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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고추를 다 따서 널어놓고 오후에 서울로 갔다.
오늘 11시에 영농.생활수기 시상식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장인 어르신, 친구 부부 둘, 우리방 회원이면서 후배인 오치스,
조카와 조카며느리, 손녀해서 모두 12명이나 화환을 들고 와 주었다.
농사꾼이 재복은 없어도 인복이 있음을 이 기회에도 확인..ㅎㅎㅎ
근데, 카메라 기자를 잘못 선정한것 같다-..-
쩌어 멀리서..뭘 찍긴 찍은 모양인디..에공~ ㅎㅎㅎ
8월 12일 농민신문에는 기사가 이렇게 나와 있었다.
<수기 전문>
좀 길어요!! 카페에 써 놓았던 귀촌이야기와 중복되는 부분도 많고..
다만, 수기라는 것이 좀 드러내도 괜찮은 부분을 적는다는 것,
정말 아픈 부분은 밝힐 수 없다는 것도 알면서 함 읽어보시길!
내 삶의 정체성을 찾아서
귀농을 생각하며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보따리를 싸서 서울 장안에서 우리나라에서 4대 부자로 소문난 집 중의 한 집에서 머슴살이(직장생활)를 시작했다. 사실 머슴살이란 생각도 귀농하기 전, 고뇌의 시간에 떠오른 말이지 그간 머슴살이도 주인살이 만큼이나 즐겁고 재미나게 하였다. 머슴과 주인을 교집합으로 보지 않았고 합집합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세경을 받고 머슴살이는 하고는 있었지만 ‘내가 주인이요, 내 집이요’하는 생각으로 참으로 열심히 그리고 즐겁게 생활하였다는 얘기다.
그러던 중 예전에 가슴에 뿌려두었던 귀농이라는 싹이 내 몸에서 슬슬 자라기 시작했다. 그때가 마흔 두 어 살 때의 일이다. 개미 쳇바퀴 도는 듯한 하루하루, 온 종일 컴퓨터에 앉아서 주식 시세나 보고, 가끔 인터넷이나 보면서 그리고 어린머슴들이 일을 잘 하는가 않는가를 관리하며 산다는 것이 참으로 무료하였다. 점심시간에 점심을 먹는 것이 부끄럽기도 하고, 주인이 주는 두둑한 세경도 내가 노력한 대가 이상으로 받는 것 같아 미안하기도 했다. 더구나 바로 위 상머슴과 부대끼는 것도 싫었다. 머슴살이에 대한 회의가 나날이 깊어갔다.
그러면서도 귀농관련 홈페이지에도 들락거리고 절에서 하는 수련회도 두어 차례 가보면서 스스로의 정체감을 확인해 보기도 하고, 귀농에 관한 책도 보면서 과연 나도 시골에 가면 살아갈 수 있을까하는 생각을 많이 하였다. 그러다가 먼 학창시절 보았던 갈매기 조나단을 다시 만나면서, 그 동안 내가 살아온 몸짓이 결국은 어부의 뱃전에 서성이면서 어부가 던져주는 고기를 받아먹기 위한 것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천규석 선생님이 말한 ‘배부른 머슴으로 살 것인가, 배고픈 주인으로 살 것인가 ?’에 대한 고민이었다. 그래서 주린 배를 안고서 더 높게 더 빠르게 나는 방법을 연마하던 갈매기 조나단과 같이 내 삶의 정체성을 찾고자 귀농을 결심하였다.
그래서 아내에게 시골에 가야겠다고 진지하게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자 아내도 50살까지만 직장생활을 하고 시골로 가지고 했다. 그러나 그 나이가 되면 용기가 없어져 그냥 어부가 던져주는 고기에 생명을 맡긴 갈매기처럼 나 역시 정년까지 그냥 지내게 될 것 같아 올해 내로(2001년) 시골로 가야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그러자 아내는 말이 없었고 안방엔 싸늘한 공기만 여러 날 흘렀다. 그러던 어느 날 퇴근하여 아내와 다시 마주앉았다. 그리고 아내에게 말했다. ‘나 요즘 매일 기도하는 심정으로 회사에 다니고 있어!’라 했다. 그러자 아내는 말없이 건너 방으로 들어가더니 문을 닫고 밤늦게까지 나오지 않았다. 걱정이 되어 아내가 있는 방에 가서 왜 그러냐고 했더니, 아내는 기운 없는 목소리로 두말 않고 ‘그러세요.’라 했다. 거기서 아내는 혼자서 그간 내 심정을 헤아리고 울고 있었던 모양이다. 내가 많이 힘들 때 내 심정을 헤아려준 아내가 무척 고마웠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때 나도 아내에게 참으로 못할 말을 했다 싶어 마음이 아프다. 귀농을 하겠다고 말을 꺼낸 지 3년 만인 45살에야 겨우 내키지 않는 아내의 동의를 받아 그해(2001년) 10월 26일 시골로 내려왔다.
정착을 위한 몸부림
나의 귀농은, 시골에서 홀로 살고 계시던 둘째 형님의 도움으로 시작이 되었다. 나는 서울에서 머슴살이를 계속하고 있었고, 형님은 그동안에 시골에서 1년 여간 귀농할 곳을 찾아 고향인 창원과 그리고 산청, 거창, 합천 등 여러 곳을 다녔다. 그러던 중 밤나무와 감나무가 있는 이곳 경남 함안군 군북면 영운리가 우리 형편에 맞아 떨어져 귀농을 하게 되었다.
귀농에 앞서 귀농의 목표를 ‘자급자족, 밥만 먹을 수 있다면 성공’으로 삼았다. 돈을 벌자고 내려 온 시골이 아니기에 언론이나 주변의 지인들이 권유하는 막대한 투자비가 들어가는 시설농사나 특용작물 따위의 농사는 짓지 않기로 하였다. 그리고 ‘무늬만 농사꾼이 아니라 농사로 끼니를 이어가는 농사꾼’으로 살자고 다짐했다. 농사를 지어 돈을 만들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아 ‘농협 빚은 가능한 내지 않는다.’ ‘소득 범위 내에서 지출 한다.’‘가능하면 현금 지출이 되지 않는 생활을 한다.’ 라는 원칙을 세웠다. 그래서 초기에 정착을 하면서도 집을 새로 짓지 않고 꾸미기만 하였는데, 형님과 2개월여 직접 수리하면서 재료비 5백 여 만원만 들었다.
귀농 첫 해 여름에 마을에서 들깨 모종을 얻어다 심었는데 한 낮에는 폭 고꾸라져 죽은 듯이 있다가 해거름에는 고개를 좀 들고, 다음 날 아침에는 꼿꼿이 서 있었다. 그렇게 너 닷새 몸살을 앓더니 드디어 새 뿌리 내리고 제 자리를 잡는 걸 보면서 나의 귀농도 그러리라 예감을 하였다. 불길한 예감은 맞는 법, 새 뿌리 내리고 살기가 정말 쉽지 않았다. 1년여는 아내와 떨어져 살아야했다. 늦게 시작한 아내의 학업 때문이었다. 형님과 둘이 살았기에 자연 주방은 나의 차지가 되었다. 온 종일 일하고 세 끼 밥에 새참까지 챙겨 먹으며 살아간다는 것은 고달프고 힘겨운 일이었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저녁밥을 짓기 위해 부엌 싱크대에 서서 쌀을 씻으려면 서 있을 힘이 없을 정도로 피곤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다보니 1년 새에 몸무게는 71kg에서 63kg로 줄었다. 시골살이는 몸이 마르고, 도시살이는 피가 마른다는 것을 알았다. 또한 손가락 관절은 자고 나면 뻣뻣하니 아팠다가 일을 시작하면 괜찮고, 또 자고나면 아프기를 근 1년 여 하였다. 나의 긴 허리는 귀농 후 만성이 되다시피 아파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머슴살 때 가슴에 통증을 주던 원인 모를 속앓이는 언제 나았는지 다 나아 있었고, 다시 겉몸 앓이 하나를 얻게 된 것이다.
귀농 생활
나의 귀농 가족은 형님과 아내, 그리고 닭, 오리, 거위 따위가 수십 마리, 그리고 개 두 마리이다. 농사는 대체로 형님과 둘이서 하고 있는데 밤산 8천여평, 과수원 2천 여평, 밭농사 7백 평, 논농사 1,300여 평을 짓고 있다. 과수는 밤과 단감, 매실을 생산하고 있고, 밭곡식은 고추, 마늘, 콩 따위를 하고 있다. 그 중에서 돈을 만드는 과일과 곡식은 밤, 감, 매실, 고추가 주류를 이루며, 간간이 감식초며 간장, 된장도 지인들에게 팔아서 얼마간 돈을 벌고 있다. 연간 조수입으로는 대략 1,500여 만 원, 많을 때는 2,000여 만 원 정도가 되는 것 같다.
귀농한 첫 해에는 과수농사에 아무런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관행농으로 농사를 지었다. 감나무에 농약을 뿌리는데 도시에서 농사라고 생각하던 것과는 영 딴판이었다. 약대를 잡고 약을 뿌리는데 완전히 농약을 뒤집어쓰고 4-5시간여를 견뎌야 했다. 그 짓을 가을 수확 철까지 8번에서 9번, 많게는 15번 정도를 해야 하니 아무리 마스크를 했다하더라도 내 몸속에 들어가는 농약을 막을 수는 없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첫 해 농사를 해 보고는 형님과 상의하여 다음해부터는 무농약으로 과수농사를 하자고 했다. 그러나 이 무농약 농사가 이렇게 힘겨운지는 몰랐다. 제초제를 사용하지 않으니 비탈진 밤산 8천여 평과 과수원 2천 여평, 그리고 밭농사, 논농사를 일일이 예초기로 풀을 베든지 호미든 손으로 풀을 뽑아야 하는데 이 일이 만만찮았다. 지금도 5개 동네가 먹고 사는 너른 들판에 한 여름에 손과 써레로 논을 매는 사람은 형님과 나, 둘 뿐이다. 지나는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고 있다. 무농약이라 해서 봄에 심어놓고 가을에 거두는 것이 아니라 화학합성 농약이 아닌 생약성분의 자연추출 농약을 직접 발효시켜 만들어서 농작물에 뿌려주어 농작물의 기운이 병과 충을 이기게 해 주어야 하는데 이 일 또한 만만치가 않았다. 농사 일 자체도 해 나가기가 힘겨운데 농업용 자재를 손수 일일이 만든다는 것은 체력이 따라 주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무농약 농산물을 그렇게 힘들게 생산을 했어도 일반 시장에는 내다 팔기도 어려웠다. 왜냐면 크기도 작고, 모양새도 흠이 많아 소위 상품으로써의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무농약 첫 해에는 과일 과게와 길거리에서 무농약 단감이라고 팔려고 하니, 지나는 사람들이‘감이 와 이렇노?’하곤 두 번 다시 쳐다보지도 않았다. 애써 지은 무농약 단감이라고 해 본들 사람들은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러나 그 다음해에 운이 좋게도 ‘부산울산 한살림’과 연결이 되어 직거래를 할 수 있는 길이 터였다. 그러나 이 무농약 농사를 지으면서 많은 시련을 겪게 되었다. 우선 감식초와 목초액이 과수농사에 도움이 된다는 말을 듣고 이를 농사에 활용하기로 하였다. 집에 불을 때어 난방을 하고 있어서 목초액은 자급자족이 되었고, 감식초도 상품으로 나갈 수 없는 감을 식초로 담궈 쓰면 되니까 자급자족이 되었다. 그러나 막상 첫해 무농약으로 감 농사를 지어보니 감식초와 목초액, 석회유황만으로는 감을 제대로 키워낼 수 없었다. 감이 빨리 익어 물러지기 쉽고 떨어지는 감이 엄청나게 많았다. 관행농으로 하면 10t정도는 나올 양인데도 첫 해는 6t 정도가 나왔다. 그 중에 물러진 감이 아마 1t은 넘었을 것이다. 다음 해에는 더욱 처참하였다. 겨우 2.5t 정도가 나왔다. 온 과수원이 낙엽병과 홍시로 9월 말부터 붉게 물들기 시작하여, 시월 중순에 거의 모든 감을 수확하였다. 보통 감나무는 11월 중순까지도 수확을 할 수 있는데 말이다. 그해 11월에는 자칭 국내 무농약 단감1호라는 농가에 가서 4일간 합숙을 하며 일손을 돕고 어떻게 농사를 짓는 지 배우기도 하였는데, 그 분 역시 20년간 실농했다는 얘기만 해 주었을 뿐, 별 신통한 방법은 얻지 못했다. 자연농업 학교에서 배운 천혜녹즙이니 미생물 발효 따위의 자연농법 농사를 실천해 보아도 수확을 얻기 어려운 것 마찬가지였다. 참담한 실농은 2010년, 작년까지 이어져 작년엔 이상 기후의 탓도 있었지만 병해충으로 단감이 거진 다 떨어져 10kg 상자로 9개 정도 수확해서 선물로 보내고는 농사를 접어야했다. 환금작물로는 비중이 가장 큰 단감의 수확이 ‘0’이었다는 것은 그간 투입된 노동력, 농비를 생각하면 마이너스였다는 얘기다.
농사꾼의 재미와 즐거움이 무엇이겠는가! 봄에 씨 뿌리는 재미, 가을에 수확하는 재미가 없다면 시골에서 얻을 수 있는 즐거움은 반감되고 마는 것이리라. 이런 일을 벌써 9년 째 겪고 있었는 것이다. 익기도 전에 물러서 줄줄이 떨어지는 단감, 일그러진 고추를 보고 있노라니 내 심정도 처참하였지만, 나를 믿고 무농약 농사를 돕고 있는 형님을 보고 있노라면 더 이상 무농약 농사는 안되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처음 무농약 농사를 시작할 때의 마음은 농약을 먹고 싶지 않아서였는데, 이젠 농약을 좀 먹어서라도 어느 정도 수확을 할 수 있는 농사를 지어야겠다는 슬픈 결심을 하게 된 것이다. 돌이켜보면 시골살이는 실농의 연속이었다. 10년이 다 된 지금까지 ‘농사를 참 잘 지었다’라는 말을 한번도 해 본 적이 없으니 말이다. 다만, 아직은 빚 없이 살고 있다는 것, 첫 마음인 ‘자급자족, 밥만 먹을 수 있다면 성공’, ‘무늬만 농사꾼이 아니라 정말로 농사로 끼니를 이어가는 농사꾼’의 목표는 그대로 이어가고 있다. 물론 이 또한 함께 사는 형님의 ‘유노동 무임금’의 덕임을 부인할 수 없다.
귀농후 잃은 것과 얻은 것
이런 처절한 실농과 무농약 농사의 고달픔 속에서 잃은 것도 많지만, 느끼고 얻은 것도 많다. 무엇보다도 세상일에는 고귀한 일과 비천한 일이 있는 것이 아니라, 또한 여자 일과 남자 일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는 것, 다만 힘든 일과 심(心)든 일이 있음을 알았다. 닭 모가지에 직접 칼을 댈 때의 비감함으로 백정에 대한 고마움도 알았다. 옮겨 심은 들깨가 새 뿌리 내리기 위해 몸살을 앓듯이 시골에서 새 뿌리를 내리기 위해 몸부림을 칠 때 그간 알고 지냈던 친구, 지인들의 도움으로 살아가면서 세상은 나 혼자 잘 나서 살아가는 것이 아님도 알게 되었다. 도파니 하게 말하면, 머슴으로 살면서는 전혀 생각하지도, 보지도 못했던 반대 편 삶의 모습을 체험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귀농 후 잃은 것들에는 편리하고 안온한 삶, 풍족한 월급봉투, 좀 우습지만 사회적인 지위, 그리고 아내가 제일 아쉬워하는 윤기 흐르는 둥근 얼굴 따위가 있지만, 그에 반해, 귀촌 후에 얻은 것들은 참으로 많다. 긍정적인 것으로는 우선, 행복이 무엇인지 그리고 행복하다는 기분이 어떤 것인지를 알았다. 한여름에 땀으로 범벅이 된 몸을 차가운 샘물에서 씻을 때, 고된 하루해를 접으며 식구들끼리 맛난 저녁상을 대할 때, 아! 오늘도 이렇게 쉴 수 있는 시간이 되었구나 하는 행복감을 느끼기도 하였다. 행복의 씨앗이 고통과 고난이란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돈 없이 누릴 수 있는 맑은 공기, 샘물, 별빛, 햇살 따위를 얻었다. 그리고 도회지에서는 생각도 못하던 된장, 고추장, 청국장 따위를 담그고, 온갖 산야초로 차도 만들고, 나물도 해 먹을 줄 알게 되었다. 아내에 대한 고마움을 참으로 많이 느끼게 되었다. 그러니까 도회지에선 아내가 집안의 가구처럼 당연한 존재로 생각하며 살았지만, 시아주버님을 군말 없이 모시고 사는 아내에 대한 고마움으로 시골에선 꼭 필요한 존재라는 걸 알게 된 것이다. 하늘에 기도하고 모든 일에 감사하며 살게 되었다. 도회지에 살면서는 내 삶에 대해 간절히 기도하며 살아 본 기억이 없다. 부족한 게 없는 삶이었기에 기도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시골의 삶은 모든 게 아쉽고 부족하고,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한계가 분명하니 자연히 어머니인 땅에 무릎을 꿇고, 아버지인 하늘을 우러러 내가 살아갈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하며 살 수 밖에 없다. 그리고 도회지의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것 중 하나인 삼쾌의 삶(快眠, 快食, 快便)을 살 수 있다. 하루 종일 몸으로 부대끼며 살아야 하고, 고기 보다는 채식위주의 먹을거리로 식사를 하다 보니 자연적으로 삼쾌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닭, 오리, 개들의 언어를 나름대로 이해할 수 있었고, 종일 대하는 식물의 관찰을 통해 그들과 대화도 어느 정도 할 수 있는 감수성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시골생활에서 얻은 부정적인 것들에는 힘들고, 외롭고, 고달프고, 불편한 것이다. 특히 곤충이나 벌레를 무척 싫어하는 아내에겐 이 시골살이는 참으로 불편하기 그지없다. 더구나 아내의 처지에서는 도회지에선 잘 가려진 채소를 마트나 시장에서 그냥 돈으로 사면되지만, 시골에서는 살아있는 슈퍼(밭)에 가서 일일이 채취를 하고 벌레먹은 잎 따위를 다듬어서 먹어야 하기에 귀찮고 성가신 일이다.
가끔 도회지의 친구들이 묻곤 한다. 귀농을 후회한 적이 없느냐? 지금 생활에 만족을 하느냐고..? 물론 후회를 한 적도 있다. 함께 일하는 형님이 감나무 가지치기를 하다가 가지가 부러지는 바람에 떨어져 머리를 다쳐서 의식을 잃고 119에 실려가며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을 때, 연약한 동생을 대신하여 힘겨운 일을 도맡아 하시다가 허리 디스크가 심하여 수술을 위해 수술대 위에 실려 가는 형님을 보았을 때, 겨울철 농한기에는 아내가 안양 처제 네에 올라가서 십 수 년 째 류머티즘으로 고생을 하고 있는 처제를 돌보며 2-3개월씩 계절이별을 할 때는 후회가 된다. 그래서 지금의 생활을 100% 만족하며 살지는 않는다. 계절에도 봄, 가을은 시골살이 하기가 참으로 좋지만, 장마와 태풍의 여름, 삭풍 부는, 아내와 별리를 해야 하는 겨울은 참으로 싫듯이, 힘겹지만 50%의 만족으로 형님과 아내 셋이서 나름대로 행복을 일구며 아직도 시골에서 살고 있다.
첫댓글 잘읽었읍니다..
참 두가지가 가슴을 찌르네요:도시의 삶은 피가 마르고 농촌의 삶은 몸이 마른다.는 것과 나는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있는 어부의 뱃전을 맴돌고 갈매기 같은 삶을 살고 있다는 것.
학촌 상 받은거 다시 한번 더 축하한다.
지오야! 니가 상타면 내가 자카르타에서 날라가서라도 축하해 줄테이 함 해봐라.
친구야~~ 축하한다 --형님과 항상 곁에서 행복을 함께 나누는 제수씨께도 축하 말씀 전해 주렴...
만난지가 벌써 일년이 ~~~또 다시 만나고 싶구나
다시한번 상 축하한다
참 삶이 묻어나오는 값진 이야기.. 내용이 궁금했는데 막상 읽고 보니 제 마음이 짠 하네요^^
다시한번 입상을 축하드리며 한땀한땀 일궈내신 자식같은 농작물들이 작은아버님의 귀농생활에 더욱 큰 빛을 주었으면 합니다. ^^
ㅎㅎ 채니가 옴마 컴 한다더만..
오랫만에 들어와보니 귀한 상 을 타셨구만요~~난 농사를 그렇게 많이 짖는 줄 몰랐고 반면 1년 수입은 너무 작고...고생은 엄청하구...실은 인생살이 고달프고 삶 이란게 무엇인가? 착잡 씁쓸하네요! 잠간 살다가는 이슬같은 우리 나그네 인생이건만..그 어떤 일도 쉬운건없구..ㅋ 여튼 축하하구 서울 올라오믄 연락주삼 해경씨랑 와요 괴기에다 밥 이나 살게~~^*^
그런데 형 사진보니 예전 모습이 보이네~~이제 사람 냄새 나는 걸...ㅋㅋ 말끔하구만 !!! @#$%
ㅎㅎ 그렁가?? 괴기 먹고싶넹!!
이런 기쁜 일이 있었네요.많이 늦었지만 축하드립니다^^상받는다는 소식에 왜 제가 울컥했는지?글은 읽기도 전에 말입니다.ㅎㅎ상금으로 마님께 은혼식 선물은 뭘 하셨는지요?혹 고대로 현금 상납?여자는 그래도 돈보단 선물인데...
ㅎㅎ 이리 쓰고 저리 사용하다보니 딸랑 몇 푼 남지 않아 현금으로 디리고 말았지요.
쉽게 들어온 건 쉽게 나가더이다. 이젠 다시 이런 허튼 짓은 안하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