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경(詩經)》은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시가(詩歌)집이다. 옛날에는 《시(詩)》라고만 하였다. 주(周)나라 초기부터 춘추(春秋) 초기까지 황하 중류 지방의 시 305편을 수록하였다. 국풍(國風)·소아(小雅)·대아(大雅)·송(頌) 등 4부로 이루어져 있다. 국풍은 여러 나라의 민요, 아(雅)는 공식 연회에서 사용한 의식가(儀式歌), 송은 종묘의 제사에서 쓰던 악시(樂詩)이다. 시편의 제목은 시구 가운데 한 단어를 골라 매겼다. 유교의 기본 경전으로, 오경(五經) 혹은 십삼경(十三經)의 하나가 되었다. 각 시편(詩篇)은 한시(漢詩)의 조형(祖型)으로, 본래 무용이나 악곡을 수반한 가요(歌謠)였을 것이다.
《시경》에 담긴 시들은 꾸밈없는 감정을 쏟기도 하고, 사실을 있는 그대로 펼쳐 보이기도 하며, 신비스런 전설을 재미있게 이야기하였다. 그래서 《시경》의 노래는 “생각에 사악함이 없다.[思無邪]”고 했고, 그 노래를 읊는 사람들까지도 “생각에 사악함이 없다.”고 했다. 《시경》을 읊을 때는, 한 번 노래할 때마다 세 번 감탄한다고 했다.
《시경》은 중국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나라와 일본에서도, 일상생활이나 사고방식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신라 유물 ‘임신서기석(壬申誓記石)’에는 두 젊은이가 생활과 공부에 관해 맹세한 내용이 새겨져 있는데, 두 사람은 임신년보다 앞서 신미년에는 ‘시’ 곧 《시경》을 다른 경전과 함께 충분히 익히자고 약속했었다고 회고했다. 또 조선의 궁궐인 경복궁(景福宮)의 ‘경복’이란 이름도 바로 《시경》에서 따온 것이다.
《시경》은 공자가 정리해서 제자들에게 가르쳤으므로 유학자들은 그것을 존엄한 경전으로 떠받들었다. 또 《시경》의 시들은 외교관이 자기의 뜻이나 자기 나라의 처지를 넌지시 알리기 위해서, 필요한 부분만 끊어다가 읊는 단장취의(斷章取義)의 방식으로 이용했다. 《춘추좌씨전》에 보면 춘추시대 외교가들은 《시경》 시편의 한 구절을 자기 식으로 해석하여 자신이나 자국, 혹은 상대방이나 상대방 국가의 특수한 상황을 비유하고 논평하는 방식을 사용했다. 그것을 ‘부시(賦詩)(《시경》 시편을 읊음)’라고 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신라 시대부터 국가의 교육기관에서 《시경》을 가르치고, 고려 때부터는 과거 시험을 볼 때 필수 과목의 하나로 꼽았다. 그렇기에 선조들은 어릴 적부터 《시경》을 공부하여야 했다. 조선의 외교가들도 《시경》을 외지 못하면 다른 나라에 사신으로 가기 어렵다고 느꼈다. 1763년 통신사로 일본에 가게 된 조엄(趙曮)은 “ 《시경》을 외는 공부가 없는데 어떻게 다른 나라에 가서 사신 노릇을 하겠는가?”라고 염려했다. 일본에 가서 《시경》의 노래를 읊을 필요가 반드시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외교 업무를 하려면 《시경》의 구절로 뜻을 넌지시 표현할 수 있어야 하거늘 자신은 그렇지 못하다고 겸손하게 말한 것이다.
첫댓글 《시경》의 명언 몇가지를 옮김.
● “쥐야 쥐야 큰 쥐야. 내 기장 먹지 마라. 오랫동안 너를 견뎌왔건만 너는 나를 돌봐줄 기색 없구나. 맹세코 너를 떠나 저 행복한 땅으로 가리라. 즐거운 땅 행복한 땅이여, 거기에 내가 살리라.[碩鼠碩鼠 無食我黍 三歲貫女 莫我肯顧 誓將去女 適彼樂土 樂土樂土 爰得我所]”
● “저 민둥산에 올라, 아버지 계신 곳을 바라보노라. 아버지는 말씀하시리, ‘아아, 우리 아들이 부역에 나가, 밤낮으로 쉬지를 못하는구나. 부디 조심해라. 살아 돌아와야지, 거기 머물지를 말아다오!’[陟彼岵兮 瞻望父兮 父曰嗟 予子行役 夙夜無已 上愼旃哉 猶來無止]”
● “무성하게 자란 다북쑥은 다북쑥이 아니라 큰 쑥이네. 슬프구나, 우리 부모님, 나를 낳고 고생하셨구나.[蓼蓼者莪 匪莪伊蒿 哀哀父母 生我劬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