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간(內間)과 가짜 대통령일 가능성이 많은 이재명 대통령, 이 글을 보기 바란다.
김충영 국방대학교 명예교수/한국시니어 과학기술인 협회 회원, 2026.08.07
제2차 세계대전 이후 1950년대와 1960년대는 독립운동을 주도했던 티토, 네루, 수카르노, 네윈, 호찌민, 모택동(마오쩌둥) 등 후진국 출신의 영웅들이 대거 등장하여, 제3 제국이라는 이름으로 세계를 풍미했다. 한편, 한국에서는 일본 육사와 한국 육사를 졸업하고, 여수 공산주의 폭동 사건 때 이 폭동 진압부대로 투입되었으나, 공산당에 입당한 사건에 연루되어 있었던 박정희 소장이 군사혁명으로 정권을 잡았다.
1970년대 이르러 세계적으로 이름 있는 내로라하는 영웅들은 정작 백성들을 잘살게 만드는 경제개발 측면에서는 뚜렷한 영향력을 미치지 못했다. 당시 세계 경제학자들은 자유민주주의 경제 체제에 관해 많은 연구를 하였지만, 어느 경제학자도 후진국, 저개발국의 경제개발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였다.
제1세계 자유민주주의 세계, 제2세계 공산주의 세계, 그리고 경제적으로 빈곤한 제3세계로 구분할 때, 제3세계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빈곤의 원인을 제3세계 자체에서 구하거나, 아니면 제국주의적 국제관계의 산물로 평가하고 있었다.
군사혁명으로 집권한 박정희 전 대통령은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사상이 뚜렷하지 않았지만, 조국 근대화에 대한 의지만큼은 강력했다. 아마도 그는 일본이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을 통해 급격히 성장하여 선진국 반열에 오른 사실만은 확실히 알고 있어서 한국 국민도 물꼬만 터준다면, 일본과 같은 경제성장을 이룰 수 있다는 신념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당시 한국의 현실은 메이지(明治) 유신(유신 당시의 일본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당시 일본은 유럽 특히 네덜란드와 무역 거래를 활발히 하여 경제적 저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은 6⦁25 전쟁으로 경제는 저개발국 중에서도 바닥이었고,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은 한국인에게 인문학 교육만 장려하고 공학 교육은 일본인 및 한국인으로 친일 인사에게만 허용하였다. 그래서 해방 후 과학자•기술자들이 전혀 없는 상태였고, 정부가 산업 발전에 투입할 국가 자본 역시 턱없이 부족했다.
특히, 미국 잉여농산물 유입은 농촌을 피폐화시켰고, 이는 젊은이들의 이농 현상을 초래하여 수백만의 실업자를 유발했다. 당시 어느 나라도 한국에 선뜻 돈을 투자할 나라가 없었다. 다만 다행스러웠던 것은 6⦁25 전쟁에 미군이 참전하여 미국 민주주의 국가에 대해 알게 되었고 자유 경제 체제와 전면 통제 체제가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알게 되었다.
1960년대에 인재도 없고 산업자금도 없어서 박정희 대통령이 경제개발에 혼신을 다하였으나, 당시 미국 대통령은 민주당의 존 F. 케네디였다. 박정희 소장은 케네디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 백악관을 찾았지만, 케네디는 끝내 만나주지 않았다. 그래서 박정희는 서독으로 노동력을 수출하고 산업자금을 끌어들여 한국 산업화에 성공했다, 그는 정권욕보다도 자기 명예보다도 국가 발전을 위해 인재를 찾아 직접 간청하여 경제를 일으킨 것을 가짜 대통령 이재명 너는 알고 있는가?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시해 이후 당시 민주화가 전 국민의 소망으로 등장했으나, 민주화 투쟁의 두 거두인 김영삼과 김대중은 서로 먼저 대통령이 되겠다고 한 치의 양보 없이 서로 다투어 한국에서 혼란 사태가 일어났다. 김영삼은 신민당을 이끌고 있었지만, 김대중은 신민당에서는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여 탈당한 후 일부 학생 세력과 노동자 세력을 반정부 세력으로 결집해 ‘국민 연합’이라는 사실상의 혁명지휘부를 결성하고, 일부 학생과 노동자들을 선동하면서 폭력시위를 지휘하기 시작했다.
김영삼은 신민당을 이끌고 있었지만, 김대중은 신민당에서는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여 탈당한 후 일부 학생 세력과 노동자 세력을 반정부 세력으로 결집해 ‘국민 연합’이라는 사실상의 혁명지휘부를 결성하고, 일부 학생과 노동자들을 선동하면서 폭력시위를 지휘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전라도 푸대접’이라는 구호로 전라도 민심을 장악했다. 김대중을 지지하는 집단은 5월 15일은 서울역에 10만 시위대를 동원하였고, 그 폭력성은 버스로 경찰을 깔아 죽이는 정도에까지 이르렀고, 한편 서울역 시위에 극도로 고무된 김대중은 5월 16일, 제2차 민주화 촉진 국민 선언문을 발표했다.
드디어 1980년 5월 17일, 전군 주요 지휘관 회의를 긴급히 소집하고, 10·26 이후 선포됐던 지역 비상계엄(제주도 제외)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5.18일 새벽 2시를 기해 전국 136개 국가시설을 보호하고 31개 주요 대학에 25,000명의 계엄군을 배치하는 한편, 5월 17일 자정을 기해 김대중, 김상현 등 24명의 내란 음모자를 체포하고 학생 주동자들을 구속하기 시작했다.
일찍이 김대중은 1971년 대선에서 ‘전라도 푸대접’이라는 기치를 내걸어 호남 민심을 잡는 데 성공하여 이를 토대로 세를 확장했는데, 전라도 주민의 김대중에 대한 지지도는 대단하여 기세를 올렸다, 이에 대해 김영삼은 ‘우리가 남이 가’라는 기치를 내세워 부산, 경남 지역 민심을 사로잡았고, 이 세력들을 근거로 두 민주화 거두가 한 치의 양보 없이 다투면서 급기야 부마사태 그리고 광주 사태로 이어졌다. ‘호남 푸대접’이라는 구호는 개발 과정에서 일본으로부터 기술과 자원이 들여오기에는 경남이 유리한 입지 조건인 것을 간과(看過)한 호남 민심 잡기 위한 정치 구호였다. 이에 항거하는 세력이 맞서서 일으킨 반정부 투쟁은 폭동으로 발전하여 광주 사태에서 정점을 이뤄, 당시 대한민국 안보는 바람 앞에(風前燈火) 있는 등불이었다.
이 시기에 미국, 영국 등 선진국은 한국 국민은 민주주의 정치를 하기에는 여전히 미개(未開)하다고 보았다. 차제에 전두환 장군이 급부상했다. 여기에 한국 민주주의 정치에 도움을 주려고 노력했던 주한미군 사령관 존 위컴(John A. Wickham)은 1980년 8월 8일에 <LA 타임스>의 샘 제임스 기자와 AP통신의 테리 앤더슨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전두환이 한국의 대통령이 될지도 모른다.”라며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마치 레밍(Lemming:나그네쥐) 떼처럼 그의 뒤에 줄을 서고 그를 추종하고 있다”라고 하여 한국 민주주의 정치의 앞날이 어두움을 내비쳤다.
레이건은 한국이 혼란 속에 공산화되는 것보다는 전두환을 택하여 한국을 안정시키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1981년 2월 2일 전두환은 레이건과 정상 회담을 가졌다. 전두환 대통령은 ‘체육관 대통령’으로 비하(卑下)를 받으며, 국민으로부터 호응을 받지 못하는 대통령이었다. 하지만 국가를 발전시키려는 의욕은 대단했다. 핵발전소를 확대하고 다른 나라보다 앞서 IT, 반도체, 컴퓨터 산업을 진두지휘했다. 88 서울올림픽에 성공하여 한국 경제개발을 세계에 알렸다. 전두환은 정권욕보다 나라 발전에 혼신하여 한국 경제를 한 단계 높였던 것이다. “한강을 보면서 전두환 대통령을 그리워하라.”라는 말이 서울에서 회자(膾炙)하고 있었던 것을 가짜 대통령 이재명은 알고 있는가?
그러나 민주주의 투사 두 거두(巨頭)는 집권하여 김영삼은 자기를 따르는 인물만 등용하여 은 IMF를 당했고, 클린턴 대통령이 1994년 3월 전쟁을 불사하고라도 북한의 핵무기 개발시설이 있는 연변을 타격하려 했으나 김영삼이 한사결단(限死決斷)하면서 막았다. 김대중은 여기에 더하여, 북한에 자금을 지원해 주어 핵 개발을 돕고 노벨평화상을 타서 자기 기념관을 지었다. 이때 로비스트(lobbyist)들이 활개를 쳤다. 조풍언(曺豊彦), 변양호, 김영완 등이 로비스트로 입에 오르내렸다. 문재인은 대통령 임기 동안에 USB를 김정은에게 넘기고, 핵발전을 중단하여 한국경제에 큰 손해를 끼치는 등 내간 역할만 했고 부산 유권자 표를 얻기 위해 세계 최초로 외해(外海) 공항으로 태풍을 직접 맞는 가덕도에 국제공항을 짓도록 허용하여 한국 발전은 전혀 생각되지 않은 최초의 대통령이 되었다.
그런데 2024.4.10 대선 때 이재명이 당선되었지만, 결과를 보면 다음과 같다.
2025년 4.10대 선거
김문수(국민의 힘)
이재명(민주당)
선거 결과
41.15
49.42
사전투표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