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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읽다 보면 우리의 마음을 무겁게 하는 그런 단어들이 나옵니다. 그중에 하나가 열매입니다. 성경은 끊임없이 하나님은 우리에게 열매를 원하신다 그렇게 말합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들이 나오지요.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다 찍어서 불속에 던질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열매 없는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시니까 그 나무가 뿌리째 말라 죽었다 그런 말이 나옵니다. 또 달란트 비유에서 아무런 열매도 남기지 못한 종에게 이 쓸모없는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아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가는 일이 있을 것이다. 그런 내용도 나옵니다. 우리는 이런 말씀을 읽으며 열매 맺는 신앙생활을 해야 되겠다 그런 다짐을 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나는 얼마나 많은 열매를 남겼나 그런 걱정을 하기도 합니다.
성도 여러분 열심히 신앙하면서 왜 우리는 걱정하고 왜 두려워해야 합니까?
우리가 사는 세상은 성과주의를 지향합니다. 그리고 그 성과를 숫자로 표현합니다. 학생들의 경우 시험을 치면 점수가 주어집니다. 직장인들의 경우 인사 고과가 주어집니다. 회사의 경우 재무제표로 성과가 표시됩니다. 그리고 그 숫자에 따라 그 사람, 그 회사의 가치를 평가합니다. 우리는 이런 현실에 익숙하기 때문에 신앙생활 역시도 숫자로 표현하려고 합니다. 일주일 동안 얼마나 기도했지, 얼마나 성경을 읽었지, 얼마나 다른 사람을 위로했지, 얼마나 사랑을 베풀었지.
그러나 기도해도 삶에 아무런 열매가 없을 때가 있습니다. 노력해도 되는 일이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낙심하고 좌절하면서 나는 쓸모없는 종인가 봐 스스로를 그렇게 자책하고 불속에 던져질 나무처럼 그렇게 생각해야 합니까?
오늘 본문은 열매가 없어 보일 때 그때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한 가지를 말씀해 줍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의 1차 선교 여행이 시작된 키프로스에서 선교 상황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선교 여행은 한마디로 하나님의 선교였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친히 바울과 바나바를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친히 키프로스로 보냈습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그들의 가는 길을 인도하십니다. 키프로스 섬의 동쪽이 동쪽 도시인 살라미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는 오래전부터 하나님께서 예비해 두신 유대인 회당들이 있었습니다. 바울 일행은 그 회당들을 다니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멈추지 않고 키프로스 섬의 서쪽 끝인 바보에 이르기까지 섬 전체를 관통하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여기서 어떤 기대를 하게 됩니까?
수많은 사람이 예수님께로 돌아왔다. 그 섬에 놀라운 영적 부흥이 일어났다. 그런 내용을 기대하지만 사실 성경은 선교의 성과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습니다. 단 한 명의 회심자도 단 하나의 교회도 세워졌다는 이야기가 없습니다. 총독 서기호 바울을 만나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바울의 선교 여행은 실패처럼 보입니다. 열매가 적은 것이 아니라 열매 자체가 아예 없기 때문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선교 여행인데 왜 열매가 없었을까요?
성경은 이 사실을 통해서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려는 것입니까?
이야기의 반전은 바보에서 일어났습니다. 한국말로 바보 그러니까 도시의 이름이 좀 이상한데요. 헬라어로는 파포스입니다. 이 파포스는 키프로스의 수도이고 그곳에 사는 총독 서기호 바울이 바나바와 바울을 초청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한 것입니다. 당시 키프로스는요 로마의 구리 생산지였습니다. 키프로스라는 단어 자체가 헬라어로 굴리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총독은 구리를 채굴해서 이웃 도시, 이웃 지역과 무역을 하고 거기서 나오는 세금을 로마에 바치는 것이 그의 주 임무였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섬에서 노동자들의 노동 분쟁이 일어나면 안 됩니다. 소요가 일어나면 안 됩니다. 그래서 행정적으로 잘 관리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7절은 이 총독을 총명한 사람 그렇게 소개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총명한 사람이란 머리가 좋다. 행정을 잘한다 그런 의미를 뛰어넘어서 당시 로마의 학문을 섭렵하고 진리가 무엇인지를 분별할 줄 아는 사람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그것이 총명함이라는 단어의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은 훌륭한 정치인일 뿐만 아니라 그 시대에 학문을 아는 엘리트 중의 엘리트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왜 바나바와 바울을 초청한 것일까요?
인간적으로 보면 바나바와 바울은 떠돌이 전도자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학식을 가지신 분이 왜 이런 전도자들을 초청했을까요?
아마 이 총독은 신의 뜻을 믿었던 사람인 것 같습니다. 어떤 중요한 일은 하늘의 신이 결정한다. 그걸 믿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신의 뜻을 파악하기 위해 다 예수와 같은 사람을 곁에 두었던 것입니다. 그 사람을 통해 하늘의 뜻이 무엇이냐 그것을 분별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런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 신의 뜻을 전하는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바나바와 바울을 초청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도행전이 말하고자 하는 하나님 선교의 의미를 생각하게 됩니다. 사실 살라미에서 파포스까지 약 180km 정도가 떨어져 있는데요. 이 먼 거리를 이동하면서 어떤 일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성경은 침묵하고 있습니다. 많은 일이 일어났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에 대해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습니다. 다만 성경이 주목하는 것은 그 침묵처럼 보이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일하고 계셨다. 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5장 17절에서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한다. 이 말씀 배경은 이런 거죠.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중풍병자를 고쳤습니다.
그러자 유대 사람들이 찾아와서 왜 안식일 계명을 어기고 안식일에 의료 행위를 했느냐 그러면서 따졌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안식일에도 일하시기 때문에 나도 일한다 그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사람이 일하지 않는 순간 그 순간에도 하나님은 일하고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은 차질 없이 사람이 일하지 않아도 차질 없이 그렇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처럼 하나님의 구원 역사 역시 인간의 노력이 부족한 것처럼 보여도, 그래서 아무런 성과가 없는 것처럼 보여도 하나님은 일하고 계신다는 겁니다. 바나바와 바울의 선교가 열매가 없는 실패한 선교처럼 보일지라도 하나님은 일하십니다.
어떻게 해요?
총독의 마음을 두들기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그로 하여금 진리에 대한 갈증을 가지게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선교는 사람의 노력 여부가 아니라 하나님의 일하심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사도행전은 그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보면 이런 예들이 참 많습니다. 예를 들어 예언자 요나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라 말씀하셨습니다. 요나는 니느웨 사람들이 너무 악하기 때문에 그들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니느웨에서 외치는 것은 나만 부끄러움을 당할 뿐 헛수고일 뿐 아무런 열매도 기대할 수 없다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결과가 어떠했습니까?
니느웨 사람들이 죄를 뒤집어쓰고 금식하면서 회개했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서 예수님이 갈릴리로 가려고 하십니다. 유대에서 갈릴리로 가시면서 사마리아를 통과하십니다. 제자들은 생각했습니다. 이 사마리아에 무슨 구원이 있을까
그러나 결과는 어떠했습니까?
수가성 여인이 주님을 믿게 됩니다. 그리고 그 성 사람 다수가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종종 내 눈에 보이는 상황만 보고 여기는 안 돼. 이 사람은 불가능해 그렇게 지레 짐작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예상치 못했던 척박한 땅에서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이루어진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습니까?
하나님께서 일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서기오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대사를 연구하시는 분들에 따르면 이 당시 로마 귀족이 기독교로 개종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로마 정부에 의해서 사형당한 인물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은 인물입니다. 그런데 로마 귀족이 로마 정부가 정죄에서 사형시킨 그런 사람을 구원자로 믿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서기호 바울은 지금 그 예수를 전하는 바나바와 바울을 불러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그의 심령 속에서 일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이 있어서 가능했다. 성경은 그걸 말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이 일하시면 나타나는 현상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사탄도 가만히 있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서기호 바울이 복음을 갈망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할 때 그 현장에서 복음의 빛을 차단하는 강력한 어둠이 작동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6절과 8절에 등장하는 바 예수 혹은 엘루마라고 불리는 그 사람입니다. 누가는 그의 직업을 마술사라고 소개하는데요. 이 마술사는 오늘날 무대 위에서 사람들의 눈을 속이는 그런 퍼포먼스를 하는 그 마술사가 아닙니다. 헬라어로 보면 마고스인데요. 이 마고스라는 단어는 예수님이 탄생했을 때 동방으로부터 왔던 박사들, 그 박사들을 지칭하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그 박사가 바로 마고스입니다. 당시 로마 세계에서는 천문학, 점성술, 신비주의 종교를 결합해서 미래를 점치고 권력자들의 길흉화복을 예언해 주던 영적 책사들이 바로 이 마고스였습니다.
그는 늘 총독 곁에 붙어 있었습니다. 총독은 로마의 모든 학문을 배운 지성인이었지만 하늘의 뜻을 다 알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자기 정치 인생에서 중요한 일을 결정할 때 늘 불안했던 것 같습니다. 하늘의 뜻과 다른 결정을 내리면 어떻게 할까 내게 불행이 오는 것은 아닐까 불안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런 불안은 신의 뜻을 안다는 이 마술사의 조언에 의존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예수는 이런 상황을 이용해서 총독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한국에서도 이런 일이 있지 않습니까? 정치인들이 무속인의 말을 듣고 국가의 일을 결정합니다. 그리고 그 무속인은 고위 정치인과의 특별한 관계를 이용해서 인사에도 개입하고 이권에도 개입합니다. 이 사람도 그러했습니다. 그런데 만약 총독이 복음을 믿고 바울과 바나바를 따르게 된다면 자신의 영적 지위와 권위는 하루아침에 날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총독이 복음을 믿지 못하도록 집요하게 방해했던 겁니다.
이런 현상을 보고 성령께서는 어떻게 대응하십니까?
바울로 하여금 성령으로 충만케 하십니다. 그리고 그로 하여금 그 사람의 내면을 뚫어보게 합니다. 바울은 이 사람의 위선의 가면을 벗겨버립니다. 10절에서 바울은 이 사람의 영적 실체를 폭로합니다.
너 속임수와 악행으로 가득한 악마의 자식아 모든 정의의 원수야.
너는 주님의 길을 굳게 하는 짓을 그치지 못하겠느냐
바울은 이 사람을 향해서 악마의 자식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은 주님의 뜻을 왜곡시켜서 총독으로 하여금 주님의 뜻을 행하지 못하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이 사람의 이름은 바 예수라고 했습니다. 바 예수 바르라는 말은 아들이라는 뜻이고 예수 구원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바 예수 구원자의 아들 그런 뜻입니다. 이 사람은 자신이 마치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다 아는 것처럼 그렇게 떠벌리고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다 아는 것처럼 사람들에게 말하고 총독에게 이렇게 해야 합니다. 그렇게 카운슬링 했습니다. 하지만 정작 이 사람은 악마의 자식이었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 14절에 사탄도 빛의 천사로 가장합니다. 그런 말이 나오지 않습니까? 사탄은 니가 살고 싶은 대로 살아라. 인생의 주인은 너다 그걸 주장합니다. 니가 하나님이다 그걸 주장합니다. 사탄은 마치 인간에게 자유를 주고 인간에게 구원을 주는 것처럼 그렇게 가장하지만 실체는 구원의 진리를 왜곡시키는 그런 일을 했습니다.
바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총독을 이롭게 하는 것 같지만 그는 총독의 눈을 가립니다. 가장한 것입니다. 사탄은 지금 이 사람을 통해 역사를 하고 있습니다.
근데 여러분 오늘날에도 이런 바 예수가 얼마나 많습니까?
여러분은 가정에서 교회에서 혹은 사회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기 위해서 노력하는 줄 믿습니다. 여러분을 통해 하나님이 증거되도록 하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자녀들을 위해서 기도하고요. 이 자녀가 하나님을 믿게 해 주십시오. 간절히 기도합니다. 가정 복음화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직장과 사회에서 하나님, 내가 일하는 이 일터가 하나님의 정의에 맞게 일하게 해 주십시오. 그렇게 기도하고 노력하는데 현실은 어떻습니까?
가정에도 사회에도 내가 기도한 열매가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기도하는데 왜 열매가 없습니까? 현실에 바 예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빛을 가려버리는 큰 어둠이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뭡니까?
복음을 가로막는 시대 사조가 있습니다. 아주 세련되지만 하나님을 반대하는 학문, 그리고 가장 정교한 과학을 하고 있지만 무신론적으로 그 과학의 결과를 해석해버리는 과학주의 이런 것이 오늘날의 바예수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신앙을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학문을 통해서 과학을 통해서 집요하게 방해합니다. 그리고 신비 현상과 미친들을 통해 방해하기도 합니다.
이 바 해수는 신비 현상 그것을 일으켰을 거예요. 그러니까 총독이 거기에 매료됐을 것입니다. 합리성을 추구하는 이 시대에 점집을 찾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길을 지나가며 타로 카드를 보고 사주 카페에 들어가서 자신의 미래를 알고자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사람들은 급격히 변하는 이 미래를 보면서 불안해합니다. 그리고 그 불안 심리를 신비 현상 혹은 초월적인 사건을 통해서 위로받으려고 합니다. 초월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하늘이 나에게 이것을 점지해 주었다. 위로받기를 원합니다.
어쩌면 이런 것들이 오늘날 우리 시대의 바 예수일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은 이렇게 사탄의 역사가 강하게 나타나자 영적으로 그와 싸우십니다. 믿는 사람들이 이 열매가 없는 세상 앞에서 낙심하지 않도록 악이 강하게 역사하면 역사할수록 성령은 더 강하게 나타나십니다. 그래서 11절 바 예수의 눈을 멀게 합니다. 주님의 손이 그를 내리쳤다고 합니다. 그 결과 바 예수는 앞을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사실은 영적 맹인이라는 것을 사람들 앞에 드러내고 만 것입니다. 이것을 보고 총독이 하나님을 믿게 되었다. 성경은 그렇게 말합니다.
12절인데요. 총독은 그 일어난 일을 보고 주님을 믿게 되었고 왜 믿었을까요?
그 바 예수가 신령한 일을 한다고 믿었는데, 그 바 예수보다 바울의 역사가 더 강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전하는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훗날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하면서 복음의 본질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능력에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좋은 말 해주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복음은 좋은 이야기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착하게 살자. 도덕적으로 훈화해 주는 것도 아닙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 능력은 사탄의 결박을 끊어버리는 것. 그래서 그 영혼으로 하여금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해주는 것 그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오늘 성경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합니까?
바울의 선교 여행은 하나님께서 주도하시는 선교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일하시고 또 하나님께서 악한 영들과 싸우십니다. 그 결과 한 영혼이 하나님이 예비하신 한 영혼이 하나님의 품에 안기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선교입니다.
그러면 이런 질문이 들 겁니다. 하나님의 선교는 하나님이 일하신다. 그러면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것 아닌가 하나님의 선교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런 질문이 들 겁니다.
무엇을 해야 합니까?
현대 선교학에서는 하나님의 선교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라틴어로 미시오 데이라고 하는데요. 이 미시 데이는 선교의 주체가 하나님이다. 그것을 선포하는 이론입니다. 교회가 선교 사업을 계획하고 조직하고 이끌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선교를 하고 계시고 교회는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는 것이다. 그런 개념입니다.
현대 선교학에서 미시오데이를 주장하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과거 서구교회는 많은 선교를 했습니다. 특별히 19세기에 선교를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이 당시 서구 사회는 제국주의 운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선교사들은 제국주의 그 운동에 편승해서 군함을 타고 복음 전하러 갔습니다. 선교사들이 군함 위에서 그 선교지로 이동을 했던 겁니다.
그리고 그들은 안타깝게도 눈에 보이는 열매에 너무 집착하고 있었습니다. 선교지에서 얼마나 많은 교회를 세웠느냐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었느냐 그 숫자에 연연했습니다. 심지어 선교란 서구 문화와 서구 제도를 식민지에 이식하는 것이다. 그렇게 착각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 식민지에 유럽식 교회 건물이 세워지고, 식민지에서 유럽식 옷을 입고 유럽식 유럽식 행세를 하는 것. 그게 선교인 줄 알았습니다.
이 당시 선교의 주체는 교회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20세기 이 유럽에서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이 일어났습니다. 서구 교회는 우리가 무엇 때문에 어디서 잘못되어서 이런 큰 악을 저질렀는가 그것을 돌아보게 됩니다. 그러는 가운데 선교 역시 잘못되었다. 무슨 잘못이 있었는가 선교의 주체가 철저히 하나님인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주체인 것처럼 행동했다. 그런 반성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하나님께서 세상으로 보낸 사람들이며, 하나님께로부터 보냄 받은 자로서 자기 자리에서 믿음으로 사는 것, 그것이 선교다. 예수 증인으로 복음 증거하는 것, 그것이 선교다. 그렇게 인식하게 됩니다.
이 미시오 데이에 따르면 선교지는 먼 곳 가난한 나라에만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보낸 곳 그곳이 다 선교지입니다. 이 세상 전체가 하나님의 선교지입니다. 그러므로 보냄 받은 사람은 자신이 보냄 받은 그 일상에서 복음을 전하고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처럼 살고, 하나님을 원하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실천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이런 하나님의 선교에 믿음으로 동참하는 겁니다. 예수 믿고 사는 것이고, 예수님 드러내면서 사는 것이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정의를 이루려고 그것이 선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의 현실이 어떻습니까? 우리가 일상의 선교사로 살아갈 때 우리 눈앞에 선교의 열매가 뚜렷하게 보입니까?
내가 예수님 닮고자 노력하면서 살 때 거기에서 많은 사람들이 회심하고 돌아옵니까?
그렇지 않을 때가 많을 것입니다. 믿지 않는 가족을 위해 눈물로 기도해도, 자녀를 위해 기도해도 그 가족들이 그 자녀가 신앙에 관심이 없을 수 있습니다. 직장에서 사랑을 베풀고 정직하게 살아도 그 직장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내 선교는 실패했나 보다 탄식하게 됩니다. 일상의 선교사로서 나는 실패자다 포기하게 됩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오늘 본문을 기억하십시오. 지금 가시적인 성과가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은 일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파보스의 총독을 만나러 가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마음을 두들겨 주셨습니다. 문이 열렸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일하시기에 하나님의 선교는 반드시 이루어진다. 우리에게 그것을 말해줍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15장 7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99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을 두고 더 기뻐할 것이다. 100마리의 양 중에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았을 때의 기쁨을 이야기하면서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선교에서 하나님의 계산법은 우리와 다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보기에 열매가 적을지라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일하신다. 우리는 그저 그 하나님의 일하심에 동참하는 동력자들이다.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 동력자로서 믿음으로 살려고 하고 동력자로서 신실하려고 하면 우리는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실 것입니다.
이 시간 우리 함께 찬송하고요. 기도했으면 합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걸어갔던 그 키프로스의 180km의 길은 어쩌면 성과가 없는 선교 여정이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인생도 그렇습니다. 열심히 사는데 열심히 믿음으로 사는데 열매가 없고 인생은 저물어 가는데 아직 내 손은 빈손인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우리에게 기억하라고 합니다. 눈에 보이는 성과가 없는 그때에도 하나님은 일하고 계신다. 선교는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다.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한 영혼을 만나주십니다. 한 영혼을 위해 싸워주십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의 일하심에 참여하며 마치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날 때 자기 도시락 하나를 내어놓았던 그 어린이처럼 주님께서 일하시면 나는 동력자로 내 것을 주님께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고백하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그 마음으로 주님 앞에 내 것을 드립니다. 그 마음으로 이 시간 함께 찬송하고요. 기도하는 시간 가져봅시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