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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세상이 아직도 여전히 코로나 바이러스로 아픔과 고통 그리고 혼란속에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예전 같으면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해남으로 가겠지만, 조금 더 힘들더라도 자가교통을 이용하여 진행을 하기로 했다. 어느덧 국토순례 길은 동해안, 남해안을 지났고, 서해안 길도 해남군 지역을 벗어나게 되었다. 이번 도보여행의 첫날 아침 우수영에서 출발한 이후 약 5키로 정도를 진행할 즈음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우의와 베낭 커버를 준비하기는 했으나 계속 진행하기에는 비의 양이 너무 많다. 주변을 보지도 못하고 그냥 젖은 채로 마냥 걷기만 해야 하는 상황이 닥칠 것이다. 다행히 아직 초반인지라 오늘은 진행을 포기하고 차를 회수한 다음 화원면 지역의 한적한 곳을 방문해보기로 했다.
지도를 찾아 보다가 이정표에서 본 윤거산 아래 절골에 있는 서동사와 매월리 바닷가에 있는 목포구(舊)항로표지관리소 등대를 가보기로 했다. 온 들과 산에는 꽃들이 피어있고 4월 초순을 지난 남녁에는 초록빛이 완연하다. 비가 내리면서 산에는 안개가 스믈스믈 계곡과 능선을 오르내리고, 안개낀 들판과 산은 산벚나무의 희고 붉은 기운을 띈 꽃들이 아름답게 수를 놓고 있다. 감성적인 여행을 하기에는 최적의 상황이라는 생각이다.
화원면은 작은 반도 지형을 형성하고 있는지라 어느 곳이든 바닷가 길을 가게 되어 있어 아름다운 남도 바닷가를 한껏 즐길 수 있는 지리적 장점이 있다. 서동사는 화원면 금평리 절골(寺洞)이라 불리우는 마을 뒷편 윤거산 기슭에 있고, 구목포항 등대(정확하게는 '목포 구항로표지관리소' 라고 부른다)는 매월리 바닷가에 위치하고 있다.
먼저 서동사로 방향을 잡았다. 비가 적당히 내리면서 초목은 더 생기가 돋고, 바닷가와 어울린 길들은 더욱 서정적인 감흥을 불러 일으킨다. 온 사방은 그냥 그대로 멋진 봄의 수채화를 그리고 있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노란색 유채꽃들이 어두운 비오는 날 더 진한 채도로 다가서고 있다. 잠시 차를 세우고 윈도우 브러시를 작동하지 않은채 앞유리로 보이는 유채꽃을 바라보았다. 노란색 물감이 물속에서 흩어지고 있는 느낌이 든다.
이런 날의 풍광은 목적지까지 가는 길을 길게 늘어뜨려 놓는다. 당연히 차에서 내려 둘러보는 횟수도 늘어난다.
2주전에 왔던 해남, 강진은 벚꽃이 한창 절정을 향해가고 있었는데, 오늘 보니 벚꽃들은 이제 이제 유채꽃들에게 자리를 넘겨주고 있었다.
남도를 꽤 여러번 와 보았지만 서동사는 처음 와보게 되었다. 이렇게 비가 오지 않고 걷는 길을 멈추지 않았다면 기회가 없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멈추면 비로소 보인다'는 말이 맞는 듯하다. 물론 정신적인 면도 그렇지만, 멈추게 되면 여행의 기회도 꼭 처음에 목표한 지점이 아니어도 오히려 더 상황과 정감에 맞는 곳을 발견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질 수도 있다.
일주문에는 '윤거산서동사(輪車山瑞洞寺)'라는 현판이 있고, 차가 올라가는 길은 일주문 왼쪽으로 나있고, 일주문 아래는 길이 없어 사람들이 일부러 가보지 않는 한 지나가지 않는다. 가능하다면 '주차장을 일주문 아래에 놓고, 사람들이 걸어 일주문 아래를 통과하도록 하면 더 좋을 걸' 하는 아쉬운 생각이 처음부터 들었다.
'서동사'는 해남 대흥사 말사의 하나로, 외지에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지역민들이 많이 방문하는 유서깊은 사찰이라 한다. 규모가 작은 편에 속하는 대웅전과 종각, 스님들의 거처인 요사채와 자그마한 산신각이 있고, 근래에 지어진 것으로 보이는 천불전이 있다. 세간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서동사가 그나마 알려지게 된것은 서동사 대웅전에 봉안되어 있는 목조석가여래 삼불좌상(세분의 앉아 있는 부처상을 말하는 것으로, 본존은 석가모니상, 왼쪽에는 약사여래상, 오른쪽에는 아미타불이 존치되어 있다)이 국가지정문화재 보물 제1715호로 지정되고 나서부터라고 한다. 그만큼 현재까지는 '외지인들로부터 숨어 있는 절'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일주문을 지나면 주차 공간이 있어 먼저 가까이 하게 되는 건물은 불사가 그리 오래되어 보이지는 않는 천불전이다. 비가 내려서인지 절에 거주하는 스님을 제외하고는 나만이 방문객 같아 오히려 미안해지고 더 조심스러워진다. 더구나, 코로나로 사회적 거리두기가 강조되고 있는 상황인지라 괜스레 더 조심스러워 마스크도 다시 여미고 몸에 베인(?) 먼지도 여러번 털어보게 된다.
주차장에서 내려다 본 일주문 뒷 모습과 아래 절골마을의 정경이다. 의외로 전망이 편안하고 한눈에 들어오는 풍경이 일주문과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주문이 외경스럽게 보이지 않고 편안해 보이는 것은 위에서 내려다 보는 지라 실제보다 낮아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경내로 들어서는 길은 주차장에서 이어지는 도로도 있지만, 윤거루 아래를 통하여 들어설 수도 있도록 되어 있다. 많은 사찰들이 이런 구조를 많이 띄고 있어 낯선 모습은 아니다.
운거루 아래에 가보니 양쪽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다. 2층 누각의 문은 닫혀 있으나 열쇠를 채워놓지 않은 터라 잠시 문을 열고 올라섰다. 어두컴컴한 누각은 서늘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고, 앞쪽으로 벽과 창문사이로 빛이 약간 새어들어오고 있었다. 잠시 후 어둠에 익숙해진 후 창문쪽으로 다가가 창문을 열어 보았다. 정말로 보기 힘든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지대가 높은 편에 있고, 일주문 쪽에 가리는 무언가가 전혀 없기 때문에 시야가 훤히 트이고, 이제 파릇해진 잎새들이 아직 내리고 있는 빗속에서 찬란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한참을 창문가에 서서 아름다운 시간을 보냈다. 문득 이 절을 최치원이 창건했다는 글을 미리 읽었는데, 그럴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라도 이 곳이라면 절 하나쯤은 짓고 마음의 수양을 쌓고 중생을 구제하고 싶은 마음이 들 것 같다.
이 절의 창건자는 통일신라 전성여왕때 최치원이라고 전해지고 있고, 1870년 의철, 진일, 정기의 세스님이 중건하였다 한다. 이후 계속된 중수, 재건에 따라 옛 모습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우리나라의 많은 절들의 창건자에는 원효, 의상, 자장대사나 도선국사 등의 이름이 많이 기록되어 있다. 그만큼 그 분들은 우리나라 방방곡곡에 영향을 미쳤다. 그런에 이 서동사는 고운 최치원이 건립했다고 하니 그야말로 천년사찰인 셈이다. 일설에는 이 절이 백제시대에 건립되었다고도 하나, 남아 있는 유적이 없어 창건연대의 정확한 추정은 쉽지 않다.
좋은 풍경을 나 혼자 보고 나니 조금은 으쓱해지고 갑자기 큰 부자가 된 기분이 들었다. 조용히 문을 닫고, 행여나 이 침묵과 어둠이 깨질새라 뒷굼치로 얌전히 누각을 내려왔다.
운거루를 지나 잠시 오르면 스님이 거주하는 요사채가 있고 뒷쪽에 대웅전이 있다. 서동사의 주요 전각들은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때 대부분 불탔으나, 대웅전만은 화재를 면했다고 한다. 대웅전 앞에는 꽤 오래된 벚나무가 있어 제때에 온다면 정말 아름다운 풍경을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즈녁하고 담백한 맛이 그만이다. 비가 내리고 있어서인지 나무와 전각의 색들이 묵직하니 바라보고 있는 내 마음을 차분하고 담담하게 만들어 주었다. 대웅전 앞의 석등에도 물기가 스며들고 있었다.
[발췌 : 해남군민신문, 2016.02.28, '다시 보는 해남땅 구석구석', http://www.hnsori.co.kr/news/articleView.html?idxno=3864]
시국이 시국인지라 살짝 들여다 보기만 하고 사진은 인터넷에서 빌려왔다. 보물 제1715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제는 꽃들이 거의 떨어지고 잎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는 커다란 자목련이 대웅전 옆면을 배경으로 서있다. 이 또한 계절의 행운이 따른다면 경탄이 나올만한 풍경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막 절정의 시기를 넘어서고 있는 듯한 조금 철늦은 벚꽃나무가 대웅전과 어우러져 담담한 젖은 산사의 풍경을 한층 더 담백하게 만들어 내고 있었다.
최치원은 천령군(지금의 '경남 함양') 태수로 재직시에 홍수를 예방하기 위하여 함양 상림을 조성하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숲이며 천연기념물 제154호로 지정되어 있다. 중국과 신라에서 공히 인정하는 대유학자이기도 했지만, 그는 조경과 산림조성 분야에도 전문가 수준의 탁견을 지니고 있었던 셈인데, 이곳 서동사에도 동백과 비자나무 숲이 있다. 대웅전 뒤에 있는 그 숲은 전라남도 기념물 제245호로 지정되어 있다. 전해내려오는 설처럼 만약 최치원이 서동사를 창건했다면 이 숲들도 그의 작품이 아닐까 하는 의견도 있다.
대웅전 주변을 돌아보고 옆으로 내려오니 오래된 동백나무가 몇그루 서 있었다. 이미 꽃은 지고 푸른 잎이 제법 자랐지만 천년의 세월을 지켜온 곳에 자리한 나무들답게 기개가 넘쳐 흘렀다. 비도 내리고 동백도 다 졌는데 동박새들은 동백나무 숲속에서 무언가를 열심히 말하고 있었다. 그들이야 말로 이곳의 주인이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해가 될새라 조용히 그곳을 물러나왔다.
범종각 뒤로 구부정한 나무 한그루가 몸을 비틀며 자리하고 있었다. 매일 아침 저녁으로 울리는 범종소리에 마음이 감동해 온 몸에 전율이 흘러서일까? 나무만이 알겠지...
서동사에는 보물로 지정된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외에도 특히 흥미로운 것이 하나 있다. 바로 칡나무로 만든 '칡북'이다.
칡으로 만든 북으로 대략 300년 가량 됐을 것으로 추정하는 이 북은 정유재란 때 칡으로 백성들을 구휼했다는 데서 절 이름이 한때 ‘갈천사(葛天寺)’로 불렸다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칡북과 관련해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1730년 무렵 목관(牧官) 강필경(姜弼慶)이 부임해와 동헌에 북통을 만들 때 칡넝쿨이 진상되었다는 것이다.
서동사 칡북은 원통형의 나무에 구멍을 뚫고 양쪽에 가죽을 대어 만들었다. 북은 나무의 원형을 따라 만든 탓인지 북의 모양이 다소 삐뚤어진 타원형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지름이 약 50cm 가량인 이 칡 북은 나무의 안쪽을 파고 만들어 굉장히 큰 칡 나무가 사용됐음을 짐작케 한다. 북통으로 칡을 이용했다는 소재의 희귀성을 감안하더라도 문화재적인 가치는 충분하다 하겠다.
[발췌 : 해남군민신문, 2016.02.28, '다시 보는 해남땅 구석구석', http://www.hnsori.co.kr/news/articleView.html?idxno=3864]
갈천사의 유래에는 또 다른 이야기도 있다. 임진란때 왜적들이 절을 태웠는데 대웅전만 화를 면했다. 일반적으로 사찰에서 본체이며 가장 큰 건물이 대웅전이다. 왜적이 들어오기 전날 갑자기 칡덩쿨이 무성하게 자라나 대웅전을 완전히 감싸 마치 칡덩쿨 숲처럼 보이게 되었고, 대웅전을 미처 발견하지 못한 왜적들은 다른 건물들만 태우고 간 것이었다.
아직도 비가 내리고 있다. 혼자 조용히 주변을 걷고 있자니 주지스님으로 보이는 분이 나와 대청 마루를 왔다 갔다 하면서 역시 비를 즐기는 듯 했다. 차분해진 마음으로 서동사를 벗어 났다.
길 옆에 나무 한그루가 제법 진해진 신록의 빛을 내뿜고 있었다. 한참을 바라보다가 내려서 마음에 담았다.
"이 비 그치면
내 마음 강나루 긴 언덕에
서러운 풀빛이 짙어 오것다".... 라는 '봄비' 싯구가 떠올랐다. 다음 번 다시 이 부근을 지나면 그때는 더 진한 녹색의 숲이 되어 있겠지.
절골을 나와 바닷가로 난 길을 따라 매월리로 향했다. 바다와 이웃한 밭 한가운데 뭔가가 빼곡히 자라고 있었고, 아직은 잎사귀가 없는 앙상한 모습을 띈 나무 몇그루가 바다를 배경으로 비를 맞으며 서있었다. 그냥 그 자체가 아름답고 세상의 가장 부드러운 면을 보고 있는 듯했다. 가장 평범한 모습 같지만 가장 아름다운 풍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평범한 것이 진리이다.
매월리 구목포항 표지관리소로 가려면 지방도 803번을 따라가면 된다. 803번이 시작되는 곳에는 방파제가 있다. 아직 비가 내리고 있고, 방파제에서 낚시를 하던 두사람이 짐을 챙겨 나오고 있었다. 차를 세워놓고 바닷가를 보고 있을때 눈에 들어온 그 풍경은 그렇게 자연스럽고 보기에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약 10분정도의 거리를 가면 막다른 곳에 등대가 있고, 그 등대 아래에는 구목포항 항로표지 관리소가 있다. 역시 코로나의 영향으로 관리소 방문은 통제되어 있어 전망대에서 앞바다와 주변을 둘러 보았다. 목포구등대는 목포 외달도와 달리도 앞에 있고, 섬사이로 멀리 서해바다가 뻗어 나가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달리도는 섬이 반달 모양으로 되어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며, 외달도는 '사람의 섬'이라고 소문이 나서 연인들이 많이 찾는다고 한다. 전망 데크에는 목포와 해남을 상징하는 삼학도와 강강술래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강강술래는 남도를 대표하는 노래이고 춤이다. 임진왜란때 일본군을 속이려는 이순신장군의 전술에서 유래했다고 하며, 국가지정 무형문화재 및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삼학도에는 유달산에서 무술을 연마하던 장수를 사모하던 세처녀의 사랑이야기가 서려 있는데, 죽어서 학이 된 세처녀를 기리는 학 조형물이 오늘은 서러운 마음을 안고 고스란히 비를 맞고 있었다.
다시 길을 돌아 나와 방파제가 있는 포구 근처에서 본 유채꽃밭이다. 비에 젖고 약간씩 부는 바람에 흔들리는 꽃잎들이 더 유난히 곱고 진하게 보였다.
서동사와 매월리 구목포 등대는 그 자체로도 아름답고 볼만 하지만, 거기까지 가는 길도 그에 못지 않게 정겹고 아름답다. 호화스럽거나 화려하지는 않아도 진한 남도의 깊은 정취가 서려있는 진국을 느낄 수 있는 길이다. 여느 이름난 장소보다 더 차분하고 사색을 즐길 수 있는 여행지로서 권하고 싶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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