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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비공개 입니다
안병하安炳夏의
광주비망록光州備忘錄
글,편집: 묵은지
1980년 5월 18일, 우리가 기억(記憶)하고 있는 '5.18'의 숫자 의미(意味)는 실로 우리나라 현대사(現代史)에 6.25의 참상(慘狀)을 떠올릴 정도인 끔찍한 역사(歷史)의 비극(悲劇)을 우리에게 안겨준 가슴아픈 숫자입니다. 택도 없는 정치적(政治的)인 이유와 명분(名分)을 내세워 자신들의 권력욕(權力慾)을 위해 군(軍) 병력(兵力)을 동원(動員)하여 양민(良民)을 무참(無慘)하게 학살(虐殺)한 도저히 정상적(正常的)인 사람의 생각으로는 상상이 않되는 짓들이 벌어졌던 참혹(慘酷)한 일들이 무려 4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습니다. 하지만 지금에도 당시의 역사 현장(現場)을 젊은 청년시절로 살았던 묵은지의 마음은 잊혀질래야 잊혀질 수가 없는 기억이며 그때를 생각하면 이루말 할 수 없는 착잡(錯雜)함과 비통(悲痛)함을 느끼게됩니다.
1979년 10월 26일에 일어난 박정희 대통령 시해(弑害) 사건을 시작으로 대한민국의 권력(權力)을 장악(掌握)한 전두환과 그의 추종(追從) 세력(勢力)인 신군부(新軍部) '하나회'는 자신들의 집권(執權)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집회(集會)와 시위(示威)가 거세어지고 있는 광주(光州)에 특수(特殊)훈련(訓練)을 받은 공수부대(空輸部隊)를 투입하여 광주 시민(市民)들에게 잔학(殘虐)한 살상(殺傷)을 저지르며 진압(鎭壓)을 하였던 것입니다. 신군부의 주장대로 불순세력(不純勢力)이 있었다하더라도 그 이유로 아무 죄도 없는 시민들을 싸잡아 마구잡이로 해친다는게 이게 말이나 되는 건지 그들에게 따지고 싶습니다. 최근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당시 헬기를 동원하여 시민에게 무차별(無差別) 사격을 가했다는 정황(情況)이 그때 사망했던 전남여상(全南女商) 3학년이었던 고(故) 박금희양을 통하여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의해 밝혀 지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권력욕과 정치적인 배경(背景) 속에 자행(恣行)되었던 소름끼치는 상황에서 폭력(暴力) 통치(統治)에 그냥 묻어가기만 해도 크게 흠이 되지 않았던 경찰 간부가 도리어 그들의 명령을 거부(拒否)하고 따르지 않아 어느날 보안사(保安司) 요원(要員)들에 의해 연행(連行)되어 고문실(拷問室)로 끌려가 갖은 고문을 당한 끝에 골병(骨病)이 들어 결국은 죽음을 당해야 했던 피해자(被害者)의 한사람이 남긴 비망록(備忘錄)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다름아닌 당시 전라남도 도경(道警)의 경찰국장(警察局長)이었던 '안병하(安炳夏)'경무관(警務官)입니다. 안병하 경무관은 일제강점기인 1928년, 강원도 양양에서 태어났으며 해방후 6.25 한국전쟁 때에는 육군사관학교 8기 출신(出身)으로서 포병장교(砲兵將校)로 참전(參戰)하여 큰 전공(戰功)을 세워 '화랑무공훈장'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1962년, 정부에서 군 간부를 경찰 간부로 특채(特採)하는 기회가 있어 당시 육군 중령의 계급으로 전역(轉役)을 한 후, 경찰에 첫 입문(入門)을 하였습니다. 곧바로 총경(總警)으로 특채된 안병하는 경찰서장으로 여러 지역을 두루 근무하였으며 1968년에는 이른바 '서귀포 간첩선 침투사건'에서 군 경력(經歷) 경험을 바탕으로 북한군 12명을 사살(射殺)하고 2명을 생포(生捕)하는데 경찰 지휘관(指揮官)으로 큰 공로(功勞)를 세워 표창(表彰)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1971년 경무관으로 승진(昇進)을 하였고 경찰 고위 공무원으로서 그의 앞날은 탄탄한 대로(大路)를 달려가고 있었습니다.1979년 2월, 그는 자신의 마지막이 될 운명(運命)의 전남도경의 경찰국장으로 발령(發令)을 받게됩니다. 사실 전남도는 안병하 국장과는 전혀 연고(緣故)가 없는 지역(地域)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발령지인 전남도 광주에 경찰국장으로 부임(赴任)하여 그의 특유의 성실함을 바탕으로 경찰행정(警察行政)에 만전(萬全)을 기하며 근무를 하였습니다. 경찰 공무원으로서 경찰의 총수(總帥)가 되기까지는 어차피 거쳐가는 과정으로 이곳에서 그가 아무 탈없이 성실하게 근무를 마치면 중앙(中央)으로의 승진과 영전(榮轉)은 시간문제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비껴갈 수 없었던 운명이었는지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재규에 의해 대통령이 시해되었고 이를 틈타 신군부가 전두환을 앞세워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지않아도 시국이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 시위로 시끄러웠던차에 당연히 신군부를 반대(反對)하는 국민들의 항거(抗拒)가 전국적으로 일어났으며 이 시위는 유독 안병하 국장의 근무지(勤務地)인 전남도와 광주시가 정치적으로 더욱 민감(敏感)한 지역이었습니다. 신군부는 먼저 경찰 병력을 동원하여 사태 진압을 하려 했었고 안병하 국장은 지휘관으로써 경찰을 동원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진압 경찰들에게 몇가지 진압 지침(指針)명령을 내렸습니다. "시위 진압시 시민을 위한 안전수칙(安全守則)을 반드시 지킬 것이며 공격적(攻擊的)인 진압보다는 방어적(防禦的)인 진압을 하라" 하지만 신군부는 거듭하여 경찰의 강력한 진압을 명령하였고 이에 응하지 않은 안병하 국장에게 노발대발(怒發大發)하며 강경진압을 하지않은 것에 심한 불쾌감(不快感)을 나타내었습니다.
결국 신군부는 공수부대를 투입(投入)하여 조선대와 전남대를 장악(掌握)하는 것을 선두(先頭)로 무자비(無慈悲)한 강경진압(强硬鎭壓)으로 시민들을 압박(壓迫)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탱크와 군 헬기는 물론 중장비(重裝備) 무기로 무차별(無差別) 사격(射擊)을 가해 무수히 많은 사람들을 죽이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에 항의(抗議)하는 경찰 간부들을 사정없이 구타(毆打)를 하기도 하였으며 신군부는 무고(無辜)한 시민들을 주저없이 죽음으로 내몰았습니다. 시민들도 이에 진압군을 향해 항거를 시작하였으나 모든 것이 빈약(貧弱)하고 훈련조차 받지못한 급조(急造)된 시민군(市民軍)에게는 중무기(重武器)로 무장된 잘 훈련받은 군을 상대하기에는 너무도 벅찼으며 그저 힘없이 죽음을 당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길거리에는 시민들의 죽음이 즐비 하였으며 시민군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많은 희생(犧牲)을 당한 끝에 거의 진압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 와중에도 안병하 국장은 신군부의 거듭되는 강경진압 명령을 거부(拒否)하고 오히려 경찰들의 총기(銃器)를 회수(回收)할 것을 명령하는 등 신군부를 거스르는 행동(行動)을 주저없이 하였습니다. 이같이 경찰이 시민의 안전(安全)을 최우선으로 하는 안병하 국장의 대처(對處)로 전남과 광주지역의 경찰들은 시민들과 큰 충돌(衝突)없이 지날 수 가 있었습니다. 신군부에서는 일단 광주에서의 진압이 성공하자 자신들의 명령을 따르지 않은 안병하 국장을 연행(連行)하였고 그는 악명(惡名)높은 동빙고동(東氷庫洞)에 있는 보안사령부 서빙고(西氷庫) 분실(分室)로 보안요원(保安要員)들에 의해 가차없이 끌려갔던 것입니다.
이곳에서 안병하 국장은 연일 혹독(酷毒)하고 끔찍한 고문(拷問)을 당했으며 결국 그는 강압 속에서도 그의 경찰 부하들을 보호(保護)하는 것을 전제(前提)로 내세우며 자신은 경찰을 떠나기로 하고 사표(辭表) 제출(提出)과 함께 일절 고문에 대한 내용을 발설(發說)하지 않겠다는 약속(約束)을 함으로써 그곳에서 풀려나게 되었습니다. 신군부의 위세(威勢)가 얼마나 등등(騰騰) 했던지 그가 보안사령부 분실로 끌려가 지독한 고문에 시달리고 있을때 경찰 수뇌부(首腦部)나 주변의 동료(同僚) 부하 직원(職員)들 어느 누구하나 그를 구하고자 발벗고 나선이가 아무도 없었습니다. 도리어 경찰 수뇌부 일부는 신군부에 아부(阿附)를 하며 그를 무능(無能)한 사람으로 몰아 세우기까지 하였다니.....
집으로 돌아온 안병하는 그동안의 고문으로 정신(精神)과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고 그 후유증(後遺症)으로 인해 많은 지병(持病)이 생겨 수년간(數年間)의 투병생활(鬪病生活)끝에 결국 그는 1988년 10월 10일 어느 내과의원(內科醫院)에서 혈액투석(血液透析)을 받던 중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청렴(淸廉)했던 그의 성품(性品) 탓으로 강제(强制) 해직(解職)된 이후 오랜 투병 생활이 겹쳐 가족들은 경제난(經濟難)의 어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심한 생활고(生活苦)를 겪어야 했습니다. 노태우 정부 때 유화책(宥和策)으로 이른바 '광주사태(光州事態)'가 '광주민주화운동(光州民主化運動)'으로 평가(評價)되면서 피해자(被害者)에 대한 보상(補償)이 있었는데 이때 해직을 당했던 부하 직원 4명이 자신들을 포함해 상사(上司)인 안병하의 명예회복(名譽回復)을 신청(申請)하였으나 기각(棄却)되고 말았습니다. 뒤이어 신군부 정권(政權)이 물러가고 1993년 문민정부(文民政府)가 들어서면서 5.18의 재평가(再評價)를 통해 그의 신념(信念)으로 광주에서 많은 시민들의 희생을 막았다는 사실에 대한 공로(功勞)가 인정(認定)되어 비로소 순직(殉職)으로 처리가 되었습니다.
그의 비망록을 눈여겨 보면 고문의 후유증 탓에 글씨 조차도 바르게 쓸수 없게된 그의 육신의 고통을 간접적(間接的)이나마 느끼게됩니다. 미망인(未亡人) 전임순 여사의 증언(證言)에 의하면 안병하는 신군부의 발포(發砲) 명령이 내려졌을때 4.19를 떠올렸다고 합니다. 4.19 때 경찰들의 무책임한 발포로 수많은 시민들이 죽거나 다쳤고 이로인해 경찰이 역사 속에 두고두고 불명예(不名譽)를 안고 사는 것이 무엇보다 걱정되었기에 그는 그러한 잘못된 명령에 당당하게 맞서 거부 했다고합니다. 지금도 경찰교육원 강당(講堂)에는 안병하 홀과 차일혁(車一赫:독립운동가이며 빨치산 토벌전에서 큰 전공을 올림) 홀이 있으며 특히 안병하 경무관은 자신의 영달(榮達)을 뿌리치고 용기(勇氣)있는 결단(決斷)으로 수많은 광주 시민을 살린 의로운 경찰관으로써 이는 우리나라 모든 경찰의 정신적 귀감(龜鑑)이 되고 있음은 두 말 할 나위가 없습니다.
군부(軍部)의 전폭적인 도움을 받으며 그들과 가까워질 수도 있었던 육사 8기생 출신인 안병하 경무관은 군사정권(軍事政權)안에서 군 출신이 득세(得勢)하는 열려있는 출세길도 마다하며 자신의 소신있는 결단으로 광주 시민들을 보호(保護)하고 경찰의 명예를 지켜낸 크나큰 업적(業績)을 세운 것입니다. 시국사태(時局事態)가 이 지경까지 진전이 되지 않았다면 그는 어떤 누구보다도 평탄한 출세길을 구가하며 내달렸을 처지에 시기를 잘못 태어난 탓으로 돌리기엔 너무 억울한 생애(生涯)였습니다. 그는 험난(險難)한 길을 가야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당(堂堂)하게 5.18 민주화운동 속에 진정으로 나라를 사랑하고 위민정신(爲民精神)이 깃든 순직(殉職) 경찰관으로서 국립(國立) 서울 현충원(顯忠院)에 안장(安葬)된 것입니다. 비록 자신은 불행한 일생(一生)을 마치고 말았지만 그의 의로운 판단으로 수많은 시민들을 살린 소신(所信)과 용기(勇氣)있는 경찰관으로써 후세(後世)에 두고두고 그 이름과 정신은 역사를 통해 영원(永遠)히 기억(記憶)될 것으로 믿습니다.
세계 어느나라 어디를 가도 경찰은 그 나라의 안녕(安寧)과 질서(秩序)를 지키는 든든한 버팀목의 역할(役割)을 합니다. 비록 저마다 경찰관으로써 지닌 개인의 가치관(價値觀)은 차이가 있을지라도 경찰이 해야 할 일은 세계 어디를 가도 거의 비슷합니다. 묵은지가 재작년 크로아티아를 여행(旅行) 중에 이른 새벽에 산책(散策)을 나와 거닐고 있었는데 어느틈엔가 근처에서 순찰(巡察)을 돌던 경찰들이 내게 다가와 이상유무의 안전을 물었습니다. 오가는 사람이 거의 없었던 이른 새벽길에 때마침 마주친 반가움과 고마운 마음에 사진 촬영(撮影)을 하고 가벼운 담소(談笑)를 나누며 같이 거닐기도 했습니다. 경찰은 이렇게 일상 생활 속에 존재(存在)하는 안전 지킴이입니다. 하물며 신념(信念)이 가득찬 경찰 공무원으로서 안병하는 광주 시민들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한 것은 당연하였으며 매우 올바른 결단력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올바른 처신(處身)을 하고도 이로인해 과욕(過慾)의 미치광이 세력인 신군부에 끌려가 고문의 후유증으로 인해 결국 억울하게 최후(最後)를 마친 것이 너무 가슴이 아플 뿐입니다. 비뚤거린 글씨체로 힘들여 기록한 그의 비망록은 그의 한을 모두 담아 내지는 못했지만 비록 그가 남긴 외침은 작은 외침일지라도 이나라 민주주의 거울 속에 새겨두고 앞으로도 계속 두고두고 기억되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