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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3669
11월9일[라테라노 대성전봉헌 축일/연중 제31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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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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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Sjc6vnylU3g
[예수회 황대기 안드레아 신부님 집전(서대문본당 보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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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우리 성전은 기도하기 좋은 분위기입니까?>
어학원 다니던 시절, 지나다니던 길에 라테라노 성당이 있어서 자주 들렀습니다. 바티칸보다는 덜 붐비고 한적한 탓에 조용히 기도가 참 좋았습니다. 로마 시내 수많은 성전 가운데서 가장 오래된 성전인 라테라노 대성전은 가톨릭교회 역사 안에 지니는 가치와 의미가 상당합니다. 그리스도교가 공인된 300년대 건립된 성당으로, 로마 공식 주교자 성당으로, 모든 성당의 어머니요 으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티칸 대성당의 규모도 엄청나지만, 라테라노 대성당의 위용도 그에 못지않습니다. 성전 안으로 들어가 앉아 있노라면, 수천 년에 걸쳐 이어져 온 가톨릭교회의 흥망성쇠가 고스란히 느껴집니다.
라테라노 대성전을 방문할 때마다 느끼는 점 한 가지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 눈으로 보고 있는 이 휘황찬란하고 웅장한 대성전이 아무리 대단하다 할지라도 결코 영원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 성전 역시 지상 성전으로서 언젠가 반드시 허물어져 내린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장사꾼들과 환전상으로 오염되고 타락한 유다 성전을 정화하십니다. 복음서 그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진노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정확히 묘사되고 있습니다. 행동 역시 과격하십니다. 채찍질을 하시며 양과 소, 환전꾼들과 장사꾼들을 성전으로부터 몰아내십니다.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버리십니다. 탁자들을 엎어버리십니다. 그리고 아주 강하게 외치십니다.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성전은 본질상 기도하는 집입니다. 따라서 신성한 곳이어야 합니다. 영적인 곳이어야 합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기도의 분위기가 조성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을 만나기 위한 분위기가 만들어져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할 수 있는 공동체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지극히 세속적인 모습들, 세상에 닳아빠진 모습들이 지속해서 정화될 수 있는 회개의 분위기가 꾸며져야 할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성전은 어쩌면 우리 각자입니다. 우리 각자가 교회입니다. 매일 성체성사를 통해서 다가오시는 그리스도의 몸이 머무시는 우리 각자가 대성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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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교우들로 인해 교회가 빛납니다. 신자들은 사목자들의 존재 이유입니다!>
코로나19 바이러스 팬데믹 시대가 의식 있는 분들에게는 진정한 의미의 성전, 참된 의미의 교회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는 계기를 마련해주었습니다. 많은 사목자들이 텅텅 빈 성전에 홀로 기도하면서 교우 한 분 한 분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였는가를 생각하였다고 합니다. ‘교우들로 인해 교회가 빛나는구나, 신자들은 사목자들의 존재 이유로구나’ 하는 뒤늦은 깨달음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위용을 자랑하는 높이 올라간 교회 첨탑, 어마어마한 규모의 대성전도 교우들이 사라져버리니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물론 걸작 성화나 성상들로 장식된 위풍당당한 건물로서의 성전도 가치가 있지만, 더 중요한 존재는 교회 구성원 한명 한명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일부 몰지각한 목자들은 어떤 일이 있더라고 성전에서의 현장 예배를 포기할 수 없다며 윽박지르며 신도들을 혼란과 고통 속으로 몰아넣었습니다. 진정한 의미의 성전에 대한 개념 파악을 하지 못한 과오입니다.
예수님의 육화강생으로 인해 이제 성전에 대한 종래의 개념을 완전히 폐지되었습니다. 그분으로 인해 이제 새로운 차원의 성전 개념이 자리 잡게 된 것입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요한 복음 2장 19절)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유다인들의 반응이 격렬했습니다. 분노에 치를 떨고, 이를 부득부득 갈면서 예수님을 성전 모독죄로 고발하기 일보 직전입니다.
“이 성전을 마흔여섯 해나 걸려 지었는데, 당신이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는 말이오?”(요한 복음 2장 20절)
예수님께서는 성금요일 당신의 수난과 십자가 죽음을 통해 극도로 훼손되고 속화된 성전을 완전히 허무셨습니다. 당신의 영광스런 부활을 통해 새로운 성전을 재창조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우신 성전은 이제 더 이상 허물어지지 않는 영원한 성전입니다. 예수님 존재 그 자체가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매일의 성체를 영하는 우리 각자가 또 다른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매일의 삶 속에서 구체화하는 교우들 한 명 한 명이 또한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예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둘이나 셋이 모여 지극정성으로 기도하는 가정은 그 어떤 성전보다 아름다운 성전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 고통받는 사람들은 세상 속의 성체요, 세상 속의 예수님이요, 예수님께서 가장 각별히 사랑하시는 개별교회입니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팬데믹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한국 교회는 진지하게 지난 순간들을 성찰하며 미래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특히 교회의 공동체성의 회복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할 순간입니다.
기원후 79년 대역병이 로마 제국을 휩쓸었습니다. 로마 정치가이자 역사가였던 타기투스의 ‘연대기’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로마인들이 집안 마다 시체가 가득 쌓여 있고, 거리 곳곳에 장례 행렬이 이어졌다.” 그러나 로드니 스타크는 ‘그리스도교의 발흥’이란 책에서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로마가 대 역병으로 위기에 처했을 때 그리스도교는 오히려 급성장했다.
당시 인구의 2/3가 죽어 나갈 때, 그리스도인들과 공동체는 환자들의 간호에 전념했다. 사람들이 모두 도시를 떠날 때에도 끝까지 남아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이렇게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희생과 헌신이 로마 사회에 새로운 네트워크를 제공했다.” 이 특별하고 어려운 시기, 오늘 우리 교회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인가를 깊이 있게 고민해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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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FBRuDraHR_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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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이들을 위한 교회를 넘어>
오늘은 베드로 대성전이 신축되기 전까지 교황의 거처였던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입니다. 라테라노 성전에 들어가면 최후의 만찬에서 사용되었던 식탁이 대표적인 유물로 남아있습니다. 마지막 만찬을 한 식탁은 그 위에서 성찬례가 제정된 숭고한 유물입니다.
저는 그 유물을 보며 생각에 잠긴 적이 있습니다. 성찬례가 교회의 중심이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당시에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의 모습을
묵상하곤 합니다.
교회의 성찬례는 바로 함께하는 하느님 나라 잔치를 상징합니다. 한 아버지를 둔 교회 가족 공동체는 그리스도의 식탁 주위에 진정 ‘가족’으로 모여야 합니다. 분명 성당도 그런 분위기여야 할 것입니다.
만약 가족이 힘들고 어려울 때 찾아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 꼭 성공해야만, 혹은 성공을 위해서만 가야 하는 곳이라면 참 가족이라고는 볼 수 없을 것입니다. 부모에게 사업자금을 챙기기 위해, 혹은 다른 형제들보다 성공했다는 것을 자랑하기 위해 찾아가야 하는 곳이라면 그런 가족은 가족의 참 의미를 잃은 곳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거대한 라테라노 대성전을 보면 그 거대함 속에 약간은 성만찬 식탁의 의미가 묻혀버린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성당이 너무 크고 화려해서 전통시장처럼 편안한 것이 아니라 백화점처럼 나를 초라하게 만드는 곳이 되어버렸습니다.
백화점이 크고 화려한 이유는 그 크고 화려함에 비해 우리가 얼마나 초라한지 느끼게 만들어서 새 옷을 사게 만들고 새 구두를 신게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만약 성당이 백화점과 같아서 그곳에 온 가난한 사람들이 주눅 들게 된다면 오늘 복음에서 성전을 정화하신 예수님께서 다시 채찍을 들지 않으실까 싶습니다.
저도 본당신부를 할 때, 어떤 분의 “신부님은 돈 있는 사람들과만 어울리세요!” 라는 충고의 말을 들었습니다. 저는 따로 돈 있는 사람들을 만나려 한 적은 없었지만 사실 사목회나 본당에서 굵직한 여러 봉사를 하시는 분들은 비교적 넉넉한 분들이었기에 가난한 분에겐 그렇게 보였을 것 같습니다.
교회 시스템 자체가 가난한 이들은 바빠서 봉사할 수 없는 처지이고 여유 있는 사람들이 봉사하며 사제와 어울릴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 모습이 예수님께서 원하신 성전의 모습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연극 ‘금관의 예수’에서 거지는 신자들이 성탄 미사를 마치고 갈 때까지 밖에서 떨고 있어야 했습니다. 미사를 드리는 이들은 자녀들 대학 걱정, 새로운 사업에 대한 걱정들을 아기 예수님께 쏟아붓고 갔습니다. 내년에 잘 되게 해 주면 비단 이불과 금관을 씌워주겠다고 아기 예수님께 약속하고 떠났습니다. 거지는 그들 틈에 끼일 수 없었습니다.
부자들이 자녀들에게 공부하지 않으면 저렇게 된다고 손가락질하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다 돌아가고 아기 예수님께 자기 누더기를 벗어 덮어준 사람은 바로 그 거지였습니다. 진정한 예배를 드린 사람은 거지 한 명뿐입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러’ 오셨습니다. 가난한 이들을 우선시하는 교회를 말한다면 부자들로서는 역차별이 아니냐고 항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가난한 이들의 교회에 부자들도 부담 없이 올 수는 있지만, 부자인 교회에 가난한 이들이 편안하게 올 수는 없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가난한 지역보다도 부자 동네에 가톨릭 신자 비율이 높다는 것은 좀 생각해봐야 할 문제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가난한 이들도 부담 없이 성당에 나와 주님을 찬미하게 할 수 있을까요? 백화점의 모습이 아니라 전통시장의 모습으로 되돌아가면 됩니다.
교황이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에게 로마로 들어오는 돈 수레들을 보며 “‘이제 나는 은도 금도 없소!’라고 말하던 시대는 지났다”라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토마스도 “맞습니다. ‘자 일어나 가시오!’라고 말하던 시대도 지났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라테라노 성전의 최후의 만찬 식탁은 황금 장식품으로 거의 가려져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그래서는 안 될 것입니다. “참으로 화려하다!”라는 감탄이 나오는 성전이 아니라 ‘내가 꾸미고 싶다!’라는 마음이 드는 성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거지라도 자기 누더기를 덮어드리고 싶은 추운 겨울에 떨고 있는 아기 예수님과 같은 성전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거지도 부담 없이 성전으로 나올 수 있습니다. 이것이 교회가 가난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입니다.
한 유튜브에 「자신을 끔찍이 학대한 주인을 법정에서 다시 만난 반려견」이란 동영상이 있습니다. 어느 날 행인이 쓰레기통 안에서 개의 울음소리가 들린다고 경찰에 신고했고 경찰은 여행 가방 안에 넣어져 버려진 개 한 마리를 발견했습니다. 그 주인은 동물 학대죄로 7년이나 이어지는 재판을 받고 있었습니다. 주인은 개가 죽었는지 알고 가방에 넣어 버렸다고 말했지만 실상 학대를 한 것이 분명해 보였습니다. 재판관은 그럼 마지막으로 개를 만나보게 하자는 제안을 했습니다.
7년 만에 주인을 만난 개는 멋쩍어하는 주인과는 다르게 바로 달려가 꼬리를 치며 좋아했습니다. 자신을 가방에 넣어 버릴 때부터 개는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주인이 그전에는 개의 그런 반응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그런 반응이 절실한 상황이었습니다.
교회도 가난한 사람들을 자신이 무언가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가난한 이가 필요해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라고 하셨습니다. 요한은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라고 말합니다.
아기 예수님은 한겨울 마구간에서 벌거벗고 추위에 떨고 계셨습니다. 어른이 된 예수님은 세상에서 박해받고 옷 벗겨지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헛간이라도 있다면 좀 쉬고 가시라고 내어드리고 싶고, 수건 한 장이라도 있으면 그분의 얼굴에 묻은 땀을 닦아드리고 싶은 마음이 솟구치게 만드는 삶을 사셨습니다.
교회가 이런 모습을 되찾지 않는다면 예수님께서 다시 성전을 허물라고 하시며 참 성전의 모범이 십자가에 매달린 당신 모습이어야 함을 깨우쳐 주려 하실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나 성당이 온전한 성전의 모습을 유지하려면 십자가의 예수님 모습을 닮아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몸이 성전입니다. 그대로 성전을 지어야 합니다.
우리 자신과 우리가 짓는 성당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분의 가난함으로 지어진 성전이라면 가난한 사람들도 부담 없이 다가올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들도 무언가 도움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이에게 복음을 전하고, 가난한 이들이 편하게 올 수 있는 성당이 되려면 가난한 이들보다 더 가난해져야 합니다. 우리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교회를 넘어 가난한 이들이 필요한 교회로 나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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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제가 태어나서 유아세례를 받은 성당은 전주에 있는 ‘전동성당’입니다. 전주의 한옥마을 가까이에 위치한 전동성당은 한국 교회 최초의 순교자 윤지충 바오로가 순교한 곳에서 세워졌습니다. 지금은 순례자와 관광객들이 찾는 성지가 되었습니다. 저는 어려서 서울로 올라와서 지금은 중앙동성당으로 이름이 바뀐 봉천동성당에 다녔습니다. 그 성당에서 첫영성체를 하고, 견진성사를 받았습니다. 1991년 사제서품을 받은 후에는 ‘첫미사’를 봉헌했습니다. 저를 포함해서 대부분의 교우들은 성당은 특정한 장소에 세워진 ‘건물’로 이해할 것입니다. 성당의 기능은 하느님께 예배를 드리는 곳이고, 교우들이 친교를 나누는 곳입니다. 예배의 가장 큰 형태는 ‘성체성사’로 미사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그밖에 다양한 전례를 통해서 예배가 이루어집니다. 혼배, 장례미사가 있고, 성모의 밤과 같은 전례가 있습니다. 학생 때 성당은 만남의 장소였습니다. 성당에서 예술제가 있었고, 성당에서 교리가 있었습니다. 유럽의 도시는 먼저 성당이 세워지고 성당을 중심으로 다른 건물들이 생겼다고 합니다. 성당은 신앙과 생활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신학교에서 ‘교회론’을 배우면서 성당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졌습니다. 특정한 장소에 세워진 건물로서의 성당은 제도로서의 교회입니다.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이 드러나는 ‘성사’로서의 교회가 있습니다. 용산참사의 현장에서 매일 미사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억울한 이들의 눈물을 씻어주는 그곳을 성당이라고 불렀습니다. 세월호의 아픔을 위로하는 미사가 광화문에서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죽은 영혼을 기억하는 그곳을 성당이라고 불렀습니다. 전방에서 군인들을 위한 미사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철책으로 둘러싸인 그곳을 성당이라고 불렀습니다. 성지순례 중에 ‘광야’에서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사람들은 삭막한 광야에서 하느님의 침묵을 묵상하는 그곳을 성당이라고 불렀습니다. 위령의 날에 교구는 용산 성직자 묘지와 용인 성직자 묘지에서 미사를 봉헌합니다. 사람들은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그곳을 성당이라고 불렀습니다. 팬데믹의 영향으로 주일미사 참례자들이 많이 줄었다고 걱정합니다. 교우들이 다시금 주일미사에 참례할 수 있도록 안내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세상에서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드러내는 성사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백성들의 공동체’로서의 교회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예배와 친교의 장소인 성당도 필요합니다. 경건함과 엄숙함이 드러나는 성당도 필요합니다. 많은 예술 작품이 영적인 충만함을 드러내는 성당도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세우려고 했던 교회는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이 드러나는 성당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세우려고 했던 교회는 하느님 백성들의 공동체로 드러나는 성당입니다. 교회의 위기가 있다면 제도로서의 교회가 부족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교회의 위기는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이 드러나는 성사로서의 교회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위기는 하느님 백성들의 공동체가 활력을 잃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직자들의 독선과 교만이 교회를 병들게 합니다. 십자가와 나눔을 외면하는 신앙생활이 교회를 병들게 합니다. 성직자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려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야 합니다. 성직자들은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야 합니다. 신앙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갔던 키레네 사람 시몬이 되어야 합니다. 신앙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땀을 닦아 주었던 베로니카가 되어야 합니다.
“누구든지 하느님의 성전을 파괴하면 하느님께서도 그자를 파멸시키실 것입니다. 하느님의 성전은 거룩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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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라떼란 대성당 봉헌 축일은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로마 라떼라노에 세운 대성당의 봉헌을 기념하는 날이다. 라떼란 대성당은 로마의 주교좌 성당이다. 성 베드로 대성당은 사도좌 성당이다. 라떼란 성당을 들어가다 보면 라틴어로 “Omnium Ecclesiarum Urbis et Orbis Mater et Caput, 로마와 전 세계의 모든 교회의 어머니이며 머리”라는 글귀가 있다. 이 성당은 성 베드로 좌의 권위를 상징할 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대성당의 모델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성당의 봉헌 일을 기념하는 것은 사랑의 전 공동체를 이끄시는 베드로 좌에 대한 존경과 일치의 표지이다.
복음: 요한 2,13-22: 예수님은 당신의 몸을 두고 성전이라 하셨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과월절이 되자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셔서 성전을 더럽히는 모든 행위를 금하시고 정화하시는 장면을 소개하고 있다. 성전의 본 의미는 그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그분께 참된 예배를 드리며 그분의 선물을 받는 곳이어야 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형식으로 변하고, 성전이 이익집단이 모여 이권 전쟁을 하는 곳으로 변해버린 것을 보시고 예수께서는 대로하셨다.
파스카 축제는 이스라엘에서 가장 성대한 축제이다. 이 축제를 지내기 위해서 온 세상에 흩어져있는 유다인들은 이때 예루살렘 성전을 순례하며 파스카 축제를 지냈다. 그때 예루살렘에 모인 순례객들이 200만 명이 되었고, 제물로 바치는 양의 숫자도 30만 마리가 되었다고 한다. 이때 성전에서 제물로 바치는 가축들을 성전에서 준비한 것만 바치게 하였고 성전세도 성전에서 만든 돈으로만 바치게 하여 이런 횡포가 있었다. 거룩하신 하느님의 현존보다는 자신의 이익에만 정신이 팔려있는 그 모습을 보시고 노하셔서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16절)고 꾸짖으신다. 예수님의 이 행위는 유다인들에게 반감을 갖게 하기에 충분한 행위였다. 그래서 “당신이 이런 일을 해도 된다는 무슨 표징을 보여줄 수 있소?” 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18-19절). 이 말씀은 당신의 몸을 두고 성전이라고 하셨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두 가지 성전을 볼 수 있다. 하나는 46년에 걸쳐 지어진 예루살렘 성전이며, 다른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께서 당신의 몸을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깊은 의미가 있다. 성전이 하느님을 만나는 장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길을 통하여 아버지께로 갈 수 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언제나 체험할 수 있으므로 그분이 성전이시며, 아버지와 성령께서 항상 함께하시기 때문에 그 몸은 거룩한 성전이시다.
바오로 사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여러분의 몸이 여러분 안에 계시는 성령의 성전임을 모릅니까?”(1코린 6,19) 이제 어떤 의미에서 아들이신 그리스도 안에 자녀들인 우리 자신은 성령을 모시는 성전이다. 성령을 모시는 또 다른 성전이라면, 우리는 우리의 몸을, 우리 자신을 하느님의 뜻에 맞는 성전으로 항상 가꾸고 보존하여야 한다. 하느님을 모시고 있는 성전이 거룩한 것처럼, 그 안에서 하느님께 기도하는 우리 자신도 다른 사람에게 나 자신을 통하여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장, 성전이 되도록 하여야 한다.
우리 자신이 성전임을 알았다면, 오늘 복음은 바로 우리의 모습이 어떠해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는 복음이다. 우리가 바로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이라고 하는 이 성전이 거룩할 때 우리 교회공동체가 모두 하느님을 모시는 성전으로 변화된다. 우리는 이 성전에 생명을 심을 수도 있고, 멸망을 심을 수도 있다. 그것은 언제나 나의 삶을 어떻게 선택하느냐에 달려있다. 항상 주님을 모시는 거룩한 성전이 되는 삶을 노력하여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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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김상우 바오로 신부님]
오늘은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입니다. 가톨릭 교회 전통은 324년에 로마의 대성당이 봉헌된 사건을 왜 기념할까요? 이 미사 중에 사제가 바치는 고유 기도문에서 단서를 발견합니다. 먼저 본 기도는 다음과 같습니다. “하느님, 몸소 뽑으신 살아 있는 돌로 영원한 거처를 마련하셨으니, 하느님의 교회에 은총의 영을 더욱 풍성히 내려주시어, 저희가 천상 예루살렘을 향하여 끊임없이 나아가게 하소서.” 이어서 영성체 후 기도를 보면, “하느님, 교회를 통하여 저희에게 천상 예루살렘을 미리 보여 주셨으니, 오늘 이 성사에 참여한 저희가 은총의 성전이 되고, 마침내 영광스러운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게 하소서.”라는 내용을 듣습니다.
로마의 라테라노 대성전은 오랫동안 베드로의 후계자인 교황들이 거주하던 교회 행정의 중심지였습니다. 그런데 지상 교회에서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천상 교회를 희망합니다. 우리가 지금은 비록 부분적으로 하느님 나라와 그분 영광에 참여하지만, 언젠가 천상 교회, 곧 천상 예루살렘에서 세상을 떠난 모든 이와 함께 삼위일체 하느님을 만나 뵙게 될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나그네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방인입니다.(1베드 2,11 참조) 우리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라 천상 예루살렘의 시민입니다.(필리 3,20 참조)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은 돌로 지어진 성전이 드러내는 지상 교회에서 살지만, 천상 교회에서 영원히 지낼 영광스러운 날을 희망하며 기도합니다. 나그네이며 이방인인 우리는 성사로 주어지는 일상 속 은총에 힘입어 오늘도 천상 예루살렘을 향하여 걸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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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성전을 정화하시다.>
“유다인들의 파스카 축제가 가까워지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 그리고 성전에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자들과 환전꾼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끈으로 채찍을 만드시어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쫓아내셨다. 또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 버리시고 탁자들을 엎어 버리셨다. 비둘기를 파는 자들에게는,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하고 이르셨다. …….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그분께서 이르신 말씀을 믿게 되었다.”(요한 2,13-22)
예수님의 ‘성전 정화’는 성전에 대한 가르침이기도 하고, 종교와 신앙생활 전반에 대한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아버지의 집’이라는 말은, ‘아버지의 소유물’이라는 뜻이 아니라, 아버지와 자녀들이 만나는 집, 아버지와 자녀들이 함께 사는 집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성전은 ‘모든 사람의 집’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내 아버지’는 우리로서는 ‘우리 아버지’입니다.>
‘장사하는 집’이라는 말은, “개인이 사적이고 세속적인 이익을 얻으려고 하는 집”이라는 뜻입니다. 당시에 성전에서 장사하던 사람들은, 겉으로는 “하느님께 바치는 제사 준비를 돕기 위해서”라는 명목을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자기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장사했습니다. 그리고 사제들은 장사를 허가하면서 ‘장소 사용료’, 또는 ‘세금’을 거두었는데, 그것은 사실은 ‘뇌물’을 받은 일이었습니다. <실제 상황에서는 사제들이 진짜 장사꾼이고, 장사하는 이들은 사제들의 하수인들이었을 뿐인 경우도 많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면 안 된다.”라고 엄하게 가르치시는데, 사제들과 장사꾼들은 “그래도 된다.”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면 안 된다.”는 “그것은 죄다.”입니다. 반대로, “그래도 된다.”는 “그것은 죄가 아니다.”라는 뜻입니다. ‘같은 일’을 두고 예수님께서는 ‘그 일은 죄다.’라고 말씀하시는데, 사제들과 장사꾼들은 죄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으니, 당시 백성들 입장에서는 혼란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러면 성전에서 아주 비싼 가격으로 파는 소, 양, 비둘기를 사야만 했던 백성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백성들 가운데에는 ‘부당한 일이다.’라고 생각하고 비판한 사람들이 많았는데(마르 11,18), 아무 생각이 없거나 당연한 일로 생각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복을 더 많이 받으려면 더 많은 돈을 바쳐야 한다고 생각하고, 비싼 가격으로 제물용 짐승을 사는 것도 하느님께 바치는 것이라고 착각한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그래야 한다.” 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이 세 가지, 즉 “그러면 안 된다.”, “그래도 된다.”, “그래야 한다.” 가운데에서 “그러면 안 된다.”만이 진리라는 것을 알고 있고, 진리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오늘날의 교회와 신앙인들의 모습을 보면, 예수님의 ‘성전 정화’는, 또 예수님의 가르침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필요하고, 중요한 것으로 보입니다. 종교와 신앙을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수단과 도구로 악용하는 경우가 아직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라는 예수님 말씀은, 공관복음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라 불릴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드는구나.”(마태 21,13; 마르 11,17; 루카 19,46) ‘강도들’은 회개하도록 깨우쳐 주고, ‘강도들의 소굴’은 허물어버리는 것이 마땅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유대교라는 종교를 없애버리라는 뜻은 아니고, 사실은 회개하라고 촉구하시는 말씀입니다.
뒤의 4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어떤 사마리아 여자에게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여인아, 내 말을 믿어라. 너희가 이 산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닌 곳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너희는 알지도 못하는 분께 예배를 드리지만, 우리는 우리가 아는 분께 예배를 드린다. 구원은 유대인들에게서 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실한 예배자들이 영과 진리 안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사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이들을 찾으신다. 하느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그분께 예배를 드리는 이는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요한 4,21ㄴ-24)
여기서 “이 산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닌 곳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라는 말씀은, 특정 장소나 건물이 예배를 독점하는 시대는 끝났다는 선언이고, 예루살렘 성전의 기능은 이제 끝났다는 선언이기도 합니다. “구원은 유다인들에게서 온다.”라는 말씀은, “구원은 유대인들이 믿고 있는 그 하느님에게서만 온다.”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유대인들의 신앙과 유대교라는 종교 자체는 긍정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유대교의 예배를 개혁하고 쇄신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셨습니다.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말씀은, 유대인들의 예배는 성령의 인도를 받지 않는 상태에서 자기들만의 이기심으로 드리는 ‘잘못된 예배’라고 비판하시는 말씀입니다. <‘성전 정화’ 이야기에서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라는 말씀은, 당신의 수난, 죽음, 부활을 바탕으로 해서 새롭게 예배를 세우시겠다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성경과 그분께서 이르신 말씀을 믿게 되었다.”라는 말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구약성경의 말씀’과(하느님의 말씀과) 동등한 말씀으로 믿기 시작했음을 나타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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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상우 바오로 신부님]
오늘은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입니다. 가톨릭 교회는 324년에 로마의 대성당이 봉헌된 사건을 왜 기념할까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신앙인에게 이 축일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오늘 미사 가운데 사제가 바치는 고유 기도문에서 단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먼저 본 기도는 다음과 같습니다.
“하느님, 몸소 뽑으신 살아 있는 돌로 영원한 거처를 마련하셨으니, 하느님의 교회에 은총의 영을 더욱 풍성히 내려주시어, 저희가 천상 예루살렘을 향하여 끊임없이 나아가게 하소서.”
이어서 영성체 후 기도에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이어집니다. “하느님, 교회를 통하여 저희에게 천상 예루살렘을 미리 보여 주셨으니, 오늘 이 성사에 참여한 저희가 은총의 성전이 되고, 마침내 영광스러운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게 하소서.”
라테라노 대성전은 오랫동안 베드로의 후계자인 교황들이 거주하던 교회 행정의 중심지였습니다. 그런데 지상 교회에서 살아가는 우리 신앙인은 언제나 천상 교회를 희망합니다. 우리가 지금은 비록 미미하게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지만, 언젠가 천상 교회, 곧 천상 예루살렘에서 세상을 떠난 모든 이와 함께 삼위일체 하느님을 만나 뵙게 될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은 나그네입니다. 우리 신앙인은 이방인입니다.(1베드 2,11 참조) 우리 신앙인은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라 천상 예루살렘의 시민입니다.(필리 3,20 참조)
그러므로 우리는 돌로 지어진 성전이 드러내는 이 지상 교회에서 살지만, 천상 교회에서 영원히 살게 될 영광스러운 날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나그네이며 이방인인 우리 신앙인은 성사를 통하여 주어지는 은총에 힘입어 하루하루 천상 예루살렘을 향한 여정을 준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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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이 성전을 허물어라.”>
사제 출신의 에제키엘은 성전에 대한 그리움과 함께 바빌론 크바르 강가에서 하느님으로부터 예언자로서의 소명을 받고 부터 환시를 통하여 말씀을 전합니다.
비극의 예레미야 예언자가 예루살렘 멸망의 예고를 남겼다면 에제키엘은 종말에 펼쳐질 하느님의 심판을 전하면서도 폐허로 끝났던 예루살렘에 세워질 미래의 성전에 대한 메시지를 전합니다.
천사는 예언자를 데리고 하느님의 집 어귀로 돌아갑니다. 그는 주님의 집 문지방 밑에서 물이 솟아 동쪽으로 흐르는 것을 봅니다. 그 물은 주님의 집 오른쪽 밑으로 해서 제단 남쪽으로 흘러 가는데 아라바로 내려가서 바다로 들어들어갑니다. 이물이 바다로 흘러들어가면 바닷물이 되살아납니다.
그 물이 흘러가는 곳마다 온갖 생물이 우글거립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그 물이 흘러가는 곳에는 땅도 생기를 갖기에 이 강가 이쪽저쪽으로 온갖 과일나무가 자라납니다. 그 과일이 양식이 됩니다.
오늘은 라떼라노 대성전 대축일입니다. 라테라노 가문의 궁전이 역사의 우여곡절을 겪으며 콘스탄티누스 황제를 통해 로마 주교에게 넘어간 것이 라테라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당(Basilica di San Giovanniin Laterano)의 기원이 된다고 하겠습니다. 그 시기가 정확하지는 않지만 대략 기원후 313여년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라떼라노 궁전과 연결되어 있는 대성당이 실베스테르 1 세 교황에 의해서 ‘하느님의 집’으로 선포되는데 그 시기를 기원후 324년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교황의 아비뇽 유수(幽囚)가 시작되던 해(1309)까지 약 천여 년 동안 라떼라노 궁전과 대성당은 역대 교황들이 머문 자리가 되었고 교회 행정의 중심이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도 베드로를 통해 교회를 세우셨는데(마태 16,18) 역사적으로 그 교회를 첫 번 째로 상징하는 라떼라노 대성전이 보수 개축과정을 거쳐 봉헌되었는데 그 건물을 바치고 있는 12개의 기둥에는 교회의 초석들이 되는 12사도의 조각상들이 그 당시 대표적인 7명의 조각들에 의해서 세워졌습니다.
대성전 중앙 입구에 있는 계단은 물결모양으로 둥근 형태를 띄고 있는데, 이것은 에제키엘이 환시중에 예루살렘 성전으로부터 물이 흘러 아라바를 향하며 사막을 적시고 바닷물을 생수로 바꾸었다는 사상과 연결된다고 보겠습니다.
교회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평화가 강물처럼 세상으로 흘러 생명을 주는 의미를 또한 갖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파스카 축제가 가까워지자 예루살렘에 올라가십니다. 예루살렘과 성전을 순례하는 많은 사람들로 도시와 성전 부근이 북적이었던 것입니다. 외국에 있던 사람들은 희생제물로 바칠 가축을 사기 위해서 환전상으로부터 성전 돈으로 바꾸었던 것입니다.
당연히 환전상들은 대목을 만나 순례객들을 맞아 돈을 버는 것입니다. 이 광경을 보시던 예수님께서 끈으로 채찍을 만드시어 양과 소와 함께 환전상을 쫓아내고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버리시고 탁자를 둘러엎으십니다.
이 광경을 보던 유다인들은 예수님께 “당신이 이런 일을 해도 된다는 무슨 표징을 보여 줄 수 있소?” 하며 따지는 것입니다.(요한 2,18)
예수님께서는 질문하는 그들에게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19절)라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그 자리에 있던 유대인도 제자들까지도 이 성전에 대한 이 말씀이 예수님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인 줄을 몰랐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저자는 이 사실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그분께서 이르신 말씀을 믿게 되었다.”(21-22절)
후에 사도 바오로는 예수님의 지체인 교우들을 두고 이런 말씀을 전합니다.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누구든지 하느님의 성전을 파괴하면 하느님께서도 그자를 파멸시키실 것입니다. 하느님의 성전은 거룩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1코린 3,16-17)
우리는 보통 교회하면 건물을 생각합니다. 그것은 성전이라고 하면 유대인들에게 예루살렘에 있던 중앙 성전을 자동적으로 떠올리는 것과 서로 통하는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인들에게 성전은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는 자리이기에 거룩하고 세상이 침범하지 못하는 위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이 바빌론에 의해서 성전이 파괴되며 공간의 의미도 잃어버립니다. 그리고 그들이 유배지에서 성전 대신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을 중심으로 다시 모입니다.
에즈라 느헤미야가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와 예루살렘에서 벌이 역사적인 일은 하느님의 성전을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업조차 그들의 뜻대로 진행하지 못하고 결국 솔로몬의 성전에 대한 향수로 이어갈 뿐이었습니다.
그 성전의 역할이 세상 각처로 흩어진 곳에서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그것은 회당과 성경을 중심으로 하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래도 예루살렘 귀환 후에도 그들은 솔로몬에 대한 성전의 향수를 잊지 못하고 재건 운동을 벌입니다.
솔로몬 이후에 북부 이스라엘은 단과 그리짐 산과 남부 유다는 예루살렘 성전을 두고 서로 정통을 주장하며 갈등을 일으켰는데 예수님 시대에 이르기까지 그 흔적이 남이 있습니다.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의 대화에서 그것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저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선생님 네는 예배를 드려야 하는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말합니다.”라고 질문을 하는 여인에게 주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여인아, 내 말을 믿어라. 너희가 이 산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닌 곳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요한 4,21)
눈에 보이는 예루살렘 성전과 우리 교회의 대성전도 역사적으로 큰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도 그러하시고 이방인의 사도 바오로는 이미 그 성전이 예수님이시며 또한 그분을 따르는 이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라떼란 대성전 봉헌을 함께 기억하며 우리는 또한 우리 자신이 주님의 성전임을 항상 생각하며 우리 자신을 거룩하고 새롭게 가꾸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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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우리는 하느님의 성전>
라테라노 대성전은 로마에 있는 최초의 바실리카 양식 대성전입니다. 324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세웠습니다. 로마교구의 주교좌성당으로 교구장인 교황좌가 있는 대성당입니다. 대성전의 공식이름은 “라테라노의 지극히 거룩한 구세주와 성 요한 세례자와 성 요한 복음사가 대성전”입니다.
로마에 있는 가장 오래된 성당으로 첫째가는 지위를 가졌으며, 전 세계 모든 지역교회의 유대관계 안에서 “모든 성당의 어머니”로 불리 웁니다.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표현대로 “사랑의 전 공동체를 이끄는”베드로좌에 대한 존경과 일치의 표지로써 이날을 기념하게 되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성전이라고 하면 하느님을 찬미하고 기도드리기 위해서 건축한 외적인 건물을 생각하고 또 말합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1코린 3,16.17). 하고 말합니다. 단순히 눈으로 보이는 기도의 집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이 곧 성전입니다. 사실 우리는 세례성사를 통해서 하느님의 성전이 되었습니다.
사람의 몸은 성령님이 계시는 성전이요, 더욱이 성체성사로 오시는 예수님을 모시고 있기에 성전입니다. 성체를 모시는 우리의 몸은 성전이요, 움직이는 감실입니다.
또한 오늘 복음은 예수님 자신이 성전임을 가르쳐 줍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그러나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요한 2,19-21)
당신 몸을 성전으로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사흘 안에 세우겠다’는 말씀은 죽음에서의 부활을 상징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써 그 의미를 알아들었습니다.
묵시록에서는 새 예루살렘의 도성을 얘기하면서 “나는 그곳에서 성전을 보지 못했습니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과 어린양이 도성의 성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도성은 해도 달도 비출 필요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그곳에 빛이 되어 주시고 어린양이 그곳의 등불이 되어 주시기 때문입니다.”(묵시 21,22-23) 하고 말합니다.
성전이란 특정 건물만도, 내세에서 영적으로 성별 된 장소만도 아닙니다. 성전이란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는 곳, 거룩한 곳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어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이시고, 성체이십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참된 성전이신 주님을 마음에 모셔야 하고 그 주님을 모신 내가 거룩함을 지녀야 하며 그러한 준비된 마음으로 기도의 집에서 하느님을 경배하고 찬미를 드려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마지막에 하느님의 성읍인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그 성전을 정화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의노와 열정으로 정화하시는 예루살렘성전은 이스라엘의 종교와 삶의 모든 것이었습니다. 그 안에 하느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계약의 궤가 모셔져 있었고, 이는 주 하느님의 현존과 그들의 선민과 구원을 상징하였습니다.
그러나 성전의 참된 의미는 환전상들과 제사에 필요한 물품을 파는 장사꾼들의 지나친 상혼에 가려져 있었고, 그 뒤엔 제사장들의 권력과의 결탁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성전의 상점은 올리브 산 언덕에 있는 산헤드린의 상점과 경쟁하기 위해 대제관 가야파가 연 것이라고 합니다. 자기네 이익과 특권을 유지하고 증진할 목적으로 종교를 이용한 것입니다.
그야말로 돈이 되니까 장사를 하였습니다. 성전에 예물을 바치러 온 사람들을 잘 도와줘야 하는 데 그들을 이용하여 폭리를 취하고 부담을 주었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정성과 거룩한 마음이 모아져야 할 성전에서 정성껏 준비한 제물은 무시되고 부정과 부패, 착취가 난무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예루살렘성전 앞에서 장사꾼들을 꾸짖으시고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버리시고 탁자들을 엎어버리셨습니다. 그리고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고 하셨습니다.
단호하게 꾸짖지 않으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결국 심판 날에 ‘손과 발이 묶여서 바깥 어두운 곳에 버려질 것’이 분명하기에 이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쫓겨난 것은 그들 마음 안에 하느님은 없고, 물질과 개인적인 이득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기적인 욕망에 가득 차 있으니, 혼이 나는 것은 마땅합니다. 성전에 하느님의 거룩한 영 대신‘돈’과 물질이 들어가서 주인행세를 하니 그 결과 46년이나 걸려서 지은 예루살렘성전도 ‘장사하는 집’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람이 썩으면 산천이 썩고 사람이 무너져서 종교도 무너지고 모두가 망그러집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악한 행실로 하느님의 살아있는 성전에 흠을 내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아무리 아름답고 웅장한 성전이라도 그곳에 거룩함을 지닌 백성이 없다면 이미 성전의 품위는 없습니다.
그저 잘 지어진 건물일 뿐입니다. 성전은 겉모양이 아니라 마음의 성전이 더 소중합니다. 어느 성당 기공식에서 하신 주교님의 말씀이 생생합니다. “성전을 건축한다고 더 큰 성전인 마음의 성전이 무너지고 상처 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집인 성전은 그 안에 거룩함을 잃지 않으려 기도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느냐에 따라 그 아름다움이 결정됩니다. 초라한 마구간이 빛난 것은 예수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웅장하지도 값진 예술품 하나 없어도 주님과 함께하는 사람, 기도하는 사람,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집은 아름다운 성전입니다.
그러나 많은 돈을 들여 지은 건물에 갖가지 값진 예술품으로 장식을 해 놓았다고 하더라도기도하는 사람이 없다면,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이 없다면 그 집은 그저 건물일 뿐입니다. 결코 성전은 아닌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성당이 참으로 아름다운 성전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우리의 마음에 주님을 제대로 모시고 거룩함을 간직한다면 대성전이든 마당이든 무엇이 문제가 되겠습니까? 주님께서 친히 우리를 당신의 거처로 삼으셨다면 어디에서든 거룩함으로 빛나야 하겠습니다. 외적인 건물의 화려함보다도 마음의 성전을 빛내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우리 마음을 기도의 찬미, 말씀 선포의 성전이 되게 하시고 우리 마음을 성모님의 발현장소로 강복하시길 청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시기 질투, 미움, 분노, 증오, 탐욕으로 차 있다면, 악습에 젖어 있다면, 사랑하지 못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 마음을 정화할 수 있는 은총이 함께하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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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흥청대는 술 잔치와 만취, 음탕과 방탕, 다툼과 시기 속에 살지 맙시다. 그 대신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십시오. 그리고 육체의 정욕을 만족시키려 하지 마십시오.”
로마서 13장 13-14절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구절을 읽고 아오스딩 성인은 그의 책, 고백록을 통해 자신의 체험을 선명한 빛이 자신에게 들어온 것을 깨달았다고 고백하십니다. 저 역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십시오’라는 말씀에 크게 감동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으로 무장해서 악이 침범하지 못하게 해야 하는데 너무 답답하다고, 시대에 뒤떨어지는 말씀이라면서 세상 것만을 추구하고 세상 것만을 입으려고 했던 것이 아닐까요?
예전에 바다 수영을 한 적이 있습니다. 바다의 높은 염도로 인해 물 위로 잘 뜰 수 있었고 그래서 신나게 수영하며 즐겁게 지냈습니다. 너무 신나게 놀았을까요? 갑자기 다리에 쥐가 올라왔습니다. 다리를 제대로 쓰지 못하니 당황할 수밖에 없었고, 그래도 다행인 것은 엄청난 물을 마셨지만 겨우 해안가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이때 구명조끼의 필요함을 깨달았습니다. 수영 잘하니까 답답한 구명조끼가 필요 없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아니었습니다. 꼭 필요했습니다.
주님을 입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너무 많은 악의 홍수 속에서 익사하지 않고 살아남는 방법은 주님을 입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 없이도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주님을 따르기가 어렵고 힘들다면서 그냥 세상을 입겠다고 합니다. 구원의 열쇠는 주님께만 있는데, 세상 것만을 따르겠다는 ‘어리석음’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성전은 하느님과 만나는 특별한 장소였습니다. 즉, 하느님을 입고 세상의 악을 막는 곳입니다. 그런데 이 기도의 집인 성전에서 물건을 팔고 환전하면서 이익을 얻는 곳이 된 것입니다. 하느님을 입을 수 없고, 세상 것만을 입게 됩니다. 그런 성전을 바라보면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의 파괴와 멸망을 예고하시지요. 참된 성전은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 성령으로 충만하신 그분의 인격임을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과연 무엇을 입고 있었는지를 따져봐야 할 것입니다. 주님을 입지 않고, 세상 것만을 쫓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하느님을 만나고 하느님을 입게 되는 특별한 장소가 되어야 할 성전도 세상 것이 가득하게 되면 그 거룩함이 사라질 수도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을 입는 데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육체의 정욕을 만족시키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필리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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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성전 정화>
요한 2,13-22 (성전을 정화하시다)
유다인들의 파스카 축제가 가까워지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 그리고 성전에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자들과 환전꾼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끈으로 채찍을 만드시어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쫓아내셨다. 또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버리시고 탁자들을 엎어 버리셨다. 비둘기를 파는 자들에게는,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하고 이르셨다. 그러자 제자들은 “당신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집어삼킬 것입니다.”라고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생각났다. 그때에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당신이 이런 일을 해도 된다는 무슨 표징을 보여 줄 수 있소?”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유다인들이 말하였다. “이 성전을 마흔여섯 해나 걸려 지었는데, 당신이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는 말이오?” 그러나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그분께서 이르신 말씀을 믿게 되었다.
<성전 정화>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요한 2,19)
네 삶의 모든 순간에
불신의 너를 허물어라
믿음의 너를 세우리니
내 삶의 모든 순간에
불신의 나를 허물리니
믿음의 나를 세우소서
네 삶의 모든 순간에
절망의 너를 허물어라
희망의 너를 세우리니
내 삶의 모든 순간에
절망의 나를 허물리니
희망의 나를 세우소서
네 삶의 모든 순간에
미움의 너를 허물어라
사랑의 너를 세우리니
내 삶의 모든 순간에
미움의 나를 허물리니
사랑의 나를 세우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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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허물고 세우는>
오늘은 라떼라노 대성전 축일인데 건물로서의 대성전의 의미를 기념하기도 하지만 성령의 성전인 우리와 우리 공동체의 의미도 기념합니다.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누구든지 하느님의 성전을 파괴하면 하느님께서도 그자를 파멸시키실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주님께서도 사람들이 보이는 예루살렘 성전을 얘기하자 당신의 몸인 성전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그렇지만 건물로서의 성전이나 나라는 성전이나 공동체라는 성전이 그 안에 하느님께서 계셔야지만 성전이라는 면에서는 공통적입니다. 그렇다면 성전이 무너지는 이유도 다르지 않고 모두 같을 것입니다. 그 안에 계셔야 할 하느님이 아니 계시기 때문입니다.
서양에서 그 웅장하고 화려한 성전이 폭격받거나 사람들이 허물지 않아도 무너지는 것은, 사람들이 그곳을 찾지 않기에 폐허가 되고 무너진 거지요. 그러니까 그 성전에 하느님이 아니 계시고 그래서 사람들이 그 성전에서는 더 이상 하느님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성전에 하느님이 아니 계시다니 그것이 말이 됩니까? 아니 계신 곳이 없이 어디에나 계시는 하느님이 마땅히 계셔야 할 성전에 오히려 아니 계시다니 말이 됩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그 성전에 하느님이 아니 계신 것은 그 성전에서 사람들이 하느님을 찾지 않고, 그 성전에서 사람들이 기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프란치스코처럼 무너진 성당을 재건하려면 프란치스코처럼 성당을 재건하기도 해야 하지만 성당 재건에 앞서 무너진 인간 성전들을 재건하여 하느님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성당에서 기도하는 사람들이 늘어나야 합니다.
사실 성당이든 수도원이든 망하고 무너지는 곳을 보면 그곳에 하느님께서는 아니 계시고 기도하지 않는 사람끼리 모여 살고, 그러니 자기들끼리 혹 사랑하기도 하지만 대부분 미워하고 싸움박질만 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끼리, 그래서 기도하지 않는 사람끼리 만나고 모이니, 사랑의 하느님이 자기들 안에 아니 계신 사람끼리 만나고 모이는 셈이요, 그러니 당연히 서로 미워하고 싸우고 갈라설 수밖에 없게 되고 망하게 되겠지요.
하느님이 아니 계신 성전들은 무너질 수밖에 없고, 그러니 무너지기 전에 우리 자신을 허물어야 합니다. 그것은 ‘허물어라! 다시 세우겠다.’라고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다시 세우기 위해 우리 자신을 허무는 것이고 이렇게 우리 안에서 잡것들을 싹 허물어버릴 때 오늘 주님처럼 우리도 성전을 정화하는 것이요 세례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 될 것입니다.
허물고 다시 세우는 이 과감한 작업을 주님과 프란치스코처럼 용감히 수행하라고 촉구받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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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전 정화>
-삶의 중심, 삶의 의미인 성전-
"주여 당신의 집에 사는 이는 복되오니, 길이길이 당신을 찬미하리이다."(시편 84,5)
오늘은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입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로마의 라테라노에 대성전을 세워 봉헌한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교황 성 멜키아데스에게 라테란 궁전을 기증할 때 함께 세워준 성전으로, 324년 교황 성 실베스테르 1세에 의해 구세주 그리스도께 봉헌되어 그리스도교의 으뜸 교회가 되었습니다. 1307년 교황이 아비뇽으로 옮겨갈 때 까지 역대 교황의 주거지였으면 이곳에서 대관식, 착좌식을 했고 이곳에 묻혔습니다.
전 세계 가톨릭교회의 총본산으로 로마의 4대 성전의 하나로, 가장 오래된 건물입니다. 전승에 의하면 이 대성전 봉헌 축일은 12세기부터 바로 오늘 11월9일에 지냈고, 후에 로마 전례를 거행하는 모든 교회가 “전 세계와 로마의 모든 교회의 어머니요 머리”인 이 대성전의 봉헌 축일을 지내게 되었습니다.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가 기록한 대로, “사랑의 전 공동체를 이끄는” 베드로좌에 대한 존경과 일치의 표지로서 이날을 기념하게 된 것입니다. 대성전 축일이면 떠오르는 다음 시편 둘입니다.
“만군의 주님이여,
계시는 곳 그 얼마나 사랑하오신고
그 안이 그리워
내 영혼 애태우다 지치나이다
이 마음 이 살이 생명이신 하느님 앞에 뛰노나이다”(시편 84,2-3)
“강물이 줄기줄기 하느님의 도성을,
지극히 높으신 분의 거룩한 거처를 즐겁게 하네.
하느님이 그 안에 계시니 흔들리지 않네
하느님이 동틀녘에 구원하시네.”(시편 46,5-6)
뒤 시편은 오늘 화답송 시편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을 상징하는 성전입니다. 이런 중심이 없어, 중심을 잃어 방황이요 혼란이요 표류입니다. 그리하여 이런 보이는 가시적 중심인 성전을 끊임없이 찾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을 찾는 사람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찾는 성전이요 하느님을 사랑하듯 성전을 사랑하는 신자들입니다. 예수님의 성전 사랑 역시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아니 누구보다 아버지를 사랑하듯 아버지의 집인 성전을 사랑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성전의 타락과 속화에 열화같은 분노는 너무 자연스럽고 당연했습니다. 세상의 마지막 영적 보루로 세상을 성화해야 할 성전이 부패하고 속화된다면, 세상의 빛과 세상의 소금 역할을 상실한다면, 세상은 어떻게 되겠는지요. 예수님은 성전을 어지럽히는 상인들과 환전꾼들을 쫓아낸 후 가난한 비둘기 파는 자들에게 타이르십니다.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하느님의 집, 기도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당신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삼킬 것입니다.”라는 시편 말씀을 연상하며 예수님을 이해하나 유다인들은 예수님께 이런 일을 해도 된다는 표징을 요구합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답이 가시적 성전이 아닌 불가시적 성전에 대한 심오한 진리를 보여줍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예수님께서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을 예수님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야 깨닫고 믿게 된 제자들입니다. 이제부터는 예수님의 몸이 참 성전이 된 것입니다. 보이는 가시적 성전이 성전일 수 있음은 바로 거기 그리스도의 몸인 성전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성체성사 미사가 없는 성전이라면 그 보이는 성전은 건물에 불과할뿐 쓸쓸하고 공허하기 짝이 없을 것입니다. 바로 이런 진리를 잘 드러내는 미사중 감사송 경문이요 가톨릭 교리서의 설명입니다
“아버지께서는 기도하는 집에 머무르시며, 끊임없이 은총을 내려주시어, 저희가 성령의 성전이 되고, 거룩한 생활로 주님 영광의 빛을 드러내게 하시니이다. 또한 눈에 보이는 이 집으로 교회를 드러내시고, 그리스도의 배필인 교회가 나날이 거룩해져, 무수한 자녀들과 함께 기뻐하며, 하늘 영광에 참여하게 하시나이다.”
진짜 참 성전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공동체입니다. 지상에서 이미 하늘 영광에 참여하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입니다. 그러니 보이는 성전이나 보이지 않는, 주님의 지체들인 우리로 이뤄진 그리스도의 몸인 성전정화에 날마다 거행하는 성전 미사전례 은총보다 더 좋은 수행은 없을 것입니다. 다음 가톨릭교회 교리서의 말씀이 심오하고 참 적절하고 은혜롭습니다.
‘“영과 진리 안에서” 드리는 신약의 예배는 어느 한 특정 장소에만 매이지 않는다. 온땅은 거룩하며, 사람의 자녀들에게 맡겨졌다. 신자들이 한 장소에 모일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이 “영적 집”으로 세워지도록 모인 “살아 있는 돌”이 되는 것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은 생수가 솟아 나오는 거룩한 성전이다. 성령으로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된 우리는 “살아 계신 하느님의 성전”이다.”(교리서 1179)
놀라운 것은 성전의 삼중(三重) 차원입니다. 보이는 1.가시적 성전이요, 2.그리스도의 몸인 공동체 성전이요, 3.각자 개인의 성전입니다. 셋이자 하나인 성전에서의 미사은총이 끊임없이 세상을 살리고 정화하고 성화합니다. 바로 에제키엘서가 이 진리를 잘 보여줍니다. 주님의 집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강물은 그대로 미사를 통한 은총의 강물을 상징합니다.
“이 강이 흘러가는 곳마다 온갖 생물이 우글거리며 살아난다. … 이렇게 이 강이 닿는 곳마다 모든 것이 살아난다. 이 강가 이쪽저쪽에서는 온갖 과일나무가 자라는데, 잎도 시들지 않으며 과일도 끊이지 않고 다달이 새 과일을 내놓는다. 이 물이 성전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 과일은 양식이 되고 잎은 약이 된다.”
창세기 아담의 죄로 잃어버린 낙원의 회복을 상징합니다. 실낙원에서 복락원을 살게 하는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영적 양식이자 영적 약이 되는 말씀과 성체의 은총입니다. 천상 예루살렘을 앞당겨 살게 하는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생명나무의 열매가 바로 이 거룩한 성체입니다. 묵시록에서 다시 반복되는 우리 궁극의 희망인 천상고향에 대한 묘사도 아름답고 은혜롭습니다.
“그 천사는 수정처럼 빛나는 생명수의 강을 나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 강은 하느님과 어린양의 어좌에서 나와 도성의 거리 한가운데를 흐르고 있었습니다. 강 이쪽저쪽에는 열두 번 열매를 내는 생명나무가 있어 다달이 열매를 내놓습니다.”(묵시 22,1-2ㄱ)
우리는 황송하게도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다달이가 아닌 날마다 생명나무의 열매인 주님의 성체를 모십니다. 무엇보다 놀랍고 은혜로운 것은 그리스도의 몸인 지체인 우리 하나하나가 주님의 거룩한 성전이라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이 우리를 고무하며 용기백배 힘나게 합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하느님의 성전이며 하느님의 성령께서 자기 안에 살아 계시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만일 누구든지 하느님의 성전을 파괴하면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을 멸망시키실 것입니다. 하느님의 성전은 거룩하며 여러분 자신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이기 때문입니다.”(1코린3,16-17)
얼마다 거룩하고 소중한 우리 하나하나의 존재인지요! 하나하나가 하느님의 거룩한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성전정화는 비단 보이는 성전이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뿐만 아니라 내 자신 성전정화도 필수임을 깨닫습니다. 정말 하느님의 성전을 돌보듯 내 심신의 성전을 잘 돌보는지요. 끊임없는 기도와 회개 은총과 더불어 사랑의 수행을 통해 날로 새로워지고 거룩해지는 우리 자신의 성전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성체성사 미사은총입니다. 날마다 정성껏 온 마음과 온정신과 온 힘을 다해 정성껏 거행하는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주님과의 일치를 날로 깊게 함으로 주님을 닮아감이 성전정화의 첩경임을 깨닫습니다. 미사때 마다 오늘 영성체후 기도를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하느님, 교회를 통하여, 저희에게 천상 예루살렘을 미리 보여 주셨으니, 오늘 이 성사에 참여한 저희가 은총의 성전이 되고, 마침내 영광스러운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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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요한 2,16)
<성전 정화!>
오늘 복음(요한2,13-22)은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이 성전으로써의 본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고, 장사하는 집으로 변해 있는 모습을 보시고 크게 분노하십니다.
"성전에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자들과 환전꾼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끈으로 채찍을 만드시어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쫓아내셨다. 또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 버리시고 탁자들을 엎어 버리셨다."(요한 2,14-15)
이 모습을 보고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말합니다. "당신이 이런 일을 해도 된다는 무슨 표징을 보여 줄 수 있소?"(2,18)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십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2,19) 예수님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의 몸'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이 말씀은 "나를 죽여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살아나겠다."라는 말씀입니다.
오늘은 기원후인 서기 324년에 '라테라노 대성전이 하느님께 봉헌된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라테라노 대성전은 현재의 베드로 대성전(1626.11.18)으로 옮겨지기 전까지 약 천년 동안 교황이 거주했던 곳입니다.
성전은 '하느님의 집'입니다.
성전은 '기도하는 집'입니다.
성전은 '부활하는 곳'입니다.
성전은 '성령이 머무는 궁전인 우리의 몸'입니다.
이 성전이 성전으로써의 기능을 잘하고 있는지? 이 성전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성령(생명)의 물이, 나와 너 그리고 세상을 살리고 있는지? 혹시 예수님께서 분노하신 것처럼 성전이, 나의 성전이 더럽혀져 있지는 않은지?
한번 성전의 모습, 나의 모습을 성찰해 봅시다!
"주님, 저희가 성령의 성전이 되고, 거룩한 생활로 주님 영광의 빛을 드러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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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tuAYW4CsB0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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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요한 2, 21)
하느님의
성전은
우리 삶의
바람직한
모습을 위해
존립합니다.
하느님의 성전은
사람을 만들어
갑니다.
올바른
신앙생활을
위해 성전이
있습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위한
참 삶의 모습을
예수님께서는
당신 삶으로
몸소
보여주십니다.
자신의 인격으로
하느님 나라를
구현하십니다.
세상을 향해
사랑을
실천하십니다.
이렇듯 성전은
예수님의 삶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느 때보다
절실히 요구되는
공동체적 삶의
실현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셨고
열정적으로
실천하셨습니다.
참된 구원과
참된 실천은
신앙의 깊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바른 삶의 자세에서
비롯됩니다.
우리의 삶을
파괴하는 갈등을
평화로 바꾸어 놓는
예수님의 몸인
성전입니다.
소금과 빛이
되는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세속적인 욕망과
유혹이 끊임없이
흔들어대는
이 세상에서
우리가
휩쓸리지 않고
사랑과 희망을
포기하지 않으며
복음을 지켜나갈 수
있는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소중한 가치를
지키기 위해
어려운 길을
걸어가는
많은 이들을 위해
기도드립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크고 화려한
건물이 아니라
묵상과 기도
실천과 반성이
함께하는
그리스도를 닮은
복음의 인격이
되는 기쁨이
성전의 기쁨입니다.
실천으로
옮기는
성전이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는 성전입니다.
진정한 성전의
자리는
실천하는
실천의
자리입니다.
결핍과 고립이
아니라
지고와 보편으로
나아가는
주님의 몸
성전입니다.
성전은
성전이 갖는
성전의 여정인
탄생과 성장
복음선포와 수난
그리고 부활이
있습니다.
사랑의 실천인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을 진심으로
함께 기뻐합니다.
그 중심에는
그 중앙에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있음을
기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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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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