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 선비촌에서 시간을 거닐다
바람 끝에 묻어나는 공기가 제법 다디단 4월의 하순이다. 길고 길었던 겨울의 잔상과 이른 봄의 변덕스러운 꽃샘추위를 지나, 마침내 온전하고도 농익은 봄빛이 대지 위에 내려앉았다. 언제나처럼 길 위의 인연을 기꺼이 함께하는 우리 사총사의 발걸음이 이번에 가닿은 곳은 경북 영주다.
푸른빛이 서늘하게 감도는 소수서원의 늙은 솔숲을 지나 선비촌으로 들어서는 길, 2천 원짜리 종이 입장권을 받아 들고 화단에 핀 연초록 잎사귀 위에 살포시 올려본다. '2026년 4월 24일'이라는 선명한 날짜 옆으로 도포 자락을 휘날리는 선비의 윤곽이 정겹다. 카메라 렌즈를 통해 바라본 입장권과 그 뒤로 일렁이는 봄의 색채는, 오늘 이곳에서 낚아 올릴 첫 번째 풍경이었다.
선비촌 초입에 들어서자 꼿꼿한 자태로 서 있는 거대한 선비 동상과 마주했다. 넉넉하고 기품 있는 도포 자락에 갓을 반듯하게 차려입은 그 모습에서, 평소 내가 그토록 매료되어 온 우리 전통 한복 특유의 단아하면서도 강직한 선(線)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한 손에 서책을 든 채 먼 곳을 관조하듯 응시하는 그의 시선 끝에는 과연 어떤 시대의 풍경이 닿아 있을까. 동상을 뒤로하고 조붓한 흙길을 따라 걸음을 옮기면, 나지막한 돌담 너머로 기와집과 초가집들이 한 폭의 맑은 수채화처럼 펼쳐진다.
이제 막 생명력을 뿜어내며 돋아나기 시작한 은행나무와 활엽수들의 연초록 잎새들은 고색창연한 기와지붕 위에서 바람의 리듬에 맞춰 춤을 춘다. 그 아래 드리운 짙은 그림자는 결코 가벼울 수 없는 시간의 깊이를 묵묵히 증명하고 있었다.
촌내의 길을 따라 걷다 내 발걸음이 오래도록 머문 곳은 '열부각(烈婦閣)'과 '충복각(忠僕閣)' 앞이었다. 억울한 누명을 벗기 위해 한양까지 먼 길을 마다하지 않았던 하인 고만석의 우직한 충의와, 지아비를 향한 반남 박씨의 굳은 절개가 안내판 위에 덤덤한 활자로 새겨져 있었다. 가혹한 시대의 무게를 온몸으로 견뎌내야 했던 그들의 애달프고도 숭고한 삶의 궤적. 그러나 그 무거운 서사 주변으로는 무심하게도 화사한 봄꽃들이 만발해 있었다.
붉은 단풍나무 아래로 흐드러지게 피어난 보랏빛 철쭉 무더기는 마치 지난날의 상흔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듯 포근하고 찬란했다. 삶의 비애와 대자연의 눈부심이 교차하는 그 역설적인 지점에서, 나는 한참 동안 카메라 셔터를 누르며 시상의 갈피를 더듬었다. 렌즈 너머로 건져 올린 이 시린 봄날의 풍경 위로 디카시(디카詩)의 한 구절이 맴돌다 이내 봄바람에 실려 흩어졌다.
무거워진 상념을 유쾌하게 환기해 준 것은, 단청이 고운 어느 누각 아래서 만난 뜻밖의 풍경이었다. '선비의 하루'라는 재치 있는 문구와 함께, 선글라스를 끼고 화려한 손놀림으로 디제잉(DJing)을 하는 선비의 모습이 그려진 힙(hip)한 벽화가 우리를 반긴 것이다. 엄숙하고 정적일 것만 같았던 전통의 공간에 이토록 자연스럽게 스며든 현대적인 유쾌함이라니. 사총사 친구들과 함께 벽화의 포즈를 따라 하며 파안대소의 웃음을 터뜨렸고, 그 찰나의 기쁨을 사진 한 장에 오롯이 담아냈다.
과거의 유산이 단지 박제된 화석으로 남지 않고, 지금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GOOD DAY'를 건네는 살아 숨 쉬는 공간이 되는 순간이었다. 한복과 한옥의 고운 선을 탐구하면서도, 결국 그 안에 담겨야 할 것은 팍팍한 삶을 여유롭게 관조하는 우리네 특유의 '해학의 미'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는다.
걸음을 잠시 멈추고 쉬어가기 위해 들른 실내의 어느 공간, 투박한 나무틀로 짜인 창문 밖으로 그림 같은 풍경이 걸려 있었다. 창문은 그 자체로 훌륭한 액자가 되어, 켜켜이 포개진 기와의 검은 곡선과 그 사이를 뚫고 올라온 싱그러운 나뭇가지들을 완벽한 구도로 담아내고 있었다. 실내 천장에 대롱대롱 매달린 따스한 빛의 조명과, 벽면에 걸린 라탄 바구니 속 마른풀의 이국적인 감성이 창밖의 묵직한 전통 지붕선과 묘하고도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었다.
뷰파인더를 눈에 바짝 대고 숨을 고른다. '길 위에서, 풍경을 낚다'라는 내 오랜 글쓰기 작업의 명제에 이토록 완벽하게 부합하는 장면이 또 있을까. 풍경을 낚는다는 것은 결국, 무심히 흐르는 찰나의 시간 속에 숨겨진 공간의 결을 기민하게 포착해 내는 일일 것이다.
대구로 돌아가기 위해 다시 선비촌을 나서는 길. 옷깃을 파고드는 늦은 오후의 바람에서는 한결 짙어진 흙내음과 다정한 꽃향기가 났다. 오늘 영주 선비촌에서 보낸 하루는 단순한 유람이 아니었다. 오랜 세월의 풍파를 버텨낸 기와지붕의 묵직함 속에서, 상처를 덮어주는 철쭉의 화사함 속에서, 그리고 시대를 가로지르는 통쾌한 해학 속에서 나는 숱한 이야기의 조각들을 낚아 올렸다. 친구들과 함께 나눈 정겨운 웃음소리는 이 눈부신 봄날의 가장 완벽한 배경음악이 되어 주었다. 길 위의 여자가 되어 발길 닿는 대로 걷다 보면, 풍경은 늘 그렇듯 내게 생각지 못한 새로운 문장을 선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