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보의 ‘살구꽃 피고 술도 익었으니’
말씀드립니다.
며칠 전 아침에 일어나 우연히 책상자 속에 간수해 두었던 시고(詩稿)를 보았다. 그 시고의 갈피에 써 놓은 친구들의 이름을 보니 절반은 이미 저 세상 사람이 되었고, 나머지는 모두 천리 머나 먼 곳에 흩어져 서로 소식조차 듣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그만 절로 탄식이 나왔습니다.
그 동안에 함자진과 오덕진 등 두서너 친구를 만나 나이를 초월하여 사귀어 왔는데, 그들도 역시 먼저 돌아갔습니다. 이들은 다 선배이니 선배가 먼저 가고 후배가 아직 남아 있는 것은 정한 이치라 하더라도 젊은 사람도 또한 믿을 수 없습니다. 사람의 목숨이 이렇게 연약하고 덧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새기게 됩니다.
오직 그대와 내가 다행히 탈이 없어 날마다 함께 놀았는데 아직까지 우정에 틈이 나거나 서로 의심한 일은 결코 없습니다. 그러나 인생은 모이고 흩어짐이 실로 무상하여 오늘 만났지만 내일 또 각기 어디로 흩어질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게 되기 전에 다만 애써 즐거운 일을 꾀할 뿐 이 밖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더 있겠습니까?
지난번 이군의 집에서 술을 마실 때는 정말 즐거웠습니다. 부축을 받으며 집으로 돌아올 정도가 되었으니 참으로 많이 추한 듯합니다. 취중에 무슨 말을 하였는지도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대는 기억하고 있습니까? 나는 오직 술이 거나했을 때 아무 장식도 없는 거문고를 찾아 탔던 것만이 어렴풋이 기억이 납니다.
또 절집 안화사의 환벽정이라는 정자., 그 청수한 곳에서 두차례나 술을 마실 때, 저의 미치광이같이 취한 모습은 실로 가관이었을 것입니다.
요즘 우리집에서 술을 빚었는데. 이제 익어서 자못 향기롭고 텁텁하여 가히 마실 만합니다. 어찌 그대들과 이 술을 마시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지금 붉은 살구꽃 이 반쯤 피었고, 봄기운이 화창하여 사람의 마음을 취하게 하고, 다정다감하게 돋우어 줍니다. 이 좋은 때에 술 한 잔 하지 않으면 어찌 하겠습니까?
바라건데, 이군, 박환고, 등과 함께 부디 오셔서 한잔 하시기 바랍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집 술은 며칠 안 가서 바닥이 날 것이다. 뒤늦게 오면 단지 물만 마시는 곤욕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황송합니다. 머리를 숙입니다.
-與全履之年書여전이지년서에서-
*이규보는 고려싣시대의 유명 문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