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숟가락의 흙 속에/정현종
한 숟가락 흙 속에
미생물이 1억 5천만 마리래!
왜 아니겠는가, 흙 한 술,
삼천대천세계가 거기인 것을!
알겠네 내가 더러 개미도 밝으며 흙길을 갈 때
발바닥에 기막히게 오는 그 탄력이 실은
수십억 마리의 미생물이 밀어 올리는
바로 그 힘이었다는 걸!
<시 읽기> 한 숟가락의 흙 속에/정현종
정현종 시인은 인간을 넘어 뭇 생명들과 드넓은 우주 속으로 자아를 확대시켜 나아간 대표적인 시인입니다. “자기를 벗어날 때처럼/사람이 아름다운 때는 없다”고 말하는 정현종 시인은 자신의 명함을 보여달라는 자리에서 강에 비친 산그림자를, 수묵화처럼 번지는 저녁 석양을 가리키며 그것이 나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이기적인 자아중심주의와 단절된 인간중심주의를 벗어난 사람만이 도달할 수 있는 세계입니다.
봄이 오고 있습니다. 인간도, 뭇 생명들도 그리고 무한의 우주도 깨어나고 있습니다. 생명의 어머니이자 드넓은 우주의 밭인 대지도 서서히 깨어나기 시작합니다. 흙의 감촉이 부드러워지고, 흙 속을 뚫고 나오는 새싹들의 소리가 맑게 트이고, 흙의 냄새가 한결 향기로워지기 시작합니다. 그 흙의 기운을 느낀 아이들은 놀이터로 모여들고, 농부들은 조금씩 흥분하며 벽장 속의 씨앗들을 점검하기 시작합니다.
정현종의 위 시는 그의 시집 『한 꽃송이』 속에 들어 있습니다. 그는 위 시에서 흙에 대해 말합니다. 그는 흙이 죽은 존재가 아님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흙 한 숟가락 속에 1억 5천만 마리의 미생물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들에게 폭로(?)함으로써 그는 언제나 낮은 자리에서 죽은 듯 고요하게 존재하는 대지가 실은 왕성하게 살아 있는 생명체이자 우주임을, 더 나아가 무수한 생명들이 거처하는 아늑한 집이자 부화의 품안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광대무변廣大無邊의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가 다른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며, 바로 내가 밟고 있는 이 대지가, 아니 1억 5천만 마리의 미생물이 살고 있는 한 숟가락의 흙 속이 삼천대천세계임을 인식하라고 그는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고 있습니다.
미생물微生物은 거생물巨生物과 달리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인간의 시력이란 한계투성이어서 시야에 들어오는 것이 제한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전부인 줄 알고 착각 속에서 일을 그르칠 때가 적지 않지요.
미생물은 너무나 작아서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오직 현미경으로 만 볼 수 있는 작은 생물이라고 우리는 교과서를 통해 배웠습니다. 그러나 그 미생물을 본 사람도, 그 존재를 느껴본 사람도, 그 존재와 동행해본 사람도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듯 미생물은 우리의 마음 속에 하나의 지식이자 관념으로 존재합니다.
그러나 이 지구상에 그 숫자가 가장 많은 것이 미생물이라면, 이 땅의 주인이야말로 미생물이 아니겠느냐고 조금 거칠게 말해볼 수도 있습니다. 그런 미생물을 실감하며 살지 못하는 우리는 삶은 너무나도 무감각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버나드 딕슨Bernard Dixon이라는 영국 과학자가 쓴 『미생물의 힘』이라는 책을 넘겨보았습니다. 그 책에서 이 저자는 미생물의 힘을 75가지로 적어놓았습니다. 비옥한 대지의 어머니, 빵과 포도주와 맥주의 제조자, 치즈의 마법사, 항생물질의 생산자, 지구의 청소부, 비타민의 생산자, 만찬의 준비자, 흰 빨래를 더욱 희게 하는 자, 석유를 만든 자연의 화학자, 세계 최대의 구연산 생산자, 르네상스 시대의 개막자, 먹성 좋은 대식가, 생명의 시원자, 자연 친화적 환경 미화원, 오존층의 보호자, 생분해성 프라스틱 생산자. 네덜란드 방파제를 지키는 파수꾼 등등이 그가 미생물에 바친 찬사의 내용이었습니다. 물론 미생물은 인간에게 백 퍼센트 이롭지만은 않은 위협적인 파괴자로서 무수한 죽음의 공포를 가져다 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인간만이 선악의 척도가 될 수 없다는 사실과, 미생물은 이렇듯 역동적으로 우주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위 시의 제2연이 무척 흥미롭습니다. 정현종 시인은 흙길을 밝으며 자신이 걸을 때마다 발바닥으로 전해 오던 그 ‘탄력’이 실은 엄청난 미생물이 밀어 올리는 힘 때문이었음을 알았다고 고백했습니다. 탄력이란 살아 있는 것의 생명적 율동입니다. 그 생명적 율동 속에 살아 있는 자의 생기가 내포돼 있고, 그 생기의 전달과 그것과의 교감 속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도 어떤 존재와 함께 ‘살아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도로만 있고 길은 없다’고 탄식하게 만드는 도시문명의 시대입니다. 아스팔트와 시멘트가 까린 ‘도로’ 위로 검은 타이어가 난폭하게 질주할 뿐, 흙의 뽀얀 살이 느껴지는 정갈하면서도 에로틱한 ‘흙길’ 위로 누군가 발자국을 남기며 걸어가는 것을 보기가 힘든 시대입니다. 추억 속에, 상상 속에, 어쩌다 신기하게 남아 있는 교외의 자연 속에서 흙길을 만날 수 있을 뿐이다. 그 흙길로 사람도, 개미도, 까치도, 무당벌레도, 잠자리도, 실뱀도 지나갑니다. 모르긴 몰라도 흙길의 손님인 그들 모두가 다 정현종 시인의 말처럼 발바닥으로 기막히게 전해 오는 탄력을 느낄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흙의 모성적인 대지 속에 무수한 생명들이 살고 있다는 것을 직감으로, 온몸으로 느낄 것입니다.
봄엔 모든 생명들이 왕성한 활동을 시작합니다. 땅 속의 미생물도 예외가 아닐 것입니다. 우주의 전 방위에서 전해오는 생명의 탄력을, 뽀얀 흙길에서 맨발로 전해 오는 대지의 탄력을 느끼며 이 생명으로 가득한 우주 속에서, 우리 자신 또한 싱싱한 생명으로 진정 ‘살아 있음’을 봄에, ‘몸’으로 직접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몸은 지식보다 정직하고 생생합니다.
―정효구, 『시 읽는 기쁨』, 작가정신,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