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시황(秦始皇)의 아버지? 진시황은 주대(周代)이후 분열된 여러 제후국을 통합하여 천하통일을 이루었다. 많은 서적을 불사르고 또한 많은 선비들을 묻어 죽인 사건, 소위 분서갱유(焚書坑儒)로 인하여 폭군으로 불리지만 분열된 나라가 통합됨으로써 수레나 문자통일 등을 가져왔다. 그는 거의 전설적 시대라 할 삼황(三皇)과 오제(五帝)에서 황(皇)과 제(帝)를 따다 ‘황제(皇帝)’라는 말을 쓰기 시작하여 청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그 용어가 쓰이게 하였다. 처음으로 황제가 되었다 하여 시황이요, 거기에 나라 이름까지 붙어 진시황이라 불리게 된 것이다.
그 진시황이 진나라 왕들의 후예가 아닌 여불위(呂不韋)라는 설이 전해온다. 진시황의 아버지가 조(趙)나라에 인질로 있을 때 이를 도운 여불위가 자신의 여자를 그에게 보냈고 그때 이미 임신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진시황이 임신한 지 12개월인가 13개월 만에 태어났다는 말도 함께 전해진다. 이를 빌미로 성호 이익은 바로 여기에 강한 의문점을 제기한다.
성호(星湖)에 의하면 진시황의 어머니가 그를 잉태한 뒤에 이인(異人 : 진시황의 아버지)에게 시집가서 12달 만에 낳았다고 하지만 시집갈 때 잉태한 지가 겨우 3개월이 되는 셈으로 반드시 그녀가 잉태했다는 것을 알 수 없다는 것이며, 또 열두 달 만에 꼭 낳을 것을 어떻게 알아서 그와 같은 계책을 꾸몄겠냐는 것이다. 그리고 만약 열 달이 못 되어서 낳았다면 이인이 자기의 아들로 여기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다.
성호의 결론은 간단하다. 당시 사람들이 진시황을 너무나도 미워하고 원수로 여기는 데다 여불위가 마침 그의 모친과 간통을 하였기 때문에 억측으로 그런 말들을 만들어 냈을 것이라는 것이다. 전설에 비해 성호의 비판이 나름대로 설득력을 지니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지금 그 진위야 알 수 없지만 천하를 통일한 그 진시황도 결국 그토록 찾던 불사약을 구하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했고, 그가 죽은 뒤 얼마 안 되어 진나라도 바로 망했으니 천하는 힘으로 정복하였는지 몰라도 덕으로 다스리지 못한 까닭에 곧바로 망하게 된 점은 두고두고 역사의 교훈으로 작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