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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산집에 .연도(燕都)는 천하의 북쪽에 자리한 옛날 변방의 요새로 큰 사막의 접경에 있는 고을이라 일컬어지던 곳인데, 사람들은 제(齊)나라와 노(魯)나라의 풍속이 드물고, 그 지역엔 숭산(嵩山)과 낙양(洛陽)의 승경도 없어 다만 궁실과 성시로 그 부유하고 화려함을 과시한다. 우리나라와 땅이 가장 가까워서 다만 작은 강 하나를 떨어졌을 뿐으로, 사신의 수레가 조석(朝夕)으로 왕복하니 유람의 장엄함과 이별의 괴로움이야 어찌 말할 만한 것이 있겠는가?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권 / 경도 상(京都上),,,,,옛날을 살펴보면, “그 나라는 서너 나라로 봉해졌는데, 지금은 하나만이 존재한다.”고 하였다. 신라(新羅)ㆍ백제(百濟)ㆍ탐라(耽羅)가 지금은 다 그 소유가 되었다. 생각건대, 앞 사람의 실패한 자취를 밟지 않았으니, 그 까닭은 당시대의 깊은 은혜를 홀로 입었기 때문이다. 조서(詔書)로써 나라 세운 것을 허락하여 독자적으로 덕화를 펴게 하니, 본조 홍무(弘武) 2년에 고려국의 왕 왕전(王顓)이 표(表)로써 즉위(卽位)를 축하하여 조서로 독자적으로 교화를 펴도록 허락하고, 구뉴(龜紐)와 금인(金印)을 내려주었다【本朝洪武二年,高麗國王王顓表賀卽位。詔許自爲聲敎,賜以龜紐金印。】
.> 고전번역서 > 연행록선집 > 동환봉사 > 동환봉사 > 올리려던 16조의 상소[擬上十六條疏] > 최종정보
아! 이 수십 만이라는 것이 모두 정병(精兵)이라 하더라도, 가령 전조(前朝)의 말에 왜선(倭船)이 하삼도(下三道)와 경기ㆍ황해에 운집(雲集)하고, 몽고의 홍건적(紅巾賊)이 양계(兩界)에서 봉기(蜂起)하듯 한다면 이 20만으로는 능히 분담하여 방어하지 못할 것이 명백합니다.設如前朝之季。倭船雲集於下三道。畿,黃之境。蒙古紅巾。蜂午於兩界之地。
봉기[蜂起] 뜻이 맞는 사람들이 벌떼처럼 떼 지어 세차게 들고일어남
兩界: 고려와 조선 시대의 특별 행정 구역으로, 평안도 지방인 서계(西界)와 함경도 지방인 동계(東界)를 아울러 이르는 말.
유방집(遺芳集) 독립운동가 82인의 열전 / 열전 2 최익현전〔崔益鉉
고려 말에 이르러서는 북쪽으로 원 세조(元世祖)를 꺾어 버렸으니 여덟 번이나 군사를 일으켰는데도 이에 대항하였다.
잡지명 삼천리 제13권 제4호 발행일 1941년 04월 01일
意志는 조금 틀리나 蒙古族은 支那에 들어 오잖었다고 그래서 그 영향은 맞지를 않으나 다른 民族이 다 영향을 받었다.
동광 제36호 1932년 08월 01일 地下에 秘藏된 金銀寶貨, 千古秘密 蒙古의 寶山, 朝鮮 先民의 남긴 遺物, 그 秘鍵은 누구의 손으로 열릴까
高麗族의 유적 그런데 이 寶山의 전설로써 于今에 傳하는 바에 의하면 이 지방은 북으로 산을 끼고 남으로 열리어 小河가 흐르고 잇어 實로 沃野千里이나 이 땅이 金遼시대에 벌서 高麗族의 손으로 개척되어 당시에는 극히 융성한 바 잇엇다 한다. 지금에도 高麗 城跡이 3개소 鼎足의 형으로 존재하엿든 터전이 남어잇다. 듣는 말에는 元朝가 일어나매 高麗族은 맛츰내 戰敗되어 그곳을 떠나지 않을 수 없이 되어 그곳에 잇든 3城主는 자기들의 소유물인 金銀財寶가 그대로 敵手에 들어갈 것을 참을 수 없어 세 城主는 서로 의논하고 비밀히 각각 자기들의 보화를 한데 뭉치어 이 小山에다가 깊이 매장하여 버렷다.
승정원일기 > 영조 > 영조 1년 을사 > 6월 25일 > 최종정보
나라의 관문인 평안도를 바라보니 우리나라의 가장 중요한 번(藩)이로다. 국경은 노룡현(盧龍縣)의 옛터와 접하고 한 줄기 긴 강을 한계로 삼는다.
조선왕조실록 > 숙종실록 > 숙종 13년 정묘 > 3월 22일 > 최종정보
신(臣)이 태극 달자(太極㺚子)들의 소식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여기에 온 사자(使子)가 말하기를, 「섬서(陝西)와 산서(山西)는 원래 우리 땅이므로 만일 내놓지 않는다면 마땅히 무기(武器)를 가지고 일을 해내겠다.」
동문선 제126권 / 묘지(墓誌)
한문경공 묘지명 병서 (韓文敬公墓誌銘) 幷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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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색(李穡)
내 나이 16ㆍ7세에 시승(詩僧)을 따라 놀기를 좋아하여, 한 번은 묘련사(妙蓮寺)에 이르러서 선비와 중들이 섞여 앉아서 차를 마시면서 연구(聯句)의 시를 지었는데, 그때에 문경공(文敬公)이 아직 12ㆍ3세의 동자로서 매양 척척 대구(對句)가 되는 연구시를 불러서 좌중의 여러 사람들이 모두 경탄하였으며, 비록 문묵(文墨)에 늙은 자라도 그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감히 같은 서열에 낄 생각을 못하므로 나는 벌써 마음속으로 보통 사람과는 달리 알고 있었다. 정해년에 나의 선군(先君)이 지공거(知貢擧)로서 과거를 관장하였는데, 문경공(文敬公)이 과연 높은 성적으로 급제하였으니, 그때의 나이 겨우 15세였다. 낙제한 자들도 그의 재주에 굴복하여 이르기를, “한생(韓生)은 요행으로 된 것이 아니다.” 하였다. 이보다 앞서 문벌에 의한 음직(蔭職)으로 두 번이나 진전직(眞殿直)과 별장이 되었기 때문에 벼슬을 구하지 않고, 고서(古書)의 토론을 좋아하였고 또 익재선생(益齋先生)에게 가서 《좌전(左傳)》과 《사기(史記)》ㆍ《한서(漢書)》 등을 읽었으며, 글씨 쓰기를 익혀서 진서(眞書)와 초서(草書)가 다 정묘한 경지에 이르렀었다. 충정왕(忠定王)이 즉위하고 공을 덕녕부 주부(德寧府注簿)에 보직하고, 정방(政房)에 불러다 두고서 비도적(秘闍赤)으로 삼았다. 신묘년에 왕이 왕위를 내놓고 강화도로 가서 공이 따라가 있었는데, 공민왕이 불러서 돌아왔으나 즉시 쓰지 않았다. 계사년에 이르러서 비로소 전의 주부(典儀注簿)에 제수되고 또 비도적이 되었으며 다음해에 전리좌랑 지제교가 되고, 또 다음해에 두 번 계급을 올려서 통직랑 성균직강 봉선대부 성균사예에 임명되었는데, 모두 예문응교를 겸임하게 하였다. 병신년에 관제(官制)를 고쳐서 중산대부 비서소감 지제고가 되고, 다음해에 병부시랑 한림대제로 옮겼으며, 가을에는 직학사(直學士)에 승진하였고, 또 그 다음해에 중정대부 국자좨주 지제고에 올랐다. 신축년에 왕이 사적(沙賊)을 피하여 안동으로 가니 따라가서 전의령과 전교령에 두 번 전직되었는데, 다 중정의 품계였으며, 다음해 가을에 서울로 돌아와서 봉순대부 판사복시사 우문관직제학에 승진되었다. 겨울에 밀직사좌부대언 보문각직제학 지공부사에 임명하니, 이는 대개 공을 등용하여 인사의 전선(銓選)을 맡게 하려는 것이었다. 다음해에 우부대언에 오르고, 또 좌대언에 올랐다.
동문선 제127권 / 묘지(墓誌)
유원 자선대부 태상 예의원사 고려국 추충수의 동덕찬화공신 벽상삼한 삼중대광익산부원군 시문충 이공 묘지명 병서 (有元資善大夫大常禮儀院使高麗國推忠守義同德贊化功臣壁上三韓三重大匡益山府院君諡文忠李公墓誌銘 幷序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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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색(李穡)
이해에 현릉(玄陵)이 스스로 불러 동성도사(東省都事)로 삼으니, 황제의 칙첩(敕牒)을 받고 황제의 궁궐에 들어가서 사은하였다. 그러나 얼마 안 되어 이를 사직하고 나가지 않았으며, 삼중대광(三重大匡)에 승진되어 익산부원군(益山府院君)에 봉하였다. 신축년에 사적(沙賊)이 우리 북방 변경을 침범하여 공이 죽전(竹田)에서 이를 막았으나, 서울이 함락됨을 보고 공은 단기(單騎)로 중원(中原) 행궁으로 달려가니, 임금이 몹시 기뻐하여 후한 예로 대하였다. 임인년 6월에 찬성사에 임명되어 판판도사사 예문관대제학 지춘추관(判版圖司事藝文館大提學知春秋館)으로 승진되었다. 이해에 사적(沙賊)이 붕괴되어 달아났으나, 서울이 병란에 파괴되어 모든 일을 새로 창설해야 했다. 공이 명을 받고 와서 인재(人材)와 일의 완급을 헤아려 방략(方略)을 지시해 주니, 조정에는 폐지된 정사가 없었고 돌아오는 자는 위로하고 안정되게 거주할 수 있도록 양식과 종자를 안배하여 분급하니, 들에는 노는 백성이 없었다. 종묘의 제사를 받들고 또 선성(先聖)과 선사(先師)에게 제사드리고, 생도들을 국고의 양곡으로 먹이니 내외(內外)의 학교가 다 풍족하여 예절과 풍속을 인도해 이루고 인재를 양육하게 하였으며, 대개 무예를 강론하는 것과 군마를 쉬게 하고 치도를 논하는 것에 대해서도 깊이 터득한 점이 있었다. 계묘년에 임금의 거가를 맞아 서울로 돌아오니, 간신(奸臣) 최유(崔儒)가 덕흥군(德興君)을 추대하고 원 나라의 권력을 가진 자에게 붙어서 현릉(玄陵)의 폐위를 계책하여 황제의 명을 받고 실행하려고 하였다. 임금이 공에게 명하여 표문을 받들고 북경으로 가게 하고, 밀직제학(密直提學) 허강(許綱)으로 보좌하게 하였다. 공이 길을 출발하여 서경(西京)에 이르러 태조 원묘(太祖原廟)에 나아가서 두 번 절하고 맹서하기를, “우리 임금님이 복위하지 못하시면 신(臣) 공수(公遂)는 죽음을 맹서하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오지 않겠습니다.” 하였다.
중종실록 103권, 중종 39년 5월 27일 甲子 1번째기사 1544년 명 가정(嘉靖) 23년
.특진관 상진(尙震)이 아뢰기를,
"왜노를 거절하기로 이미 조정 의논이 정해졌습니다마는, 신의 생각을 계달해 보겠습니다. 왜노들이 오가면 한갓 각 고을들만 폐해를 받게 되는 것이 아니라, 도해량(渡海糧)264) 및 상품[商物] 무역이 한량 없어 참으로 크게 손해가 되니, 이번의 미미한 사단이 생긴 기회에 거절하는 것이 좋을 듯하기는 합니다. 다만 제왕(帝王)의 사람 대우하는 도리는 너무 각박하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이어서, 천자는 제후에 대해 한 차례 조회하지 않느면 작위를 낮추고 두 차례 조회하지 않으면 영토를 깎고 세 차례 조회하지 않은 다음에야 육사(六師)265) 를 출동하는 법입니다. 또 도둑을 다스리는 법으로 보더라도 초범(初犯)·재범·삼범이 각각 율(律)이 다르게 되어 있습니다.
왜인(倭人)들은 본시 교화(敎化) 밖의 사람으로 우리 백성을 다스리는 법으로 다스릴 수는 없습니다. 이번에 한 차례 변방을 침범했는데 어찌 경솔하게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잘못을 저지른 이번에 엄중한 말로 서계(書啓)를 만들어 대마 도주(對馬島主)에게 책망하기를 ‘네가 능히 적왜(賊倭)들을 모조리 베어 죄를 자복하는 성의를 보여야 한다.’고 하되, 그가 그렇게 하지 못한 다음에 죄악이 가득차게 되었을 때에 거절하더라도 늦지 않습니다. 전조(前朝)266) 의 일로 보더라도 왜구들이 교동(喬桐)에까지 들어 왔었고, 강화(江華)와 운봉(雲峰)에서의 싸움 때는 성무(聖武)하신 태조(太祖)가 계신 데다 또한 이두란(李豆蘭)이 있었기 때문에 비록 아기발도(阿只拔都)와 같은 천하의 기이한 무재(武才)로도 패전(敗戰)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었다면 위태했을 것입니다. 지금은 방비가 전조에 비하여 비록 조금 든든한 듯하기는 하지만, 해마다 흉년 들고 군졸이 고단하여 빈약한 데다가 더욱이 변방 고을들은 성(城)이 없는 데가 또한 많으므로 완전하게 든든하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또 대마도는 토지가 척박하여 모두들 돌 위에다 흙을 북돋우고 보리를 심어 먹으므로, 우리 나라에서 접대(接待)받지 않으면 먹고 살 것이 없어 장차는 궁지에 빠진 도적이 되어 부득이 노략질을 하게 될 것입니다. 서·북 변방의 일도 또한 매우 허술하여 침범해 오는 일이 있을까 염려됩니다. 전조 말년에 거란[契丹]이 한없이 밀려와 양근(楊根)·충주(忠州)·원주(原州)에까지 들어왔으므로, 문반(文班)과 종친까지 모두 군액에 충당했었으니, 매우 두려운 일입니다. 또 시운으로 보더라도 백년토록 태평한 시운은 없었으니, 이번에 왜노들을 거절하는 것은 경솔한 일인듯 싶습니다. 그 왜노들은 입을 것과 먹을 것의 근원이 우리에게 있으므로 마침내는 반드시 항복을 애걸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한 번 와서 항복하면 반드시 경솔하게 허락하지 않을 것이고 반드시 두 세 차례 와서 애걸한 다음에야 바야흐로 납관(納款)267) 을 허락하게 될 것이니, 변방 백성들이 받는 피해가 많을까 염려됩니다."
중종실록 15권, 중종 7년 1월 15일 辛酉 8번째기사 1512년 명 정덕(正德) 7년
평안도 절도사 이장곤이 변방 수비에 대해 포괄적으로 건의 요청하다
평안도 절도사(平安道節度使) 이장곤(李長坤)이 치계(馳啓)한 비변 사의(備邊事宜)026) 에,
"신이 삼가 내리신 유서(諭書)를 보건대, ‘산동(山東)027) 에 사단이 생겼으니 창졸의 변란을 미리 염려하라.’ 하셨습니다. 신이 그윽이 생각하건대, 중국[中原]이 편안치 못하여 산동에 도적이 일어났으나, 산동은 우리 국경과 거리가 매우 가까우므로 창졸의 변을 조석에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고려 말엽에 거란[契丹]과 홍군(紅軍)028) 의 변 때도 먼저 소식을 통하고 미리 온다는 소문을 놓지 않았으므로 편안하게 여겨 경계하지 않은 것이 마치 오늘과 같았습니다. 그런데 뭇 도적이 졸지에 들이닥치자 창황 망조(蒼皇罔措)하여, 조련하지 않은 군사와 완비하지 못한 군기(軍器)로 엄청난 기세의 도적을 당하게 되어, 적의 칼날이 지향하는 곳에 새가 달아나고 짐승이 도망치듯 하여 마침내 예측할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렀습니다.
예로부터 중원에 사변이 있으면 우리 나라가 병화(兵禍)를 입지 않는 때가 없었는데, 듣건대 ‘산동의 온 지역이 도적이 되었으므로 대병(大兵)이 사방에서 친다.’고 하니, 이 말이 사실이라면, 극도로 궁박(窮迫)해질수록 도적은 반드시 구름이 몰리고 물길이 터지듯이 우리의 지경으로 뛰어들기를 거란과 홍군의 난폭한 것과 같이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외로운 성(城)의 잔약한 군사로써 어찌 죽기로 날뛰는 도적의 돌격(突擊)하는 칼날을 당해내겠습니까
영조실록 113권, 영조 45년 9월 25일 甲辰 2번째기사 1769년 청 건륭(乾隆) 34년
청천강을 준설하고 남당성을 쌓고 돌아온 전 평안 병사 구선행을 소견하다
전 평안 병사 구선행(具善行)을 소견하였다. 이때에 구선행이 청천강(淸川江)을 준설(浚渫)했으며 남당성(南塘城)을 쌓고 돌아왔는데, 임금이 불러서 물으니 구선행이 대답하기를,
"일찍이 국초(國初)에 서변(西邊)을 모두 흙으로 성을 쌓았던 것은 거란[契丹]이 아침에 쳐들어왔다가 저녁에 물러가는 까닭에 그것을 위해 쌓기가 쉽고 또한 허물기 어려웠기 때문에 흙으로 쌓고 돌로 쌓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제 신도 또한 흙으로 쌓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되어 많은 사람들의 의논을 물리치고 흙으로 성을 쌓았습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성을 쌓은 장교(將校)들을 논상(論賞)하도록 명하였다.
중종 25년 경인(1530) 1월 19일(경술)
25-01-19[01] 석강에서 유보ㆍ신공제 등과 금년 봄의 구황 대책에 대해서 논의하다
고려(高麗) 때 거란[契丹]이 침구하자 공민왕(恭愍王)이 끝내 남쪽으로 피란(避亂)한 일이 있었고, 【거란의 침구는 현종(顯宗) 때의 일이다. 그런데 이렇게 아뢴 것은 틀림없이 잘못 기억한 탓일 것이다.】당 명황(唐明王)은 몸소 태평을 이룩했지만 끝내 촉(蜀)으로 파천(播遷)하는 화(禍)를 당했고, 덕종(德宗) 때는 당나라의 국운이 쇠미한 데는 이르지 않았지만 봉천(奉天)의 난(亂)이 있었으니, 천운(天運)은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한때의 태평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현금의 사정으로 살펴보면 변방의 흔단이 없다고 할 수 없는데, 평안도의 군졸(軍卒)이 야인(野人)을 몰아낼 때와 전염병이 발생했을 때에 모두 죽었습니다. 이곳은 방어(防禦)가 긴급한 곳이라서 과거에는 4번(番)으로 나누어 번서게 했었습니다만, 지금은 3번으로 나누었을 뿐이라고 합니다. 안주(安州)는 중요한 관방(關防)으로서 수(隋)나라의 백만대군이 살수(薩水)에 발붙일 수 없었던 것은 이곳을 잘 지켰기 때문입니다. 살수는 바로 안주 지역에 있습니다.
태종실록 26권, 태종 13년 7월 19일 병신 1번째기사 1413년 명 영락(永樂) 11년
최이ㆍ연사종ㆍ김승주ㆍ이종무ㆍ조비형ㆍ윤곤ㆍ마천목 등을 외방의 군 책임자로 보내다
.“황제가 진실로 우리에게 마음이 없다 하지만, 만약 호인(胡人)의 만산(漫散)이 동쪽으로 혼동강(混同江)에도 있고 서쪽으로 만리장성(萬里長城)에도 있는 까닭으로 반드시 남쪽으로 우리에게로 도망할 것인데 방비하지 않아도 좋겠습니까?”
임금이 말하였다.
“이는 옳은 말이다. 내가 들으니 옛날 거란(契丹)의 홍군(紅軍)이 있었을 때 본래 우리 나라를 지목하지는 않았으나, 마침내 그 화를 입었다. 만약 이것을 도모한다면 옳은 일이며, 반드시 곡해(曲解)하여 의심할 것도 없다. 또 내가 정성으로 사대하는데 무슨 의심할 것이 있겠는가! 무비(武備)는 나라의 상사(常事)이니 마땅히 무신(武臣)을 외방에 보내야 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명령이 있었다
홍군(紅軍) : 홍건적(紅巾賊).
> 고전번역서 > 양촌집 > 양촌선생문집 제35권 > 동현사략 > 최종정보 공은 지순(至順 원 문종(元文宗)의 연호) 경오년(1330, 충숙왕17) 송천봉(宋天鳳)의 방(榜)에 세 번째로 급제하였으며, 공민왕(恭愍王) 계사년에 동지공거로 이색(李穡) 등을 뽑았다. 갑오년에는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제수되었으며, 신축년에 홍건적이 쳐들어왔을 때 모두들 피하려고 하였으나, 공만은 선왕(先王)이 터 닦아 전해 준 것을 버릴 수 없다고 말하고, 왕에게 스스로 거느리고 백성과 같이 죽음으로 지키자고 권하였다. 조금 뒤에 서병(西兵 홍건적(紅巾賊)을 가리킨다.)이 패하자 드디어 종사(宗社)를 받들어 남쪽 복주(福州)로 옮기고, 제장(諸將)을 파견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진격하게 하였다. 다음해 정월에 서울을 수복하였는데, 승리로 이끈 방략은 거개 공이 지시한 것이었다.
> 승정원일기 > 영조 > 영조 6년 경술 > 8월 30일 > 최종정보
영조 6년 경술(1730) 8월 30일(병인) 맑음
06-08-30[24] 덕유당에서 대신과 비국 당상이 인견을 위해 입시한 자리에 좌의정 이집 등이 입시하여 성상의 체후 등을 묻고 옥당의 신하를 절도의 외직에 보임한 일 등에 대해 논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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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 시대 때 홍건적(紅巾賊)과 묘청(妙淸)이 모두 서쪽 방면에서 일어났고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이괄(李适)의 역변도 서쪽에서 일어났습니다. 서쪽 지방의 토질이 매우 좋지 않아 백성들이 농사에 힘쓰지 못하고 오직 이리저리 떠도는 것을 일삼기 때문입니다
중종실록 40권, 중종 15년 9월 20일 甲戌 3번째기사 1520년 명 정덕(正德) 15년
평안도 관찰사 허굉이 역사를 점차로 성취하여 백성의 힘을 늦추기를 청하다
평안도 관찰사(平安道觀察使) 허굉(許硡)이 장계(狀啓)하였는데, 대략,
"의주(義州)에서 성을 쌓는 일은, 조정의 의논이 ‘성은 좁고 군사는 적으며 중국에는 일이 많아서 뜻밖의 변고가 있을까 염려되므로, 성을 넓히고 군사를 보태서 되[虜]가 깊숙이 들어오는 것을 막으려는 것’이라고 하니, 나라를 지키는 구원(久遠)한 계책으로는 이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신의 소견은 이러합니다. 성안이 아주 좁다 할 수 없는데 토병(土兵)은 7백여 명이 있을 뿐이므로 평시에 성을 지키기에도 여유가 없습니다. 이제 넓히고 물려서 쌓되 보탤 만한 군사가 없는데 갑자가 급한 일이 있게 되면 어떻게 사변에 대응하겠습니까? 또 요성종(遼聖宗)은 대군을 일으켜 삭주(朔州)를 거쳐서 들어왔고, 소손녕(蕭遜寧)의 홍건적(紅巾賊)도 의주를 거치지 않았다 하니, 되는 과연 어느 길로 침범할는지 모르는데 여기만을 믿고 견고하다고 하는 것은 옳지 못할 듯합니다. 그러나 이미 터를 물렸으므로 다 쌓아야 하겠으나, 시기와 역사를 헤아리지 않고 쌓기에만 급하여 민중을 크게 징발하여 백성을 지치게 하는 것은 몹시 불안합니다. 한 혜제(漢惠帝)는 원년에 장안성(長安城)을 쌓기 시작하였으나 3년에 제후왕(諸侯王)·열후(列侯)의 도례(徒隷) 2만 인을 징발하고 5년에 다시 이중(里中)의 백성을 징발하였으며, 주 세종(周世宗)은 현덕(顯德) 2년에 외성(外城)을 쌓도록 명하였으나 다시 이듬해가 되기를 기다려 점차로 성취하였습니다. 천하를 차지한 큰 나라가 경사(京師)의 중요한 성을 쌓는 데에도 세 번에 걸쳐 징발하여 점차로 하였습니다. 이제 역사를 시작하였으므로 중지할 수 없다 하겠으나, 한(漢)나라와 주(周)나라의 옛일과 같이 점차로 성취하여 백성의 힘을 늦추고, 옛성을 남겨 두어 옛 자성(子城)을 본떠서 방어를 편리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이것을 삼공(三公)에게 보이고 그것이 편리한지를 물으라고 명하였다.
수사록 권2 / 유상수필(遊賞隨筆) 【상(上)】
압록강(鴨綠江) 【의주(義州)】
[○1리쯤도 채 못가서 배로 중강(中江)을 건넜다. 호인(胡人) 무리 수십 명이 있는데 용모가 심히 흉악하고 추하였고 모두 다 붉은 모자〔紅兜〕에 제수(蹄袖) 차림이었으며, 입에는 담뱃대를 물고 강가에서 혹 걸터앉아 있거나 서 있으며,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서로 말을 하는데 재재거리는〔啁啾〕 말소리가 한 마디도 알아듣지를 못하였으니, 곧 변방에 수자리 사는〔戍邊〕 갑군(甲軍)이었다. 울타리를 엮어 기장이나 차조를 심어 먹고 입에 풀칠은 한다고 한다. 마두배(馬頭輩)와 악수하며 안부를 묻고는 갔다.
별건곤 제20호 > 30만의 紅頭賊을 一擧掃蕩 高麗三元帥의 大勝捷
잡지명 | 별건곤 제20호 |
발행일 | 1929년 04월 01일 |
기사제목 | 30만의 紅頭賊을 一擧掃蕩 高麗三元帥의 大勝捷 |
필자 | 申湜 |
기사형태 | 문예기타 |
30만의 紅頭賊을 一擧掃蕩 高麗三元帥의 大勝捷
申湜
지금으로 571년전 -高麗 恭愍王 6년 冬 10월!
歐洲天地까지 威嚴을 뜰치던 蒙古의 成吉思汗이 세상을 버린지도 二百餘年 北方의 一胡族으로 父祖의 뒤를 이어 中原一幅을 긔어코 席捲號令하던 나라의 忽必烈이 죽은 지도 역시 二百年! 一盛一衰는 天理의 循環일넌지, 그러케 천하를 威壓하던 元나라의 세력이 일시에 頓挫하야 威令이 서지 못하게 되매, 全國이 混亂하고 群雄이 蜂起하는 중에 紅頭賊關先生 破頭潘等이 北方에서 이러나게 되니 兵勢가 大振하는지라 翌年 春二月에 천하에 檄文을 돌니되 倡義擧兵에 中原을 恢復한다 自稱하고 그해 8월에 賊兵 3천 여명이 鴨綠江을 건너와서 剽掠하다가 갓스나<14> 都指揮使 金元鳳이 숨기고 上報를 올니지 안이하야 朝廷에서는 아지도 못하고 지낫스니 엇잿던 녜나 이제나 太平乾坤의 시대 일이엇다.
성종실록 216권, 성종 19년 5월 27일 庚寅 2번째기사 1488년 명 홍치(弘治) 1년
무령군 유자광이 의주 방어의 중요성에 대해 상서하다
대저 의주(義州)는 본래 요(遼)나라의 포주(抱州)인데, 고려 예종조(睿宗朝)에 금(金)나라 군사가 침공(侵攻)하여 요(遼)나라의 개주(開州)를 취(取)하고 내원성(來遠城)을 습격하자, 자사(刺史) 상효손(常孝孫)이 내원(來遠)·포주(抱州) 두 성(城)을 가지고 우리 나라에 귀부(歸付)하였다가 그 무리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도망하였으므로, 예종이 포주를 고쳐서 의주(義州)로 만들고 압록강(鴨綠江)을 경계로 삼았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현종조(顯宗朝)에는 거란(契丹)이 교량[橋]을 만들고 그 교량을 끼고 동서(東西)로 성(城)을 만들었으며, 문종(文宗)조(朝)에는 거란이 포주성(抱州城) 동쪽 들에 궁구문(弓口門)을 설립하고 문밖에다 우정(郵亭)을 설치하였으며, 또 확장(搉場)560) 을 설치하였는데, 문종이 그것을 근심하여 혁파(革罷)하도록 청하였으나 거란의 임금이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수(隋)나라·당(唐)나라의 군대와 소손녕(蕭遜寧)의 군대, 삼별초(三別抄)·유관(劉關)의 군대가 모두 의주(義州)로부터 들어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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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실록 43권, 고종 40년 7월 22일 양력 1번째기사 1903년 대한 광무(光武) 7년
대체로 러시아 사람들이 만주(滿洲)를 침략한 것이 물론 하루아침의 일은 아니지만, 그들이 권력을 수립하고 세력을 늘리는 행위가 갈수록 불어나고 있는데, 특히 밀접한 관계를 지닌 곳은 바로 우리나라의 서북쪽 연변 지대입니다. 서북쪽 연변 지대는 부여(扶餘), 예맥(濊貊), 발해(渤海), 거란(契丹), 말갈(靺鞨), 여진(女眞), 몽고(蒙古), 합단(哈丹) 야인(野人)들이 대대로 변경의 우환 거리를 만들면서 우리의 강토를 침략하지 않은 시대가 없었습니다. 우리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께서 북쪽으로는 육진(六鎭)을 개척하고 서쪽으로는 사군(四郡)을 설치하여 긴 강을 천연적인 해자(垓字)로 만들어 남북의 한계를 갈라놓으시고 진(鎭)과 보(堡)를 설치하여 요해처를 지키는 데에 무엇이든지 다 극진하지 않은 것이 없으셨습니다. 청(淸) 나라의 세조(世祖)가 성경(盛京)에서 일어난 후부터는 국경을 정해놓고 각기 서로 지켰으므로 변방이 편안하고 진과 보들이 조용하여 200여 년 동안이나 변방이 무사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삼엄하던 변방의 방비가 조금씩 해이해져 진과 보를 버려두었으니, 실로 변방의 방어가 극도로 허술하게 된 것입니다.
중종실록 15권, 중종 7년 1월 15일 辛酉 8번째기사 1512년 명 정덕(正德) 7년
첫댓글 중종실록 15권, 중종 7년 1월 15일 辛酉 8번째기사 1512년 명 정덕(正德) 7년 원본이미지엔
거란의 홍군이 맞는데 , 해석은 거란과 홍건적이 쳐들어온다고 하네요. "거란의 침구는 현종(顯宗) 때의 일이다. 그런데 이렇게 아뢴 것은 틀림없이 잘못 기억한 탓일 것이다" 적극적으로 친절하게 부인하는 설명까지.
속잡록 1(續雜錄一)기미년 만력(萬曆) 47년, 광해군 12년(1619년) .
옛날의 대금(大金)ㆍ대원(大元)이 삼오(三吳)까지 병탄하여 홀로 존재하려 했으나, 결국은 그 훗날이 영구하지 않아서 자기의 뜻을 얻지 못한 것입니다.
(三吳) : 오흥(吳興), 오군(吳郡), 회계(會稽) 지방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몽고의 일족인 거란(요)이 홍건적이라면, 알타이산(백두산)의 상도.대도를 공격하고, 압록강을 건너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오.월 땅을 소유한 백제.신라를 고스란히 물려받은 고려에게 한족의 홍건적 난은 가당치도 않은 사건아닌가요? 원의 후예들이 청나라에 원하던 것도 산서.섬서성입니다. 한족의 홍건적 난은 의심의 여지가 충분하다고 생각해봅니다.참고로 구한말 청의 군대수는 30만이랍니다. 홍건적은 40만이죠.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비가 많이 옵니다. 좋은 밤 되세요^^
역사 재해석의 좋은 기본자료를 발견하셨군요. 수고하셨습니다.
동문선에도 공민왕이 신축년에 사적(沙賊)을 피하여 안동으로 간 기록이 있네요. 한족과는 전혀 관련없는 홍건적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