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4세기경부터, 영국 땅에 켈트 족이; 거주. 영국 땅에 자리잡은 켈트 족은; 씨족들이 모여 사는 부족국가로, 여기저기 흩어져 살고, 있었다.
그러다가, 기원전 55년로마의 율리우스 카이자르의 침략으로, 영국의 남쪽은; 로마제국의 영토에 속하게, 된다.
로마군대는; 템스 강가 평야에, 요새를; 세우고, 영국을; 지배하는 데 필요한 물자를; 수송하는 기지로 쓰게 되는데, 이 항구의 이름을; 론디니움 Londinium 이라고 불렀고, 이곳이; 뒷날, 영국의 수도 런던이다.
차츰, 켈트 족과, 로마인은; 섞이게 되어, 영국에는, 라틴문화가; 일찍이, 뿌리 내린다.
로마의 정복 후에, 약 300년동안 전쟁 없는, 로마의 평화태평시대Pax Romana 가; 지속되었다.
앵글로 색슨 시대
4세기 초 게르만 족의 대이동과 함께, 영국의 로마군대는; 본국을 지키기 위해 돌아가고, 그 사이 켈트 족의 일파인, 스코트족이; 살기 좋은 남쪽으로, 대대적인 침략을; 시작했다.
로마인과; 어울려 살던, 남쪽의 켈트 족은; (현재 독일의 북쪽작센지방에 거주하던) 색슨 족에게, 구원을; 요청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색슨족은; 켈트 족을 돕기는커녕, 침략을; 시작했고, 이에 앵글로족도 가세하여, 켈트 족은; 대부분 지금의 스코틀랜드, 웨일즈,아일랜드로, 도망쳐 그곳에; 자리잡게, 되었다.
평야지대인 잉글랜드지방엔, 지금도 앵글로색슨 족의 자손이; 살고 있으며, 잉글랜드라는 지명은; 이들 종족의 이름에서, 비롯된다.
앵글로색슨족이; 지배하던 시기에,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실은; 기독교로, 개종한 사실이다.
577년 그레고리 교황은; 영국의 선교를 위해 아우구스티누스를; 파견하였고, 8세기 이후, 영국 전 지역은; 로마 카톨릭 교회에 귀속되었고, 왕들은; 로마 교회의 제도와 조직 등을; 받아들였다.
영국은; 783년부터, 덴마크 바이킹족의 침략에; 시달리게, 된다.
그때, 앵글로색슨족은; 몇몇 작은 나라로 갈라져 싸우고 있었는데, 바이킹의 침략을; 계기로, 단결하였고, 단결된영국의 지도자로 나선 이가; 바로, 전설적인 알프레드대왕이다.
이로써, 영국역사에; 처음으로, 나라다운 나라. 즉, '영국왕국'이; 태어났고, 이것이; 앵글로 색슨 족의 첫 통일 국가이다.
알프레드 대왕은; 침략자 덴마크 군대를 물리친 뒤, 덴마크와 화평조약을 맺는다.
알프레드 대왕은; 또한, 학문을 크게 권장하여, 영국 역사에 길이 빛나는 위인으로 존경받게 된다.
노르만 족의 정복
바이킹족이; 프랑스 왕에게 신하임을; 맹세하고, 노르망디에, 자리잡은 것은; 911년. 그후, 100년이 지난 뒤, 노르망디 왕에 오른 이가; 윌리엄이었다.
노르만족은; 100년이 흐르는 사이, 완전히 프랑스화되어; 있었고, 1066년 노르망디 공윌리엄의 영국 정복은; 프랑스의 영국정복이나, 다름 없었다.
덴마크도, 영국을; 침략했으나, 그들은; 앵글로 색슨 족과 비슷해, 영국에 큰 변화를; 가져오지 않았으나, 노르만족의 영국정복은; 로마제국에 이은, 라틴문화의 두 번째 정복이었다.
이때, 영국은; 언어, 풍습, 정치, 문화 등, 큰 변화를; 겪게, 된다.
윌리엄은; 영국 정복 후에, 윌리엄 1세로 노르만왕조를; 열었고, 영국의 모든 권력은; 노르망디에서 건너온 귀족들의 손에 들어간다.
그러면서, 왕실과, 귀족들은; 자연히 프랑스 말을; 쓰고, 영어는; 평민과 농민들이 쓰는 말로 구분되어, 영어는; 이때, 프랑스어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된다.
정복왕 윌리엄 1세는; 영국왕이면서, 동시에 프랑스 왕의 신하였다.
그러나, 노르만 족의 왕들은; 프랑스 내에 영토를; 계속 넓혀가, 프랑스왕보다도 더 넓은 땅을 차지하기에 이르고, 이것이;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벌어진 백년전쟁의 원인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윌리엄 1세는; 왕이 된 후, 반란을 진압하고, 몰수한 땅을 기사에게 나누어 주는 노르만식 봉건 제도로 통치하였고, 중세 영국의 특징인 집권적 봉건국가의 기초를; 다졌다.
자문회는 왕의 의견을 청취하고 승인할 뿐, 법률과 재판은; 왕이 직접 관장하였으며, 경제 체제도 마찬가지로 왕중심이었다.
헨리 2세의 영토 확장
정복왕 윌리엄 1세가; 죽은 뒤, (1087) 그의 손자인 헨리 2세부터 프랑스의 피가 반쯤 섞인 (아버지가 프랑스인 앙주 백작) '앙주'왕조가; 시작된다.
그는; 프랑스루이 7세의 왕비였던 엘레노아와 결혼 남프랑스의 엄청난 땅을; 얻게 된다.
프랑스 땅에 프랑스 왕보다 더 큰 영토를 소유하게 된, 헨리 2세는; 영국 내에서도, 스코틀랜드와, 웨일즈지방을; 평정, 단단한 통일잉글랜드의 기반을; 다짐으로써, 알프레드 대왕과; 더불어, 후세에 길이 존경받는 왕이; 된다.
헨리 2세는; 영국의 정치를 안정시켜, 많은 법과 재판 제도를 만들어, 1154-1189년까지, 35년 동안 평화로운, 영국을; 이끌어갔다.
마그나 카르타
헨리 2세는; 아들들의 반란으로 쫓겨나, 비참한 최후를; 마치고, 1189년 셋째 아들 리처드가; 왕이; 된다.
그가; 사자왕리처드 1세이다.
그는; 모험심이 강해, 십자군 원정에도 몸소 참가하였으며, 1199년 왕이 된지, 10년만에 전쟁터에서, 화살에; 맞아, 숨을 거두었다.
그를 이어 왕이 된 이가; 동생존이다. (1199)
존왕은; 왕이 된 후에 실정을 거듭하면서, 국민의 신망을; 잃게 된다. 그러자, 프랑스가; 군사를 일으켰고, 1204년노르망디를; 시작으로, 남부 프랑스 대부분의 영국소유 땅을; 빼앗기에 이른다. 그러면서, 왕과 귀족, 신하사이는; 더욱 멀어졌고, 귀족들은; 자신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존 왕에게, 칼을; 들이댔다. 그것이; 대헌장. 즉, 마그나 카르타 Magna Carta (great charter) 이다.
1. 세금을 거두려면 반드시 대표자 회의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2. 법에 따르지 않고는 자유민을 체포, 처벌하지 못한다 등의 내용을 골자로 함.
마그나카르타는; 영국의 첫 헌법이며, 현대 의회 민주주의의 주춧돌이; 된다.
왕에게서 세금을 거둘 권리를 크게 제한한 마그나카르타의 제정으로 (1215) 영국의 왕은 권력을 휘두를 길이; 막혀버리고, 사실상의 권력은; 세금 내는 대표자회의로 넘어가게 되는데, (납세자 대표: 귀족, 영주, 농장주인, 부유상인. 등) 이로써, 영국에는; 이른바, '국회'라는 씨앗이; 뿌려지게 되었다.
영국 국회의 탄생
'못난왕'이라는 국민과 신하들의 비웃음 속에 존왕이 세상을 떠나고,(1216) 그 위를 이어 헨리 3세가; 왕위에 오른다.
그러나, 헨리 3세가; 교황의 권위를 등에 업고, 마그나카르타의 정신을 위배, 국민에게 세금을 징수하고 폭정을; 일삼자, 귀족은; 다시 왕에게 맞서기 시작한다.
대헌장을 어기고, 마음대로 권력을 휘두르는 헨리 3세에 맞서 반란을 일으킨 이는; 왕의 매부인 프랑스 인 시몽 드 몽포르였다.
그는; 뛰어난 전술을; 사용하여, 왕의 군대를; 격파하고, 헨리 3세를; 포로로 잡는다.
권력을 쥔, 몽포르는; '각계 각층의 대표들이 모인 회의에서 국사가 다루어져야 하며, 따라서 각 주와, 자유도시는; 두 사람씩 대표를 뽑아 런던으로 보낼 것이며, 이들 대표들은; 나라 일을 다룰 의회를 이룰 것'이라고, 포고했다.
이렇게 해서, 1265년 영국 역사상 처음으로 각 주, 지방대표들이 모인 의회가; 열리게 되었는데, 이것이; 영국국회의 탄생이며, 오늘날 의회 민주주의의 시초이다.
이때부터, 영국은; 왕과, 국회라는 두 세력으로 갈려, 서로 상대를 누르려는 투쟁이; 벌어지게, 된다.
영국국회는; 그후, 1341년양원제로 발달하게 된다.
귀족과 승려 등 고귀한 신분을 가진 사람들로 이루어진 '상원'과, 그리고, 소귀족, 농장주, 상인, 지식인 등 실지로 국민의 대표들로 이루어진 '하원'.
시몽 드 몽포르 백작은; 영국민주주의에 큰 공적을 세운 사람이었으며, 정복왕윌리엄이; 영국을 점령한 뒤, 영국역사에, 영향을; 끼친, 마지막인물이었다.
이로써, 영국은; 근 200여년에 걸친, 프랑스의 정치, 문화의 영향에서 벗어나게 된다. (1066년: 윌리엄의 영국정복 - 1272년: 시몽 드 몽포르 죽음)
100년 전쟁 (1337-1453), 장미전쟁 (1455-1485)
1337년부터, 영국은; 프랑스와 100년 전쟁을; 벌이게 된다.
1328년프랑스의 카페왕조가; 끝나고, 발루아가(家)의 필립 6세가 왕위에 즉위하였을 때, 영국의 에드워드 3세는; 카페왕조와의 인척 관계임을 내세워, 왕위계승을; 주장하며, 프랑스에 침입하였다.
그러나, 전쟁의 실질적인 배경은; 에드워드 2세가 스코틀랜드와 대립했을 때, 프랑스가; 스코틀랜드를 지원했기 때문에, 또 프랑스의 플랑드르지방의 양모 시장을 둘러싼 양국의 이해 관계가 대립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전쟁초기에는 영국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어, 한때 프랑스령의 대부분을 점령하였으나, 헨리 6세 때, 오를레앙 전투에서 패배한 후,(잔다르크의 활약) 대부분의 대륙령을; 상실하고, 끝났다.
100년 전쟁이; 끝나고, 2년 후에, 영국에서는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귀족들 간에 전쟁이; 일어났다.
에드워드 3세의 손자. 랭커스터와, 요크를; 각각 지지하는 귀족들 간에, 30년내전이; 시작된 것이다.
요크가(家)의 문장(紋章)은; 백장미, 랭커스터가(家)의 문장은; 빨간 장미였기 때문에, 장미전쟁이라 불리는데, 요크가의 승리로, 에드워드 4세가; 왕위에 오르게; 된다.
그러나, 에드워드 4세는; 단명하고, 그의 아들 에드워드 5세의 나이가 어린 것을 이용하여, 리차드가; 에드워드 5세를 가두고, 왕위에 오르나, 그 역시 튜더가의 헨리에게 패하고, 영국에는 튜더왕조가; 시작되었다.
절대왕정
100년전쟁과, 장미전쟁으로, 귀족 세력이; 쇠퇴하였다.
왕위에 오른 헨리 7세는; 귀족이 가신단을 거느리는 권리와, 재판권을; 박탈하였고, 상인을 규제하고, 왕실 재정을; 튼튼히 하는 등, 절대주의왕권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이어, 헨리 8세는; 이혼문제로 로마 교황과 갈등을 일으켜, 1534년 로마 교황과 결별을 선언하고, 직접 교회의 수장이 되는 영국 국교회(성공회)를; 설립하였다.
그는; 복종하지 않은 수도원을 해산시키고, 토지를; 몰수하였다.
그러나, 헨리 8세의 아들 에드워드 6세에 이어, 메리(1553~1558)가; 여왕으로 즉위하자, 메리여왕은; 철저한 카톨릭신봉자로서, 교황과 화해하고, 카톨릭으로 돌아가, 수장령을; 폐지하고, 영국 국교회의 많은 신도들을; 화형시켰다.
(오늘날 칵테일의 일종인 블러디메리 Bloody Mary는; 여기서 이름이 유래되었다.)
메리 여왕 이후, 엘리자베스 1세는; 두 종파의 갈등에서 오는 폐해를; 극복하기 위해, 새로이 영국국교회를; 확립하였다.
가신단을; 해체하고, 빈민 대책으로 구민법을 제정하는 등, 국내정책도 충실히 행했으며, 스페인의 무적 함대를; 격파하고, 식민사업을; 추진했으며, 중상주의정책을; 펼쳐, 절대왕정을; 확고히, 했다.
1603년 엘리자베스 1세가; 후손없이 죽자, 인척인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스튜어트가; 제임스 1세로 영국 왕위에 올라 양국 왕실이; 통합되었다.
(이때부터, 잉글랜드, 웨일스, 스코틀랜드를; 합쳐서, 그레이트브리튼으로, 부르게 되었다)
제임스 1세는; 카톨릭과, 엘리자베스 시대부터 성장해 온 칼뱅파청교도들을; 탄압하며, 왕은; 법 위에 선다는 왕권신수설을; 주장하여, 의회와; 대립하였다. 1628년 조세나 공채는 의회의 찬성이 있어야 하고, 법에 의하지 않고 함부로 시민을 체포하지 못하며, 각종의 자유권을; 보장하는 내용의, `권리청원'을; 의회가; 통과시키자, 제임스 1세는; 의회를; 해산시켰다. 결국, 왕과, 의회의 대립은; 의회파와, 왕당파 사이의 내전으로, 발전하였다. 당시 부유했던 남부와, 동부는; 의회를; 지지했고,// 빈곤했던 북부와 서부는; 왕당파을 지지하였다. 대부분의 세입이 런던에서 징수되었고, 외국에서 군대가 들어오는 것을 막을 수 있었기에, 의회가; 남부와 동부의 지지를 받게 된 것은; 전략상 큰 이점이었다. 결국, 올리버크롬웰이; 이끄는 의회군은; 찰스를 패배시키고, 권력을; 장악하여, 공화정부가; 들어섰다.(청교도 혁명) 그러나, 크롬웰의 엄격한 종교정책과, 군사독재로, 국민의 불만은; 커졌으며, 크롬웰이; 죽자, 의회는; 네덜란드로 망명한 찰스 2세를; 맞이하여, 왕정을; 복귀시켰다.
왕정복고 시대
찰스 2세(1660~1685)는; 마그나카르타와, 권리청원의 존중을 조건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즉위한 후 사실상 이러한 선언은; 무시되었고, 찰스 자신은; 카톨릭교도로, 비국교도는; 공직을 가질 수 없다는 심사율을; 제정하는 등, 국교주의의 재건에 힘쓰는, 의회와, 다시 마찰을; 빚었다.
찰스의 뒤를 이은, 제임스 2세 역시 카톨릭주의와, 절대주의로 복귀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의회가; 네덜란드의 메리와, 오렌지 공 윌리엄(윌리엄 3세)을; 여왕과, 왕으로 불러들이자, 제임스는; 프랑스로 망명하게 된다.(명예 혁명)
1689년 의회는; 왕권을 제한하는 일련의 법안을 통과시켰는데, 이것이; 마그나 카르타, 권리청원과 함께, 영국헌법의 근간을; 이루는 권리장전이다.
이후, 윌리엄 3세는; 영국내정은; 의회에 맡기고, 당시 확대되는 프랑스 루이 14세의 유럽지배를; 막는 데, 전념하였다.
윌리엄3세와 그 뒤를 이은 앤여왕의 치세 동안, 영국은; 스페인 계승 전쟁을; 통해, 지브롤터, 미노르카, 노바스코샤, 뉴펀들랜드 등을; 차지하며, 주요 해상국으로 부상하였고, 식민지체제를; 확대해 나갔다.
1714년 앤 여왕 이후, 의회는; 독일의 하노버왕조의 조지 1세에게 왕위를; 부여했다. 하노버왕조의 왕위 계승 이후, 평화가; 지속되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산업혁명이라는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된다.
프랑스와의, 식민지쟁탈을; 위한, 7년 전쟁 후, 영국은; 북미와, 인도를; 지배하게 되었다. 영국은; 전쟁에서 소요된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식민지에서의 수입을 늘리려 하였고, 이것은; 미국에서의, 불만을; 야기시켰다. 인지세법이 1년 만에 폐지되고, 수입세의 부과가; 시작되었지만, 독립전쟁으로, 결국 미국의 독립을; 승인하게 되었다.
18세기 후반 산업화가; 경제적지배권을 가져다 주었다면, 프랑스나폴레옹과의 전쟁은; 정치적우위를 가져다, 주었다. 워털루에서, 나폴레옹을; 패배시킨 후, 영국은; 유럽과 세계 여러 지역에서 지배권을; 행사하게 되었고, 영국은; 입법 활동, 전쟁. 그리고, 개인의 기업 활동을; 통해서, 식민지를; 더욱 확장시켜 나갔다. 1820년에, 영국이; 지배한 영토의 인구는; 전 세계 인구의 26%인 2억명에, 달했다.
19세기 초반 수송 수단으로 철도와 기관차의 도입은; 중공업 분야에서 커다란 수요를 유발시켰고, 농업 분야에서도 새로운 시장의 확보와 비료의 값싼 수송을 가능케 함으로써 커다란 이익을 가져왔다.
한편, 1801년에는, 그레이트브리튼과, 아일랜드의 통합으로, 연합왕국이; 탄생하였다. 그 후, 아일랜드공화군(IRA)으로 알려진 게릴라군이; 결성되어, 아일랜드 독립 전쟁을; 시작하였으며, 1919년더블린에서 아일랜드 독립 의회를 구성하였다. 이에 따라, 1919~1921년 동안 영국과, 아일랜드 간에, 전쟁이 계속되었고, 1921년 휴전 조약이; 체결되어, 아일랜드북부의 얼스터 지방의 6개 주는; 영국에 잔류하고, 남부아일랜드의 26개 주는; 독립하게 되었다.
19세기 전반기에 차티스트 운동(노동자층을 주체로 전개된 민중 운동)과 반곡물법 운동이 일어났다. 차티스트들은; 의회의 개혁과 선거법 개정을 주장했으며, 반곡물법 동맹은 수입 곡물에 대한 관세의 폐지를 주장하였다. 이와 같은 운동은; 여러 가지 중요한 입법 조치를 가져오게 했다. 1832년에 선거권을 확대하는 제1차 선거법 개정이; 이루어졌고, 1833년에는, 제국 내 전 지역에서 노예제가 폐지되었다. 선거법 개정은; 매우 중요한 것이었지만, 국민 전체의 의사를 반영하기보다는 중산층이; 정부에 참여할 기회를 부여하는 데 그쳤다.
1837~1901년까지 통치한, 빅토리아의 시대는; 비교적 평온을; 유지했는데,
각 가정이; 사회의 핵심 조직으로 인식되었으며, 개인의 창조력이; 강조되었다.
품격, 의지, 성실, 근면. 그리고, 검약 등, 이른바, `빅토리아주의'가; 윤리적 덕목으로, 대표되었다.
1867년에 제2차 선거법이; 제정되었다. 이 개정안을 제안한 사람은; 자유당의 지도자 글래드스톤이었고, 통과시킨 사람은; 보수당의 디즈레일리였다. 이 두 사람은; 휘그파가; 자유당으로, 그리고, 토리파가; 보수당으로 변하는 과정을; 이끌어 낸, 인물들이다. 글래드스톤의 자유당은; 1869년에, 아일랜드국교회를; 폐지하였고, 아일랜드 토지법, 교육법(1870), 그리고 노동 조합법(1871)을; 통과시켰다. 보수당의 디즈레일리 역시, 사회 입법을; 추진하여, 공중 보건법(1875)을; 제정하고, 주당 노동 시간을 56시간으로 줄이는 데 이바지했다. 글래드스톤과, 디즈레일리는; 모두 대영제국의 팽창에, 힘썼다. 1890년대의, 제국주의는; 원료와 상품 시장을 찾는 기업가들의 경제적 이해 관계, 제국주의적 모험에 들뜬 군중의 열광. 그리고, 왕실의 영광과도 관련이; 있었다. 이 시기에, 아프리카, 아시아, 태평양 등지에서 식민지정복은; 계속되었다.
19세기 말에 이르면서, 빅토리아식, 사회 구조가; 흔들리기 시작했는데, 그 가운데서도, 경제적 상황 변화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국내의 경제적 어려움은; 주로, 국제 금융면에서의 영국 경제력에 의해서 극복될 수 있었으나, 노동자들의 불만은; 커져 갔고, 조직화되었다. 1900년에, 런던에서 열린, 노동자 대표 회의에서는; 노동 조합 운동가들과, 사회주의자들이; 의회에, 노동자 출신의 의원을; 보내기 위한, 위원회를; 설치하였다. 이것은; 20세기 노동당의 시작이었으며, 노동당은; 마침내, 자유당대신, 제2당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기원전 4세기경부터, 영국 땅에 켈트 족이; 거주. 영국 땅에 자리잡은 켈트 족은; 씨족들이 모여 사는 부족국가로, 여기저기 흩어져 살고, 있었다.
그러다가, 기원전 55년로마의 율리우스 카이자르의 침략으로, 영국의 남쪽은; 로마제국의 영토에 속하게, 된다.
로마군대는; 템스 강가 평야에, 요새를; 세우고, 영국을; 지배하는 데 필요한 물자를; 수송하는 기지로 쓰게 되는데, 이 항구의 이름을; 론디니움 Londinium 이라고 불렀고, 이곳이; 뒷날, 영국의 수도 런던이다.
차츰, 켈트 족과, 로마인은; 섞이게 되어, 영국에는, 라틴문화가; 일찍이, 뿌리 내린다.
로마의 정복 후에, 약 300년동안 전쟁 없는, 로마의 평화태평시대Pax Romana 가; 지속되었다.
앵글로 색슨 시대
4세기 초 게르만 족의 대이동과 함께, 영국의 로마군대는; 본국을 지키기 위해 돌아가고, 그 사이 켈트 족의 일파인, 스코트족이; 살기 좋은 남쪽으로, 대대적인 침략을; 시작했다.
로마인과; 어울려 살던, 남쪽의 켈트 족은; (현재 독일의 북쪽작센지방에 거주하던) 색슨 족에게, 구원을; 요청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색슨족은; 켈트 족을 돕기는커녕, 침략을; 시작했고, 이에 앵글로족도 가세하여, 켈트 족은; 대부분 지금의 스코틀랜드, 웨일즈,아일랜드로, 도망쳐 그곳에; 자리잡게, 되었다.
평야지대인 잉글랜드지방엔, 지금도 앵글로색슨 족의 자손이; 살고 있으며, 잉글랜드라는 지명은; 이들 종족의 이름에서, 비롯된다.
앵글로색슨족이; 지배하던 시기에,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실은; 기독교로, 개종한 사실이다.
577년 그레고리 교황은; 영국의 선교를 위해 아우구스티누스를; 파견하였고, 8세기 이후, 영국 전 지역은; 로마 카톨릭 교회에 귀속되었고, 왕들은; 로마 교회의 제도와 조직 등을; 받아들였다.
영국은; 783년부터, 덴마크 바이킹족의 침략에; 시달리게, 된다.
그때, 앵글로색슨족은; 몇몇 작은 나라로 갈라져 싸우고 있었는데, 바이킹의 침략을; 계기로, 단결하였고, 단결된영국의 지도자로 나선 이가; 바로, 전설적인 알프레드대왕이다.
이로써, 영국역사에; 처음으로, 나라다운 나라. 즉, '영국왕국'이; 태어났고, 이것이; 앵글로 색슨 족의 첫 통일 국가이다.
알프레드 대왕은; 침략자 덴마크 군대를 물리친 뒤, 덴마크와 화평조약을 맺는다.
알프레드 대왕은; 또한, 학문을 크게 권장하여, 영국 역사에 길이 빛나는 위인으로 존경받게 된다.
노르만 족의 정복
바이킹족이; 프랑스 왕에게 신하임을; 맹세하고, 노르망디에, 자리잡은 것은; 911년. 그후, 100년이 지난 뒤, 노르망디 왕에 오른 이가; 윌리엄이었다.
노르만족은; 100년이 흐르는 사이, 완전히 프랑스화되어; 있었고, 1066년 노르망디 공윌리엄의 영국 정복은; 프랑스의 영국정복이나, 다름 없었다.
덴마크도, 영국을; 침략했으나, 그들은; 앵글로 색슨 족과 비슷해, 영국에 큰 변화를; 가져오지 않았으나, 노르만족의 영국정복은; 로마제국에 이은, 라틴문화의 두 번째 정복이었다.
이때, 영국은; 언어, 풍습, 정치, 문화 등, 큰 변화를; 겪게, 된다.
윌리엄은; 영국 정복 후에, 윌리엄 1세로 노르만왕조를; 열었고, 영국의 모든 권력은; 노르망디에서 건너온 귀족들의 손에 들어간다.
그러면서, 왕실과, 귀족들은; 자연히 프랑스 말을; 쓰고, 영어는; 평민과 농민들이 쓰는 말로 구분되어, 영어는; 이때, 프랑스어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된다.
정복왕 윌리엄 1세는; 영국왕이면서, 동시에 프랑스 왕의 신하였다.
그러나, 노르만 족의 왕들은; 프랑스 내에 영토를; 계속 넓혀가, 프랑스왕보다도 더 넓은 땅을 차지하기에 이르고, 이것이;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벌어진 백년전쟁의 원인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윌리엄 1세는; 왕이 된 후, 반란을 진압하고, 몰수한 땅을 기사에게 나누어 주는 노르만식 봉건 제도로 통치하였고, 중세 영국의 특징인 집권적 봉건국가의 기초를; 다졌다.
자문회는 왕의 의견을 청취하고 승인할 뿐, 법률과 재판은; 왕이 직접 관장하였으며, 경제 체제도 마찬가지로 왕중심이었다.
헨리 2세의 영토 확장
정복왕 윌리엄 1세가; 죽은 뒤, (1087) 그의 손자인 헨리 2세부터 프랑스의 피가 반쯤 섞인 (아버지가 프랑스인 앙주 백작) '앙주'왕조가; 시작된다.
그는; 프랑스루이 7세의 왕비였던 엘레노아와 결혼 남프랑스의 엄청난 땅을; 얻게 된다.
프랑스 땅에 프랑스 왕보다 더 큰 영토를 소유하게 된, 헨리 2세는; 영국 내에서도, 스코틀랜드와, 웨일즈지방을; 평정, 단단한 통일잉글랜드의 기반을; 다짐으로써, 알프레드 대왕과; 더불어, 후세에 길이 존경받는 왕이; 된다.
헨리 2세는; 영국의 정치를 안정시켜, 많은 법과 재판 제도를 만들어, 1154-1189년까지, 35년 동안 평화로운, 영국을; 이끌어갔다.
마그나 카르타
헨리 2세는; 아들들의 반란으로 쫓겨나, 비참한 최후를; 마치고, 1189년 셋째 아들 리처드가; 왕이; 된다.
그가; 사자왕리처드 1세이다.
그는; 모험심이 강해, 십자군 원정에도 몸소 참가하였으며, 1199년 왕이 된지, 10년만에 전쟁터에서, 화살에; 맞아, 숨을 거두었다.
그를 이어 왕이 된 이가; 동생존이다. (1199)
존왕은; 왕이 된 후에 실정을 거듭하면서, 국민의 신망을; 잃게 된다. 그러자, 프랑스가; 군사를 일으켰고, 1204년노르망디를; 시작으로, 남부 프랑스 대부분의 영국소유 땅을; 빼앗기에 이른다. 그러면서, 왕과 귀족, 신하사이는; 더욱 멀어졌고, 귀족들은; 자신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존 왕에게, 칼을; 들이댔다. 그것이; 대헌장. 즉, 마그나 카르타 Magna Carta (great charter) 이다.
1. 세금을 거두려면 반드시 대표자 회의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2. 법에 따르지 않고는 자유민을 체포, 처벌하지 못한다 등의 내용을 골자로 함.
마그나카르타는; 영국의 첫 헌법이며, 현대 의회 민주주의의 주춧돌이; 된다.
왕에게서 세금을 거둘 권리를 크게 제한한 마그나카르타의 제정으로 (1215) 영국의 왕은 권력을 휘두를 길이; 막혀버리고, 사실상의 권력은; 세금 내는 대표자회의로 넘어가게 되는데, (납세자 대표: 귀족, 영주, 농장주인, 부유상인. 등) 이로써, 영국에는; 이른바, '국회'라는 씨앗이; 뿌려지게 되었다.
영국 국회의 탄생
'못난왕'이라는 국민과 신하들의 비웃음 속에 존왕이 세상을 떠나고,(1216) 그 위를 이어 헨리 3세가; 왕위에 오른다.
그러나, 헨리 3세가; 교황의 권위를 등에 업고, 마그나카르타의 정신을 위배, 국민에게 세금을 징수하고 폭정을; 일삼자, 귀족은; 다시 왕에게 맞서기 시작한다.
대헌장을 어기고, 마음대로 권력을 휘두르는 헨리 3세에 맞서 반란을 일으킨 이는; 왕의 매부인 프랑스 인 시몽 드 몽포르였다.
그는; 뛰어난 전술을; 사용하여, 왕의 군대를; 격파하고, 헨리 3세를; 포로로 잡는다.
권력을 쥔, 몽포르는; '각계 각층의 대표들이 모인 회의에서 국사가 다루어져야 하며, 따라서 각 주와, 자유도시는; 두 사람씩 대표를 뽑아 런던으로 보낼 것이며, 이들 대표들은; 나라 일을 다룰 의회를 이룰 것'이라고, 포고했다.
이렇게 해서, 1265년 영국 역사상 처음으로 각 주, 지방대표들이 모인 의회가; 열리게 되었는데, 이것이; 영국국회의 탄생이며, 오늘날 의회 민주주의의 시초이다.
이때부터, 영국은; 왕과, 국회라는 두 세력으로 갈려, 서로 상대를 누르려는 투쟁이; 벌어지게, 된다.
영국국회는; 그후, 1341년양원제로 발달하게 된다.
귀족과 승려 등 고귀한 신분을 가진 사람들로 이루어진 '상원'과, 그리고, 소귀족, 농장주, 상인, 지식인 등 실지로 국민의 대표들로 이루어진 '하원'.
시몽 드 몽포르 백작은; 영국민주주의에 큰 공적을 세운 사람이었으며, 정복왕윌리엄이; 영국을 점령한 뒤, 영국역사에, 영향을; 끼친, 마지막인물이었다.
이로써, 영국은; 근 200여년에 걸친, 프랑스의 정치, 문화의 영향에서 벗어나게 된다. (1066년: 윌리엄의 영국정복 - 1272년: 시몽 드 몽포르 죽음)
100년 전쟁 (1337-1453), 장미전쟁 (1455-1485)
1337년부터, 영국은; 프랑스와 100년 전쟁을; 벌이게 된다.
1328년프랑스의 카페왕조가; 끝나고, 발루아가(家)의 필립 6세가 왕위에 즉위하였을 때, 영국의 에드워드 3세는; 카페왕조와의 인척 관계임을 내세워, 왕위계승을; 주장하며, 프랑스에 침입하였다.
그러나, 전쟁의 실질적인 배경은; 에드워드 2세가 스코틀랜드와 대립했을 때, 프랑스가; 스코틀랜드를 지원했기 때문에, 또 프랑스의 플랑드르지방의 양모 시장을 둘러싼 양국의 이해 관계가 대립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전쟁초기에는 영국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어, 한때 프랑스령의 대부분을 점령하였으나, 헨리 6세 때, 오를레앙 전투에서 패배한 후,(잔다르크의 활약) 대부분의 대륙령을; 상실하고, 끝났다.
100년 전쟁이; 끝나고, 2년 후에, 영국에서는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귀족들 간에 전쟁이; 일어났다.
에드워드 3세의 손자. 랭커스터와, 요크를; 각각 지지하는 귀족들 간에, 30년내전이; 시작된 것이다.
요크가(家)의 문장(紋章)은; 백장미, 랭커스터가(家)의 문장은; 빨간 장미였기 때문에, 장미전쟁이라 불리는데, 요크가의 승리로, 에드워드 4세가; 왕위에 오르게; 된다.
그러나, 에드워드 4세는; 단명하고, 그의 아들 에드워드 5세의 나이가 어린 것을 이용하여, 리차드가; 에드워드 5세를 가두고, 왕위에 오르나, 그 역시 튜더가의 헨리에게 패하고, 영국에는 튜더왕조가; 시작되었다.
절대왕정
100년전쟁과, 장미전쟁으로, 귀족 세력이; 쇠퇴하였다.
왕위에 오른 헨리 7세는; 귀족이 가신단을 거느리는 권리와, 재판권을; 박탈하였고, 상인을 규제하고, 왕실 재정을; 튼튼히 하는 등, 절대주의왕권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이어, 헨리 8세는; 이혼문제로 로마 교황과 갈등을 일으켜, 1534년 로마 교황과 결별을 선언하고, 직접 교회의 수장이 되는 영국 국교회(성공회)를; 설립하였다.
그는; 복종하지 않은 수도원을 해산시키고, 토지를; 몰수하였다.
그러나, 헨리 8세의 아들 에드워드 6세에 이어, 메리(1553~1558)가; 여왕으로 즉위하자, 메리여왕은; 철저한 카톨릭신봉자로서, 교황과 화해하고, 카톨릭으로 돌아가, 수장령을; 폐지하고, 영국 국교회의 많은 신도들을; 화형시켰다.
(오늘날 칵테일의 일종인 블러디메리 Bloody Mary는; 여기서 이름이 유래되었다.)
메리 여왕 이후, 엘리자베스 1세는; 두 종파의 갈등에서 오는 폐해를; 극복하기 위해, 새로이 영국국교회를; 확립하였다.
가신단을; 해체하고, 빈민 대책으로 구민법을 제정하는 등, 국내정책도 충실히 행했으며, 스페인의 무적 함대를; 격파하고, 식민사업을; 추진했으며, 중상주의정책을; 펼쳐, 절대왕정을; 확고히, 했다.
1603년 엘리자베스 1세가; 후손없이 죽자, 인척인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스튜어트가; 제임스 1세로 영국 왕위에 올라 양국 왕실이; 통합되었다.
(이때부터, 잉글랜드, 웨일스, 스코틀랜드를; 합쳐서, 그레이트브리튼으로, 부르게 되었다)
제임스 1세는; 카톨릭과, 엘리자베스 시대부터 성장해 온 칼뱅파청교도들을; 탄압하며, 왕은; 법 위에 선다는 왕권신수설을; 주장하여, 의회와; 대립하였다. 1628년 조세나 공채는 의회의 찬성이 있어야 하고, 법에 의하지 않고 함부로 시민을 체포하지 못하며, 각종의 자유권을; 보장하는 내용의, `권리청원'을; 의회가; 통과시키자, 제임스 1세는; 의회를; 해산시켰다. 결국, 왕과, 의회의 대립은; 의회파와, 왕당파 사이의 내전으로, 발전하였다. 당시 부유했던 남부와, 동부는; 의회를; 지지했고,// 빈곤했던 북부와 서부는; 왕당파을 지지하였다. 대부분의 세입이 런던에서 징수되었고, 외국에서 군대가 들어오는 것을 막을 수 있었기에, 의회가; 남부와 동부의 지지를 받게 된 것은; 전략상 큰 이점이었다. 결국, 올리버크롬웰이; 이끄는 의회군은; 찰스를 패배시키고, 권력을; 장악하여, 공화정부가; 들어섰다.(청교도 혁명) 그러나, 크롬웰의 엄격한 종교정책과, 군사독재로, 국민의 불만은; 커졌으며, 크롬웰이; 죽자, 의회는; 네덜란드로 망명한 찰스 2세를; 맞이하여, 왕정을; 복귀시켰다.
왕정복고 시대
찰스 2세(1660~1685)는; 마그나카르타와, 권리청원의 존중을 조건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즉위한 후 사실상 이러한 선언은; 무시되었고, 찰스 자신은; 카톨릭교도로, 비국교도는; 공직을 가질 수 없다는 심사율을; 제정하는 등, 국교주의의 재건에 힘쓰는, 의회와, 다시 마찰을; 빚었다.
찰스의 뒤를 이은, 제임스 2세 역시 카톨릭주의와, 절대주의로 복귀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의회가; 네덜란드의 메리와, 오렌지 공 윌리엄(윌리엄 3세)을; 여왕과, 왕으로 불러들이자, 제임스는; 프랑스로 망명하게 된다.(명예 혁명)
1689년 의회는; 왕권을 제한하는 일련의 법안을 통과시켰는데, 이것이; 마그나 카르타, 권리청원과 함께, 영국헌법의 근간을; 이루는 권리장전이다.
이후, 윌리엄 3세는; 영국내정은; 의회에 맡기고, 당시 확대되는 프랑스 루이 14세의 유럽지배를; 막는 데, 전념하였다.
윌리엄3세와 그 뒤를 이은 앤여왕의 치세 동안, 영국은; 스페인 계승 전쟁을; 통해, 지브롤터, 미노르카, 노바스코샤, 뉴펀들랜드 등을; 차지하며, 주요 해상국으로 부상하였고, 식민지체제를; 확대해 나갔다.
1714년 앤 여왕 이후, 의회는; 독일의 하노버왕조의 조지 1세에게 왕위를; 부여했다. 하노버왕조의 왕위 계승 이후, 평화가; 지속되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산업혁명이라는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된다.
프랑스와의, 식민지쟁탈을; 위한, 7년 전쟁 후, 영국은; 북미와, 인도를; 지배하게 되었다. 영국은; 전쟁에서 소요된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식민지에서의 수입을 늘리려 하였고, 이것은; 미국에서의, 불만을; 야기시켰다. 인지세법이 1년 만에 폐지되고, 수입세의 부과가; 시작되었지만, 독립전쟁으로, 결국 미국의 독립을; 승인하게 되었다.
18세기 후반 산업화가; 경제적지배권을 가져다 주었다면, 프랑스나폴레옹과의 전쟁은; 정치적우위를 가져다, 주었다. 워털루에서, 나폴레옹을; 패배시킨 후, 영국은; 유럽과 세계 여러 지역에서 지배권을; 행사하게 되었고, 영국은; 입법 활동, 전쟁. 그리고, 개인의 기업 활동을; 통해서, 식민지를; 더욱 확장시켜 나갔다. 1820년에, 영국이; 지배한 영토의 인구는; 전 세계 인구의 26%인 2억명에, 달했다.
19세기 초반 수송 수단으로 철도와 기관차의 도입은; 중공업 분야에서 커다란 수요를 유발시켰고, 농업 분야에서도 새로운 시장의 확보와 비료의 값싼 수송을 가능케 함으로써 커다란 이익을 가져왔다.
한편, 1801년에는, 그레이트브리튼과, 아일랜드의 통합으로, 연합왕국이; 탄생하였다. 그 후, 아일랜드공화군(IRA)으로 알려진 게릴라군이; 결성되어, 아일랜드 독립 전쟁을; 시작하였으며, 1919년더블린에서 아일랜드 독립 의회를 구성하였다. 이에 따라, 1919~1921년 동안 영국과, 아일랜드 간에, 전쟁이 계속되었고, 1921년 휴전 조약이; 체결되어, 아일랜드북부의 얼스터 지방의 6개 주는; 영국에 잔류하고, 남부아일랜드의 26개 주는; 독립하게 되었다.
19세기 전반기에 차티스트 운동(노동자층을 주체로 전개된 민중 운동)과 반곡물법 운동이 일어났다. 차티스트들은; 의회의 개혁과 선거법 개정을 주장했으며, 반곡물법 동맹은 수입 곡물에 대한 관세의 폐지를 주장하였다. 이와 같은 운동은; 여러 가지 중요한 입법 조치를 가져오게 했다. 1832년에 선거권을 확대하는 제1차 선거법 개정이; 이루어졌고, 1833년에는, 제국 내 전 지역에서 노예제가 폐지되었다. 선거법 개정은; 매우 중요한 것이었지만, 국민 전체의 의사를 반영하기보다는 중산층이; 정부에 참여할 기회를 부여하는 데 그쳤다.
1837~1901년까지 통치한, 빅토리아의 시대는; 비교적 평온을; 유지했는데,
각 가정이; 사회의 핵심 조직으로 인식되었으며, 개인의 창조력이; 강조되었다.
품격, 의지, 성실, 근면. 그리고, 검약 등, 이른바, `빅토리아주의'가; 윤리적 덕목으로, 대표되었다.
1867년에 제2차 선거법이; 제정되었다. 이 개정안을 제안한 사람은; 자유당의 지도자 글래드스톤이었고, 통과시킨 사람은; 보수당의 디즈레일리였다. 이 두 사람은; 휘그파가; 자유당으로, 그리고, 토리파가; 보수당으로 변하는 과정을; 이끌어 낸, 인물들이다. 글래드스톤의 자유당은; 1869년에, 아일랜드국교회를; 폐지하였고, 아일랜드 토지법, 교육법(1870), 그리고 노동 조합법(1871)을; 통과시켰다. 보수당의 디즈레일리 역시, 사회 입법을; 추진하여, 공중 보건법(1875)을; 제정하고, 주당 노동 시간을 56시간으로 줄이는 데 이바지했다. 글래드스톤과, 디즈레일리는; 모두 대영제국의 팽창에, 힘썼다. 1890년대의, 제국주의는; 원료와 상품 시장을 찾는 기업가들의 경제적 이해 관계, 제국주의적 모험에 들뜬 군중의 열광. 그리고, 왕실의 영광과도 관련이; 있었다. 이 시기에, 아프리카, 아시아, 태평양 등지에서 식민지정복은; 계속되었다.
19세기 말에 이르면서, 빅토리아식, 사회 구조가; 흔들리기 시작했는데, 그 가운데서도, 경제적 상황 변화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국내의 경제적 어려움은; 주로, 국제 금융면에서의 영국 경제력에 의해서 극복될 수 있었으나, 노동자들의 불만은; 커져 갔고, 조직화되었다. 1900년에, 런던에서 열린, 노동자 대표 회의에서는; 노동 조합 운동가들과, 사회주의자들이; 의회에, 노동자 출신의 의원을; 보내기 위한, 위원회를; 설치하였다. 이것은; 20세기 노동당의 시작이었으며, 노동당은; 마침내, 자유당대신, 제2당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첫댓글 좋은 자료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설교자료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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