생,
이제는 위안부 양대립 사회인가? 은밀하게 이 문제를 한일 화해 무드 만들기 일 때, 극우들이 나설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위안부는 새로운 한일 관계를 위해서 이들에게 너무나 적절한 필요선(必要善)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 달라졌다. 어떤 점에서 달라진 것인가? 위안부로 한일관계 개선이란 목적이 무너져버린 것이다. 이때 사용되어진 실무자들이 선과 악의 역할을 현정부와 한국사회 몰이로 역공을 펴고 혼란을 조성해야 하는 필요악(必要惡)으로 만들 이유가 형성 된 것이다.
그러자면 이전 30년 동안 두 나라 진영에서 고도로 배역을 해 온 자들이 선과 악으로 역할을 함으로써 우리사회를 양분해서 또 다른 대립구도로 몰아가야 하는 것이다. 지금 이런 점에서 새로운 대립각이 세워지고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은 판을 키워서 우리사회를 혼란스럽게 몰아가고 결국 대선으로 부정적 여론을 형성해서는 판도를 확실하게 바꾸어가고자 하는 파괴가 가동되는 것이다. 극우주의자들의 윤미향 사건을 기회를 잡았다고 우리사회를 몰아가는 짓들이 가관이지 않을 수 없다.
일본을 위해서란 입에 개 버끔을 물고 달려드는 불나방 같은 극우주의자들이 모두 총출동하지 않았는가? 그렇다고 우리사회나 정부는 윤미향이 잘했다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서 이용수할머니를 공격으로 빌미로 삼으면서 윤미향을 살리려 하는 정치 환경 조성 또한 어리석은 행보이다.
우리는 알아야 한다. 모두가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이를 주도해 온 지난 30년 동안의 당사자들이나 실무진들, 그리고 수요 집회에 주동한 소수자들 중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의 진정한 우리사회 구성원들이 아닐 수 있음이다.
이들은 한일 양국 가까워지기 민간인 차원에서 은밀하게 차출(差出)되어 가장 적절한 도구를 이용해서 운동을 해 온 인물들이었다고 단정 될 수 있다. 이들이 조직을 가동하면서 우리사회 내의 순수한 역사와 인원들을 활용하여 실제적으로 효과를 노려 온 것이다.
만일 민주당이 복병으로 심어서 이런 배경에 본질을 알지 못하고 민주당 차원의 정보 활용의 대상이 윤미향이었던가? 이러한 배경은 재정까지도 은밀성이 개입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합리적 추론이 사실일 때, 윤미향을 국회의원으로 농공행상을 하고, 보호하여 지켜주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개인적으로 불법 자금 문제가 개입되어 있다면, 이 또한 일본의 컨트롤 운용에 허점 잡히는 정보누출이 파생될 것이다. 이것이 우리사회 지금과 같은 대립과 혼란 상황들이 발생했다.
그런다음 우리사회 내부 일본 동조자들이 고도의 정보를 일본으로부터 받아서 이 같은 극단의 사회로 몰아오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현재까지의 일본관련 우리사회 어두운 지대가 형성되었고, 이러한 사회적 배경에서 우리가 원치 않는 일들이 얼마든지 가능했던 것이다.
민주당은 윤미향을 활용하고자 해서는 안 되었다. 만일 민주당 내의 유력한 정치 실무자의 뒷배가 연류되어 있다면, 지금의 민주당의 윤미향 존재의 보호가 되고 있는 것이라면, 이것은 민주당에 지금이라 아니라도 부메랑이 되어 돌아 올 것이다.
작은 개미구멍이 둑을 무너트릴 수 있음을 왜, 모른단 말인가? 본인도 후원으로 선교를 하는 사람이다. 지난 십 수년 동안 가난한 삶에서 벗어나지를 못한다. 하지만 선으로 먹고살고자 선택을 했다면, 그 선한 행위로 부자되고 힘을 가지려 해서는 안 된다.
40년이 넘는 동안 이 처음 자세를 지금까지도 놓지 않고 가난한 삶을 영위하며 다른 사람들을 돕고자 해오는데 본인이 믿고 섬기는 신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으려고 싸워오고 있다. 하지만 사회 약자들을 돕는다고 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몇 년을 잘 하다가 어느 날부터 변질 되고 만다.
만일 자신이나 그 가족들이 잘 먹고 살 살고, 집을 몇 채식 가지고자 하는 마음이 약자들을 돕는 일로 그렇게 하고자 했다면 아예 처음부터 그 길을 들어서면 안 되는 것이다.
정말 사회 속에서 힘없고, 배우지 못해 일처리가 잘 안되고, 구조적으로 잘못 된 사회 속에서 매번 당하고만 사는 사람들을 돕고자 뛰어 들었다면, 마지막 순간까지 마음을 비워야 한다. 자신들이 먹고 살 수 있으면 된다. 그 어떤 경우에도 욕심을 부리고 물 타기 등으로 인생전환을 하고자 하면 안 된다.
과연 우리사회 속에 선한 이들을 대상으로, 신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고난을 감내하면서 순수하게 사람들을 돕고자 하는 마음을 끝까지 지킬 사람들이 얼마나 자신의 양심을 지키면서 살아가는가?
윤미향은 이미 언론들이 밝혀내고 있듯이 이러한 인물은 못되는 것 같다. 앞으로 코로나, 테러, 무정부 상태 등과 같은 지구적 혼란 상황이 더욱 극성을 부리게 될 것인데, 언제까지 우리사회가 일본 간자들이 몰아가는 거짓의 힘에 놀아나고자 하는가?
이들을 키우는 것은, 바로 일본적인 경향성이다. 그래야 우리사회가 제대로 서지 못할 것이 아닌가? 그럴 때 일본이 우리를 삼킬 수 있는 불안전한 사회로 나아갈 것이 아닌가? 그런데도 장단을 맞추고 그런 인물들을 나라 지도자들로 등극을 시키는 이들 또한 누구인가?
윤미향사태, 위안부 할머니 중 소수자들, 이들을 우리사회 내부에서 은밀하게 한일 가까워지기 운동으로 펼쳐 온 조직적인 운동들은 바로 양비론(兩非論)적인 문제임을 직시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하게 어필하지 않을 수 없다.
장단 맞추면서 놀아나고, 손뼉을 마주 치려고 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판을 키워서 우리사회를 유린하는 방향으로 몰아가는 새로운 파괴의 성질이기 때문이다. 이용수할머니가 왜, 한일 양국이 가까워지고, 한일 양국 아이들이 서로 배워서 좋은 방향으로 나갔으면 한다.
그것이 자신들의 위안부 억울한 문제를 바로 풀어주는 것이다. 이렇게 역설을 하시고자 했다. 이것이 지난 30년 동안 정신대나 위안부 문제가 우리사회 안에서 부상을 했던 이유가 아니었던가?
민주당 계열의 시민운동가들이 이용수 할머니를 공격적으로 대하는 것도, 만일 한일 가까워지기 운동의 세포들이라면, 신분을 속이고 사회적 분위기를 몰아가면서 국악의 고수 역할처럼 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런 역할을 하며 공격수가 되어주니까 이를 반대하는 극우주의자들이 신나게 떠들면서 우리사회를 들썩이고자 마음껏 몰아가고 있지 않는가? 이것이 우리에게 무슨 의미를 던지고 있는가?
우리사회 장을 그러한 환경으로 내몰아 한일 문제를 뜨거운 감자처럼 만들어서 일본이 원하는 방향으로 내몰아가고자 하는 의도가 숨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우리사회는 양비론(兩非論)적인 관점에서 해석하고 아예 이 자체를 거두어 버려야 할 것이다.
일본과 관계해서 일본이 우리 과거 나라 자체를 무력으로 침략하여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착취(搾取), 갈취(喝取), 파괴(破壞), 생명경시, 민족정신말살 등의 문제를 바로 잡는 국가적인 과거사 문제 해결이 되어야 한다.
즉, 일본이 지금까지처럼 여전히 침략 욕구를 구축해 오는 것에 대한 직접적인 우리의 국가적 공세에 의미를 두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어떻게 이루어져오고 있었는가? 오히려 일본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여전히 주인국으로 섬기려는 자들이 자기사회 내부를 유린하는데 적극적이었던 것이다.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고, 일본 유리한 방향으로 나라 장치들을 해왔고, 그것이 한일 국회의원 연맹(聯盟)으로 정치적 결합을 도모해오면서, 은밀하게 민간인 차원의 한일 관계 가까워지기 운동을 해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위안부 문제의 근원으로써 원인이자 이유였던 것이다. 그런데 뜻밖의 사건으로 이것이 무산되고, 살아날 회생이 보이지 않자 그때 활용했던 인적 자원들을 역(逆)으로 사회 혼란을 조성하고, 한국 정부로 하여금 걸려들도록 하여 정부와 우리사회가 갈리도록 물귀신 작전을 펴는 것이다.
이것이 전형적으로 일본이 우리사회를 유린하는 선악의 문제라 할 수 있다. 본인은 잘 안다. 우리나라 안에 들어와 있는 국제결혼 대상자들은 본래 자신들 국가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옳고 그름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
즉, 선택이나 주장에 있어서 자유롭고 별다른 신경을 쓸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관심의 힘을 쏟을 필요가 없다는 인식이 그 바탕이다. 그러니까 우리사회에서 생활할 때, 감정이 없는 편리한 생각, 혹은 그 어디에도 매이지 않을 수 있는 성향을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일본은 아예 없을 뿐만 아니라 철저하게 모두 다 이용하는 것이다. 결코 우리를 좋아할 수 없고, 철저하게 이용만 하는 것이다. 바로 위안부 문제는 우리사회를 유린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였을 뿐이다.
그래서 이용수 할머니 입에서 한일 양국이 함께 잘 지내고, 양진영의 아이들이 역사를 바르게 배워서 이 문제를 해결해 주면 좋겠다는 의미 있는 긍정논리를 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의미 있는 긍정논리는 철저하게 일본이 원하는 대한민국 장악으로 연결되는 천사 같은 웃음이자 용어 사용인 것이다.
윤미향의 역할은 부정적인 배경을 미연에 듬뿍 만들어서 이런 공격의 빌미를 제공하는 배역이 되어 일본이 주도하는 한일 양국 방향으로 내몰아가는 배역이 되어 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본인과 같은 뜻있는 국민들은 아예 이 수요 집회를 없애고, 일본이 자발적으로 과거사 문제를 철저히 시인하고, 두 번 다시 그런 잔악하고 파괴적인 무력 도발 행위를 하지 않겠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이것이 과연 일본에서 일어날 수 있겠는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지엽적인 문제로 해결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 온 나라 국민차원에서 일본을 바라보는 눈과 심지를 키울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결코 일본이 바뀌지 않는 한 함께 미래를 향해서 나아가자! 느니 경제 교류와 외교차원의 관계개선, 확대생산 등의 이유들을 들먹이면 안 되고, 아예 일본을 무시해버리는 것이다.
일본이 우리에게 투자하는 것은 너무 미비하고, 일본 회사들이 우리사회 안으로 들어와서 어마어마하게 기업활동들을 해서 합법적으로 거두어 가는 돈들이 얼마였는가? 반면에 우리나라는 일본에 투자한 그 금액이 얼마인가?
일본이 우리 기업 물건을 사주는 일 년 액수는 너무나 형편없고, 우리나라 대 기업들은 기업이윤 논리에 의거해서 일본 중소기업들과 상생의 경제 활동을 펴왔던 것이다. 일본은 우리와 우리 물건에 대해서 경시하고, 사주지도 않는데, 대기업들이 그런 일본 기업들과 상생을 해 온 것이다.
생각해보자! 일본 기업들이 우리사회 안으로 들어와서 일상용품 체인점들이나 사회 중간 기업 구조들을 운용해 오고 있는 것이다. 즉, 서민들의 가슴속으로 파고 들어오는 전략을 구사한 것이다.
그런데 요즘은 미국 회사들이 설립되어서는 매우 대량으로 구입을 해도 서민들의 장바구니를 가볍게 해준다는 것이 아닌가? 왜, 도대체 이런 외국 기업들이 이런 역할들을 하는 것인가?
왜, 어째서 우리나라 대기업들이 자기사회를 겨냥해서 물건 값을 싸게 하는 일상생활 용품 마트들을 운용하지 않는가? 다이소 같은 그런 가게들을 삼성, 현대, LG, 선경 등, 대기업들이 운용하여 서민들의 가슴을 파고들어가야 할 것이 아닌가?
하지만 대형마트를 운용하지만 물건 값이 산 것이 아니다. 한국사회 안으로 들어와 서민들의 가슴을 파고 들어오는 외국 기업들과 비교하면 터무니없이 가격 차이가 난다. 미국 마트에 어마어마한 인파들이 카트 차에 가득 싣고 계산을 마치고 자신들이 운전해 온 차에 가득 채우지 않는가?
왜, 대기업들이 이런 방식으로 자기사회 어려운 시기에, 자신 국민들을 생각하는 노력들이 부족하단 말인가? 우리사회 물가는 미국보다 더욱 더 비싼 편이다. 물가를 바로 잡을 뿐만 아니라 언제나 소외당하는 서민들의 장바구니를 생각하는 한국기업들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어떤가? 왜, 이것이 안 되는가? 바로 이와 같은 양비론적 사회로 몰아가는 자들이 우리와 똑같은 사회 속에서 둘을 다 활용하고자 미리미리 함정을 만들어 둔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성경은 말한다. 그 함정을 만들어서 다른 이가 걸리기를 바라는 자들은 오히려 자신들이 그 자신이 파 놓은 함정에 자기 자신이 빠진다고 기술해 놓은 것이다.
정부와 민주당은 이번 계기를 통해서 위안부 문제가 근본적으로 잘못 되었음을 직시直視)했으면 한다. 오랜 시간 거치면서 이때를 바라보고 미통당의 전신 정당이 미연에 작업해 둔 것이라면, 지금의 위안부 이상기류와 극우들의 일치되고 공격적인 형태는 이미 제작되었다는 증거이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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