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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il on canvas, 158 x 133 cm.Museo del Prado, Madrid
St. Bernardus, D. E SAINT BERNARD OF CLAIRVAUX ABBOT, DOCTOR OF THE CHURCH
그의 저서와 신심은 오늘의 신자들에게도 깊은 감명을 준다.
라는 칭호와 더불어 교황 비오 8세에 의하여 교회박사로 선언되었다. 1153년 세상을 떠났다.
1447.Wood, 69 x 105 cm.National Gallery, London
사랑은 다른 것 때문이 아닌 그 자체로 마음에 드는 것입니다. 사랑은 그 자체로 공로도 되고 상급도 됩니다. 사랑의 열매는 사랑하는 것-바로 그것입니다.
사랑은 보배로운 것입니다. 자신의 기원으로 돌아서며 자신의 원천으로 되흘러가야 합니다. 사랑을 통해서만 창조주께 보답해 드릴 수 있습니다. 그래도 사랑을 통하여 같은 방법으로 보답해 드릴 수 있습니다.
사랑하실 때 사랑을 받으시는 것 외에 다른 목적을 두지 않으십니다. 사랑 자체이신 분의 신부가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신부는 보답으로 사랑을 줌으로써 사랑에 응답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영원한 사랑의 원천에서 흘러 나오는 그 분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영혼과 말씀이신 그리스도, 신부와 신랑, 피조물과 창조주, 꿀과,온유함에 있어서 어린 양과, 순결에 있어 백합화와, 광채에 있어 태양과, 혼인하는 이의 욕망과 애통하는 이의 갈망과 사랑하는 이의 열정과
힘을 다해 사랑한다면 부족함이 없고 있을 것이 다 있습니다. 이 정도 사랑을 베푸는 사람은 사랑을 받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말씀이신 주님께서 먼저 또 더 위대하게 사랑하셨다는 것을 누가 의심하겠습니까? 세기의 위인, 그는 오늘날 ’세기의 골키퍼’ , ’세기의 화해자’ 너무도 많은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젊어서부터 은둔하는수도 생활로 돌아가고자 하는 열망을 갖고 있었다. ’윔우드’골짜기 근처에 새집을 짓기에 충분할 정도로 생기를 되찾았다. 열성적인 이 젊은이는 타인에게보다도 자기 자신에게 많은 요구를 했다.
1486.Oil on panel, 210 x 195 cm.Church of Badia, Florence. "위험과 의심과 어려움에서 성모님을 생각하고 성모님을 부르시오. 그분의 발자취를 따라 걸어가는 것을 소홀히 하지 마시오.
그분이 당신 손을 잡아 주시는 한 당신은 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성베르나르도)
지금도 클레르보-명랑한 골짜기라는 수도원의 성당 안의 동정 성모 마리아 제단 앞에 묻혀 계신 성 베르나르도는 새로운 용기를 얻은 이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하느님과 성모께 대한 신심을 가르치며 열심을 일깨운 베르나르도는 베르타르도에게 있어서 이것은 최상의 행복이었다.
어머니의 죽음으로 많은 충격을 받고서 수도 생활을 추구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불고뉴의 군영에 입대중인 형들을 방문하는 도중, 그는 원래 시토회의 창설자 3명 가운데의 한 명이 아니었지만 흔히들 그를 시토회의 창설자로 부른다.
이 성이나 영토나 모든 아버지의 재산은 모조리 너의 것이 되는 거야"라고 말하니까,
(성 로베르토, 성 알베리코, 성 스테파노 아빠스) 이 수도원을 지원하는 자는 평소에도 그다지 많지 않았고
자진하여 다른 고행도 많이 행했다.
"베르나르도야, 너 무엇하러 여기 왔느냐( Ac quid venisti)?"는 글씨를 앞에 놓고 자신을 격려했다.
and then remind himself of his main duty - lead a holy life. 그의 성덕이 수많은 제자들을 사로잡을 수 있었다. 당시 68개의 시토회 수도원의 모원이 되었다.
이로써 그는 놀라운 명성을 얻었다. 종종 그 교회에 서한을 보내어 훈계나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 회교도의 수중에서 탈환하는 십자군을 위한 설교일 것이다.
마침내 십자군 전쟁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모든 것을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인내하며, 교회에 손해를 입히지 않고, 그를 랑그독에 파견해 알비파 이단을 대항해 설교토록 했다.
클레르보에 부지런히 돌아와서 사랑하는 수도 생활에 골몰했다.
1152년 베르나르도는 병상에 눕게 되었는데 마침 메츠시의 귀족과 시민들 사이에 투쟁이 일어나자, 끝내 쌍방을 화해 시키는데 성공했다.
교황 비오 8세가 그를 1830년에 교회 박사로 선언했다.
"마지막 교부"(Last of the Fathers of the Holy Church)로 불리기도 한다. ☆시토회
국외 시토회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였다. 이것은 라 트라프 (La Trappe)의 수사들에 의해 실현되었다. 이 전의 시토회는 `성 시토회’로 존속하였다. 로마에 거주하는 시토의 아빠스는 엄률시토회의 총장이 되었다.
이 때 `트라피스트’란 이름이 생겨났다. (가톨릭대사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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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름다운글 감사함니다.
아름다운글 감사함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