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믿기지 않겠지만 기독교를 최초로 정치적으로 이용한 사람은 콘스탄틴 황제이다. 사실 콘스탄틴황제와 그국민들은 대대로 미트라신앙을 해왔었다. 니케아 종교회의를 주도했던 콘스탄틴 황제는 기독교인으로 죽었지만, 임종직전에 세례만 받았을 뿐이다. 결국 기독교에대한 지식은 암것도 없었다. 그는 평생동안 태양신 종교의 고위성직자로 있었다. 바로 이런 관계로 예수의 안식일인 토요일을 일요일로 바꾸게 된 것이고 아직까지 유대인들은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키고 있다. 예수 역시 토요일을 안식일로 믿고 평생 살았다..
태양의 숭배자들은 항상 태양의 날이 신성한 날이라고 믿어왔다(12월 25일) 원래 예수님의 탄생일은 1~3월이지만 콘스탄틴황제가 기독교를 받아들이면서 태양신=예수님을 동일화하는과정에서 예수님의 생일이 12월 25일로 바뀌어버렸습니다. 실제 기독교의 창시자는 콘스탄틴이다. 그는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로마의 황제였기 때문에 그의 압력하에 성직자들은 예수의 신성에 찬성하게 된 것인데 그연유는 당시 로마내에 종교적 혼란이 계속되자 나라내에 분란을 잠재우기 위해 아타나시우스의 삼위일체를 채택하게 됩니다.
바로 콘스탄틴이 예수를 신으로 만들었다. 예수의 신격화는 콘스탄틴의 착안이다.
또 콘스탄틴은 예수의 생일을 1월 6일에서 태양의 재생일인 12월 25일로 바꾸었다. 12월 25일은 예수 탄생 이전부터 전세계적으로 경축해온 태양신의 날이었다. 크리스마스의 발상 전체는 꾸며진 것이다. 예수는 1월 6일에 태어났다. 그런데 콘스탄틴의 영향력에 의해 예수의 생일은 태양의 재생일인 12월 25일로 둔갑된 것이다. 태양숭배자들은, 태양이 12월 25일에 탄생했다고 생각해 왔다. 모든 기독교인들은 완전한 무지 속에서 살고 있다. 그들의 크리스마스가 가짜라는 것을 모르는 채..... 교회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대중들에게 철저히 감추고 있다. 이것이 진리의 수호인가? 거짓의 방어일 뿐이다.
콘스탄틴은 예수를 실패한 메시아로 보고, 그 자신을 진정한 메시아로 생각했다. 그의 이런 견해는 유명한 주교인 케자리아의 유세비우스의 다음 말에서 잘 알 수 있다. "아브라함의 종교는 마침내 예수가 아닌 콘스탄틴에게서 완성된 것처럼 보인다."
콘스탄틴은 그 자신을 유대인들이 기다려온 마지막 예언자로 만들었다. 물론 유대인들은 로마의 황제를 십자가에 매달 수는 없었다. 그리고 기독교인들은 왕권의 원조를 원했다. 그 당시 기독교인들은 곳곳에서 십자가에 처형되고 있었다. 그들은 콘스탄틴의 보호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순전히 협상,비지니스에 불과하다. 기독교인들은, 예수는 실패한 메시아이고 콘스탄틴이 참메시아라는 것을 받아들여야만 했다.이런 사실은 대중들에게 공표된 바가 없다. 기독교인들은 아무도 그 사실을 모르고 있다."(라즈니쉬) 이런 사실을 유추 하여 볼 수 있는 곳은 너무나도 많다.
----------------------------------------------------------------------------------- 라즈니쉬가 기독교의 창시자를 콘스탄틴이라고 칭하는이유 미트라(Mithras) 신앙과 기독교 흔히 제대로 공부하지 않은 이들이 미트라 신앙을 고대의 잡신 신앙이나 원시신앙으로 매도해 버리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 미트라 신앙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면 기독교의 뿌리를 전혀 이해할 수가 없다
태양신으로 널리 알려진 미트라에 대한 신앙은 약 사천년 전, 페르시아에서 시작되었다. 미트라 신앙은 동으로는 인도에서 중국까지 서로는 로마국경의 전 범위, 즉 스코틀랜드에서 사하라 사막, 스페인에서 흑해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미트라를 숭배했던 장소들이 영국,이태리,루마니아,독일,헝가리,불가리아,터기,페르시아,아르메니아,시리아,이스라엘, 그리고 북아프리카에서도 발견된다.
미트라 신앙은 로마제국에서 로마 군인들의 종교가 되었고, 제국 전역에 사원과 성전이 세워진다. 그들은 미트라에움이라는 자연적인 동굴모양을 모방해서 만든 사원에서 의식을 행했는데, 황소를 제물로 바쳤다.
"미트라" 동굴에서 꼭 발견되는 하나의 그림이 있는데, 한 인물이 황소의 목을 따는 그림이다. 그림에서 황소를 제압하는 인물이 "미트라"로써 태양신의 아들이다. "세상의 빛"으로 불리워졌고, 예수와 마찬가지로 "미트라" 성 삼위 일체의 두 번째, 즉 아들의 존재로써 중개자의 역할을 담당한다. 그의 생일은 12 월 25 일로 경축되었다. 만인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죽었다가 3 일만에 부활하였다. 그의 부활은 기독교의 부활절 주기와 일치하며 12제자를 거느렸다고 전해진다.
예수의 가르침이 국교화되는 과정에서 이 미트라 신앙의 의식이나,제도,관습,교리 등이 없어지지 않고 초기 기독교에 의해 대부분 수용된다. 즉, "미트라" 숭배자들이 믿었던 천국과 지옥, 죽은 자가 부활하는 심판의 마지막날, 어둠에 대한 빛의 승리를 위해 현존하는 모든 것들을 파괴하는 최후의 전쟁, 구세주의 고통과 형벌이 신자를 구원하게 되리라는 교리, 영을 통해 거듭 태어난다는 것, 구원, 부활, 재림 등의 교리, 최후의 만찬 이야기 등등 너무도 흡사하다.
또 미트라신은 처녀한테서 태어났는데 예수도 처녀에게서 태어났다. 또 미트라의 탄생을 경축하는 축제가 12월 25일에 열렸는데 이를 기독교에서 그대로 차용하여 예수의 생일로 쓰게 되었다. 그리고 두 종교 모두 세례의식과 피와 포도주에 의한 성화의례가 있다. 기독교 사제의 명칭인 파더(Father)는 미트라교 사제의 이름에서 따 온 것이며 미트라교의 주교는 자신들 직책의 상징으로 미트라 또는 미테르(주교관)을 썼는데 기독교의 주교들 또한 이러한 미테르를 지금까지 쓰고 있는 것이다. 카톨릭의 성직자 계급 제도나 예배 형식 및 예배 시 쓰이는 도구들 즉 향불, 예배 의복 등등 모두 미트라와 흡사하다. 십자가 목걸이, 염주알 등도 마찬가지이다. 이와같은 연유로 라즈니쉬는 기독교의 창시자는 예수가 아니라 콘스탄틴 황제라고 선언한 것이다
.....................................................................................................
|
첫댓글 착오 없으시기 바랍니다, 모두 이단 까페에서 퍼왔습니다. 이분들이 보는 콘스탄틴과 그의 니케아 공의회 배경을 조금이라도
알 수 있다고 생각 합니다. 여기에는 게재 하지 않았지만,,
"원제: Constantine versus Christ, 저자: Alistair Kee. 이승식 옮김, 한국신학연구소, 1988. (이미지는 1992년 판)
[출처] 콘스탄틴 대 그리스도|작성자 나비" 라는 책이 한국어로 번역되어 나와 있네요,,""
콘스탄틴이 니케아 공회의를 이끌고 나갔을 때 분명코 초대교회의 세력이 있었을지도 모르나 결국엔 콘스탄틴이 회의
를 이끌고, 이래라 저래라 하며 삼위일체를 고정지었다는 것이 모두 공통점으로 부각 됩니다.
그리고 그 회의 거의 모든 구
성원이 모두 로마 감독들의 성격을 지니고 있는 태양신+기독교의 짬뽕 사제들이었다고 기록 되어 있다고 합니다.
시중에 잘못논설들이 많으니 다 믿으면 안됩니다
콘스탄단황제가 니케아 회의를 주관하고 이끈것이 무슨 삼위일체를 그때부터 도입한것인가요?
마음으로 잘 믿다가 신학적으로도 정립해본 년도가 325년일뿐입니다
삼위일체는 구약부터 의인들의 마음에 한분되신 하나님을 믿어온것입니다
설명은 자세히 못하는 시대 였지만 삼위일체 믿음은 구약의 모든 의인들이 그렇게 믿고 죽었습니다
A. D. 325년에 다음에 콘스탄티노플에서 확대되었고 Chalcedon에서 승인된 Nicene신조가 생겼다.
이 신자들은 모든 기독교 신앙의 공동 유산이 되었고 여기서부터 거의 모든 신조들이 뻗어나간 공동 뿌리가 되었다
. 이리하여 복음주의적 개신교 신조는 대부분 이 초대 교회 신조들 위에 기초되었다.
그것이 왜 우리 재림신도들이 그들을 유리하게 말도록 하기 위한 또 다른 이유이다.
Nicene회의 선언은 일어났던 Arian 이단에 대항한 것 같이 인격의 교리에 관한 그 후의 Athanasian신조, Nicene신조는
그리스도의 영원한, 빛 중의 빛, 바로 그 하나님의 바로 그 하나님, 아버지와 한 본질의 존재, 모든 것을 창조하신 분을 제시한다.
. 1844년의 밀러의 무리는 의심할 여지가 없이 그 구성상에 압도적 대다수가 삼위일체론 자들이었다.
이 견해들은 역시 분명히 그 큰 분기점 1844, 10, 22 대 실망 이후에 우리 교회 기초를 놓은 조상들 중 삼위 일체, 그러나 이것은 처음에는 논쟁이 되지 않았다.
이것이 배경이다. 우리 교회 역사의 첫 10년간에는 그 문제에 관한 선동이나 분열이 없었다.
1854년에 Stephenson은 자기의 아리안 논쟁에 이곳에 제시된 적대가 있을 것을 인식했고 그렇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