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애불의 기원은 인도 석굴사원이 시원이며, 그 영향으로 중국을 거처 한반도에도 마애불을 조성하였다.
인도나 중국은 바위가 사암 계통이어서 깊숙한 만든 석굴사원이 많이 있지만 한반도는 바위가 화강암 계통이라 단단하여
동굴 형태의 마애불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고 본다.
다만 삼각형 모양이나 약간 깊숙히 파임 정도 이거나 자연적인 바위굴을 이용한 것이 보이고 있다.
그리고 산악에 마애불을 많이 조성 하였는데 그 이유는 전통적인 산악사상과 큰 바위를 숭상하는 것이
산악에 마애불을 조성 한것으로 보인다.
그중에 경주 남산이 신라시대와 통일신라의 마애불이 체일 많이 남아 있으며 조선 말이나 근대의 마애불은
서울 주위나 북한산에 마애불을 많이 조성 하였다.
그리고 지방에는 도시 주위에 있는 풍수적으로 진산에 마애불을 조성하는 느낌이 들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경남 양산에는 4좌의 마애불이 있으며, 2좌는 고려시대이고 2좌는 근대의 작품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 중에 부산 범어사가 있는 금정산에 양산 가산리 마애불이 있으며, 범어사에서 1 시간 등산을 하면 볼 수있으며,
낙동강이 훤히 보이는 자리에 불상을 새겨 놓았다.
가산리 마애여래입상은 높이 12m의 선각(線刻) 마애불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 편단우견(偏袒右肩) 차림으로 오른손은 오른쪽 가슴 앞에서 정면을 향해 살짝 틀어 시무외인(施無畏印)을 하고 있고, 왼손은 무릎 근처까지 내려 손가락으로 바닥을 가리키는 듯한 모습을 취하고 있다. 육계는 자연암반의 튀어나온 부분을 이용한 듯 볼록하게 입체적으로 솟아있고, 그 외에는 모두 선각으로 처리되어 있다. 나발이 표현되지 않은 머리카락 부분은 마치 머리 타래를 얹은 듯 둥그스름하게 부풀어있다. 이렇게 강조된 머리카락은 일본의 청량사(清涼寺)에 있는 북송대 제작한 목조석가불입상과 유사하다. 지그시 감은 눈에 비해 크고 넓적한 코와 윤곽선이 또렷한 입술이 강조되어 있다. 신체의 양감을 적극적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목 둘레로 삼도가 있고, 편단우견으로 드러난 오른쪽 어깨와 팔뚝은 유려한 볼륨감이 드러나 있다. 손가락은 선각 마애불의 특성답게 미묘한 손의 움직임을 회화적 필선으로 정교하게 묘사했다. 하체로 흘러내리는 옷자락은 양 허벅지를 따라 각각 옷 주름을 형성하며 흘러내리는 우전왕상식(憂塡王像式) 착의법을 보여준다. 이렇게 흘러내린 옷자락은 은행잎 모양으로 접히다가 아래로 내려가면서 역삼각형 모양으로 길게 늘어져 있는데, 이러한 착의법은 통일신라시대에 제작된 경주 굴불사의 사면석불에서도 확인되며 고려불화에 등장하는 부처의 착의법으로도 널리 유행했던 방식이다. 발은 오른발만을 잘 보이게 표현하였는데, 양감을 부여하며 의도적으로 원근감을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그 다음으로는 호계리 마애불이다. 예수상으로 표현 되고 있으며, 마을 깊숙히 있고 도식적인 느낌이 강한 마애불이다.,
직사각형의 커다란 바위 중앙에 표현된 좌불상이다. 오른쪽 어깨가 떨어져 나갔으며 오른손과 무릎 그리고 발 역시 심하게 마모되어 세부는 명확히 알아보기 어렵다.
불상이 표현된 바위 밑에는 동굴이 있어 현재는 ‘석굴암 굴법당’이라 이름 붙여진 법당이 조성되어 있다. 주변에는 많은 양의 기와 편이나 분청사기 편 등이 흩어져 있어 조선 초기까지도 절이 운영되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머리는 굵은 나발(螺髮: 부처의 머리카락. 소라 껍데기처럼 틀어 말린 모양)로 표현되었다. 앞쪽으로 두 줄 정도만 남아 있고 그 위로는 마모되어 나발의 표현이 희미하다. 그리고 마치 두건을 쓴 듯 육계(肉髻: 부처의 정수리에 있는 뼈가 솟아 저절로 상투 모양이 된 것)는 불분명하다.
전체적으로 선각(線刻: 선으로 새김.)인 데 비해 양각한 얼굴은 넓고 큰 편이며 백호공(白毫孔)에는 감입(嵌入: 장식 따위를 박아 넣음.)한 흔적이 남아 있다. 눈은 한 줄의 깊은 음각선으로 옆으로 길게 표현하였으며, 코는 크지만 입은 작은 편이며 얼굴에는 희미한 미소가 감돌고 있다.
넓은 어깨에는 통견(通肩: 어깨에 걸침.)의 법의(法衣: 중이 입는 가사나 장삼 따위의 옷)를 걸쳤다. U형으로 길게 트인 옷깃 사이에는 가슴을 가로지르는 엄액의(掩腋衣: 大衣 안에 윗內衣로 입던 옷으로,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 겨드랑이로 걸쳐 입음.)가 드러나 있다.
그 다음은 원효암 마애불이다.
천성산 꼭대기에 있는 마애불로 회화성이 강하여 세운시기 정확하게 남아 있는 마애불이다
삼존상을 새겼으며 아미타불 삼존상이다.,
아미타삼존의 상단부에는 음각으로 "南無阿彌陀佛"(남무아미타불)이라고 깊이 새겨져있으며, 각 글자의 너비는 약 14cm정도이다.
그리고 우협시보살상의 우측에는 세로로약 4cm 정도의 너비의 글자가 음각으로 "世尊應化二千九百三十三年四月 日"(세존응화이천구백삼십삼년4월 일)이라고 새겨져 있다. 또한 삼존의 아래에는 '姜膺秀'(강응수), 삼존이 새겨진 암석의 향좌측 측면 암석에는 향좌부터 '李瑀榮'(이우영), '安珪行'(안규행), '郵創玉'(우창옥), '鄭基南'(정기남)의 발원자명이 음각되어 있다.
원효암 법당 동쪽면의 암석에 마애아미타삼존불입상이 조각되어 있다. 마애불의 특성상 외부에 노출되어 있어 전체적으로 이끼가 많이 끼여 있으며, 특히 아미타여래의 왼쪽 발과 연화대좌, 그리고 우협시보살상의 군의 부분이 특히 심한 편이다. 아미타여래의 나발·오른 손, 우협시보살상의 얼굴 등이 약간 마모되었으며, 삼존의 허리 부위에 횡으로 금이 가 있으나 전반적으로 상태는 양호하다.
마지막으로 통도사 자장암 마애불이다.
자장암에는 삼존불이 있으며, 좌우 협시를 새긴 바위가 다른 마애불과 달리 꺽여 만들어 특이하게 보이여
불감형식의 마애불이다.
조각에 불화를 접목한 중요한 사례에 해당. 근대기의 출발점에 있는 불교 조각이며 인근에 조성된 근대기 회화성 짙은 마애불상의 제작에도 많은 영향을 주고 있으며, 19세기 유행한 불화의 초본을 바위에 옮긴 것처럼 불화의 시대적 특징이 잘 드러나 있으며 희소성의 가치가 있다. 그리고 발원자와 시주자 이름이 새겨져 있고 년대를 정확히
알 수 있는 마애불이다.
옥산 이희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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