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논제의 해석-소크라테스의 죽음에 대한 영화를 보고
드디어 늙은 맹인은 깊은 산속에서 어린 맹인을 발견했다.
어린 맹인은 눈 덮인 산 위에 넘어진 채 꼼짝 않고 누워 있었고 마치 죽기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 같았다. 늙은 맹인은 어린 제자를 일으켜서 근처 동굴로 데리고 들어갔다. 어린 맹인은 반항할 기운조차 없었다.
늙은 맹인은 땔감을 주워 모닥불을 피웠다. 어린 맹인은 천천히 울음을 쏟기 시작했다. 늙은 맹인은 안심했다. 그는 어린 제자가 실컷 울도록 내버려두었다. 울 수만 있다면 이 아이를 구할 방법이 생길 것이고, 울 수만 있다면 울음을 그칠 때도 있는 법이다.
어린 맹인은 몇날 며칠을 한없이 울었다. 늙은 맹인은 그렇게 조용히 기다리고만 있었다. 산토끼, 염소, 여우, 꿩, 매 따위의 동물들이 모닥불 불꽃과 사람의 울음소리에 놀라 달아났다.
드디어 어린 맹인이 말을 하기 시작했다.
"스승님, 왜 우리는 맹인인가요?"
"그 이유는 우리가 맹인이기 때문이란다."
"눈을 떠서 세상을 한번 보고 싶어요. 단 한번만이라도요."
"정말 눈을 뜨고 싶으냐?"
"네, 정말요."
모닥불이 활활 타올랐다. 눈이 그쳤다. 태양은 엷은 회색 하늘에 반짝이는 작은 거울 같았다. 매 한 마리가 하늘 위를 평화롭게 선회하고 있었다.
"그럼, 삼현금을 켜거라. 한 줄 한 줄 정성을 다해 켜거라."
"스승님, 약은 지어오셨어요?"
어린 맹인은 방금 막 잠에서 깨어난 사람 같았다.
"기억하거라. 온 정성을 다해 삼현금을 켜야 한단다."
"이미 눈을 뜨셨나요? 스승님, 지금 제가 보이세요?"
어린 맹인은 발버둥 치듯 두 손을 뻗어 스승의 눈을 만지려고 했다. 그러자 늙은 맹인은 어린 제자의 손을 꽉 붙잡았다.
"기억하거라. 천이백 줄을 끊어야 한다."
"천이백 줄이라고요?"
"삼현금을 이리 다오. 이 처방문을 네 삼현금 울림통에 넣어줄 테니."
늙은 맹인은 비로소 그의 스승이 자신에게 했던 말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인생은 이 현과 같다는 것이었다. 삶의 목적은 비록 허구이지만 살아가는 데 있어 반드시 필요하다. 그렇지 않다면, 어찌 현을 팽팽하게 죌 수 있을 것인가. 현을 팽팽하게 조일 수 없다면 삼현금도 제대로 켤 수 없는 것이다.
"왜 천이백 줄이나 끊습니까?
"천이백 줄이다. 내가 천 줄로 착각했었구나."
늙은 맹인은 생각했다. 이 아이가 아무리 삼현금 연주를 많이 한다 해도 살아서는 천이백 줄을 다 끊을 수 없으며, 그렇게 영원히 생명의 현을 팽팽하게 조여야 할 거라고. 그러한 까닭에 그 백지장을 볼 필요는 없는 거라고....
이곳은 외지고 황량한 첩첩산중으로 숲속에는 늘 꿩 한 쌍이 날아다니고 산토끼, 여우 따위의 산짐슴들도 뛰어다닌다. 산골짜기 위로는 매 한 마리가 유유히 선회하고 있다.
지금 우리는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간다.
....
(史鐵生 소설 '현 위의 인생' 중, 이혜임 옮김)
좋은 이야기는 잘 잊혀지지 않은 채 특정한 인식과 신비로움을 나타낸다. 내 삶에서는 오래 된 중국영화 <현(絃) 위의 인생(string on the life)>이 그러하다. 지금은 어지간한 노력을 통해서도 영화 파일조차 구해보기 힘든 이 영화의 줄거리는 대략 이러하다.
옛날 중국 어느 곳에 늙은 사부에게서 현을 배우던 눈먼 소년은 스승으로부터 눈을 뜨게 할 수 있는 비방이 있다는 상자를 유물로 받지만, 그 상자를 열려면 일천번째 현이 끊어져야 한다. 세월이 흘러 노인이 된 소년은 현이 끊기는 날만 기다리며 눈먼 제자 시두와 유랑생활을 한다. 그의 현은 신기에 가까웠고 싸움이 있는 곳에 평화를 가져오는 신통력마저 생겨 성자로 추앙받는다.
그러던 중 노인과 시두는 한 마을에 머물게 되는데 시두는 란수라는 소녀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노인은 이제 몇 개 남지 않은 현이 끊기기만을 기다린다. 그러다 마침내 마지막 현이 끊기지만, 처방전은 빈 종이일 뿐., 세상의 빛을 보기 위한 꿈이 깨져버린 성자는 비로소 인생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고 시두의 품에서 영원한 휴식을 취한다
이렇게 길게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도대체 이 영화의 해석이 어렵기 때문이다. 해석의 문제가 다소 어렵지만 중요한 이유는 토론을 하는 본질과 핵심 즉 주제를 어떻게 보는가와 연결되기 때문이다.
토론의 시작은 어디서부터일까? 입론? 개요서?
나는 개인적으로 ‘주제’라고 생각한다. 주제가 주어지는 순간 인간은 쪼개진다. 때로 만장일치의 경우도 있겠지만 인간의 역사에 완벽한 일치란 존재하지 않는다. 무수히 많은 유사와 차이가 존재할 뿐.
그런 점에서 토론은 차이의 바탕 위에서 벌이는 한 판의 칼춤 같은 것이기도 한데, 이는 주제가 던져지는 순간 다양한 형태로 갈라지기 시작하는데서 출발한다. 하나의 주제를 왜 사람들은 다르게 접근할까? 그 본질이 무엇인가를 냉철하게 보여주는 영화가 구로자와 아키라의 기념비적 영화 <라쇼몽>이다.
동일 시간, 동일 현장에서 일어난 일조차 각자가 서 있는 삶의 자리가 다른 까닭에 다르게 해석되고 진술되는 기이한 일이 벌어진다. 인간이란, 근본적으로 차이의 존재들이다.
토론이란 무엇인가? 논리의 싸움이다. 논리란 무엇인가? 주장과 근거의 타당성을 아성적이고 합리적인 언어로 연결하는 작업이다. 달리 말하면 던져진 주제에 대한 인식의 언어화다. 그 바탕에는 주제에 대한 해석의 고유성이 깔려 있고 그런 점에서 결국 토론은 해석의 싸움이다. 근거란 그 해석을 뒷받침해주는 핵심 자료일 뿐이다. 더 나아가서는 해석을 만들어가는 입장의 차이까지를 고려한다면 토론이란 입장(立場), 즉 서있는 자리의 싸움이기도 하다. 냉정하게 말해 토론이란 자리 싸움이다. 때론 이익을 때론 진리를 다투는 자리의 정당성을 놓고 벌이는 한 판의 싸움 그것이 토론이다.
자리에 근거한 싸움, 그걸 풀어나가는 열쇠인 해석, 그 해석의 어려움과 중요성을 같이 생각해보자. 입장의 차이에 따른 해석의 갈라짐을 보고 싶다면 <라쇼몽>을 권하지만 그 영화는 토론의 전사 00권에서 간단히 다루었으므로 여기서는 다른 영화 한 편을 소개하면서 해석의 문제를 언급하고 토론에서 논제 분석이 왜 중요하지를 말하고자 한다.
우선 유명한 소크라테스의 유언에 대한 해석부터. 그의 죽음을 다룬 단편 영화 하나를 소개한다. 스님으로서 불교의 사상을 대중들이 쉽게 이해하게 하려고 여러 편의 영화를 만들어오신 00사 대해 스님이 제작하신 영화다. 제목은 <소크라테스의 유언>. 우리가 잘 아는 소크라테스의 죽음에 대한 스님의 해석을 영화를 통해 만나보자.
- 소크라테스는 왜 그런 유언을 남겼을까?
장면1
한 사람이 죽었다. 네 명의 친구가 먼저 떠난 친구의 넋을 위로하며 강물에 재를 뿌린다. 말없이 허공만 바라보는 친구들. 그들이 나눈 대화는 자못 무겁다.
“사는 게 뭔지, 죽는 게 뭔지”
“사람이 죽을 때를 보면 한 평생을 어찌 살았는지 안다고 하던데 그렇게 죽기 싫어 발버둥치시더니만 결국 저렇게 한 줌 재가 되고 말 것을. 다음은 누구 차례일까요?”
“어렸을 때 말이에요,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알고부터 저도 그렇게 의연히 죽고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맞아요 저도 성인들의 유언에 관해서 연구를 하다보니까 성인들이 죽음을 맞이하는게 일반인들하고는 차원이 다르더라고요. 그러데 이게 부처님 유언도 이해가 되고 예수님 유언도 이해가 되는데 이 소크라테스 유언은 전혀 이해가 안되네. 혹시 파이돈 읽어보았어요?”
“그럼요 읽어봤지요.”
“아, 아니 난 말은 대충 들어봤는데”
“이 보시게 그 유언은 무슨 내용이신가?”
“소크라테스가 죽기 전에 ‘아스클레피우스한테 닭 한 마리를 빚 졌으니 내 대신 갚아주게나,’ 이런 유언을 남겼답니다.”
“아스클레피우스는 뭐하는 사람이야?”
“의술(醫術)에 신입니다.”
“의... 의신.”
“고대 그리스에서는 자신의 병이 다 나으면 아스클레피우스한테 닭 한 마리를 바치는 풍습이 있었죠.”
“아~”
“소크라테스는 그리스의 젊은이들을 오염시키고 다른 신을 모신다는 죄로...”
장면2
소크라테스 사형! 땅땅땅
장면이 바뀌면 동굴 속에 소크라테스와 그 제자들이 사형 선고를 받은 소크라테스 곁을 지킨다. 소크라테스 담담한 표정으로 여제자들을 물린다. 몇몇의 아주 가까운 친구와 제자들만 남아 주변을 지킨다.
“잘 들어보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영혼이야. 혼이 최대한 훌륭하게 되도록 혼을 보살펴야만 하네. 어떻게 해야 혼이 최대한 훌륭하게 될 수 있는지 그 기능을 캐묻고 찾지 않는 사람은 살 가치가 없지. 혼이 죽음에 닥친다 해도 그것이 소멸할 수는 없네. 왜냐 하면 혼은 죽음을 받아들이지도 않고 죽은 상태의 것이 될 수도 없지. 사람에게 죽음이 닥칠 경우 그 사람이 소멸하게 되는 부분은 죽게 되지만 죽지 않는 부분은 온전한 상태로 불멸하는 것으로서 떠나가 버리지”
“여보게 말을 많이 하면 독약이 잘 듣지 않는다는 게야. 그럼 독배를 두 잔이나 세 잔 마실 수도 있다네.”
“허허허. 걱정하지 말게 두 잔이고 세 잔이고 마시면 되지 않는가. 될 수 있는 대로 죽음의 상태에 가깝게 살려고 애쓰는 사람이 막상 죽음의 상태에 당면해서 죽음을 마다한다면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허허허허. 어서 독배를 가져 오게
(문을 지키던 문지기 독배를 들고 온다. 소크라테스 문지기를 향하여)
여보게 간수, 자네는 이런 일들에 관해서 잘 알고 있을 텐데 내가 뭘 해야만 하나?“
“예, 마시고는 이리저리 거닐기만 하시면 됩니다. 선생님의 양 다리에 무거움을 느껴지게 될 때까지는요. 그리고 그 다음에는 누우시면 됩니다. 그렇게 하시면 약이 절로 작용할 겁니다.”
(소크라테스 얼굴에 인자한 웃음을 머금고)
“여보게 간수 고수레를 해도 되오?”
“안됩니다. 저희는 딱 치사량만큼만 만들었습니다.”
“알겠소. 하지만 이승에서 저승에로 이주가 잘 되는 것은 내가 빌겠소.”
(소크라테스 담담히 독배를 든다. 약이 남김 없이 마신다. 흐느끼기 시작하는 제자들)
“이상한 사람들 다 보겠네. 내가 이럴 까보아 여자들을 먼저 돌려보낸 건데.
(소크라테스 일어서서 천천히 걷는다. 독약이 몸에 퍼져나가도록 하기 위한 행동이다.)
울지들 말게, 사람은 숙연한 가운데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고 나는 들었네. 조용히들 하고 의연하게... 다리가 이제 좀 무겁군.” (평상에 앉는다.)
간수에게 손을 내민다.
“비가 오는군.”
“감각이 있으십니까?”
“아니. 아무 감각이 없군.”
“이런 현상이 심장에까지 이르면 그 때, 완전히 돌아가시는 겁니다.”
간수, 천을 가져다가 덮어준다. 한 제자가 얼굴도 천으로 덮어준다.
(소크라테스, 천천히 얼굴의 천을 치우고는 크리톤을 부른다.)
“크리톤, 두 잔이고 세 잔이고 필요 없었네. 한 잔이면 충분하군.
내가 아스클레피우스한테 닭 한 마리를 빚 졌거든. 그대가 내 대신 좀 갚아주게나.“
“알겠네. 또 다른 할 말은 없는가?”
빗소리 간간히 들려오는 가운데 소크라테스 조용히 숨을 거둔다.
장면 3
다시 이 이야기를 나눈 4명의 친구들의 대화가 이어진다.
“지금까지 제 이야기 잘 들으셨죠. 제가 아까 궁금하다고 말씀드린 거요.
의신에게 닭을 좀 바쳐달라고 한 거 있잖아요. 다른 사람들도 잘 이해가 안되는 것 같더라고요. 정확한 답을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해가 되게 말하는 사람도 없었고 너무 미스테리 같아요. 누가 좀 이해가 확 되게 말씀 좀 해주시죠.”
“제 생각에는 말이에요 이미 사형 선고를 받았고. 인생의 고통에서 벗어나게해 주었으니 감사하다는 뜻으로 의신에게 닭을 바쳐달라고 한 건 아닐까요? 왜, 인생은 고통이고 거기서 벗어나야 한다고 하잖아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드는 현문)
“우리 현문의 생각을 들어봅시다.”
“저는 정확하게 이해는 안 되지만 예전에 그리스에서 병이 다 나으면 아스클레피우스한테 닭을 바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관습을 잘 따랐고 확실한 사람이었죠. 그렇다면 예전에 소크라테스가 병이 나았는데 깜빡 잊었던 게 죽기 전에 생각났던 게 아닐까요?”
“근데 이건 좀 다른 이야기인데 난 소크라테스가 부러워. 자기 자신에 대한 애착이 전혀 없는 것 같잖아. 난 손주들 결혼하는 것도 봐야 하고, 집필하던 책도 마쳐야하고 해야 할 일이 많아. 죽는다는 건 나한테 거 해당 사항이 없는 것 같은데 친구들이 한 명씩 한 명씩 저 세상으로 가는 걸 보면 나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고 죽어서 어디로 갈지도 모르겠고 생각만 해도 두려워. 그런데 말이야, 소크라테스가 어찌 그리 의연할 수 있었을까?”
“하이고 참, 유언에 대해서 말씀하시라니까요? 소크라테스의 그 유언이요.”
“아, 그거 궤변 아니야 궤변. 소크라테스는 궤변가잖아. 죽다가 왜 그런 말을 했겠어. 끝까지 궤변을 하는 거지.”
“허허허 허, 참”
“이보시게들. 내가 생각하기로는 소크라테스는 성인인데, 성인에 걸맞는 유언을 하지 않았겠는가. 내가 그 내용을 듣고 보니 소크라테스가 혼의 불멸성에 대해서 열정적으로 토론하는 것을 보고 크리톤이 말을 많이 해서 흥분하면 독약이 잘 안들어서 두 잔 세 잔 마셔야 되니 말을 많이 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실제로는 열정적으로 말을 많이 했는데도 한 잔만 마시고도 몸이 다 죽어갔잖은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심장만 남았을 때 천을 들쳐서 ‘두 잔 세 잔은 필요 없었네, 한 잔으로 충분하네’ 하고 아스클레피우스에게 닭 한 마리를 갚으라고 유언을 하셨는데 그 뜻은 약을 정말 잘 지어서 약의 효능이 엄청 좋다는 뜻으로 그래서 의신에게 감사의 닭을 올리라고 한 것 같은데.”
“아, 쉽게 말해서 약발이 잘 받았다는 말씀이네요.”
“아, 법공 말씀이 딱 맞네요. 독약도 약이네요.”
“그러게요, 인간의 옷을 빨리 벗게 하는 약이네요. 그럼 그냥 헌 옷을 벗는 거군요.”
“헌 옷을 벗는다고?”
“보이는 육신은 그저 옷일 뿐이고 중요한 것은 어떻게 사느냐 하는 것이네. 소크라테스는 평생 너 자신을 알라고 하시면서 우리의 참 마음으로 깨어날 것을 가르치셨네.”
“그게 늘상 듣는 말이긴 한데, 남의 죽음에 대해서 말하기는 쉽지만, 막상 내가 죽는다는 생각을 하면 헌 옷을 벗는다는 생각이 안 듭니다.”
“이 보시게나 무구, 지금 보이는 모습은 사라져 버리지만 보이지 않는 참 영혼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는가.”
“법공을 보면 늘 의연하셔서 참 부럽습니다. 잘은 모르겠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는 마음이 없으시잖아요.”
혹시 소크라테스가 환생하신 거 아닙니까?
법공 : 크게 웃는다. “하하하하”
무구 : “그렇네. 그럼 난, 그리톤인가? 아직도 생에 대한 애착이 이렇게 많으니.”
다 같이 하하하하 웃는다
“영혼은 불생불멸 하는 것이기에 죽음이 끝이 아니지. 다만, 흔히 사람들이 말하는 죽음은 소멸하는 것으로 여기니 끝이라고 하지만 죽음에서 삶이 생기고 삶에서 죽음이 생기지. 소크라테스도 그걸 알았기에 두려움이 없었던 게 아닐까. 오고 갈 자리를 알면 무엇이 두렵겠는가!”
“맞아요. 저도 어디로 갈지 몰라서 두려웠어요. 헌 옷을 벗고 새 옷을 입는다면 두려울 게 없네요. 저도 소크라테스처럼 제가 돌아갈 길을 이제 편안히 갈 수 있겠네요.”
“우리도 소크라테스처럼 의연하게, 우리가 돌아갈 길을 가야하지 않을까?”
“그렇죠.”
“인제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이제 모두 의문이 풀렸지요.”
“예.”
“오늘 정말 의미 있는 이야기를 나눈 것 같네요.”
“자 그럼 우리 일어날까요?”
지는 해를 뒤로 하고 천천히 언덕을 내려가는 네 사람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에 다음과 같은 자막이 나온다.
사리자여 모든 법은 공하여 나지도 멸하지도 않으며
더럽지도 깨끗하지도 않으며
늘지도 줄지도 않느니라.
그러므로 공 가운데는 색이 없고
감각, 지각, 의지적 행동, 인식 작용도 없으며
늙고 죽음도, 늙고 죽음이 다함까지도 없고
지혜도 얻음도 없느니라.
얻을 것이 없는 까닭에
보살은 참 마음을 의지하므로
마음에 걸림이 없고
걸림이 없으므로 두려움이 없어서
뒤바뀐 헛된 생각을 멀리 떠나
완전한 열반에 들어가느니라.
-반야심경 중에서
영화는 이렇게 마친다. 짧은 대화를 통해 소크라테스의 죽음과 그 유언의 의미를 간명하게 보여주는 영화다.
우리는 대개 낯선 이야기에서 독특한 상황이나 질문을 접하면 해석의 어려움을 느낀다. 위의 영화에서 대해 스님은 불교의 진리를 말하기 위해 소크라테스의 일화를 활용했다. 일종의 해석이다. 일견 일리가 있는 멋진 해석이지만 이 해석만이 진리라는 보장은 없다. 라쇼몽 사례에서 언급했듯이 사람들마다 자기가 선 자리, 마음과 경험에 따라 달리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누구의 해석이 더 의미가 있고 깊이가 있나가 중요한 것이다. 이견이 있을 때 벌어지는 토론의 현장, 토론이란 이런 해석의 싸움이다.
토론의 주제가 주어지면 개요서와 입론서를 작성해야 한다. 개요서에 반드시 들어갈 내용 가운데 용어정의가 있는데 이 부분이 바로 해석의 출발점이다. 같은 단어라도 어떻게 해석하는가가 입장, 근거, 논리를 만들어가는 기준 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자.
전국의 학생들이 동시에 시험을 쳐서 학력을 검사하는 ‘국가수준 학업성취도평가’라는 것이 있었다. 전교조를 포함해서 많은 교원단체와 교사들, 학부모들이 반대했지만 고등학교 2학년생과 중학교 3학년생을 대상으로 하는 이 평가는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다. 초등학교 6학년도 처음에는 대상에 포함이 되었다가 이제는 제외되었다.
만약 지금 시점에서 ‘국가수준 학업성취도평가를 폐지해야 한다’라는 주제로 토론을 한다고 가정해보자. 그럼 토론을 준비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하는가? 당연히 자료를 찾아야 한다. 교과부에서 이 제도를 시행하기 위해 진행한 공청회 자료라든지, 취지가 담긴 시행령, 언론에 발표했을 때의 반응이 담긴 사설이나 기사 등등.
그 다음에는 개요서를 작성한다. 말했듯이 이 단계에서 본격적인 논제 분석이 필요하다. ‘국가수준 학업성취도평가’의 정의를 내려야 하는데 이 단어에 대한 해석이 개입해야 하는 순간이다. 객관적인 자료 단계를 지나 주체적이고 주관적인 자기화의 단계를 맞이하는 과정이라고나 할까. 그래서 이 단계가 중요하다. 진정한 의미의 나, 새로운 페르소나의 나를 만나야 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국가수준 학업성취도평가’라는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찬성과 반대로 나누다면 크게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이 제도를 찬성하는 입장에서 ‘국가수준 학업성취도평가’를 말 그대로 해석하는 길이고 혹은 그 반대의 길이다. 찬성측이라면 국가 혹은 국가수준, 학업이나 학업 성취도, 평가의 개념과 의미를 최대한 잘 살려서 해석을 해야한다. 사전적 해석을 해도 좋고 사회적 의미와 파장을 연결지어 해석을 내리는 것도 가능하다. 그렇다면 반대측은 어떨까?
반대측은 주어진 논제의 ‘국가수준 학업성취도평가’라는 말을 부정하는데서 출발한다. 용어 자체가 객관성을 담보하지 못하므로 반대측은 ‘국가수준 학업성취도평가’라는 말 대신에 ‘일제(一齊) 고사’라는 말을 사용하겠다고 주장한다. 모든 학생들을 강제로, 획일적으로 모두 시험에 참여하게 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의미가 강하게 들어간 말이다. 실제로 전교조 교사들 가운데 자기 자녀를 못 보게 하거나 교사로서 일제고사를 거부해서 파면에 이르렀다가 다시 학교로 복직한 사례도 있다. 이들에게 ‘국가수준 학업성취도평가’는 학생들의 학력을 무작위로 재단하고 학생들을 줄세우는 비교육적 제도라고 해석했기 때문이다.
‘국가수준 학업성취도평가’도 하나의 제도이기 때문에 만든 측에서의 의도가 있고 그 의도나 결과의 진정성과 문제점을 고려한다면 이를 찬성하는 사람들이 있고 또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다. 찬성을 하든 반대를 하든 이유와 근거가 무엇인지, 상대를 설득할 수 있는 논리가 필요한 것이고 소통을 통해서 최선의 좋을 결과를 만들어내는 일이 중요하다.
하여간, 해석이란 이렇게 중요하다. 토론의 근본 취지와 의미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토론의 커다란 줄기가 형성되고 그 안에서 세부적인 가지가 쳐지기 때문이다.
결론을 알 수 없는 낯선 이야기를 던져놓고 다양한 해석을 요하는 문학과 딜리 토론은 칼로 베듯이 이쪽과 저쪽을 명확하게 가르는 과정이라 해석의 여지가 좁다고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소크라테스의 유언 하나만을 놓고도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듯 세상이 반드시 양자택일적으로만 나뉘는 것은 아니다.
‘대형 마트의 판매 품목을 제한해야 한다’. ‘일반 학교에서 청소년 미혼모의 보육권을 보장해야 한다.’ 영화 <더 그레이트 디베이터스>에 나오는 ‘흑인들도 텍사주의 대학에 입학을 허가해야 한다’나 ‘시민 불복종은 정의를 향한 싸움에 도덕적 무기인가’ 등을 보면 주어진 용어들, 대형파트, 제한, 일반 학교, 보육권, 흑인, 도덕의 개념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논리가 전개 가능하다. 요는 논제를 바라보는 눈, 자리, 입장이 중요한 것이다.
대립 토론에서의 입장은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정해지기 때문에 토론에서 진정성을 갖기도 어렵고 해석의 다양성도 보장받기 쉽지 않다. 대체로 이것이냐 저것이냐 양자 택일을 요구받기 때문이다. 이럴 때도 그 입장에 충실한 해석은 필수 과정이다.
만약 대립토론일지라도 화이부동과 상호공생의 토론의 윤리를 생각한다면 주어진 자리에서 함께 살아나가기 위한 입장의 고려와 해석의 방향은 고민을 해야 한다. 왜? 토론은 논리의 싸움이면서 동시에 윤리의 전쟁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첫댓글 등업을 위해 이런저런 최근 쓴 글들 올립니다. 나눔을 위해 앞으로 종종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