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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태복음 25장 31-46절 최후의 판결
오늘 말씀은 종말론의 마지막 부분에 해당하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이 땅에 살았던 모든 사람들에 대한 판결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었다고 하는 사람들에 대한 편결로 마태복음 7장의 판결의 연장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7장에서는 주의 이름으로 이적을 행하고 귀신을 내쫓으며 예언을 하며 선지자의 노릇을 했던 사람들을 향하여 “불법을 행한 자들”이라고 하시면서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시는 최후의 심판 광경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보면 ‘그들이 주의 이름으로 사람들이 할 수 없는 일들을 주의 능력으로 행한다고 생각하고 했는데 왜 예수님은 그들을 모른다고 하셨을까’에 대한 의문을 갖게 만듭니다. 그리고 나서 마태복음 8장부터는 예수님의 사역을 통한 삶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사역의 마지막 부분에 가서 방문한 예루살렘에서 멋지게 지어진 성전에 대하여 제자들이 예수님께 “이 성전 멋있죠?”하고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것이 얼마 가지 못해서 파괴될 것과 그 후에 임할 종말의 현상들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 부분을 계속해서 예수님을 믿는 다고 하는 사람들을 두 부류로 나누어서 비유하시면서 데려감을 당할 사람과 남게 될 사람들에 대하여 설명하십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그 마지막 부분인 최후의 판결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역시도 예수님을 믿지 않은 세상에 대한 판결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다고 하면서 살았던 사람들에 대한 판결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면 예수님이 마태복음 5장부터 7장까지 말씀하셨던 산상수훈에 대한 삶의 결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왜 그런지 말씀을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말씀 31절을 보면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로 시작하십니다. 예수님 자신의 재림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두 가지로 말씀하십니다. 하나는 공중재림입니다. 온 세상에 천사들을 보내셔서 예수님이 구원하신 사람들을 공중으로 불러 모으시는 재림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24장 31절을 보면 “그가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의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광야에 있다고 하거나 골방에 있다고 할지라도 그들에게 속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역시 이와 맥락을 같이하여 주님으부터 받은 말씀을 따라 이 날에 있을 일을 데살로니가전서 4장 16-17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님을 영접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재림은 지상재림입니다. 오늘 말씀은 공중에서 심판하시는 것이 아니라 천사들과 함께 오셔서 펼치신 영광의 보좌에 앉으셨을 때 하시는 판결입니다. 이것은 공중으로 들림받은 성도들에 대한 판결이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다만 여러분들이 알 것은 예수님의 보좌를 중심으로 양과 염소를 구분해서 양쪽으로 나누셨다고 해서 그들이 서로 마주볼 정도로 옆자리에 서 있다고 보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 보신 것처럼 음부와 낙원에서 서로 쳐다볼 수는 있지만 그 거리가 가깝게 보이면서도 서로 가까이 할 수 없는 구렁이 끼어 있는 한 없이 먼 거리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영적인 세계의 거리개념입니다.
또한 욥기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인 천사들이 하나님 앞에 있고 또 사탄도 하나님 앞에 서 있었다고 해서 그 둘이 바로 옆에 서 있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적인 세계에서 거리관념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다만 양으로 인정을 받는 성도들과 염소로 인정을 받는 사람들 모두가 예수님의 보좌 앞에 있으며 그들은 서로 나뉘어져서 예수님께서 판결하시는 그 판결을 받게 되고 그 판결의 이유를 듣게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판결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말씀하신 근거로 이루어집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모든 판결은 신구약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해서 이루어집니다.
어떤 집사님이 나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각 교단마다 자기들이 주장하는 교리들이 있고 그것이 교단마다 다르며, 또한 이단들 역시도 성경을 가지고 가르치는데 그들의 주장 역시도 다른데 아무것도 모르는 평신도 입장에서 어떤 것이 진리인지 어떻게 알수 있을까요? 사실 이런 질문에 대하여 쉽게 대답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두가 다 하나님의 뜻을 전하고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그에 대한 대답이 마태복음 5-7장의 산상수훈과 오늘 여러분들이 읽으신 25장의 예수님의 판결 속에 있습니다.
이제 영광의 보좌에 앉으신 예수님께서는 모든 민족을 자신 앞에 모으십니다. 그리고 각각 구분하십니다. 여기서 각각 구분한다는 것은 심판에 대한 구분이 개인적이라는 것입니다. 신앙이 좋은 부부나 건전한 교회라고 해서 함께 판결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함께 같은 교회에 다니고 함께 신앙생활을 했다고 해서 같은 판결을 받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살 때 그들이 예수님과 가졌던 영적인 관계를 가지고 그들을 판결하십니다. 예수님의 구분은 바로 예수님과의 관계성에 따라 나누어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과의 관계성이 사랑의 관계면 그는 자신이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뜻을 알고 행했을 것이고, 예수님과의 관계성이 결여된 사람은 굳이 예수님의 뜻을 따르려고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 앞에 사람들을 구분하여 세우실 때 두 종류의 사람 밖에는 없습니다. 하나는 양이고 하나는 염소입니다. 아담과 하와 이래로 예수님이 이 땅에 재림하실 때까지의 모든 사람들이 양 아니면 염소입니다. 한 부류는 하나님의 약속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고, 다른 한 부류는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습니다. 가인과 아벨이 분류되고, 이스마엘과 이삭이 분류되었으며, 에서와 야곱이 분류되었듯이 이 세상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와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로 나누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두 부류로 나누신 예수님께서는 한 부류의 사람인 오른 편의 양들에게 말씀하십니다. 34-36절입니다.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그 말씀을 들은 의인들이 대답합니다. 37-39절입니다.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이들은 예수님이 자기들에게 하신 말씀들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자신들은 예수님이 주리실 때 대접한 적도 없었고, 목마르실 때에 마시게 한 적도 없었고, 나그네 되셨을 때에 영접한 적도 없었고,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을 입혀드린 적도 없었고, 병드셨을 때나 옥에 갇히셨을 때 찾아뵌 적도 없었습니다. 적어도 자신들이 아는 한 주님을 대면하여 주님이 곤고한 상태에 빠지셨을 때 도움을 드린 적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런 섬김을 받았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주님께 “우리가 언제 그렇게 주님을 섬긴 적이 있었죠?”하면서 주님을 그렇게 섬긴 기억이 안난다고 묻는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언제 그들이 예수님을 섬겼는지를 말씀하십니다. 40절입니다.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여기 있는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라고 말씀하셨을 때 예수님의 형제는 누구를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그리스도인들을 이야기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불신자들까지 포함해야 하는 것일까요? 만일 불신자들까지 포함한다면 불신자들 전부를 말씀하실까요? 아니면 불신자들 가운데 그리스도인들의 섬김을 받고 나중에라도 예수님을 믿은 형제들을 가리킬까요? 여러분들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은 이 문제에 대한 대답을 하기 전에 예수님이 이 세상에 사셨을 때, 다시 말해서 마태복음 5장부터 24장 전까지의 예수님의 생애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을 고쳐주셨고 귀신으로부터 자유롭게 하셨습니다. 거기에는 자기 믿음을 가지고 온 사람도 있었고 다른 사람의 믿음에 의해 치료받으러 온 사람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그들을 다 영접하셨고 다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구분하지 않으셨고 차별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 모두를 형제라고 생각하지 않으셨을까요?
주린 형제, 목마른 형제, 나그네된 형제, 헐벗은 형제, 병든 형제, 옥에 갇힌 형제들은 현재 그리스도인인 형제들일 수도 있지만 실제로 가진 것이 없는 가난한 자들일 수도 있습니다. 그들을 돌아보고 섬기는 것은 바로 자기 안에 그리스도가 계셔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게 되는 행동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형제라고 생각하는 것은 자신과 똑같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사람이라는 것을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의 행동입니다. 그만큼 영적으로 성숙했기 때문에 그런 눈으로 볼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그의 안에서 그렇게 볼 수 있도록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가난한 자들을 안 도와줘도 누가 뭐라고 하는 사람도 없을 만한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도와주기를 원하셨고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다가가서 도와 준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의인들을 칭찬하고 계십니다. 그들이 바로 예수님 자신이었다고 말씀하시면서 칭찬하십니다.
여러분들은 가난한 자들을 도운 그들의 행위가 단순히 믿음이 배제된 행위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예수님은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다고 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심판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믿음을 보시지 않고 행위만 보셨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마치 사람의 뒷모습만 보고 이 사람은 누구다 하고 주장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물론 비슷하게 맞출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절대적인 것은 아닙니다. 뒷모습이 비슷한 사람도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친구인줄 알고 등을 치면서 “야 누구야!”했는데 앞모습을 보니 전혀 낮선 사람입니다. 그런 경우와 같습니다.
예수님이 칭찬하시는 의인들은 믿음의 사람이며 또한 사랑의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그 모습이 바로 예수님과 닮은 모습입니다. 그들 안에서 믿음을 주시며 사랑하게 하시는 성령이 계시기에 이런 선한 행동들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들이 도운 사람들이 예수님이라고 생각하고 도운 것이 아닙니다. 새로 거듭난 본성을 따라 선을 행했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 선을 행한 것이 아니라 거듭난 자신 안에서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과 향기가 자연스럽게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도 모르는 것입니다. 일부러 행하려고 하지 않아도 저연스러운 삶으로 증거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그들 안에 계신 성령이 충만한 증거입니다.
작은 것에도 욕심을 부리는 이 세상에서 다른 어려운 사람들을 배려하고 사랑으로 찾아가서 섬기는 그들을 보시면서 예수님은 자신을 향해서 행하는 행동으로 받으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을 칭찬하신 것입니다. 그들에게서 예수님 자신이 이 세상에서 사셨던 삶의 모습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에게서는 교회 안에서나 교회 밖에서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고 예수님의 삶의 방식을 살고 계십니까? 예수님은 여러분들에게 그것을 묻고 계십니다.
왼편에 있는 염소들은 그런 믿음이 없었고 사랑이 없었습니다. 마태복음 7장의 말씀대로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많은 일들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마태복음 7장 18-23절을 보면 이렇게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왼편에 있는 염소로 불리는 사람들을 향해 예수님은 불법을 행한 자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나쁜 나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들이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었던 이유는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지 않았던 이유는 거듭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난한 자들을 그리스도처럼 섬기지 않았던 것입니다.
가난한 자들이 목말라도, 배고파해도, 헐벗어도, 나그네로 방황해도, 옥에 갇혔어도 전혀 도울 맘이 없었던 것입니다. 자기 집 앞에 병들어 누워 구걸하고 있는 나사로를 거들떠 보지도 않은 부자처럼 말입니다. 그의 최후는 음부에 던져져서 불못 가운데서 단 한방울의 물조차도 구할 수 없는 타는 갈증과 고통을 느꼈던 것입니다.
거기는 마귀와 그 사자들이 들어가기로 예비된 곳입니다. 예수님은 염소에 속한 사람들을 저주받은 자들이라고 하십니다. 그런 그들에게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이 예비된 곳으로 가라고 하십니다. 왜 그렇게 판결을 하십니까? 그들이 생전에 따랐던 삶은 예수님이 아니고 마귀와 그 사자들이 보여주는 세상의 부귀영화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들이 따랐던 자기들의 주인인 마귀를 따라 영원한 불못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그들이 이 세상에서 주의 이름을 부르기는 했지만 주님을 이용하느라고 부른 것이지 주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 부른 것은 아닙니다. 기도를 해도 자기가 원하는 것을 받으려고 기도할 뿐이지 주님의 뜻을 행하려고 기도한 것은 아닙니다.
비록 양과 염소의 사람들이 똑같이 기도하는 모습을 보이기는 했지만 그들이 구한 기도의 내용은 근원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기도하고 계십니까? 무엇을 구하고 계십니까?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구하셨던 예수님이 수가성 우물가 옆에서 제자들에게 뭐라고 하십니까? 요한복음 4장 34절을 보면 예수님이 무엇을 중요시 여기셨는지를 알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그렇다면 예수님의 영이 여러분 안에 있다고 주장하는 많은 사람들 안에 예수님과 같은 뜻을 가지고 같은 행동을 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계셨던 영과 같은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 같은 가르침과 인도를 받으면서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예수님의 편에 같이 서있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들이 이 세상의 것을 따르지 않고 영원한 천국에서 얻을 칭찬과 상을 바라고 이 세상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주님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의인들이 자신들이 예수님을 대접하고 섬긴 자체를 알지 못했던 것처럼 왼편에 있는 저주받은 자들 역시 자신들이 예수님을 영접하지도 섬기지도 않았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의인들은 자신들이 예수님을 섬긴 것을 몰랐지만 악인들은 에수님을 섬기지 않고 외면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야고보서 4장 17절의 말씀처럼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않음으로 죄를 범한 것입니다. 야고보서 4장 17절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
그 판결이 예수님을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사람을 영원한 불못에 던져 넣으려고 지옥을 만드신 것이 아니라 마귀와 그 사자들을 집어 넣으려고 만드신 것인데 마귀와 그 사자들이 자기 사람들을 통하여 준 거짓 가르침과 이 세상의 유혹에 빠져서 자기들 스스로 영원한 불못으로 들어가는 길을 택한 것입니다.
마귀가 주는 것을 구하는 사람들은 자기 중심적인 사랑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미래에 도움이 될 사람들에게는 잘해 주시만 자기에게 별 도움이 안되거나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냉담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25장 42-43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그들 역시 예수님께 이의를 제기합니다. 44절입니다. “그들도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 예수님이 그들에게 대답하십니다. 45절입니다.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조금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마지막 말씀으로 종말에 일어날 수많은 재난과 시험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의 재림을 기다리는 자세에 대하여, 그리고 마지막 판결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하여 말씀하시고 마치십니다. 그 말씀은 46절 말씀입니다.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여러분 이 세상에서 너무나 힘들게 살고 계십니까? 가진 것없고 모아 놓은 것이 없어 걱정이 되고 두려워집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여러분들의 것은 모두 영원한 천국에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자기의 통장에 쌓아 놓을 때 여러분들은 천국에 쌓아 놓으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최고의 집들을 여러 채를 가지고 있고 최고의 차와 최고의 옷을 입고 음식을 먹으면서 사치스럽고 그것들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사는 사람들을 여러분들은 부러워하고 계십니까? 아니면 그런 것들을 누리지 못해도 여러분들을 위해 십자가에 자신을 내주신 예수님과 함께 사는 것을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는 믿음과 사랑과 소망으로 살고 계십니까? 여러분들이 믿었던 바가 현실로 이루어지고 여러분들이 소중히 여기셨던 예수님과 천국에 여러분들이 함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너희는 언제나 나와 함께 있었으며 내 뜻대로 사랑하며 섬기면서 살았다”고 하시는 칭찬을 받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을 주님의 성령이 이끌어 가시도록 여러분들의 몸을 온전히 주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 드리면서 산상수훈을 말씀하신 예수님의 마음을 알고 겸손히 하나님 앞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과 더불어 날마다 어렵고 가난한 사람들을 도우시면서 사실 수 있기를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