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국무역 창업자인 백욱기(白煜基·84) 전 명예회장이 2003년 2월 12일 오후 7시20분쯤 노환으로 별세했다. 1919년 경북 달성에서 4남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백 회장은 일제 말기 대구 서문시장에서 포목상으로 시작해 1950년에 동국직물(현 동국무역의 전신)을 창업한 뒤, 국내 굴지의 섬유업체로 성장시킨 입지전적 인물이다. 동국무역은 한때 국내 30대 재벌에 포함되기도 했다. 그는 평소에 "인류가 존재하는 한 섬유산업은 영원하다"고 지론처럼 말했다. 섬유산업이 사양산업에 접어들었다는 주변의 평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50여년간 섬유인으로서의 외길을 걸었다.
대구상공회의소 부회장과 대구· 경북 섬유산업협회 회장 등을 역임한 그는 대구 경제계의 ‘대부(代父)’로 대접을 받았다. 80년대 초 불황으로 많은 대구지역 직물업체들이 도산 위험에 처했을 때 은행권을 찾아다니며 ‘돈줄’을 뚫어낸 사례는 유명하다. 검소하기로 소문난 백 회장은 돈이 모일 때마다 공장을 세워 한때 종업원이 1만명을 넘었고, 협력업체를 포함하면 10만명 이상의 고용을 창출해 대구지역 경제에 큰 활력을 불어넣었다. 평소 기업이익보다는 국가이익이 앞서야 한다고 강조해온 백 회장은 수출에 역점을 둬, 1992년에는 5억1000만달러를 수출, 섬유직물 단일업체로는 최초로 5억달러 수출탑을 수상했다.
1979년에는 ‘동국장학재단’을 설립, 소년소녀가장과 불우학생들을 지원했다. 지역 사회 발전과 수출에 이바지한 공로를 인정받아 국민훈장 석류장(84년), 국무총리 표창(89년), 금탑산업훈장(95년) 등을 받았다. /조선
[2001년] 게놈지도 완성 공식 발표
‘국제 인간게놈 연구 컨소시엄’(IHGSC)의 미국 등 6개국 합동 연구팀과 유전공학회사 셀레라 제노믹스가 2001년 2월 12일 워싱턴, 런던, 파리, 베를린, 도쿄 등에서 공동 기자회견을 갖고 ‘인간게놈지도’의 완성을 공식 발표했다. BBC는 게놈지도 완성 발표를 ‘끝의 시작’이라고 불렀다. 염기의 위치를 모두 표시한 것 자체가 큰 과학적 이정표임에 틀림없지만 그 정확한 기능을 알 수 있는 유전자는 아직 소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번 발표로 유전자치료법 등 의학발전은 물론 생물학, 공학 등 관련산업 발전의 전기가 마련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컨소시엄’은 미국의 과학잡지 ‘사이언스’를 통해, ‘셀레라’는 영국의 ‘네이처’를 통해 각각 연구결과를 일반에 공개했다. 이번 발표를 인간의 달 착륙에 비유하는 사람도 있지만, 게놈프로젝트 결과는 이보다 훨씬 더 큰 영향을 인류에 미칠 것으로 전문가들은 예상했다.
이번 발표로 인간은 약 31억개의 염기가 있으며 이 안에 약 3만 5000여개의 유전자가 있다는 것이 확인됐다. 게놈은 생물의 생로병사와 관련된 유전정보 전체를 뜻하는 용어로 ‘유전정보의 전달자’인 유전자(gene)와 ‘유전자를 담는 그릇’인 염색체(chromosome)의 합성어다. /조선
[2000년] 미국의 만화가 슐츠(Schulz, Charles M.) 사망
슐츠 [Schulz, Charles M., 1922,11.26~2000.2.12]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만화를 그린 금세기 최고의 만화 작가 찰스 슐츠. 어린 시절부터 간직해 오던 어마어마한 야심이 현실화 됐지만 그는 여전히 불행했다.
다른 여자와 결혼하기 위해 첫 아내와 이혼한 그는 잠시 행복한가 싶더니만 다시 또 만화 그리기 말고는 아무런 낙을 찾지 못하는 삶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는 평소 이런 말을 버릇처럼 했다고 한다. 만화가 아니었으면 자긴 죽었을 거라고.
이 말 역시 현실화 된다. 그는 1999년 말 뇌졸중과 암에 시달리다가 결국 50년 넘게 해 온 피너츠 연재를 중단하고 만다. 그리고 연재 중단 뒤 2개월 만에 그는 사망한다. 몸이 아파서 연재를 그만뒀는데, 연재를 그만 둔 뒤 몸에 더 안 좋아지더니 결국 2000년 2월 12일 77세에 사망한 것.
그는 그리기를 멈추었지만, 피너츠의 연재는 그가 죽은 다음날까지 계속됐다. 죽은 뒤에도 자신의 창작물이 연재되길 바랐던 고인의 소망 때문이었다.
2000년 2월 13일. 피너츠의 마지막 연재.
스누피가 (찰스 슐츠를 대신해) 연재의 종료를 알리는 편지를 쓰고 있고, 그간의 하일라이트를 모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죽기전 연재가 종료되는 것 때문에 매우 힘들어 했다. 그에겐 암과 뇌졸중보다 이제 더 이상 만화를 그릴 수 없다는 것이 더 고통스러웠다.
[1996년] 서울대 암연구소, 유전성 유방암유전자 ‘BRCA1’ 국내 최초 발견. 유전성 유방암 발병 메커니즘 밝혀져
유전성 유방암은 두 유전자가 차례로 연쇄적인 변이를 일으키면서 발병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미국 국립보건연구원(NIH)의 수 샤오링 박사는 유전학 전문지 네이처 지네틱스 최신호에 발표한 연구보고서에서 유전성 유방암 유발 유전자로 알려진 BRCA-1이 변이되면 뒤이어 P53유전자 마저 변이를 일으키면서 종양의 성장이 가속화되는 것으로 밝혀졌다고 말했다.
수 박사는 BRCA-1이 변이되면 P53 유전자가 변이를 일으킬 환경이 조성되며 이어 두 유전자가 모두 변이되면서 유방암이 시작되는 것으로 쥐 실험 결과 확인되었다고 밝혔다.
수 박사와 함께 연구에 참여한 로타르 헤니히하우젠 박사는 "P53은 문지기 역할을 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P53이 무너지면 종양이 자라기 시작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 새로운 발견이 유전성 유방암에 관한 연구와 치료법 개발을 가속화시킬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그는 BRCA-1과 연관된 종양 형성에 P53유전자가 개입한다는 직접적인 증거가 나타났지만 이외에 종양유전자의 활동을 촉발시키는 또 다른 변이유전자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유전성 유방암과 난소암 환자의 90%에서 BRCA-1 변이유전자가 발견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NIH에 따르면 미국에서는 매년 약17만 5천명의 유방암 환자가 발생하고 4만 3천명이 사망하고 있다.
[1992년] 삼성전자, 8비트 마이컴 국내 첫 개발했다고 발표
삼성전자가 1992년 2월 12일 고기능 TV를 비롯한 고급 전자기기, 자동차의 자동기능분야, 휴대용 전화기 등 첨단기능제품에 두루 쓰이는 8비트 마이컴(마이크로 컴퓨터)을 국내 최초로 개발, 시험생산에 들어갔다고 발표했다.
데이터를 처리하는 중앙처리장치(CPU)와 기억소자를 반도체칩 하나에 내장한 마이컴은 미국의 TI 모토롤러 등 일부 기업들 만이 원천기술을 보유하고 기술이전을 기피하고 있는 대표적인 첨단제품이다. 지난 1983년 4비트 마이컴을 개발한 삼성전자는 8비트 마이컴 개발에 착수한지 2년 만에 신제품 개발에 성공했는데, 8비트 마이컴은 1백개의 명령어를 처리할 수 있어 VCR 등 가전제품 통신기기 자동차 등의 각종 인공지능 제품에 사용되고 있다.
이 8비트 마이컴은 컬러TV용과 VCR용인데 컬러TV는 타이머예약, 채널 및 볼륨조정, 색상조정 등 각종 자동제어기능과 화면에 문자를 나타내는 장치인 OSD기능을 수행할 수 있고 VCR용은 데크 튜너 예약녹화 등을 할 수 있다. /조선
[1991년] 남북한,세계탁구선수권대회와 세계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에 출전할 단일팀 구성에 합의
← 남북 단일탁구팀이 좋은 성적을 거둬 시상대에서 꽃다발을 받고 있다.
1991년 2월 12일 남북한은 판문점에서 제41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와 제6회 세계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에 출전할 단일팀 구성에 합의했다. 1963년 첫 논의가 시작된지 28년 만의 일로, 국민들은 ‘스포츠 남북통일’ ‘남북은 하나’라며 더없이 흥분했다.
선수단 명칭은 코리아, 선수단기는 흰색 바탕에 한반도를 하늘색으로 그려 넣기로, 선수단가는 ‘아리랑’으로 합의했다. 탁구단장은 북한이, 축구단장은 한국이 맡기로 하는 등 후속작업도 일사 천리로 진행됐다. 4월 24일 일본 지바에서 열린 세계탁구선수권에는 전 세계의 관심이 집중됐다. 남북한 선수들의 일거수 일투족이 경기 결과보다 더 큰 관심거리였다.
현정화, 홍차옥(한국)과 이분희, 유순복(북한) 4명으로 짜인 여자단체가 중국을 3대2로 꺾고 우승, 극적인 장면이 연출되기도 했다. 청소년축구팀은 서울-평양에서 한차례씩 평가전을 치러 선수를 선발한 뒤 6월 포르투갈대회에 출전했다. 남북단일팀은 예선서 아르헨티나를 제압하는 등 선전, 8강에 올랐다.
[1987년] AIDS환자 국내 첫 사망
후천성면역결핍중(AIDS) 항체 양성반응자로 서울 서대문시립병원에서 격리치료중이던 윤모씨가 1987년 2월 12일 뇌중추신경계 감염으로 인한 호흡장애로 사망했다. AIDS항체양성반응자 중 사망한 내국인은 윤씨가 처음이었다.
윤씨는 아프리카 케냐 나이로비에 거주하는 교포사업가로 감기증세로 케냐현지병원에 입원, 진료를 받던 중 AIDS 양성반응자로 판명돼 귀국조처됐다. 윤씨는 한국 도착 즉시 국립보건연구원에 의해 항체반응검사를 받았으며 이때도 양성반응을 나타내 격리수용됐다. 보사부방역관계자는 "윤씨가 AIDS환자는 아니지만 AIDS환자로 발전할 수 있는 전단계증세를 보였다"고 말하고 "AIDS바이러스가 뇌중추신경계를 감염시킬 수는 없기 때문에 윤씨가 다른 세균에 감염,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이어 "윤씨가 2년전 말라리아를 앓아 현지에서 수혈받은 적이 있는데, 이때 AIDS에 감염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하고 "미국 의학계에 따르면 케냐는 전국민의 약 20%가 AIDS바이러스 보균자인데도 케냐인들은 독특하게 AIDS 증세를 거의 보이지 않으면서 타인에게 감염을 시키는 것으로 알려져있다."고 말했다. /조선
[1975년] 유신헌법 찬반국민투표 실시
← 1975년 2월 13일 서울 교동국민학교에서 개표종사원들이 철야로 국민투표안을 한표 한표 가려내고 있다.
박정희 대통령이 1975년 1월 22일 야당과 일부 재야세력의 헌법논쟁에 따른 정국의 혼란을 예방하고 국론통일을 위해 유신헌법과 유신체제 유지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하겠다고 발표했다.
이와 더불어 특별회담을 통해 이번 국민투표는 현행 헌법에 대한 찬반 뿐 아니라 대통령에 대한 신임(信任) 여부를 결정하는 것으로 국민이 원할 경우 즉각 대통령직에서 물러날 것임을 밝혔다.
음력설 다음날인 1975년 2월 12일 유신체제의 찬반을 묻는 국민투표가 실시됐다. 총유권자 1천6백78만 8천8백39명 중 1천3백40만4천2백45명이 투표해 이 중 73.1%인 9백80만2백6명이 찬성표를 던졌다. 박 대통령은 유신체제가 이같은 국민들의 호응을 얻자 3월 15일 긴급조치 1호와 4호로 구속한 1백48명에 대해 구속집행 정지처분을 내려 전국 8개 교도소에서 가석방했다. /조선
[1971년] 월간 ‘다리’지에 게재된 평론가 임중빈의 논문으로 김상현-윤재식-윤형두, 반공법 위반혐의로 구속
← 1971년 2월12일, 반공법위반혐의로 월간잡지 ‘다리’의 전발행인 윤재식씨와 동편집인 겸 주간 윤형두씨(왼쪽), 기고가 임중빈씨(오른쪽)등 3명을 구속했다.
정부는 1971년 2월 12일 월간 ‘다리’지에 게재된 평론가 임중빈의 ‘사회참여를 통한 학생운동’을 문제삼아 사장인 김상현 의원을 비롯 필자와 발행인 윤재식, 주간 윤형두씨 등을 반공법 제4조 1항 위반 혐의로 입건했다.
검찰은 임씨의 논문이 ‘국외 공산당계 활동을 찬양-고무-동조해 결과적으로 북한을 이롭게 했다’고 주장했지만 목요상 1심 판사는 ‘이 논문은 반공법에 위반되지 않는다’고 판시해 관계자 전원에게 무죄판결을 내렸다. 이 사건은 사건발생 4년 만인 1974년 5월 대법원의 무죄원심 확정판결로 해결됐다. /조선
[1961년] 콩고의 초대 수상 루뭄바(Lumumba, Patrice Hemery, 1925~1961) 피살
← 루뭄바 콩고 수상(왼쪽에서 세번째).
1925. 7. 2 ~ 1961. 1. 17
1961년 2월 12일 콩고의 전수상 루뭄바가 피살됐다. 그는 콩고의 초대 수상으로 형무소를 탈출하다가 반대파부락민들에게 살해되어 콩고뿐 아니라 전세계를 경악케했다. 루뭄바를 지지해온 소련은 하마슐드 UN사무총장에게 비난의 화살을 던져 콩고의 혼란은 절정에 도달하고 말았다.
카탕가로 루뭄바를 옮겨가는 자체가 수상했고 카탕가정부는 탈출한 루뭄바를 살해한 부락민에게 8천불을 지불하였으니 이사건은 계획적인 살해라는 추측이 떠돌기도 했다. 유엔 조사단은 부락민에 의한 살해가 아니라 카탕가주의 주장 촘베의 앞에서 살해되었다는 보고로 더 한층 루뭄바의 죽음에 의문을 던졌다. 그러나 촘베는 루뭄바의 죽음이 전적으로 카탕가 내부문제라는 이유를 들어 협조를 거부했다.
36세의 젊은나이에 콩고의 수상이된 루뭄바는 과격한 성격의 소유자로 레오폴드빌 우편국 흑인노동조합위원장으로 지내다 콩고 국민운동당(MNC)의 총재가 됐다. 그는 중앙집권주의를 고집하고 소련측으로 지나치게 편향했다. 친서구적이고 연방국가를 주장하는 카사부부 대통령과의 대립으로 혼란은 가중됐고 결국 루뭄바는 해임됐다. /조선
[1951년] 팔레비 이란 국왕 두번째 결혼식
1951년 오늘, 이란 국왕 팔레비(Mohammad Reza Shah Pahlevi)의 생애 두번째 결혼식이 성대하게 열렸다. 왕비는 이란 출신의 19살 소라야(Soraya). 그러나 소라야의 화려한 결혼생활은 7년 뒤인 1958년 이혼과 함께 막을 내렸다. 팔레비국왕은 1980년 7월 사망할 때까지 3번 결혼했다. 팔레비국왕은 소라야와 이혼한 직후인 1959년 파라(Farah) 왕비와 결혼해 4명의 자녀를 두지만 말년을 국외에서 망명생활로 보내다 세상을 떠났다. /YTN
[1912년] 중국 마지막 황제 푸이 퇴위
← 푸이
1912년 2월 12일 중국 청조의 마지막 황제 푸이가 제위에서 물러났다. 그는 광서제의 동생 순친왕 재풍의 아들로 1908년 3세의 나이에 제12대 황제가 되었다. 순친왕이 섭정을 하던 중인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나면서 난징[南京]에 쑨원[孫文]을 임시대총통으로 하는 중화민국 임시정부가 세워졌다. 위안스카이[袁世凱]는 푸이의 퇴위를 조건으로 쑨원으로부터 총통직을 양보하겠다는 약속을 얻어냈다. 결국 제위에서 물러난 푸이는 1924년 베이징[北京]에서 빠져나와 톈진[天津]에 있는 일본 조계(租界)에서 지내다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에는 소련에 억류되었다. 1950년에 전범 재판을 받기 위해 중국으로 송환되었다./브리태니커
[1909년] 신문관서 우리나라 최초 문고본 ‘십전총서(十錢叢書)’ 의 첫 권 ‘걸리버 여행기’ 간행
1909년 2월12일, 신문관(新文館)에서 우리나라 최초 문고본 ‘십전총서(十錢叢書)’ 첫 권이 발간됐다. 십전총서는 10전이라는 저가에 구입할 수 있다고 붙여진 이름. B6사이즈(18cm x 13cm)로 요즘 문고본과 비슷한 크기다. ‘문명의 이기를 빙자해 백주에 공연히 남을 속이고 재물을 빼앗는 책 도둑을 없애려 한다’는 발간 취지의 한 대목은 책 도둑을 지금보다 더 경계했음을 알려준다.
‘최초 문고본’은 아일랜드 작가 조나단 스위프트(Swift, Jonathan, 1667~1745)가 1726년 10월 발간한 ‘걸리버여행기(Gulliver’s Travels)’ 번역본(54쪽)였다. 책명은 ‘걸늬버유람긔((葛利寶遊覽記)’. 발간 예정표에는 10여권의 책명이 더 소개됐으나 ‘산수격몽요결’을 두 번째로 발간하고 중단됐다. 육당 최남선(崔南善, 1890~1957)이 1907년 설립한 신문관은 우리나라 최초의 청소년잡지 ‘소년’ ‘붉은 저고리’ 등을 발간했다. 1913년에는 더 저렴한 ‘륙젼쇼셜문고(六錢小說文庫)’를 기획, ‘홍길동젼’ 등 10여 종의 순국문 소설을 발간했다.
세계 문고본의 효시는 1841년 독일 타우흐니츠(Tauchnitz)문고. 100여년간 5,290종을 펴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펭귄문고(Penguin Books)는 1935년 ‘담배값으로 책 한권을’이란 슬로건으로 영국에서 나왔고, 일본은 1938년 발간된 이와나미(岩波) 신서가 유명하다. /조선
[1881년] 러시아의 발레리나 파블로바(Pavlova, Anna) 출생
1881. 2. 12 ~ 1931. 1. 23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출생하였다. 왕실(王室) 발레학교에서 공부한 후 마린스키극장에서 데뷔하였다. 1907년부터 유럽 여러 나라에서 공연하였으며, 1907년 파리에서 S.P.디아길레프의 발레뤼스에 참가하고, 1913년 마린스키극장을 탈퇴하였다. 이듬해 무용단을 조직, 영국을 본거지로 한 이래 17년 동안 세계 각국을 순연하였다. 주요 출연작품으로 《지젤》《백조의 호수》 등이 있으며, 특히 《빈사(瀕死)의 백조》는 대표적인 무용이었다. 1931년 네덜란드 순연 중 헤이그에서 객사하였다. /naver
[1818년] 칠레 독립
1818년 2월 12일 칠레가 스페인으로부터 공식적으로 독립했다. 남부 아메리카 대륙의 안데스 산맥이 동서로 뻗어 있는 칠레에는 토착민 아라우칸인이 디아기타, 피쿤체, 마푸체족 등 여러 종족으로 나뉘어 살았다. 스페인은 이들을 정복하기 위해 19세기 내내 전투를 벌였다. 1808년 프랑스가 스페인을 침공하자 칠레는 독립운동을 활발히 벌였다. 1810년 칠레 임시정부가 산티아고에 수립되자 스페인은 통치권을 주장했다. 지도자 베르나르도 오이긴스는 아르헨티나로 피신했다가 아르헨티나의 지도자 호세 데 산 마르틴의 도움으로 1817년 차카부코에서 스페인군을 물리쳤다. 다음해 오이긴스를 국가원수로 하는 공식 독립국가가 선포되었다. 이후 1878∼83년에 볼리비아·페루와의 전쟁으로 옛 영토를 되찾았다.
[1809년] 다윈(Charles (Robert) Darwin) 출생
← 다윈, Julia Margaret Cameron이 찍은 사진(1868)
1809년 2월 12일 태어남 / 1882년 4월 19일 죽음
"살아남는 것은 가장 힘이 세거나 가장 똑똑한 종(種)이 아니라, 변화에 가장 잘 대응하는 종이다." - 찰스 다윈
다윈은 진화론의 아버지로 불리는 영국의 박물학자이다. 그는 22세 때인 1831년부터 5년간 비글호를 타고 항해하는 동안 세계 각지의 동식물을 관찰하면서 진화설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생물의 진화에 관한 다양한 가설들은 19세기초부터 활발히 제기되었던 것이지만, 다윈이 제출한 가설의 새로운 점은 이전의 진화론에 내포되어 있던 신학적·형이상학적 함의들로부터 자유로워졌다는 데 있다. 다윈은 1859년에 발표한 <종의 기원 Origin of Species>에서 생물의 변이성·적응·생존경쟁·자연선택·적자생존 등의 견해를 중심으로 생물의 진화와 그 요인에 대해 설명했다. 이 책은 생물학에서의 업적뿐만 아니라 사상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1809년] 미국 제16대 대통령 링컨(Lincoln, Abraham) 출생
1809. 2. 12 ~ 1865. 4. 15
켄터키주(州) 호젠빌 출생.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노동을 하였기 때문에 학교교육은 거의 받지 않았지만, 독학하여 1837년 변호사가 되어 스프링필드에서 개업하였으며, 1834~1841년 일리노이 주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847년 연방 하원의원으로 당선되었으나, 미국멕시코전쟁에 반대하였기 때문에 인기가 떨어져 하원의원직은 1기로 끝나고 변호사 생활로 돌아갔다. 1850년대를 통하여 노예문제가 전국적인 문제로 크게 고조되자 정계로 복귀하기로 결심하고, 1856년 노예반대를 표방하여 결성된 미국 공화당에 입당하여, 그해 대통령선거전의 공화당후보 플레먼트를 응원함으로써 자신의 웅변이 알려지게 되었다.
1858년 일리노이주(州) 선출의 상원의원선거에 입후보하여 재선을 노리는 민주당의 S.A.더글러스와 치열한 논전을 전개함으로써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 더글러스와의 공개논전에서 행한 “갈려서 싸운 집은 설 수가 없다. 나는 이 정부가 반은 노예, 반은 자유의 상태에서 영구히 계속될 수는 없다고 믿는다” 는 유명한 말을 하여 더글러스의 인민주권론을 비판하였다. 선거결과에서는 패하였으나, 7회에 걸친 공개토론으로 그의 명성은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되고, 1860년 대통령선거에서는 공화당의 대통령후보로 지명받았다. 그러나 그가 대통령후보로 지명된 것은 노예제에 대한 그의 견해가 과히 급진적인 것은 아니었기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이 선거에서는 민주당 쪽에서 노예제 유지의 브리켄리지와 인민주권의 더글러스의 두 명의 후보로 분열되었기 때문에 링컨이 당선되었다.
그러나 그의 당선과 함께 남부 제주(諸州)는 잇달아 합중국을 이탈하여 남부연합국을 결성하였다. 링컨은 이미 노예제를 가지고 있는 남부 제주의 노예를 즉시 무조건 해방시킬 생각은 없었으나, 앞으로 만들어질 준주(準州)나 주(州)는 자유주의로 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기 때문이다. 1861년 3월 4일 대통령에 취임하자 링컨은 “나의 최고의 목적은 연방을 유지하여 이를 구제하는 것이지, 노예제도의 문제는 아니다”라고 주장하였으나, 4월 섬터 요새에 대한 남군의 공격으로 마침내 동족상잔(同族相殘)의 남북전쟁이 시작되었다. 전쟁 중 그는 의회에 대하여 대통령의 권한 강화를 요청하고, 독재적 권한을 행사하여 인신보호령장의 정지, 언론집회의 자유의 제한을 강행, 반대당으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목적은 여러 세력을 조정하여, 북부의 강경론자들을 누르면서 노예해방을 점진적으로 단행하는 것이었다. 전황은 처음에는 북군에게 불리하였으나, 1862년 9월 남군이 수세로 몰린 때를 노려 노예제 폐지를 예고하고 외국의 남부연합국 승인을 저지함으로써, 북부와 해외여론을 자기편으로 유도하여 전황을 일거에 유리하게 전개하는 데 성공하였다.
1863년 11월 게티즈버그국립묘지 설립 기념식 연설에서 유명한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국민의 정부는 지상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라는 불멸의 말을 남겼다. 전쟁 중인 1864년의 대통령선거에서는, 재선 전망이 불투명하였으나, U.S.그랜트가 총사령관으로 임명된 후 승리가 계속된 것이 그에게 유리하게 작용해서 재선에 성공하였다. 1865년 4월 9일 남군사령관 R.E.리가 애포매턱스에서 그랜트에게 항복함으로써 남북전쟁은 종막을 고하였다. 전쟁이 종막에 가까워짐에 따라 관대한 조치를 베풀어 남부의 조기 연방 복귀를 바랐으나, 남군 항복 2일 후인 4월 14일 워싱턴의 포드극장에서 연극관람 중 남부인 배우 J.부스에게 피격, 이튿날 아침 사망하였다. /naver
[1804년] 독일의 철학자 칸트(Kant, Immanuel) 사망
1724. 4. 22 ~ 1804. 2. 12
동(東)프로이센의 수도 쾨니히스베르크(지금의 칼리닌그라드)에서 출생하였다. 프랑스 혁명과 같은 시대의 사람으로 그 이전의 서유럽 근세철학의 전통을 집대성하고, 그 이후의 발전에 새로운 기초를 확립하였다. 그 영향은 여러 가지 형태로 오늘날까지 미치고 있으며, 근세 철학사상 가장 중요한 인물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마구(馬具) 제조업자인 아버지와 경건하고 신앙심 두터운 어머니에게서 태어나 루터교 목사가 운영하던 경건주의학교에 입학하여 8년 6개월 동안 라틴어 교육을 받은 후 고향의 대학에서 공부하고 또 모교의 교수로 일생을 마쳤다.
스코틀랜드에서 이민해 온 변경(邊境)의 소시민 가정에서 장성한 칸트는 프리드리히 대왕 시대의 계몽적인 시민육성책의 혜택도 받을 수 있어 지리적 ·역사적 조건이 그의 철학으로 하여금 독일적 특수성을 떠나 참다운 ‘세계시민적’인 철학이 되게 하였다. 대학 재학 중에는 당시의 신사상이었던 뉴턴역학에 특히 관심을 두었다. 이 방면에 대한 연구는 대학 졸업 후 10년이 지나 모교의 강사직을 얻은 1755년에 《천계(天界)의 일반자연사와 이론 Allgemeine Naturgeschichte und Theorie des Himmels》 으로 결실을 보았다. 이 저작에서 그는 뉴턴역학의 모든 원리를 확대 적용하여 우주의 발생을 역학적(力學的)으로 해명하려고 하였는데, 후일 ‘칸트-라플라스의 성운설(星雲說)’로 널리 알려지게 된 획기적인 업적을 수립하였다. I.뉴턴의 방법의 철저한 적용이라는 이 대담한 시도는 목적론적 세계관에의 귀의(歸依)와 표리일체를 이루며 그것의 바탕 위에 비로소 가능하게 된다는 일면을 지닌다.
여기의 내포되는 모순이 의식에 떠오른다면 그것은 커다란 위기에 봉착함을 뜻할 것이다. 이 위기에서 칸트를 구한 것은 J.J.루소이다. 그는 칸트로 하여금 문명에 침식되지 않은 소박한 인간의 존엄성에 대하여 눈뜨게 하고, 여기에다 그 후의 모든 사상적 노력의 숨은 기초를 뿌리박게 한 것이다. 이렇게 하여 뉴턴, 루소를 두 개의 기둥으로 삼고 D.흄을 부정적 매개체로 하여 중세 이후의 전통적 형이상학을 그 밑뿌리까지 파고들어 전면적 재편성을 시도함으로써 비판철학을 탄생시켰다.
그는 《순수이성비판(純粹理性批判) Kritik der reinen Vernunft》(1781) 에서 뉴턴의 수학적 자연과학에 의한 인식구조에의 철저한 반성을 통하여, 종래의 신(神)중심적인 색채가 남아 있는 형이상학의 모든 개념이 모두 인간 중심적인, 즉 넓은 의미에서의 인간학적인 의미로 바뀌어야 되는 이유를 들고, 나아가 일반적 ·세계관적 귀결을 제시하였다. 다시 말해서 인간적 인식이 성립되는 장면을 해명해야 할 인간학적 형이상학을 새로 수립하는 일을 통하여, 종래의 신적 형이상학(神的形而上學)이 이론적으로 성립하지 않는 이유를 제시한 것이다.
제2의 비판서인 《실천이성비판(實踐理性批判) Kritik der praktischen Vernunft》(1788)에서 칸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율적 인간의 도덕을 논하고, 실천의 장(場)에서의 인간의 구조에 ‘불가결한 요청(要請)’이라는 형태로 신(神) ·영세(永世) 등의 전통적 형이상학의 내실을 재흥시켜 그것이 새롭게 인간학적 철학에서 점유할 위치를 지적하였다. 종교를 도덕의 바탕 위에 두는 이 구상(構想)은 그 후의 《종교론》(1793)에서 다시 구체적으로 전개된다. 이상 두 가지 비판서로 명백하게 된 인식과 실천이라는 두 개의 장면을 매개하고 인간의 삶이 영위되는 장(場)의 구조를 통일적으로 파악하여, 새로운 인간학적 철학을 종결짓고자 구상된 것이 제3의 비판서인 《판단력비판(判斷力批判) Kritik der Urteilskraft》(1790)이다. 여기서 칸트는 미(美)와 유기체(有機體)의 인식이라는 장면의 분석을 통하여 목적론적 인식의 구조를 명백히 하고, 또한 목적론과 기계론의 관계라는, 일생의 과제이며 동시에 세기적 과제에 비판적 해결을 부여하여 스스로의 철학적 노력을 결말지은 것이다.
이상 3권의 비판서에 의하여 그 토대가 놓여진, 비판철학 사상과 밀접히 관련하여, 또는 그 위에 기초한 사고(思考)를 전개한 기타의 주요 저서로는 《순수이성비판》의 해설판이라고도 할 수 있는 《프롤레고메나 Prolegomena》(1783), 《실천이성비판》에 앞서 비판적 논리학의 기본구상을 기술한 《도덕형이상학원론(道德形而上學原論) Grundlegung zur Metaphysik der Sitten》(1785), 이것에 기초한 법철학 ·도덕철학의 구체적 체계를 전개한 《도덕형이상학 Metaphysik der Sitten》(1797), 그 자매편으로 자연철학의 체계를 전개한 《자연과학의 형이상학적 원리 Metaphysische Anfangsgrunde der Naturwissenschaft》(1786)가 있다. 또 오랜 기간의 강의를 정리하여 출판한 《인간학》(1798) 《자연지리학》(1802)은 칸트의 폭넓은 실제적 지식의 일단을 엿볼 수 있는 흥미로운 자료이다.
칸트의 철학은 3권의 비판서 간행 후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예나를 비롯한 몇 곳을 거점으로 하여 순식간에 전독일의 대학 ·논단을 석권하였고, J.G.피히테에서 G.W.F.헤겔에 이르는 독일 관념론 철학의 선두 주자로서, 또 그 모태로서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그 영향은 다시 영국 ·프랑스의 이상주의철학까지 미쳤으며, 특히 후일의 독일 신(新)칸트학파의 철학은 칸트의 비판주의의 직접계승을 지향한 것이었다. 또한 신칸트학파 퇴조 후에 나타난 수많은 철학 조류도 모두 직접 ·간접으로 칸트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기독교한국루터회가 뽑은 ‘세계를 빛낸 10인의 루터란’의 한 사람이다. /naver
[1777년] 독일 소설가 푸케(Fouque, Friedrich Heinrich Karl de La Motte, Baron) 출생
1777. 2. 12 브란덴브루크~1843. 1. 23 베를린.
특히 동화 〈운디네 Undine〉(1811)의 저자로 널리 알려졌다.
프랑스 귀족의 후손이었으며 나폴레옹 시대에 동시대인들에게 국민성에 대한 의식을 고취시키려는 뜻에서 작품을 통해 기사도 정신의 영웅적 이상을 표현했다. 철학자 J.G. 피히테가 처음 생각해낸 언어 발전론에 바탕을 둔 그의 사상은, 사고 형성에서 모국어가 미치는 영향을 중요시했다. 다작의 작가로서 스칸디나비아의 사가와 신화에서 대부분의 소재를 모았다. 그의 3부작 희곡 〈북방의 영웅 Der Held des Nordens〉(1808~10)은 니벨룽겐의 이야기를 다룬 최초의 현대극으로서 프리드리히 헤벨의 후기극과 리하르트 바그너의 오페라의 선례가 되었다. 그러나 푸케의 작품 중 불후의 성공작은 물의 요정 운디네의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운디네가 기사인 힐데브란트와 결혼함으로써 영혼을 지닌 사람이 되지만 나중에는 아저씨인 쿨레보른과 베르툴다 양의 배신으로 사랑을 잃게 된다는 내용이다. 그의 작품은 처음에는 크게 환영받았으나 1820년 이후 빠른 속도로 유행에 뒤지게 되었다. 푸케는 뒤늦게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의 인정을 받았지만 그후 가난 속에서 세상을 떠났다.
[1763년] 프랑스의 극작가, 소설가 마리보(Marivaux, Pierre de) 사망
← Portrait of Marivaux by Louis-Michel van Loo
1688. 2. 4 ~ 1763. 2. 12
파리 출생. 랑베르 부인과 탕상 부인의 살롱에 출입하여 B.퐁트넬 등 문인들과 사귀었으며, 신구문학논쟁(新舊文學論爭)에서는 근대파의 입장에 섰다. 1720년 《사랑으로 연마된 아를르캥》을 이탈리아 극장에서 상연하여 호평을 받았으며, 그 이후 대부분의 작품을 이 극장을 위해서 썼다.
몰리에르식 전통적 희극을 개혁하여 여성의 연애심리에 대한 미묘하고 섬세한 분석을 특색으로 하는 희극을 창조하였다. 《사랑의 기습》(1722) 《사랑과 우연의 희롱》(1730) 《거짓 고백》(1737) 등이 대표작이며, 후에 A.뮈세, G.포르토리슈, J.지로두 등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의 우아하고 세련된, 그리고 때로는 고답적인 문체는 마리보다지(marivaudage)라는 일반명사로 불린다.
또 《스펙타퇴르 프랑세》지(紙) 등을 단독으로 집필 ·간행하여 사회비평가로서도 활약하였다. 소설의 주요 작품인 《마리안의 생애》(1731∼1741) 《벼락부자가 된 농부》(1735∼1736) 등은 평민을 주인공으로 하여 풍속을 정확하게 묘사함으로써, 프랑스 근대 사실소설(寫實小說)의 선구적 작품이 되었다. /naver
[1593년](선조26) 권율장군의 행주대첩 시작
권율(權慄, 1537~1599) 장군이 2800여명의 군사로 한강을 건너 행주산성(幸州山城)에 들어간 때는 1593년 2월이었다. 전라도 순찰사로 왜군 점령하에 있던 서울을 탈환하기 위해서였다. 행주산성은 뒤로는 한강이 흐르고 앞으로는 넓은 들판이 자리하고 있어 그야말로 막다른 길이었다. 권율은 전라도에서 서울로 진격중 수원 독왕산성(禿旺山城)에서 왜군을 물리쳐 경기-충청-전라도의 관군 및 의병의 총지휘관으로 승진해 있었고, 왜군도 북쪽에서 서울로 퇴각중 경기 벽제관(碧蹄館)에서 명나라 군사에 대승한 터라 사기가 드높은 때였다.
마침내 1593년 2월 12일 왜군들은 3만여명의 군사로 행주산성에 쳐들어왔다. 권율장군과 군사 그리고 백성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왜군과 싸워 그들을 물리쳤다. 화살과 화약이 떨어지자 여인들의 앞치마로 날라 온 돌을 던지며 싸웠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왜군은 하루에도 9회에 걸쳐 산성을 공격했으나 모두 실패, 2만4천여명의 사상자를 내고 물러갔다.
권율의 행주대첩은 김시민(金時敏, 1554~1592)의 진주대첩, 이순신(李舜臣, 1545~1598)의 한산도 대첩과 함께 임진왜란의 3대 대첩으로 손꼽히고 있다. 이 승리로 권율은 도원수의 자리에 올랐고 1599년 그의 나이 62세때 노환으로 관직에서 물러났으나 그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가 죽은 뒤 선조는 그에게 승정 대부 의정부 좌찬성의 벼슬을 추증했으며 시호를 충장공이라 했다. /조선
그 밖에
2007년 열린우리당 김태홍 의원 31번째로 탈당 선언
2007년 행시·외시 120% 뽑아 부처별 면접후 임용
2006년 충남도청, 홍성·예산으로 2009년 착공·2013년 입주
2002년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前 유고대통령 전범 재판 개시
2001년 미국 무인 우주탐사선 슈메이커호, 지구에서 3억2천만km 떨어진 소행성 '에로스'에 착륙
2001년 MP3 음악 무료교환하는 냅스터 위법 판결
1999년 서울대 황우석 교수, 복제 송아지 ‘영롱이’ 분만 성공(동물복제로는 세계 5번째, 젖소복제는 세계 1번째)
1999년 클린턴 미국대통령, 탄핵안 부결
1997년 외무부, 황장엽 북한 노동당 비서의 망명신청사실을 발표 v
1996년 중소기업청 발족
1995년 이스라엘-PLO-요르단-이집트-미국, 테러행위 대처 등 4개항의 ‘중동평화안’ 합의
1995년 멕시코, 농민반란군 지지 시위
1994년 제17회 동계올림픽 개막(노르웨이 릴레함메르)
1991년 미국 국방부, 전 지구적 제한공격방어계획 (GPALS) 발표
1988년 금호그룹에 제2민항 인가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
1983년 소련 SSNX20 핵잠함서 발사성공
1981년 비동맹회의 뉴델리선언 채택
1981년 한국-레바논, 국교수립
1981년 이탈리아, 스페인 공산당, 소련 공산당대회 불참 선언
1980년 미국, 아라비아해에 해병대 1,800명을 처음으로 파견
1979년 이란, 석유 국유화.
1975년 사이클론, 인도양의 모리셔스 섬 강타
1961년 소련, 금성로케트 발사 성공
1961년 선거법안 통과
1959년 일본, 재일교포 북송 한국에 통고
1958년 미국, 최초의 유도탄 부대 결성
1957년 영국, 요르단 조약 폐기
1947년 전국문화단체 총연합회 발족
1947년 크리스찬 디오르 ‘뉴룩(New Look)’ 발표
1946년 홍사익장군 구출운동 전개
1941년 사상범예방구금령 공포
1936년 조선소작조정령 개정공포
1926년 프랑스 화가 존 미첼 출생
1923년 미국 작곡가 거슈인 뉴욕 초연
1921년 총독부관제 개정(한국인 임용확대)
1912년 노르웨이 의학자 헨리크 한센 사망
1901년 화폐조례공포, 금본위제 채택
1896년 총리대신 김홍집 피살
1895년 청일전쟁 종전(청 북양함대 사령관 정여창, 일 함대에 항복)
1880년 미국 노동운동가 루이스 출생
1874년 프랑스 건축가 페레 출생
1861년 독일 작가 루안드레아스 잘로메 출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