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회주의 강령과 기본소득론의 충돌
[당의미래 칼럼] 사회주의 강령과 기본소득론의 충돌
글은 노동당 기관지 『미래에서 온 편지』28호(2016.02)에 실린 기획기사의 원본입니다. 글쓴이와 노동당 편집실의 동의를 구해 [당의미래] 블로그에 옮깁니다.
지상천국의 기획
기본소득론자들은 “자유의 왕국을 향한 일보”, “자본주의를 넘어서거나 획기적으로 변형시킬 ‘트로이의 목마’”, “21세기의 보통선거권”, “주권자가 되기 위한 물질적 보장”, “자본주의를 대체할 ‘근본적이고 간결하며 강력한 대안’” 등의 화려한 수사로 기본소득의 가능성을 논한다. 기본소득이 펼쳐놓은 이러한 몽환적 유토피아에 발을 들여놓게 되면 모든 근심걱정이 사라진 지상천국을 경험하게 된다. 물론 이 경험은 아직까지는 현실의 그것이 아니라 시뮬레이션 상에서만 만끽할 수 있다. 따라서 이 기획을 현실에서 실천함으로써 막연한 가정이 아닌 실제의 삶으로 승화시키고자하는 일련의 노력들이 뒤따르게 된다.
결이 다른 여러 기본소득론 중에 특히 관심을 끄는 것은 사회주의 이행전략론과 꼬뮨론이다. 전자는 기본소득을 통하여 임노동관계가 해체되면서 단계적으로 사회주의의 실현을 가능하게 할 것이라고 보고 있다. 후자는 사회주의단계론을 뛰어 넘어 기본소득을 통해 곧장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나누는” 꼬뮨체제로 돌입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사회주의 강령을 가진 정당의 당원으로서, 그리고 아직까지 꼬뮤니즘에 대한 이상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솔깃하지 않을 수 없는 제안이다.
사회주의 강령과 기본소득의 마찰
하지만 기본소득이 가지고 있는 함의가 과연 어떤 정치철학적 이념과 부합하는지, 그리고 이를 현실화하는 과정과 이에 따른 결과가 애초 의도했던 정치철학적 이념을 실현하는 것인지에 대해선 보다 면밀한 논의가 필요하다. 특히 사회주의 강령을 채택하고 있는 남한 유일의 진보정당인 노동당에서, 기본소득이 과연 그러한 강령의 정신을 담보하고 있는지도 명확하게 파악해야만 한다.
노동당에서 제기되고 있는 기본소득론은 꼬뮤니즘에 입각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엄밀하게 보자면 사회주의 이행전략으로서 제시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며, 이러한 판단은 몇 가지 근거에 기초한다. 우선 당의 부속강령으로 채택되어 있는 구 사회당 강령이다. 이 부속강령에 따르면 기본소득은 임금노동을 전제한 완전고용사회의 환상을 탈피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수단이 된다. 노동여부와 관계없이 배제 없는 경제를 수립하기 위한 전제조건이 기본소득이며, 기본소득을 통해 임노동 형태에 얽매이지 않는 자발적 노동의 가능성이 열리게 된다. 이 과정을 거쳐 새로운 통합방식의 창출이 가능하며 결국 시대의 전환을 거머쥐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당의 부속강령이나 최근 제안된 2016 총선정책의 내용으로서 기본소득은 사회주의적 이념, 즉 당 강령이 제시하고 있는 사회주의적 대전환을 위한 도구로 제안되었다고 봐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볼 수가 없다. 사회주의 이념과 기본소득은 마찰을 빚고 있기 때문이다. 이 마찰을 해소하기 위해 답변되어야 할 몇 가지 질문이 있다. 첫째, 생산수단의 사회화가 전제되지 않은 채 분배구조개선에 집중하고 있는 기본소득을 사회주의 이행전략으로 볼 수 있는가? 둘째, 확장된 케인즈주의의 형태인 현찰자본주의의 일환으로서 복지의 시장화를 조장하는 기본소득은 과연 사회주의적인가? 셋째, 자본주의적 잉여이윤체계에서 획득할 수 있는 재원조달방식을 전제한 기본소득은 결국 사회주의로의 이행은커녕 자본주의체제가 존속해야만 가능한 수단이 아닌가? 넷째, 기본소득은 노동착취를 근절하므로 사회주의적일 수 있다는 근거는 적절한가? 다섯째, 이윤창출이 전제되어야만 가능한 기본소득지급에서 은폐되는 생태적 및 국제적 착취관계를 도외시하는 것이 사회주의적인가?
실무적이고 구체적인 차원에서도 기본소득에 대한 무수한 비판지점은 널렸다. 당 총선 공약으로 제출된 내용에 한정하더라도, 어디까지가 ‘기본’소득인가? 즉, 어느 정도로 삶에 기여할 수 있을 정도가 되어야 ‘기본’소득인가? 분배재원의 회수율이 떨어질 때, 다시 말해 뿌린 돈이 돌지 않는 상황에서 재원의 누적적 증가에 대한 대책은 무엇인가? 목적세의 특수성을 망각한 채 생태세를 걷어 기본소득 재원으로 하겠다는 발상은 어떻게 가능한가? 기타 등등 이러한 질문이 가능하다. 그러나 세부적인 사항에 대한 논의는 일단 다음 기회로 넘기기로 하고, 이번엔 오직 위에서 언급했던 사회주의 강령과 기본소득의 마찰부분만 살펴보자.
생산관계를 배제한 분배론의 한계
기실 제시된 질문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기본소득론자들에 대하여 제기되어왔던 질문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질문에 대해 아직까지도 명확한 해답을 발견하지 못했다. 도리어 이런 질문에 대해 일부 기본소득론자들은 “기본소득론에 대해 공부를 해라”라는 훈계만 하고 입을 닫고 있다. 당 기관지 ‘미래에서 온 편지’의 지난번 기본소득 특집에서도 역시 해답은 보이지 않는다.
우선 생산수단의 문제에 대하여 안효상 대변인은 “기본소득이 그 자체로 사회변화를 가져오는 만병통치약이 아니”라고 하면서, 갑자기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않은 사람들의 “물질적 독립성을 보장할 수 있는 다른 수단”인 기본소득을 통해 공화주의적 이상에 복무할 수 있는 시민을 양성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한다. 맥락을 따라 유추해볼 때, 안 대변인은 조세개혁을 통해 마련된 재원으로 기본소득을 제공함으로써 공화주의적 시민을 만들어내고, 이 공화주의에 충실한 시민들의 힘으로 장차 생산수단의 소유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하지만 이러한 논리구조는 애초 제기된 질문에 대한 대답이 아니다. 복잡해보이지만 결국 이 논리는 인간의 진보가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는 역사발전론에 불과하다.
복지의 시장화
두 번째 문제에 대한 답 또한 어떤 기본소득론을 통해 보더라도 명확한 해명이 없다. 복지국가의 한계를 대체한다는 명목으로 제출된 기본소득은 오히려 개인의 기초적 생활에 대한 책임을 개인에게 온전하게 부과한다. “돈을 줬으니 알아서 써라”라는 것만큼 시장주의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은 없다. 이러한 비판에 대한 가장 공격적인 반박은 이 논리가 일부 우파의 주장이라는 것이다. 우파전략에 동승하는 기본소득론의 성격에 대한 비판을 오히려 우파적이라고 반박하는 것은 논할 가치가 없으므로 넘어가자. 이에 대해, 단지 현찰지급만을 하는 것이 아니고 여타의 현금 및 현물 복지체제와 함께 유지함으로써 기본소득이 보편복지의 기준으로 작동할 수 있다는 견해가 있다.
이 경우 기본소득의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의 문제가 부각된다. 만일 기본소득이 월등히 많다면 다른 복지수급체계는 구태여 존재할 이유도 없다. 그러나 기본소득의 규모가 보조적 성격에 지나지 않게 된다면 오히려 기존 복지체제의 대안이라기보다는 부수적 복지유형의 추가에 불과하게 된다. 이 경우 간결성 혹은 명료성이라고 하는 기본소득의 장점은 거의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다. 더 중요한 것은 전자든 후자든 간에 이것이 시장에 복지를 맡겨버리는 문제에 대해 어떠한 대답도 되지 못한다는 점이다.
극복할 수 없는 자본주의체제
세 번째 질문에 대한 답변 중에 주목할 만한 몇몇 답변은 바로 기관지 27호(2015.11.)에 실린 박선미 사무국장의 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우선 오리건 주의 사례인데, 탄소배출권 판매와 규제를 통해 환경오염을 줄이고, 이 과정에서 발생한 수익금을 주의 시민들에게 배당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사례는 전형적으로 기본소득이 생태친화적 대응이 될 수 없으며, 자본수익이 없는 상태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방식임을 보여준다. 생태주의좌파적 기본소득론자가 들고 나올만한 사례가 결코 아닌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기술혁명의 부작용을 기술혁명으로 극복한다고 하면서, IT의 발전을 통해 창출된 이윤 및 지재권에서 유발된 수익금을 기본소득 재원으로 하겠다는 발상의 소개다. 이 논의에서는 어떠한 생산수단의 사회화 내지 공유화에 대한 내용이 없다. 오로지 공유적 분배만을 이야기하고 있을 뿐이다. 다시 말해, 이 방안은 투기자본에 대한 과세로 재정을 확보하겠다고 하는 것만큼이나 시장질서 안에서 창출되는 잉여이윤이 있어야만 기본소득이 가능하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노동당은 2016년 1월 9일, 4기 6차 전국위원회에서 기본소득 정책이 포함된 '2016년 총선 종합계획'을 채택하였다. (사진: 박성훈 노동당 홍보실장)
노동이 사라진 노동해방?
네 번째 질문으로 넘어가자. 기본소득이 임노동체제를 근본적으로 해체할 것이라는 주장은 매우 중요하므로 조금 깊이 살펴보도록 하자. 자본주의 생산양식, 특히 신자유주의체제 하에서의 약탈적 자본팽창과 관련된 문제의식에 대해서는 근본적으로 동의하므로 다른 부연은 제외하도록 하자. 사회주의 이행전략으로서의 기본소득이건 꼬뮨주의의 실현으로서 기본소득이건 양자 모두 기본소득을 통해 궁극적으로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나누는” 세계로 돌입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런데 기본소득론이 생산수단의 소유와 자원의 분배문제가 가지는 선후관계를 뒤집고 있는 한계가 여기서 드러난다. 즉 기본소득론은 이 꼬뮨의 명제 중에 “필요에 따른 분배”에 집착한 나머지 “능력에 따른 노동”이라는 부분을 간과하고 있다.
사회구성원 누구나 “능력에 따른 노동”이 전제될 때에만 “필요에 따른 분배”가 가능하다. 여기서 노동은 무엇보다도 생산수단이 누구의 소유인가에 따라 자발적으로 능력을 제공할 유인을 갖게 된다. 더불어 누구나 노동을 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왜냐하면 분배는 생산이 전제되지 않은 상황에서는 발생할 수 없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생산수단이 사회화된 상태에서 임노동에 한정되지 않은 전체 노동이 발생시킨 사회적 생산물이 있을 때에야 비로소 연대의 차원에서 필요에 따른 분배가 가능해지게 된다. 기본적으로 생산이 없는 분배는 지속가능할 수 없으며, 이것은 생산수단의 사회화와 발전된 생산력을 근본으로 하는 사회주의체제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구조이다.
또한 이 부분을 간과한 채 제시되는 “필요에 따른 분배”는 소위 ‘노동윤리’ 차원의 반발을 무마할 수 없게 된다. 임금노동이건 부불노동이건 간에 사회적 생산에 기여하는 바 없는 자의 분배의 요청은 타인의 노동력을 착취할 때만 가능하다는 관점을 어떻게 극복할 것이냐에 대한 대안의 제시는 기본소득론을 관철시키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다. 그러나 현재까지 제시된 기본소득론은, 기본소득이 지급되면 좋은 세상이 올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 이상의 현실적인 대안책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기본소득으로 인해 소득의 여유가 생기면 좋은 일자리를 찾게 되고, 임금에 얽매이지 않은 채 사회에 기여할 수 있게 되며, 자본과의 협상력이 증대하리라는 비전은 창대하다. 하지만 이러한 비전은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본에게 어떠한 위협도 주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임노동자들의 추인도 받기 어렵다.
여담으로 기본소득론은 부불노동이 가지고 있는 ‘공화주의적’ 장점을 ‘현금 대체적 자원’의 문제로 전락시키는 우를 범하고 있는 점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오히려 부불노동에 대한 관점은 그것이 얼마짜리 가치를 가지고 있느냐보다는 성별, 지위, 학력, 재산 등의 구분으로 인해 발생하는 불평등을 어떻게 해소할 것이냐에 주목함으로써 더 풍부한 해결의 가능성을 가질 수 있음을 부연한다.
국제적 착취의 연쇄
마지막으로, 생태적 및 국제적 착취관계에 대한 기본소득론자들의 입장이다. 일부 기본소득론자들은 지구적인 자원배당금, 전 세계적인 누진적 소득세, 토빈세 등 국제적 금융거래에 대한 조세를 통해 지국적 차원의 기본소득이 가능하다고 한다. 곽노완 교수는 이를 근거로 ‘글로컬적 기본소득’의 가능성을 피력하기도 한다. 즉 국제적 차원의 기본소득, 지역적 차원의 기본소득, 국가적 차원의 기본소득의 연계로 지구적인 기본소득체계가 완성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을 하기 위해선 국제적 차원의 사회주의적 시공간의 재설계가 선행되어야 한다. 이 전제가 충족되지 않은 상황에서 국제적 차원의 기본소득론은 공염불에 불과하다.
핀란드, 스위스, 독일 등이 과연 국제적 차원의 기본소득의 사례가 될 수 있을 것인가? 이들 국가가 기본소득에 대해 그나마라도 생각의 여지를 둘 수 있는 배경이 무엇인지 기본소득론자들은 밝히지 않고 있다. 예를 들자면, 인구 5백 5십만 정도에 불과함에도 1인당 국민소득이 3만6천불을 넘는 핀란드가 국가적 차원에서 기본소득을 제공하기 위해 국내생산만으로 감당할 수 있는 재원의 규모는 얼마나 될 것인가? 8백만 인구에 1인당 국민소득 4만5천불을 넘으면서, 국제기구유치와 금융소득에서 발생하는 재원이 한국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에 있는 스위스의 기본소득은 과연 스위스 자체적으로 만들어낸 재원으로 가능한가? 유로통화의 생명줄을 쥐고 있는 독일에서 논의되는 기본소득은 과연 독일이라는 국가 안에서만 재원의 충족이 가능할 것인가? 참고로 독일은 8천만 국민에 1인당 국민소득이 역시 4만5천불에 육박한다.
이 문제의 핵심은, 이들 국가들이 재원으로 융통할 수 있는 재정의 여력이라는 것은 결코 자국 내부로 한정된 공간의 경제 안에서만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외부로부터의 잉여이윤 수탈이 가능하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돌려 말하자면, 이주노동자 혹은 빈곤국가의 노동자들을 착취해서 만들어진 이윤을 자국의 기본소득으로 돌리는 것이 바람직한가의 문제다. 거꾸로, 이러한 이윤을 특정국가에 현찰로 제공하면서 기본소득으로 사용할 것을 요구하는 것 또한 국제적 기본소득의 이념에 걸맞은 것인가라는 문제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현재의 복지체제 또한 같은 문제를 내재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문제를 어떻게 해소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것이 먼저가 아닐까?
자원착취의 부분에서는 더욱 심각한데, 기본소득론자들이 들고 나오는 알래스카의 사례는 전형적인 자원착취의 모범이다. 기본소득론자들이 의외로 언급하지 않는 사례가 사우디아라비아인데,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왕족과 부족장들이 석유 뽑아 판 돈을 자국국민들에게 제공하고 있다. 이것도 일종의 기본소득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이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도 의아하지만 마찬가지로 자원착취의 한 예라고 볼 것이다. 문제는 석유자원에서 발생한 이윤을 기본소득으로 제공하는 어떤 사례도 반생태적일 뿐만 아니라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점이다. 당장 유가하락으로 인해 알래스카와 사우디가 배당금을 축소하려하는 움직임을 보라.
그런데 생태주의자들 중에도 이러한 발상을 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예를 들어 탈핵의 일환으로서 친환경재생에너지 생산으로의 전환 및 여기서 발생하는 이윤을 기본소득으로 돌리겠다는 논의도 있다. 문제는 기본소득을 제공할 정도의 이윤을 발생시킬 만큼 친환경재생에너지생산량을 높이기 위해선 역설적으로 자연환경을 심각하게 훼손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경기도 일대의 골프장 전체를 태양광발전시설로 전환한다고 하더라도 기껏해야 핵발전소 1기를 대체할 수 있을 정도의 효율성을 가질 뿐이다. 그런데 이러한 수준의 재생에너지 효율을 전제로 대단위 풍력발전시설이나 태양광발전시설을 설치하게 되면 이미 그 때는 이를 친환경재생에너지라고 할 수도 없게 된다. 요컨대 자원착취에 대한 대안으로 작동하지 못하는 기본소득론은 생태사회주의적 입장에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방식이다.
다시 강령으로
한국에서 기본소득을 주장하는 대표적인 정당은 녹색당이다. 필자는 녹색당이라면 얼마든지 기본소득을 주장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과정과 결과에 대한 비판은 차후로 미루더라도, 탈이데올로기적 생태주의의 범주 내에서는 기본소득이 어떤 이념적 전제 없이도 소화될 수 있다. 하지만 사회주의 이념을 강령으로 채택하고 있는 정당인 노동당에서, 기본소득을 강령실천을 위한 최우선적 수단으로 설정하는 것에는 동의할 수 없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건드리지 못하는 기본소득론을 해방적 관점으로 승인하기는 곤란하다.
노동당을 사회주의에 입각한 ‘사회운동정당’이라고 하려면 당연히 생산수단의 소유를 둘러싼 계급적 대립구조를 어떻게 만들어 나갈 것인지를 선명하게 해야 한다. 이를 위한 대안은 이미 당의 강령과 부속강령에 세밀하게 언급된 바 있으며, 각종 선거과정에서 대중적으로 제출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정비된 바가 있다. 당 강령이 선언하고 있는 최종적 목적과 이에 도달하기 위한 경로를 단계적으로 도한 구체적으로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자기 선명성에 치우친 나머지 강령에 대한 왜곡을 일으킬 수 있는 정책을 제시하는 것은 제 발등을 찍는 일이 될 것이다.
오해의 여지를 없애기 위해서 첨언하자면, 필자는 기본소득이라는 발상 자체를 무시하지는 않는다. 금수저 흙수저 계급론이 먹혀 들어가는 이 처참한 불평등사회를 극복하기 위한 다양한 대안 중 하나로 기본소득론은 의미를 가진다. 우려하는 바는 과유불급(過猶不及)이다. 꿈이 지나치면 망상이 되고 과장이 지나치면 허세가 된다. 특히나 현실정치에서 망상과 허세는 곧잘 공수표가 되기 십상이다. 기본소득이 의미를 가지고 대중들을 설득할 수 있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사회주의 이행전략이니 꼬뮨주의의 완성이니 하는 과대포장을 벗겨내는 것이다.
곽노완 교수는 “한국의 기본소득운동은 실업과 빈곤에 대한 근원적인 대안일 뿐만 아니라, 진보정치+노동+생태+여성+실업자+장애인+인권+의료+대안교육+도시빈민+영세자영업자+농민+대학생+청소녀(년)+노령자 운동의 주체를 비약적으로 활성화시키며 이들 다양한 운동을 가로지르는 연대의 지렛대”라고 주장한다. 표현은 다르지만 현재 제출된 총선정책의 기조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 이념적 측면에서든 운동의 주체적 측면에서든 이러한 과대포장은 대중들의 환호와 지지를 얻기보다는 공수표의 남발로 치부되고 만다. 차라리 한정된 범위 안에서 명확하게 자기위치를 잡을 때 기본소득은 효과를 발휘할 수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