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057
3월7일 [사순 제1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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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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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AL9w69zSqqo (김윤상 프란치스코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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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여러분이 돌보고 있는 그들이 바로 살아있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젊은 시절, 매 주말이 다가오면 소년원과 분류심사원, 교도소와 구치소를 내집 드나들 듯이 드나들었습니다. 주간에는 제게 맡겨진 아이들 위해서 밤낮으로 뛰어다니느라 거의 녹초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주말이 되면 만사 제쳐놓고 쉬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갇혀있는 아이들의 초롱초롱한 눈망울, 이제나저제나 마냥 기다리고 있는 형제들 생각에 또 다시 지친 몸을 이끌고 육중한 철 대문을 넘나들곤 했습니다. 매주 방문할 때 마다 큰 고민거리는 간식이었습니다.
개신교나 불교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떡에다, 고급 과자에다, 엄청난 물량 공세를 펼치는 데 비해 저희 천주교는 언제나 초라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젊은 혈기와 열정 하나로, 양질의 프로그램으로 승부를 건다는 마음으로 참 열심히 다녔습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주 목숨 걸고 칙칙한 담장을 드나들던 협조자들의 얼굴이 오늘따라 참 그립습니다.
줄기차게 다녀봐야 별다른 변화도 없고, 감사의 표현도 없고, 밑빠진 독의 물붓기 같아 별 의미를 못 찾겠다는 협조자들에게 제가 늘 강조한 복음 구절이 있습니다. 바로 오늘 종말과 관련된 복음 구절입니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 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또 내가 헐벗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주었다.”(마태오 복음 25장 34~36절)
저는 이 구절을 근거로 침이 마르도록 설명해드렸습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갇힌 이들을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교정 사목, 정말 힘든 일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 일은 가장 복음적인 일이며,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갇힌 사람으로 변장해 계시는 주님을 찾아뵙는 일입니다. 주님께서 가장 기뻐하실 일이며, 대대손손 큰 축복을 내리실 사목입니다.”
오늘도 힘겨운 사목 현장에서 열 일 하시며 고생하시는 형제자매님들께도 똑같이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응급실이나 중환자실에서, 요양원이나 요양병원에서, 무료급식소나 청년 밥집에서, 소년원이나 분류심사원에서, 교도소나 구치소에서 하루하루 전쟁 같은 날을 보내시는 여러분, 여러분이 돌보고 있는 그들이 바로 살아있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부디 그들을 잘 돌보십시오. 그것은 곧 살아계신 예수님을 섬기는 일입니다. 여러분은 정말이지 귀찮고 힘겨운 바로 그 일을 통해서 하느님의 오른편에 앉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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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잊혀진 보잘것없는 이들>
중학교 때 저도 싫어했지만 저를 싫어했던 선생님이 계셨습니다. 그 분은 먼저 저의 형의 담임을 할 때 형을 미워했었고 형에게 심하게 대하셨던 분입니다. 이제는 그 분이 저의 담임이 되어 저희 집을 방문하고 다음날 전체 반 아이들 앞에서 “너희 집 가정 형편이 완전 바닥이던데?”라고 하셨습니다.
저희 집의 형편이야 어차피 친구들이 다 알고 있어서 창피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왠지 부모님을 욕되게 하는 것 같아 기분이 매우 나빴습니다. 가족은 다 연결되어 있습니다. 나를 모욕하는 것이 곧 부모님을 모욕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부모님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세상의 가장 작은이들을 모욕하는 것도 하느님을 모욕하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로부터 태어나지 않은 것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요즘 인간의 이기주의로 초래된 지구 온난화로 인한 자연재해가 심각한 지경에 이르고 있습니다. 지진이나 해일로 수만 명씩 죽어도 금세 잊히고 추위나 홍수로 수백 명씩 죽어도 또 다른 더 큰 사건에 묻혀버리기 일쑤입니다.
왜 우리는 자연을 미리 보호할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요? 자연을 파괴하는 것이 곧 하느님께 대한 불신앙을 나타냄을 깨닫지 못해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연은 하느님께서 만드신 것이고 하느님께서 만드셔서 우리에게 주셨다면 그만큼 당신의 애정이 담겨있는 것입니다.
내가 꽃을 선물했는데, 다음날 그 꽃이 쓰레기통에서 발견되었다고 생각해 봅시다. 기분 좋을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저도 나름대로 갖은 돈을 다 털어 선물을 했지만 그것이 무시당하고 그 선물이 다른 용도로 남용될 때 매우 기분이 상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내가 남용되는 것이 아니지만 그 선물에 나의 애정도 함께 들어있기 때문에 결국 같은 것입니다. 인간뿐만 아니라 세상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하느님으로부터 나온 것이고 인간에게 선물로 주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세상 어떤 것이든 함부로 대하는 것은 창조주 하느님을 함부로 대하는 것과 같습니다. 밍크코트를 만들 때 털의 부드러움을 유지하기 위해 밍크가 살아있는 채로 껍질을 벗긴다고 합니다. 밍크도 하나의 생명입니다. 모든 생명은 다 하느님께로부터 나왔습니다. 하느님은 생명 자체이십니다.
그렇게 동물을 학대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동물의 생명도 하느님으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녀를 모욕하면서 부모를 좋아한다고 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어렸을 때 살아있는 개를 전봇대에 매달아놓고 몽둥이로 죽을 때까지 때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또 어떤 아저씨가 개를 잡아 망치로 머리를 부수어 죽이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는 그 배를 갈라 김이 모락모락 나는 간을 꺼내어 저에게 맛을 보라고 주었습니다.
저는 그 이후로 개를 먹지 못했습니다. 개가 사람이냐고 할 수 있겠지만, 개의 생명이나 사람의 생명이나 모두 하느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하느님의 선물을 그렇게 막 대하는 것 자체가 하느님을 막 대하는 것입니다.
사람들만 보잘것없는 이들이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연도,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도 다 보잘것없는 것들이고 그것들에게 하는 것이 곧 하느님께 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서도 물질적으로 아프고 가난하고 감옥에 갇힌 사람들만 가장 보잘것없는 이들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실제로 가장 보잘것없는 이는 하느님으로부터 났지만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참 부모를 모르고 어떻게 영혼을 구원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사람들만큼 불쌍한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느님께서 그 사람들을 가장 안타깝게 보고 계십니다. 따라서 그들의 구원을 위해 선교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께 해 드릴 수 있는 가장 큰 일이 되는 것입니다.
만약 한 영혼이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면 그 분은 당신이 생명을 새로 얻는 것처럼 기뻐하십니다. 그러나 그런 영혼이 옆에 있는데도 참 생명을 전해주려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을 창조하신 하느님께 대한 사랑도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의 가장 보잘 것 없는 이들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당신에게 해 준 것이라고 하십니다. 아내에게 사랑받으려면 장인장모에게 잘하면 된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이 세상 모든 것들을 만드신 분께 사랑받기 위해 세상 존재하는 그분으로부터 나온 모든 것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갖도록 합시다.
자연에 존재하는 생명의 소중함이나 내 옆에 있는 한 영혼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세상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하느님으로부터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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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
예수님의 말씀은 이 사순절에 어떠한 마음으로 이 시기를 살고 부활을 맞이할 수 있는지를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부활에 우리가 함께 할 수 있으려면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면서 하느님의 축복 받는 자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계시다. 이것은 또한 하느님께서 인간이 당신 앞에 섰을 때, 우리를 심판하시는 기준이 어떤 것인지를 알려주고 계시는 말씀이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본성 안에서 굶주리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사랑하시는 사람들 안에서 굶주리신다. 또한 당신의 가난한 이들 안에서 목말라 하시고, 당신의 종들 안에서 헐벗으신 분이시다. 모든 병을 고쳐 주신 분은 당신의 종들 안에서 병드셨다. 모든 사람을 해방하시는 분이 당신의 신자들 안에서 감옥에 계시다. 하느님의 자녀들은 혼자가 아니다. 주님 때문에 이 모든 것을 겪는다. 마찬가지로 주님께서도 당신이 사랑하시는 사람들 때문에 이 모든 일을 그들과 함께 겪으신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34절) 주님께서는 옳은 일을 한 그들을 칭찬하셨다. 아버지께 복을 받는다는 것! 이렇게 큰 영예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판단된 것은 무엇 때문인가?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35절) 얼마나 대단한 영예인가! 얼마나 큰 복됨인가! 그분은 그들에 대한 당신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드러내신다.
그러나 왼쪽에 있는 자들에게 임금은 “저주받은 자들아, 나에게서 떠나 악마와 그의 부하들을 위하여 준비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41절) 하신다. 영원한 불은 “악마와 그의 부하들을 위하여” 준비된 것이지, 인간들을 위하여 준비된 것이 아니다. 처음부터 아버지께서는 사람들을 저주하시지 않는 분이시다. 다만 그들의 행실을 단죄하신다. 사람들을 위하여 준비한 것이 아닌데 그들 자신이 스스로 그 속으로 던져 넣었다는 것이다. 스스로 그렇게 만든 것이다.
여기에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그들은 자기들이 이 세상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었다. 그들이 단죄받는 이유는 그들이 저지른 악행 때문이 아니다. 그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라, ‘너희는 내가 나의 종들 안에서 굶주리고 목말랐을 때 보살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릇된 일을 저지르지 않은 자들이 이런 단죄를 받았다면 악마의 일을 행하는 자들은 어떻게 되겠는가?
“그들은 영원한 벌을 받는 곳으로 가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으로 갈 것이다.”(46절) 그것이 무엇이든 그것은 영원할 것이다. 죄인들은 영원한 벌을 받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다. 이웃에 대한 사랑은 우리를 그분께로 인도해 줄 것이고, 그분을 닮게 하고, 그분의 생명에 참여하게 할 것이다. 이웃 안에서 주님을 알아 모시고 사랑하는 사순절이 되도록 노력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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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최후의 심판>
“사람의 아들이 영광에 싸여 모든 천사와 함께 오면, 자기의 영광스러운 옥좌에 앉을 것이다. 그리고 모든 민족들이 사람의 아들 앞으로 모일 터인데, 그는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그들을 가를 것이다. 그렇게 하여 양들은 자기 오른쪽에, 염소들은 왼쪽에 세울 것이다."(마태 25,31-33)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에는 ‘심판관’으로 오실 것입니다. 여기서 ‘모든 민족들’은 글자 그대로 ‘모든 사람’입니다. 종교가 다르다고, “나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말해도 소용없습니다. 그날의 심판은 ‘모든 사람’에 대한 심판입니다. 사람들이 ‘사람의 아들 앞으로’ 모인다는 말은 심판받기 위해서 모인다는 말인데, 아무도 심판을 피해서 달아날 수도 없고, 숨을 수도 없습니다.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그들을 가를 것이다.”라는 말은, 구원받을 사람들과 구원받지 못할 사람들을 갈라 세운다는 뜻인데, 심판이 순식간에 끝난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기도 합니다. 기소하고, 변론하는 등의 심리 과정도 순식간에 끝나버립니다. 양들을 오른쪽에, 염소들을 왼쪽으로 세운 다음에 남은 절차는 ‘선고’뿐입니다. <심판이 순식간에 끝난다는 말은, ‘지금의 삶’이 곧 심판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누구든지 지금 죄를 짓고 있으면 자기 스스로 ‘왼쪽’으로 가는 것이고, 회개하고 있으면 ‘오른쪽’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때에 임금이 자기 오른쪽에 있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마태 25,34-36)
여기에 언급되어 있는 “굶주렸을 때, 목말랐을 때, 나그네였을 때, 헐벗었을 때, 병들었을 때, 감옥에 있을 때” 라는 말은, 예수님의 복음 선포에서 언급된 ‘가난한 이들, 억압받는 이들’에 연결됩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4,18-19) 오른쪽에 서 있는 양들은, 예수님의 복음 선포를 믿고 받아들여서, 복음을 그대로 실천한 사람들입니다. (믿음을 행동으로 실천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의인들은 “주님, 저희가 언제......?” 라고 질문합니다.(마태 25,37-39) 의인들의 질문은, 자기들이 사랑 실천을 한 적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사랑 실천을 했지만 ‘주님께’ 해 드린 일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들의 질문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라고 대답하십니다. (“나에게 해 준 것과 같다.”가 아니라, “나에게 해 준 것이다.”입니다.) 이 말씀을 근거로 해서,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나오는 ‘강도들을 만나서 초주검이 된 사람’(루카 10,30)은 바로 예수님이었고, ‘착한 사마리아인’은 예수님을 도와드린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지금 나의 앞에 있는 ‘작은 이’가 곧 예수님이라는, 또는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작은 이’로서 나에게 오신다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하나”라는 가르침이기도 하고, “신앙과 사랑은 하나” 라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사랑 없는 믿음은 아무것도 아닙니다.(1코린 13,1-3) 즉 믿음이 아닙니다. 반대로, “믿음 없는 사랑은 무엇인가?”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그 경우에 대해서는,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너희에게 마실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마르 9,41)라는 말씀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왼쪽에 있는 자들’에게는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는 선고가 내립니다.(마태 25,41) 선고 이유는 그들이 사랑 실천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입으로만 ‘주님, 주님!’ 하면서,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지는 않은 사람들입니다.(마태 7,21)> 주님의 선고에 대해서, 악인들은 “주님, 저희가 언제......?” 라고 질문합니다.(마태 25,44) 그들의 질문은, “주님께서 그런 처지에 계셨다는 것을 알았다면 도와드렸을 텐데, 몰라서 못했습니다.”라는 뜻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안 해도 주님에게는 합니다.”라는 뜻인데, 결코 칭찬받을 수 없는 말입니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마태 25,45)라는 주님의 말씀은, 그들이 사랑 실천 자체를 하나도 안 했음을 나타냅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나오는 사제와 레위인이 그런 사람들입니다.(루카 10,31-32)> 어쩌면 그들은, “그 작은 이가 바로 주님이시라는 것을 미리 알려 주셨더라면, 저희는 틀림없이 사랑 실천을 했을 것입니다.” 라고 항의할지도 모릅니다. 지금 이 복음 말씀은, 그런 항의를 할 경우에 대비해서 ‘너의 앞에 있는 그 작은 이가 바로 주님이시다.’라고 미리 알려 주는 가르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때 가서 ‘몰랐다.’고 변명하지 말고, 또 ‘왜 미리 알려 주지 않으셨습니까?’라고 항의하지도 말고, ‘지금 당장’ 작은 이들에게 사랑을 실천하여라.”라는 가르침.
여기서 ‘한 사람’이라는 말은 중요한 말입니다.(마태 25,40.45)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한 사람’에 대한 사랑 실천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께서 굉장히 ‘큰 사랑’을 바라시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할 수 있는 ‘작은 사랑’을 바라신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각자 자기 위치에서, 자기 형편대로,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됩니다. 인류 전체를 구하라는 것도 아니고, 무슨 초능력을 발휘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굶주리는 ‘한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하는 ‘한 사람’에게 물 한 잔을 주는 작은 사랑도 사실은 ‘위대하고 큰 사랑’입니다. ‘사랑’은 큰 사랑이든지 작은 사랑이든지 간에 모두 고귀하고 위대합니다. <우리의 인생은 ‘하느님의 법정을 향해서 가는 길’이고(마태 5,25), 그 재판에서 구원을 선고받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은 ‘지금’ 해야 하는 일입니다. ‘사순시기’는 바로 지금 그것을 깨달아서 실천하라고 깨우쳐 주는 시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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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군자삼락(君子三樂)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부모님이 건강하시고, 형제들이 무탈한 것입니다.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는 것입니다. 천하의 영재를 얻어 가르치는 것입니다. 저는 군자삼락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 부모님이 모두 하느님의 품으로 가셨습니다. 형제들과는 멀리 떨어져있습니다. 하늘은 물론, 양심을 비추어도 부끄러움이 있습니다. 누군가를 가르칠 만큼 깨달음에 이르지도 못하였습니다. 하지만 제게도 3가지 즐거움이 있습니다. 책을 가까이해서 읽는 즐거움입니다. 산보하면서 기도하고, 강의를 듣는 것입니다. 부르클린 한인 성당에서 2년째 미사를 하는 것입니다. 사순시기를 지내는 신앙인에게 3가지 즐거움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교회는 3가지 즐거움을 이야기합니다. 단식과 절제를 통해서 주님의 수난과 고통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자선과 희생을 통해서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행복하다는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기도와 회개를 통해서 키레네 사람 시몬처럼, 베로니카처럼 주님 십자가의 길에 함께 하는 것입니다.
요즘 2권의 책을 읽고 있습니다. ‘지구의 짧은 역사와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입니다. 하나는 45억년 지구의 역사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미국의 보스턴과 영국의 런던이 1년에 2,5센티씩 움직여서 1억년이 지났는데 지금은 2500킬로 떨어져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맨틀 위에 떠있는 지각이 화산과 지진으로 떠오르기도 하고, 섭입의 과정을 통해서 지각이 맨틀 속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새로운 지각이 생긴다고 합니다. 짧은 우리의 생에서는 느낄 수 없지만 우리의 별도 태어나고, 자라고, 변하고 있다고 합니다. 다른 하나는 마음, 생각을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마음과 생각을 따라서 움직이지만 마음과 생각 너머에 진정한 자아가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진정한 자아는 존재와 하느님과 연결되어 있다고 합니다. 진정한 자아를 만난 사람을 깨달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진정한 자아를 만난 사람은 지복직관의 삶을 산다고 합니다. 순간을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진정한 자아를 통해서 영원한 생명을 이야기하는 것 같았습니다. 짧은 지구의 역사를 통해서 인간도 자연의 일부라는 성찰을 하게 됩니다. 지금 이 순간을 충실하게 살아가는 사람은 온 우주와 하느님과 하나 될 수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오늘 독서는 ‘진정한 자아’를 찾은 사람이 가는 길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거룩하시니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하느님을 섬기게 됩니다. 그런 사람은 부모에게 효도하고, 살인하지 않고, 간음하지 않고, 도둑질 하지 않고, 거짓증언하지 않고, 남의 아내를 탐하지 않고, 남의 재산을 탐하지 않습니다. 공정과 정의를 드러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진정한 자아를 찾은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식별하는 기준을 이야기하십니다. 지금 가장 굶주리고, 가장 헐벗고, 가장 아픈 사람을 따듯하게 품어주는 사람은 진정한 자아를 찾은 사람이라고 하십니다. 지금 가장 굶주리고, 가장 헐벗고, 가장 아픈 사람을 외면하는 사람은 진정한 자아를 만나지 못하고 하느님과 멀어지는 사람이라고 하십니다.
32년 전입니다. 술에 취해서 길에 누워있던 사람을 보았습니다. 추운 겨울인지라 그냥 지나칠 수 없었습니다. 본당 신학생과 함께 남자를 부축해서 택시에 태웠습니다. 택시기사가 함께 가길 원했습니다. 우리는 택시를 타고 남자의 집까지 데려다 주었습니다. 술에서 깬 남자가 우리를 오해하고 욕을 했지만 남자의 가족들은 진심으로 고마워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하늘에서는 눈이 내렸습니다. 그때 함께 했던 신학생들은 모두 사제가 되었습니다. 잠시나마 진정한 자아를 만났던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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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도회(부산 분도명상의 집) 박재찬 안셀모 신부님]
<무엇이 진정한 선행일까?>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날 심판의 기준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세례도, 믿음도 아닌 바로 “선행”입니다. 이 선행은 되돌려 받을 수 있는 이에게 베푸는 것이 아니라, 가장 미소한 이들에게 해 준 것이어야 합니다. 나는 지금 내 주변에 굶주린 이들, 목마른 이들, 나그네 된 이들, 헐벗은 이들, 병든 이들, 감옥에 갇힌 이들을 예수님의 마음으로 돌보고 있는 지 반성하며, 사랑 받기만 하려는 우리의 나약한 마음에 주님의 자비를 청하도록 합시다.
봄이 오고 있습니다. 어제는 오랜만에 명상의 집 숲을 산책했습니다. 숲 속 마루 의자에 앉아 한 참을 그저 바라보았습니다.
죽은 듯한 나무에는 작은 새 순이 보였습니다.
매화에는 꽃이 피어 오르고 있었습니다.
새들이 어디선가 날아왔다가 다시 어디론가 사라졌습니다.
하늘에는 구름이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바람은 호수에 잔잔히 물결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땅은 따스한 햇빛에 녹고 있었습니다.
그저 그렇게 가만히 앉아 마주 오는 것을 바라보고 있는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상이 숨을 쉬고 있구나! 세상은 살아 움직이고 있구나! 자연 속에서 나도 그 일부가 되어 숨을 쉬며 살아가고 있구나!”
“그저 바라보는 것”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는 것”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요 진정한 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모든 자연 속에, 그 모든 사람 속에, 그리고 내 마음 속에 함께 살아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과 함께 숨을 쉬며 살아가는 것, 그들이 본래의 그들 자신이게 하는 것, 그것이 참된 창조의 목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의 있는 그대로를 받아 주시는 그분과 함께 너와 세상을 받아 들이면 그것이 진정한 선이요 그것이 참된 사랑일진대, 내 생각 대로 바꾸고 의미를 부여하고 나의 틀 속에 나와 세상을 가두어 두려고 하지 않았던가 반성하게 됩니다.
굶주린 이들이 다가오면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른 이들이 다가 오면 마실 것을 주고, 나그네 된 이들이 다가 오면 잠자리를 마련해 주고, 헐벗은 이들이 다가 오면 입을 옷을 주고, 병든 이들이 다가 오면 치유해 주고, 감옥에 갇힌 이들에게 위로와 기도를 해 주는 것, 그것은 예수님과 함께 숨 쉬며 살아가는 이들이라면 마땅하고 자연스러운 삶인데, 선행을 베풀면서도 되돌려 받을 것을 생각하고, 구조적인 악을 생각하며, 그들을 판단하고 회피하지는 않았는지 반성하게 됩니다.
가난한 이들뿐 아니라 모든 이들 안에 예수님이 살아 숨쉬고 계십니다. 부유한 이들 안에도 주님은 계십니다. 하지만 우리가 특별히 어려움 중에 있는 이들을 돕는 것은 그들은 스스로 자신의 힘겨운 상황을 극복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때로는 식별이 필요합니다. 도우면 도울수록 그것이 버릇이 되어 계속해서 도움을 요청하는 게으른 이들도 있고, 때로는 극심한 어려움 중에 있음을 호소하는 사기꾼도 있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우리의 선행은 고통 중에 있는 이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 안에 살아 숨쉬고 계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그들 안에 있는 주님의 숨결을 느낄 때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께서 사랑으로 더욱 자라고 성장하게 됩니다. 그렇게 우리가 편견과 선입견 없이 가난한 이들을 향한 사랑과 선행으로 우리의 삶이 충만해질 때 우리가 작은 예수님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작은 예수님이 된다면 심판날에 우리가 있어야 할 곳은 결코 지옥이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지옥에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매 형제 여러분, 겨우내 죽은 듯한 자연이 죽은 것이 아니라 추위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기다림이요 새로운 성장을 위한 멈춤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 역시 마주 오는 시련 속에서 몸과 마음과 영이 굶주리고, 목마르고, 병들고, 버림받고, 헐벗고, 갇히기도 합니다. 삶의 겨울과 같은 시간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잠시 멈춤이요 새로운 시작을 위한 기다림의 시간인 것입니다.
누군가 있는 그대로의 나, 있는 그대로의 너를 바라봐 주며 따뜻한 사랑의 손길을 내밀 때 우리 안에 있는 사랑의 예수님이 깨어나 새로운 숨을 쉬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바로 굶주리고 목마르고 병들고 버림받고 헐벗고 갇힌 이에게 따뜻함을 전해 주는 그 “누군가”입니다. 또한 우리 역시 때로는 굶주리고 목마르고 병들고 버림받고 헐벗고 갇히게 되어 그 “누군가”의 따뜻함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도 기억해야 합니다.
모든 것은 다 지나갑니다. 가진 모든 것도 죽음 앞에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우리의 사랑과 우리의 선행은 영원히 예수님께 기억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그 숨결 속에서 함께 숨쉬며 살아간다면 우리의 선행은 심판의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자연스런 우리의 삶이 될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이기적인 나의 숨을 멈추고,
경계 없는 예수님의 사랑의 숨을 쉬며
마주 오는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그분의 눈으로 바라보며
사랑으로 충만한 날들 되시길 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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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준 것이 나에게 해준 것이다.”
오늘 우리는 <사순 첫 주간 월요일>을 미사를 봉헌하고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우리는 주님께서 모세에게 하신 말씀을 들었습니다.
“나,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라.”(레위 19,2)
‘거룩한 사람이 되어라’는 성덕으로의 부르심은 나중에 바오로 사도에 의해 “아버지의 뜻”으로 선포됩니다. 곧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버지의 뜻은 바로 여러분이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1테살 4,3)
그리고 이 부르심은 오늘 <복음>에서 ‘자비와 사랑을 실행한 사람’으로 드러납니다. 오늘 <복음>은 최후의 심판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심판의 기준’이 무엇인지 눈여겨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 기준은 신앙이나 종파가 아닙니다. 당시의 유대인들이 믿었던 것처럼, 이스라엘인이냐 이방인이냐도 아니요, 죄를 지었느냐 짓지 않았느냐도 아닙니다. 초월적인 신비체험이나 관상도 아니요, 기적이나 예배도 아닙니다. 교리나 신심도, 신분이나 성공도, 부나 힘도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사랑과 자비의 실천일 뿐입니다. 특별히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마태 25,40)에게 해준 사랑과 자비의 실천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해 준 것이 곧 예수님께 해준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이를 분명히 말해줍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준 것이 나에게 해준 것이다.”(마태 25,40)
그렇습니다. 그분께서는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을 당신의 ‘형제’라고 부르실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해준 것이 당신에게 해준 것이라고 하시고 그들과 당신을 동일시하십니다. 그래서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 곧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이 되고, 하느님을 인간들 사이에서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마더 데레사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세상 사람들이 외면하는 버려진 사람들의 얼굴 속에서 하느님의 얼굴을 보았다.’ 이를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요한 4,20)
한편, 이 심판에서,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처벌을 받은 왼 편의 사람들이 어떤 큰 범죄나 악행을 저지른 사람들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단지 무관심하고 소극적이었을 뿐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이 처벌을 받은 것은 그들이 특별한 죄를 지었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적극적인 사랑을 하지 않은 사실에 있음을 명심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니, 사랑하지 않음, 곧 자비를 베풀지 않음이 죄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죄짓지 않으려고 애쓰기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랑하려고 애쓰는 일일 것입니다. 사도 야고보는 말합니다.
“좋은 일을 할 줄 알면서도 하지 않으면 곧 죄가 됩니다.”(야고 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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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마태 25,40)
주님!
어느 누구에게나 무관심하지 않게 하소서.
어느 누구든지 하잖게 여기지 않게 하소서.
나에게 필요해서가 아니라, 그가 존귀하기에 귀중하게 여길 줄 알게 하소서.
결코, 당신의 선물을 보잘 것 없이 여기지는 말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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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날세, 나야>
마태오 25,31-46 (최후의 심판)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에 싸여 모든 천사와 함께 오면, 자기의 영광스러운 옥좌에 앉을 것이다. 그리고 모든 민족들이 사람의 아들 앞으로 모일 터인데, 그는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그들을 가를 것이다. 그렇게 하여 양들은 자기 오른쪽에, 염소들은 왼쪽에 세울 것이다. 그때에 임금이 자기 오른쪽에 있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그러면 그 의인들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리신 것을 보고 먹을 것을 드렸고,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렸습니까? 언제 주님께서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따뜻이 맞아들였고,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렸습니까? 언제 주님께서 병드시거나 감옥에 계신 것을 보고 찾아가 뵈었습니까?’ 그러면 임금이 대답할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그때에 임금은 왼쪽에 있는 자들에게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저주받은 자들아, 나에게서 떠나 악마와 그 부하들을 위하여 준비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않았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이지 않았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지 않았고, 내가 병들었을 때와 감옥에 있을 때에 돌보아 주지 않았다.’ 그러면 그들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리시거나 목마르시거나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또 헐벗으시거나 병드시거나 감옥에 계신 것을 보고 시중들지 않았다는 말씀입니까?’ 그때에 임금이 대답할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영원한 벌을 받는 곳으로 가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으로 갈 것이다.”
<날세, 나야>
보아주기 힘들겠지만
보아주게나
날세, 나야
들어주기 힘들겠지만
들어주게나
날세, 나야
잡아주기 힘들겠지만
잡아주게나
날세, 나야
나눠주기 힘들겠지만
나눠주게나
날세, 나야
맞아주기 힘들겠지만
맞아주게나
날세, 나야
품어주기 힘들겠지만
품어주게나
날세, 나야
함께하여주기 힘들겠지만
함께하여주게나
날세, 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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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심판의 기준은 사랑이다>
허름한 옷을 입고 술에 취한 상태로 성당 앞을 서성이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행려자인 듯했습니다.
은근 걱정이 되었습니다. 성당에 어떤 해가 되는 일을 하면 어쩌나? 마침 몇몇 신자들이 돈을 주어 보냈습니다. 얼마나 다행스러웠는지.... 어떻게 도와줄까 생각하지 않고 귀찮은 존재로 생각했습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아마도 돈보다 더 귀한 관심과 사랑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이시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부끄러움이 큽니다. 그들이 예수님이었음이 분명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과 가난한 사람들을 동일시하셨습니다. 그래서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25,40). 그리고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주지 않은 것이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영원한 벌을 받는 곳으로 가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으로 갈 것이다”(마태25,45-46).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구원과 심판의 기준을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에 두셨습니다.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헐벗은 사람, 병든 사람, 나그네 등등 가장 작은 이들에게 베푸는 사랑이 곧 주님께 드리는 봉헌이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 날 심판은 양이냐 염소냐 둘 가운데 하나입니다. 어중간은 없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7,21)
그러나 막상 실천의 기회가 오면 머리로 계산하고 따집니다. 말로나 혀끝으로 할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진실하게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반대의 삶을 살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자선을 베푸는 사람은 기쁜 마음으로 해야 하고 민첩하게 해야 합니다”(성 그레고리오). 그래야 주님의 마음에 들 수 있습니다. 이리저리 재지 말고 그가 새 출발하기를 간절히 기도하면서 베풀면 주님의 평화가 함께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회피하지 마십시오. 사랑은 다가가는 것입니다. 사실 “사랑은 지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글 모르는 시골 할머니가 신학 교수보다 하느님을 더 사랑할 수도 있습니다”(성 보나벤뚜라). 사랑은 변덕스럽지 않습니다. 허풍을 떨지 않습니다. 사랑은 섬김입니다.
“삶이 끝날 때 우리는 사랑으로 심판받게 될 것”(십자가의 성 요한). 이라는 것을 기억하며 기회가 좋든 그렇지 않든 행동으로 사랑하는 날 되시길 희망합니다. 우리가 만나는 수많은 한 사람, 한사람이 나그네 된 예수님이시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겠습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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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수원교구 정진만 안젤로 신부님]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공적 선포의 마지막 자리에 있습니다. 마태오 복음서는 다섯 개의 긴 담화로 구성되어 있는데, 24─25장은 마지막 담화 부분입니다. 이 담화의 중심 주제는 마지막 날과 심판이며, 청(聽)자는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제자들의 질문(24,3 참조)에 대한 예수님의 응답으로 시작하는 이 마지막 담화는 26─27장의 수난 이야기를 준비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소개되는 ‘최후의 심판’의 구조는 단순합니다. 먼저, 심판 준비 상황이 묘사됩니다.(25,31-33 참조) 마지막 날에 영광스럽게 오시어 옥좌에 앉으시는 사람의 아들은 심판자이시며, 그 앞에 모인 “모든 민족들”은 심판받을 대상입니다. 그 다음으로, 심판 과정이 이어집니다.(25,34-45 참조)
임금이 오른쪽과 왼쪽에 있는 이들과 각각 대화를 나누며 심판의 권한을 행사합니다. 임금의 질문에 대한 양쪽의 대답은 뚜렷이 대조를 이룹니다. 그러나 이들을 향한 심판의 기준은 똑같으며 분명합니다. 심판자인 임금에게는,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자선을 베풀었는지 그 여부가 가장 중요합니다. 누군가 가난하고 약한 이들에게 자선을 베풀었다면, 그는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의인’이라 불릴 것입니다. 반면에 그러지 못하였다면, 그는 영원한 벌을 받고 ‘저주받은 이’라 불릴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저마다 임금이신 주님 앞에서
심판을 받게 될 마지막 날의 상황을 그려 볼 수 있습니다. 마지막 날의 심판은 우리를 두려움으로 몰고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심판은 주님의 오심을 믿고 늘 깨어 자선을 베푸는 이들에게는 희망을 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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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25,40)
<변방에 계시는 예수님!>
오늘 복음(마태25,31-46)은 '최후의 심판에 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이 말씀은 참으로 놀라운 말씀입니다.
예수님 당시, 기득권 카르텔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던 바리사이들이나 율법 학자들에게는 예수님의 이 말씀이 대단히 불쾌한 말씀으로 다가왔을 것이고,
변방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던 사회적 약자들에게는 큰 기쁨과 희망의 말씀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이나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근본 이유는 '그들의 이 불쾌함'에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변방에서 태어났고, 변방의 삶을 조금은 체험했습니다. '이문영(베드로)' 증조부님께서 모진 박해를 피해 지금의 경기도 용인에 있는 '한덕골 성지'로 이주해 오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변방에 계신 예수님에 관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임마누엘이신 예수님께서 변방에 계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는 이들의 마음'이 늘 변방으로 향해 있어야하고, 변방에 있는 내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선택'도 변방에서 태어나 변방의 삶을 살고, 변방에 있는 예수님이신 이웃들과 함께 한 사람을 향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 앞에 '흙수저와 금수저'가 놓여 져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계신 곳으로 마음과 정책이 향해 있는 후보가 우리나라의 이 큰 배를 이끌어 갈 선장으로 뽑혔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영원한 벌을 받는 곳으로 가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으로 갈 것이다."(마태25,46)
"너희와 너희 후손이 살려면 생명을 선택해야 한다."(신명30,19)
오늘도,
더 나은 나의 미래를 위해,
나의 영원한 생명을 위해,
더 열심히 화이팅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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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지금은 아동학대라고 하면서 도저히 할 수 없는 실험이겠지만, 13세기 독일의 프레드릭 2세는 아이를 대상으로 실험했습니다.
외부와의 접촉을 완벽히 차단해서 키우는 것입니다. 그때 어떤 언어를 말하고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지를 알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안아주지 않고 말도 걸어주지 않았습니다.
이 아이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결국 단 한마디도 하지 못했고, 말을 할 나이가 되기 전에 대부분 사망했습니다. 끔찍하다고 할 수 있는 비윤리적인 실험이었지만, 신체적 접촉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해 주었습니다. 다른 사람과 친밀하고 행복한 사랑의 관계를 맺지 못하면 우리도 살아남지 못합니다. 육체적으로는 살고 있다고 할 수 있어도, 감정적으로는 무조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 안에서만 그럴까요? 이렇게 사랑의 관계를 맺지 못하면, 하느님 앞에 서서도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 점을 ‘최후의 심판’을 이야기하는 오늘 복음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모든 천사를 거느리고 오시는 사람의 아들은 여기서 모든 백성을 심판하는 임금으로 나타나십니다. 그 앞에 세상을 살아온 모든 백성이 서게 되고, 각자 믿음과 그 실천에 관하여 심판받게 된다고 하십니다. 임금에게 충성을 다하는 사람은 사람을 대하는 데 소홀히 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사랑이 넘치는 임금이신 주님은 자신에게 하는 것보다 가장 작은 이들에게 해 준 것을 자신에게 해 준 것으로 여기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율법에서도 이렇게 강조합니다. 오늘 독서의 레위기는 이렇게 말하지요. “너희 동족을 정의에 따라 재판해야 한다.”(레위 19,15) “너희는 마음속으로 형제를 미워해서는 안 된다.”(레위 19,17)
우리 주변에는 우리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무수히 많습니다. 이런 이들과 사랑의 관계를 맺어야 곧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이고 최고의 찬양을 드리는 것이 됩니다. 자신과 이루는 모든 관계는 나를 살게 하는 관계였습니다. 그런데 왜 이 관계를 끊으려고 하십니까?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나에게 큰 상처를 주었다고…. 이런 식을 끊어버리면 이 세상에서도 그리고 주님 앞에서도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의 관계 중에 하나를 끊으면 또 다른 관계를 끊는 것도 쉽게 이루어집니다. 이렇게 계속 관계를 끊다 보면, 심지어 주님과의 관계도 끊게 됩니다. 절대로 행복할 수 없습니다. 마지막 날, 주님 앞에 섰을 때 우리에게 어디로 가라고 하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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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사랑이 잣대다>
- 최후심판 -
사랑밖엔 길이 없습니다. 제 졸저의 책명이기도 합니다. 사랑이 답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인생 무지와 허무에 대한 궁극의 답도 사랑뿐입니다. 사랑의 관상, 사랑의 찬미, 사랑의 신비, 사람의 기적, 모든 말마디에 사랑이 붙습니다. 사랑해서 사람입니다. 사랑은 아무나 하나? 사랑도 공부임을 깨닫습니다. 평생공부가 사랑공부요 사랑공부에는 끝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랑공부에는 영원한 초보자라 합니다.
오늘 말씀 주제도 사랑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다시피 최후심판의 잣대는 바로 곤경중에 있는 구체적 이웃 사랑의 실천임을 보여 줍니다. 모든 인류가 예외없이 사람의 아들인 예수님 앞에서 곤경중에 있는 구체적 이웃 사랑의 실천으로 심판을 받습니다. 주님은 곤경중에 있는 이들과 자신을 일치시킵니다. 의인들에 대한 축복선언을 통해, 또 저주받은 이들에 대한 저주선언을 통해 확인하게 됩니다.
“너희는 1.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2.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고.
3.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4.또 내가 헐벗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5.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6.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추상적이며 애매모호한 사랑이 아니라 구체적 실천의 사랑입니다. 새삼 사랑은 추상명사가 아닌 실천동사임을 깨닫습니다. '언제 저희가 주님께 이런 사랑을 실천했느냐?'는 의인들이 질문에 주님은 명쾌하게 대답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곤궁중에 있는 작은 이들 하나하나가 주님의 형제들이란 말씀이 참 신선하고 놀랍습니다. 가까이 있는 형제들 하나하나가 주님의 형제들이자 주님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반대로 ‘언제 저희가 주님께 이런 사랑을 실천하지 않았느냐?’의 질문에 대한 저주 받은 이들에 대한 주님의 선언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
그대로 오늘 최후심판 이야기는 우리의 회개를 촉구합니다. 모든 것은 다 때가 있습니다. 살아있을 때 찬미와 감사, 기도와 회개, 사랑의 실천이지 죽어 최후심판정에 섰을 때는 아무리 후회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살아서 사랑하라, 기뻐하라, 찬미하라, 감사하라 주어진 하루하루의 날들임을 깨닫습니다. 찬미와 감사, 기도와 사랑하기에도 턱없이 짧은 세상인데 미움과 불평불만으로 시간과 정력을 낭비함은 참으로 어리석고 허무한 어처구니 없는 일입니다.
기도도 공부도 전례도 좋지만 이웃사랑의 실천이 빠졌다면 참 공허할 것입니다. 바로 구체적 이웃 사랑의 실천이 최후심판의 잣대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1독서 레위기도 구체적 이웃사랑이 금령들로 표현됩니다. 금령들의 항목을 헤아려보니 무려 18개 항목입니다. 악마는 디테일 안에 숨어있다는데 이렇듯 디테일에 철저한 금령들이니 악마도 도저히 숨어 있을 수 없겠다 생각됩니다. 첫 말씀과 마지막 말씀이 인상적입니다.
“나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주님을 닮아 우리 모두 거룩해야 한다는 주님의 명령입니다. 어떻게 거룩한 사람이 되는가? 바로 이어지는 이웃에게 해서는 안되는 금령들을 하지 않는 이웃사랑의 실천을 통해서입니다. 맨 마지막 말씀입니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나는 주님이다.”
주님은 단락이 끝날 때 마다 못박듯이, 도장 찍듯이 “나는 주님이다” 말씀하심으로 말씀의 엄중함을 강조합니다. 거룩함으로 시작하여 사랑으로 끝납니다. 사실 우리는 거룩하신 하느님, 자비하신 하느님이라 고백합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닮은 거룩한 사람은 자비로운 사람임을 깨닫게 됩니다.
최후심판의 잣대는 종교도 인종도 국적도 기도도 공부도 전례도 아닌 곤궁중에 있는 이웃 형제들에 대한 구체적 사랑의 실천입니다. 놀랍게도 곤궁중에 있는 이들 하나하나가 주님의 형제들이자 주님 자신이라는 주님의 선언입니다. 참으로 이웃을 통해 주님을 만나는 것이 건강하고 건전한 신비주의임을 깨닫게 됩니다. 어제 읽은 교황님의 감동적인 말씀입니다.
“세상에서 진정한 혁명은 날마다 묵묵히 일하는 이들을 통해 작고 가난한 이들이 더 이상 무시되지 않고 버려지지 않고, 포기되지 않고, 하느님의 자녀로서 그들의 존엄성에 따라 일어나 살아 갈 수 있을 때 비로소 이룩된다. 진정한 혁명은!”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곤궁한 이웃들에 대한 구체적 사랑 실천에 항구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주님의 거룩한 사랑의 성체를 모신 형제들 하나하나가 ‘주님의 형제들’이자 ‘주님 자신’임을 깨닫게 해주는 미사은총이 참 고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구원의 축복받은 이들에 대한 주님의 말씀은 그대로 미사에 참석한 우리를 향한 말씀처럼 들립니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마태25,3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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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N8O_eHTAfB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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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1)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 39)
순간 순간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을
보게 된다.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함께해야 할
사랑과 이해의
소중한
사람임을
일깨워주시는
예수님이시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사람의
길을 보여주신다.
먼저 사람이
되는 길이다.
사람의 길은
돌보아 주는
사랑과 관심의
실천이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통해
사람의 길을
만드신다.
사람은
사람에게서
삶을 배운다.
사람은
사람 속에서
사람이
되어간다.
모순된 삶을
바로잡아
주시며
가난한 이들
모두를
사람답게
살게 하시는
예수님의
삶이다.
사순은
사람의
올바른 실천에
초점을 맞추는
사람의 시간이다.
모든 것들은
다 사라져도
하늘 나라의
사랑은 남는다.
복음의 가치는
실천의 가치이다.
우리를
돌보아 주시는
그 사랑으로
우리 또한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쑥과 마늘을
먹으며
끝까지
사람이
되고자 한
이야기처럼
먼저 사람이
되게 하시는
사순의 선물이다.
사순의 선물
보따리 안에는
사람의
굶주림과 목마름
외로움과 헐벗음
병듦과 수감의
고통이 들어 있다.
이제 사순의
보따리를 풀어
하나 하나
함께해야 할
사순의 실천이다.
사람이
사순이며
사람이
섬겨야 할
우리의
예수님이시다.
보라!
가장 작은
사람
예수를.
사랑은
실천이다.
사람은 실천으로
사람이 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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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마태 2, 45)
가장 가까이에
우리의 예수님이
계십니다.
사랑하기 위하여
존재하는 우리의
삶입니다.
주저앉아 있는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우리의
예수님이 계십니다.
연민의 마음으로
사랑은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장 작은 이들의
얼굴로 우리에게
오십니다.
굶주리고 목마르고
나그네로
헐벗고 병들고
감옥에 갇힌 가난한
이들로 계십니다.
먹을 것을 주고
마실 것을 주고
따뜻이 맞아들이고
입을 것을 드리는
것이 복음적 사랑입니다.
병들고 감옥에 갇힌
이들을 찾아가는 것이
예수님께 드리는
우리의 사랑입니다.
우리의 반대편에는
또다른 우리들이
있습니다.
가장 가치 있고
아름다운 사랑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랑을 내어주어야 할
우리의 사순입니다.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계시는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당신 먼저
우리의 모진 마음을
뚫으며 희망의 자리로
바꾸어주십니다.
가장 가난한 자리가
실은 사랑을 나누어야 할
가장 뜨거운 자리입니다.
모든 것이
나눔입니다.
가난한 이들을 통해
잊어버리고 산 나눔이
다시 살아납니다.
모든 것은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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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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