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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렌 바라드와의 인터뷰(Interview with Karen Barad)
"물질은 느끼고, 대화를 나누며, 고통을 겪고, 욕망하며, 갈망하고, 기억한다"
Q1:
'신유물론'이라는 개념은 마누엘 데란다와 로지 브라이도티에 의해 1990년대 후반기에 제기되었습니다.
신유물론은 어째서 정신이 언제나 이미 물질인가를, 즉 정신이 신체와 관련된 하나의 관념인가를 보여
주며, 어떻게 해서 질료가 필연적으로 정신에 속한 어떤 것인지(정신이 그것의 대상으로서 신체를 가진
다는 것),
그리고 어째서 자연과 문화가 언제나 이미 '자연문화'(naturecultures, 도나 해러웨이의 용어)인지를
보여줍니다.
신유물론은 문화론을 따라다니는 초월론적이고 인간주의적(이원론) 전통에 반대하지요.
이 두 가지는 근대성과 후기근대성 시대, 둘 모두의 바로 직전을 대표하는 것이지요.
초월론적이고 인간주의적인 전통들은 여전히 지속적으로 이원론적 구조에 입각하여 다양하게 존재하며,
계속해서 신유물론자들에 의해 제기된 논쟁들을 휘젖고 다닙니다.
예컨대 주디스 버틀러의 연구에서 실패한 유물론과 관련된 페미니즘의 격렬한 논쟁지점을 생각해 보면
됩니다.
그리고 미디어와 문화연구들에 전승되어 온 소쉬르/라캉적 언어학적 유산도 있습니다.
'신유물론'이라고 이름붙여질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이원론적 구조를 자연과 문화, 물질과 정신의 흐름들의
경로를 개념화함으로써 그리고 적극적인 이론 구성을 개시함으로써 전환합니다.
당신은 양자역학을 강조하면서, 이와 아주 유사한 경로를 취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행위적 실재론'(agential realism)에 관한 생각은 대략 1980년대 중반 이래로 당신이 출판했던 인식론에
대한 보어(Bohr)적 접근을 따라 1996년 까지 이어지지요.
이는 인문학과 과학 양자를 따라다니던 이원론과 단절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측정의 문제와 관련해서, 이 행위적 실재론은 양자역학에 관한 보어의 철학을 재독해하도록 이끌었
습니다.
또한 너무나 많은 이론가들이 상호행위들(inter-actions)의 물질-담론적이고 수행적인 본성에 대해 의견
의 합의를 거부하는 사실을 비판했습니다.
이러한 수행적 본성은 당신이 '행위적 실재론'이라고 지칭한 바, 물질과 의미의 내재적 포함관계를 뜻합
니까?
그리고 당신의 과학과 인문학 양자의 비판에서 우리가 '신유물론'이라고 이름 붙인 것은 핵심적인 사항
인지요?
카렌 바라드:
내게 답해야 하는 당신 질문의 핵심은 분명하지만, 내가 비판과 관련해서 하고 있는 것을 당신이 언급하기
때문에, 나는 비판에 관해 뭔가 말함으로써 시작하고 싶군요.
사실 난 비판에 그다지 관심이 없어요.
내 생각에 비판은 과대평가되고, 과도하게 강조되며, 남용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페미니즘을 오히려 손상시키고 있지요.
브루노 라투르(Bruno Latour)는 어떤 논문의 제목에서 다음과 같이 암시했지요.
「왜 비판이 소진되어 버린 것일까?
사실의 문제에서 관심의 문제로」(2004). 이에 따르면 비판은 아마도 습관으로부터 벗어나려고 계속
사용되어온 어떤 도구같은 것이지만, 우리가 지금 직면한 그런 종류의 상황들에서는 더 이상 필요가
없어진 것이지요.
비판은 오랫동안 선택의 도구였고, 우리의 학생들은 스스로를 비판에 잘 훈련된 사람으로 생각하면서,
버튼을 누르면 비판이 툭 튀어나올 수 있을 정도가 된 겁니다.
비판은 너무 쉬워요.
특히 신중하게 독해하는 것이 더 이상 비판의 기초요소가 아닌 것으로 보일 때 그러합니다.
그래서 나는 제 학생들에게 설명할때 읽기와 쓰기는 윤리적인 실천이며, 비판은 과녁을 벗어나는 것이
라고 합니다.
그래서 나는 유럽적인 의미에서는 어떤 상이한 균형이 있다고 보는데 그것은 미국에서의 그것과는 다른
의미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지점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비판은 간혹 해체적인 실행이 되요.
다시 말해 그러한 비판은 우리가 그것 없이는 일을 진행할 수 없는 그런 아이디어들을 구성적으로 배제
하는 방식인 것이지요.
하지만 해체적 실행은 기각하고, 밀어 놓으며, 가치절하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른 학문, 다른 페미니즘, 어떤 학제, 접근 방식 등등이지요. 따라서 이것은 부정성의 실천입니다.
즉 내 생각에 이것은 빼기, 거리두기, 타자화하기인 것이지요.
라투르는 튜링의 생각에 따라 비판보다는 비판적인 것(the critical, 임계치)으로 전환해야한다고 제안합
니다(Turing 1950).
여기서 비판적으로 된다는 것은 임계질량(critical mass)이라는 생각을 가리킵니다.
즉 이것은 어떤 단일 중성자가 관념들을 탐사하면서, 분기하는 연쇄반응을 생산하는 핵물질의 임계 표본
(critical sample)으로 진입하는 때라는 것이지요.
물리학자로서 나는 이러한 은유가 으스스하고 불길하다는 점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대신에 도나 해러웨이의 제안에 기반해서 논하고자 해요. 이에 따라 내가 제안하는 바는 회절(diffr
action)의 실행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로써 나는 차이를 만드는 차이들의 패턴을 위한 회절적인 독해를 의미하고자 합니다.
또한 나는 빼기라는 개념에 반대해서 어떤 다른 치명적인 개념을 제안하고 싶어요.
그래서 그것에 대해 조금 설명할까 합니다.
나아가 그것으로 난 적극적이고 창조적이며 예견적인 존재를 함축하고자 합니다.
『우주의 길목에서 만나기-양자물리학 그리고 물질과 의미의 뒤얽힘』(Barade 2007)의 2장에서 나는
회절적 방법론이라고 지칭한 것, 즉 상호간 관통하는 통찰들을 회절적으로 읽어내는 방법을 상세하게
논했습니다.
이 방법은 새로운 통찰을 건설하고 아주 세부적인 문제에서 차이들을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읽어내는 것
이지요.
이와 더불어 이러한 분석에 내재한 인식이 외재성이 아니라 상호간 뒤얽혀 있음을 드러내는 어떤 윤리라
는 것도 알게 됩니다.
회절적 독해는 발명적인 도발을 감행하는 것이에요.
사람들은 이런 방식에 익숙해질 겁니다.
그러한 독해는 상대를 존중하는 것이고, 섬세한 것이며, 윤리적인 참여와 교전을 의미합니다.
나는 이제 내가 비판에 관해 어떤 것을 말했던 바, 당신의 질문에서 가장 난해한 부분으로 돌아가고자
해요.
그것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그 대신에 그것을 우리가 실천할 것인 그런 종류의 도발 그리고 다른
종류의 조우로 위치이동 시키는 것이지요.
그 지점으로 돌아오자면, 물질과 의미의 뒤얽힘이 한편으로는 자연에, 다른 한 편으로는 문화에 있는 이런
이원론을 문제시하게 되는 것이지요.
관심의 문제와 염려의 문제(Maria Puig de la Bellacasa)로부터 사실의 문제를 분리하는 것(Bruno Latour), 그리고 그것들을 여기 미국에서 적절하게 부르는 바 '학제간 분할'에 따라 취급하는 것과 떨어트려 놓는 것
이지요.
이에 따른 노동분할은 일종의 자연과학 같은 것이에요.
이를테면 그것은 사실의 문제와 관심이라는 인문학의 문제에 할당되는 몫과 같지요.
분리된 영역에 대한 관심의 차단이 뒤얽힌 것을 가시적으로 만드는 회절의 패턴들을 구성하는 공명과
불협화음들을 생략할때 회절패턴, 즉 차이를 만드는 차이의 패턴들을 보는 것이 어려워진다는 겁니다.
당신의 질문에 응답하면서 두 가지 예를 제공하고 싶군요.
최근 나는 뉴저지에 있는 스티븐스 기술연구소에서 가진 컨퍼런스에서 한 가지 주요기조를 발표했습니다.
그 연구소는 자신들의 인문학 프로그램을 매우 혁신적으로 개조하기 시작하는 중이지요.
그들은 과학으로부터 통찰을 수용하는데 흥미를 가지면서 그것을 인문학으로 되돌려 주는 연구를 하지요.
그들이 제안하는 것은 과학연구의 잠재적 영항력에 대해 몇몇 사람들이 생각하는 방식을 역전시키자는
것이지요.
과학을 사유하기 위해 인문학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인문학을 재사유하기 위해 과학을 이용하는 것입
니다.
이것이 그들의 기획이고 그것은 매우 흥미로운 컨퍼런스였습니다.
하지만 거기에는 전체를 틀지우는 방법에 대한 어떤 것이 있었지요.
나는 만약 내가 그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된다면 그것에 대해 이해하고 싶었습니다.
우선 필요로 하는 것이 종합이라는 생각이 거기 있었지요.
다시 말해 과학과 인문학이 마치 언제나 이미 서로 뒤얽혀 있다기보다 분리되어 있다는 듯이, 그것들의
결합이나 종합을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거기에는 한편으로 사실의 문제, 자연 등등으로서의 과학과 다른 한편으로 인문학, 즉 의미와 가치,
문화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떻게든 그 둘을 결합하려는 생각이 있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미 존재하는 인문학과 과학 사이의 뒤얽힘이 존재하는 방식에 대해 이야기했지요.
이 둘은 서로 분리되어 성장하지 않습니다.
나는 단지 한편의 과학과 다른 쪽의 인문학 사이에 거울이미지를 찾는 것과 같은 유비적인 사유의 몇몇
한계를 지적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샤론 트로윅이 말해준 놀라운 이야기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일은 그녀가 스탠포드 선형가속장치(SLAC)에 있는 고에너지 연구단체에서 연구작업을 할 때 있었
지요.
그녀는 가속장치의 홀에 서있었는데, 어떤 물리학자가 벽에 있는 프랙탈 이미지들의 그림들을 주시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녀는 그 이미지들에 시선을 던지며 그에게 물었습니다.
"나에게 이 대단히 아름다운 이미지들에 대해 이야기해줄 수 있나요?"
그 물리학자는 그녀를 돌아보며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당신이 왜 그런 질문을 하는지 정말 모르겠군요. 이건 자명하다구요! 당
신이 바라보는 모든 곳에서 이것은 동일하게 존재하지요."
그리고 물론 페미니스트들은 동일하게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해 즐거움을 가지거나 익숙하지 않지만,
차이들에 대한 생각에는 익숙합니다.
물론 그것의 거울이미지는 과학이 문화를 비춤으로써 나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일종의 과학적 실재론 대 사회적 구성주의라는 대당을 가지게 되지요.
물론 둘 모두는 거울에 비춰지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내가 제안하는 것은 회절에 대한 생각이에요.
그것은 나의 동료이자 친구인 도나 해러웨이의 작업에서 드러납니다.
도나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회절의 패턴은 상호작용, 상호간섭, 재강화, 차이의 역사를 기록한다.
회절은 이질적인 역사이지 기원들에 대한 것이 아니다.
반영들과 달리, 회절들은 어디에서도 동일성을 대체하지 않으며, 단지 일그러진 형상(형식)일 뿐이다.
따라서 그것은 [기원과 진리들에 대한] 이야기-만들기의 산업들을 야기한다.
나아가 회절은 비판적 의식의 다른 종류를 위한 은유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지적했던 것은 기하광학으로부터, 거울상 그리고 동일성, 되비추기에 관한 질문들로부터의 이동에
있는 차이입니다.
당신의 이미지를 거울 안에서 보는 거기에는 필연적으로 당신과 거울 사이의 거리가 존재해야 하지요.
그래서 주체와 객체의 어떤 분리가 존재하는 것이고, 객관성은 세계의 거울 이미지에 대한 것입니다.
그리고 대신에 회절을 향해, 차이를 행해 그 문제를 이동시키는 것은 정말로 물리학자들이 기하광학과
대비하여 물리광학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기하광학은 빛의 본성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지요. 실재로 그것은 여러 상이한 렌즈들이나 거울들을
연구하게 되는 것과 유사한 것입니다.
다른 말로 그것은 빛이 입자, 파동 또는 다른 무엇인지에 대해 완전히 불가지론적인 입장을 가지는 것입
니다.
그것은 다만 여러 장치들을 연구하기 위한 근사적 도식일 뿐이지요.
반대로 회절은 당신이 장치의 본성과 마찬가지로 대상의 본성 둘 모두를 연구할 수 있게 합니다.
즉 빛의 본성과 장치 자체의 본성 말이지요.
나는 이에 대해 『만나기』 2장에서 논했지요.
하지만 내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양자물리학을 사용하면 회절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
다는 사실이에요.
회절을 고전물리학의 현상으로 이해하는 것과 양자역학적으로 이해하는 것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나는 도나 해러웨이가 우리에게 가져다 준 이 놀라운 은유를 취해서 양자물리학으로부터 중요한 비고전적
통찰을 부가함으로써 생각을 진행하고자 합니다.
회절은 양자물리학에서 사용하는 식으로 이해하면 단순히 간섭의 문제가 아니라 뒤얽힘의 문제, 윤리-
존재-인식론적 문제입니다.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해요.
이것은 지식이란 직접적인 물질적 만남이라는 것을 강조하지요.
즉 거리를 두고 함께 있는 것, 강제로 분리하지만 행위주체의 가능조건을 개방하고 재활성화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이러한 지식은 어떤 거리로 존재하진 않아요.
주체와 대상의 분리 대신에 '현상'이라고 불리워지는 주체와 대상의 뒤얽힘이 있게 됩니다.
대상성(객관성)이란 세계의 왜곡되지 않은 거울 이미지를 제공하는 대신 신체들에 새겨진 기록(accounta
bility, 의무)과 우리가 나누어져 존재하는 바, 그 뒤얽힘에 대한 응답(responsibility, 책임)에 대한 것이
지요.
만약 우리가 회절을 양자 물리학의 영역으로 가져 간다면, 그것은 우리가 했던 그러한 종류의 이동일 겁
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가 과학, 인문학, 예술, 사회과학을 통찰하는 것에 대한 사유의 어떤 다른 방법을 찾아
낸 것이라고 말할 수 있지요.
그리고 이는 대학 외부로부터 이끌어낸 통찰을 잊지 않게 하는 것이며, 그러한 분과들을 그 다양한 뒤얽
힘에 대해 회절적으로 읽어냄으로써, 그리고 무엇이 배제되고 무엇이 중시되는지 관심을 기울임으로써
수행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과학과 인문학 사이의 관계성를 수립하는데 있어서 매우 다른 방법을 도입하면서 마무리
짓는 셈이지요.
이 방법이 내 생각에 당신의 원래의 질문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내 두번째 예를 정말 간단히 얘기할게요.
그러니까 모든 질문에 대해 이렇게 길게 말하진 읺겠다고 약속할게요.
하지만 시작할 때 뭔가를 잘 차려놔야 해서... 이번 학기에 난 '과학에서의 페미니즘'이라는 강의를 했어요.
강의에는 과학을 배우는 학생들 뿐 아니라 예술, 사회과학, 인문학을 배우는 학생들도 있었습니다.
거기서 우리는 과학문예능력(scientific literacy)의 개념에 대해 이야기하고, 어떻게 과학문예가 과학들의
유일한 응답이 될만큼 성장했는지에 대해 논했지요.
하지만 과학문예란 무엇일까요? 우리는 미국에서 이 분야에 수 백만 달러를 쓰지요.
그런데 사실상 우리는 정말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확실치 않아요.
그리고 과학문예능력를 위해 이런저런 것을 가늠하고 측정하느라 수백만 달러를 쓰고난 뒤에도, 우리는
이전과 달라진 것이 없어요.
이 측정에 따르면, 과학문예능력을 가진 사람들은 대개 3에서 6퍼센트 정도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실재 우리가 보유하고 있는 과학자와 기술자들의 수와 동일하지요.
이것은 과학문예가 이해되는 방식에 대해 당신에게 무언가를 말해줍니다.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측정되어지며, 어떻게 사고되어지고 있는지, 또한 그것을 위해 누가 응답할 필요가
있는지 등등도 말해 주지요.
그래서 우리는 어떤 다른 종류의 문예능력이 과학하기를 위해 실재적으로 요구된다는 사실에 대해 이야기
했습니다.
이 사실에 따르면 여러 새로운 과학과 기술에 관한 윤리적, 사회적, 법적 함축을 고려하는 것은 충분치 않
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는 생물윤리학이라는 새로운 영역을 고려했지요.
이 분야에서 윤리학은 이미 주어진 과학적 기획들의 상상가능한 결과들을 고려하는 문제에 유일하게
대응합니다.
하지만 결과라는 생각은 잘못된 시간성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잠재적인 결과들에 관해 질문하는 것은 거의 없고, 그래서 [거기 응답하는 것이] 너무 늦어지고 맙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윤리학이란 마땅히 연구실 의자에서 이루어는 것이 올바르다고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과학적으로 문예활동을 한다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말하자면, 그 질문은 여기서 당장 존재하는
신체적인 생산의 여러 기제들을 정체성화(동일시, identify)하기 위해 취하는 것이 무엇인가입니다.
그러므로 그것들을 정체성화하기 위해 우리가 문예활동의 의미를 더 넓게할 필요가 있으며, 연구실 의자
주위로 모든 종류의 사람들을 모을 필요가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과학문예활동은 더 이상 과학에 관해 유일하게 책임을 가지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나는 그것이 우리가 우리 자신을 교육과 관련해서 많은 문제들과 조우하는 길들 중 하나라고 생각해요.
Q2:
행위적 실재론(agential realism)에 '존재하는' 그 행위주체(agent)가 무엇이고, 그것이 어떻게 구성되는지
우리에게 조금 더 설명해 주실수 있습니까?
KB:
첫째로 나는 '행위주체' 또는 행위자(actant)라는 단어로부터 좀 떨어지고자 한다고 말하고 싶군요.
왜냐하면 그 단어들은 내가 제안하는 관계적 존재론에 반하는 작용을 하거든요.
또한 행위수행항(agency)을 가지는 또는 그것을 부여하는 행위주체들이 존재한다는 생각은 비인간에
대한 말이에요(행위수행항의 부여란 역설적 생각이 아닌가요?)
이러한 생각은 끊임없이 오래되고 동일한 인간주의의 궤도로 우리를 끌어당기지요.
인간주의의 중력에 저항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특히 그것이 '행위주체'라는 물음으로 다가올 때는 더 그러하지요.
하지만 나에게 행위주체는 갖가지 수준들을 '가지는' 어떤 것 또는 어떤 사람이 아니에요.
나는 독립적으로 실존하는 개별체들이라는 바로 그 생각을 대체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 중요성에서 행위주체를 회피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반대로 관계적 존재론들에 비추어 그것을 재론하자는 것이지요.
행위주체는 고정된 것이 아니에요.
즉 어떤 사람이나 사물의 고유성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보다 행위주체란 일종의 행위제정(enactment), 뒤얽힘들을 재형상화하기 위한 가능성의 문제입니다.
따라서 행위주체는 어떤 자유로운 인간적인 감각에 있어서 선택에 대한 것이 아니지요.
그것은 가능성들과 의무에 관한 것이며, 이로 인해 신체적인 생산의 물질-담론적 기제들이 재형상화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그러한 행위들에 의해 드러난 경계들 간의 절합과 배제도 포함됩니다.
당신이 질문한 것들 중 하나는 행위주체의 방법(how)이고, 어떤 의미로 그 방법은 정확히 개별 실천의
특수성이지요.
그래서 나는 그것에 대해 일반적인 답변을 할 수 없지만, 아마도 행위주체의 가능성들의 공간에 대해
도움되는 무언가를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행위적 실재론자가 고려하는 행위주체란 조직체 간의 충돌(버틀러가 한때 제안했듯이)을 요청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여성성에 관한 모순적인 명칭들인데, 그래서 우리는 완전하게 신체화한 여성성이란 결코 성공할
수 없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순된 요청이기 때문입니다.
행위적 실재론은 그러한 종류의 조직들의 충돌을 요구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처음부터 상호행위들이 결코 결정되지 않기 때문이지요.
심지어 조직들이 강화될 때에도 그러합니다.
상호행위들은 배제를 야기하고 배제는 결정론을 차단합니다.
하지만 일단 결정론이 차단된다고 해도, 이것이 우리를 자유의지의 선택권에 맡겨 놓지는 않지요.
나는 우리가 한편으로는 결정론에서 또는 다른 한편에서는 자유의지과 관련해서 인과성과 행위주체에
관한 질문에 대해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해요. 원인과 결과는 마치 당구공들처럼 하나가 다른
하나를 뒤따른다고 가정하고,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실재로 인과적 의미로 받아들인다고 말하는 습관을
가지게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나는 실재론이 그러하고, 그러했던 것과 같이 어느정도는 인과성이 다소 오염된 단어가 되었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나는 사람들이 다시 한번 인과성에 대해 이야기하도록 하려고 애를 쓰지요.
왜냐하면 내 생각은 그것은 매우, 매우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어떤 집단에 암이 퍼져 있다는 것을 발견한 곳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을 안다면, 나는 그
집단의 본성에 대하여, 그리고 그 인과관계에 대해 어떤 것을 알기를 원할 겁니다.
왜냐하면 내가 만일 미국의 러브 카날(Love Canal) 지역, 그러니까 독성이 대량으로 퍼진 어떤 인구밀집
지역에 있고, 사람들이 암에 걸리기 시작했다면, 나는 사람들을 탈출시키기를 원할 것이기 때문이지요.
다른 한편, 만약 내가 마요(Mayo) 치료센터에 있고, 그곳에서 암 환자들을 치료하고, 암에 걸린 많은 사람
들이 있다면, 그렇게 할 필요는 없겠지요.
나는 실제로 우리가 좀더 신중하게 이런저런 상이한 종류의 인과성들을 분류하고 어떻게 인과성을 다시
사유할 수 있을지 생각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부분적으로 내가 '상호-행위'(intra-action)라는 개념으로 의미하는 바이지요.
이 개념은 인과성에 관한 새로운 사유방식을 제안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신논리주의의 한 종류가 아니라, 우리를 상호작용의 장으로부터 이동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 장에서 우리는 분리된 실체들로부터 시작해서 그 실체들이 상호작용합니다.
우리는 이 장으로부터 상호-행위로 이동하는데, 여기서는 주체와 대상이 출현하는 상호작용이 있게되
지만, 현행적으로 그것은 인과성 자체에 대한 어떤 새로운 이해로서 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선, 행위주체는 광범위한 재-형상화의 가능성에 대한 것이지요.
그래서 행위주체는 인간에 의해 지배되는 어떤 것이 아니라, 비인간에 대한 문제도 되는 것입니다.
재형상화란 어떤 법칙의 제정입니다.
그리고 만일 당신이 그러하고자 한다면, 거기에는 '인간' 뿐 아니라 '비인간'도 기입됩니다.
동시에 나는 여기서 인간과 비인간의 배치를 가로질러 민주적으로 분배하는 행위자에 대해서는 말하고
있지 않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자 합니다.
심지어 거기 어떤 행위주체(agent) 자체가 없다 해도, 내가 제안하는 행위자(agency) 개념은 힘의 불균
형의 임계지점에 대항하여 나아가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지요.
상호-행위의 특유성은 어떤 힘의 장에서 복잡성의 힘의 불균형이 가진 독특함에 대해 말해 줍니다.
나는 몇몇 사람들이 인간적 주체에 국한된 행위자를 가지지 않는 것에 대해 매우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내 생각에 그것이 첫 발을 디디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러한 종류의 국지화나 인간 주체의 특별한 성격이 그것에 대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힘의 불균형에 대해 고려하는 시작이라는 것이지요.
하나의 단순한 예를 들어 보지요.
내가 인터넷을 훑어보는 중에 어떤 논문을 발견했는데, 그것은 크리스 윌버트가 쓴 <이윤, 전염병, 가금류:
고병원성 조류독감의 상호-행위적 세계>(Wilbert 2006)이었어요.
이 논문은 전국적인 독감의 잠재성에 관한 생물지리정치학이었지요.
조류독감(H5N1)을 어떤 자연문화적 현상으로 바라보는 크리스의 분석은 상호-행위적 인간과 비인간적
실행의 행위적 뒤얽힘의 중요성에 방점을 둡니다.
크리스는 세계적인 건강 조직들과 정부들은 철새들을 정착시키고, 소규모 양계농장주들을 감시하려고
하지만, 경험적인 자료는 이러한 것들의 인과적 연관성을 지지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질병은 대규모의 공장식 가금류 생산의 지리적인 회절 패턴을 따르지요.
후자의 경우는 미증유의 조류 밀집도를 초래하고, 생식력이 좋고 돌연변이하는 축산병원체를 위한 일급의
서식처를 제공하게 되지요.
기업화되어 생산되는 고기들, 국제적인 수의학 실천, 생명안전성 실행, 국제무역협약들, 운송네트워크는
인구 밀집도를 증가시키고, 여러가지 행위적 기구들 사이에 더 많은 것들을 작동시킵니다.
인과성은 상호작용적이지 않으며, 상호-행위적이지요. 정책 입안은 다양한 원인들에 대한 부가적인 접근
들에 기반하고 있는데, 전염병을 피하는 중에, 핵심적인 요인들, 예컨대 가장 가난한 인구를 위한 안전한
음식의 저렴한 형태를 공급한다든지, 동물대량 학살의 산업적 형태들을 제거한다든지 하는 것들을 놓치는
겁니다.
그래서 부가적으로 행위자의 '인간적'이고 '비인간적'인 형식들에 그 자체로 주의를 기울이는 것에 대한
중요성을 훌륭하게 설명하는 것에 크리스의 깨달음들이 있는 것이지요.
여기서는 행위자가 인간적, 비인간적 실체들과 나머지 것들에 분배될 때, 고려되는 실천의 소외가 사유
되는 것이지요.
당신도 알다시피 소외되는 것은 어떤 종류의 전염병에 기여하는 아주 복잡한 물질적 실행들의 어떤 전체
적인 배열입니다.
이것은 조직체 전체에 대해서 또는 사람들이 하는 어떤 종류의 행위들에 기여하는 그런 전염병이 아니
지요.
나는 크리스를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난 당신이 여기 주목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왜냐하면 내 생각에 그가 우리에게 어떤 흥미로운 생각거리를 주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도움이 될만한 다른 예는 해러웨이가 든 예입니다.
그것은 바르바라 스무츠(Barbara Smuts)에 의해 제기된 예이지요.
그녀는 미국 생명인류학자로서 의학연구를 위해 야생 개코원숭이를 탐구하러 탄자니아에 갔습니다.
그녀는 비인간 영장류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탐구하는 과학연구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녀는 연구 중인 대상들의 행동에 영향을 주지 않지요.
거리는 객관성의 조건입니다.
스무츠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말해줍니다.
즉 이러한 진단은 그녀의 탐구에 완벽한 재앙을 초래했다는 겁니다.
그녀는 스스로 어떤 관찰도 할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다는 것을 발견한 거지요.
왜냐하면 개코원숭이가 끊임없이 그녀가 하는 행동에 신경을 쓰더라는 겁니다.
그녀가 깨달은 바는 이러한 원숭이의 행태가 그녀의 낯선 행동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이었지요.
원숭이들은 끝내 그녀를 무시하지 못한 겁니다.
그녀는 원숭이들의 집단 내에서는 나쁜 사회적 주체가 되어간 겁니다.
객관적으로 연구를 계속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 원숭이들에게 응답하는[책임지는] 것이었지요.
다시말해 그런 객관성은 페미니즘 과학이 늘상 강조해 왔던 것인데, 객관성이란 응답의 문제이지 거리의
문제가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수행되었던 것은 그녀가 비인간 영장류에게 완전하게 응답하는 법을 배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방식으로 그녀는 좋은 개코원숭이 집단의 일원이 되었지요.
사람들은 비인간 영장류에 대해 지성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고 결과적으로 그들은 그녀를 놔두고 그들의
일을 하기 시작했으며, 그녀는 연구를 계속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Q3:
『우주의 길목에서 만나기』와 여러 학술 저널 논문에서 당신은 해러웨이를 따라 '회절'이란 개념을
제안했지요.
이 개념은 차이의 관계적 본성을 의미하며, 미리 존재하는 실체들로서가 아니라, 상호-행위로서, 다른
텍스트들이 그로부터 실존하게 되는 힘들로서 이론들과 텍스트들을 다루기 위한 방법론이지요.
다른 한편으로 당신은 전체 저작들을 통틀어 닐스 보어(Niels Bohr)의 연구에 대해 강하게 집중합니다.
당신의 철학 재기술은 그의 텍스트 전체 안에서 작동하는 것으로 보이지요.
그런데 그것은 추종하는 것도, 추종하지 않는 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당신의 연구는 현재 대학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보어의 저작에 대한 가장 강력한 주석
중 하나로 읽힐 수 있지요.
아마도 이것은 보어를 인문학적으로 읽는데 성공한 첫번째 사례가 될 것 같습니다.
물론 보어 다음으로 당신은 아인슈타인, 슈레딩거, 메를로-퐁티, 해러웨이, 들뢰즈, 라투르와 같은 다른
과학자나 학자들도 읽었지요.
특히 철학자들과 그러한 학자들에 관해서는 과학의 영역 안에서 전통적으로 읽지는 않고, 비록 그저
지나친다 하더라도, 매우 확정적으로 읽어가는 것으로 보입니다.
당신이 다루는 이론들을 회절적 방법론을 위한 이론으로 들여오면서, 당신이 다루는 이러한 방법적 개념
화들을 어떤 방식으로 평가하시는지요?
다른 말로 하자면, 당신의 연구는 보어의 연구에 동의하든 동의 하지 않든 어떤 중재가 아니라, 보어의
연구와 행위적 실재론 둘 모두를 창조한다는 의미가 있는 것인가요?
그리고 보다 일반적으로 회절의 [페미니스트의] 세대적 함축은 무엇인지요?
페미니스트들은 보통 오이디푸스적 특성에 의해 지배당하는 사유를 경계하지요.
이를테면 로시 브라이도티 같은 페미니스트들은 스승들(Masters)과의 오이디푸스적 관계를 모든 방면
에서 반복하지 않는 어떤 방법론에 관해 논했지요.
브라이도티는 스승들의 업적을 부정함으로써 그들의 위치를 긍정하는데, 이것이 당신이 수행하는 비판의
비판과 실질적으로 매우 근접해 가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회절은 텍스트들과 학자들 간 관계, 다시말해 종속적(스승의 영역에서 '새로운' 연구를 수립하는 것)이지도
비종속적(스승의 연구를 부정함으로써 스승을 확고히 긍정하는 것)이지도 않은 그런 관계를 허용하는 것
인가요?
KB:
내가 이미 회절적 독해에 대해 말을 했습니다만, 일단 당신의 질문은 물질적인 것과 나의 관계를 정말로
아름답게 언급했다는 건 분명해 보입니다.
나는 회절적 독해를 하는 와중에 물질적인 것에 연루된 것이지요.
나는 우선 당신이 회절적 독해들의 핵심에 관한 내 책을 꼼꼼하게 읽어준 것에 매우 감사드려야 겠습니다.
나는 전적으로 당신이 했던 말, 즉 내가 보어의 연구를 우러러보지도 않으며, 다소 '비종속적인 딸'처럼
바라보지도 않는다는 그 말에 동의합니다.
하지만 서로를 통해 다양한 통찰들을 읽어내기 위해, 그리고 뭔가 새로운 것을 생산하기 위해, 사유하는
존재의 새로운 패턴이 있는 것이지요.
동시에 보어가 우리에게 말하려고 한 바, 그 본질적인 것에 상당한 주의를 기울이는 것을 해 나갈 필요도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당신이 나의 연구에 대해 그렇게 했다고 생각했기에, 앞서 감사를 드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Q4:
'젠더'가 젠더 연구의 장에서 의심할 여지 없는 기초로 보이는 개념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개념적 전통은
영미적이고 언어학적인 방식으로 특성화되어 왔습니다.
젠더 문제를 연구하는 페미니스트 학자들은 대개 생물학적 결정론이나 생물학적 본질주의에 반하여 어떤
논증을 수립하고, 학술적으로 주된 전통적인 사유에서 뿐 아니라 대륙의 페미니즘 철학에 대해서도 어떤
고정된 성적 존재론을 귀속시키지요(특히 뤼스 이리가라이의 연구).
펠릭스 가타리는 언젠가 이 이슈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습니다.
만약 질 들뢰즈와 내가 섹슈얼리티에 대해 말하고 욕망에 대해 말하는 대신 실천적인 입장을 취한다면,
그것은 삶과 창조의 문제란 결코 심리학적 기능들, 생산적 기능들로, 즉 몇몇 특정한 신체의 차원으로
환원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문제들은 사회와 정치의 장에서 개체를 넘어서거나, 그밖에 개체적 차원 전에 존재하는 요소들을
포함하지요(Guattari and Rolnik[1982] 2008, 411).
'성차'에 대해 이러한 비-재현주의자의 임무는 이 개념에 관한 당신의 독해와 근접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당신이 제안한 어떤 존재-인식론은 물질(다른 신체적인 물질 가운데에)과 의미가 언제나 내재적으로 접
히고 이행하는 방식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하지만 정신분석으로부터 어떤 개념을 가져오는 대신에(욕망 같은), 당신은 물리학에서 그것을 가져오지요(보어의 개념적 장치들).
그렇다면 양자 물리학은 당신의 페미니즘과 접목할때 어떤 도움을 주는지요?
KB:
10년 전에 나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자주 제기하곤 했지요.
"당신의 작업이 여성이나 젠더에 관한 것이 아니게 된 이후, 무엇이 페미니즘과 관계되어야 하는가?"
나의 대답은 물론 다음과 같습니다.
'모든 것'. 기쁘게도, 당신이 던진 질문은 오랜 시간 동안 그 질문을 작동시키는 생각 이상으로 중요하지요.
그리고 나는 대화의 단계가 그 시간 동안 이동했으며, 그래서 나는 그 속으로 바로 뛰어들 수 있다고 가정
하고 있습니다.
에로스, 욕망, 삶의 역능은 모든 것을 관통합니다.
특수한 신체의 부분들 뿐 아니라 신체 부분들 간의 특별한 종류의 조우들에 이르기까지 말입니다.
물질이란 그 자체로 어떤 결여나 욕망의 흐름을 매개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질성은 그 자체로 늘 이미 욕망하는 역학계, 구체적인 재형상화, 에너지 수용과 에너지 방출, 살게 하기
와 살아가기입니다.
특히 나는 물질(질료)이 어떻게 물질이 되는지에 대해 관심을 기울여왔지요.
질료(물질)는 어떻게 스스로를 느끼는지에 대해서 말입니다.
이것은 페미니즘적 기획입니다.
그것이 어떤 여성이나 민중 또는 다른 어떤 거시적인 것을 시야 안에 두고 있든 그렇지 않든 말입니다.
다른 새로운 유물론적 페미니스트들 - 특히 비키 커비(Vicky Kirby)가 이 방면에서 특출합니다 - 에
따르면, 느낌, 욕망 그리고 경험은 인간의식의 단일한 특성들 또는 능력들이 아닙니다.
물질도 느끼고, 대화를 나누며, 겪고, 욕망하고, 갈망하며 기억합니다.
당신은 또한 이 주제에 관해 노엘라 다비스(Noela Davis)의 논문을 볼 수 있을 겁니다(Davis, 2009).
나는 이에 대해 내 책 7장에서 보다 생생하게 써보려고 노력했지요.
그것에 대해 나는 많은 관심과 비판을 수용했는데, 그러나 특별히 페미니즘적인 비평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적어도 내 마음에 드는 여러가지 중요한 요소들이 거기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난 이것을 좀 검토해 보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그 장(chapter)은 사물/사태의 물리학 안으로 깊게 들어가는 것이고, 결과적으로 많은 인간성과
사회과학자들이 그들이 생각하는 것과 무관하다고 여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언제나 내 페미니즘 강의에서 물리학을 가르칩니다.
그 이유는 부분적으로나마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단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의 측면에서, 과학적 관심과
과학적 글쓰기가 가진 예외적으로 협소한 틀거리가 의문스럽기 때문이지요.
과학과의 교전에 대해 누가 책임이 있을까요?
나는 그 장에서 진행되는 것의 몇몇을 당신에게 말하고 싶어요.
왜냐하면 나는 그것이 물질, 공간과 시간 등등에 관한 페미니즘 주제의 몇몇 핵심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정말 중요한 방법들을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난 당신이 양자 물리학에 대해 알 필요가 있는 것에 대해, 그리고 그 책의 7장에서 전개되고 있는 것에
대해 정말 빠르게 이야기해주고자 합니다.
그것은 당신에게 몇몇 결론들을 보여줄 것이고, 내가 생각하는 바, 그 함축이 사회 정의에 관한 질문에
대해 생각하는 것과 관련이 있음을 알려 줄 겁니다.
내 생각에 핵심은 여기 있습니다.
그러니 양자 물리학에 관한 집중강좌를 제시하도록 하지요.
고전 물리학에 따르면, 단지 두 가지 종류의 실체들만이 세계에 존재합니다.
그것은 입자와 파동이지요.
입자는 파동과 상당히 다릅니다.
입자는 국지화된 실체로서, 시공간 안에 어떤 특정한 위치를 점하지요.
그리고 당신은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에서 두 개의 입자를 가질 수 없습니다.
이와 달리 파동은 전혀 실체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파동은 장(fields) 안에 분배됩니다.
만약 당신이 대양의 파도를 생각한다면, 파도가 자주 다른 파도와 겹쳐진다는 것을 알게 될 겁니다.
그것들은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를 점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이 바로 잘 알려진 것들 중 일부이지요.
한편으로 우리는 국지화된 것을 가지게 되고, 다른 한편으로 상당히 비국지화된 어떤 것을 가지게 됩니다.
이것은 매우 다른 종류의 실체들이라고 존재론적으로 논해질 수 있지요.
물리학에서는 어떤 것이 입자고 파동인지를 발견할 수 있는 아주 간단한 기계장치가 있지요.
이중슬릿장치(two-slit apparatus)가 그것입니다.
당신이 한 더미의 공을 집어서 그것들을 무작위로 그 두 슬릿(틈)에 던지면, 당신은 대부분의 그 공입자들
이 곧장 두 슬릿의 맞은편 벽으로 되튀기는 결과를 보게 될 겁니다.
당신은 여기서 '산란패턴'(scatter pattern)이라고 불리는 것을 얻게 되지요.
당신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만약 내가 이방의 출입구 바깥쪽에서 테니스공들을 아무렇게나 세게 던진다면, 공들 중 대부분은 출입구
맞은편으로 날아가고 몇 개만 그 옆으로 흩어질 것입니다.
이와 반대로 파동기계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물속에서 어떤 요동을 일으키는 기계를 생각해보자는 겁니다.
이 요동이 이 슬롯과 같이 두 개의 구멍을 가진 '방파제'를 친다면, 그 요동은 그 구멍들 쪽에서 파동을
그리며 불거져 나아갈 것이고, 당신은 힘을 통과하게 하는 동심의, 중첩하는 원들을 목격할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내가 두 개의 돌을 연못에 던지면 발생하는 현상과 유사하지요.
그때 나는 동심의 원들이 중첩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것이 회절패턴이고, 당신이 보는 것은 거기에 파동의 강도 증가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두 개의 파동이 만날 때, 물마루와 물마루가 만날때, 그것들은 보다 고도의 파동을 형성하지요.
하지만 가끔 당신은 서로 상쇄하는 것을 보게 될 텐데, 그때 그것들은 사라집니다.
그것은 어떤 상당히 다른 종류의 패턴을 만들어 냅니다.
자, 그럼 만약 우리가 두 개의 슬릿을 가진 장치로 전자를 실험한다면 어떤 일이 발생할까요? 우리가 극소의 입자인 전자를 생각하는 것이 익숙하기 때문에, 당신은 어떤 입자 패턴이 주어질 것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하지만 우리가 실재로 얻게 되는 결과는 전자들이 회절이나 파동 패턴을 전개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았다시피, 회절 패턴은 중첩 파동에 의해 생성됩니다. 하지만 전자가 중첩할 수 있나요? 그들은 입자에요. 그들은 서로 중첩할 수 없습니다. 당신은 그 전자들이 중첩할 것이라고 생각하겠지요. 그러나 당신은 하나의 전자를 따로따로 쏘아보내는 실험을 할 수 있습니다. 만약 당신이 단지 하나의 전자를 번갈아 쏘아보낸다면, 당신은 이러한 회절패턴을 구성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회절패턴을 설명할 수 없을 것처럼 보입니다. 이 입자가 파동처럼 활동하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은 거의 미스테리하지요. 특히 아인슈타인은 이 사실에 대해 매우 흥분했고, 전자가 슬릿을 통과하는 것을 볼 수 있는 장소에서 실험을 진행해야 한다고 주장했지요. 나는 이 슬릿-선택 탐지기(which-slit detector) 실험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군요. 왜냐하면 이것이 내가 논하는 바에 해당되거든요. 이 실험에서 내가 했던 바는, 스프링이 장착된 슬릿으로 상단 슬릿을 교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입자가 그 상단 슬릿을 통과하게 되면, 그것은 운동량의 일부를 상단슬릿에 운반하게 되고, 그것이 살짝 움직이는 것이지요. 그러면 나는 '아, 전자가 상단슬릿을 통과했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따라서 이러한 장치는 전자가 스크린 위에 도달하는 동안 어느 슬릿을 통과하는지 측정할 수 있는 방법이 됩니다. 그리고 아인슈타인은 만약 우리가 이러한 실험을 한다면, 하나의 슬릿이나 다른 슬릿을 통과하는 입자와 간섭 패턴을 보여주는 파동 둘 모두에 따라 활동하는 양상 안에 있는 전자를 파악하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보어는 말했지요. "아니요, 잠깐 기다려 보세요." 만약 당신이 이 실험을 하게 되면, 당신은 이제 장치들을 바꾸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실험에서 관찰하게 되는 것은 어떤 '현상' 또는 뒤얽힘 또는 장치들과 관찰되는 대상의 분리불가능성입니다. 보어는 다음과 같이 말했지요. 만약 아인슈타인이 그가 제안한 이중슬릿장치에 익숙해진다면, 그는 어떤 입자 패턴을 얻게 되지 회절패턴을 얻게 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이것에 대해 열심히 파헤쳐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실험이 말하는 바가 전자의 존재방식이 내가 그것을 측정하는 방식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이제 양자 물리학 강의를 빨리 끝낼게요. 보어는 이를 위한 설명수단을 가지고 있어요. 그것은 다시 말해 우리가 측정하는 그 속성들이 독립적인 대상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독립적 대상들은 추상적 개념들입니다. 이것은 잘못된 대상 지칭이지요. 현행적 대상 지칭은 현상, 다시 말해 우리가 전자와 측정기구라고 부르는 것들 간의 상호-행위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측정기구를 바꿀때 그 존재방식이 변한다는 것이 놀랄만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떤 전반적으로 다른 현상을 탐구하는 중이기 때문이지요.
나는 이제 내 책 7장에서 논하고 있는 것으로 진입하고자 합니다. 내 생각에 거기에 다시 한 번 중요한 페미니즘 '강좌'가 있지요. 그리고 물론 내가 '페미니스트 강좌'라고 할때, 그것은 내가 자격을 부여할 필요가 있는 어떤 알아보기 힘든 속기록이지요. 왜냐하면 물론 내가 행위적 실재론으로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 이미 페미니즘 이론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것이 7장의 아름다움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나에게 그것은 한편으론 페미니즘 이론을 통찰하는데, 그리고 물리학적 통찰에 있어서,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그것을 차례로 행위적 실재론을 구성함을 통해 읽어내는 데 있어서 굉장히 만족스러운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되돌아가서 행위적 실재론이 양자 물리학에서 특정 종류의 근본적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지 어떤지를 이해하게 될겁니다. 그리고 행위적 실재론이 그것을 수행하기에 충분한 힘이 있다는 사실, 그리고 페미니즘 이론이 물리학을 말하기 위해 중요한 것이라는 그 사실은 놀라운, 정말로 놀라운 것이지요. 그리고 나 또한 그러하기를 원하는 바가 바로 그것이지요. 그리고 사실상 당신이 행위적 실재론과 함께 과학이 뭔가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실재적으로 보여줄 수 있고, 이러한 중대한 관심사들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때, 그 질문은, 내가 그 결과를 물리학 저널에 발표해야 하든 책에 남기든 말든 내게 중요한 것이지요. 그러니까 물리학자들은 물리학에 관해 뭔가를 발견하려면 페미니즘 책을 살피러 가야 할겁니다. 나는 물론 출판하는 쪽을 택했지만 되돌아보면 그건 실수였어요. 책이 나오는 기간이 너무 긴겁니다(3년 이상이 걸려요). 그리고 몇몇 물리학자들은 그러한 자각 없이 내 생각들에 개입합니다. 출판 행위란 언제나 정치적이에요.
주제로 돌아와보죠. 보어와 하이젠베르그는 총체적으로 불화합니다. 보어와 아인슈타인 뿐 아니라 보어와 하이젠베르그도 그렇지요. 하이젠베르그는 실험장치를 바꿀때, 파동패턴에서 입자패턴으로 바뀌는 이유가 실험자가 입자를 방해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지요.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알 수 있는 한계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매번의 측정이 당신이 측정하는 것을 방해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를 "(하이젠베르그) 불확실성 원리(Uncertainty Principle)"라고 불렀습니다. 이 명칭은 미국인들에게 보다 유럽인들에게 더 익숙합니다. 하지만 보어는 하이젠베르그와 논쟁하면서, 그가 불확실성을 주장할 때 어떤 근본적인 오류를 범했다고 봤어요. 문제가 되는 것은 전혀 불확실하지 않고, 오히려 불확정적(indeterminacy)이라는 것이지요. 다시말해 우리가 측정을 할 때 발생하는 일은 무언가를 방해하면서 결과적으로 우리의 지식이 불확실해진다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사물/사태의 고유한 속성이 없다는 것 그리고 우리가 상호-행위적 측정을 하기 전에는 실체들이라고 부르고자 하는 사물/사태의 고유한 경계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 보어는 사물/사태들은 결정되어 있지 않다(indeterminate)고 말하는 것이지요. 측정 이전에는 어떤 사물/사태도 존재하지 않으며, 측정이라는 바로 그 행위가 결정된 경계들[규정적경계들]과 사물/사태의 고유성을 생산한다는 겁니다. 따라서 그의 주장은 어떤 인식론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의 존재론적 원리에 해당되지요. 다른 말로 해서, 보어에게 입자는 내가 위치라고 부르는 어떤 것을 측정한다고 할 때의 그 위치를 독립적으로 가지지 않습니다.
자, 그렇다면 이제 여기에는 누가 정당한지를 판별할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말하고 있는 것은 당신이 어떤 측정을 하기 전에 일어난 것에 대한 경험적 결과를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그 문제를 해결할 방법조차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실재적으로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있어요. 이것은 놀라운 일이지요! 우리는 이제 실험적 형이상학을 할 수 있다는 겁니다. 물론 이것은 단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지칭하는 하나의 지표일 뿐입니다. 즉 한편으로 물리학과 다른 편에서의 형이상학 또는 철학을 가르는 경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놀랍고 정말로 굉장한 실험이 있는 것이지요. 이것은 물리학자들이 과거 십 년간 또는 이전에 그것이 기술적으로 가능하지 않았지만 이제 비로소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유명한 이념적 착상(Gedanken) 또는 보어와 하이젠베르그의 사유실험들은 이제 처음으로 실행될 수 있게 된 겁니다. 즉 실재로 실험실 안에서 수행된다는 것이지요. 그들은 그러한 것들이 실재로 이루지리라고 결코 생각할 수 없었지요. 그리고 그들은 그것들이 현실화되어야할 실험들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어요. 그것들은 단지 생각을 위한 실험이었으며, 그것을 위한 도구였을 뿐이지요. 하지만 이제 이러한 실험을 실재로 행할 수 있는 기술적 가능성이 존재합니다. 내가 슬릿선택을 측정할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여줄 수 있게 된 겁니다. 아인슈타인이 옳았고, 양자 이론이 자기모순적임을 보여주는 입자와 파동 둘 모두로 존재하는 전자를 파악하는 것일까요? 또는 보어가 옳고, 내가 실재로 선택슬릿을 측정하면서, 어떤 입자패턴과 간섭패턴을 획득하게 될까요? 하지만 이것들에 비해 보다 아름다운 점은 이 경우에 물리학자들이 해 냈던 것이, 무언가 이미 존재함으로써 방해한다는 하이젠베르스의 설명에서 어떤 실험을 디자인하는 것이 설명의 일부가 될 수 없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하이젠베르그는 이러한 실험을 고안해낸 것입니다. 만약 어떤 일이 발생한다면, 그것은 방해라는 것이 아닌 다른 이유가 있다는 것이지요.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하면, 어떤 원자들의 광선이 따라 나온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것들은 루비듐(rubidum) 원자고, 그 루비듐 원자들이 이중슬릿에 도달하기 전에 발생하는 사태는 루비듐 원자에 얼마간의 에너지를 전달하는 레이저 광선이 있다는 것입니다. 원자가 에너지를 얻을 때 발생하는 사태, 즉 루비듐의 내부 궤도 안에 이는 전자에 발생하는 사태는 그것이 레이저 광선으로부터 얻은 에너지로부터 어떤 더 높은 에너지 준위로 단숨에 올라간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것을 '들뜬 상태'(excited state)라고 부릅니다. 보세요, 여기에 벌써 물리학에 욕망에 관한 말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빈구멍들, 즉 마이크로메이저의 빈구멍을 지나가면서 또 그것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선택슬릿 검사기(which-slit detector)인 것이지요. 당신은 이것 이외에 마이크로메이저 공백에 대해 어떤 것도 알 필요가 없습니다. 들뜬 상태에 있는 루비듐 원자가 하나의 마이크로메이저 공백 또는 또 다른 마이크로메이저 공백 안으로 들어갈 때, 전자는 그것의 기저상태(ground state)로 되떨어지고, 그 와중에 그것은 포톤입자를 방사하며 두 개의 슬릿을 통과해 가는 것이지요. 그래서 루비듐 원자는 계속 두 개의 슬릿을 통과해 가면서 이러한 포톤 궤적을 남기게 됩니다. 그것은 위쪽 공백 또는 아래쪽 공백에 남게 되고, 두 개의 슬릿을 통과하면서 스크린을 치게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실험입니다. 그래서 하이젠베르그가 여기에 속하지 않는 이유는 루비듐 원자가 들뜬 상태가 되고 다시 안정을 되찾는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원자의 진행에 영향을 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겁니다. 거기에는 어떤 방해도 존재하지 않아요. 여기서 물리학자들은 매우 영리하게 선택 슬릿 감지기를 만들지요. 그것은 루비듐 원자의 진행계기를 방해하지 않는 감지기이지요. 그래서 그것은 1번 감지기나 2번 감지기에 숨길 수 없는 흔적을 남가게 됩니다. 그 흔적은 슬릿을 아무런 방해 없이 통과한 흔적입니다. 이제 만약 당신이 선택-슬릿 감지기 없이 이것을 실행하면서, 이중슬릿에 루비듐 원자를 쏘아보낸다면, 당신은 어떤 회절 패턴을 얻게 될 겁니다. 하지만 만약 레이저를 그곳과 마이크로메이저 공백에 놓으면, 그것이 슬릇 중 하나로 통과하는 것을 발견할 것이고, 그러면 어떤 산포 패턴(scatter pattern)이나 입자 패턴으로 옮겨지는 것을 보게 될 겁니다. 그러나 두번째 것은 확실히 산포패턴이지요(파동들의 변화하는 강도 패턴이 아니라). 나는 다만 당신에게 거기에 아무런 방해가 없다는 것과 그래서 그것이 놀라운 사실이라는 점을 말했습니다. 그것은 보어가 옳고, 아인슈타인은 틀렸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하지만 이제 여기에 우리는 페미니스트로서 정말로 주의를 기울여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제 정말 놀라운 어떤 것이 여기 있기 때문이지요. 그것은 내가 실재로 원자들이 통과하는 슬릿을 측정하는데 어떤 방해물도 만들지 않았기 때문에, 당신은 분명 원자가 슬릿을 지나 이쪽이나 저쪽의 슬릿에 분명한 흔적을 남긴후 내가 그 정보를 삭제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 아니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지 물을 것입니다. 내가 회절 패턴을 다시 얻을까요? 만약 어떤 방해요소가 있다면 완전히 '방해가 없는' 딱 그러한 상태가 있을 수 있는지 어떤지 아는 것은 참 어렵습니다. 하지만 여기엔 아무런 방해도 없다는 것, 기억하시지요? 그러니 만약 내가 슬릿 선택에 관한 정보를 지운다면, 실재로 내가 회절패턴을 얻을지에 대한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지운 부분은 내가 선택슬릿 정보를 지우려 한 그 부분이지요. 내가 그렇게 한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두 가지 다른 공백을 취해서 그들 중 두 개, 즉 두 마이크로레이저 사이의 경로를 취하고, 거기 사진 집열판을 놓지요. 리비듐 원자가 거기 남겨져서 그 사이를 통과해 스크린을 친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러나 포톤 입자를 남깁니다. 양광자말입니다. 그것은 공백1이나 공백2에 남게 되지요. 만약 내가 그 사이에 포톤 집열판을 놓았고, 그래서 거기 포톤이 스며들었다면, 나는 그것이 어느 쪽에서 오는지에 관한 정보를 지웠겠지요. 따라서 그런 식으로 나는 그 정보를 삭제하게 됩니다. 그리고 내가 할 것은 차단막을 설치하는 겁니다. 이 차단막은 창문앞에서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당신은 그것을 닫아서 그 창문이 완전히 빛을 차단하도록 하거나 그것을 열어서 빛이 들어오게 할 수도 있지요. 그래서 만약 우리가 차단막을 거기 설치하고, 그 차단막이 닫히면 나는 선택슬릿 정보를 알기 이전의 상황에 있게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내가 그 차단막을 열게 되면 나는 그 가능성을 지우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여기서 실재적으로 일어나는 일은 바로 이것입니다. 즉 내가 만약 이러한 실험을 지금 한다면, 그리고 차단막을 연다면, 나는 실재로 회절 패턴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건 참 이상한 일이지요. 그래서 나는 이 루비듐 원자들을 가지게 되며, 그것들이 이중슬릿 감지기를 향해가는 것이지요. 그것들은 확연한 포톤입자들을 여기 저기 남기게 됩니다. 또한 두 개의 슬릿을 통과해 가면서 나는 그것들을 이미 부딪히게 할 것이며, 완전히 스크린을 치도록 만들 겁니다. 이제 그 이후로 나는 차단막을 열 것인지 그러지 않을 것인지 결정하게 될 것이고, 그것이 어느 슬릿을 통과해 갈 것인지에 대한 정보를 지울 겁니다. 그것을 '지연된 선택' 모드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만약 내가 슬릿선택 정보가 지워진 것들을 추적한다면, 나는 어떤 회절 패턴을 얻게 되는 겁니다.
다른 말로 해서 리비듐 원자가 이미 스크린을 친 후에, 나는 그것이 입자같이 행위하는지, 파동같이 행위하는지에 대해 결정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 달리 말하면, 그것이 마치 입자가 그럴 것처럼, 한 번에 한 슬릿씩 통과해 갔는지 아닌지, 또는 파동이 그러할 것처럼 동시에 두 슬릿을 동시에 통과해 갔는지 아닌지를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달리 말해 그것이 이미 스크린을 쳤고 장치를 통과해 갔다면, 나는 그것의 존재방식을 이후 결정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중요한 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물리학자들은 이것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라는 것이지요. 물리학자들이 이것을 해석하는 방법은 우리가 과거를 변경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고 말하는 식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입자가 이미 슬릿을 통과한 이후에 그 슬릿을 통과해 간 입자의 방식을 변경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이미 존재했던 것을 삭제하는 것에 대한 논의가 있게 됩니다. 또는 입자가 이미 지나가 버린 후, 그 입자가 통과한 방식을 어떻게 변경하는가에 대한 논의가 있게 되지요. 즉 이것은 과거를 변경하는 능력에 대한 것입니다. 이제 나는 다음과 같은 제안을 하고자 합니다. 이것은 어떤 매우 안락한 향수어린 환상입니다. 난 물리학자들이 이 환상에 참여한다고 해서 비난할 수는 없어요. 나는 이것이 매우 매혹적인 환상이라고 생각하지요. 아마도 한 두번 쯤 우리들 중 누군가는 과거를 바꾸고 신체에 남겨진 과거의 흔적을 바꾸고, 우리가 세계를 물질화한 방식을 바꾸며, 특히 우리가 부주의할 때 뭔가를 바꾸려고 할 지 모릅니다. 또한 우리는 무언가 행해졌던 것을 하지 않은 것으로 하고 싶을지도 모르지요. 그리고 과거로 되돌아가 그것을 다른 식으로 행하고 싶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실험이 우리에게 가능한 것에 대해 말하는 바가 실재로 이러한 것일까요?
만약 우리가 이 실험을 좀 더 주의깊게 살펴 본다면 - 이에 대해서는 내 책 7장에 더 풍부하게 기술되어 있지요 - 원래의 회절 패턴은 무엇이든간에 보존되는 것이 아니고 여기서 진행되는 삭제가 완전히 이루어지진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기 발생하는 바는 실험이 이미 완료된 과거에 개입하는 것에 대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시간이 어떤 주어진 외재성, 즉 앞으로 전진하는 어떤 기준일 뿐이라고 가정하면서 과거는 이미 발생했고,현재는 과거로 미끌어져 들어가는 '지금' 이 순간이며,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것이라고 보는 겁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이것을 신중하게 음미해보면, 그리고 이를 페미니즘, 후기구조주의 그리고 문화연구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바를 통해 다시 성찰하고 그것을 여기서 논하는 물리학 안으로 들여와 보면,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실재 진행되는 것이 '시간성의 구성'이라는 것이지요. 여기에서 앞서 제기되는 것은 시간성에 대한 질문들입니다. 우리가 이로써 이해하는 것은 시간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 즉 그것은 보편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보다 시간은 다양한 물질적 실행들을 통해 절합되고 재-동조화됩니다. 다른 말로 해서, 상태, 순간, 파동과 입자와 같이 시간은 그 자체로 특정한 현상의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뿐이지요. 그래서 여기서 진행되고 있는 것은 물리학자들이 실재로 시간을 만드는 과정에서 시간이 만들어지며, 거기에는 우리가 '과거'라고 취하는 것, 그리고 '현재'와 '미래'로 취하는 것이 서로 간에 뒤얽히는 어떤 방식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앞의 실험으로부터 우리가 배우는 것은 존재하는 것은 상호-행위적 뒤얽힘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회절패턴을 다시 취하는 것은 어쨌든 이런 이유에서일 뿐입니다.
그리고 중요하게도, 원래의 회절 패턴은 되돌아오지 않고, 새로운 것이 창조됩니다. 이때 회절(즉 뒤얽힘 효과)은 흔적을 좇아가기 위한 어떤 도전이지요. 따라서 그 주제는 삭제와 회귀의 대상이 아닌 것입니다. 주제화되고 있는 것은 어떤 뒤얽힘과 상호-행위입니다. '과거'는 결코 단순하게 거기서 어떤 것이 시작되는 것이 아니고, '미래'는 펼쳐질 어떤 것도 아니지요. '과거'와 '미래'는 되풀이해서 재형상화되고 세계의 지속적인 상호-행위를 통해 펼쳐지는 것입니다.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 사이에는 그 어떤 전승된 결정적 관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인과성을 당구공 인과성 - 어떤 결과에 의해 이끌어내어지는 원인 - 과 같은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상호-행위성으로 사고할 때, 환상이나 삭제는 가능하지 않지만 보상을 위한 가능성이 존재하게 됩니다. 시간에 있어서 시간을 잘개 쪼개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과거를 변경하는 것"은 환상입니다. 과거는 미래와 마찬가지로, 닫혀 있지 않지요. 하지만 ‘삭제’(망각, erasure)는 중요하지 않아요. 어떤 중요한 의미에서, '과거'는 변화에 열려있지요. 그것은 재수행될 수 있으며, 시공간 물질의 상호행위적인 펼침 안에서 생산적으로 재형상화됩니다. 하지만 그것의 잔여효과(sedimenting effect), 그것의 흔적은 지워질 수 없지요. 그것의, 물질화하는 효과의 기억은 세계 안으로 기입됩니다. 그래서 과거를 변화시키는 것은 결코 대가 또는 책임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최근에 나의 박사과정 학생인 아스트리드 쉬라더(Astrid Schrader)(이 학생의 연구는 정말 주목할 만 하지요. 그는 가치있는 작업을 하는 중입니다.)는 《과학 사회학 연구》지에 놀라운 논문을 제출했는데요, 그것은 「와편모조류(pfiesteria piscicida)에 응답하며: 독성 미시생물학에서 가상 온톨로지, 불확정성 그리고 책임성」(2010)이라는 제목이에요. 이것은 방대한 환경 정책에 따라 아주 작은 해양 생물에 관해 이전과는 다른 실험을 하는 법을 보여주는 것이 상이한 실험실 수행들을 통해 시간이 다른 식으로 만들어지는지 또는 동기화되는지를 추적하는 것과 어떻게 일치하는지를 밝히는 작업이지요. 그녀는 기억은 과거의 것이 아니라, 그것이 상기되는 순간순간에 과거를 재창조하는 것이라고 논증합니다.
내가 분명히 밝히고자 하는 것은 - 믿든 말든 이 모든 것이 당신의 질문에 대한 답변입니다 - 하나의 사례입니다. 이 사례는 내가 양자역학에 관여함으로써 배운 것들인데, 이를 통해 나는 페미니즘 주제와 실천에 관한 이해를 확대하고자 합니다. 연구에 대한 나의 열정은 궁극적으로 그리고 완전히 정의와 윤리의 문제에 기반합니다. 그리고 나는 언제나 이 기반에 발을 디디고 있을 것이라고 낙관적으로 생각합니다. 이것이 바로 나를 이끌어가는 것이지요. 따라서 나는 물리학이 여기서 실제적으로 나를 도울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데리다적인 '도래할 정의'(justice-to come)라는 개념을 함축하는 어떤 중요한 유물론적 의미에 도달하게 하지요. 그것은 우리가 그것이 앞으로도 그리고 영원히 고정되어 있다는 것을 안다고 전제하는 그런 정의가 아닙니다. 그래서 나는 이 좀 더 짧은 답변을 데리다의 언급을 인용하는 것으로 마감하고 싶군요.
[염려는] 변형된 - 과거 또는 미래 - 현재의 지평이 아니라, 결코 현재였던 적이 없었던 과거 그리고 결코 미래가 되지 않을 과거이다. 그리고 그것의 다가올 미래는 어떤 생산물 또는 현전의 형식에서 어떤 재상산도 결코 아니다.(Derrida [1968], 21)
그리고 더 나아가,
어떤 정의도 [...] 몇몇 책임성의 원리 없이는 사유가능하거나 존재 가능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모든 살아있는 현재를 넘어서, 살아있는 현재와 분열하는 것 안에서, 아직 태어나지 않거나 이미 죽은자들의 유령 이전에 가능한 것, 존재 가능한 것도 아니다. [...] 이런 살아있는 현재의 그 자체의 비당대성 없이, 이런 책임성 그리고 거기 없는 자를 염려하는 정의에 관한 존중 없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자들, 아직 현재가 아니거나 살아 있지 않은 자들,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 자들 없이, '어디서?', '내일 어디서?', '어디를 향해?'라는 질문을 제기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Derrida [1993] 2006, xviii]
그래서 이것이 내가 나의 물리학과의 회절적 교전을 통해 배운 바의 한 예시인 것이지요. 특정한 방법들에서 세계로부터 침전되어 나오는 것으로의 우리의 행위적 간여에서 어떤 책임성이 수반되는 것일까요? 우리가 재행위(re-dong)하는 방식들에 주의를 기울인다면, 각각의 물질적인 상호행위와 더불어 그 물질적인 것은 시공간물질화로 형성됩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언제나 재구성되고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현상은 회절되며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다양한 시간들과 공간들에 분배된다고 말할 수 있고, 사회적 정의의 물음에 대한 우리의 책임성[응답가능성]은 상이한 종류의 인과성 개념들에 대해 사유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나에게 이것은 물리학을 페미니즘으로 가져갈 뿐 아니라, 페미니즘을 물리학으로 가져가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해 보입니다. (물리학으로부터 배운 어떤 것으로서 나의 응답을 이해하는 것과 그것을 페미니즘에 적용하는 것은 내가 말하고자 한 것에 대한 근본적 오해를 함축한다고 보여집니다.)
Q5: 인문학에 속한 많은 학자들은 포스트 휴머니즘 이론을 특히나 상당히 어렵게 여깁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어떤 윤리학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당신은 이에 대해 이미 말했지요. 특히 당신이 물리학을 가져올 때, 이러한 비판은 더할 나위 없이 강화될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의 연구작업의 여러 계기에서 우리는 당신의 접근법에 함축된 윤리학이 당신에게 아주 중요하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당신이 이미 말했듯이 말이지요. 명백하게도 우리가 페미니즘 논쟁의 일부가 되길 원할 때, 하나의 윤리-존재-인식론이라는 방식으로 존재-인식론을 절합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해 보입니다. 당신이 쓴 「포스트휴머니즘 수행성: 물질은 어떻게 물질이 되는가에 대한 이해를 향해」(Barad 2003)를 보면, 당신이 담론-물질적인 것에 대한 강조가 '매개' 관념에 대한 비판처럼 보입니다. 이 매개 관념은 어떤 사례들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것인데요, 이를테면 의미가 비물질화될 수 있으며, 관념적인 방식으로 물질에 의해 촉발되지 않는 공간을 가로질러 여행하고, 궁극적으로 변하지 않는 것, 즉 '동일자'로 실재 남아 있다고 주장합니다. 당신의 텍스트는 이러한 매개 관념이 물질과 의미가 필연적으로 뒤얽혀 있다는 논증과 충돌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의 질문은 그래서 어떻게 이러한 ‘관계존재론’이라는 어휘에서 그리고 사물/사태들에서 보통 '관계성'(relata)라고 부르는 것에 관한 형이상학을 거부하는 그것을 이해할 것인가가 될 겁니다.
KB: 나는 당신이 내가 말하고 있는 것으로부터 그것을 이미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즉 나는 윤리와 정의에 관한 질문이 언제나 이미 세계의 바로 그 직조상태를 관통해 이어져 있다고 믿습니다. 그것들은 어떤 특정한 종류의 관심에 의해 지금 그리고 다시 우리의 전망의 장 안에 정립되거나 부가되는 보충적인 관심이 아닙니다. 존재는 물질화(mattering)에 의해 관통되어 있는 것이지요. 인식론, 존재론, 그리고 윤리학은 분리불가능합니다. 사실상, 염려의 물질, 그리고 사려의 물질들은 서로를 겨냥합니다. 또는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하자면, 물질과 의미는 끊어질 수 없어요. 나의 행위적 실재론이 고려하는 바에 따르면, 물질은 그것의 상호-행위적 생성 안에서 세계의 역동적 표현/절합인 것이지요. 인간의 신체에 국한되지 않는 모든 신체들은 세계의 구체적인 상호-행위성, 그것의 수행성을 통해 물질화됩니다. 경계들, 속성들, 그리고 의미는 물질화의 상호-행위를 통해 차이나게[미분적으로] 가동됩니다. 차이화[미분화]는 근본적인 외재성(우리는 이를 내가 방금 언급했던 실험을 통해 봤습니다)에 대한 것이 아니라, 내가 행위적 분리가능성이라고 부르는 것이지요. 즉, 차이화하기[미분화하기]는 타자화, 분리에 대한 것이 아니라, 반대로 연결과 수행들을 형성하는 것에 대한 것입니다. 따라서 물질성 자체의 본성은 어떤 뒤얽힘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측면에서 행위적 절단이라는 것은 우리와 결코 분리되지 않지요. 행위적 분리가능성은 개체화가 아닙니다. 윤리학은 그러므로 타자를 근본적으로 외재화하는 것에 대한 응답이 아니라 우리가 그 한 부분인 생생한 관계성들을 위한 책임과 의무에 대한 응답이지요. 윤리학은 물질화에 관한 것, 뒤얽힌 물질화들에 대한 고려에 대한 것입니다. 그것은 새로운 형상화, 새로운 주체성, 새로운 가능성들이 포함됩니다. 심지어 가장 작은 절단물이라 할지라도 그러하지요. 책임성은 따라서 응답할 능력의 문제이지요. 타자의 응답에 귀기울이는 것, 그리고 타자에게 응답하는 의무를 다하는 자는 우리가 자기성이라고 부르는 것으로부터 전반적으로 분리되지 않습니다. 존재론, 인식론 그리고 윤리학을 사유하는 이러한 방식은 언제나 이미 하나의 윤리적 문제인 세계를 위해 함께 구성됩니다.
Q6: 마지막으로, 만약 당신이 바디우(2007)와 메이아수([2006] 2008)와 같이 수학의 영역을 재절대화하면서 물리학을 통해 유물론적 윤리학을 제안한다면, 당신은 포스트 칸트주의적인 아카데미를 정말 뒤흔들어놓을 것입니다. 이것은 당신이 여러 학제들에 가치를 어떻게 두느냐에 따른 결과들을 초래하지요. 학제적인 특성들, 다학제성, 상호학제성, 또는 포스트 학제성의 덫에 빠지지 않고, 당신은 당신의 아카데믹한 연구를 위한 선언을 어떻게 정당화할 수 있을까요?
KB: 글쎄요, 선언은 내 친구이자 동료인 도나 해러웨이가 수행한 작업이지요. 내가 그 용어를 내세울 수는 없어요[웃음]. 물론 그녀는 그것을 아이러니한 방식으로 이해합니다. 행위적 실재론은 어떤 선언은 아닙니다. 그것은 모든 것을 선언하도록 할 수 있고, 그렇게 될 것이라는 것을 보증하지는 않습니다. 반대로 그것은 어떤 요청, 기원, 도발, 외침, 세계를 관통하는 윤리성의 세포에 대한 관심, 그것에 대한 예의를 위한 어떤 열정적인 투여인 것이지요. 윤리학과 정의는 내 관심사의 핵심이며, 더 나아가 '나의' 바로 그 존재, 모든 존재를 관통해 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나에게 윤리학은 물질에 대한 질문에 부가되는 어떤 염려가 아니라, 물질이 의미하는 바로 그 자연[본성]이라고 하겠습니다.
(본문주석문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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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출처는 Rick Dolphijn & Iris van der Tuin,New Materialism: Interviews & Cartographies,
Open Humanities Press, 2012, pp. 38-47 이다. 번역 중간에 ‘[ ]’는 역자 보충이다.
첫댓글 제가 번역한 내용을 아무런 출처도 밝히지 않고 무단으로 가져온 걸 지켜보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내려달라고 말한 것 같은데, 아직 이렇게 그대로 두고 있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