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문산에 있었던 소촌역을 찾아 가기로 하고 길을 나서니 바람이 차갑지만 2025년 처음으로 가는 여행겸 답사라 생각하니
몸이 한결 가볍다.
소촌역은 현재 없어지고 그 자리에 문산성당이 자리잡고 있으며, 소촌역 중심으로 발달한 지역은 문산읍이 되었다.
문산을 검색하면 대부분 파주 문산과 진주 문산이 검색에 보이고 있다.
반성 나들목에서 20여분 달려 나가면 문산읍이 보인다.
---소촌역은 조선시대 경상도 진주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소촌도의 중심이 되는 찰방역이었으며, 경상남도 서남부의 바닷가와 내륙을 통과하는 역로를 관할했다. 소위 서부경남에 해당하는 역을 관할한 중심역이었다. 소촌도는 고려시대의 산남도를 계승한 것으로, 조선시대에는 15개의 역을 거느렸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에 진주성을 향하던 왜군이 소천역을 통과했으며, 1862년 발발한 진주농민항쟁 때에도 농민들이 소촌역 관아 앞에서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소촌역 자리에는 현재 천주교 문산성당이 들어서 있다.
소촌역(召村驛)은 조선시대 경상도 진주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소촌도의 중심이 되는 본역으로 찰방이 주재하던 역이었다. 조선 초기에는 역승이 소재했으나, 뒤에 찰방으로 승격되었다. 소촌역은 경상남도 진주시 문산읍 소문리 문산초등학교 일대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문산초등학교 정문 근처의 담 벼락에는 찰방 선정비가 서 있다. 소문리는 본래 소촌역이 있다는 데에서 소촌리로 불렸지만, 일제에 의해 행정구역 개편이 단행된 1914년 소촌리의 일부 마을과 조동면의 일부 마을을 병합하여 소문리(蘇文里)로 개편되었다.
소촌의 한자 표기는 소촌(召村)이었던 것이 조선 말기에 소촌(柖村)으로 변경된 듯하다. 1880년대에 일제에 의해 제작된 『구한말 지형도』「진주」도엽에서는 소촌역(柖村驛)으로 표기되어 있다. 조선시대에 찰방의 임기는 최장 3년이었지만, 소촌역 찰방의 임기는 광해조까지 6년이었고 그 후부터는 3년이 되었다고 한다. 왜 소촌역의 찰방 임기만 6년이었는지는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다. 소촌역을 중심으로 한 소촌도는 임진왜란 이전까지만 해도 중요성이 낮았지만, 임진왜란 이후 경상우병영이 창원에서 진주로 옮겨가고 고성에 통제영이 신설됨에 따라 중요성이 높아졌다.
소촌도는 고려시대의 산남도에 속했던 일부 역을 계승한 것으로, 중심역인 소촌역은 상령역, 부다역, 평거역, 문화역, 영창역, 지남역, 배둔역, 송도역, 구허역, 관율역, 동계역, 양포역, 완사역, 오양역, 덕신역 등의 15개 역을 관할했다. 관할 범위는 진주에서 동쪽으로 의령 방면, 서쪽으로 하동 방면, 남쪽으로 남해·고성·통영·거제 등지로 이어지는 역로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났던 1592년 8월에 전라도와 경상도에서의 전쟁 상황은 밀고 밀리는 접전이었다. 9월에는 남해안을 따라 이동한 일본 왜군이 진주성을 공략하고자 했으며, 당시 왜군의 규모는 2만 명에 달했다. 10월 1일 함안군을 점령한 왜군이 부다현(지금의 경상남도 진주시 일반성면)에서 조선군과 마주했으며, 진주의 소촌역까지 진군해 들어왔다. 소촌역을 거친 왜군은 10월 3일 2개 부대로 나누어 진주성을 공격했다.
과거에 소촌역이 있던 자리에는 현재 문산성당이 들어서 있다. 문산성당은 경상남도에서 두 번째로 세워진 가톨릭 신앙공동체이다. 한반도에 상륙하려던 천주교는 초기에 박해를 받았다. 조선시대의 역은 관원들에게 말과 숙소를 제공해주는 기능뿐만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서 오가는 소문을 수집해 관찰사에게 보고하는 한편, 역을 오가는 사람과 물자를 통제하던 곳이다. 천주교가 박해를 받던 시기에 전국의 역로에 있던 역은 천주교인을 찾아내는 공포의 장소였다고 한다. 따라서 옛 소촌역 자리에 들어선 문산성당은 천주교 박해를 이겨낸 상징으로 봐도 좋다는 의견이 있다.
소촌역이 있던 문산읍의 북쪽으로는 남해고속도로가 동서 방향으로 통과하며 문산 나들목이 설치되어 있다. 문산읍의 남쪽으로는 국도 2호선이 동서 방향으로 통과한다. 지방도 1009호선은 문산읍을 남북 방향으로 통과한다. 문산성당의 바로 북쪽에 남해고속도로가 통과한다. 문산읍의 서쪽에는 진주혁신도시가 들어서 있다.
1862년(철종 13) 진주에서 농민항쟁이 발생했다. 이 항쟁은 삼정문란과 가혹한 수탈에 저항하여 발생한 대규모의 농민항쟁이다. 당시에 소촌리 일대를 거친 농민들은 소촌역 찰방 관아 앞에서 시위를 벌이기도 했지만, 소촌역은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한다.---출처 지역n문화
소촌역을 관리하는 벼슬아치는 찰방이며 역에 찾아 오는 관리의 숙소나 말을 지급 등이 그의 업무이고, ㄸ 다른 업무는 물자의 수송도 있다. 각 도의
관찰사가 오면 안내 하는 중요한 일도 하는 찰방의 역할이다.
시기적으로 조선후기에는 커다란 권력을 가진 지방의 실력자 였다.
소촌역에서 벼슬한 찰방의 기록이 많이 있으며, 선정을 베풀어 선정비를 남겼는데 그 중에 찰방 이상석의 비도 남았다.
1980년에 조사한 기록에는 4개의 찰방 선정비가 있다고 하지만 현재는 1좌만 남아 있다.
1980년 자료조사
행찰방 민문혁 선정비---1821년 소촌찰방 병비현황
행찰방 방우구 선정비-- 1816년 소촌찰방
행찰방 안침 선정비---- 1847년 소촌 찰방---- 비석 3좌는 행방불명 기록에는 남동초등학교에 있다 하지만 어디 있는지 모름
행찰방 이상석 청덕선정비----1681년 소촌찰방
위에 나열한 선정비 중 3좌는 행방불명이고 나머지 1좌인 이상석의 비만 남았다.
찰방의 역할은 중하고 중하지만 진주 소촌역의 흔적은 거의 남아 있지는 않다.
그 중에 1좌의 선정비 만이 소천역의 흔적을 알려주고 있다.
이번 답사는 문산의 변화와 소촌역의 흔적을 보러 갔지만 일제강점기를 지나고
물산의 발달로 인해 많은것이 사라졌고 기록도 보이지 않는다.
이상석의 청덕 선정비는 조선의 역마제도 역의 실재 역할을 알 수 있지만 기록이 미비 한 것이
역사를 탐구하는 학자로서는 아쉬움이 남는다.
소촌역이 있었던 문산읍에는 두방사 청석탑이 있으며 예전에 남해로 갔다가 두방사 석탑을 보러 간
기억이 새로워 진다.
그 부근에는 진주의 대표적인 사찰이 청석사도 있어 답사의 한자락의 차지하였다.
소촌역은 기록은 있지만 흔적이 거의 보이지 않는 것이 역사의 흐름에 남아 한 순간으로 생각된다.
시대도 변하고 마을도 변하고 여러가지의 변수로 인해 옛 자료가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사라진 찰방 선정비 3좌도 찾았으면 한다.
소촌역을 답사하고 가까운 곳에 있는 청석사도 오랫만에 다시 들렀다.
탑과 삼존불과 여러 문화유산이 있지만 특히 괘불이 인상적이었는데 청석사 박물관이 수리 중이라
보지 못하고 돌아 왔다.
돌아 오면서 의령읍에 있는 현감 구충원의 비도 보고 창녕으로 밀양으로 울산에 도착핬다.
많이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상세하게 보는 것도 중요한 것이 답사이다.
이번 답사는 소촌역의 흔적을 찾는 것이 주 목적이지만 그래도 기억에 남는 것은 문산성당 이 었다.
옥산 이희득
첫댓글
참 대단하시고 훌륭하십니다,
감사 합니다,
전국 방방곳곳 대한민국 지키며 이십니다,
다시한번더 박수를 보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