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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박팽년의 상소문이 발견되었다는 1989년의 MBC 보도는 오보임.]
이 글은 무려 30년 전에 보도되었던 뉴스에 관한 것인데, 본론을 시작하기에 앞서 이 글을 쓰게 된 배경을 언급하고자 한다. 해당 뉴스가 오래 되었지만 근자에 누군가에 의해 새로 발굴되고 뉴스 형태로 주어진 때문인지, 요즘 이 뉴스 내용이 믿을 만한 듯이 퍼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필자가 검토한 결과 전혀 그렇지 않음이 판명되어 진실이 더 왜곡되기 전에 사실을 밝혀 공개하는 것이다.
1. 뉴스의 내용
MBC 뉴스 홈페이지에 다음 자료가 실려 있다.
-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89/1824378_19354.html : “조선초 사육신 박팽년 상소문 초본 발견[최현호]” 1989년 7월 16일 보도.
여기에는 박팽년 선생의 상소문 초본이 발견되었다는 보도 동영상이 들어 있고, 그 대본이 실려 있다. 뉴스의 앵커는 당시 MBC 소속이었던 손석희 씨이고, 보도 기자는 최현호 씨이다.
그 내용을 보면 강원대의 박한설 교수(참고: 현재 정년퇴직)에 의해 박팽년 선생의 상소문 초본이 발견되었고, 사육신 사건의 의미를 재평가하는 중요한 역사자료라는 평가를 내리고 있다.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내용이 보도에서 언급되고 있다.
A. 단종복위 모의사건 발각 한 달 전인 1456년 음력 5월 17일에 쓰인, 세조에게 올린 상소문의 초본임.
B. 박팽년은 고려왕조를 무너뜨리고 고려충신들을 몰아낸 이조의 정통성에 문제가 있음을 암시하고 태종이 방석과 방번을 제거하고 왕위에 오른 것도 비판하고 있음.
C. 하륜이 주동이 돼 조준, 조영규, 함부림 등 공신들이 고려대신 차원부 일가족을 학살한 것에 대한 부당성을 지적하면서 조카를 몰아낸 세조에게도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암시해 다시는 이 같은 일들이 반복돼서는 안 된다는 젊은 관료와 선비들의 생각을 대변하고 세조에게 미움을 사게 되는 동기가 됐음을 보여주고 있음.
2. 뉴스의 실상
결론부터 말씀하자면, 뉴스에 나온 문건은 박팽년 선생이 ‘지은’ “상소문”이 아니라, 다름 아닌 박팽년 선생이 ‘지었다고 조작된’ 위서(僞書) “차원부설원기”(이하 ‘설원기’)이다.
2-1. 외형적인 평가
다음은 설원기(필사본)와 방송된 문건을 비교한 것이다.
이것이 설원기의 마지막 부분이며, 박팽년의 이름이 나오는 부분이다. 두 자료가 초록 표시 부분(오른쪽에서 두 번째 박스)에서 不能記와 不能以記로서 以가 다르며, 붉은 표시 부분(오른쪽에서 세 번째 박스)에서 後來가 來後로 순서가 다를 뿐 동일한 것을 볼 수 있다.
뉴스에 또렷이 비친 다른 부분도 살펴보았다.
방송화면 기준으로 오른쪽에서 두 번째 줄의 間阿와 間隔(이체자), 그리고 네 번째 줄의 哉의 유무만 차이가 난다.
그리고 위의 설원기에서 파란색 원으로 표시한 부분은 아래에 보인 뉴스의 문건에서 나온 것과 동일한 형태로 쓰여 있다.
여기서 이것을 제시하는 이유는 이런 것만 봐도 뉴스의 문건이 상소문이 아님을 알 수 있음을 지적하기 위해서이다. 상소문은 왕에게 직접 읽어달라고 올리는 글인데 일단 아무도 알아보기 어렵게, 李原이라는 이름과 南在라는 이름을 줄여서 原在라고 해놓은 다음 그것에 주석을 붙여서 설명하는 식의 상소문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또 한 가지, 그 문건이 상소문일 수 없는 사실은 마지막 부분에서도 자명하다. 관원이 올리는 상소문의 형식을 보면 마지막에 날짜를 기록한 후 “單銜(간단히 관직만 기록) + 臣 + 姓 + 署名”의 형식으로 쓴다. 여러 사람이 연명으로 쓸 때는 姓만 쓰면 구별이 안 되므로 성명을 다 쓴다. 물론 상소문의 초안이라면 말 그대로 한번 써 보는 것이므로 대개는 그런 부분이 아예 들어가지 않는다. 혹시 그런 부분까지 작성해 봤다 해도 문제는 없지만 뉴스의 문건에 제시된 것은 상소문의 형식에 전혀 맞지 않는다. 거기에는 “....臣朴彭年書”라고 끝나는데, 왕에게 상소를 올리면서 자기 이름을 쓴 다음 “書”라고 쓰는 발칙한 신하가 도대체 있을 수 있겠는가만 생각해 봐도 된다. 참고로, 설원기 필사본에서는 마지막이 “....臣朴彭年奉 敎謹記”(신 박팽년 임금의 하교를 받들어 삼가 기록함)이라고 되어 있다.
이상에서 설원기와 뉴스의 문건에는 사소한 차이들이 있지만 문장의 뜻에는 차이가 없다. 사실 설원기는 이본이 셀 수 없이 많은 이상한 문헌이다. 제목도 중구난방으로 여러 가지가 돌아다닌다. 설원기는 왕의 명령을 받들어 짓고 왕에게 바치는 형식으로 되어 있는데 이런 사실만 봐도 왕명으로 쓴 것일 리가 없음이 저절로 드러난다. 설원기는 참람하게 왕과 왕의 권위를 가장하고 저자를 박팽년 선생으로 조작한 위서(僞書)이다.
2-2. 내용적인 평가
지금까지 외형적으로 뉴스의 문건이 상소문이 아님을 밝혔고, 이로써 앞에 정리한 뉴스의 내용 중 A가 부정되었다. 이하에서는 내용적으로도 B와 C도 부정됨을 설파하고자 한다.
B의 내용은 정리하자면, 박팽년 선생께서 이조의 정통성과 태종의 왕위에 대해서도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것이다. 이 말만 놓고 봐도 전혀 말이 되지 않는다. 사육신은 바로 단종의 복위를 추구한 분들이다. 단종은 아버지가 문종이고 할아버지가 세종이고 증조할아버지가 태종이다. 세종의 신임을 두텁게 받고, 그래서 목숨을 내걸면서까지 단종을 지키려 했던 조선의 신하 박팽년 선생이 바로 그 태종의 정통성을 문제 삼는다? 게다가 근본적으로 왕조의 정통성까지? 조금만 역사적 상식이 있다면 나올 수 없는 발언이라 생각된다.
그런데 실제 B와 같은 성립할 수 없는 주장이 설원기에 실려 있다. 그리고 그런 주장이 주어진 데에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바로 설원기(“차원부설원기”)의 주인공인 차원부 때문이다. 차원부라는 인물은 전적으로 그 행적이 설원기에서 만들어진 인물이다. 설원기의 등장 이전에는 그 존재 혹은 실재를 증명할 수 있는 역사적 자취조차도 전혀 없다. 그래서 예를 들어 우리나라의 허다한 족보에 이름만이, 때로는 아무런 증거가 없어서 조작되었다고, 좋게 말하면 꾸며졌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벼슬 이름과 함께, 주어진 인물들과 동일하다. 개인적으로야, 그것이 비록 한 집단의 여러 사람들일지라도, 그런 인물의 실재를 믿는 것은 자유지만, 엄밀하게 말하자면 역사의 논의에는 들어올 여지가 없다. 그래서 필자는 차원부의 행적이 설원기에서 비로소 만들어지면서 그 현재 논란의 대상으로서의 실재도 성립되었다고 의심할 여지가 크다고 생각한다. 이 말은 뒤집어 보면 차원부라는 인물이 과연 실재했었는지조차 역사의 논의의 관점에서는 알 수 없다는 말이다. 혹시 있을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서, ‘역사적 논의의 관점’에서 그렇다는 말임을 다시 강조한다.
더구나 설원기에서 차원부는 멸망한 고려에 대해 절개를 지킨 절신(節臣)이면서 태조를 도와 조선 개국에 지대한 공헌을 한 공신(功臣)이라는 양립할 수 없는 정신분열적 묘사를 하고 있다. 이것을 포함해서 설원기에 묘사된 많은 일들은 역사적으로 전혀 증명이 될 수 없거나 역사적으로 성립될 수 없는 것들이다.
마찬가지로, 앞에 제시된 C의 내용 역시 역사적으로 완전히 부정된다. 설원기에서는 정도전, 조영규, 함부림, 하륜 등이 차원부와 그 일족을 죽였다고 주장하는데, 역사적으로 확실한 이 사람들의 행적만 살펴보아도 그런 주장이 얼마나 엉터리인지 알 수 있다. 곧, 차원부가 죽임을 당했다고 주장되는 그 시점에 정도전과 조영규는 이미 오래 전에 죽어 있었던 것이다. 대체 이미 죽은 사람이 귀신이 되어 살인 사건을 일으켰다는 말인가. 나머지 함부림과 하륜 등에 대한 설원기의 묘사도 그 못지않은 중대한 문제들을 갖고 있지만, 이미 다른 곳에서 다 상세해 다룬 것이기에 더 이상의 언급은 하지 않는다.
그런데 C에서는 박팽년 선생이 세조 임금에게 ‘상소’를 통해 직접 “조카를 몰아낸 세조에게도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암시했다고 말하고 있다. 뉴스에서는 ‘상소문’의 초안이라고 했지만, 다른 허다한 상소문 초안에서는 나오지도 않는 날짜와 작자(作者)의 이름을 갖추고 있으니 실제 그 날짜에 바쳐진 것일 수밖에 없다. A에서는 ‘단종복위 모의사건 발각 한 달 전인 1456년 음력 5월 17일’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거사가 발각된 것이 6월 2일이므로 불과 두 주쯤 전인 셈이다. (심지어, 설원기에는 역시 사육신 중의 한 분이신 하위지 선생의 서문이 붙어 있는데 그 날짜는 5월 21일로 명기되어 있어 더 심각하다. 이 논의는 역시 생략한다.) 이미 1년 전쯤인 1455년 윤6월에 세조가 단종을 몰아내고 왕이 되었을 때부터 단종 복위를 위한 거사는 모의되기 시작했다고 보는 것이 보편적 견해이다. 그런데 처음 거사일로 잡은 것이 발각된 날의 전날인 6월 1일이었다. 그날 명나라 사신의 연회가 있어 성승과 유응부가 왕을 호위하는 무사인 별운검(別雲劍)으로 설 수 있어 절호의 기회가 온 것이었다. 결국 실패한 이 6월 1일의 특정한 거사 계획이 정확히 언제 정해졌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명나라 사신이 이미 4월 20일에 도착했다고 하며, “실록”에 혜성이 거사 모의와 관련이 있는 듯 암시되어 있는데, 혜성이 처음 나타난 것이 5월 4일이었고 5월 27일까지 관측되었다. 따라서 5월 17일이면 6월 1일이건 그 전이건 그 후이건 모든 명운을 걸고 세조를 척살(刺殺)할 기회를 노리고 있던 절체절명의 시기였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러한 시기에 바로 죽여 제거하려는 대상일 뿐인 세조에게 박팽년 선생이 ‘臣 박팽년’으로 상소를 올린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이렇게 날짜와 배경을 상세하게 따져 본 것은 그 날짜와 박팽년 선생이 사육신 중의 한 분이라는 사실만으로도 박팽년 ‘상소문’이라는 것은 성립할 수 없음을 밝히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그것은 ‘설원기’라 해도 마찬가지이고 실상 이때는 더 문제가 있다. 설원기 곧 “차원부설원기”는 제목대로 차원부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기록인데, 구체적으로는 세조 임금에게 그 억울함의 실상을 알리고 차원부와 그 일족을 위해 복수해 주고 은전을 베풀어 달라는 건의를 하는 것이다. 만일 박팽년 선생이 세조에게 목숨을 걸고 직설적으로 세조를 비난하는 상소를 한 것이라 해도 지금까지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과 함께 거사를 도모해 왔다는 사실과는 완전 배치되어 성립하기 어려운데, 설원기는 한 발 더 나아가서 결국 박팽년 선생이, 어떤 사람이 억울하게 죽었으니 세조께서 그 사실을 잘 알아주시고 앞으로 잘 부탁한다는 글을 오늘 낼 기회가 되면 죽이려고 벼르고 있는 세조에게 올린 것이 된다. 어불성설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설원기는 국가의 공신 우대 정책을 이용해서 이익을 얻고자 지금으로서는 실재인지 아닌지도 알 수 없는 차원부를 내세운 것이며, 임진왜란 직전이라는 시기에 200년전쯤인 고려말-조선초의 시기의 일을 조작해낸 문헌으로 평가된다. 이때 그 시간의 차이를 교묘하게 처리하고자 반역죄로 처형을 당했으나 충절로 추앙할 가치가 있는 사육신 박팽년 선생을 저자로 둔갑시켜 등장시킨 것이다. 반역자는 심한 경우 삼족을 멸하고, 재산은 모두 몰수당하고, 작품 같은 것은 모두 흩어지고 사라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때 100년, 200년 후에 사라졌던 그 작품이 새로 발굴되었다고 주장하면 누가 뭐라 의심하겠는가. 그런데 필자는 그 교묘함에 탄복하면서도 설원기의 가장 큰 패착은 아이러니하게도 그 날짜를 1456년 음력 5월 17일로 명기하고 저자로 박팽년 선생을 제시한 것이라 생각한다. 사료를 평가하고 비판적으로 볼 수 없거나, 심지어 맹목적으로 신봉하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그렇게 확실하다고 주장하면서 몇 십 년이고 몇 백 년이고 속일 수 있겠지만, 그리고 실제 그래왔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경우에는 그 날짜와 저자의 명기(明記)가 온갖 조작을 밝히는 핵심 증거이자 등대가 되기 때문이다. 바로 그 날짜의 왕은 누가 봐도 세조이고, 백팽년 선생과 세조의 관계를 보면 그 날짜와 저자도 조작되었음이 자명하고 결국 이것은 설원기 전체가 위서(僞書)임을 가리키는 것이다.
설원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거의 모든 내용이 근거 없이 꾸며진, 다른 말로 하면 조작된, 문헌이다. 심지어 그중 많은 부분이 여러 학자와 탐구자들을 연구를 통해서 거짓임이 이미 밝혀져 있다. 필자가 과문한 탓인지 이렇게 심각한 위서(僞書)를 본 적이 없다. 그래서 항상 설원기를 따로 지칭할 때는 “위서(僞書) 설원기” 혹은 “위서(僞書) 차원부설원기”라 부르고 있다. 필자는 이것이 앞으로 이 책의 공식 명칭으로 통용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3. 결어
지금까지 뉴스의 내용이 실질적으로 전부 문제가 있음을 밝혔다. 여기서는 오래된 뉴스가 잘못된 것임을 밝히는 것이 주목적이기 때문에 관련 측면을 상세히 다루었고, 그 이외의 사항은 여러 사람들이 실상을 밝혀왔기 때문에 관련 언급 정도로만 제시하였음을 지적해 두고자 한다.
만일 뉴스의 멘트대로 진짜 박팽년 선생의 상소문이라면 사육신과 당시 상황에 대해 역사적으로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닐 자료이다. 그러나 약간의 고문헌 지식과 역사 지식만 가지고도 상소문일 수 없음을 알 수 있고, 그 내용 또한 심각한 모순을 갖고 있음을 간파할 수 있다. 그래서 필자는 그동안 뉴스의 내용을 정정하거나 비판하거나 평가하는 후속 보도나 자료 혹은 논문 등이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여 여러 각도로 검색해 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보아도 그런 것은 전무했다. 지금은 이수건, 김난옥, 박은정 등의 연구 결과가 확실하게 나와 있지만 1989년 당시에는 위서 설원기의 실체를 파악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가능성도 있고, 외형적인 분석만 해봐도 최소한 ‘상소문’이란 주장이 간단히 무너지므로, 혹시 역사학계에서 단순한 학자의 실수로 여기고 일고(一考)의 가치도 없다고 판단한 결과일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1989년의 해당 뉴스는 단순한 해프닝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뉴스에 나온 문건은 전체를 볼 수 없어서 설원기의 이본인지 혹은 단순히 설원기를 베껴 쓴 것인지 판단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방송에 제시된 것들을 가지고 판단하면 이본이라고까지 말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만일 이런 황당하고 잘못된 사실을 무작정 표면적으로만 받아들여서 그 진위 여부를 판단 내지는 평가하지도 않고 세상에 퍼뜨린다면 요즘 사회적으로 심각한 피해를 주고 있는 가짜 뉴스의 양산에 다름 아니다. 잘못된 사실이 오히려 독버섯처럼 퍼져나가는 일은 흔하다. 그래서 그런 일을 방지하고자 하는 일념으로 상세한 논의를 펼쳐보았다. 독자들의 의견과 혜량(惠諒)을 기대한다.
2019년 5월 25일
류주환
첫댓글 30년전 일을 이제와서 새로운 발견처럼 발견자가 자기 지식과 연구실적을 과시하려고 하는 경향이라 생각하는데 원파록에 의한 묘비명 행장 등을 족보를 새로 편찬할 때 원파록 부분을 삭제한다고 해도 묘에 있는 비문을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조선초 저의 선조 묘비를 보면 "유명조선국 우의정"이라 써 있는 것처럼 원파록이 써진 행장 묘비명 등은 그대로 두고 대종회 차원에서 "원파록 삭제의 변 "을 널리 알리는 방법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