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환추기경 선종 / 빈소 명동성당에 애도물결
정진석 추기경(왼쪽에서 두번째)이 16일 밤 서울 명동성당에서 김수환 추기경의 시신 안치 의식을 집전하고 있다. 김영민기자
2009년 2월 16일(월) 김수환 추기경의 빈소가 차려진 서울 명동성당에는 고인의 선종을 애도하는 추모객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오후 6시15분쯤 명동성당에 선종을 알리는 33번의 종이 울리자 신도들이 속속 모여들어 추모 기도를 올렸다.
신도와 일반시민들은 “나라의 큰 별이 졌다”며 애도했다. 명동성당 입구에는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님 선종…주님, 스테파노 추기경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라는 현수막과 선종을 알리는 검은 리본이 달린 김 추기경의 문장이 걸렸다.
서울대교구 허영엽 신부는 오후 8시30분쯤 기자회견을 열고 김 추기경의 선종소식과 장례절차를 발표했다.
허 신부는 “정진석 추기경을 위원장으로 하는 장례위원회를 구성해 서울대교구장으로 5일장을 치를 예정”이라고 밝혔다.
김 추기경의 선종 순간은 정진석 추기경과 교구청회 신부들이 함께했으며 고인은 마지막 순간까지 의식이 뚜렷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허 신부는 “선종 2~3일 전부터 ‘나는 너무 사랑을 많이 받았다. 서로 화해하고 사랑하라’는 말씀을 계속 반복했다”고 말했다.
김 추기경은 안구를 기증하겠다던 1989년 성체기증대회의 약속대로 선종 직후 서울 강남성모병원에서 안구 적출 수술을 받았으며 시신은 오후 9시40분쯤 명동성당으로 운구됐다. 시신은 곧바로 대성당 대성전으로 옮겨져 십자가 아래 유리관에 안치됐다.
김 추기경은 흰색 주교제의를 입은 채 왼손에는 묵주를 쥐고 오른손에는 주교반지를 끼고 있었다. 오후 10시쯤 빈소를 찾은 한승수 국무총리는 유리관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렸다. 성직자와 수녀·수도사들은 자정부터 위령미사를 열었다.
명동성당에서는 앞으로 장례가 치러지는 5일간 매일 추모미사가 봉헌된다.
고인의 시신은 대성당에서 일반에 공개되고 고인의 안식을 기원하는 위령기도제가 열린다.
선종 4일째는 입관 예식이 진행된다. 5일째인 20일 장례미사가 거행된 후 경기 용인시 천주교 성직자 묘지에 안장될 예정이다.
<오동근· 김향미기자>

김수환 추기경
대한민국의 성직자이며, 한국인 최초의 로마 가톨릭교회 추기경이다.
세례명은 스테파노이며, 대구광역시 출신이다.
생애
유년시절과 학업
- 1922년 대구광역시 중구 남산동에서 독실한 천주교 집안의 5남 3녀중 막내로 태어났다.
- 그의 조부인 김보현은 천주교를 믿다가 무진박해때 충청도 연산에서 잡혀 순교하였을 만큼 집안이 대대로 독실한 천주교 신자의 집안이었다.
- 그의 부모는 8명의 자녀들이 전부 성직자가 되기를 바랐으나 넷째형 김동한(가롤로)와 김수환만이 그 꿈을 이루었다.
- 김수환의 나이 5살때 경상북도 군위군로 이주하였고 군위보통학교(지금의 군위초등학교)에 입학하여 학업을 시작하였다.
- 보통학교 5년 과정을 졸업한 김수환은 대구 성 유스티노 신학교에 입학하였고, 서울교구의 소 신학교였던 동성상업학교(지금의 동성고등학교)로 편입하여 계속 학업을 하였다.
- 1941년 4월 김수환은 천주교 대구교구 장학생으로 일본 상지대학 문학부 철학과에 입학하여 학업을 계속했으나 독립투쟁에 더욱 관심을 갖게되었다. 1944년 일본 학병으로 강제 징집 당하여 일본 사관후보생으로 훈련을 받았으나 이듬해 전쟁이 끝나면서 다시 상지대학에 복학하여 1946년 12월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 서울 성신대학교(현 가톨릭대학교)에 편입하여 학업을 지속하다가 1951년 9월 15일대구 계산동 성당에서 사제서품을 받고 천주교 신부가 되었다.
사목생활
추기경으로서의 사목
1969년 3월 28일, 교황 바오로 6세는 김수환 대주교를 추기경으로 임명하였다. 이 때 그의 나이는 47세였고 당시 추기경중 최연소 추기경이었다.
김수환 추기경은 이후 30년 동안 천주교 서울대교구장으로 재임하면서 두 차례에 걸쳐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의장을 역임했고, 주교회의 산하 여러 분과 위원장과 전국 단체들의 총재를 맡았으며, 1975년 6월 1일부터 평양교구장 서리를 겸하였다.
또 1970년에는 아시아 천주교 주교회의 구성 준비 위원장으로 선출되었으며, 1967년 이후에는 한국 대표로서 여섯 차례에 걸쳐 세계 주교 대의원 회의에 참석하기도 하였다.
이 밖에도 김수환 추기경은 고위 성직자로서 한국의 종교뿐만 아니라 정치·사회·문화 등 여러 방면에 공헌한 업적을 인정받아 1974년 2월 서강대학교에서 명예 문학 박사 학위를 수여받은 이래 미국 노틀담 대학, 일본 상지대학, 고려대학교, 미국 시튼 힐 대학, 연세대학교, 타이완 후젠 가톨릭대학, 필리핀 아테네오 대학 등에서 명예 법학·철학·인문학 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그러던 중 75세가 되던 1997년 김수환 추기경은 고령의 나이를 이유로 로마 교황청에 서울대교구장 사임 의사를 밝혔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후 그는 다시 여러 차례 사임 의사를 밝혔고, 1998년 4월 19일에는 아시아 특별 주교 시노드 참석차 교황청을 방문한 자리에서 다시 한 번 사의를 표명하였고, 결국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도 그의 청을 들어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여 1998년 5월 29일 서울대교구장과 평양교구장 서리직의 사임을 허락하였다.
- 김수환 추기경은 교회가 공동선을 이룩하려면 불의와의 타협을 거부해야한다고 하였으며, 그의 사상은 유신체제 아래에서 탄압을 당하던 민주화 인사들의 인권을 위해서, 정의의 회복을 위해서 쓰여졌다.
- 특히 1980년대의 민주화운동에서 김수환 추기경은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그 결과 한국 천주교회는 정치적으로 많은 고난을 맞이하게 되지만 사람들에게 천주교를 더욱 가까이 느껴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 특히, 1987년 천주교 서울대교구에 빈민사목위원회를 두었고 김수환 추기경 재임기간 중에 복지기관을 150개나 설립하는등 어려운 사람들을 위하는 삶을 보여주었다.
- 1970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1]
- 1998년 서울대교구장과 평양교구장서리를 청주교구장 정진석 주교에게 물려주었으나 많은 왕성한 활동을 통하여 아직도 사회 곳곳에 그의 영향이 끼치고 있으며, 세계적으로도 최고령 추기경과 최장재임 추기경으로서도 명성이 높다.
최근 동향
노환으로 인하여 고령의 나이에 심신이 쇠약해져 강남성모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던 중, 2008년 10월 4일 오전 한 때, 호흡곤란으로 산소 호흡기에 의존했으나 지금은 정상을 회복하였다. 하지만, 언제 다시 돌발상황이 발생할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2]
저서
-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분도출판사, 1981)
- 《평화를 위한 기도》(1981)
- 《이 땅에 평화를》(햇빛출판사, 1988)
문장
- 방패 안의 왼쪽은 순교자들의 피 위에 세워진 한국 교회를, 오른쪽은 삼각산과 산으로 둘러싸인 서울을 상징하며, 별은 원죄 없이 잉태하신 성모 마리아를 주보로 모심을 나타낸다. 주교의 권위를 상징하는 모자 아래의 술5단은 추기경임을 뜻한다.
- 아랫쪽에 리본에 씌어있는 "PRO VOBIS ET PRO MULTIS"는 한국어로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라는 뜻이고 김수환 추기경의 사목표어이다.
<출처: 위키백과사전>
평화의 기도 / 폴리포니 앙상블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하여 추기경 반지 수여(1969)
김수환 추기경 생애(1부)
- 믿음의 발자취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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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이처럼 어떤 누구도 소외됨이 없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를 사랑으로 하나되게 하는 도구요, 이를 나타내는 표지여야 합니다. 교회 쇄신이란 바로 이러한 정신으로 이웃과 사회, 세계를 위해 봉사하는 것입니다. 신앙인은 누구나 끊임없이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먼저 그러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분을 주변에서 찾아 나름대로 그분의 신앙을 본받으려 합니다. 1968년 5월 29일 제12대 서울대교구장으로 임명된 이래 지금까지 40여년 동안 하느님의 목자로서, 양심의 대변자로서 스스로에게 충실해 온 김수환(金壽煥, 스테파노) 추기경의 신앙과 삶은 '너희와 모든이를 위하여'라는 말의 실천이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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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교 갔지만 신부될 생각은 없어"
<사진설명> 1. 1934년 대구 성 유스티노 신학교 예비과 시절의 소년 김수환(앞줄 왼쪽에서 3번째). 어머니의 말씀을 거역할 수가 없어 소신학교에 들어갔을 뿐 신부가 될 생각은 없었다.
2. 어머니(서중하 마르티나, 앞줄 왼쪽에서 4번째 안경쓰신 분)는 성품이 무척 곧으셨다. 그런 어머니 무릎에서 신앙과 삶의 자세를 배운 것에 늘 감사한다. 뒷줄 왼쪽에서 세번째가 김 추기경이고, 그 오른쪽이 형 김동한 신부.
추기경 김수환(81).
연세가 들면서 그의 상징인 '긴 인중'이 유난히 길어 보이는 추기경은 두눈을 지그시 감고 웃는 모습이 영락없는 우리네 할아버지다. 이 '혜화동 할아버지'의 웃는 모습을 뵐 때면 넉넉하다 못해 천진스런 느낌까지 든다.
그러나 그 소탈한 웃음에는 버거웠던 인고(忍苦)의 세월이 녹아있다. 그는 30여년간 무거운 짐을 짊어진 채 한국교회의 큰 어른으로 살아오고, 때로는 정도(正道)에서 이탈하는 역사의 흐름을 '민주'와 '정의'의 제자리로 돌려놓는 시대의 양심으로 살아왔다. 그러면서도 가난하고 힘없는 약자들의 곁을 유달리 좋아했다.
1998년 서울대교구장직에서 물러난 그는 이제 하느님께 한발짝 더 가까이 가있다. 스스로도 "나는 이제 해거름에 와있다. 하루에 비기면 석양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교회는 물론 사회 전반에서 필요한 말씀을 주는 그는 여전히 우리 시대의 큰어른이다. 생생한 육성으로 회고하는 그의 삶과 신앙을 연재, 격동기 한국사회와 교회 역사의 한 장을 독자들과 함께 정리한다. <편집자>
나는 붉게 물든 저녁 하늘을 무척 좋아한다. 산등성이로 석양이 기우는 풍경은 내 고향이고 내 어머니이다.
유년시절 첫 기억은 서너살 무렵, 경북 선산에 살 때이다. 어머니는 곡마단이 들어온 읍내 공터 구석에서 국화빵을 구워 파셨다. 난 그 옆에 쪼그려 앉아 어머니가 장사하는 모습을 우두커니 쳐다보았다.
옹기를 팔러 장에 나간 어머니가 해질녘이 되어도 안 돌아오시면 큰 길로 나가서 어머니가 나타나실 고갯길을 하염없이 바라보곤 했다. 늘 그 시간이면 서쪽 고갯마루에 석양이 뉘엿뉘엿 기울고 있었다.
우리 집안은 조부 때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본관이 광산(光山)인 조부 보현(요한) 공은 독실한 신자로 1868년 무진박해때 충남 논산에서 체포돼 서울에서 순교하셨다. 그 바람에 나의 아버지(김영석 요셉)는 유복자로 태어나셨다. 아버지는 당시 박해를 피해 다니던 신자들이 그랬듯이 옹기장수로 전전하다 대구 처녀인 어머니(서중하 마르티나)와 결혼해 대구에 정착하게 되었다.
난 6남 2녀의 막내인데 가난 때문에 이사를 자주 다녀서인지 고향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다. 대구 남산동에서 태어나기는 했으나 서너살 때는 경북 선산에서 살았다. 추측컨대 선산에서도 셋방살이를 했을 것이다.
그래도 '우리 집은 왜 이렇게 가난한가', '다른 집 애들은 점심을 먹는데 난 왜 굶어야 하는가'라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가난을 뼈저리게 느꼈을 텐데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을 보면 신기할 따름이다.
선산에서 어린 나이에 항일전쟁(?)을 치른 적이 있다. 집 가까이에 일본 아이들이 다니는 소학교가 있었는데 바로 위 형과 그 아이들간에 싸움이 붙었다. 그 싸움판에 끼어 있다가 일본 아이들이 던진 돌에 이마를 맞았다. 그때의 흉터가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다. 요즘도 가끔 사람들에게 흉터를 내보이면서 '항일 독립운동의 상처'라고 농담을 한다.
5살 무렵에 구미와 가까운 군위로 이사했다. 선산에서 군위로 이사가느라 큰 고개를 넘은 기억이 선명하다. 군위에서 석양이 지는 고갯마루를 볼 때면 '저 너머에 고향이 있는데…'라는 생각을 했다. 물론 태어난 곳이 대구임에는 틀림없지만 고향으로서 대구에 대한 추억은 별로 없다. 특히 유신반대운동을 할 때 고향 사람들이 나를 못마땅하게 여겨 서운한 마음이 들었던 적도 있었다.
아버지는 전형적인 충청도 사람이다. 아버지가 "순한아~"라며 나를 부르는 억양이 특이했던지 동네 사람들은 내가 나타나면 아버지 억양을 흉내내곤 했다. 내 이름이 '수환'이란 사실은 나중에 호적을 떼어보고서야 알았다. 동네 사람들 싸움을 잘 말리고, 바둑과 장기두는 것을 좋아하셨던 아버지는 초등학교 1학년 때 해수병으로 돌아가셨다.
그때 아버지를 위해 연도를 바치던 어머니 음성이 기억난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청국(淸國)으로 보내달라"고 기도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동네에 장사를 하는 청나라 사람이 살기는 했지만 죽은 아버지를 왜 그 사람들 나라로 보내달라고 하는건지…. 나중에 알고 보니 '천국(天國)'을 '청국'으로 잘못 알아들었던 것이다.
나와 3살 차이가 나는 형 동한과 어머니는 내 유년시절의 전부나 다름없다. 다른 형들과 누이들은 돈 벌러 일찍 객지로 나가거나 철이 나기 전에 출가를 해서 그런지 깊은 정이 들지 않았다.
내 인생에서 가장 깊게 인간적 관계를 맺은 상대를 꼽으라면 단연 동한 형이다. 형이 초등학교 4학년을 마치고 소신학교에 갈 때까지 한번도 헤어져 본 적이 없다. 형은 참 좋은 사람이었고, 더할나위 없이 동생을 사랑해 주었다. 형제들은 싸우면서 자란다지만 난 형과 싸운 기억이 전혀 없다. 형이 소신학교에서 공부하다 방학 때 집에 오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왜정 때 내가 학도병으로 끌려가게 되자 내 손을 잡고 엉엉 울던 형, 나보다 앞서 신부가 된 후에는 '순진한 건지, 어리석은 건지 모르겠다'는 핀잔을 들어가면서 결핵환자들을 돌보던 형, 동생이 추기경이 되자 행여나 불편을 끼칠까봐 일부러 피하셨던 형…. 형 김동한 신부는 참으로 사람을 사랑하시다 일생을 다하신 분이다.
유년시절에서 어머니의 존재는 참으로 절대적이었다. 어머니는 당신 이름 석자와 하늘 천(天) 따지(地) 정도의 글자 밖에 아는 것이 없었고, 가난 때문에 거의 평생토록 옹기와 포목을 머리에 이고 팔러 다니셨다. 그러나 곧은 신앙심과 여장부같은 기질만은 대단하셨다. 그런 어머니 무릎에서 신앙심을 키우고 인간으로서 기본교육을 배운 것을 하느님께 감사한다.
성품이 곧으셨던 어머니는 자식 교육에도 매우 엄격하셨다. 특히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는 "밖에 나가 '아비없는 자식'이라는 소리를 들어서는 안 된다"고 하시면서 더 엄격하게 자식들을 키우셨다.
하지만 어머니는 편애(偏愛)이다 싶을 정도로 이 막내 아들에게 사랑을 쏟으셨다. 막내 아들에게 하나라도 더 먹이려고 애쓰시는 것이 싫어서 어느해 여름에는 "과일 먹으면 자꾸 배탈이 난다"고 거짓말을 하고 과일을 입에 대지 않았다.
동한 형이 소신학교에 간 후로 어머니와 단 둘이서 살았다. 밤이 되면 어머니는 보통 1~2시간씩 기도를 바쳤는데 난 옆에서 뜻도 모른 채 꾸벅꾸벅 졸면서 중얼중얼댔다. 그때 기도하다가 엄마 등 뒤에서 잠드는 게 내 특기였다. 기도하기 싫다는 무언의 표시였다. 그리고 어머니는 성서나 옛 성인의 이야기, 또는 우리나라 고담 중 효자전을 들려주시곤 했다. 그 이야기를 들을 때면 속으로 '나도 성인되고, 효자돼야지'하고 다짐하곤 했다.
한번은 찰고(擦考)를 앞두고 교리문답을 외워놓지 않아 어머니에게 혼쭐이 난 적이 있다. 그때 효자전 이야기가 생각나 버드나무 회초리를 만들어 어머니에게 갖다드리고는 "이 불효자를 때려 주십시오"라고 말했다. 어머니는 매를 드시는 대신 다시 한번 조용히 타이르는 것으로 잘못을 용서해주셨다.
어머니의 젖무덤을 만지며 응석을 부린 기억은 없다. 그래도 어머니는 내 엉덩이를 두드리면서 "어이구 내 강아지, 내 강아지"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우리는 늘 초가삼간에서 살고, 한때는 셋방살이도 했지만 어머니는 그 옹색한 집에서도 공소를 열었다. 봄 가을 두차례 방문하시는 신부님을 모시는 관계로 우리 집은 동네에서 유일하게 도배를 하고 살았다. 그것도 봄 가을 두번씩이나 말이다.
그때 신부님 방문은 임금님 행차나 다름없었다. 신부님이 오시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땅에 엎드려 "찬미 예수님"하고 인사를 했다. 식사 때면 평소 구경도 못해보던 반찬이 신부님 밥상에 올라왔는데 나중에 그것을 얻어먹는 재미가 쏠쏠했다.
형과 내가 군위보통학교에 다닐 때였다. 대구 친정에 다녀오신 어머니는 두 자식을 불러 앉히고는 천청벽력같은 말씀을 하셨다. "너희는 이 다음에 커서 신부가 되거라."
훗날 짐작컨대, 어머니는 대구 시내에서 장엄한 사제서품식 광경을 보신 후 감동을 받으셨던 것 같다. 형은 이듬해 흔쾌히 대구에 있는 신학교 예비과(초등 5, 6학년)로 옮겼다. 나도 2년 후 형을 따라 신학교에 들어가기는 했지만 단지 어머니 명에 따른 것이지 신부가 될 생각은 없었다.
어릴 적 꿈은 장사꾼이 되는 것이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읍내 상점에 취직해서 5~6년쯤 장사를 배워 독립한 후 25살이 되면 장가를 갈 생각이었다. 어머니한테는 한번도 말씀드린 적이 없지만 내 나름대로 골똘히(?) 생각해서 구체적으로 세워놓은 계획이었다.
그 계획에 미련이 남아 있었던지 신부가 된 후에도 굴뚝에서 저녁밥 짓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집을 보면 부럽기만 했다.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2] 대구 성 유스티노 신학교 시절
5학년 마치고 5학년으로 입학 ... '낙제'한 셈
<사진설명>
1. 1993년 폐허가 된 경북 군위 옛집을 찾아가 유년시절의 추억에 잠긴 김수환 추기경. 김 추기경은 성유스티노 신학교(예비과) 입학 직전까지 이 집에서 신앙과 꿈을 키웠다.
2. 성유스티노 신학교(예비과) 시절의 소년 김수환(앞줄 가운데).
사제품을 1951년에 받았으니까 성직의 길로 들어선 지 올해로 53년째가 된다.
반세기 넘게 걸어온 성직자의 길. 하느님께서 부족한 나를 도구로 쓰시기 위해 넘칠 정도로 많은 영광과 사랑을 베풀어 주신 것을 생각하면 감사할 따름이다. 그러나 그 첫 걸음을 되돌아보면 절로 웃음이 나온다. 스님들은 머리깎고 출가를 한다지만 난 '가출'을 해서 신부가 된 경우이기 때문이다.
군위에서 5학년을 마칠 무렵이었다. 난 곧 동한 형의 뒤를 따라 대구 성유스티노 신학교(예비과)에 진학하기로 돼 있었다. 그 무렵 어머니가 볼 일이 있어 며칠 동안 대구에 가 계시는 바람에 달수(큰형) 형님하고 단 둘이 집에 있었다.
다른 애들은 밥먹고 학교에 가는데 달수 형님은 밥차려 줄 생각은 안하고 "밖에서 뭐 사먹고 학교에 가라"면서 5전인가 주었다. 그때 액자 뒤에 감춰둔 10전이 내 수중에 있었다. 그걸 합쳐서 주머니에 찔러넣고 대구까지 130리 길을 걸어갔다.
어차피 조만간 학교를 그만두고 대구로 옮길 테고, 어머니도 보고 싶고 해서 형한테 말 한마디 없이 길을 나선 것이다. 그때 사람들은 자동차가 아니라 마차를 타고 대구에 다녀왔다. 혹시나 해서 마차와 마주칠 때마다 유심히 살펴보았는데 어머니는 보이지 않았다. 도중에 배가 고파서 5전을 내고 떡을 샀는데 그걸 다 먹지 못해 손에 들고 뚜벅뚜벅 길을 걸었다.
내 뒤에서 자동차가 뽀얀 흙먼지를 날리면서 다가오길래 차를 세웠다. 운전사한테 남은 10전을 내보이면서 "아저씨, 요만큼만 태워주세요" 하고 부탁했다. 대구에 가는 길인데 거기까지 태워달라고 하면 될 걸 고지식하게 10전어치만 태워달라고 했더니 운전사는 정말 10리쯤 가서 나를 내려주었다. 나나 운전사나 고지식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할 수 없이 또 걸었다. 아무튼 아침에 군위에서 출발해 해가 지기전에 대구 시내 누나 집에 도착했다. 뜬금없이 철부지 막내동생이 나타나자 누나는 화들짝 놀라면서 "엄마는 오늘 군위로 돌아가셨는데 어떻게 네가 왔냐"고 말했다.
어머니는 내가 대구에 간 것을 어떻게 아셨는지 이튿날 부리나케 누나 집으로 찾아오셨다. 그 바람에 군위로 돌아가지 않고 누나 집에서 한동안 머물다 곧장 소신학교에 들어갔다. 결국 어머니를 만나러 홀로 130리 길을 걸은 것이 신학교 가는 길이 되었다.
성 유스티노 신학교 예비과는 초등학교 5, 6학년 과정이었다. 군위에서 5학년을 마치고 들어갔는데도 학교측에서 입학시험 성적이 형편없었던지 5학년 과정부터 밟으라고 했다. 따지고 보면 낙제를 해서 5학년을 두 번 다닌 셈이다.
예비과 생활이라는 게 아침 일찍 일어나서 기도하고, 엄격한 규율을 지키는 것이었으니 그 어린 나이에 재미를 부칠 리가 없었다. 기숙사는 또 왜 그렇게 덥고, 추운지….
기숙사는 난방시설이 안 돼 있어서 겨울이면 잠자리에 드는 게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솜옷을 껴입고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가 좀 따뜻해지면 일어나서 옷을 벗어놓고 자곤 했다. 옷을 껴 입은 채로 곯아 떨어지는 날도 많았는데 그럴 때면 땀을 많이 흘려 이불이 흥건히 젖었다. 그걸 낮에 내다 널면 날씨가 추워서 그대로 얼어버렸다. 그런 날 밤 얼음이불 속으로 들어가는 건 더 고역이었다.
하루는 신학교에서 쫓겨나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1원짜리 동전을 갖고 꾀를 냈다. 어차피 내 의지로 들어온 신학교가 아닌데다 난생 처음 떨어져 살아서 그런지 어머니가 몹시 그리웠다.
당시 우리는 규칙상 개인적으로 돈을 갖고 있을 수가 없었다. 돈은 모두 담당 신부님께 맡겨 놓아야지 만일 돈을 갖고 있다 들키면 집으로 쫓아보낸다는 얘기를 여러차례 들었다.
어느날 아침, 새로 갈아입은 윗도리 주머니에서 딱딱한 뭔가가 손에 잡혔다. 뜻밖에도 1원짜리 동전이었다. 난 '악마'가 시키는 대로 책상서랍을 열고 가장 눈에 잘 띄는 자리에 그 동전을 놓아두었다.
오후쯤이면 호랑이 신부님이 불러서 당장 보따리 싸라고 호통을 치시겠지.'
생각만해도 신이 났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밥을 먹고 돌아와도, 밖에 나가 운동을 하고 돌아와도, 수업을 마치고 돌아와도 신부님이 부르질 않았다. 결국 그 동전을 학교 담장 밖으로 던져 버렸다. 1원짜리 동전을 갖고 부린 잔꾀는 실패로 돌아갔다.
서울 동성상업학교 시절에는 꾀병을 부려 병원에 입원까지 했다. 신부가 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지 않아서인지 공부에도 별 흥미가 없었다. 그런데도 하느님께서 발목을 놓아주지 않으신 걸 보면 성직자의 길은 이미 정해진 운명이었던 같다.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3] 동성상업학교 시절(上)
신부되기 싫어 꾀병 부리다 진짜 축농증 걸려
대구 성유스티노 신학교(예비과)를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와 동성상업학교에 진학했다.
동성상업학교(현 동성고등학교)는 갑조(甲組)와 을조(乙組)로 편성된 5년제였는데 갑조는 일반 상업학교였고, 을조는 나처럼 신부가 되려는 학생들이 다니는 소신학교였다.
전 원주교구장 지학순 주교(1921~1993), 전 전주교구장 김재덕 주교(1920~1988)가 입학동기다. 지학순 주교는 도중에 결핵에 걸려 중퇴했다가 몇년 후에 함남 덕원신학교로 편입했다. 그 때문에 동기들 가운데 '꼴찌'로 사제품을 받았다. 하지만 1965년 가장 먼저 주교직에 올랐다.
그때 동기들이 그의 주교서품식장에서 "하느님 말씀 중에 틀린 말이 하나도 없어. '꼴찌가 첫째가 되고 첫째가 꼴찌가 될 것이다'(마태 20, 16)라고 하셨잖아."라면서 한바탕 웃었던 기억이 새롭다.
동성학교에 진학해서도 사제직에 확신을 갖지 못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시간이 좀 흐르자 '꼭 신부가 돼야 하나?' 하는 회의가 '나 같은 사람도 신부가 될 수 있을까?'라는 의문으로 바뀌었지만 말이다.
그런 갈등 속에서도 공부는 그럭저럭 해나가고, 주일이면 친구들과 어울려 북한산에 올라가 소리도 지르고 노래도 부르다 내려왔다.
2학년 때였다. 대구 집에서 방학을 보내고 올라왔는데 무슨 까닭인지 다른 때보다 의욕이 더 떨어졌다. 성유스티노 신학교 시절, 집에 가고 싶어 1원짜리 동전을 갖고 꾀를 부리다 실패한 적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꾀병을 앓기로 마음 억었다.
담임 신부님이 아파서 누워 있는 학생에게 빵을 갖다주는 장면도 여러번 본 터라 이왕이면 빵도 얻어먹을 수 있는 꾀병이 좋을 것 같았다.
담임 신부님께 "머리가 몹시 아프다"고 거짓말을 하고 기숙사에 누웠다. 그런데 신부님은 정 못 참겠으면 집에 가서 휴양을 하고 오라는 말씀은커녕 이틀이 지나도 빵조차 갖다 주지 않으셨다. 밖에서 학생들이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도 한낮에 꾀병으로 누워있는 '가짜 환자'의 마음을 괴롭혔다. 이번에도 실패한 것 같았다.
다시 일어나서 공부해야 겠다고 마음을 고쳐먹었는데 옆에 누워있는 선배가 내 병세를 꼬치꼬치 캐묻더니 축농증이라는 진단을 내려주었다.
축농증? 난생 처음 듣는 병명이지만 그럴듯한 병명을 하나쯤 대고 싶었던 터라 신부님께 가서 "저는 축농증에 걸렸습니다"라고 말씀드렸다. 신부님은 "축농증이 뭔지 아느냐?"고 묻길래 선배한테 주워들은 증상을 자세히 댔다.
곧바로 신부님이 소개해준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았는데 이게 무슨 조화란 말인가. 진짜 축농증이었다. 그 바람에 수술까지 받고 한 학기를 쉬게 됐다. 같은 교정에서 공부하는 상급반 동한 형에게는 혼이 날까봐 신부되기 싫어 꾀병을 부렸다는 얘기를 차마 꺼내지 못했다.
3학년에 올라가서는 어느 정도 마음을 잡았다. 꾀병 때문에 뒤진 한 학기 공부를 만회하느라 책을 붙들고 있는 시간이 많다보니 자연스레 공부에 탄력이 붙었다. 그 전에는 도서관에서 주로 소설책을 뽑아 읽었다. 그런데 소설이라는 게 남녀가 만나서 사랑하다 헤어지고, 때로는 삼각관계에 빠지는 내용이 대부분이라 얼마 안 가 흥미를 잃었다.
반대로 처음에는 시큰둥했던 성인전에서 새로운 재미를 찾았다. 사실 도서관에 더 이상 읽을 소설책이 없어 빼든 성인전이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가슴 속에서 뭔가 뜨거운 기운이 솟았다.
돈 보스코 성인과 소화 데레사 성녀 일대기를 그때 읽었다. 특히 소화 데레사 성녀 일대기는 소설에서 느껴보지 못한 뜨거운 감동을 안겨 주었다. 지금도 소화 데레사 성녀의 이 말씀을 기억한다.
"하느님은 미미한 존재를 통해서도 당신의 사랑을 충분히 드러내는 분입니다… 기쁨과 고통 등 모든 것이 사실은 하느님의 사랑에서 나옵니다…."
내게 심적 변화가 일어난 것은 사실이다. 열심한 성인 얘기 일색이라고 쳐다보지도 않던 성인전에서 영적 뜨거움을 느끼고, 모든 게 하느님 사랑으로 귀착되는 섭리에 조금씩 눈을 떠갔다. 한마디로 말해 하느님께 기울고 있었다.
신앙적 순수함 때문인지 3학년때는 소위 '세심병(細心病)'이란 걸 앓았다. 죄같지도 않은 죄까지 꼬치꼬치 고해 신부님께 고백해야 마음이 편한 결벽증 같은 증세 말이다.
심지어 고해성사를 보고 나오는데 미처 말씀드리지 못한 죄가 생각나서 다시 돌아가 "아까 ○○죄를 빠트렸습니다"라고 고백할 정도였다.
그같은 우스꽝스런 행동을 몇번 되풀이하자 고해 신부님이셨던 프랑스 출신의 공 신부님은 "너, 자꾸 그러면 신부가 될 수 없다"라고 타이르셨다.
세심병이 깊어지자 나 같이 부족한 사람은 다른 이들의 영혼을 구제하는 신부가 될 자격이 없다는 자격지심이 들었다. 사제직에 대한 열망도 없이 어머니에게 등 떠밀려 신학교에 온 사람이 무슨 신부가 된단 말인가.
어느날 심호흡을 크게 하고 공 신부님 방문을 두드렸다. 그리고 "이만 신학교에서 나가겠습니다."라고 정중히 말씀드렸다.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4] 동성상업학교 시절(下)
시험답지에 "나는 황국신민이 아님"
<사진설명>
김 추기경이 갈등 속에서 사제의 꿈을 키운 동성상업학교(현 서울 혜화동 동성중고등학교) 옛 교사(校舍).
담임이었던 공 신부님께 신학교를 그만두겠다고 말씀드린 이유는 '도둑'이 되기 싫어서였다. 사건의 발단은 공 신부님 강론이었다.
공 신부님은 미사 강론 중에 '착한 목자'(요한 10, 7-21)의 비유를 들어 이렇게 말씀하셨다.
"성서에 나와있듯이, 양 우리에 들어갈 때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딴 데로 넘어가는 사람은 도둑이며 강도이다. 도둑은 양을 훔쳐다가 죽이려고 울타리를 넘는다. 하지만 양치는 목자는 문으로 버젓이 들어간다. 너희들 중에도 이런 도둑같은 심보를 갖고 신학교에 온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런 녀석은 지금이라도 보따리를 싸는 게 낫다."
공 신부님이 나를 지목해서 말씀 하신 게 틀림없었다. 신부님은 고해성사때 "자꾸 그러면 신부가 될 수 없다"라고 몇 차례나 주의를 주었다. 또 내가 어머니한테 등 떠밀려서 신학교에 들어오고, 집에 가고 싶어 꾀병을 부린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에 직접 말씀은 못하시고 강론시간에 에둘러서 '너 같은 녀석은 일찌감치 다른 길 찾는 게 좋다'라고 충고하시는 줄 알았다.
신부님 말씀을 듣고나니 양을 훔치려고 우리를 넘는 도둑이나 신부가 될 생각도 없이 신학교 교문을 들어선 나나 별반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신부님께 이런저런 이유로 신학교에서 나가겠다고 말씀드렸다. 신부님은 아무 말씀도 없이 한참동안 나를 쳐다보셨다. 긴장감이 감돌았다.
"신부란 자기가 되고 싶다고 되고, 되기 싫다고 안 되는 게 아니다." "그래도 저는 자격이 없는 것 같습니다." "당장 나가!" "… …어디로 나가란 말씀인지?" "어디긴 어디야. 내 방에서 당장 나가."
일반 상업학교 과정을 밟는 갑조(甲組) 학생들과는 교련수업을 같이 하는 정도였지 별 교류는 없었다. 지금 은퇴해서 분당에 살고 있는 나상조(아우구스티노) 신부는 그 당시 갑조 학생이었는데 학교 대대장을 맡을 정도로 소문난 수재였다. 신자가 아니었던 그는 일반 대학에 진학한 후 하느님의 부르심을 듣고 뒤늦게 신학교에 들어와 사제가 된 경우다.
갑조 선생님들은 신학생반인 을조(乙組) 수업에 들어오면 신부님들과 달리 3.1 운동, 일제 식민통치 만행 등 민족혼을 일깨워주는 말씀을 자주 해주셨다. 선생님의 그런 얘기를 들을 때면 피가 역류하는 듯 울분이 치밀고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그럴 때는 신학생이 아니라 나라를 빼앗겨 신음하는 백성이었다.
선생님들이 조국애를 부추긴 건지, 아니면 정의감이 부쩍 자란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일제에 대한 울분이 치솟을 때마다 그 심정을 일기장에 토해놓곤 했다. 서랍에 넣어둔 그 일기장을 들켜 교장 신부님께 불려가서 호되게 꾸지람을 들은 적도 있다.
그 무렵 동한 형과 북한산에 올라간 적이 있다. 그때 일본에 빼앗긴 조국에 대한 얘기를 꺼내자 동한 형은 "너는 신부가 될 거니? 아니면 독립운동가가 될 거니?"라며 걱정스럽게 물었던 기억이 난다.
내 마음 안에서는 이미 독립전쟁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시험시간에 그 전쟁이 밖으로까지 비화(飛火)되고 말았다.
5학년 졸업반 수신(修身, 지금의 윤리)과목 시험시간이었다. 수업시간에 배운 내용이 소크라테스 철학에 관한 것이라 우리는 당연히 그와 관련된 문제가 나올 줄 알았다. 그런데 어처구니없게도 "조선반도의 청소년 학도에게 보내는 일본 천황의 칙유(勅諭)를 받은 황국신민으로서 그 소감을 쓰라"는 문제가 나왔다.
아마도 조선총독부가 황국신민화 정책을 강화하기 위해 전 학교에서 그같은 시험을 실시하라고 지시했던 모양이다.
순간 민족적 자존심과 젊은 혈기의 반항심이 엇갈렸다. 한 시간 동안 꼼짝않고 앉아있다가 마침 종이 울릴 무렵 답지에 이름을 쓰고 빈난에 "① 나는 황국신민이 아님. ② 따라서 소감이 없음."이라고 썼다. 지금 생각해봐도 그 어린 나이에 뭘 믿고 그런 배짱을 부렸는지 모르겠다.
예상한대로 이튿날 교장 신부님으로부터 호출명령이 떨어졌다.
"이거 네가 쓴 것 맞아?" "네." "어쩔려고 이런 답안을 쓰냐. 이게 밖에 알려지면 학교는 그날로 문 닫아야 하고, 너는 감옥에 가고, 교회는 또 박해를 받는다는 걸 모르냐? 엄청난 일이 일어나는 거야." "그럼 그 답지를 밖으로 내보이지 않으면 되잖습니까." "이 녀석이, 어른말 안듣고 어디서 말대꾸야!"
교장 신부님한테 말대꾸한다고 따귀를 한대 얻어 맞았다. 교장 신부님은 이어 "너는 위험해서 신부가 되면 안되겠다"라고 말씀하셨다. 교장 신부님 입에서 그런 말씀이 나왔으니 이젠 정말 끝나는가보다라고 생각했다.
며칠 후 여름방학이 되어 대구로 내려갔다. 학교로 돌아오지 말라는 기별, 즉 퇴학통지서가 날아오리라고 예상했는데 아무 소식이 없었다. 방학을 끝내고 돌아와 그럭저럭 지내다 졸업을 두어달쯤 남겨두었을 때 우리 교구 주교님(대구대목구 무세 주교)이 신학교를 방문하셨다. 마당에서 서성거리다 교장 신부님이 주교님 계신 방으로 바삐 들어가시는 모습을 보았다.
나는 속으로 '교장 신부님이 분명히 나에 대한 얘기를 하실테고, 그러면 정말 쫓겨나게 되는구나'라고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후 주교님이 나를 부르셨다. 각오를 단단히 하고 주교님 방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이건 또 무슨 얼토당토않은 명령이신가.
"스테파노. 여기 졸업하면 일본으로 가라. 거기서 공부를 더 하고 오너라."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5] "어머니, 내 어머니"
당신의 깊은 신앙심 말로 표현할 수 없어
<사진설명> 1951년 9월15일 대구 계산동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은 김수환 추기경이 어머니 서중하 여사를 모시고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김 추기경은 어머니의 기도가 없었다면 성직자가 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일본 유학을 다녀오라는 교구장님의 명령은 정말 뜻밖이었다. 아마도 교장신부님이 우리 주교님(대구대목구 무세 주교)께 나에 대해 좋게 말씀해주셔서 그렇게 된 것 같다. 교장신부님은 버릇없이 말대꾸한다고 내 뺨을 때리시면서도 한편으로는 '괜찮은 녀석인데'라고 생각하신 모양이다.
잠시 어머니(서중하 마르티나, 1955년 작고)에 대한 얘기를 하고 넘어가고 싶다.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한 성직자가 혈육의 정에 연연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러나 모든 사람에게 자기 어머니가 그러하듯이 나에게도 내 어머니는 가장 크고 특별한 존재다. 오늘의 나를 있게 하고, 이 막내아들을 위해서라면 10번이라도 목숨을 내놓으셨을 분이다.
난 비교적 무뚝뚝한 아들이었다. 길을 함께 걸을 때도 난 나대로 앞서 가고 어머니는 뒤에서 따라오곤 하셨다. 목석(木石)같은 아들이 못마땅하셨던지 언젠가 "네 형(김동한 신부)하고 같이 가면 심심찮게 말도 부치고, 재미난 얘기도 들려주건만 너는 어찌 그리 돌부처같냐"고 불평을 하셨다.
효도라고 해봐야 어머니 뜻대로 신부가 되고, 오래 전에 약속한 대로 삼(蔘)을 한번 사드린 게 고작이다. 부모에게 삼을 달여드리는 게 효도라고 생각한 나는 어릴 때 "돈을 많이 벌면 서른쯤 돼서 삼을 사드릴께요"라고 몇번 약속을 했다.
그때는 나름대로 계획이 있었다. 25살에 결혼해서 자리잡고 착실히 돈을 벌면 그때쯤 보약을 지어드릴 형편이 될 것 같았다. 그런데 어머니가 그 약속을 용케 기억하고 계시다가 내 나이 딱 서른이 되자 먼저 얘길 꺼내셨다. 그래서 쥐꼬리만한 신부 월급을 톡톡 털어 삼을 사드린 적이 있다.
달성 서(徐)씨인 어머니는 가난한 옹기장수 아버지(김영석 요셉)와 결혼해 평생을 힘겹게 사셨지만 자식들 앞에서 한번도 나약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셨다.
그 시절 대구 천주교 신자들 사이에 인품과 신심이 돈독하기로 소문난 서동정이란 외삼촌이 계셨는데 그 분이 십수년 연하인 누이동생(어머니)을 늘 존경에 가까운 경애심으로 대하는 것을 보았다.
코흘리개 시절의 일이다. 일본에 가있던 큰형(김달수)한테서 편지가 왔다. 다리에 화상을 입어 다 죽게 됐다는 기별이었던 모양이다.
어머니는 일본말을 한마디도 못하시는데도 즉시 주소만 들고 현해탄을 건너가 꼼짝도 못하고 누워있는 형을 들것에 실어 데려오셨다. 그리고 큰아들의 썩어들어가는 다리를 온갖 약을 써서 3년 만에 고쳐놓으셨다. 내 생각에 어머니는 자식이 아프면 어떤 약을 써야 좋은 지를 본능적으로 아시는 분 같았다. 어머니의 용기와 의술이 놀랍고 신기할 따름이었다.
나와 나이 차가 큰 달수 형님은 아무래도 방랑병이 있었던 것 같다. 다리가 낫자 이번에는 만주로 떠났다. 한동안 편지가 오는 듯하더니 소식이 끊겼다. 어머니는 그 바람에 3번이나 간도 연길과 하얼빈까지 가서 큰아들을 찾아 헤매셨다.
집안 형편이라도 넉넉하면 좋았으련만 어머니는 돈이 없어 포목을 머리에 이고 행상을 하면서 그 멀리까지 기나긴 여행을 하셨다.
마지막으로 다녀오셔서는 "하얼빈역에서 네 형이 보여 뒤에서 큰 소리로 불렀더니 한번 돌아보고는 인파 속으로 사라져 놓쳐버렸다"며 슬퍼하셨다. 그로 인해 마음에 큰 상처를 입으셨다. 어머니가 그 말씀을 꺼내실 때마다 우리는 "사람을 잘못 보셨겠죠. 형님이 그 멀리까지 찾아온 엄마를 못본 척하고 피하셨겠습니까?"라고 위로했다.
그러면 어머니는 "아니다. 어미 눈은 못 속인다"며 미련을 떨치지 못하셨다.
내 마음에 새겨진 어머니의 영상은 온갖 풍상으로 주름진 늙은 어머니, 만날 길 없는 큰아들을 찾느라 낯선 거리를 헤매는 애타는 모정(母情)의 어머니다. 어머니의 눈과 마음은 마지막 날까지 큰아들을 찾느라 구만리를 헤맸을 것이다.
1980년대 전국을 울음바다로 만든 KBS 남북이산가족찾기 생방송 때 나 역시 형님이나 그 자손들이 우리를 찾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 남몰래 TV를 지켜보곤 했다. 마음 같아서는 나도 방송국에 나가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라고 외치고 싶었다. 혈육의 정이란 게 그런가 보다.
우리 집은 참으로 가난했다. 대신학교 시절, 집에 내려갔다가 어머니와 형수가 "내일 아침에 먹을 쌀이 떨어졌다"고 걱정하시는 소리를 엿들은 적이 있을 정도다. 그래도 어머니 덕분에 가난에 찌들어 살지는 않았다.
어머니는 그런 가난 속에서도 신세를 한탄하거나 궁색한 티를 내지 않으셨다. 옛날 가난한 선비마냥 끼니를 잇지 못할지언정 강인하고 꼿꼿한 정신만은 잃지 않으셨다. 우리 형제는 어머니의 그런 모습을 보고 자랐다. 그 때문인지 서울 동성상업학교 시절에 동료들은 "부잣집 아들인 줄 알았다"며 놀라는 표정을 짓곤 했다.
어머니의 깊은 신앙심과 기도는 이루 형언할 수가 없다. 내가 일본군 학병으로 끌려갔다가 살아 돌아오자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네 어머니 기도 덕에 살아온거다"고 말해주었다.
내가 신학교에서 공부를 하거나 전쟁터에 나가 있을 그 시간에 어머니는 계산동성당 성모당 앞에서 기도를 하고 계셨다. 어머니의 기나긴 기도가 없었다면 난 전쟁터에서 살아 돌아오지 못하고, 사제가 되지도 못했을 것이다.
어머니는 1955년 3월 "어머니! 어머니!"하고 다급하게 부르는 나에게 기대신 채 조용히 눈을 감으셨다.
어머니는 "다리에서 바람이 난다"는 말씀을 가끔 하셨다. 그 말뜻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다가 내 몸에서 그런 증세를 느끼고서야 알게 되었다.
늙으신 어머니가 하늘나라에서 단 5분만이라도 나를 찾아와 주신다면 무릎을 꿇고 어머니의 야윈 다리를 주물러드리고 싶은 게 이 막내아들의 사모곡(思母曲)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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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6] 일본 상지대학 유학시절(上)
일본에 대한 반감에 유학길이 '고생길'
<사진설명>
1. 일본 상지대학 유학시절의 김수환(뒷줄 가운데). 앞줄 왼쪽 안경 쓴 이가 김정진, 그 옆이 최석우, 뒷줄 김 추기경 왼쪽이 최익철 신학생이다. 맨 오른쪽은 한공렬(제2대 전주교구장) 신부.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내 연배 신부들 중에 세상을 떠난 이들이 많은데 유독 일본 유학동기 4명만은 지금도 건재하다.
김정진(은퇴)·최석우(한국교회사연구소 명예소장)·최익철(은퇴) 신부가 나와 함께 1941년 일본 상지대학으로 함께 유학을 떠난 신부들이다. 최석우 신부는 지금도 식을 줄 모르는 열정으로 교회사 연구에 전념하고 있고 최익철 신부는 평생 모은 우표로 하느님 사업에 여력(餘力)을 보태고 있다.
나 역시 밀려드는 강연요청 탓에 바쁘게 살고 있으니 우리에겐 뭔가 특별한 건강비결이 있는 것 같다. 사실은 그때 한 명(신종호)이 더 있었는데 아쉽게도 사제생활 도중에 환속했다.
당시만 해도 유학 신학생들은 대부분 로마에 가서 공부를 했다. 그런데 주교님들은 일본 식민통치가 장기화될 조짐을 보이자 우리를 일본으로 보내셨다. 아무래도 일본을 잘 아는 신부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신 듯했다.
유학을 떠난다면 마음이 설레야 정상일 텐데 일본에 대한 반감 때문인지 내게는 유학길 자체가 고행길이었다. 일본 형사들이 부산행 기차 안에서 학생들을 의심의 눈초리로 훑어보고 부산항에서 연락선에 오를 때 몇번씩 신원조회를 하는 것도 못마땅했다. 배 안에는 막노동 일거리를 찾아 보따리 하나 옆에 끼고 고향을 떠나는 한국인들이 많았다. 다들 옷차림은 남루하고 얼굴은 초췌했다.
그런데 일본 선원들이 통제에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들에게 발길질을 하면서 욕을 퍼붓는 것을 목격하고는 속이 얼마나 부글부글 끓어올랐는지 모른다. 한창 혈기왕성한 나이라서 한층 더 그랬던 것 같다. 그러나 혼자서 끌탕만 했을 뿐이지 그 자리에서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일본에 내려 학교에 찾아갈 때까지 불심검문이 대여섯번도 더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일본 경찰들은 검문할 때면 매번 나를 건너뛰었다. 나를 일본인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심지어 일본 사람들과 한참동안 얘기를 하다가도 고향 얘기가 나와 나는 조선사람입니다 라고 말하면 한결같이 표정부터 바뀌었다.
내 얼굴이 일본인처럼 생겼나? 난 일본인 취급을 받는 게 무척 싫었다. 일본인들과 구별되게 얼굴에 무슨 표시를 하고 다니는 방법은 없을까 하는 궁리를 했을 정도다.
도쿄에 있는 상지대학(Sohia University)은 예수회가 1913년에 설립한 대학이다. 철학을 전공하기 전에 2년 동안 예과에서 주로 독일어를 공부했다. 신학생 신분이라 여학생과 데이트를 하거나 캠퍼스의 낭만을 즐길 기회는 없었다. 공부하는 시간 외에는 그저 동포 친구들과 어울려 우국지사마냥 조국의 운명을 걱정하고 서점에 들러 전공서적을 고르는 게 고작이었다.
어느날 교정에서 일본인 교수와 대화할 기회가 있었다. 그 분은 나를 믿고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제의하곤 했는데 그날 문득 이런 말을 꺼냈다.
내가 겪어보니까 한국 학생들은 좀 교활한 면이 있어.
교활하다니요? 교수님 지금 한국은 일본의 식민통치 아래서 신음하고 있습니다. 질 나쁜 일본인들이 한국인들을 이간질시키면서 조종하고 있잖습니까.
조종이라니?
일본 식민정책을 아시잖아요. 한국인은 일본의 강압에 못이겨 성과 이름까지 바꾸고 있어요. 일본인 교사가 한국말을 하면서 뛰어노는 소학교 어린애를 불러다 매질을 했다는 얘기도 들리더군요. 인간인 이상 약자가 강자 앞에서 비굴해지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요. 저 같은 젊은이들은 대학을 졸업해도 민족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희망이 없다는 말입니다.
꼭 민족을 위해서만 일을 해야 하나?
그럼 배운 우리가 고통받는 민족 무지몽매한 민족을 내팽겨쳐두고 무슨 일을 해야 옳은 건가요.
난 목이 메어서 더 이상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아마 그 대화를 고등계 형사가 엿들었다면 그 즉시 철창 신세를 져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대화를 엿들은 사람이 있기는 있었다.
며칠 후 독일 출신의 게페르트(Theodore Geert) 신부님이 나를 조용히 부르셨다.
지나가다 우연히 자네 얘기를 엿들었네. 자네 가슴 속에 뜨거운 불덩이가 있더구만. 잘못하면 화상을 입겠어. 그런 마음으로는 신부가 될 수 없다네.
신부님 민족이 저를 부르거나 제가 민족을 위해 헌신할 기회가 온다면 주저없이 달려갈 겁니다.
아니야 아니야. 내 눈에 자네는 꼭 신부가 돼야 할 사람이네.
게페르트 신부님. 그 분은 잊지 못할 나의 영적 스승 이다. 과묵하고 중후한 인상이었지만 대화를 하다 보면 모성애에 가까운 자애심이 느껴지곤 했다. 언젠가는 내 얼굴이 고독해 보였던지 따로 부르셔서 신부가 되면 더 고독하다. 그 고독을 이겨내는 좋은 방법은 너만의 도서관을 꾸미는 것이다 하시면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을 읽어보라고 권해주셨다.
게페르트 신부님은 당신도 기회가 되면 한국에 건너가 일하고 싶다고 말씀하셨다. 식민통치 시절이라 선교사들조차도 관심이 덜했던 한국을 극진히 생각해주는 마음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실제 행동으로 보여주셨다. 6.25 전쟁 직후 한국에 들어와 1960년 서강대를 설립하고 초대 이사장을 맡으신 것이다. 신부님은 지난해 여름 일본에서 98세를 일기로 돌아가셨다.
신부님은 정말 나에 대한 사랑이 깊으셨다. 내 머리에 손을 얹고 소리내어 울기까지 한 일이 있다. 사제가 되겠다고 현해탄을 건너온 식민지 국가의 제자가 주검으로 변해 돌아올지 모를 전장(戰場)으로 나가게 되었을 때다.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7] 일본 상지대학 유학시절(下)
강제 입영 앞둔 친구가 누이동생 부탁
<사진설명>
일본 상지대학 유학 시절 절친했던 친구 박철(왼쪽). 학병에 나갈 무렵 헤어진 연변 용정 출신의 이 친구를 찾으려고 나름대로 수소문해 보았으나 여태껏 재회하지 못했다.
건강도 그렇고, 사람도 그렇고 소중한 것은 잃어버린 후에야 그 가치를 안다.
유학 시절에 무슨 식(式)을 할 때마다 군가 비슷한 노래를 불러야 했다. 전쟁 기간이어서 더 그랬던지 일본 학생들은 그 노래를 우렁차게 부르면서 뜨거운 조국애를 느끼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 같은 유학생들은 입만 놀리는 시늉을 했다. 그러면서 '언제쯤 내 조국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는 다짐을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생각해보면 참 기가 막힐 일이다.
일본에 적개심을 품고 있는 한국 신학생이 사제가 되겠다고 유학을 와서 일본 전장(戰場)에 끌려가게 되었으니 말이다. 훈련소에 입소해 "쏴!", "찔러!" 구령에 맞춰 총검술 훈련을 받을 생각을 하니 난감하기만 했다. 도대체 누굴 향해 쏘고, 찔러야 한단 말인가.
일본은 1941년 진주만 기습을 감행하면서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다. 전쟁이 날로 치열해지자 학생들까지 전쟁터로 내몰려는 책동을 전방위적으로 펼쳤다. 심지어 대구 집까지 찾아가서 가족을 괴롭히고, 대구 주교님(일본인 하야사까 주교)에게도 "신학생들의 학병 지원율이 저조하다"면서 압력을 가했다.
이광수, 최남선 같은 저명한 지식인들도 일본에 건너와 유학생들에게 "학병에 입대해 죽을 때에야 조선이 제국의 일원이 될 수 있고, 그리하여 조선인이 황국신민이 될 때에야 신운명을 개척할 수 있다"는 요지의 유세를 했다.
나뿐만 아니라 모든 한국 유학생들의 적은 일본이었다. 학병지원 압력이 점점 거세지자 우리들은 기가 막힌 '작전'을 짰다.
"피할 수 없는 일이라면 지원해서 일본이 주는 밥을 먹으면서 전술을 열심히 익히자. 그리고 중국으로 파병되면 그 쪽에 있는 우리 독립군에 합류해서 일본군과 목숨을 걸고 싸우자."
그렇다 하더라도 한국으로 돌아가는 게 더 나을 것 같아 친구 남규일(전 부산 성모여고 교장)과 '일본 탈출 대작전'을 세웠다. 친구와 함께 보름 동안 동경역에 나가 기차표를 알아 보았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우리 차례만 되면 발매가 끝나버렸다. 짐작컨대 한국인이어서 표를 안 준 것 같았다.
그래서 배를 타고 함경북도 청진으로 가기로 하고 배표를 구했다. 청진을 거쳐 덕원신학교로 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형사들이 청진 부두에 상주하면서 눈에 띄는 학생들을 강제 입대시킨다는 소문이 돌았다. 배표를 구하기는 했는데 마침 공교롭게 독감이 걸려서 배를 탈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먼저 배에 오르는 친구와 약속을 했다. 만일 청진에 내려 강제 지원하게 되면 나에게 '지원했다'고 전보를 쳐주기로 말이다. 얼마 후 그 친구에게서 전보가 도착했다. 첫 전보에는 '지원했다'고 하더니 그 다음 전보에는 '덕원으로 간다'고 적혀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친구는 청진에서 강제로 학병지원서를 쓰고 난후 여관방에서 다른 친구들과 독립군으로 넘어가자고 의기투합을 하다가 형사에게 발각돼 감옥으로 끌려간 것이었다.
학병 얘기를 하다보니 팔자(?)를 고칠 뻔한 웃지못할 해프닝이 기억난다.
한 친구는 자기만 전쟁터에 가는 줄 알았던지 하숙집에 찾아간 나에게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난, 수환이 자네가 맘에 드네. 오래 전부터 자네에게 부탁하고 싶었네."
"무슨 부탁?"
"… …"
서울 돈암동 출신인 그 친구는 호주머니에서 누이동생 사진을 꺼내더니 "한국에 가거든 누이동생과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그 친구가 착각을 한 모양이었다. 난 신학생이고, 나중에 신부가 될 사람이라고 설명을 했더니 그제서야 미안하다고 했다. 훗날 그 누이동생과 한국에서 만난 적이 있는데 참 예쁘기는 예뻤다.
나중에 들리는 얘기로는 누이동생은 김(金)씨 성을 가진 남자와 결혼해서 아들을 낳았는데 아이 세례명을 나와 같은 '스테파노'라고 지었다고 한다. 나는 속으로 '오빠한데 뭐 들은 얘기가 있나' 하고 생각했다. 마산교구장 재직시절에도 누이동생은 나를 몇 번 찾아왔다. 어느날 둘의 관계(?)를 아는 누이동생의 친구가 내게 "저 사람하고 연애했죠?"라고 물어본 적 있다. 그래서 "연애는 못해보고 할 뻔했다"고 대답해 주었다.
아무튼 내게도 학병 입영통지서가 날아왔다.
작별인사를 하려고 나의 영적 스승인 게페르트 신부님을 찾아뵈었다. 신부님은 차를 끓여 내오셨다.
"스테파노, 하느님을 원망하는가?"
"신부님, 찻잔이 넘칩니다."
"예수님도 이 지상에서 마지막 순간에 하느님께 왜 나를 버리시느냐고 절규했네. 하느님은 결코 자네를 버리시지 않으실거야."
신부님은 의자에서 일어나 내 머리에 두 손을 얹고 축복을 해주셨다. 얼마나 지났을까. 신부님의 손이 심하게 떨리더니 우시는 소리가 들렸다. 분명 사나이의 울음소리였다. 그분이 식민지 나라의 신학생인 나를 진정으로 아껴주었다는 사실을 그때 알았다.
사랑하는 제자를 사지(死地), 그것도 남의 나라 전쟁터에 보내는 스승의 심정이 오죽했겠는가. 난 그 사랑을 감당할 수가 없어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왔다.
서강대 설립자이시기도 한 게페르트 신부님은 지난해 여름 일본에서 돌아가셨다. 서강대에서 봉헌된 영결미사를 내가 집전했다. 돌아가시기 몇달 전 마지막으로 찾아뵈었을 때도 내게 "한국과 한국교회, 그리고 한국의 제자들을 위해 늘 기도한다"고 말씀하셨다. 신부님의 유해는 서강대 도서관 옆 로욜라 동상 밑에 봉안돼 있다.
문득 옛 스승이 사무치게 그리워진다.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8] 전쟁터에서(上)
내 영명축일에 태평양의 작은 섬으로
<사진설명>
학병시절 전석재 신부와 함께
1944년 결국 학병으로 입대해 일본 중부 나가노 부근 마쯔모도라는 곳에서 훈련을 받았다.
고된 훈련이 연일 계속됐다. 얼마나 잠이 부족하고 배가 고팠던지 그때 소원은 딱 두가지였다. 배가 부르도록 실컷 먹고, 허리가 뻐근할 때까지 드러누워 실컷 자는 것. 요즘은 밤마다 잠이 안 와서 고생을 하는데 그때는 왜 그렇게 잠이 쏟아지던지….
훈련소에서도 입바른 소리 잘하는 성격이 불거졌다. 어느날 나이 많은 고참상사가 나와 친구를 부르더니 허심탄회한 대화를 제의했다. 그는 우리가 흉금을 털어놓고 얘기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부드럽게 이끌었다. 그 자리에서 고지식하게도 한국인에 대한 차별의 부당성 같은 얘기를 해버렸다.
아니나 다를까. 그때까지만 해도 훈련병들 가운데 훈련점수가 2위였는데 그날 이후로 꼴찌에서 2번째로 급락했다. 그 바람에 사관후보생 자격시험을 치를 기회도 박탈당했다.
훈련을 마치고 기차에 몸을 실었다. 차창 커튼을 모두 내렸기 때문에 남으로 가는 건지, 아니면 북으로 가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전선(戰線)으로 간다는 것만 알고 있었을뿐이다.
기차가 멈췄다. 유학생활을 하던 동경과 그리 멀지 않은 요코하마였다. 그곳에서 일주일 가량 대기하는 동안 온갖 흉흉한 얘기가 다 들려왔다. 요코하마 대기 병력은 배를 타고 남쪽으로 가는데 십중팔구는 도중에 미군 잠수함 공격을 받아 물고기 밥이 된다는 소문이 돌았다.
요코하마 대기소는 사찰이었는데 그곳에서 성탄절을 맞이했다. 전선으로 떠날 날을 기다리면서 성탄밤을 지내는 신학생의 신세가 갑자기 서글퍼졌다.
그때 목사 수업을 받다 입대한 친구가 "거룩한 성탄밤인데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조용한 곳으로 가서 함께 기도하자"고 제의했다. 기쁜 마음으로 따라 나서 조용한 곳을 찾아보았더니 불상 뒤가 제격이었다.
그 자리에 사람들이 버린 잡동사니가 좀 있었는데 일본 가요집이 눈에 띄었다. 가요집에 성탄캐럴송 '고요한 밤'도 있었다. 우린 이래저래 잘됐다 싶어 기도하고 나서 가요집을 펴들고 '고요한 밤' 노래를 정말 거룩하게 불렀다.
요즘 일치주간이 돌아오면 천주교, 개신교 등의 그리스도교인들이 한데 모여 일치기도회를 여는데 우린 벌써 그때 일치기도회(?)를 연 셈이다. 그것도 옆에 부처님까지 모셔놓고 말이다.
이튿날 2000톤급 화물선에 올라 태평양으로 나갔다. 그날이 마침 내 영명축일(스테파노)이라 괜시리 마음이 울적했다. 파견지는 남쪽의 작은 섬 부도라는 곳이었다. 직선 거리로 3일이면 갈 것을 미군 잠수함을 피해 지그재그로 가야 하기 때문에 꼬박 6일이 걸린다고 했다. 배멀미가 하도 심해서 아무 것도 먹고 마시지 못했다. 배에는 연료 드럼통과 탄약이 잔뜩 실려 있었다. 그 위에 가마니를 깔고 축 늘어져서 고통스런 시간을 보냈다.
항해가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다. 친구가 헐레벌떡 뛰어 내려오더니 비상 구명대를 챙겨 빨리 갑판으로 올라가라고 소리쳤다. 미군 잠수함이 출몰(出沒)하는 것이었다. 병사들은 갑판 위에서 사색이 되어 검푸른 바다를 응시하고 있었다. 연료와 폭발물을 산더미처럼 실은 배가 어뢰 공격을 받으면 배는 물론이고 사람도 산산조각이 날 판이었다.
겁에 질려서 어느 누구도 감히 입을 떼지 못했다. 폭풍 전야의 고요가 느껴졌다. 물결이 찰랑찰랑 흔들리는 수면 저 아래에서는 이미 어뢰가 배를 향해 돌진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태평양 망망대해에서 맞닥뜨린 절체절명의 위기.
그 순간 어머니의 모습이 수평선 위로 또렷하게 떠올랐다. 불현듯 어머니가 보고 싶어졌다. 그리고 어머니의 무릎에서 죽고 싶다는 생각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참 이상한 체험이었다. 철학을 공부하면서 죽음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만일 내가 죽게 되더라도 어머니가 보는 앞에서는 절대 죽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곤 했다. 자식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는 어미의 심정은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그리고 그런 어머니의 모습이 마지막 순간에 눈에 밟힌다면 자식의 고통 또한 얼마나 클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막상 죽음이 닥치자 정반대로 어머니의 품이 그리워졌다.
나는 그때 스스로 만들어 낸 생각과 본심(本心)에는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았다. 그 이후로 내 생각이 앞설 때면 나의 본심, 즉 마음 속 깊이 자리잡은 참 모습이 무엇인가를 성찰해보게 되었다.
천만다행으로 잠수함은 우리 배를 공격하지 않았다. 죽음을 모면한 것이 기쁘기만 했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놀라울 정도로 큰 하느님 사랑에 고개가 숙여질 뿐이다.
또 그 경험이 없었더라면 어머니에 대한 정이 이토록 애틋하게 마음 속에 남아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한때는 어머니의 사랑이 부담스러워 일부러 거리를 둔 적도 있었는데 본심은 그게 아니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은 내 인생의 큰 소득이다.
우리가 주둔한 섬에서는 다행히 전투가 벌어지지 않았다.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유황도를 미군이 점령하고 난 후에는 매일 오전 일정한 시각에 미군의 폭격이 있었다. B-29 폭격기가 일본 본토를 폭격하고 돌아오다 남은 포탄을 소진하느라 떨어뜨리는 폭격이었기 때문에 위협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기를 마냥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마침내 나와 동료 학병 몇명은 유황도로 탈출하기로 결심하고 은밀히 계획을 세웠다.
카누처럼 생긴 조그만 배 한척을 어렵사리 구했다. 그리고 수류탄, 비상식량 건빵, 흰천을 감춰두었다. 흰천은 바다 한가운데서 미군 비행기나 군함을 만나면 항복의 표시로 흔들려고 준비했다. 탈출 직전까지 우리를 망설이게 한 것은 유황도까지의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D-day, 마침내 운명의 날이 밝았다.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9] 전쟁터에서(하)
무모했던 탈출계획 끝내 '물거품'
<사진설명>
남의 나라 전쟁터에 끌려온 학병이었기에 종전 소식은 더할나위 없이 감격스러웠다. 사진은 1945년 9월2일 시게미쯔 일본외상이 미국 미조리 항공모함에서 항복조인서에 서명하는 장면.
탈출의 날이 밝았다. 아침에 미군 B-29 폭격기가 포탄을 쏟아붓고 돌아가면 곧바로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갈 작정이었다. 우리 일행은 몸을 숨기고 매일 아침 일정한 시각에 나타나는 폭격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그날 따라 해가 중천에 걸릴 때까지 폭격기가 보이질 않았다. 폭격기가 돌아간 후에 출발해야지 만일 바다 한가운데서 폭격기를 만나면 모든 게 끝장이었다. 기다리면 기다릴 수록 불길한 예감이 가슴을 짓눌렀다.
그냥 부대로 돌아가느냐, 아니면 태평양 한가운데서 죽을 각오를 하고 출발하느냐의 선택만 남았다. 우린 출발하기로 결정하고 배를 띄웠다.
그런데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 미군 폭격기가 그제서야 나타났다. 파도가 심해 한 사람은 멀미를 하느라 정신을 못차렸다.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 배를 돌려 부랴부랴 섬으로 되돌아갔다.
지금 생각해보면 무모하기 짝이 없는 도주계획이었다. 나중에 알아보니 우리의 목적지 유황도는 200마일(약 320㎞)이나 떨어져 있었다. 카누처럼 생긴 배를 타고 도주하기에는 너무나 먼 거리였다.
그리고 그날 부대에 조금만 더 늦게 복귀했더라면 총살을 당했을지도 모른다. 일본(군)을 비난하는 편지를 내 사물함에 꽂아두고 출발했으니 말이다. 한창 혈기왕성한 나이라서 겁없이 도주를 감행했지 나이가 조금 더 들었더라면 그런 무모한 계획을 행동에 옮기지 않았을 것이다.
그럭저럭 부대생활을 했다. 남의 나라 전쟁터에 끌려나온 학병 신분이었기에 별다른 의미를 둘 수 없었다. 1945년 8월 15일, 마침내 히로히토 일본 천황이 연합군에 무릎을 꿇었다. 일본의 항복은 우리 민족의 해방이었다.
'아, 고국에선 36년 압제의 사슬에서 풀려난 백성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태극기를 흔들면서 만세를 외치고 있겠지….' 일본 군복을 입고 있는 조선 학병의 기쁨과 감격은 더 컸다.
미군은 몇달 동안 우리를 완전히 무장해제시킨 후 섬에 상륙했다. 일본군측에서는 부대원들이 미군과 접촉하는 것을 엄하게 금지시켰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미군은 일본 군인들을 본토로 송환하기 시작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억울하게 끌려온 한국인들을 먼저 풀어줘야 하는데 미군은 무슨 영문인지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기다리다 못해 "여기에 강제로 끌려온 한국인들이 있으니 빨리 돌려보내달라"는 내용의 영문편지를 쓰고 맨 밑에 '스티븐 김'이라고 싸인을 했다. 내 세례명을 영어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 편지는 내가 갖고 있던 콘사이스 영어사전과 동료의 중학교 1학년용 영어교과서, 그리고 우연히 손에 쥔 'LIFE'라는 영문 화보잡지를 총동원해서 쓴 것이다. 문제는 미군과의 접촉이 완전히 차단된 상태에서 어떻게 편지를 전달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어느날 미군 주둔지역 정지(整地)작업에 불려나가 일하던 중 트랙터를 몰고 있는 미군 병사에게 살짝 다가가 말을 걸었다. 난생 처음 영어로 말을 하는 데다 절박하게 부탁하는 입장이라 내딴에는 깍듯이 예의를 갖췄다.
"Would you pease be kind enough to speak with me?"
"What?"
"… …"
"What?"
미군 병사가 그 말을 알아들을 리가 없었다. 접촉을 포기하고 땅에 주저앉아 묘안을 짜냈지만 신통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잠시후 그 병사가 다가오더니 "아까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느냐"는 식으로 말을 걸어왔다. 너무나 반가웠다.
난 땅바닥에 한반도와 일본 지도를 그려가면서 "여기는 일본, 저기는 한국. 난 한국 사람이다. '히로이드'(미국식 일본 천황 이름)를 증오(hate)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 편지를 너희 사령관에게 전해달라"면서 병사 손에 몰래 쥐어 주었다. 며칠 후 미군측에서 요란스럽게 편지의 주인공을 찾아다녔다. 한국인이 열댓명 있었으니까 나를 찾아내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미군 사령관은 나를 불러놓고는 "내가 사령관이다. 질서문란 행위는 용납하지 않는다"면서 엄포만 놓았다.
실망하고 나오는데 사령관 부관인 중위가 나를 따로 불렀다. 의사소통이 안돼 몸짓과 필담(筆談)으로 1시간 가까이 얘기를 나눴다. 그런데 왜 나를 따로 불렀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윽고 중위는 "그동안 이 섬에 미군 조종사 열댓명이 공격을 받고 추락했다. 그들의 행방을 아는 것이 있느냐?"고 물었다. 미군이 한국인을 풀어주지 않는 이유를 그제서야 알았다. 일본군들이 모두 모른다고 발뺌을 하자 한국인들에게 정보를 캐낼 요량으로 붙잡아 둔 것이었다.
그 얘기라면 나도 아는 것이 있었다. 체포된 미군 조종사들이 묶여있는 것은 두눈으로 직접 본 데다 그 이후 일본 군인들이 미군 인육(人肉)을 먹었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건너편에 일본군이 있기 때문에 지금으로선 알아도 말할 수 없다"며 한국인에 대한 신변 안전보장을 요구했다. 그가 내 요구를 받아들여 그 섬의 한국인들은 모두 미군지역(American Zone)으로 들어왔다. 육군에는 학병들이 전부였으나 해군쪽에서는 100명이 넘는 한국인 노무자들이 넘어왔다.
그때 일본 해군 사령관이 노무자들에게 무슨 거짓말을 했던지 그들은 "학병 몇명 때문에 이제 미군 종살이를 하게 됐다"며 우리에게 거칠게 항의했다. 난 "미군의 손을 거쳐야 우리가 자유를 얻을 수 있다"고 그들을 설득했다.
다행히 노무자들 중에서 목격자 3명이 나타났다. 그 무렵 괌(Guam)에서는 전범(戰犯)재판이 열리고 있었다. 미군측의 동행 요청을 받고 재판증인으로 나설 노무자 3명과 함께 괌으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6개월 정도 머물다 일본을 거쳐 꿈에도 그리던 고국 땅을 밟았다.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10] 고달픈 귀국길
어렵사리 밟은 고국 땅 '실망 투성이'
<사진설명>
며칠 동안 굶은 채로 부산항에 내려 형님 김동한 신부(오른쪽)를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1951년 형님 신부가 해군 군종신부로 입대하기 직전에 찍은 사진이다.
해방된 내 조국으로 돌아오는 길이 왜 그리 멀고 고달펐던가.
괌에서 일본으로 돌아온 것은 1946년 9월이었다. 원래 미국으로 건너가 공부하고 싶었으나 대구 교구장님의 승낙서가 좀체 도착하지 않는 데다 이래저래 일이 꼬여서 3개월 더 일본에 머물다 귀국길에 올랐다.
귀국을 결심한 이유 중 하나는 재일교포들의 분열과 다툼이었다. 36년간 남의 나라 밑에서 설움을 겪다 해방됐으면 이제 한마음이 되어 조국의 미래도 생각하면서 살아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재일교포들은 툭하면 좌우로 갈라져 싸웠다. 그때 일본 주둔 연합군은 한국인과 같은 제3국인을 일본인보다 우대했다. 가령, 일본인은 맥주를 구입할 수 없어도 한국인은 자유롭게 맥주를 사서 마실 수 있었다. 그런데 교포들은 맥주를 마셔가면서 회의를 하다 의견이 서로 안맞으면 맥주병을 깨서 혈투극을 벌이곤 했다. 그런 소식이 들려올 때마다 실망스럽고 마음이 아팠다.
귀국하는 한국인을 위해 편성된 동경발 임시열차에 몸을 실었다. 일본 열도의 제일 서쪽에 있는 구주(九州)지방 하까다에 가서 귀국선을 타야 했다. 평소 19시간이면 닿는 거리인데 그 임시열차는 서른 대여섯시간이나 걸렸다.
그 길고 지루한 시간을 도시락 한개로 버텼다. 하까다에 내리자 안내원들이 우리를 큰 창고에 밀어넣었다. 가마니가 깔린 바닥에서 모포 한장과 건빵으로 사흘을 견뎠다.
사흘 후 마침내 귀국선에 올랐다. 다음날 아침 나절에 부산항이 보였다. 나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감격스러워했다. 단 1초라도 빨리 일본인들이 물러간 조국 땅을 밟아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런데 배가 항구에 정박하기도 전에 미군제복처럼 생긴 옷을 입은 청년들이 배에 올라왔다.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간 청년들은 우리를 모아놓고 장황하게 일장훈시를 했다. 귀에 들리지도 않았지만 희망찬 조국건설을 위해서 ○○를 해달라는 얘기 같았다. 화가 나기도 하고, 실망스럽기도 했다.
'타지에서 산전수전 다 겪고 들어오는 사람들 앞에서 무슨 입바른 소리인가. 여기 있는 사람들 얼굴을 보면 모르나. 며칠 동안 먹은 거라곤 건빵뿐이 없어 쓰러질 판인데.'
내 옆에 한국인과 결혼한 일본 여인이 있었다. 한국에 있는 남편을 찾아가는 길이라고 했다.
"남편이 어디에 사는지 알아요?"
"전에 남편하고 한 번 가본 일이 있어요. 그런데 그 집에 가니까 본처가 있더라고요. 남편이 본처랑 이혼하고 부를 테니 먼저 일본에 가 있으라고 해서 기다렸는데 소식이 없어서요."
"그럼 이혼했다는 연락은 받았어요."
"아뇨. 이혼했으리라 믿고 가는 길이에요."
국적을 떠나서 한 여자를 내팽개친 한국 남자의 무책임한 행동에 또 실망했다.
동포들은 하선 허락이 떨어지지 않아 하루 종일 쫄쫄 굶으면서 대기했다. 사무치게 그리웠던 조국 땅을 지척에 두고 바다에 떠서 굶는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날이 어둑어둑해질 무렵 하선 허락이 떨어져 배에서 내렸다. 그런데 갑자기 주위가 소란스러워졌다. 깡패들이 몰려와서 승객들의 짐, 특히 부녀자들의 핸드백을 낚아채 가는 것이었다. 하루 종일 배에 가둬놓고 있다가 어두워진 후에 하선시킨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일본에서 온갖 설움을 겪은 동포들이 조국 땅을 밟자마자 당한 것이 약탈이라니…. 또 한번 실망했다.
저녁밥이라고 나온 게 밀가루 몇 조각 띄운 멀건 국물이었다. 그것도 한사람씩 퍼준 게 아니라 한번 마시고 옆사람에게 그릇을 넘겨줘야 하는 엉터리 배식이었다. 개인화물 하역작업은 새벽 2시부터 시작된다고 했다. 그래서 떠밀려들어간 곳이 큰 창고였는데 구석에 시체 3구가 있었다. 귀국 동포들의 감정이 결국 폭발했다.
동포들은 "우리가 너희한테 밥을 달라고 했냐, 돈을 달라고 했냐. 왜 붙잡아놓고 이 고생을 시키냐"면서 "차라리 일본으로 돌아가겠다"고 아우성을 쳤다. 그렇다. 해방 직후의 조국은 법과 원칙도 없이 혼란스러웠다.
아무튼 저녁 늦게 그 실망스러운 자리에서 빠져 나왔다. 그 시간에 어딜 찾아가서 밥 한술이라도 얻어먹을 수 있는 곳은 범일성당과 성당 근처 김태관 신부님 집이었다. 이미 고인이 되신 김 신부님(예수회)은 일본 상지대학 선배로서 방학 때 잠시 집에 들른 적이 있었다.
그 집에 도착했더니 저녁식사를 하던 가족이 나를 보고 깜짝 놀라는 눈치였다. 내 얘기를 듣고는 밥을 먹고 가라고 옷소매를 끌었지만 괜히 예고없이 찾아와서 가족들 밥을 축내는 것 같아 성당 위치를 물었다. 범일성당에 형님(김동한 신부) 서품동기인 신 신부님이 보좌신부로 계신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런데 가족들은 "보좌신부의 성은 신씨가 아니라 김씨"라면서 "그렇지 않아도 아까 문을 열고 들어오는데 그 김 신부님이 오신줄 알고 깜짝 놀랐다"는 것이었다. 참 이상했다.
'형님 동기신부들이야 내가 뻔히 다 아는데. 그럼 혹시 형님이….'
성당을 찾아 올라가는데 얼마나 마음이 앞서던지 헛걸음질을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사제관 문을 두드렸더니 교리공부를 하고 있던 한 아주머니와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아이들은 내 얼굴을 보자마자 "와~ 김 신부님 동생이다"라고 소리쳤다. 형님 책상에 놓여있는 내 액자사진을 아이들이 본 모양이었다. 아이들은 조금 떨어진 식당쪽을 향해 "신부님, 신부님, 동생 오셨어요!"라고 외쳤다.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형님이 맨발로 달려나왔다. 그 반가운 마음을 어떻게 말로 표현하겠는가.
학병에 나가는 나를 부산항에서 배웅할 때 눈물을 보이신 형님이었다. 며칠 동안 굶은 채로 부산항에 내리자마자 그 형님을 만나 밥을 얻어먹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11] 갈등과 유혹
부산의 한 여인에게서 '청혼'받고 고민
<사진설명>
대구시 중구 남산동 대구교구청내 성모당에는 예나 지금이나 기도하는 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어머니는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이 성모당 앞에서 무릎을 꿇고 막내아들의 무사귀환을 빌었다.
나 같은 사람은 누구와 언성을 높여 싸워본 일이 한번도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전쟁터에서 돌아와 어머님을 찾아뵙기 위해 도착한 대구에서 경찰관과 대판 언쟁을 벌인 적이 있다.
부산항에서부터 조국의 혼란스런 현실에 실망해 마음이 언짢았던 것이 사실이다. 형님 자전거를 타고 부산항으로 짐을 찾으러 갈 때도 경찰관의 고압적 검문 태도에 마음이 상했다. 대구행 열차는 유리창이 모두 떨어져 나간 데다 시트도 성한 것이 없었다. 해방 후의 어수선한 분위기를 틈타 사람들이 떼어간 것이다.
전등도 없는 열차가 컴컴한 터널에 들어가면 선반 위에 올려둔 짐이 없어지는 일이 다반사라 나 역시 터널에서는 가방을 꼭 껴안고 있어야 했다.
'이 나라가 제 꼴을 갖추려면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릴까….' 내내 마음이 답답하고 서글펐다.
경찰관과 언쟁이 붙은 이유는 통행금지 위반 때문이었다. 밤 늦게 역에 도착하는 승객에게는 손에 도장을 찍어주는 모양이었는데 일본에서 돌아온 내가 그걸 알 리가 없었다. 어머니가 사시는 남산동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는데 경찰관이 나를 불러 세웠다.
"여보 여보, 어딜 가요?"
"어딜 가다니요. 집에 가는데요."
"이 사람이, 통행금지 있는 거 몰라?"
"… 통행금지요? 처음 듣는데요."
"(거칠게) 모르다니? 어디서 왔어?"
"며칠 전에 일본에서 왔습니다. 일본서 공부하다 귀국하는 길입니다."
"공부만 하면 제일이야."
"몇년 만에 고국에 돌아왔으면 모르는 게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럼 경찰관이 친절하게 가르쳐 줘야지, 다짜고짜 죄인 다루듯 다그치는 게 잘하는 겁니까."
나는 물러서지 않고 언성을 높여 꼬박꼬박 말을 되받아쳤다. 일제 압제에서 풀려났으면 국민들이 서로 감싸주면서 한마음이 되어야 할 텐데 경찰관의 태도에서 보듯 현실은 그렇지가 않았다. 난 그 경찰관이 미운 게 아니라 조국의 현실이 서글펐던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집에 도착했다. 그동안 내가 어머니 품에 안겼지만 그때는 내가 어머니를 가슴에 안았다. 어머니가 그렇게 우시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다음날부터 만나는 사람들마다 "자네는 어머니 덕에 살아왔네"라는 인사말을 했다. 그렇다. 난 어머니 기도 덕에 목숨을 건졌다. 어머니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도 거르지 않고 대구교구청 옆 성모당에 나가 이 아들을 위해 기도하셨다. 바다 한가운데서 미군 잠수함 공격에 목숨을 잃을 뻔한 그 순간에도 어머니는 성모님께 아들의 무사귀환을 빌고 계셨다.
어머니의 그런 사랑을 느낄 때마다 '하느님의 사랑은 얼마나 더 크겠는가'하고 생각하곤 했다.
신학교에 복학하기 전까지 대구에서 9개월쯤 머물렀다. 대구대목구 임시 교구장인 주재용 신부님의 일을 거들고, 형님이 계신 부산을 오가면서 보낸 그 기간에 갈등과 유혹이 끊이지 않았다.
누님은 집안 형편이 쪼들리자 "네 형이 신부됐는데 너까지 또 신부가 돼야겠느냐"면서 신학교 복학을 탐탁스러워 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그보다 마음을 더 심란하게 만든 사건은 한 여인의 청혼이었다.
그 여인은 형님이 계시는 범일성당에 드나들면서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형님이 관여하는 고아원에서 일하면서 가끔 사제관 청소를 해주었는데 잘은 몰라도 심적 고통이 큰 사람처럼 보였다. 마음의 병 때문인지 그녀가 병으로 눕자 형님은 "다른 사람은 그 여자를 좀 어려워 하니 네가 병간호를 해주면 어떻겠냐"고 말했다.
그래서 아무 생각없이 그러겠다고 대답하고 병간호를 하는데 그녀가 어떤 얘기를 하다말고 자신이 살아온 과정을 장황하게 들려주었다.
그때 그녀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고해성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본당 신부님은 그녀가 어려워할 것 같아 영도에 계시는 프랑스 신부님을 찾아가 자초지종을 말씀드리고 모셔왔다. 그녀의 고해성사는 한시간도 넘게 걸렸다. 그런 관심과 배려가 그녀의 마음을 사로 잡았는지 모르겠다. 지금 생각해 보니 마음이 극도로 지친 상태에서 자신에게 잘해주는 누군가가 옆에 있으면 그쪽으로 마음이 쏠리는 것은 당연할 것도 같다.
"나를 받아줄 수 있겠어요?"
깜짝 놀랐다. 하늘이 노래지는 것 같았다.
소신학교 시절에 방학이 되어 고향에 내려갈 때면 교장 신부님이 "여자는 아예 쳐다보지도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셔서 안면이 있는 여자에게도 고개를 돌렸는데 프로포즈까지 받게 될 줄이야….
물론 어릴 때부터 '나만을 사랑해주는 여인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을 품고 있었던 건 사실이다. 그러나 막상 그런 여인이 나타나자 나에게 모든 걸 거는 한 사람을 평생 행복하게 해줄 자신이 없었다. 차라리 신부가 돼서 부족하나마 여러 사람에게 고루 사랑을 쏟는 일이 훨씬 쉬울 것 같았다.
내가 단호하게 거절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단념하지 않고 있다는 소식을 훗날 전해 들었을 때는 고통스럽기까지 했다. 어쩌면 그 해프닝이 나는 사제의 길을 가야 할 사람이라는 확신을 갖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갈림길에서 우왕좌왕하는 나를 붙잡아 준 은인은 장병화 주교님(1990년 선종)이다.
당시 우리 본당에 계시던 장 신부님께 내 결점만 쏙쏙 골라서 과장되게 말씀드린 적이 있다. 신부가 되어도 집안 걱정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 같고, 여자에게도 마음을 쉽게 빼앗길 것 같다는 식으로 말이다. 사제가 되면 안 될 사람이라고 판단하시도록 유도한 것이다.
장 신부님은 한달만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하시더니 한달 내내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정확히 한달째 되는 날 아침미사에 참례한 나를 부르셨다.
"신부는 모름지기 자신의 약점이 뭔지 알아야 해. 그래야 그걸 이겨내고 성덕을 쌓을 수 있어. 그렇기 때문에 자네는 꼭 신부가 돼야 하네."
장 신부님은 내가 한 말을 모두 거꾸로 해석하시고 신학교 복학을 독려하셨다.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12] '삭발례' 감동 사제수품 때보다 커
공베르 교수신부님 금경축날 전쟁 터져
<사진설명>
1950년 4월 대신학교 교정에 모인 김수환 추기경의 소신학교 동창들. 앞줄 왼쪽부터 신종호 신부·김정진 신부·최석우 신부, 뒷줄 왼쪽부터 김 추기경, 한사람 건너 김재덕 신부·최석호 신부·김영일 신부·최익철 신부·지학순 신부. 젊은 신부들이 담배 파이프를 물고 있는 모습이 이채롭다.
1947년 9월 서울 혜화동 신학교 교정으로 다시 돌아왔다.
일본 유학 기간의 공백 때문에 후배들과 함께 공부해야 했다. 내가 소신학교 5학년때 1학년에 갓 입학한 후배들이었지만 나보다 나이가 많거나 비슷한 또래도 더러 섞여 있었다.
내 소신학교 입학 동기들은 그 해에 벌써 사제품을 받았다. 동기라 하더라도 신부와 신학생 신분은 천양지차(天壤之差)라 착잡한 마음이 없었던 건 아니다.
남들 눈에 띌 정도는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열심히 생활했다. 유학과 학병시절에 있었던 재미난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으면 새 친구들이 모여들어 귀를 쫑긋 세우고 들었다. 그때는 지금보다 남들에게 얘기를 쉽게 꺼내는 편이었던 것 같다. 10개비가 든 담배 한갑을 다 피워가면서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눈 적도 있다.
담배 얘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난 우리 민족이 해방되는 바로 그날부터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그 전에도 담배를 배워보려고 했지만 몇 모금 빨고 나면 머리가 아파 그만두곤 했다. 그런데 전쟁터에 나가있는 학도병에게 들려온 해방 소식이 얼마나 감격스러웠던지 그날 입에 문 담배가 그야말로 꿀맛이었다.
민주화운동으로 인해 명동성당이 조용한 날이 없던 1970년대는 하루에 두갑까지 피웠는데 1984년 교황님이 한국에 다녀가신 그 해 가을에 완전히 끊었다. 요즘 금연열풍이 불어 담배를 끊으려는 사람들이 많은 모양인데 나중에 기회가 되면 100% 확실한 금연비결(?)을 공개하겠다.
심지어 손을 물어 뜯으면서 분심을 쫓는 친구도 있었다. 평양 출신의 서운석 신부는 성체조배하는 모습이 얼마나 경건했던지 마음 속으로 '기도를 가장 잘 하는 신학생'이라고 인정해 주었다. 서 신부와 충남 공세리 출신의 강만수 신부 등 몇 명은 한국전쟁 당시 공산군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당시 신학생들이 성서 다음으로 애독한 것이 '준주성범'(遵主聖範, Imitation of Christ)이라는 영신지도서였다. 제목 그대로 주님을 따르는 데 필요한 거룩한 모범을 제시한 그 책을 옆에 끼고 살면서 그 가르침대로 살려고 애를 썼다.
신학교 생활 중 삭발례(削髮禮)의 감동은 잊을 수가 없다. 삭발례란 세속을 끊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친다는 의미로 머리를 깎고 수단을 착용하는 예식인데 성직 입문의 첫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은 사라진 예식이다. 스님이 되기 위해 머리를 깎듯이 성직자가 되기 위해 첫 관문을 통과한 것뿐인데 그날의 기쁨은 사제수품 때보다 오히려 더 컸던 것 같다.
하느님이 그동안 내게 주신 영적 기쁨 가운데 가장 큰 기쁨이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든다.
특히 그날 예식의 복음이 가슴 깊이 와닿았다. 말씀 줄거리는 "야훼 하느님은 나의 유산이다"라는 것이었다. 내가 부모로부터 물려받을 재물이 있는 것도 아니고, 설사 있다 해도 하느님이 계시는 한 별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 오로지 하느님만이 내가 차지할 수 있는 몫처럼 느껴졌다.
교정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으려는 신학생들의 순수한 열정이 가득했다. 그러나 신학교 울타리 밖은 무척 혼란스러웠다. 정치인과 국민들이 좌우로 갈리어 극한 이념대결을 벌이고, 곳곳에서 폭력적 투쟁을 일삼았다.
많은 지식인들이 좌익계열 단체에 가입해 활동했다. 일본 상지대학 선배들 중에도 적지 않은 수가 좌익단체에서 비중있는 책임을 맡고 있었다. 함경도 출신의 유학 동기를 서울역 앞에서 만난 일이 있는데 그 친구도 좌익에 가담한 듯했다. 그 혼란스런 이념대결을 지켜보는 동안 내가 가톨릭 신자가 아니고, 신학생이 아니었더라면 좌익쪽으로 기울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당시 가톨릭교회는 우익 성향을 보이기는 했으나 기본 입장은 중립이었고, 우리 신학생들 역시 그러했다. 일반 대학교수로 있던 한 선배가 내게 이런 말을 했던 기억이 난다.
"요즘 학생들이 교수님 입장은 뭐고, 가톨릭 입장은 뭡니까 하고 자주 물어봐.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좌익과 우익 중간에 하느님당(黨)이 있는데 난 그 당원이다. 하느님당은 오른쪽이나 왼쪽으로 기우는 게 아니라 하늘로 곧장 올라간다'고 대답하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명답(名答)이라고 맞장구를 쳐주었다. 내가 만일 하느님당 당원이 아니었더라면 이념투쟁의 한복판에서 방황했을지도 모른다.
1950년 6월25일은 신학교 교수인 공 베르(파리외방전교회) 신부님의 사제수품 50주년 금경축 날이었다. 내가 총급장(총학생회장)인데다 공 신부님은 소신학생 시절부터 인연을 맺어온 터라 학생들을 동원해서 금경축 행사를 정성껏 준비했다.
그날 금경축 행사를 다 치를 때까지도 전쟁이 일어난 줄 몰랐다. 시간이 갈수록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는 것 같았다. 의정부 방면에서 피난민들이 내려오기 시작했다. 인민군이 청량리까지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왔느니, 미아리 고개까지 들이닥쳤느니 하는 유언비어가 떠돌았다.
조국 광복 5년 만에 동족상잔의 비극이 일어나다니, 그리고 우리 국군이 그토록 힘없이 밀리다니….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았다. 국군들이 신학교 뒷편 언덕배기 성터에 포를 설치하는 것을 보고는 상황이 생각보다 심각하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런데도 신학생들은 27일 저녁까지도 학교에 남아 있었다. 식당에 저녁밥을 준비해 놓았지만 주위가 뒤숭숭해서 어느 누구도 밥 먹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교수신부님 같은 웃어른으로부터 어떻게 행동하라는 지시가 내려오지도 않았다. 사태 추이를 종잡을 수 없는 건 신부님이나 신학생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날 저녁부터 학생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일단 명동성당으로 가자는 의견이 우세했다. 총급장인 내가 학생들을 통솔해야 했으나 나 역시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랐다.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13] 전쟁의 혼란 속으로
여권 수속 밟던 로마 유학 '물거품'
<사진설명>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오는 인민군을 피하기 위해 화물열차 지붕에 오른 피란민들. 신학교 총급장이었던 김 추기경도 소신학생들을 데리고 화물열차 지붕에 매달려 피난했다.
27일 밤 인민군이 미아리고개까지 밀고 내려왔다. 신학생을 대표하는 총급장으로서 더 이상 머뭇거릴 여유가 없었다. 일단 신학생들과 명동성당으로 뛰었다.
명동성당도 우왕좌왕하고 대책이 없기는 매한가지였다. 하는 수 없이 뿔뿔이 흩어져야 했다. 난 몇명과 구천우 신부님이 계시는 삼각지성당으로 가서 잠자리를 얻었다.
얼마쯤 눈을 붙였을까…. 요란한 폭발음을 듣고 잠에서 깨어 일어났다.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면서 "인민군이 시내까지 들어왔다"고 소리쳤다. 부랴부랴 밖에 나가보니 비가 억수같이 퍼붓는 이른 새벽 거리에 피란민들과 차량들이 넘쳐났다. 한강다리는 이미 새벽 2시경에 끊어졌다.
공포에 휩싸인 피란민들은 거대한 물결이 출렁이듯 왼쪽으로 밀렸다, 오른쪽으로 밀렸다 하면서 갈팡질팡했다. 북쪽으로 올라간 피란민들은 인민군이 위쪽 강나루에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는 방향을 틀어 다시 내려왔다. 다행히 끊어지지 않은 철교가 하나 남아 있어서 그 다리를 건너 수원으로 갔다.
급히 서울을 빠져나온 신학생들은 수원성당에 모여 하룻밤 신세를 졌다. 그 다음날 신학생들을 삼삼오오 짝을 지어 남쪽으로 내려보냈다. 본당 신부님께 고맙다는 인사를 드린 후 나도 막 출발하려고 하는데 혼자 남아 훌쩍이고 있는 소신학생이 보였다. 난 그때 차(次)부제품 시절이라 어린 소신학생들과는 차이가 많이 났다.
깜짝 놀라서 "넌 왜 안 갔니? 고향이 어딘데?"라고 물으니 문산이라고 대답했다. 경남 진주에 문산이라는 곳이 있어서 그쪽 방향인 줄 알았더니 이미 인민군 수중에 들어간 경기도 문산이라는 것이었다. 전날 저녁에 소신학생 한명을 데리고 다니다가 인파 속에서 잃어버린 경험이 있는 터라 그 꼬마 손을 꼭잡고 수원역으로 나갔다. 그 꼬마가 누구인가 하면 바로 광주대교구장 최창무 대주교다.
수원역에 도착했더니 뒤쳐진 소신학생 너댓명이 모여 있었다. 우리 일행은 저녁이 다 되어서야 남쪽으로 내려가는 화물열차 지붕에 올라탈 수 있었다.
"너희들 졸면 큰일난다. 여기서 졸다 떨어지면 죽는단말야. 조는 사람이 있으면 옆 사람이 꼬집어서 깨워야 한다. 알았지!"
"예."
소신학생들을 데리고 오른 피란길이라 걱정은 됐지만 다행히 큰 어려움 없이 대전까지 내려갔다. 그곳에서 주머니를 톡톡 털어 밥 한끼씩 사먹은 후 다시 조를 짜서 내려가기 시작했다. 난 소신학생 최창무와 함께 대구까지 내려갔다.
전쟁은 반드시 피해야 할 비극이다. 6.25 전쟁의 포화 속에서 수많은 인명이 무참히 쓰러지고, 교회도 큰 피해를 당했다. 내 은사인 공베르 신부님을 포함해 서울에 남아있던 상당수 성직자들이 인민군에 체포돼 목숨을 잃었는가하면 외방선교회 소속 서양 신부님들은 이른바 '죽음의 행진'에 끌려갔다.
나 역시 소신학교 동기생 4명을 전쟁통에 잃었다. 전남 출신의 신학생 2명은 고향으로 피란을 내려가다 공산당에 부역을 했는지, 아니면 인민재판을 받았는지 돌에 맞아 죽었다는 얘기가 들려왔다. 동족끼리 총을 쏘고 피를 흘리는 비극이었기에 더 슬프고 참담했다.
사실 난 로마유학을 가기 위해 6.25 전쟁 발발 3일전부터 여권수속을 밟고 있었다. 결국 유학계획은 물거품이 됐다. 대신 5년 후배지만 대신학교에서 같이 공부한 정하권(현 마산교구 몬시뇰)과 최덕홍 대구교구장님 밑에서 부족한 신학공부를 했다. 아무리 후방이라지만 전쟁통에 공부가 제대로 될 리 없었다.
시시각각 전해지는 전황을 듣고 있노라면 '이러다 나라가 공산화되는 건 아닌가?'하는 걱정이 앞섰다. 이 나라가 공산당 손에 넘어가면 가톨릭교회는 박해를 받다 무너지는 것이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이미 북한교회가 초토화되고, 많은 성직자들이 목숨을 잃지 않았는가.
그때 내 생각은 '이 전쟁에서 공산당이 이기면 그들 손에 죽느니 차라리 산에 들어가서 게릴라전을 벌이겠다'는데까지 미쳤다. 국가체제보다 민족 동일성을 우선시하는 요즘 젊은이들은 그때 내가 품었던 생각을 쉽사리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당시 공산당은 신부 한명을 죽이는 것을 1개 사단을 섬멸하는 것처럼 여긴다는 얘기가 있었다. 공산혁명 과정에서 가톨릭, 특히 인민들(신자들)의 영적 세계를 관장하는 신부를 위험천만한 반동세력이라고 간주한 것이다. 가톨릭을 막강한 군사조직으로 생각했던지 스탈린은 1945년 얄타회담 때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로마 교황은 도대체 몇개 사단을 갖고 있느냐"고 물었다는 얘기도 있다.
부산 피란시절의 고단한 추억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영도에 서울교구 소속 신부와 신학생들을 위한 임시거처가 마련되었다. 신부와 수녀들은 혼란 속에서 미국이 보내준 밀가루와 의류품을 갖고 구호사업을 벌이느라 여념이 없었다. 몇몇 신부들은 포로수용소에 출입하기도 했다.
나도 어느 신부님 일을 잠깐 거드는 동안 범일동에서 부산역 방면으로 나갈 일이 자주 있었는데 차편을 구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다. 그럴 때면 수녀님들을 이용(?)했다.
수도복을 입은 수녀들이 부산 시내를 활주하는 미군 차량에게 태워달라고 손짓을 하면 백발백중이었다. 로만칼라를 한 신부들이 태워달라고 하면 거들떠보지도 않는 미군들이 수녀들에게만큼은 최대한 친절을 베풀었다. 그래서 급할 때는 수녀들을 앞세워 차를 세워놓고 우리가 슬쩍 뛰어오르곤 했다.
대구교구청 주교관에서 최덕홍 주교님 지도를 받으면서 공부하던 어느날, 주교님께서 나와 정하권을 불렀다.
"자네들도 이제 사제품을 받을 준비를 하게. 언제 사제품을 받으면 좋을지 자네들이 상의해서 날짜를 잡아보게나."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14] 사제로 태어나다
'고통의 성모마리아 기념일'에 사제품 받아
<사진설명>
사제품을 받고 69세 어머니와 기념촬영을 했다. 주름이 깊게 패인 어머니는 계산동성당 맨 앞자리 마룻바닥에 꿇어앉은 채 막내아들이 사제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지켜보셨다.
1951년 9월15일. 함께 공부하던 정하권(현 마산교구 몬시뇰)과 사제수품일을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인 이 날로 잡았다.
그 이유는 예수님을 잉태해 낳으시고 수난과 부활을 지켜본 성모 마리아야말로 예수님이 가신 길을 가장 가까이서 함께 걸은 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성모님처럼 고통 속에서 예수님이 가신 길을 묵묵히 따르는 것이 사제의 길 아니겠는가.
사제생활의 모토로 삼고 싶은 성구(聖句)를 골라 쪽상본에 새겨넣어야 했는데 난 고심 끝에 시편 139장에 있는 "당신 생각을 벗어나 어디로 가리이까?"란 구절을 선택하고 싶었다.
하늘 저 높이 올라가도, 땅밑에 내려가도 거기에 계시는 하느님. 바다 끝 서쪽으로 가서 자리를 잡아도 당신 오른손으로 나를 붙들어주시는 분. 내가 그런 하느님을 떠나 어디로 도망칠 것이며, 설사 도망친다 한들 한순간이라도 편히 숨을 쉴 수 있겠는가. 시인이신 최민순 신부님(1975년 선종)이 마침 대구에 내려오셨길래 내 생각을 말씀드렸더니 "한편의 아름다운 시같다"며 좋아하셨다.
그러나 홀로 생각에 잠겨있으려니 마음이 바뀌기 시작했다.
과연 한 평생을 착한 목자로 살 수 있을까? 장점보다 단점이 많은 내가 오히려 하느님 앞에 죄인으로 남을 가능성이 더 높지 않은가. 그렇다면 내 생명이 다하는 순간까지 성찰하고 고백해야 할 것은 '하느님 저는 죄인이오니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말 외에 무엇이 또 있겠는가. 결국 시편 51장에서 찾아낸 '하느님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구절을 상본에 써넣었다.
52년 전의 일이다. 그러나 지금도 그 같은 마음가짐에는 변함이 없다. 요즘 선후배 사제들의 임종을 지켜보거나 부고(訃告)를 접할 때마다 '나도 이제 머지않아 하느님 앞에 서겠지'라고 되뇌인다. 지금 다시 생각해도 내가 하느님께 가면서 바칠 수 있는 기도는 "주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 지극하신 사랑으로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것 외에 떠오르는 게 없다.
사제서품식이 열린 날은 마침 음력 8월 보름이었다. 대구 계산동성당 마당에서 올려다 본 가을 하늘은 유달리 맑고 높았다. 쪽빛 창공처럼 맑고 깨끗한 마음으로 사제품을 받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대구교구 신부님들과 교우들이 서품식장을 가득 메웠다. 서품식 중간쯤 이르러 성인호칭기도가 울려 퍼졌다. 제단 앞 바닥에 엎드려서 하느님께 이렇게 속삭였다.
"주님, 사실 저는 다른 길을 가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주님께서는 다른 길은 보여주지 않으시고 오로지 이 길만을 보여주셨습니다. 주님 뜻에 따르겠습니다."
13살 나이에 어머니한테 등 떠밀려 소신학교에 들어가 30살에 사제가 되었다. 18년 동안 하느님의 부르심에 회의를 여러번 느꼈고, 신학교를 떠나고 싶은 마음에 꾀병을 내어 한학기 건너뛰기도 했다. 때로는 갈등과 유혹에 심하게 흔들리기도 했다. 그러나 하느님은 조금도 변함없이 나를 한 길로 이끄셨다. 그 큰 섭리와 은혜에 엎드려 감사드린다.
특히 어머니의 기도를 기억하지 않을 수 없다. 그날 막내아들이 신부가 된 것을 보고 기뻐하시는 어머니의 주름진 얼굴에서 기도와 눈물로 얼룩진 인고(忍苦)의 세월을 읽을 수 있었다.
그때는 사제수가 워낙 적었기 때문에 곧바로 안동본당(현 목성동주교좌본당) 주임신부로 발령받았다. 그런데 막상 성당에 도착해보니 밥 끓여먹을 솥 하나 걸려있지 않았다. 한달 전에 떠난 전임 신부님이 빗자루 하나 남겨놓지 않고 비품을 모두 가져가신 것이었다.
임시방편으로 며칠 동안 여관에 묵으면서 신자들이 해다주는 밥을 얻어 먹었다. 그리고 나서 인근 고아원에 부탁해 2달 가량 밥을 대먹었지만 그쪽에서도 힘이 든지 하루 빨리 딴살림을 차리라는 눈치를 줬다. 하는 수 없이 성당 회장님께 얘기했더니 그 분이 이집저집 돌아다니면서 숫가락, 젓가락, 밥그릇 등을 구해다 주었다. 돈을 주고 장만한 살림살이는 냄비 한개가 고작이었다.
그런데 어머니가 철칙처럼 내려주신 '제1계명'을 첫 임지에서부터 거스르는 일이 발생했다. 신학생 시절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첫째 계명은 "젊은 여자를 식모(요즘의 식복사)로 둬서는 절대 안된다"는 것이었는데 회장님이 구해온 식모가 하필이면 젊은 여성이었다. 나는 어머니 핑계를 대가면서 자초지종을 말씀드렸더니 회장님은 "그럼 이 사람밖에 없는 걸 어떡하죠? 어머니 뜻이 그러하시더라도 저를 믿고 쓰십시오."라고 말하고 돌아갔다. 돌이켜보면 대수롭지 않은 일인데 그때는 왜 그토록 곤혹스럽던지….
첫 임지에서 주민들의 가난에 관심이 쏠렸다. 갓 태어난 신부이다 보니 하느님과 교회, 그리고 신자들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는 열정이 더 뜨거웠는지 모르겠다. 당시 안동은 전화(戰禍)로 인해 성한 집보다 불타버린 집이 더 많았고, 설상가상으로 두해 연속 흉년이 들어 주민들은 그야말로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연명하고 있었다. 읍내를 조금만 벗어나면 나무 껍질을 벗겨서 가루를 내어 죽을 끓여먹고 사는 집이 대부분이었다.
그렇다고 교구에서 사제생활비를 보내줘 수중에 돈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유일한 수입원이라고 해봐야 미사예물인데 그것도 한국 신자들이 바치는 것이 아니고 서양교회 신자들이 미사예물 지향으로 미사 한대당 1달러씩 보내주는 것을 받는 것이었다. 초근목피로 목숨을 부지하는 주민들을 그 돈으로 돕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예수님이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하실까?'
며칠을 궁리한 끝에 묘안이 떠올랐다. 부족한 영어실력으로 주민들의 딱한 사정을 적은 영문편지를 들고 부산에 계신 안 제오르지오 주교님(메리놀외방전교회)을 찾아갔다. 미국 주교회의 구호사업 한국지부장으로 와 계신 그분께 도움을 청하면 하다못해 밀가루라도 얻어갖고 올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요즘 유행하는 말로 '대박'이 그곳에서 터질 줄 누가 알았겠는가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15] 꿈처럼 아름다웠던 본당신부 시절
"신부님 출장가지 마세요. 성당이 텅빈 것 같아요"
<사진설명>
성직생활 52년 중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순박한 교우들과 희노애락을 나눈 본당신부 시절이다. 사진은 첫 부임지인 안동본당(현 목성동주교좌본당)의 여성 교우들.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연명하는 안동 주민들에게 도움을 줄 방도를 찾기 위해 부산에 갔다가 '대박'을 맞은 사연은 이렇다.
주민들의 딱한 사정을 적은 영문편지를 들고 안 제오르지오(미국 주교회의 구호사업 한국지부장) 주교님을 찾아뵈었다. 하지만 안 주교님은 일본 출장 중이어서 사무실에 계시지 않았다. 대신 일본에 머물면서 한국 교황사절을 겸하고 계신 필스텐벨그 대주교님이 그곳에 와 계셨다.
필스텐벨그 대주교님께 찾아온 목적을 말씀드렸더니 내 편지를 갖고 윗층으로 올라가셨다. 한참 후에 내려오신 대주교님은 뜬금없이 "내일 안 주교님이 일본에서 돌아오니까 그분을 꼭 만나고 가게"라고 말씀하셨다. 나를 위해 어떤 조치를 취해놓은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분 말씀대로 다음날 안 주교님을 찾아뵈었다. 안 주교님은 나를 보고 반가워하시면서 수표를 한장 끊어주었는데 그걸 보는 순간 뒤로 넘어질 뻔했다. 눈을 비비고 수표에 적힌 '0'자를 세어보았다. 하나 둘 셋… '2'자 뒤에 '0'이 무려 7개나 달려있었다. 2000만원. 난생 처음 구경하는 거액이었다. 안 주교님은 대구에 계신 최덕홍 주교님께 전해주라면서 편지도 한통 건넸다.
혼자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그 수표를 안주머니에 넣고 대구행 기차를 탔다. 누가 그 수표를 훔쳐갈까봐 무서워 기차가 터널에 진입하면 양 손으로 안주머니를 꼬옥 감쌌다.
대구교구장이신 최 주교님께 수표와 편지를 모두 드렸다. 마음 속으로 '내게 300만원만 떼어주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생각했다.
"김 신부, 얼마쯤 받아가고 싶은가?"
"제가 그걸 어떻게 말씀드리겠습니까. 주교님이 주시는 대로 받아가겠습니다."
"절반이면 되겠지"
"(절반이면 1000만원? 그렇게 많이….) 아이고, 감사합니다. 주교님 감사합니다."
그 돈을 갖고 본당으로 돌아와 성당보수 작업을 시작했다. 주민들에게 돈을 무작정 나눠주는 것은 옳은 방법이 아닌 것 같아 일을 시키고 품삯을 후하게 쳐주었다.
그리고 궁핍하기 이를데 없는 공소 신자들에게는 아주 은밀한 방법(?)으로 돈을 나눠주었다. 신자들 중에 가장(家長)이 고해성사를 보러 고해실에 들어오면 교적을 대조해 가면서 집안 형편, 생업수단, 농사 평수 등을 꼬치꼬치 캐물은 후 형편에 따라 현금을 건네주었다.
그러면서 "여긴 비밀이 지켜져야 하는 고해방입니다. 여기서 돈 받은 얘기를 밖에 나가서 하면 절대 안됩니다" 하고 엄하게 못을 박았다. 누구는 더 받고, 누구는 덜 받은 게 알려지면 뒷말이 나올 것 같아서 그랬는데 다행히 잡음이 일체 없었다. 아마 그때 고해실에서 돈을 받은 신자들은 적잖이 놀랐을 것이다.
중세시대 루터는 교회가 면죄부라는 걸 이용해서 돈을 받아 챙겼다고 주장했는데 난 거꾸로 고해실에서 돈을 나눠주었다.
첫 부임지라서 더 그랬는지 몰라도 안동본당(현 목성동주교좌본당) 사목생활은 정말 꿈처럼 달콤하고 아름다웠다.
나는 매일 저녁에 교리반을 열었다. 예비신자는 물론 교리지식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신자들이 많이 참석했다. 시골은 해가 지고나면 마땅히 할 게 없는 터라 교리반은 사랑방 역할도 했다. 교리수업이 끝나면 남성 교우들과 둘러앉아 안동소주를 몇 순배 돌리면서 이야기꽃을 피웠다.
고해성사와 병자성사만큼은 언제 찾아와서 요청을 해도 흔쾌히 응했다. 그렇게 해야 '착한 목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신자들이 워낙 순박하고 정겹다 보니 금방 정이 들었다. 볼 일이 있어 대구에 가도 신자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아 한시라도 빨리 안동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실제로 내가 대구에서 사나흘 볼 일을 보고 돌아가면 신자들이 성당 종탑 아래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버스를 타고 안동 시가지가 내려다보이는 마지막 고개를 넘으면 나를 기다리는 신자들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신자들도 뽀얀 흙먼지를 날리면서 달려오는 버스가 보이면 정류장까지 마중을 나왔다.
그 무렵 신자들이 이런 말을 했던 기억이 난다.
"신부님, 대구 가지 마세요. 신부님이 하루라도 안 계시면 성당이 텅 빈 것 같아 우리가 너무 적적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신자들과 한가족이 됐다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신자들에게 특별히 잘한 것은 없다. 평소 신념대로 열과 성을 다했을 뿐이다.
안동 근처 예천본당에 신학교에서 같이 공부했던 신부가 사목을 했는데 그분은 나보다 전교를 잘해 신자수가 눈에 띄게 증가했다. 특히 우체국장, 경찰서장, 군수 같은 지역유지들을 척척 입교시켰다. 나도 그분 못지 않게 열심히 전교했는데, 그리고 그분은 나보다 학교성적과 언변이 떨어지는데도 결과는 다르게 나왔다. 복음전교는 언변이나 지식보다 카리스마가 필요하고, 하느님께서 함께 해주셔야 성과를 거둘 수 있다는 것도 그때 깨달았다.
사랑도 풋풋한 첫사랑이 가장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다고 한다.
사람들이 "성직생활 52년 중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언제냐"고 물어오면 난 서슴없이 "가난한 신자들과 울고 웃었던 본당신부 시절"이라고 대답한다. 일선 본당신부 생활이라고 해봐야 안동본당과 김천본당을 합해 2년반밖에 안되지만 돌이켜보면 그때 추억이 가장 많이 남아 있다. 요즘도 그 시절에 사귄 신자들을 만나면 그렇게 반갑고 마음이 편할 수가 없다.
고백하건대, 난 주교로 살아가면서도 본당신부 생활을 무척 그리워했다. 혼자서 '이런 것(주교직무와 복장) 다 내려놓고 본당 신부로 가는 방법은 없을까?'라는 궁리도 해보았다. 사제인사철이 되면 시골본당으로 발령난 신부들 중에는 가기가 싫어서 억지로 끌려가는 듯한 신부를 간혹 보게 되는데 그럴 때면 '자네가 가기 싫다면 내가 가서 본당신부 생활하고 싶다'고 혼잣말로 중얼거리곤 했다.
안동본당 시절의 추억을 더듬다보니 "젊은 여자를 식모(식복사)로 두지 말라"는 어머니의 '제1계명'을 어긴 것이 들통났던 게 생각난다. 어머니의 신신당부에도 불구하고 젊은 여자를 식모로 뒀는데 어머니께서 성탄절을 앞두고 불쑥 성당에 나타나신 것이다.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16] 짧았던 교구장 비서 시절
순박한 교우들과 눈물의 이별하고 대구로
어머니가 그토록 신신당부했음에도 불구하고 본당 회장님이 소개해 준 젊은 부인을 식복사로 들여 몇 달을 아무 탈 없이 살았다. 남편이 전장에 나가 있어 홀로 안동으로 피난 내려온 새댁이었다.
그런데 어머니가 본당에 와서 머무시겠다는 기별이 왔다.
'어떻게하지…. 젊은 여자를 절대 식복사로 들이지 말라고 하셨는데. 어머니가 아시면 무척 상심하시겠는 걸. 아냐, 그래도 어머니가 와 계시면 남들 보기에도 좋을 것 같다.'
성탄절을 앞두고 어머니가 오셨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한달 동안 식복사에 대해 일체 말씀이 없으셨다. 그냥 무사히 넘어가는 것 같아 내심 마음을 놓았는데 어느날 낯선 부인이 사제관에서 밥을 짓고 있는 게 아닌가.
어떻게 된 일이냐고 여쭸더니 어머니는 "새댁이 아프단다"라고 태연스레 말씀하셨다. 낯선 부인은 새댁이 몸을 추스리는 동안 잠시 와 있는 줄로 알았다.
며칠 후 내방 창문을 통해 그 새댁이 시내를 걸어가는 모습을 보았다. '아프다는 사람이 멀쩡하네'라고 중얼거리다가 이상한 생각이 들어 어머니께 다시 여쭸더니 어머니께서 그 새댁을 내보냈다고 말씀하셨다.
"어머니, 그래도 그렇지 홀홀단신 피난온 아낙네를 무작정 내보내면 당장 뭘 먹고 살아요? 제가 본당신부입니까, 어머니가 본당 신부입니까?"
할 수 없이 다음날 그 새댁을 불러 얼마 안되는 돈이지만 수중에 있는 것을 몽땅 털어 주었다. 결국 '젊은 식복사 소동'은 그렇게 해결되었다. 그후 남편에게 소박맞은 일본 여자를 식복사로 들인 적이 있었는데 그때도 아기 둘을 데리고 고생하는 게 안쓰러워서 "일본으로 돌아가는 게 더 좋을 것 같다"고 타이르고 수중에 있는 돈을 톡톡 털어 준 적이 있다.
본당사목에 한창 재미를 붙이는가 했더니 교구장 비서로 발령(1953년 4월)이 났다. 나는 안동본당(현 목성동주교좌본당)에서 신자들과 동고동락하는 1년반 동안 '소박한 꿈'을 꾸고, 그 꿈을 키웠다. 나 자신을 온전히 바쳐 신자들의 영혼구령은 물론 가난까지 구제하겠다는 꿈이었다. 어디가서 돈을 끌어다 일자리를 만들어주면 삶이 신앙이고, 신앙이 삶인 가족공동체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아쉽게도 정이 들대로 든 순박한 교우들의 눈물과 그 꿈을 뒤로 하고 대구로 왔다.
대구대목구장 최덕홍 주교님(1902~1954)은 내게 아버지 같은 분이시다. 나를 어릴 때부터 알고 계시던 분이라 당신이 입던 옷을 곧잘 물려주시고, 내가 실수를 하면 스스럼없이 "바보같은 녀석!"이라고 혼을 내셨다. 워낙 아버지 같은 분이셨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야단을 쳐도 전혀 귀에 거슬리지 않았다.
한 번은 최 주교님이 주신 돈과 양복을 도둑맞은 적이 있다. 분명히 방문을 잠그고 주교님과 식사를 하러 나갔는데 돌아와보니 도둑이 홀랑 털어가 버렸다. 그 바람에 주교님께 "바보같은 녀석"이라는 소리를 또 들었다.
비서 역할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주교님이 대구지역에 주둔한 미군부대를 방문하시면 짧은 영어실력으로 통역을 하고, 외출 때면 가끔씩 수행하는 정도였다. 특히 최 주교님은 혼자 다니시는 경우가 많아 내 시간이 많았다. 그래서 고등학생 단체 지도신부를 자임했는데 현 대구대교구장 이문희 대주교가 그때 경북고등학교 학생이었다.
하루는 견진성사에 다녀오시는 최 주교님의 안색이 황달(黃疸) 환자처럼 누렇게 뜨고 몹시 피곤해 보였다. 나는 깜짝 놀라서 해성병원이라는 작은 병원으로 모시고 갔는데 시간이 조금 흐르자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공군 군의관으로 대구에 내려와 계신 박병례 박사(성모병원 초대원장)를 비롯해 내로라하는 의사들이 병원을 급히 들락거렸다. 주교님 병실에서 나오는 의사들의 표정이 한결같이 어두웠다.
의사들이 암(癌)인 것 같다고 내게 살짝 귀띔해 주었다. 난 암이라는 병명을 그때 처음 들었다. 주교님은 밤이 되면 무척 고통스러워하셨다.
박병례 박사는 "좀 더 확실하게 알려면 개복(開腹)을 하는 수 밖에 없는데 수술 도중에 돌아가실 수도 있다"고 말했다. 수술을 하려면 주교님께도 그 사실을 알려야 했는데 차마 주교님 면전에서 그 말씀을 드릴 용기가 나지 않았다. 교구 원로 신부님들도 고개를 저으셨다.
결국 내가 병실에 들어갔다.
"주교님…. 주교님. 저… 암진단이 나왔습니다. 의사들 말이 수술을 받으면 괜찮다고 합니다. 만의 하나 모르니까 유언을 남기시는 것도 좋을 듯 합니다."
주교님은 아무 말씀도 없이 눈물을 주르르 흘리셨다. 그리고 현실을 받아들이는 듯한 표정을 지으셨다. 난 50대의 건장한 주교님께 유언을 하라고 말씀드리는 것이 무척 괴로웠다. 처절한 느낌까지 들었다. 나를 절대적으로 신임했던 주교님은 다른 신부들을 제쳐두고 내게 교구 재산내역을 알려주면서 그걸 책임지라는 유언을 남기셨다.
병이 워낙 깊었던 탓에 주교님은 수술후 며칠을 못 버티시고 54년 12월14일 영면하셨다. 그분의 비서인데다 내게는 아버지 같은 분이셨기 때문에 상주(喪主)같은 심정으로 장례를 치렀다.
긴 겨울이 지나고 봄이 찾아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어머니 병세가 심상치 않았다. 어머니는 내가 주교관 담벼락 뒤에 있는 번지도 없는 낡은 집을 수리해서 모시고 살았는데 중풍에 걸려 몇달간 고생을 하셨다.
어머니는 평소 "나는 사순절 둘째 영복날 죽으련다"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당시 신자들은 묵주기도 묵상주제인 환희·고통·영광을 갖고 월요일을 '첫환희', 화요일을 '첫통고(고통)', 수요일을 '첫영복(영광)', 목요일을 '둘째 환희'라고 불렀는데 둘째 영복날은 토요일이 되는 셈이다. 일부 신자들 사이에서 사순절 둘째 영복날 죽으면 천당에 간다라는 속설이 있었는데 어머니는 그걸 믿으시고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바로 둘째 영복날, 어머니는 평소와 다른 행동을 하셨다. 그 불편한 몸으로 벽에 걸려있는 십자가를 내리더니 그걸 갖고 성당으로 걸어 가셨다.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17] 내 무릎에 기대어 눈을 감으신 어머니
'이제 고아구나'라는 생각에 어린애처럼 두려워
<사진설명>
어머니는 한평생 고단하게 사시다가 내 무릎에 기대어 눈을 감으셨다. 장지에서 하관식 예절을 거행하면서 어머니의 천상영복을 빌었다.(김 추기경 왼쪽은 김동한 형님 신부)
난 아무래도 불효자식인 모양이다. 어머니 사랑을 독차지한 막내아들인데도 막상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TV 드라마를 보다가 이따금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면 눈물이 없는 사람은 아닌데….
내 딴에는 어머니 임종을 조용히 준비했다. 대구교구청 담벼락 뒤에 있는 낡은 집을 구입한 이유도 남의 셋방에서 큰일을 치를 수가 없을 것 같아서였다. 언제 큰일이 닥칠지 몰라 식량과 땔감도 충분히 장만해 두었다.
어머니는 그날 낮에 당신 방에 걸려있는 십자가를 떼어 갖고 2~3분 거리에 있는 남산동성당으로 가셨다. 중풍이 든 불편한 몸이었기 때문에 10분 남짓 힘겹게 걸으셨을 것이다.
어머니는 십자가를 손에 꼭 쥐고 예수님께서 걸으신 수난의 길을 따라 성로신공(聖路神功, 십자가의 길)을 바치셨다. 불편한 다리로 한걸음 한걸음 뒤따른 예수님의 수난길…. 그것이 평생 기도 속에서 사신 어머니의 마지막 기도였다.
어머니는 때마침 성체조배 중이던 프랑스 유 신부님께 총고해(평생 지은 모든 죄를 뉘우치며 고백하는 것)를 하고 집에 돌아오셔서 저녁식사까지 잘 드셨다. 그리고 위급하다는 연락을 받고 교구청에서 뛰어온 이 막내아들의 무릎에 머리를 기대시고 조용히 눈을 감으셨다.
어머니는 참으로 죽음을 잘 준비하셨다. 하느님께서 부르시는 소리를 들으셨던지 그날 그 불편한 몸을 이끌고 성당에 가서 성로신공과 총고해까지 하시고 눈을 감으셨으니 말이다. 내가 그토록 사랑한 어머니의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이유도 그 때문이다.
어머니는 살아 생전에 "말띠 여자는 팔자가 드세다"고 말씀하셨는데 일흔두해를 정말 고단하고 험하게 살다 가셨다. 옹기장수에게 시집와서 가난을 뼈저리게 겪으시고, 방랑벽이 있는 큰아들을 찾느라 3번씩이나 만주 일대를 헤매신 어머니, 말이 아니라 기도로써 이 아들이 성덕을 갖춘 사제가 되기를 빌으셨던 어머니….
밤늦게 시신을 모신 방에 홀로 남아 신산(辛酸)했던 어머니의 한평생을 더듬다보니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리고 '이제 고아가 됐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내 나이가 32살이었는데도 마치 어린애가 부모를 잃었을 때 느낄 법한 두려움과 외로움이 엄습했다.
모든 어머니의 자식사랑이 다 그렇겠지만 이 세상에서 어머니만큼 나를 사랑해준 사람은 없다. 난 고린토 1서 13장 '사랑의 송가'를 무척 좋아하는데 이 세상에서 그 완전한 사랑에 가장 가까운 것이 어머니의 사랑, 특히 내 어머니의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어머니는 나를 위해서 모든 것을 다 내어주시고, 어떤 처지에서든지 다 받아주시고, 어떤 허물과 용서도 다 덮어주셨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많이 입에 올린 말이 '사랑'이다. 그러나 고백컨대, 어머니가 보여준 사랑처럼 '모든 것을 덮어주고, 믿고 바라고 견디어내는' 사랑을 온전히 실천하지 못했다.
효도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안동과 대구에서 몇년 동안 어머니를 모시고, 마지막 날 임종을 지킨 것이 그나마 위안이 된다. 어머니에 대한 정으로 말하자면 형님(김동한) 신부가 더 깊었을 텐데 형님은 그때 군종신부로 나가 있어서 임종조차 지킬 형편이 안됐다.
어떻게 보면 하늘같고 바다같은 어머니 사랑에 조금이라도 보답하라고 하느님께서 내게 특별히 기회를 허락하신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어머니 장례를 치르고 일상으로 돌아왔다. 교구장 비서로 일하면서 해성병원 원장직을 맡은 적이 있지만 서류상 책임자였을뿐 실무에는 관여하지 않았다. 이어 1955년 6월 김천본당(현 황금동본당)으로 발령받았다. 김천본당은 역사가 깊은 데다 유치원과 성의중고등학교를 운영하고 있어서 무척 바빴다.
그러고 보면 신부된 지 4년밖에 안되고, 본당사목이라고 해봐야 안동본당(현 목성동주교좌본당)과 김천본당을 합해 3년이 채 안되는데도 그 사이에 온갖 감투를 다 써보았다. 주임신부, 교구장 비서, 병원장, 재경부장, 유치원장, 중고등학교장… 교구참사로도 잠시 일했으니까 그 나이에 안해본 것 없이 다 해본 셈이다.
김천본당에 부임해 자연스럽게 성의중고등학교 교장직을 맡게 되었는데 학생들과 즐겁게 학교 생활을 한 기억이 새롭다. 성의중고교는 전임 최재선 신부님(현 부산교구 은퇴주교)이 옛날부터 내려오던 교육시설을 중고등학교로 인가받아 기초를 닦은 학교다. 그래서 나는 좋은 전통을 만들어 후배들에게 물려주고, 미래를 스스로 개척하는 젊은이가 되라고 학생들에게 신신당부했다.
특히 여학교 교사(校舍)가 성당 마당에 있고, 사제관을 교장실로 겸용하는 통에 눈을 뜨고 나면 참새처럼 재잘거리는 여학생들이 사방 천지였다. 난 여학생들에게 장난도 곧잘 쳤는데 학생들은 자상한 아빠를 대하듯 나를 따랐다. 어느 날인가 마당에서 여학생들과 장난을 치며 놀고 있는데 수녀님이 "학생들과 장난치면서 노는 교장이 세상에 어디있냐?"며 슬쩍 눈을 흘긴 기억이 난다.
그때 학생들, 특히 여학생들이 나를 무척 따르고 서로 정이 깊게 들었다. 여학교 제1회 졸업식날, 졸업생 40여명이 집에 돌아갈 생각은 안하고 내내 울기만 하다 결국 사제관에서 잤다. 자기네들끼리 헤어지는 것이 섭섭해서 그랬겠지만 말이다.
요즘도 초노(初老)의 나이에 접어든 1회 졸업생들과 일년에 한 번 정도 만나서 옛 추억에 잠기곤 한다. 나를 생각해주고 위해주는 그들을 보면 친딸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하느님은 이런 식으로도 홀몸으로 사는 성직자에게 혈육의 정까지 선물해주시는 것 같다.
제자들 가운데 김윤선이란 학생이 있었다. 인물이 무척 빼어난 데다 여학교 대대장을 맡아 남학생들 사이에서 요즘말로 '인기 짱'이었는데 그 제자가 뭇 남성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수녀회에 입회한 얘기가 재미있다.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18] 교장신부 시절과 1950년대 후반 한국교회
자상한 아버지, 때론 짓궂은 친구같은 '인자하신 콧님'
<사진설명>
김천 성의여자상업고등학교 제1회 졸업생들. 나는 젊은 교장이었지만 자상한 아버지, 때로는 짓궂은 장난을 거는 친구처럼 학생들을 대했다.
김천 성의중고교 제자들 가운데 김윤선이란 학생을 특별히 떠올리는 이유는 그가 뭇남성들의 구애를 뿌리치고, 또 내 예상을 뒤엎고 수녀원(예수성심시녀회)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내게서 세례를 받은 윤선이는 미모가 빼어난 데다 여학교 대대장을 맡았을 만큼 똘똘했다. 들리는 얘기로는 남학생들의 연애편지가 툭하면 집에 날아와 곤혹을 치르고, 동네 부잣집에서도 며느리 삼고 싶어 안달했다고 한다.
어느날 윤선이 친구가 내게 "교장신부님, 윤선이 같은 애가 수녀되면 참 좋겠어요"라고 말했다. "수녀가 되면 좋지"라고 맞장구를 쳤지만 나뿐 아니라 어느 누구도 윤선이가 수녀원에 가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독일 유학을 앞두고 성당 유치원 보조교사로 일하는 윤선이를 잠깐 만났는데 그때 뜬금없이 "제가 수녀원에 가면 잘 살 수 있을까요?"라고 물어왔다. 나는 "물론 잘 살 수 있지. 그런데 네 부모님이 허락하시겠냐?"라며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다.
독일 유학에서 돌아온 후 교구장님 대신 예수성심시녀회 종신서원 수녀들을 면담하러 간 적이 있다. 그곳에서 수녀가 된 윤선이를 만났다. 제자 수녀는 당시로서는 드물게 부활신앙에 대한 믿음이 무척 강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윤선이 동기 중에 박희순이란 학생이 있었는데 희순이는 훨씬 앞서 그 수녀회에 입회했다. 박희순(마리요왕) 수녀는 70년대에, 김윤선(마리요셉) 수녀는 80년대 중반에 수녀회 총원장까지 지냈다. 내게는 지금도 꿈많고 웃음많은 여고생들처럼 보이는데 수녀원에서는 벌써 원로 축에 드니 세월이 빠르긴 참 빠르다.
1년 남짓 교장을 맡는 동안 학생들과 격의없이 가깝게 지냈다. 권위를 앞세우지 않고 아버지처럼 자상하게 대하고, 때로는 친구처럼 장난도 걸어서 그랬는지 학생들이 내게 '인자하신 콧님'이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내가 웃을 때면 코가 벌렁거린다나….
30대 중반의 젊은 교장이었지만 선생님들과도 별 어려움없이 학교를 꾸려 나갔다. 하지만 가난한 농촌이라 수업료를 제때 못내는 학생들이 많아 난감했다. 학교운영 책임자로서 선생님들을 통해 수업료 납부를 독촉한 적도 있지만 내 속 마음은 그게 아니었다. '오죽하면 자식 학비를 대지 못할까'라는 생각에서 가난한 학생들에게 나름대로 관심을 기울였다.
더 힘들었던 것은 이따금 인근 학교 교장 선생님들과 모임을 갖는 자리였다. 학교와 지역사회에서 존경받는 교장 선생님들이 둘러앉아 음담패설을 주고받는 광경을 보고 있노라면 '이분들이 정말 교육자인가'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실망스러웠다.
한국교회에 소위 '밀가루 신자'라는 말이 생긴 것은 이 무렵이다. 전후 미국 주교회의 원조기구인 가톨릭구제회(NCWC)는 엄청난 구호물자를 배에 실어 한국에 보내주었다.
우리가 전후 폐허 속에서 굶주림의 고통을 그나마 덜 수 있었던 데는 가톨릭구제회 한국사무소 책임자로 와 계시는 안제오르지오 주교님(메리놀외방전교회)의 역할이 컸던 것으로 알고 있다. 밀가루·분유·의류품 같은 구호물자는 교구를 거쳐 각 본당에 배급됐는데 내가 사목했던 안동본당과 김천본당에도 이따끔 구호품이 한트럭씩 배달됐다.
성당에서 그런 구호품을 신자, 비신자 가려 나눠준다는 게 우스운 얘기지만 아무래도 성당에 나오는 신자들에게 먼저 돌아간 것은 사실이다. 그러다 보니 구호품을 더 탈 요량으로 믿음도 없이 입교해서 신자가 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리 없었다. '밀가루 신자'라는 말은 그래서 생겨났다.
또 이 무렵에 한국교회는 어떤 의미로 소외를 당했다. 기세높은 일본인들이 제2차 세계대전 패망후 정신적 공허와 가난에 시달리자 교황청은 이때를 일본 복음화의 호기로 삼고 인적, 물적 선교자원을 집중 투자했다. 일본 복음화가 아시아 복음화의 단초라고 판단했던 모양이다. 비오 12세 교황님은 세계적 선교회와 수도회에 서한을 띄워 일본에 진출할 것을 권고했을 정도이다.
그 바람에 선교회와 수도회들이 일본에 엄청난 수의 선교사를 파견하느라 한국은 관심 밖으로 밀려났다. 실제로 내가 교구장님을 대신해 어느 수도회에 한국 진출을 요청한 일이 있었는데 "아시아에 새 선교지를 정해 놓아 한국 진출은 곤란하다"는 답변을 들었다. 그때 섭섭한 마음과 함께 '한국교회는 스스로 일어서야 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의 소외는 오히려 한국교회에 축복이 됐다. 예나 지금이나 일본 교세는 정체돼 있고, 자국 신부보다 외국 수도회 신부가 더 많다. 반대로 한국교회는 한국 신부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으며, 역동적 성장력을 계속 유지하고 있다. 이 또한 하느님께서 한국교회에 내려주신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는 그때까지도 단란한 가정에 대한 향수가 애련히 남아 있었다. 자동차나 기차를 타고 가다 굴뚝에서 저녁밥 짓는 연기가 피어오르는 초가가 눈에 띄면 가슴이 설레고, 더러는 부럽기까지 했다.
'오두막 같은 저 집에서 일가족이 화목하게 살고 있겠지. 가족을 위해 하루 종일 땀흘리고 돌아온 아버지는 우물가에서 세수를 하고, 부인은 부엌에서 달그락 달그락거리면서 저녁상을 차리고, 아이들은 마당에서 깔깔대며 뛰어놀고…. 저 집 가장은 얼마나 행복할까.'
사제직을 저버리고 환속(還俗)할 생각을 한 것은 아니다. 석양에 물들어가는 초가, 그곳에서 오순도순 살아가는 가족의 모습은 어린 시절부터 동경(憧憬)한 풍경이다. 내 어릴 적 꿈은 읍내에 가게를 차려서 돈을 번 후 25살쯤 장가를 가서 단란한 가정을 꾸리는 것이었다. 그 꿈도 그런 동경에서 비롯된 것인지 모르겠다.
김천본당을 떠나 1956년 독일 유학길에 올랐다. 한국교회가 성장하려면 신부들이 그리스도교 전통이 깊은 나라에 가서 하나라도 더 배워와야 한다는 생각에서 교구장님께 청했더니 흔쾌히 허락해주셨다. 학교는 성베네딕도 왜관수도회에서 맡아주기로 한 덕분에 자유롭게 떠날 수 있었다.
배움에 대한 열정과 여비만 갖고 도착한 독일. 그곳엔 또다른 세계가 기다리고 있었다.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19] 독일 유학생 시절(上)
낯설고 힘들어도 새로운 사실 깨우치는 재미 쏠쏠
<사진설명>
독일 유학시절에 거리에 나가면 사람들이 `희한한 구경거리`를 만난듯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당시 독일에는 한국인은커녕 동양인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독일 어느 기차역에서.
1956년 10월, 배움의 열망을 가슴에 안고 독일에 도착했다.
뮌스터대학 요셉 회프너 교수신부님 밑에서 '그리스도 사회학'을 배운 것은 정말 행운이었다. 내가 그리스도 사상에 기초한 인간관과 국가관 등을 정립하는 데 적지 않은 영향을 준 사람이 그 분이다.
그런 이론적 토대가 허술했더라면 70~80년대의 그 험난한 시기를 제대로 헤쳐나왔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얼마 전에 독일 의원들이 그분의 학문 업적을 기리는 모임을 열었다는 소식을 신문에서 접한 적이 있다. 참으로 훌륭하고 저명한 학자신부님이셨다.
회프너 교수님은 일본 상지대학 은사인 게페르트 신부님 소개로 만났다. 게페르트 신부님은 언젠가 "더 공부하고 싶으면 독일로 가거라"라고 말한 적이 있다. 게페르트 신부님은 당시 서강대학교 설립을 준비하기 위해 한국에 와 계셨다. 유학 문제에 대해 상의할 겸 신부님을 찾아뵈었다.
"요셉 회프너 교수를 찾아가서 배워라. 난 그를 만난 적도 없고, 그가 교수인지 신부인지조차 모른다. 하지만 그의 저서를 읽어보니까 사회학 이론이 매우 깊고 건전하다."
게페르트 신부님은 손수 추천서까지 써주셨다. 벨기에로 계획했던 유학길이 독일로 바뀐 것은 그 때문이다.
지금은 유럽 대륙에 유학생이 많이 나가 있어 덜하겠지만 그때만 해도 동양인 유학생의 고충은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뮌스터에 가기 전에 퀼른에서 두달간 머물렀는데 밖에 나가면 사람들이 힐끔힐끔 쳐다보는 바람에 무척 곤혹스러웠다. 한국인은 고사하고 얼굴색이 노란 동양인을 처음 보는 주민들이 대부분이었으니 그럴만도 했다. 버스에 오르면 어떤 사람은 화들짝 놀라기까지 했다. 그때 퀼른시 전체에 한국인은 두세명밖에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음식은 그나마 입에 맞았다. '품뽀니끄'라는 검은 보리빵과 돼지고기를 구워 말려서 얇게 썰은 '신뽀니'라는 게 특히 먹을 만했다. 그러나 '한국 토종'인데 김치와 된장국이 왜 그립지 않겠는가. 수녀원에서 방 한칸을 얻어 살고 있을 때, 비가 내려 날씨가 음산한 날이면 김이 모락모락나는 밥과 된장국 생각이 간절했지만 독일 저녁식사는 대부분 찬음식이었다.
그런 날 학교에서 세미나까지 마치고 늦게 돌아오면 식탁에 차려놓은 저녁을 먹는둥 마는둥하다 내 방에 가서 캠핑용 버너에 불을 붙여 밥을 짓곤 했다. 반찬이라고는 조선간장 비슷한 '막'이라는 게 있어서 거기에 양파를 썰어넣어 만든 양념간장이 고작이었다. 하얀 김이 피어오르는 쌀밥에 '막'을 붓고, 그 위에 생계란을 풀어 쑥쑥 비벼먹는 하숙방 저녁식사….
그동안 여러 자리에 초대받아 온갖 음식을 다 맛보았지만 그 시절 한 손으로 책장을 넘겨가면서 떠먹은 밥 보다 더 맛있는 밥은 먹어 본 기억이 없다. 내 평생 내 손으로 밥을 지은 기억은 어린 시절에 어머니가 출타하고 안 계서서 형과 함께 밥을 해먹은 것과 학병시절에 중대 취사병으로 근무할 때, 그리고 독일 하숙생 시절이 전부이다.
독일어가 서툴러서 어느 수녀님한테 야단(?)을 맞은 적도 있다. 수녀원 아침미사를 집전하기로 하고 오전 7시30분에 자명종 시계를 맞춰놓고 잠들었는데 이른 아침에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렸다. 누군가 싶어 나가봤더니 수녀님이 잔뜩 화가 나서 "왜 6시반 미사에 나타나질 않느냐"고 따졌다. 6시반? 독일어는 6시반을 '반7시(할프 지벤 halb sieben)'라고 표현하는데 그걸 잘못 알아들은 것이다. 그 바람에 미사시각도 못 지키는 게으른 신부가 돼버렸다.
그런 어려움을 겪다 보니 '외국생활이란 게 이렇게 힘든 것이구나'라고 새삼 깨달았다. 그제서야 한국에서 활동하는 외국 선교사 신부님들의 고충을 조금이나 헤아릴 것 같았다.
그러나 가장 힘들었던 점은 전공 공부를 따라가는 것이었다. '그리스도 사회학'은 신학부에 속해 있어서 교의신학·윤리신학·교회법·성서 등 신학과 성서 전반을 다시 새롭게 공부해야 했다. 특히 한국에서 성서를 제대로 공부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스어와 히브리어를 배워가면서 신구약 성서를 익히는 게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지도교수님은 내게 '한국 가족제도'를 연구하고, 그 주제로 논문을 쓰라고 권유했다. 문제는 그에 관한 기초자료를 구하는 것이었다. 한국에 있는 자료는 순전히 한문으로 되어 있고, 영어와 불어자료는 조금 있지만 독어자료는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한국 가족제도는 유교 전통이 깊기 때문에 학문적으로 접근하려면 유교 경전도 독해할 줄 알아야 했다. 그러려면 내 한문 실력 갖고는 어림없는 일이었다. 아쉬운대로 불어자료라도 참고하려면 새로 불어를 배워야 했다. 이 때문에 머리에서 쥐가 날 지경이었다.
결국 지도교수님께 찾아가 "이 주제로는 도저히 논문을 못쓸 것 같으니 바꿔달라"며 백기(白旗)를 들었지만 교수님은 요지부동이었다. 지도교수님은 원래 어느 학생에게든지 출신국 가족제도를 연구하라고 주문하는 분이었다.
그래도 새로운 사실을 하나하나 깨우쳐가는 재미만큼은 쏠쏠했다. 초기에는 강의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해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강의내용이 서서히 귀에 들어오자 마치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것만 같았다. 신학교 시절에 배운 것보다 훨씬 앞선 내용을 접할 때는 '한국은 멀어도 한참 멀었구나'라는 생각을 하곤했다. 인간에게 기쁨을 주는 요소는 수없이 많지만 배우는 기쁨도 어느 것에 뒤지지 않는다.
한창 공부 재미에 빠져 있던 그 즈음에 예기치 않은 돌발사태가 발생했다. 유학생활 3년째로 접어들었을 때이다. 대구교구 서정길 주교님이 독일교회 초청을 받아 오시는데 비행기에서 덜컥 감기에 걸려 경유지 파리에서 심한 고열에 시달리셨다. 독일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폐렴으로 악화된 상태였다.
그 바람에 서 주교님은 독일 시립결핵요양원에서 넉달 동안 입원해 계셨는데 그때 본의 아니게 비서역할을 해야 했다. 한국교회에 물심양면으로 많은 도움을 주는 오지리(오스트리아) 부인회도 서 주교님을 기다리고 있던 터라 서 주교님을 다시 빈에 있는 병원으로 모시고 가서 여러달 동안 병수발을 들었다. 다행히 주교님은 2년후 쾌차해 귀국하셨다. 중간에 다른 신부가 와서 교대를 해주기도 했지만 꼬박 2년 동안 공부를 뒷전으로 미뤄놓고 주교님을 모신 셈이다.
주교님이 떠나신 후 다시 뮌스터대학 교정으로 돌아왔다. 새롭게 출발하는 마음으로 학업에 정진하려고 마음을 굳게 다잡았다. 그러나 차분하게 앉아서 공부할 팔자(?)는 아니었나보다. 여기저기서 나를 찾는 전화와 편지가 오기 시작했다.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20] 독일 유학생 시절(下)
현지 체험들, 훗날 사목자로서 소임수행에 큰 도움
<사진설명>
한국에서 온 광부와 간호사, 수녀들이 나를 찾는 바람에 가뜩이나 힘든 공부가 자꾸 지연됐다. 독일 탄광촌에서.(뒷줄 가운데가 김 추기경)
다시 뮌스터대학으로 돌아와 공부하고 있을 무렵에 한국인들이 독일로 물밀듯 밀려왔다.
한국 정부가 서독으로부터 상업차관을 얻기 위해 간호사와 광부를 송출하기 시작한 것이 이때부터다. 제2차 세계대전의 폐허에서 '라인강의 기적'을 이룬 서독은 노동력이 부족해 광산·병원처럼 고된 사업장에는 외국 노동력을 수입해야 하는 실정이었다.
한국에 진출한 독일 계통의 분도회에서도 어학과 간호학을 공부시키느라 수녀와 수사들을 독일에 파견하기 시작했다. 성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의 한 독일인 신부님은 독일 가정에 입양시키기 위해 한국에서 고아들을 데려왔다. 그야말로 아이들을 여기저기에 던져놓는 상황이었다.
문제는 한국인 신부가 거의 없다 보니 이들이 툭하면 나를 찾는 것이었다. 고해성사와 미사는 물론이고 갑자기 어려운 일에 부닥치면 도움을 청할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공부를 한다고 해도 "도와달라", "꼭 와달라"는 동포의 간청을 어떻게 거절하겠는가.
한인들에게 '김수환 신부'가 입소문이 났던지 나를 부르는 전화와 편지가 끊이지 않았다. 이 때문에 학업에 지장이 많았지만 어려운 사람을 보고 가만 있지 못하는 성격이라 웬만하면 요청에 응하려고 했다.
한국 여성이 세계 어느나라 여성보다 강인하다는 사실은 그때 새삼 깨달았다. 한국 간호사들의 헌신적이고 억척스런 일솜씨는 현지인들에게 좋은 평판을 얻었다. 간호사들은 생활비를 거의 안쓰다시피하면서 월급을 고스란히 가족에게 송금했다. 그 중에는 대학에 진학해 의사나 문학박사가 된 사람도 있었다.
유학시절에 보고 겪은 여러가지 일들 중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65)였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가톨릭교회가 창문을 활짝 열어 새 바람을 맞아들이고, 쇄신을 통해 시대변화에 적응하려는 '희망의 대역사(大役事)'였다.
교황 요한 23세는 공의회를 소집하면서 시대적응이란 뜻의 '아죠르나멘토(aggiornamento)'라는 단어로 그 의미를 설명하셨는데 이는 순식간에 전세계 교회의 유행어가 됐다.
가톨릭교회에 변화와 쇄신의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감지했다. 비록 신문과 방송을 통해 공의회 진행소식을 접했지만 예전에 느껴보지 못한 강한 바람이었다. 그리고 독일 신부들과 공의회에 대해 토론하면서 많은 얘기를 주고 받았다. 그러한 체험은 내가 신부로서뿐만 아니라 훗날 주교와 추기경으로서 소임을 수행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그 무렵 교황 요한 23세가 나를 울린 일은 잊을 수가 없다. 어느날 극장에 영화를 보러 갔는데 영화가 슬퍼서 운 것이 아니라 영화가 시작되기 전에 나오는 뉴스를 보면서 눈물을 흘렸다. 교황님이 추기경과 주교들을 이끌고 공의회장에 입장하는 장면이었다. 기도에 열중하고 계신 교황님 얼굴이 화면에 비친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루룩 흘렀다. 감동의 눈물이었다. 성령께서 새로운 도전에 나서는 교황님과 함께 하고 계시다는 것을 강하게 느꼈다.
극장에 가서 영화가 아니라 뉴스를 보고 눈물을 흘렸다고 하면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다.
1958년 요한 23세(원명 안젤로 주세페 론칼리)가 77세 고령에 교황직에 오르자 교계와 언론에서는 '과도기적 교황'이라고 표현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워낙 고령이다 보니 큰 기대를 거는 것 같지 않았다. 전임 교황 비오 12세가 수려한 귀족적 분위기였다면 이분은 털털한 시골 할아버지 같은 인상이었다. 돌아가시기 전에 후임교황 물망에 오를 만한 젊고 유능한 추기경들을 많이 임명해 주는 것 외에는 기대할 게 없다는 여론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요한 23세는 세상을 향해 문을 열고 변화와 쇄신, 그리스도교 일치, 세상 및 타종교와 대화하는 교회를 꾀하셨다. 어느 누구도 그러한 용단을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고 보면 '과도기적 교황'이라는 신문 제목이 적중하기는 했다. 젊은 새 교황을 기다리면서 임시로 직책을 수행하는 교황이 아니라 전통과 관습을 뛰어넘어 새로운 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교회를 이끈 교황이 되셨다는 말이다.
특히 요한 23세는 교회의 사회적 가르침을 담은 '지상의 평화', '어머니요 스승' 등 8개 회칙을 발표하셨다. 이 두 회칙은 지금도 교회 안팎에서 '평화의 교과서'라고 불릴만큼 내용이 뛰어나다.
요한 23세는 공의회 회기 중인 1963년 운명하셨다. 교황님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들은 후부터는 바티칸 방송에 주파수를 맞춰놓고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라디오를 틀곤했다. 내 마음은 로마에 가 있었다. 이탈리아 공산당 유력기관지조차도 그분의 부고(訃告)기사에 "세계의 목자 가시다"라는 제목을 달아 업적을 기렸다.
독일은 여러 면에서 흥미로운 나라이다. 내가 관찰한 독일 국민성은 질서, 근면, 철두철미다. 이는 일본 국민성과도 유사한데 한가지 특징을 더 말하라면 집단주의를 꼽고 싶다.
어느날 술에 흥건히 취한 사람들이 민요를 합창하면서 줄맞춰 걷는 모습을 보고 고개를 갸우뚱한 적이 있다. 맥주집에서 나온 취객들이 한치 흐트러짐도 없이 군가풍 민요에 발을 맞춰 걷는 질서의식과 집단의식을 어떻게 설명해야할까. 이튿날 독일 신부에게 "독일인에게는 군국주의의 피가 흐르는 것 같다"고 말했더니 깜짝 놀라는 시늉을 했다.
가뜩이나 힘겨운 전공 공부는 요셉 회프너 지도교수님이 주교로 임명돼 뮌스터교구장으로 떠나시면서 난관에 부닥쳤다. 덧붙이면, 회프너 주교님은 1969년 나와 함께 추기경에 임명됐다. 더구나 내 임명순서가 조금 빨라 교황님께 먼저 임명장을 받았다. 그때 스승님께 고개를 숙이고 "정말 죄송합니다"라며 백배사죄(?)한 기억이 난다.
아무튼 후임 지도교수는 아무리 기다려도 배정되지 않았다. 신학과 사회학을 공부하면서 '한국 가족제도'에 관한 박사학위 논문을 쓰는 것도 버거웠다. 난 고민에 빠졌다.
'이러다가는 10년이 넘어도 공부를 마칠 수 없겠는 걸. 무작정 책만 붙들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박사가 되는 것보다 하루라도 빨리 한국에 돌아가 일하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마침내 '박사학위를 포기하고 가겠다'는 생각을 교구장님께 말씀드렸다.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21] 가톨릭시보사 사장 시절
식사 시간이 아까울 만큼 가장 열정적으로 일에 매달려
<사진설명>
김수환 추기경(가운데)이 가톨릭시보사 사장신부로 재직하던 1965년 9월 직원들과 회의를 하고 있다.사진제공=가톨릭신문
1963년 11월, 독일에서 7년만에 돌아왔다.
그 사이에 한국 가톨릭은 정식 교계제도를 갖추고 자립기반을 닦느라 여념이 없었다. 내가 교회발전에 조금이라도 이바지하는 길은 독일에서 보고 배운 것을 사목현장에서 열심히 실천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교구장님은 난데없이 가톨릭시보사(현 가톨릭신문) 사장직을 내게 맡기셨다. 신문을 만들어 본 경험이 없어 막막한 심정으로 출근한 신문사. 난 그곳에서 2년 동안 밥먹는 시간이 아까울 정도로 일에 미쳐 살았다. 돌이켜보건대 내 일생에서 가장 열정적으로 일에 매달린 때는 시보사 시절이 아니었나 싶다.
그때만 해도 가톨릭시보는 말이 신문이었지 신문이라고 내밀기가 부끄러울 정도로 모든 게 열악했다. 10명이 채 안 되는 기자와 직원이 만성적자에 시달리면서 근근이 신문을 내는 실정이었다. 독일 유학시절에 고국교회 소식이 궁금해 우편으로 배달되는 가톨릭시보를 한 글자도 빼놓지 않고 애독하기는 했지만 신문이 이토록 열악한 환경에서 만들어지는 줄은 몰랐다. 구독료 수입이 적다 보니 기자들 봉급 챙겨주는 일도 만만치 않았다.
그런 여건에서 나름대로 전력투구하다시피하면서 신문을 만들었다. 신문이란 게 기획단계부터 최종 인쇄까지 일일이 손이 가고, 정성과 애정을 쏟아야만 제대로 나온다. 윤전기에서 막 나와 잉크 냄새가 진동하는 신문을 펼쳐들면 예술가가 고된 작업을 마치고 한발짝 물러서서 작품을 관조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밤낮없이 정성을 쏟으면서 부지런히 일하니까 발행부수도 늘어 한결 재미가 붙었다.
하지만 수지타산을 맞추는 게 여간 어렵지 않았다. 발행부수와 광고가 적어 적자를 면치 못하는데 그나마 있는 독자들도 구독료를 제때 납부하지 않아 애를 먹었다. 구독료를 그냥 떼먹겠다는 심보라기보다는 잊어버리고 안보내주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짬이 나면 가방을 들고 직접 성당으로 밀린 구독료를 받으러 나갔는데 어떤 성당 사무실에서는 잡상인 취급을 받기도 했다.
"저, 신부님을 만나러 왔는데요."
"(얼굴을 쳐다보지도 않고) 무슨 일 때문에 그러세요?"
"직접 뵙고 말씀드려야 하는데…."
"신부님이 그렇게 한가한 분이 아닙니다"
"그래도 좀 어떻게…."
"허허, 이 양반이 말귀를 못 알아 듣네."
내가 '독일물' 좀 먹었다고 독일식 사제복을 입고 다녔으니 문전박대를 당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 당시 독일 신부들은 로만카라 대신 와이셔츠에 달린 것 같은 칼라가 붙은 흰옷에 셔츠를 받쳐 입었다.
그래도 편집국은 가족같은 분위기였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직원들 봉급을 적정수준에 맞춰 주려고 노력했고, 특별히 생활이 힘든 직원에게는 남들 눈에 안 띄게 도움을 줬다. 부수와 광고가 늘어나니까 직원들 사기도 제법 올라갔다. 난 신문사에서 봉급을 받지 않았을 뿐 아니라 돈을 일절 갖다 쓰지도 않았다. 오히려 어떻게 하면 1원이라고 더 보태서 재정을 튼튼하게 할까 궁리했다.
그때 제2차 바티칸공의회 바람이 한국교회에 불어오기 시작했다. 로마에서 열리고 있는 공의회 소식을 보도하는 일만큼은 사명감을 갖고 임했다. 한국교회가 교회를 위한 교회가 아니라 세상에 봉사하는 교회가 되려면 공의회 정신을 올바로 알고 실천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같은 건물에 동아통신사가 있어서 외신이 타전하는 공의회 뉴스를 시시각각 받아볼 수 있었다. 일반 통신사는 종교뉴스가 들어오면 거의 다 버리는데 난 동아통신사에 "바티칸 소식을 모두 넘겨 달라"고 부탁해 뉴스를 빠뜨리지 않고 꼼꼼이 챙겼다. 중요한 내용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번역을 맡기거나 그게 여의치 않으면 직접 번역을 해서라도 신문에 실었다.
난 가톨릭시보가 비록 종교매체이지만 비신자도 읽고 싶은 신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세상을 위한 교회'가 되려면 종교매체도 세상 사람들과 소통해야 한다는 소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사설(社說)은 내가 거의 다 썼는데 사회적 사건과 흐름을 신앙적 눈으로 조망하는 주제도 심심찮게 다뤘다. 어느날 신문사에 드나드는 정보과 형사가 "가톨릭시보에서 이런 사회적 얘기도 쓰네요"하며 관심을 보인 적이 있다.
변화와 쇄신은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었다. 그렇다면 한국교회는 어떻게 변해야 하고, 무엇을 쇄신해야 하는가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심 끝에 유명한 목사와 스님, 이어령씨 같은 명사에게 편지를 띄워 "가톨릭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루빨리 고쳐야 할 단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는 등의 질문을 했다. 그분들이 보내준 답장원고를 보니까 가톨릭을 사정없이 비판하는 글이 많았다.
심지어 '교회 밖 사람들이 가톨릭을 이토록 부정적으로 보는가?'하며 탄식한 적도 있다. 그 원고들을 토씨하나 바꾸지 않고 그대로 신문에 게재했다. 원고의 일부분을 옮긴다.
"교황의 독점 성서해석의 권위는 재고해야 한다. 베드로는 어느 특정한 개인에게가 아니라 '비두니아'에 흩어진 모든 성도들에게 왕 같은 제사장들이라고 했다면 그리스도인은 누구나가 다 제사장이 될 수 있고 성서해석의 권리가 있다.… 로마교회가 단순히 용어와 어휘상의 오해가 종교개혁을 가져왔다고 보고 이에 대한 재음미만 힘쓴다는 것은 종교개혁의 진의를 모르는 소치라고 할 수밖에 없다…"(이영헌 기독공보 편집인, 1964년 8월2일자 게재)
장면 박사님 같은 분은 걱정이 되셨는지 "신문에 이런 글이 실려도 되느냐"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 주셨다. 그래서 "세상이 우리를 어떻게 보는지 알아야 고칠 것은 고치고, 바로 잡을 것은 바로 잡지 않겠습니까"라는 요지의 답장을 보내 드렸다.
매스미디어는 복음선교사업에 있어서 더 없이 유용한 도구다. 교황 비오 10세(1835-1914)는 이미 100년 전에 "돈이 부족하다면 내 주교관과 목장을 팔아서라도 미디어를 통한 복음선교사업에 나서야 한다"라고 역설하셨다. 서울대교구장 재직시절에 평화방송·평화신문 설립을 최종 승인한 것도 이같은 확신과 각오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무렵 교도사목에도 관여해 재소자들을 자주 만났다. 그때 만난 사형수 최월갑은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다.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22] 사형수 최월갑과 희망원
교수대 부러져 떨어졌는 데도 편안히 웃기만
<사진설명>
한때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함께 살고 싶은 열망에 불타올랐지만 용기를 내지 못했다. 가톨릭시보사 사장 시절 대구 희망원 가족과 얘기를 나누고 있는 김 추기경.
가톨릭시보사 사장 시절에 교도소엘 밥먹듯이 자주 들락거렸다. 무슨 죄를 짓고 잡혀 들어간 게 아니라 재소자들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주일미사나 고해성사 때 재소자들을 대하고 있으면 '순백의 영혼' 같은 천사를 만나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죄를 뉘우치고 하느님 사랑 안에서 다시 태어나려고 애쓰는 그들의 선한 눈빛이 내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다.
특히 고해실에서 그들 얘기에 귀를 기울이는 동안 '(교도소) 밖에 있어야 할 사람이 안에 있고, 안에 있어야 할 사람이 밖에 있는 것은 아닌가'라며 고개를 갸우뚱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그들이 죄를 짓고 교도소까지 오게 된 사연을 눈물로 털어놓을 때는 '무전유죄 유전무죄(無錢有罪 有錢無罪)'라는 말이 가슴에 와닿아 함께 울곤 했다.
내가 재소자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미사집전과 고해성사가 전부였다. 이따금 돈이 생기면 그걸 소장에게 주고 "재소자들에게 고깃국 한번 끓여주라"고 부탁했다. 기름진 음식을 먹지 못해 얼굴이 늘 까칠까칠한 게 마음에 걸려 그랬던 것이다.
재소자들과 가깝게 지내다 보니 그들은 출소하는 날이면 나를 곧잘 찾아왔다. 대부분 차비를 얻기 위해 오는 사람들이었다. 그럴 때면 "얼마나 고생이 많았느냐. 이제부터 마음 단단히 먹고 새출발을 하라"면서 호주머니를 톡톡 털어 돈을 쥐어줬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미심쩍은 생각이 들었다. 한결같이 차비가 가장 많이 드는 제주도나 강릉이 고향이라는 것이었다. 어느날 출소자라면서 사무실에 찾아온 사람의 언행이 하도 수상해서 교도소에 문의했더니 출소자 중에 그런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냥 돈을 뜯어낼 요량으로 찾아온 사기꾼이었다.
그때부터 출소자가 찾아오면 항상 교도소측에 신원을 확인했는데 10명 중에 7, 8명은 그런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아예 신문사 직원에게 차표를 직접 끊고 차 좌석에 앉는 것까지 보고 오라고 시켰는데도 별 소용이 없었다.
그때 만난 재소자들 가운데 최월갑이란 사람은 뇌리에 각인된 것마냥 또렷하게 기억한다.
그는 살인강도죄를 짓고 사형선고를 받은 젊은 사형수였다. 개신교 신자였던 그가 천주교로 개종하고 싶다고 해서 미사도 드려주고, 수녀님께 교리를 잘 가르쳐 주라고 특별히 당부까지 해놓고 만났다. 그는 이미 신앙 안에서 죄를 깊이 뉘우치고 용서받은 상태였다. 선하디 선한 눈빛만으로도 그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세례를 받기 직전에 사형대에 서야 했다. 사형집행 소식을 듣고 교도소로 달려가 그에게 조건부 세례를 주었다. 죽음을 앞둔 그는 놀라우리만치 평화로웠다. 오히려 다시 눈부신 햇살이 내리쬐는 일상으로 돌아갈 내가 울고 있었다.
나는 마지막 선물로 예수님께서 죽은 라자로를 살려내신 복음(요한 11, 38-44)을 읽어 주었다. 그는 천주교묘지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사형대로 걸어 올라갔다. 그리고 잠시후 "쿵"하는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그 소리는 심장에 꽂히는 비수(匕首)처럼 차갑고 날카로웠다. 주위가 쥐죽은듯 조용했다.
그런데 잠시후 간수가 얼굴이 사색이 되어서 내 옆에 있는 소장에게 뛰어왔다.
"소장님, 월갑이, 월갑이가…."
"왜 그래. 무슨 일인가?"
"월갑이가 저 밑에서 싱글싱글 웃고 있어요."
"무슨 뚱딴지같은 얘기야. 죽은 사람이 웃다니?"
현장에 가보았더니 그가 목에 밧줄을 걸고 정말 편안히 웃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나무로 된 낡은 교수기(絞首機)가 그의 체중을 이기지 못하고 부러져 아래로 함께 떨어진 것이었다.
소장은 즉시 "사형집행 계속!" 명령을 내렸다. 젊은 사람을 두번 죽여야 하는 상황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난 애처로운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어서 아무 말도 못하고 그의 손만 꼭 잡고 있었다. 간수들이 사형대를 고치는 것을 태연스레 보고 있던 월갑이가 말문을 열었다.
"미안해하지 마세요. 전 괜찮습니다. 지금 죽는 것이 제게는 가장 복된 죽음입니다. 여러분도 저와 같은 믿음이 있으면 제 말을 이해하실 거예요."
그리고 내게는 "제가 반시간쯤 후면 천당에 가 있겠네요"라며 날 위로하는 듯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는 두번째 죽음도 편안하게 받아들였다.
다음날 시신을 인도받아 계산동성당에서 장례미사를 봉헌했다. 미사 참례자들에게 내가 목격한 그의 죽음을 전하면서 부활신앙에 대한 강론을 했다. 그리고 유언대로 시신을 교회묘지에 안장했다.
인간은 무수한 만남 속에서 살아간다. 돌아서면 금방 잊혀지는 만남이 있는가하면 오랜 세월이 흘러도 잊혀지지 않는 만남이 있다. 난 40년 세월이 흘렀는데도 그와의 만남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가 죽음을 받아들이는 자세와 부활신앙에 대해 많은 묵상거리를 남기고 떠났기 때문인 것 같다.
또 그 무렵 행려병자와 장애인들을 수용하는 시립 복지시설 '희망원'에 자주 들렀다. 치료 한번 제대로 받아보지 못한 병든 사람들, 거리에서 구걸하다 잡혀온 거지들, 손과 발이 뒤틀린 장애인들, 피를 토하면서 기침을 하는 폐병 말기환자들….
그런 부류 사람들 1000여명이 열악하기 짝이 없는 시설에서 형편없는 먹거리로 연명하는 것을 보면서 '희망원이 아니라 절망원'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그들을 만나면 만날수록 이상하게 마음이 끌렸다. 어떻게든 힘이 되어주고 싶은 마음이 들어 돈을 얻어다 갖다주고, 봉사활동을 하도록 수녀회와 연결시켜 주었다. 날이 갈수록 그들에게 마음이 끌렸다.
가난하고 소외된 그들과 함께 살고 싶다는 충동이 강하게 일기 시작했다. 희망원에 발길이 부쩍 잦아진 나를 발견하고는 한동안 갈등에 빠졌다.
'이들이야 말로 예수님 사랑을 가장 애타게 기다리는 사람들 아닌가. 그렇다면 이들 속으로 뛰어들어가 그분의 사랑을 증거해야지 왜 머뭇거리고 있는가. 그런데 이들과 똑같이 먹고 자면서 살아갈 용기가 있는가….'
이 고민을 몇 사람에게 털어놓았다. 그러나 "그 험한 일을 왜 시작하려고 하느냐"면서 말리는 사람들뿐이었지 용기를 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 망설임 속에서 살아가던 어느 날, 교황대사님 전화를 받았다. "한번 만나고 싶으니 서울로 올라오라"는 용건이었다.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23] 마산 교구장이 되어
사제서품 15년 뒤 '천주의 성모마리아 대축일'에 주교서품
<사진설명>
김 추기경이 서정길 대주교, 최재선 주교, 노기남 대주교(왼쪽부터 시계 방향)의 인도를 받으면서 주교서품식장에 입장하고 있다.
'교황대사님이 나를 왜 갑자기 보자고 하시지?'
교황대사님(안토니오 델 주디체 대주교)이 나를 찾는 이유를 궁금해하면서 서울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차창 너머에는 겨울잠에 빠져 있는 들판을 깨우는 3월 초순의 봄기운이 완연했다. 성무일도서를 펴고 그날 독서를 읽었다.
"야훼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네 고향과 친척과 아비의 집을 떠나 내가 장차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리라. 너에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떨치게 하리라. 네 이름은 남에게 복을 끼쳐 주는 이름이 될 것이다…' 아브람은 야훼께서 분부하신 대로 길을 떠났다."(창세 12,1-4)
그때만 해도 라틴어로 성무일도를 바쳤다. 라틴어 실력이 부족해 평소 이해하지 못하는 구절이 많았는데 유독 그날 복음만은 가슴에 콕 박히듯 와닿았다. 그때 불연듯 어떤 생각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이 대목이 내게 무슨 암시를 주는 것은 아닌가?'
한동안 차창 밖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교황대사관에 도착했더니 대사님은 단도직입으로 말씀을 꺼내셨다.
"김 신부, 부산교구에서 마산지방을 떼어 새 교구를 설립하기로 결정됐네. 그리고 교황님이 자네를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하셨어. 물론 주교로도 임명하시고."
"예?"
"순명하겠는가? … 난 자네가 순명할 거라고 믿네."
"……"
"그럼 순명하는 걸로 알겠네. 축하하네, 김 주교."
난 뜻밖의 통보에 어리둥절했다. 대구에서 안동이 분할될 것이라는 소문이 돌기는 했지만 마산이 먼저 분할되고, 더구나 그 교구 책임자로 내가 지목될 줄은 미처 몰랐다.
사실 안동교구 분할과 새주교 탄생 소문이 돌 때 신부들 사이에서 한동안 내 이름이 거명됐다. 그러나 그것은 말 그대로 바람처럼 떠도는 풍문인 데다 신문사 일이 바빠서 그런 풍문에 신경쓸 겨를도 없었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당신은 주교가 될 것이다"라는 말을 여러 번 듣기는 들었다. 사제품을 받고 보름쯤 지났던가, 어떤 할머니가 찾아와 "당신은 이 다음에 주교가 됩니다"라고 말하고 돌아간 적이 있다.
언젠가 대구대교구장 서정길 대주교님을 모시고 독일 뮌헨 교구장님을 방문했을 때도 그쪽 비서신부가 "당신 얼마 후에 주교됩니까? 그때 내게 초대장을 보내주세요"하고 명함을 내민 적이 있다. 주교 임명통보를 받고 나서야 서 주교님이 그 전부터 말씀 중에 몇 번 암시를 하셨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 주교직을 어떤 마음으로 수락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야훼의 부름심에 응답한 아브라함처럼 순명하겠다는 마음 외에 무엇이 또 있었겠는가.
아무튼 사제품을 받은 지 15년 만에 또다른 성직의 길로 들어서게 됐다. 주위에서 주교서품식 날짜를 빨리 잡으라고 재촉했지만 난 최대한 늦춰서 5월31일로 결정했다. 신설 교구라서 아무 준비도 할 수 없을 텐데 내가 주교품을 받겠다고 서둘러 가면 신부와 신자들이 적잖이 당황할 것 같아서였다.
그리고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9월15)에 사제로 태어났듯이 5월 '성모성월', 그것도 마지막 날 '천주의 성모마리아 대축일'(지금은 1월1일로 이동)에 주교로 태어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성모님처럼 예수님이 가신 길을 고통 속에서 묵묵히 뒤따르는 것이 성직자의 길이지 않겠는가.
주교직 사목표어는 '여러분과 또한 많은 이들을 위하여'(Pro Vobis et Pro Multis)라고 정했다. 나는 성혈축성 경문에서 인용한 이 문구를 무척 사랑한다. 그래서 훗날 서울대교구장좌에 착좌할 때도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라고 해석을 조금 고쳐서 그대로 사용했다.
예수님은 성체성사를 세우시면서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 내 몸과 피를 내어주신다고 말씀하셨다. 세상 구원을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념하는 성체성사는 신비로 가득찬 미사 성제(聖祭)의 핵심이며, 그리스도교 생활 전체의 원천이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교회의 영적 전재산이 거룩한 성체 안에 내포되어 있다"(사제교령 제5항)고까지 가르치고 있다.
신앙인의 삶이란 게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예수님처럼 세상 사람들을 위해 나 자신을 온전히 내놓는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어떤 사람을 하찮은 존재로 무시할 때 "저 사람은 우리 밥이야!"라는 표현을 쓴다. 주님은 그 정도로 당신을 낮추고 비우면서까지 우리 밥이 되어 주셨다.
나 역시 예수님처럼 모든 것을 바쳐서 모든 이에게 밥이 되고 싶다는 생각에서 그렇게 정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 표어대로 살지 못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이 표어는 당시 어떤 수녀님이 권해준 것이다.
외가가 있던 마산은 소년 시절부터 자주 가본 고장이다. 그때 외가를 오가면서 본 풍경이 얼마나 아름다웠던지 누군가가 나한테 살고 싶은 고장을 물으면 마산하고 남해를 꼽으리라고 마음 먹었다. 그래서 그랬는지 마산으로 이삿짐을 옮기는 동안 기분이 좋았다.
1966년 5월31일 완월동 성지여중고 운동장에서 교황대사님 주례로 주교서품식이 거행됐다. 폭우가 쏟아질 것이라는 전날 일기예보와 달리 날씨가 무척 화창했다. 전국 주교님들이 다 참석하시고, 내외빈이 운동장을 가득 메웠다. 나중에 얘길 들어보니 국회의장, 도지사, 군사령관 등이 탄 차량을 경찰차가 사이렌을 울리면서 인도하는 바람에 마산 시내가 들썩였다고 한다.
난 그날 취임사에서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을 강조했다.
"우리 교구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 제시한 쇄신정신과 사목정신을 최선을 다해 신부들과 수도자, 신자들의 협동 하에 구현시켜 나가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요청을 우리가 확신하기 위해서는 복음의 빛 아래 깊이 반성하고 각성해야 합니다. 우리는 밖으로부터 도움을 기대하지 말고 우리 안에서 사도적 인재도, 물질적 면도 스스로 발굴하고 육성시키는 방향으로 완전히 생각부터 바꿔야 할 것입니다."
신자수 3만명, 본당 21개의 시골 교구 교구장생활이 드디어 시작됐다.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24] 마산 교구장 재직시절
첫 정 각별히 쏟은 교구로 2년 동안 혼신의 노력
<사진설명>
마산교구장이 되어 진해본당(현 진해 중앙동본당)으로 첫 사목방문을 나간 김 추기경. 신설교구 초대 교구장의 첫 사목방문이라서 그랬는지 시민들까지 거리에 나와 환영해 주었다.
신부는 아무리 고달퍼도 신자들과 희노애락을 나누면서 살 때가 가장 행복한 것 같다.
지금은 늦어서 단념했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신자들, 특히 가난한 이들과 동고동락하면서 살고 싶다는 바람을 간직하고 있었다. 지난 세월을 돌이켜보아도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안동본당(현 목성동본당), 성의중고교, 가톨릭시보사, 대구 희망원 등에서 사람들과 가깝게 호흡했던 시절이다.
마산교구장이 되어서도 본당 사목방문을 나갈 때가 가장 즐거웠다. 시내에 있는 본당이야 한나절이면 다녀오지만 시내를 벗어나면 하룻밤을 묵고 와야 했다.
당시 교구는 마산 진주 진해 등 5개시와 13개군을 관할했는데 먼 성당은 울퉁불퉁한 시골길을 서너시간 달리고, 때로는 산넘고 물건너야 하는 곳도 있었다.
시골 성당에 가면 신부들과 식사를 같이 하면서 사목에 관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밤이면 산새와 풀벌레 우는 소리를 들으면서 잠이 드는 게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 시간을 넉넉하게 잡고 교우들과 대화하다 보면 교구장이긴 해도 그들과 가까이서 호흡하는 사목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본당을 가급적 자주 찾아다니면서 신설교구의 기초를 잡아 나갔다. 기초작업이라고 해봐야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에 따라 평신도가 참여하는 사목협의회를 결성하거나 사제평의회를 조직하는 일 정도였다.
사제와 평신도간 대화 창구를 만들기 위해 신자 강습회를 열었던 기억도 난다. 그때 나는 신자들에게 평신도도 신부, 수녀와 똑같은 하느님 백성이라는 사실을 인식시키고, 더 나아가 그들에게 맡겨진 시대적 소명을 일깨워주려는 생각이 간절했다.
또 한시도 머릿속을 떠나지 않은 생각은 어떻게 기초를 놓아야 교회가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대로 살아갈 수 있는가 하는 점이었다. 그때만 해도 교회가 세상과 대화하거나 삶을 나누는 일은 전무하다시피했다. 세상 한가운데 있음에도 세상사에는 무관심한 채 교회를 위한 교회에 머물러 있었다.
"교회는 이 세상 안에 있으면서도 이 세상에서 온 것이 아니다"라는 말이 있다. 교회는 세상 안에 있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의 고통과 슬픔을 덜어주면서 하느님의 구원역사를 펼쳐나가야 하지만, 이 세상에서 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떤 세속적 욕심을 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은 교회가 변화하는 시대 흐름에 적응해서 세상 한가운데로 나가 봉사하는 하느님 백성으로 거듭 태어나자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이 먼저 쇄신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교구장 재직 시절에 제2차 바티칸공의회 폐막 후 처음 열린 세계 주교대의원회의(1967년)에 한국대표로 참석했다. 주교대의원회의(주교시노드)란 지역교회를 대표하는 주교들이 교황과 함께 교회와 신앙에 관한 제반 문제를 논의하는 회의다.
그런데 '주교대의원회의'라는 용어는 가톨릭시보사 재직 시절에 내가 만들어낸 것이다. 로마에서 '주교시노드'가 열릴 예정이라는 외신을 받아들고 이걸 독자들에게 어떻게 쉽게 전달할 수 있을까 궁리하다 '주교대의원회의'라는 용어를 만들게 되었다.
주교대의원회의에는 원래 서울교구장 서리로 계시던 윤공희 대주교님이 참석하기로 했었다. 그런데 윤 대주교님이 사정이 있어 참석하실 수 없게 되자 내가 대신 뽑혀 가게 됐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주재한 교황 바오로 6세가 소집한 제1차 세계주교대의원회의의 주 의제는 가톨릭 신앙을 보전하는 문제였다. 그 회의에서 나는 신자와 비신자간 결혼 문제에 대해 강한 어조로 발언했다.
대의원들은 신앙보전 차원에서 신자와 비신자간 결혼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강했다. 그러나 한국처럼 신자수가 적은 전교지방에는 적용할 수 없는 얘기였다. 그 당시 한국 신자들만 하더라도 비신자와 결혼하는 이들이 더 많았는데 그런 결혼을 '있어서는 안될 일'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 발언 기회를 얻었다.
"대의원님들은 성서 말씀을 편협하게 인용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자리에서 사도 바오로의 말씀(고린토 전서 7, 12-14)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떤 교우에게 교인이 아닌 아내가 있는데 그 아내가 계속해서 함께 살기를 원하면 그 아내를 버려서는 안 됩니다… 믿지 않는 남편은 믿는 아내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고, 또 믿지 않는 아내도 믿는 남편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신자와 비신자의 결혼 문제는 다시 해석할 필요가 있습니다."
내 주장은 다행히 좋은 반응을 얻었다. 그래서 시노드 교부들은 나중에 그 부분을 내 의견대로 손질했다.
한달간 꼬박 열린 주교대의원회의를 마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마산교구장 생활은 2년밖에 하지 못했지만 주교가 된 후 첫 정을 각별하게 쏟은 교구임에는 틀림없다. 남녀간에도 첫사랑이 잊혀지지 않는다고 하지 않는가. 2년 동안 나름대로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서 교구 기초를 닦았다. 하지만 아쉽게도 내세울 만한 치적이 없다. 아마 마산교구에서 「교구사」를 쓴다면 '초대 교구장 김수환 주교(1966.5∼1968.5)'라는 한 줄 외에는 달리 기록할 만한 사항이 없을 것이다.
난 마산교구를 떠나올 때 첫 정이 얼마나 깊이 들었던지 신부님들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 그런데 나와 헤어지는 게 섭섭하다고 눈물을 보이는 신부님은 없었다. 첫사랑은 대부분 짝사랑으로 끝난다고 하던가.
그 무렵에 가톨릭노동청년회(JOC) 총재주교를 겸임하고 있었다. JOC는 청년 노동자들의 성화와 노동현장 복음화를 위해 벨기에 카르딘 신부가 창설한 신심운동단체로 한국에는 1960년대에 전국으로 빠르게 확산됐다.
마산교구를 떠나기 4개월 전, 그러니까 1968년 초에 JOC와 관련된 중대한 사건이 발생했다.
그 사건은 길고 험난한 여정의 첫걸음이었다.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25] 강화도 심도직물 사건
내 생각을 지배하는 가장 큰 주제는 '인간'
<사진설명>
산업화 초기에는 상상할 수도 없는 노동탄압이 곳곳에서 벌어졌다. 사진은 1976년 서울대교구장 시절, 회사의 부당한 해고에 항의하는 동일방직 여공들을 만나는 장면..
내 생각을 지배하는 가장 큰 주제는 예나 지금이나 '인간'이다.
하느님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은 존엄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 권리와 존엄성은 언제 어디서든지 지켜지고 보호받아야 한다. 이같은 신념은 1970년대와 80년대를 숨가쁘게 헤쳐 나오는 동안 내게 절대적 판단기준으로 작용했다.
1968년 가톨릭노동청년회(JOC) 총재주교 자격으로 강화도 심도직물사건에 개입한 이유도 노동자의 인권을 옹호하기 위해서였다. 이 사건은 한국교회가 예민한 사회문제에 대해 주교단 성명을 통해 최초로 발언했다는 데 의미를 둘 수 있다.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1967년 5월 강화도 심도직물에 합법적 노동조합이 결성됐는데 이 과정에서 강화본당 JOC 회원들이 주도적 역할을 했다. 강화도에 있는 21개 직물회사 중에는 이미 노조가 결성된 곳도 있었다. 강화본당 전 미카엘 주임신부(메리놀외방전교회)는 회합장소를 빌려주는 등 노조활동을 간접적으로 지원했다.
그런데 그 회사 사장인 국회의원 김모씨는 노조간부를 해고한 데 이어 이에 항의하는 노동자들까지 공장 밖으로 내몰았다. 다른 회사 사장들도 이 틈을 타서 노조활동에 적극 가담한 노동자들을 해고했다. 해고된 노동자 16명은 한결같이 천주교 신자였다.
기업주들은 그것도 모자라 전 신부를 찾아가 노동자들을 선동한 용공분자라고 몰아붙이면서 공장 손실에 대해 책임지라고 협박했다. 또 천주교인은 누구를 막론하고 고용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결의문을 내걸었는가 하면, 심도직물 사장은 "전 신부의 부당한 간섭으로 공장이 마비되어 문을 닫는다"면서 휴업 결정을 내렸다.
회사 사주를 받은 노동자들이 성당으로 몰려와 시위를 벌이는 일도 있었다. 기업주들과 한통속이 된 강화 경찰서장도 '반공법 위반' 운운하면서 기업주들에게 정중히 사과할 것을 전 신부에게 종용했다. 이로 인해 지역 주민은 물론 일부 신자들 사이에서도 분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른 마당에 JOC 총재주교로서 현장에 가보지 않을 수 없었다. 강화도로 올라가면서 '장차 한국사회에서 수없이 일어날 충돌인데 첫 충돌이 교회와 연관되어 일어났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현장에서 파악한 사건 전말은 매우 복잡했다. 기업주들이 노조활동을 방해하려고 폭력배를 동원한 흔적이 나타났다. 노조 배후자로 지목된 아피(A.F.I.) 회원 송 고레띠씨는 폭력배들의 협박이 무서워 성당에서 나오지를 못했다. 노동자의 기본적 인권과 권리를 짓밟는 노조탄압,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사실 그때는 '노동자'라는 명칭조차 호사스러운 시절이었다. 정부 당국자들이 농촌 희생을 전제로 한 산업화정책을 밀어붙였기 때문에 농촌은 급격히 기울기 시작했다. 농사를 지어서는 자식 교육은커녕 끼니 잇기조차 힘들게 되자 농민들은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몰려들었다.
하지만 일자리가 부족하다 보니 그들의 노동력은 헐값에 팔려나갈 수밖에 없었다. 열악한 환경에서 터무니없이 낮은 임금을 받고 일하는 노동자들은 산업화정책의 희생양이라고도 볼 수 있다. 특히 강화도는 외부와 격리된 섬이라는 특성상 기업주의 횡포가 더 심했다.
대책을 논의하는 자리에 개신교의 조승혁 목사와 성공회의 리차드 신부도 참석했다. 조 목사는 교회가 노동문제에 개입해야 하는 이유를 조목조목 짚어가면서 일장 연설을 했는데 그 모습이 퍽 인상적이었다.
이튿날 오후 그 일행과 전등사에 잠시 바람을 쐬러 갔다. 그런데 어느 지점에서 우락부락하게 생긴 청년 10여명이 나타나더니 욕설을 퍼부으면서 협박하는 게 아닌가. 기업주들이 보낸 폭력배들이 틀림없었다. 우리가 대꾸를 하지 않고 피했길래 망정이었지 그러지 않았으면 물리적 충돌이 일어날 뻔했다.
'우리에게도 물리적 위협을 가하는데 힘없는 어린 여직공들에게는 얼마나 못된 행패를 부릴까?' 바람을 쐬러 나간 길인데도 가슴은 답답하기만 했다.
그날 미사에서 JOC 회원들에게 이런 말을 말했다.
"억눌리고 고통받는 노동자들을 위해 스스로 십자가를 진 연약한 소녀들과 JOC 회원들에게 존경을 표할 따름입니다. 여러분의 노력은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교회 역사가 증명합니다."
대책위원회가 주축이 되어 해결방안을 모색했으나 별 성과가 없었다. 인천교구장 나 굴리엘모 주교님도 관할지역 사목 책임자로서 메시지를 발표하고, 경기도 경찰국장실에서 사측 대표와 만나 협상하는 등 최선을 다하셨다. 그러나 시원스런 해답은 나오지 않았다.
이듬해 2월 주교단은 새로 부임한 교황대사 환영미사를 위해 대사관에 모일 예정이었다. 나는 나 굴리엘모 주교님과 함께 임시주교회의를 그 자리에서 개최하자고 주교단에 건의했다. 교회가 심도직물 사태에 대한 입장을 밝힐 필요가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마침내 2월9일 임시주교회의에서 주교님 14분이 서명한 '사회정의와 노동자 권익옹호를 위한 주교단 공동성명서'가 발표됐다. 성명서 요지는 다음과 같다.
"교회는 그리스도교적 사회정의를 가르칠 권리와 의무가 있다. 노동력 착취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범하기 쉬운 자본의 횡포이다. 따라서 주교단은 강화본당 신부와 노동자들의 정당한 활동을 지지한다. 인간 기본권은 어떤 이유를 막론하고 수호되어야 하기 때문에 주교들은 부당한 노사관계를 개선하는 데 적극 노력할 것이다."
이 성명서가 발표되고서야 정부가 사태수습에 나섰다. 그리고 6일후 해고자들이 전원 복직되는 것으로 사태는 일단락됐다.
이 성명이 사회정의와 노동자 인권신장에 획기적 계기가 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 이후에도 전태일 분신자살, 동일방직 파업사태 등 열악한 노동환경에서 생존권을 요구하는 노동자들의 절규는 끊이지 않았다.
이 성명이 한국교회의 첫 대사회적 발언이라고 밝혔듯이 교회가 울타리 너머 바깥 세상에 눈을 돌린 점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다시 마산으로 내려와 평소처럼 일상업무에 임했다. 잠시 후 '마른 하늘에 날벼락' 같은 일이 벌어지는 줄도 모른 채….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26] 서울대교구장에 오르다
'대주교 승품' 소식에 날벼락 맞은 듯한 충격
<사진설명>
김수환 추기경이 1968년 5월29일 서울대교구장좌에 착좌한 후 세상에 봉사하는 교회상을 교구민들에게 제시하고 있다.
1968년 4월 어느날이었다. 서울로 급히 올라오라는 주한 교황대사 히폴리토 로톨리 대주교님의 전갈을 받고 대사관에 들어섰다.
"어서 오시오, 김 주교."
"무슨 일 때문에 부르셨는지…."
"우선 축하부터 해야겠습니다. 교황 성하께서 김 주교를 서울대교구장에 임명하셨어요."
"예? 뭐라구요?"
"김 주교가 대주교로 승품되어 서울대교구장직을 맡게 됐다는 말이에요."
"… …"
그때 그 충격과 어리둥절한 상황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나.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라는 말보다 더 적합한 표현이 없을 것 같다. 정말이지 맑은 하늘에서 난데없이 내리치는 벼락을 맞는 충격이 그럴 것이다. 머릿속에서 맴돈 말은 '왜 하필 내가?'라는 반문뿐이었다.
"대주교님, 저는 주교된 지 2년밖에 안됐습니다. 주교단에서도 제일 막내입니다. 그런 제가 그 무거운 십자가를 어떻게 지고 가겠습니까?"
"그러나 누군가는 짊어져야 할 십자가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십자가입니다."
서울대교구는 노기남 대주교님이 은퇴하신 후 수원교구장 윤공희 주교님이 서리(署理) 자격으로 13개월째 이끌어가고 있었다. 후임자가 머지 않아 임명될 것이라는 소문이 퍼지자 서울대교구 신부들이 교구 출신 교구장 선임을 요청하는 서명운동을 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은 있었다. 당시 서울대교구는 빚에 쪼들리고, 사제들이 분열되는 등 복잡하게 얽힌 문제가 많았다. 그야말로 교회에서 종종 발생하는 문제와 갈등이 모두 불거져서 실타래처럼 얽혀 있는 상태였다.
수원과 서울을 오가면서 집무하시던 윤 주교님은 심적 고통이 얼마나 크셨던 지 "수원에 있다가 서울 땅을 밟으면 그때부터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고, 서울에 있다가 수원으로 넘어오면 '휴~'하고 한숨부터 나온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심지어 교구청에서 윤 주교님을 모셨던 수녀님은 "방 청소를 하면서 주교님이 흘리신 코피 자국을 수도 없이 봤다"고 훗날 털어놓기까지 했다.
"주님께서 주시는 십자가"라는 교황대사님 말씀에 더 이상 변명을 하지 못하고 대사관을 빠져나왔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주교가 된 지 2년밖에 안 된 '시골뜨기 주교'가 짊어질 만한 십자가가 아닌 것 같았다.
마산으로 내려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차창 밖을 내다보면서 깊은 생각에 빠졌다. 신록이 짙어가는 4월인데도 옷깃을 파고드는 찬바람같은 외로움이 엄습하기도 했다.
'하느님 뜻이 무엇인가? 주님, 감당키 어려운 십자가를 들려 낯선 타향으로 저를 보내시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실 심도직물사건에 대한 성명을 발표하느라 주교단이 교황대사관에 모였을 때 대사님이 나를 따로 불러 후임 교구장에 대한 자문을 구한 적이 있다. 그때 ○○○와 ○○○를 추천하고 싶다고 분명히 말씀드렸는데도 그 '화살'이 내게 돌아왔다.
새 교구장 탄생 소식은 4월27일 오후 늦게 로마와 한국에서 동시에 발표되었다. 그 전부터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서울대교구 수장(首長)이 누가 될 것인가에 대한 관심이 높았던 터라 언론에서도 이 소식을 일제히 보도했다. 별의별 반응이 다 나왔지만 한마디로 요약하면 '너무나 예상 밖'이라는 것이었다. 신문에 "김수환이란 주교가 누군지, 얼굴도 본 적이 없다"는 어떤 분의 반응이 실리기도 했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특히 서울 신부들은 서울에 아무런 연고가 없고, 또 교구장이 될만한 특출난 자격을 갖춘 사람도 아닌 내가 수도(首都) 교구의 교구장으로 온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게다. 하기는 나 자신도 상상하지 못한 파격 인사인데 그분들이야 오죽했겠는가.
언론사에서도 의외의 인물에 대한 관심반, 호기심반으로 인터뷰를 요청해 왔다. 지금 같았으면 말을 아꼈을 텐데 그때는 순진하게도(?) 묻는 대로 꼬박꼬박 대답했다. 그때 기자들이 나보다 교회 문제를 더 많이 알고 있어서 잠시 놀랐다.
"나는 이미 모든 것을 교회에 바친 사람입니다. 2년전 주교품을 받을 때 정한 사목표어 '여러분과 모든 이를 위하여'(Pro Vobis et Pro Multis)를 되새겨봅니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의 막중한 사명인 현실참여는 어떻게든 실천해야 하며, 서울대교구가 한국 일반정세에 비춰 지방교회에 봉사하는 교구가 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가톨릭시보 1968년 5월 5일자 인터뷰에서)
마산교구민들과 아쉬운 작별을 하고 서울로 올라왔다. 일전에 말한 대로 마산은 왠지 모르게 고향같은 느낌이 드는 고장이다. 주교가 된 후 첫정을 쏟은 곳이어서 그랬는지 신부들과 작별인사를 할 때 눈물이 나왔다. 그 눈물은 홀로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낯선 곳으로 떠나는 인간적 고독의 표시였는지도 모르겠다.
5월 29일 2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명동대성당에서 교구장좌 착좌식이 거행됐다.
내가 교황대사님 인도로 교구장좌에 앉자 교구사제 120명이 한줄로 걸어나와 내게 순명서약을 했다. 백발이 성성한 80 넘은 원로사제들이 맨 먼저 47세 새파란 교구장에게 무릎을 꿇고 순명을 서약하는 그 순간, 내 마음은 감동의 물결로 출렁거렸다. 난 그분들보다 더 몸을 굽히고 서약을 받았다.
가톨릭의 순명 전통을 모르는 외빈들은 그 광경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만일 비슷한 상황에 놓인 일반 회사나 기관이었다면 식장 밖에서 취임반대 시위가 벌어졌을 테니 말이다. 그런데도 성당 밖에 축하 플래카드가 걸리고, 원로사제들은 아들 뻘 되는 교구장에게 무릎을 꿇고 순명을 약속했다. 그게 가톨릭의 순명 정신이다. 그들이 진심으로 나를 받아들이는가, 아닌가 하는 것은 둘째 문제다.
그날 취임미사 강론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짐이 얼마나 무거우며, 또 그것이 우리 교회를 위해 어떤 뜻이 있는가를 잘 알고 있습니다. 또한 제가 모든 이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칠 때에 교회가 천주의 장막이 된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너희들이 모시고 있는 그리스도를 생활로써 증거해달라'고 하는 사회 요구를 명심해야 합니다. 이제 교회는 모든 것을 바쳐서 사회에 봉사하는 '세상 속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27] 서울대교구장 직무를 시작하며
많은 이들의 기도와 격려는 30년 교구장 시절 큰 힘
<사진설명>
주님과의 대화와 주위 사람들의 격려는 교구장 30년 세월을 헤쳐나가는 데 큰 힘이 되었다. 서울대교구장 시절 기도하고 있는 김 추기경.
요즘 차를 타고 어디를 가다 명동 부근을 지나치게 되면 나도 모르게 목을 빼고 성당 쪽을 쳐다본다. 30년 동안 살다 나온 집인데 어찌 마음이 가지 않겠는가.
그런데 이상하게도 '내가 저기서 30년을 살았구나'라는 생각 외에는 별로 떠오르는 게 없다. 나이가 들어 기억력이 떨어진 탓인지, 아니면 서울에 깊은 정을 붙이지 못한 탓인지 모르겠다.
난 아무래도 촌사람인 것 같다. 아무리 타향이라지만 30년 넘게 살았으면 제법 정이 들었을 텐데 그렇지가 않다. 솔직히 말해 명동은 풋내기 신부 시절에 살았던 안동이나 김천을 생각할 때 마음보다 애틋한 감정이 덜하다.
그렇다고 보따리를 싸고 싶을 정도로 서울에 정을 못 붙인 것은 아니다. 30년 넘게 몸담은 곳을 등지고 이 나이에 갈 곳이 어디 있겠으며, 설사 떠난다 한들 어디서 밥을 얻어먹겠는가.(아니, 다른 것은 몰라도 밥 얻어 먹을 걱정은 안한다. 나는 개띠인데 저녁에 태어났다. 그 시각은 개가 죽을 얻어먹는 때라서 그런지 먹을 복만큼은 타고난 것 같다)
서울대교구장에 취임해서 서울에 정을 붙이려고 한동안 무던히 애를 썼다. 속으로는 '어떻게 하면 하루라도 빨리 이 자리를 면할 수 있을까'라는 궁리를 했을지언정 겉으로는 서울 생활에 잘 적응하는 척 했다. 마음이 흔들릴 때면 '타향도 정들면 고향이라는 데 정을 붙여야지, 정을 붙여야지'라고 스스로 주문을 걸다시피했다.
그래서 취임 초기에는 저녁식사를 마치면 교구청에 근무하는 신부들과 둘러앉아 마실 줄 모르는 술도 두어 순배 돌려가면서 늦도록 이야기꽃을 피웠다. 또 어떤 날은 신부들과 차를 타고 서울 근교로 나가 저녁식사를 하고 돌아오곤했다. 신부들도 촌사람이 서울에 와서 외로움을 탈까봐 여러 모로 신경을 써주었다.
젊었을 때는 사람들과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받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누가 취미를 물어보면 "사람들하고 얘기하는 것"이라고 말했을 정도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도 아닌 것 같다. 요즘은 사람을 만나면 말수가 점점 줄어든다. 늙으면 사람을 붙잡고 자꾸 얘기를 하고 싶어진다고 하는데 다행스럽게도 그런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조금 심심한 것은 사실이다. 외로움이라기보다는 거창하게 표현해 인간 누구나 느끼는 실존적 고독일 것이다.
서울교구장이 되니까 몇 가지 달라진 점은 있었다. 그 전에는 볼 일이 있어 서울에 올라오면 잠잘 곳이 마땅치 않아 정동 프란치스코회관에 가서 숙박비를 내고 잠자리를 얻었다. 친구들이 있기는 했지만 그쪽 사정도 모르고 불쑥 찾아가는 것 같아 망설인 적이 많았다. 그런 내가 서울 한복판에 큼지막한 집을 얻어 잠자리 걱정을 덜었으니 얼마나 큰 변화인가.
신부들이 나를 보면 슬슬 피하는 것은 원치않는 변화였다. 교구청 신부들이야 매일 얼굴을 맞대고 사니까 그러지 않았는데 사제모임에 참석하거나 식사자리에 가면 사람들이 내 옆에 오는 것을 꺼려하는 눈치였다. 물론 어려워서 그러려니 하고 이해했지만 어떨 때는 속으로 '내가 무슨 몹쓸 전염병에 걸렸나, 왜 내 옆에 오려고 하지를 않지….'라며 서운한 마음을 홀로 달랬다.
나같은 촌사람은 서울에 처음 올라오면 한동안 어리둥절하다. 그리고 조금 살다보면 지리적 거리와 심정적 거리가 뒤바뀐 데 대해 혼란스러워한다.
예를 들어 마산 시내 어느 본당에 큰 일이 생기면 그 소식이 그날로 진주까지 간다. 마산 시내와 진주까지는 꽤 떨어져 있는 데도 말이다. 하지만 서울에서는 바로 옆 본당에서 일어나는 일을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아파트 주민들이 바로 건너편 집에서 일어나는 일도 모르고 사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시골 사람들은 그 같은 도시성(都市性)에 이질감을 느낀다.
아무튼 1998년 서울대교구장직에서 물러날 때까지 최선을 다해 일했다. 다른 사람들이 점수를 매긴다면 겨우 낙제점을 면할 정도겠지만 내 나름대로는 십자가를 지고 걷는 심정으로 살아왔다. 힘들도 지쳐서 그 십자가를 내려놓고 싶을 때도 많았다.
특히 1970년대와 80년대 사회 격동기의 한가운데 있을 때, 그로 인해 교회 안에서조차 압력과 비난이 쏟아질 때는 한 사제로서, 또 한 인간으로서 감수해야 하는 고통이 어떠했는지 말로 표현하기 힘들다. 1980년대 소위 'TK 아성' 때문이었는지 나를 잘 아는 고향 대구 사람들까지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낼 때는 괴로운 나머지 고독하기까지 했다.
한때는 교황님께 올리는 교구장직 사표서한을 쓰고 찢기를 몇번이나 반복했는지 모른다. 편지를 찢어버리고 나면 홀로 성당에 들어가서 "주님,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요?"라고 물었다. 그럴 때마다 나를 사랑해주시는 분들의 기도와 격려가 큰 힘이 되었다. 내가 주님께서 주신 십자가를 벗어던지지 않고 질질 끌고라도 갈 수 있었던 힘은 많은 이들의 기도에서 나왔다고 생각한다.
지금도 나는 의사가 처방해준 약에 의지해 잠들 때가 많다. 불면증은 교구장 시절에 얻은 병인데 아직도 그 약을 끊지 못하고 있다.
아무튼 길고 험난했던 서울대교구장 30년 생활은 교구의 자잘한 골칫거리와 부닥치는데서부터 시작됐다. 앞서 언급한 대로 당시 교구에 부채가 많아 교구장 서리로 계셨던 윤공희 대주교님은 마음 고생을 많이 하셨다. 그래도 윤 대주교님 재직시절에 빚을 많이 갚은 덕분에 전처럼 폭력배를 낀 채권자들이 찾아와서 횡포를 부리는 일은 없었다.
또 이런저런 이유 때문에 동성중고등학교에 교장이 부임하지 못하고, 몇개 수 도회는 혼란을 겪고 있었다. 가톨릭중앙의료원에서는 일부 의사들이 따로 병원을 차려 분열이 일어나고, 신부가 의과대학장으로 맡는 것에 대한 반대여론이 거셌다. 사제들이라도 일치했으면 괜찮았을 텐데 그렇지가 않았다.
내 나름대로 해결 실마리를 찾은 문제도 있지만 그보다는 '세월이 약'이라고 시간이 해결해 준 문제가 더 많은 것 같다.
교구장 취임 직후 박정희 대통령에게 인사를 하러 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의견이 있었다. 마침 학병시절 친구가 청와대에 근무하고 있어서 수월하게 약속날짜가 잡혔다.
약속 당일 아침, 난생 처음 대면하는 대통령이라 조금 긴장되기는 했다. 박 대통과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됐다. |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28] 내가 만난 박정희 대통령
1971년 성탄 자정미사 강론서 '비상대권' 비판
<사진설명>
박 대통령의 초청을 받고 청와대에 들어간 김 추기경(1969년 7월1일). 김 추기경과 반갑게 악수하는 소녀가 지금의 한나라당 박근혜 의원이다.
서울대교구장 재임 30년(1968년~1998년) 동안 박정희 대통령부터 김대중 대통령까지 여섯분의 대통령을 만났다. 그 30년은 알다시피 한국사회 격동기였다.
어떤 대통령과는 팽팽한 긴장 속에서 마주앉아 담판을 짓고, 또 어떤 대통령과는 그럭저럭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다. 청와대에서 만나자는 전갈이 오면 '제발 날 그만 불렀으면….'하는 마음부터 들게하는 대통령도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과는 1968년 6월 7일 교구장 취임 인사차 처음 만났다. 첫 인상은 듣던 대로 소박하고 소탈했다.
독일 유학시절 신문에서 본 사진, 그러니까 검은색 선그라스를 끼고 5·16 군사정변을 지휘하는 사진을 통해 그분을 알게 된 터라 선입견이 좋지 않았는데 꼭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첫 만남의 좋은 인상과 분위기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1969년 가을 나라 전체가 개헌논란으로 시끄러웠다. 두번째 임기 중반을 맞은 박 대통령은 장기집권 야욕을 버리지 못하고 3선 개헌안을 국민투표에 부쳐 관철시켰다. 결국 71년 4월 제7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나라가 점점 어둠 속으로 빠져드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언론은 말할 것도 없고 어느 누구도 서슬퍼런 군사독재정권의 비위를 거스를 엄두를 내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그해 말 박 정권은 "대통령에게 '국가보위에 관한 비상대권'을 주는 법을 의결해야 한다"고 국회에 으름장을 놓았다. 국회 동의없이도 긴급조치를 발동해 전권을 휘두르려는 의도였다.
성탄절이 다가오고 있었다. '하늘은 기뻐하고 땅은 즐거워하며'(시편 96, 11) 환희의 노래를 불러야 할 시기인데도 국민들은 공포정치의 암울한 현실에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괴로워하는 이들, 실의에 빠져있는 모든 이들과 이 성탄밤에 마주앉아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고통과 슬픔, 회의(懷疑)를 나누고 싶습니다"라는 말을 넣은 성탄 메시지를 발표했다.
성탄을 준비하는 내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성탄의 축복과 평화 메시지는 현실과 너무나 동떨어져 있었다. 하도 답답해서 대통령 측근 중에 내가 아는 분이 성탄 하루 전날 전방부대 위문을 간다고 하길래 같이 가자고 따라 나섰다. 그에게 한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비상대권 요구가 박 대통령 의지입니까, 아니면 주변 사람들 의지입니까?"
"글쎄요…. 대령령 각하 본인의 의지라고 보시면 됩니다."
전방부대에서 돌아와 하루 종일 고민에 빠졌다. 그 고민에 대한 최종 답을 얻은 시각은 성탄 자정미사를 한 시간 남겨둔 밤 11시였다. KBS TV로 전국에 생방송되는 그날 자정미사 강론에서 말문을 열었다.
"… 정부와 여당에 묻겠습니다. 비상대권을 대통령에게 주는 것이 나라를 위해서 유익한 일입니까? 그렇지 않아도 대통령한테 막강한 권력이 가 있는데, 이런 법을 또 만들면 오히려 국민과의 일치를 깨고, 그렇게 되면 국가안보에 위협을 주고, 평화에 해를 줄 것입니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마침 미사중계를 시청하고 있던 박 대통령은 그 충격적 발언에 버럭 화를 내고 방송국에 방송중지 명령을 내렸다. 그런데 중계방송 책임자가 자리에 없어서 즉각 방송이 끊기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한 후에 중단됐다. 박 대통령은 날이 밝는 대로 장관들을 소집해서 나에 대한 처리문제를 논의하려 했다는 얘기까지 내 귀에 들려왔다.
그런데 그날 아침 165명이 사망하는 대연각호텔 화재참사가 발생했다. 그로 인해 청와대에서 내 문제가 흐지부지 묻혔다. 그 사건의 여파로 방송 책임자가 회사를 떠나야 했는데 그 희생을 안타깝게 생각한다. 그때 누군가가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면 난 그 발언을 절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듬해 식목일에 박 대통령과 무려 11시간이나 함께 지내는 뜻밖의 기회가 찾아왔다. 박 대통령과 함께 진해 해군사관학교 졸업식에 참석했는데 기차에서 7시간, 진해 공관에서 4시간을 마주보고 있었다. 그 만남은 육영수 여사가 주선했는데 아마도 나와 대통령의 관계를 화해시키려는 뜻이 아니었나 싶다. 서로 의견을 나눌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분은 말할 기회를 좀체 주지않고 일방적으로 혼자 얘기했다. 그래서 '오늘은 듣자. 어떤 분인지, 어떤 통치철학을 갖고 있는지 들어보자.'고 마음먹고 거의 듣기만 했다. 기차가 천안 부근에 이르렀을 때이다.
"어이, 비서실장. 저것 봐! 나무가 없잖아. 저기가 어디야?"
"천안 어디쯤인 것 같습니다."(비서실장)
"추기경님, 저 뚝 좀 보십시오. 대한민국이 이래요!"
기차가 김천을 통과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주교님, 여기가 무슨 역입니까?"
"아마 대신역일 겁니다."
"아, 그래요. 쯧쯧…. 저 플라타너스는 전지(剪枝)를 하면 안되는데 저렇게 가지를 쳐버렸네요. 이봐 비서실장! 차장 불러서 저 전지를 누가 했는지 알아보라고 해."
더 놀란 것은 서울서 진해까지 가는 철로 양편에 경찰들이 500m 정도 간격으로 쭉 늘어서 있다가 기차가 지나가면 '받들어 총' 자세를 취하면서 기차 진행 반대 방향으로 돌아서는 광경이었다. 또 종이에 4대 강을 그려가면서 몇 십년은 족히 걸릴 법한 개발계획을 설명하는 그분 모습에서 이 나라가 1인 장기독재체제로 갈 것임을 예견했다. 다음날 혼자 서울로 올라오는 동안 무척 우울했다.
박 대통령은 우리 강산 구석구석 나무 한그루에까지 애정을 쏟는 분이었다. 동시에 그 모든 것을 자신이 가꾸고 돌봐야 한다고 생각할 만큼 집착이 강했다.
박 대통령을 생각하면 아쉬운 마음을 떨칠 수 없다. 제3기 집권에 대한 욕망을 꺾고 나머지 과제를 후임자에게 넘겼더라면 지금쯤 국민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국부(國父)가 됐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나라 민주주의도 훨씬 앞당겨졌을 것이다. 영부인 육영수 여사는 국모(國母)라고 칭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런 칭호를 받을만한 분이 아니었던가 생각한다.
박 대통령과 대화다운 대화를 한 것은 74년 지학순 주교가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돼 구금되었을 때이다. 역대 대통령들과의 만남 중에서 가장 뜻깊었던 그 만남은 나중에 자세히 얘기하겠다.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29] 병인박해 순교자 24위 시복식
1968년, 베드로 대성전에서 시복미사 집전 영광
<사진설명>
바티칸 성베드로 대성전에서 거행된 병인박해 순교자 24위 시복식에 참석한 김수환 추기경(단상 가운데). 이날 시복식을 계기로 한국교회에 순교자 현양운동이 빠르게 퍼져 나갔다.
나도 순교할 수 있을까? 순교자들처럼 피와 살이 튀는 끔찍한 고문을 받으면서도 천주님을 배반하지 않겠노라고 외칠 수 있을까?
순교도 하느님 은혜인 것 같다. 아픈 걸 못참는 내가 그 고통을 이겨낼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런 순간이 닥치면 하느님 은혜를 청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한국교회 순교자들은 참으로 위대하다. 그 시기에 천주신앙을 어떻게 받아들였기에 목숨이 경각에 달린 순간에도 "천주님을 배반할 수 없다"고 당당하게 외쳤을까. 한 교회사가가 "조선 관가의 순교자 심문기록에서 '사학죄인(邪學罪人) ○○○'라는 말만 빼면 그 자체가 훌륭한 교리서"라고 감탄했는데 나 역시 순교자 증언록을 읽을 때마다 감탄을 금치 못한다.
1968년 10월6일은 한국교회에 큰 축복이 내린 날이다. 그날 로마에서 병인박해 순교자 24위 시복식이 거행됐는데 나와 한국교회 대표단 136명이 그 감격스런 현장에 있었다. 당시 한국 대표단은 전세기를 타고 로마까지 날아갔다. 국내에 전세기가 없어 아르헨티나 전세기가 서울까지 와서 우리를 싣고 갔지만 민간인이 여객기를 전세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을 것이다.
그날 예상하지도 않았는데 시복미사 집전의 영광이 내게 주어졌다. 교황 바오로 6세는 미사가 끝나고 오후에 베드로 대성전에 입장해 24위 시복을 선포하셨다.
우리 선조들은 신앙을 지키느라 모든 것을 버리고 깊은 산속으로 숨어들어 곤궁하기 이를 데 없는 나날을 보냈다. 그리고 관헌에게 붙잡혀 매맞고 굶주리는 등 온갖 수난을 겪다 입가에 '봄바람 이는 미소'를 머금고 숨을 거두셨다. 그분들에게 하느님은 생의 전부였다. 그러하기에 산간벽지로 쫓겨다니고, 굶주리고, 울고, 짓밟히다 마침내 목숨까지 내놓으신 것이다.
그런 선조들이 복자품에 오르는 감격스런 장면을 지켜보는 신자들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흐르는 것은 당연했다. 유럽에 사는 교포신자들까지 합쳐 한국인 500여명이 모인 그날은 바티칸 전체가 아시아의 변방, 한국의 날이었다.
요즘 젊은이들은 순교를 까마득한 옛날 이야기라고 여기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가깝게는 우리의 조부, 멀게는 증조부와 고조부가 걸어온 길이다. 따라서 순교자의 후손임을 자랑하는 우리가 선조들이 목숨까지 내놓고 지킨 하느님을 더 극진히 믿고 섬기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면 우리가 과연 순교자들처럼 세상 부귀영화와 목숨을 다 버린다 해도 하느님만은 버릴 수 없다고 장담할 수 있겠는가. 최소한 주일에 돈 벌거나 먹고 즐기는 일보다 하느님 섬기는 일을 우선시하면서 살고 있는가. 우리 마음은 과연 어디에 있는지 성찰해보지 않을 수 없다.
특히 내게 순교는 바로 할아버지 얘기다.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고 독실한 신앙생활을 하시던 조부 보현(요한)공은 병인교난(1866-68년)때 충남 논산에서 붙잡혀 서울 감옥에서 아사(餓死)하셨다. 조모(강말손)도 함께 체포됐으나 임신 중이어서 석방됐는데 감옥에서 풀려나 낳은 아기가 내 아버지 김영석 요셉이다.
천주교로 인해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한 집안에서 유복자로 태어난 아버지는 옹기장수로 전전하면서 참으로 가난하게 사셨다. 어머니 역시 배우자의 믿음만 보고 몰락한 집안으로 시집와서 거의 평생토록 옹기와 포목행상으로 살림을 꾸리셨다.
난 어릴적 어머니 무릎에서 할아버지 순교 얘기, 할머니의 서럽고 고달픈 옥바라지 얘기를 수도 없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어머니는 내게 성인전을 읽어주면서 "너는 커서 신부가 되라"는 말씀을 하셨다. 겉으로 내색을 않하고 살아왔지만 내 몸에 순교자의 피가 흐른다는 사실을 한시도 잊어본 적이 없다.
아무튼 한국 신자들은 시복식 다음날 교황님을 특별 알현하는 영광까지 얻었다. 알현을 기다리는 신자들의 기대와 설레임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때만 해도 한국 신자들이 바티칸 순례를 하는 것도 어려웠지만 교황님을 알현하는 것은 더욱 힘들었다. 교황님이 알현장에 들어오시고 나가실 때 신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연세든 신부님들까지 교황님 옷자락이라도 만져보고 싶어서 아우성치듯 손을 뻗었다. 그런데 난 한국 대표교구 책임자랍시고 교황님을 옆에서 모셨으니 얼마나 큰 특권을 누린 것인가.
교황 바오로 6세는 어떤 의미로 나에게 아버지 같은 분이시다. 나를 주교와 대주교, 이어 추기경으로까지 임명해주신 데다 한국교회에 대한 애정이 특별했던 분이시다. 교황님은 나를 만날 때마다 "한국교회를 특별히 사랑한다"라고 말씀하셨다. 처음 그런 말씀을 하실 때만 해도 의례적 표현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가 않았다.
그 각별한 애정은 아시아 추기경들이 한자리에 모여 교황님을 뵙는 자리에서 확인했다. 난 나이가 제일 어려서 교황님께 인사를 드리는 순서가 맨 끝이었다. 그런데 다른 추기경들과 의례적 덕담을 주고받으면서 인사를 하시던 교황님이 내게는 또다시 "한국교회를 특별히 사랑한다"라고 말씀하시는 게 아닌가.
그분의 각별한 애정에 대해 수차 생각해보았지만 아직도 그 연유를 모르겠다. 한국교회가 선교 역사상 유례없이 평신도의 힘으로 세워진 데다 해가 다르게 성장하는 모습이 믿음직스러워서 그러셨던 것으로 짐작할 따름이다.
시복식에 참석하고 돌아온 후 산적한 교구 현안을 처리하느라 정신없이 바쁘게 지냈다. 교구 부채를 갚아나가는 일은 만만치가 않았다. 심지어 미국까지 건너가서 "형편이 풀리는 대로 갚을 테니 조금만 더 참아달라"는 사정을 하고 돌아와야 했다.
골치 아픈 일이 잇따라 터질 때는 '아~ 이 십자가를 언제 벗나'라는 탄식이 절로 나왔다. 그러나 지도자이기에 그런 탄식조차도 사람들 눈을 피해서 해야 했다.
나는 늘 도망갈 궁리를 하면서 살아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소신학교 입학 때도 그랬고, 주교로 서품될 때도 그랬다. 우스운 얘기지만 주교품을 받기 직전에 주교서품식 전례서 맨 끝장에 나와있는 주교직위 박탈사유와 절차를 유심히 읽어본 적이 있다.
그런데 그 무렵 도망갈 길이 완전히 막히는 사건이 발생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내게는 도망을 못가게 아예 족쇄를 채워놓는 일이었다.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30] 추기경으로 임명되다
한국교회가 세계에서 인정받은 것 가장 기뻐
<사진설명>
로마에서 추기경 서임식을 마치고 귀국하자 교회 안팎에서 축하가 쇄도했다. 성신중고등학교 교정에서 봉헌된 축하미사에 노기남 대주교(왼쪽), 서정길 대주교와 함께 입장하는 김 추기경(가운데, 1969.5.20)
1969년 2월 회의차 로마에 갔다가 미국을 거쳐 3월27일쯤 일본에 도착했다. 그때는 미국에서 한국에 들어오려면 일본을 경유해야 했다.
도쿄에 내린 김에 상지(上智)대학에 계시는 은사 게페르트 신부님을 찾아뵙고 문안을 올렸다. 그리고 후지산 자락에 있는 작은 자매회 수녀원에 가서 하룻밤 신세를 졌다. 다음날 서울행 비행기를 타러 공항에 나가려고 아침 일찍부터 서둘렀다.
동행한 장익 비서신부(현 춘천교구장)와 가방을 들고 막 나서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잠시후 한 수녀가 "대주교님, 전화 왔어요" 하며 나를 불렀다.
"이상하다. 나한테 걸려올 전화가 없는데…"라고 중얼거리면서 수화기를 받아들었다. 전날 찾아 뵌 게페르트 신부님이었다.
"아, 김 대주교, 축하해요"
"축하라뇨, 오늘 제 생일도 아닌데 무슨 축하입니까?"
"김 대주교가 추기경이 됐어요"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추기경! 교황님이 당신을 추기경에 임명하셨어요."
"무슨 농담이세요"
"아니라니까. 여기 신문에 당신 이름이 이렇게 났어요."
"…… "
수화기를 들고 한동안 얼빠진 사람처럼 멍하니 서 있었다. 정신을 가다듬고 나서 내가 한 첫 말은 "임파서블(impossible, 불가능한)"이었다. 정말 불가능한 일이었다. 상상도 해본 적이 없는 일이었다.
장 신부가 걱정스런 눈빛으로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잠시 머뭇거리다가 "허허, 허허, 장 신부, 내가 추기경이 됐데"라고 겨우 한마디 했다. 수녀원 앞에서 택시를 못타고 100m 정도 걸어서 성심수녀원까지 내려갔다. 그곳에서 교육을 받고 있는 한국 수련자들에게 얼굴이라도 비치고 갈 참이었다.
그런데 그곳에 있는 일본 수녀와 한국 수련자들이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 꽃다발까지 안겨주면서 축하해주었다. 수녀들이 그 짧은 시간에 꽃다발을 준비한 것 역시 '불가능한' 일이었다. 무엇에 홀린 기분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은사신부님이 내 숙소를 수소문하는 동안 얘기가 퍼진 것 같다.
로마에 머무는 동안 교황님은 물론 인류복음화성장관 아가자냔 추기경님도 그에 대한 암시를 전혀 주시지 않았다. 그러니 어리둥절한 것은 당연했다.
아무튼 김포공항에 도착했더니 노기남 대주교님과 주한 교황대사 로톨리 대주교님 등 300여명이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 '우리의 영광 김수환 추기경 탄생'이라고 쓴 플래카드를 들고 서 있는 신자들을 보고 나서야 조금 실감할 수 있었다. 한국교회는 그 전날 외신보도를 통해 나보다 먼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때 은사 신부님이 출발 직전에 전화를 해주셨길래 다행이었지 그걸 모르고 공항에 내렸더라면 웃지못할 해프닝이 벌어졌을 것이다.
추기경은 알다시피 교황 다음가는 고위 성직자다. 그런데 난 추기경 임명통보를 받는 순간 자리의 높고 낮음을 떠나 한국교회가 세계교회에서 인정받았다는 사실이 가장 기뻤다. 그 인정은 피를 흘리며 돌아가신 순교자들의 도우심과 신자들의 희생봉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믿었기에 감사기도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도망갈 길이 정말 막혔구나' 하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소신학교 입학, 일본유학, 사제수품, 주교임명 등 신상에 어떤 변화가 일어날 때마다 결국에는 그 변화를 받아들이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도망갈 방법은 없을까'라는 궁리를 떨치지 못했다.
아시아에서는 중국에서 추기경이 가장 먼저 탄생했고 이어 인도, 일본·필리핀, 인도네시아 순으로 추기경이 나왔다. 그러니까 아시아에서 그 다음 추기경이 한국교회에서 나온 것이다.(물론 대만의 폴 유핀 대주교, 필리핀 세부의 줄리오 로살레스 대주교도 나와 같은 시기에 임명됐다) 서울대교구 신부와 신자들뿐 아니라 지방교구에서도 이 사실에 함께 기뻐했다.
주교가 추기경이 됐다고 해서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다. 임명된 후에 '추기경이 뭐하는 사람인가'하고 법전을 뒤져보았더니 복장이 순교의 피를 상징하는 붉은색으로 바뀌고, 주교도 들어갈 수 없는 일부 봉쇄수도원에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는 정도였다. 추기경이라고 해서 어떤 특권이 있는 것은 아니다. 물론 교황선출권은 의미있는 권한이다.
옛날에는 추기경을 '교회의 왕자(Prince of Church)' 또는 '교황의 왕자'라고 부르고 '전하(殿下)라는 존칭을 붙였다고 한다. 그래서 추기경은 로마에 가면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하지 않고 벤츠 승용차를 타고 다니는 게 관례였다.
나도 추기경이 된 직후 로마에서 바티칸 소유의 벤츠를 이용해보았다. 바티칸에서 내주는 벤츠 뒷좌석에 앉아 한껏 폼(?)을 잡기는 잡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공짜가 아니라 이용자가 요금을 내는 것이었다. 일반 택시요금보다 배가 비쌌다. 그래서 그 후부터 택시를 이용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을 하나씩 하나씩 실천하는 시기라서 바티칸도 얼마 안가 벤츠를 처분했다.
추기경 서임행사는 4월28일부터 며칠간 로마에서 거행됐다. 나와 함께 추기경에 임명된 33명은 지정장소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교황특사가 들고 온 임명장을 받았다. 난 우르바노대학에서 유핀 추기경, 로살레스 추기경, 그리고 독일 유학시절 은사인 훼프너 추기경과 함께 임명장을 받았다. 그런데 내가 존경하는 훼프너 추기경님이 임명 순서상 내 뒤였다. 그래서 "교수님, 제자가 먼저 받아서 죄송합니다"라고 석고대죄(?)하면서 임명장을 받은 기억이 난다.
그리고 교황님이 수여하는 팔리움, 관(冠), 반지를 받고 6월1일 교황님과 다 함께 성베드로대성전에 모여 감사미사를 성대하게 봉헌했다. 새 추기경들이 대성전에 줄지어 입장할 때 길 양옆에서 박수를 치던 사람들 중에 나를 보고 깜짝 놀라는 이들이 많았다. 다들 연세가 지긋한 새 추기경들 속에 47세 앳된 동양인이 끼어 있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나는 당시 최연소 추기경이었다.
요즘 한국교회에 새 추기경이 탄생하길 학수고대하고 있다. 그 소망을 이미 여러차례 교황청에 전달한 상태이다.
* 2부로 이어집니다.
<자료출처 : 김수환 추기경님 홈피에서 가져온 글입니다>
첫댓글 주님 영원한 안식을주소서
김수환 스테파노추기경님 사랑합니다-
평안한 안식되소서..감사합니다
김수환스테파노 추기경님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