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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1
▣ 복있는 사람-시편 1편-
본 시편의 주제는 경건한 사람의 복됨과 거룩하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심판이다. 1절은 이렇게 번역해도 좋을 것이다. “오, 한 사람의 행복함이여!“ 성경의 그 어느 곳을 펼쳐도 하나님은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시며(시련의 한복판에서라도) 불순종하는 사람들에게는 슬픔을 주신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하나님은 이 세상 사람들을 그리스도 안에 있는 거룩한 사람들과, 그리스도 밖에 있는 거룩하지 못한 사람들로 이분하여 보신다.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 있어 구원을 받았거나 아니면 “아담 안에“ 있어 잃어버림을 당하는 둘 중의 하나이다(고전 15:22/고전 15:49 참조). 이 두 부류의 사람을 살펴보자.
1.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사람(1-3절)
태초의 창조로부터 하나님은 인간을 축복하셨다(창 1:28). 저주라는 말이 나오는 것은 다만 인간의 불순종을 통하여 세상에 죄가 들어온 후였다(창 3:14-19). 하나님은 언제나 인간이 하나님의 축복을 누릴 수 있기를 갈망하고 계신다. 에베소서 1장 3절은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가 “모든 영적인 축복을 받는다“고 말한다. 주님 안에서 우리는 얼마나 부유한가! 유감스럽게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자기의 기업을 누리지“ 못하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축복들을 즐기지 못한다(옵 17절). 이 구절들에는 하나님께서 축복하실 수 있는 종류의 그리스도인에 대하여 설명되어 있다.
세상과 분리된 사람(1절)-그리스도인의 생활은 걷는 것으로 비유된다(엡 4:1/엡 4:17/엡 5:2/엡 5:8/엡 5:15 참조).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일보를 내딛음으로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시작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믿음의 걸음을 더멀리 걸어갈 때 성장하게 된다. 걷는 일은 행동을 뜻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일상생활에 성경의 진리들을 적용함에 있어 행동을 보여야 한다. 그러나, 신자들은 하나님의 뜻 밖에서 “어두운 가운데“ 행할 수는 없다(요일 1:5-7 참조).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사람은 자기의 행실을 삼가한다. 일상적으로 부딪치는 일들이 세상 안에서 이루어지지만 그의 행실은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 이 구절에 나오는 일련의 대조점들을 살펴보자.
●걸음-논의-불경건함(악인, 하나님을 닮지 않음)
●서있음-길-죄인들(목표에서 빗나감, 도달하지 못함)
●앉음-자리-경멸함(거룩한 것을 업신 여김, 조롱함)젊은이가 죄 가까이 걷다가 죄를 생각하느라고 서있고 마지막으로는 “잠시 죄의 낙을 누리려고“ 앉게 되는 일은 상상력을 많이 동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히 11:25 참조). 우리는 베드로의 불순종에서 이러한 슬픈 과정을 보게 된다. 예수님은 그에게 물러가라고 말씀하셨으나(요 18:8), 그는 예수를 따라 걸어갔다(요 18:15). 다음으로는 그가 그릇된 군중들과 함께 서 있는 것을 본다(요 18:18). 그리고 오래지 않아 그는 불 곁에 앉아 있다(눅 22:55)! 그 후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우리는 알고 있다. 그는 곧장 유혹을 향해 걸어갔으며 세 번 주님을 부인하였다. 그리스도인이 거룩하지 못한 논의(충고, 계획)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하면 그는 머지 않아 그들의 생활방식에 서 있게 되고 마침내는 주저앉아 그들에게 동의하게 된다.
말씀으로 가득 채워져 있는 사람(2절)-하나님이 축복하시는 사람은 죄와 세상의 일들을 기뻐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즐거워한다. 말씀을 향한 사랑과 순종은 우리의 생활에 축복을 가져온다(수 1:8 참조).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사람은 성경 말씀을 매일 연구하고, 암송하며, 읽을 뿐 아니라 주야로 말씀을 묵상한다. 그의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조절을 받는다. 이 일로 인하여 그는 성령의 인도를 받게 되고 성령 안에서 행하게 된다. 영혼에 있어서 “묵상“은 곧 몸의 “소화기능“과 같다. 묵상이란 말씀을 이해하고 그 말씀을 우리의 '생활에 적용하며 속 사람의 일부가 되게 하는 것이다(렘 15:16/겔 3:3/계 10:9 참조).
물가에 있는 사람(3절)-마실 물이란 하나님의 성령을 비유하는 말이다(요 7:37-39 참조). 여기서 그리스도인은 마른 땅 밑 깊숙한 곳에 숨겨진 샘으로부터 물을 얻는 나무에 비유된다. 이 세상은 헌신한 신자에게 있어서는 사막과 같아서 결코 만족을 줄 수가 없다. 그는 그리스도께 속한 일들에 영적인 뿌리를 깊이 내리고 영적인 생명수를 끌어 올려야 한다(렘 17:7-8/시 92:12-14 참조). 뿌리가 없으면 열매를 맺을 수가 없다. 뿌리보다는 잎사귀와 열매에 대해서 보다 더 관심을 가지는 그리스도인들이 너무도 많다. 뿌리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기도와 말씀으로 매일 시간을 보내며 성령께서 자신을 먹이시도록 허락하지 않는다면 유용성의 면에 있어서는 말라서 죽게 될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영적인 생명을 끌어내는 신자는 열매를 맺을 것이며 성공을 거두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열매 맺기를 멈추면 그것은 뿌리에 이상이 생겼기 때문이다(막 11:12-13/막 11:20/눅 13:6-9 참조). 우리가 맺어야할 열매에 대해서는 다음 귀절들을 찾아 보라(롬 1:13/롬 6:22/갈 5:22-23/히 13:15/골 1:10).
1-3절에 제시된 거룩한 사람에 대한 완전한 모범은 물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는 길이요(1절) 진리요(2절) 생명이시다(3절/ 요 14:6 참조).
2.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사람(4-6절)
“그렇지 않음이여!“ 참으로 무서운 심판이다! 이 말은 거룩한 사람들이 즐기고 경험하는 모든 일들이 불경건한 사람들의 생활에서는 실현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경건한 사람은 강하고 영구적이며 아름답고 유용하고 열매맺는 나무에 비유되어 있다. 그러나 불경건한 자는 겨이다! 그는 뿌리가 없고 바람에 날려가며, 하나님의 계획에 아무런 쓸모도 없을 뿐 아니라 아름다움도 결실함도 없다. 세례(침례)요한은 마태복음 3장 10-12절에서 이와 유사한 비유를 사용하였다. 그는 하나님을 탈곡 마당에 찾아와서 알곡과 쭉정이를 분리시키는 추수군으로 비유한다. “그는 겨를 불사를 것이다!“(시 35:5/욥기 21:18 참조) 이 땅에서의 전 생을 겨와 같이 보내야 하는 사람의 비극은 어떠하겠는가?
미래의 심판이 있는가? 5절에 보면 심판이 있다고 되어 있다. 물론 구약에는 우리가 신약에서 찾아볼 수 있는 미래의 심판에 대한 온전한 설명은 나오지 않는다.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에게는 심판이 없다(요 5:24/롬 8:1 참조). 하지만 불신자에게는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이 있다(히 10:27 참조). 잃어 버린 자들에 대한 심판은 요한계시록 20장 11-15절에 설명되어 있다. 그 무대에는 그리스도인들은 없을 것이며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만 있을 것이다. 심판 때에는 사악한 사람들 그대로의 본성, 즉 쭉정이로서 가치없이 잃어버려진 영혼임이 드러날 것이다. 5절은 악인이 심판 때에 서지 못한다고 말한다. 이 말은 그들이 심판의 자리에 없을 것이라는 뜻이 아니라 심판을 견디지 못할 것이라는 뜻이다. 책이 펼쳐질 때 이들은 무릎을 꿇고 죄에 대하여,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와, 하나님의 아들에 대하여(빌 2:9-11 참조) 고백하게 될 것이다. 이들이 비록 이 세상에서 종교적인 모임의 회원이었을지라도 천국 의인의 회중에는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 7:21-23 참조).
성경의 “안다“라는 단어는 보통 “나는 열 두 제자들의 이름을 안다“고 말할 때의 지적인 이해보다 훨씬 더한 뜻을 가지고 있다. 이 단어에는 다음 귀절들에서 볼 수 있듯이 “선택과 관심“이라는 개념이 내포되어 있다.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시며...“(딤후 2:19 참조). “내가 내 양을 알고...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같이...“(요 10:14-15 참조). 예수께서는 잃어버린 자들에게 “나는 너를 알지 못한다“라고 말씀하셨다(마 7;23 참조). 여호와는 의인의 길을 직접 계획하셨고 설계하셨으므로 알고 계신다(엡 2;10 참조). 주님은 의인들이 이 계획된 길을 갈 때에 그들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신다. 거룩한 사람들의 삶은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이다! 그가 하는 말, 그가 행하는 일, 그가 가는 곳, 이 모든 것에는 영원한 결과가 따른다. 거룩하지 못한 사람은 “각기 제 길로 갔다“(사 53:6 참조). 의인의 가는 좁은 길은 영광으로 향하지만(잠 4:18 참조), 경건치 못한 사람들의 길은 망할 것이다. 참으로 비극적인 일이다. 거룩하지 못한 사람은 이 땅에서 낭비하는 삶을 살며, 오는 세상에서는 멸망을 받는다! 얼마나 큰 낭비인가 !
6절은 “두가지 길“에 관한 잘 알려진 교훈을 우리 앞에 펼쳐 놓는다. 예수님은 산상설교를 이 비유로 끝맺으셨다(마 7:18- 이하). 또한 잠언 전체를 통하여 이러한 내용을 볼 수 있다(잠 2:20/잠 4:14/잠 4:24-27 등). 거룩하지 못한 사람이 잃어버림을 당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는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에 순복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말씀에 나타난 “하나님의 모든 뜻“(행 20:27 참조)보다도 거룩하지 못한 사람들의 의견을 더 좋아한다. 그는 의인의 회중보다 거룩하지 못한 사람들과의 교제를 더 좋아한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지 않으며 하루 종일 죄를 생각하며 보낸다(창 6:5 참조). 그는 이 땅에서 안전하다고 생각하지만 겨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신자가 시편 1편 1-3절을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 주님께 양보함으로 시작된다. 우리 자신과,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매일 양도하는 것이다(롬 12:1-2 참조). 여기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말씀으로 시간을 보내는 일도 포함되어 있다. 이 생활은 세상으로부터 분리된 생활을 하는 것이며(물론 고립이 아니라 그 더러움에서 분리되어 있는 것) 하나님의 숨겨진 자원들을 빨아올리는 뿌리를 가진 생활이다. 얼마나 축복된 생활인가.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 참된 만족을 주는 생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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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2
▣ 왕-시편 2편-
시편 1편과 2편 사이에는 흥미로운 대조점들이 있다. 첫 장은 개인적이고 둘째 장은 국가적이다. 시편 1편에서 우리는 완전한 인간이신 그리스도를 보지만, 시편 2편에서 그는 왕중의 왕이시다. 1편은 유대인의 축복을 다룬다(물론 오늘날 그리스도인에게도 적용된다). 반면에, 2편은 이방 나라들의 심판을 제시한다. 1편과 2편에 모두 “망한다“는 단어가 나오는데, 1편 6절은 개별적인 개인에게 적용되며, 2편 12절은 반역하는 나라들에게 적용된다. 또한 두 편 모두 “묵상하다“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2편 1절에서는 “경영한다“고 번역되어 있다. 1편 2절에 나오는 묵상은 올바른 것이며 2편 1절에 나오는 것은 그릇된 종류이다! 시편 2편의 열 두 구절은 세 구절씩 네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각 부분마다 우리는 다른 음성을 듣게 된다.
1. 민족들의 소리(1-3절)
이것은 반역의 소리이다. “분노하다“는 단어는 “모여서 소란을 피운다“는 뜻이다. 허사를 경영하는 사람들은 이방인들(“이교도“, “백성들“)이며 하나님과 그의 규율에 대항하여 반역하고 있다. 민족들은 왕들로 말미암아 반역으로 이끌려 가고 있으며 모두들 하나님과 그리스도께 저항하고 있다. 물론 이 소리는 시대를 내려오며 수십 세기에 걸쳐 들려오고 있다. 그러나 이 마지막 때에 더욱 크게 들려온다. 전에는 그런 일이 없었으나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규율에 대항하는 반역의 소리가 연합을 이루고 있다. 민족들이 원하는 바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법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를 얻으려는 것이다. “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풀어버리자!“ 창세기 10장 5절에 따라서 하나님은 이방 민족들을 나라와 민족으로 나누셨다(행 17:26/신 32:8 참조). 역사는 이방 나라들이 유대인들(하나님의 백성들)을 거절하였으며,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스도를 거부하였음을 밝혀준다. 교만한 느부갓네살처럼 이들은 자기의 길을 가고자 함으로써, 하나님이 인간의 일들을 통치하신다는 사실을 시인하기를 거절한다(단 4:28-37 참조). 이 이방인의 반역은 교회의 설립과 더불어 더욱 맹렬하게 되었다. 사도행전 4장 23-30절은 초대교회의 박해를 말해 주고 있는데, 이는 본 시편의 부분적인 성취인 것이다. 그러나 이 마지막 때에는 “이 땅의 왕들“이 하나님께 대항하여 싸우기 위해 연합함으로 이 예언의 완전한 성취를 보게 될 것이다(계 1:5/계 6:15/계 16:12-16/계 17:2/계 17:18/계 19:11-21 참조).
2. 아버지의 음성(4-6절)
하나님은 인간의 위협에 대하여 어떻게 대응하시는가? 그는 웃으신다! 이것은 거룩한 조소의 음성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람보다 위대하시며 가련한 왕들의 교만한 공격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오늘날 심판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않는다. 그는 십자가에서의 은혜를 통하여 말씀하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마지막으로 웃으실“ 날이 올 것이다(시 37:1-15/시 59:1-8 참조). 산헤립이 얼마나 교만하게 하나님과 유대인들을 무시하였는지 기억해 보라, 그리고는 어느 날 갑자기 쓸어버림을 당하였다(왕하 19장). 이 일은 심판 가운데 이 세상의 나라들을 처리하기로 결정하시는 날, 다시 일어날 것이다.
또한 화를 발하시는 음성이 이어진다(5절). 다시 말하지만, 오늘날 하나님은 진노로 말씀하지 않으신다. 그는 은혜 가운데서 아들을 통하여 말씀하고 계신다(히 1:1-2 참조). 그러나 어느날, 이 세상의 나라들에게 그의 진노를 쏟으실 것이다. “분“이라는 단어는 “맹렬한 화“라는 뜻이다. 이것은 요한계시록 6-19장에 상세히 설명되어 있는 대환란을 말한다. 이 때는 땅과 바다와 하늘과 자연계, 사람들과 나라들에게 무서운 심판이 임하는 때이다. 수백만의 사람들이 재앙과 하늘로서 온 질병에 걸려 죽을 것이다. 환란 기간 동안에 이스라엘 민족은 “정화되어서“, 믿음을 가진 남은 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주님의 왕국을 세우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돌아오시는 때를 준비할 것이다. 이 기간 동안에 수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을 것이지만, 자신들의 결정을 자신의 생명으로 인칠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음성은 선포의 음성이다(6절). 하나님은 그의 거룩한 산에 그의 기름부으신 왕을 세우실 것이다! 이 분이 그리스도이시다(사 9:6-7/단 7:13-14 참조). 주님이 아직은 영광스러운 자신의 보좌에, 또는 다윗의 보좌에 오르시지는 않았지만 아버지의 오른편에 앉아 계시며, 그의 보좌는 아버지의 말씀처럼 확실하다! 오늘날 그리스도는 멜기세덱 같은 “제사장-왕“이다(히 6:20-7:17 참조). 주님은 자기 백성들을 중재하시며, 어느 날 영광 중에 돌아오셔서 나라들을 심판하고 다스리기 위하여 보좌에 오르실 것이다(마 25:31-46 참조).
3. 아들의 음성(7-9절)
이 구절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이다. 그는 아버지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영원한 법령을 우리에게 가르치신다. 하나님은 자기의 말씀을 성취하기로 이미 결정을 내리셨다. 따라서 인간이 하나님의 일을 방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안다는 것은 얼마나 좋은 일인가.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아버지 하나님은 언제 아들에게 이 말씀을 하셨는가? 그가 세상에 태어났을 때가 아니라 그가 무덤에서 나왔을 때였다. 사도행전 13장 28-33절을 주의깊게 읽자. 그리스도는 장사지낸 일이 없는 새 무덤에서 나오셔서 부활의 능력에 속한 영광스러운 생명으로 일어나셨다. 이 구절은 히브리서 1:5 과 5:5 에 다시 인용된다.
그리스도께서 죄와 죽음을 이기셨으므로 그는 유업을 받으셨다(히 1:4-5 참조). 하나님은 그 아들이 세례(침례)를 받으실 때에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말씀하셨으며(마 3:17 참조),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상의 참혹한 죽음을 직면하셨을 때에도 변화산 상에서 재차 말씀하셨다(마 17:5 참조). 예수님은 십자가 상에서의 충성스러운 사역으로 말미암아 모든 나라들을 유업으로 받으셨다. 그러나 사단은 십자가를 지지 않고 이와 똑같은 왕국을 가지라고 예수님께 제안했었다(마 4:8-10 참조). 만일 예수님이 마귀에게 굴복하셨더라면 고난없이 이 나라들을 받으실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아버지의 뜻 밖으로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물론 그리스도께서 죄를 범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유혹은 끊임없이 있었다). 사단은 이 왕국들을 적그리스도에게 넘길 것이며, 그가 잠깐 동안 나라들을 통치할 것이다(계 13:1-10 참조).
그리스도는 언제 “땅 끝까지“ 온 땅을 자기의 소유로 받으실 것인가?(그가 오늘 소유하고 있지 않은 것은 확실하다!) 그가 능력과 영광 가운데서 이 땅에 돌아오실 때이다(계 19:11-21 참조). 시편 2편 26-29절은 요한계시록 12장 5절과 19장 15절에 언급되어 있다. 요한계시록 2장 26-29절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이 그와 함께 다스리게 될 것이라고 말해 준다(단 2:42-44 참조).
4. 성령의 음성(10-12절)
마지막 세 구절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 자신을 순복하려는 사람들에게 성령께서 호소하시는 말씀이다. 성령은 인격의 모든 면으로 호소하신다!
정신(10절)-“지혜로우라...교훈을 받으라!“ “거룩하지 않은 사람의 논의“(시 1:1)는 거룩하지 못한 곁길로 인도하였다. 세상의 지혜는 하나님께는 어리석은 것이다(고전 1:18-31 참조). 우리의 세상은 그 지식을 자랑한다. 그리고 과거보다도 지식이 많아졌음은 사실이다. 그러나, 지혜는 줄어든다! 하나님의 지혜는 하나님의 말씀에 기반을 두고 있으나 왕들과 통치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원하지 않는다.
마음(11절)-“그를 섬기라!“ 거역하고 저항하는 대신 사람들은 그리스도에게 절하고 그를 섬겨야 한다. 경건한 기쁨은 그리스도께 순복하는 데서 오는 결과이다.의지(12절)-“아들에게 입맞추라“는 말은 그에게 사랑의 헌신을 나타내어 경의를 표하라는 말이다. 입맞춤이란 사랑과 화해를 말해 주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세상과 화해하셨다(고후 5:14-21 참조). 의와 평화는 십자가에서 서로 입을 맞추었다(시 85:10 참조). 이제 하나님은 잃어버린 죄인들을 구원하실 수가 있으시며 그의 거룩하신 법도 지키실 수 있게 되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를 다스리도록 하지는 않겠어!“라고 말하는 것은 매우 좋지 못하다. 예수께서 돌아오실 때 이들은 그 앞에 머리를 숙이지 않을수 없게 될 것이다(빌 2:10/빌 2:11 참조). 그러나 그 때는 이미 늦을 것이다! 하나님이 하셔야 했던 모든 일은 주님의 진노를 “조금만“ 타오르게 하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한 사람이 멸망하였다! 주님의 진노자 큰 심판 가운데서 이 땅을 태울 때 과연 어떠할 것인가!
시편 1편은 축복으로 시작되며 시편 2편은 축복으로 끝을 맺는다. “그를 의지하는 모든 이에게 복이 있으라.“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 주(註): 시편에서 설명하고 있는 반역은 아마겟돈전쟁으로 이끌어 갈 것이다. 나라들이 예루살렘에 대항하여 모여들 것이나(계 16:13-16/요 3:1- ), 그리스도의 재림의 징후로 말미암아 이들은 연합하여 주께 대항하려 할 것이다(마 24:30). 물론 그리스도는 그들을 속히 멸망시킬 것이며(계 19:19-/슥 14:1-), 예루살렘에서 그의 지상 통치를 시작하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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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 8: 1-9 ▣ 인간은 무엇인가?-시편 8편- 당신이 이 아름다운 시를 처음 읽을 때 “오늘날 현실적인 사람들에게 주는 멧세지는 무엇인가?“라고 의아해 할 것이다. 이 시는 창조에 나타난 인간의 지위에 대한 시적인 설명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빙산과 같이 이 시에 숨겨진 교훈은 크다고 하겠다. 시편 8편에 대한 신약의 관련 성구들의 도움에 힘입어 여기서 발견되는 몇 가지 교훈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 시를 세 가지 관점에서 생각하려 한다. 1. 역사적인 배경 시편의 제목들이 역사적인 면과 음악적인 면의 두 가지 형식으로 기재되어 있는 것을 눈여겨 보았을 것이다. 예를 들면, 시편 8편의 서두에서 “다윗의 시-영장으로 깃딧에 맞춘 노래“라고 기록되어 있다. “깃딧“이란 “포도주틀“이란 뜻으로, 아마도 추수 때에 사용되는 것을 나타내는 말인 듯하다. 그러나 음악적인 지시사항은 하박국 3장에서와 같이 앞에 나오는 시의 끝부분에 속한다고 결론짓는 성경학자들도 있다. 이 말은 9편의 처음에 나오는 “뭇랍벤“은 사실상 시편 8편의 끝에 속한다는 뜻이다. “뭇랍벤“이란 용어는 “챔피언의 죽음“이라는 뜻으로서, 다윗이 골리앗을 죽인 것을 가리킨다(삼상 17장). 젊은 다윗이 거인을 죽인 후, 그 날 저녁 하늘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백성을 향하신 그 관심에 놀라워하며 하나님과만 홀로 지새우는 것을 우리는 쉽게 상상할 수 있다. 다윗은 거인에 비교하면 “젖먹이요 풋나기“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젖먹이“를 사용하시어 적을 잠잠케 하셨다. 사무엘상 17장 4절에서 골리앗은 “챔피언“으로 불리워졌으며 40일 동안 교만스럽게도 도전하며 유대인들에게 겁을 주었다(삼상 17:16). 다윗이 적을 침묵시킬 때 사울은 이렇게 말했었다. “너는 소년이다“(삼상 17:33 ,젖먹이요 풋나기이다). 사무엘상 17장과 시편 8편 사이의 또다른 유사점은 “공중의 새“와 “들의 짐승“(삼상 17:44/시 8:7-8)이라고 한 말이다. 또한 시편 8편이 “여호와의 이름“을 영화롭게 한다는 사실도 유사하다(8:1/8:9). 다윗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골리앗을 패배시켰다(삼상 17:15). 따라서, 우리는 이 시를 통하여 하나님이 주신 위대한 승리로 인해 여호와를 찬양하는 젊은 다윗을 보게 된다.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나이까?“ 하나님은 왜 한 목동에게 관심을 기울이셨는가? 다윗에게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토의 놀라운 모형을 본다. 이들은 둘 다 베들레헴에서 출생하였다.둘 다 목자였으며, 둘 다 일시적으로 형제들에게 거절을 당하였다. 또한 둘 다 광야에서 적을 직면했으며 승리를 거두었다. 왕이 되기 전에 추방을 당했으며, 유배되어 있는 기간 동안 신부를 취하였다. 그리고, 둘 다 “사랑의“ 사람들이었다. 왜냐하면 “다윗“이란 이름은 “사랑받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2. 교리적인 의미 신약에서 시편을 인용하여 그리스도에게 적용할 때는 언제나 메시야와 관련된다. 시편 8편은 신약에서 몇 차례에 걸쳐 그리스도께 적용되고 있다(2절/ 마 21:16/히 2:6-8/고전 15:27/엡 1:22 참조). 이 관련성구들을 조심스럽게 읽자(특히 히브리서 2장). 시편 8편으로부터 인출되어 히브리서 2장과 고린도전서 15장에서 가르치고 있는 주된 교훈은 다음과 같다. 그리스도는 아담이 죄로 인하여 잃어버린 모든 것을 도로 찾으셨다. 그리스도는 하늘 위에 높이 올리워지셨으며, 그로 인해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셨다(엡 1:19-23/히 1:1-3 참조). 하나님의 영광은 이제 더이상 천막이나 성전에 머물러 있지 않다. 영광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 저 위에“ 있다. 그리고 신자들의 마음에 있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사역하셨을 때에는 제사장이나 왕들에게 찬양을 받지 못하셨다. 성전에서 그에게 찬양을 돌린 사람들은 어린 아이들이었다! 창세기 1장 26-28절을 주의깊게 읽고 하나님은 처음 사람에게 바다의 고기와 새와 가축들을 다스리게 하셨음을 알아보자. 사실상, 인간은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지음을 받았으며 하나님을 대신하여 이 땅을 다스리도록 위임을 받았다. 아담이 범죄하였을 때 그는 이 왕권을 잃었다! 로마서 5장은 “왕들“에게 변화가 있음을 지적한다. 죽음이 다스리고(롬 5:14 /롬 5:17) 죄가 다스렸다(롬 5:21). 아담은 자기의 왕권을 잃었으며, 왕은 고사하고 노예였다!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오셨을 때 그는 아담이 잃은 주권을 행하셨다. 그리스도는 물고기를 다스렸고(눅 5:1-6/마 17:24-27/요 21:1-6), 새를 다스렸으며(눅 22:34), 짐승들을 다스리셨다(막 1:13/막 11:1-7 참조). 오늘날 지상의 어떤 사람도 하나님이 행하신 대로 자연을 조절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예수께서 지상에 오셨을 때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방문하시는 것“이었다(시 8:4/눅 1:68/눅 1:78 참조). 다윗이 밤의 경치를 묘사하고 있는 것에 유의하자(3절). 왜냐하면 예수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는 영적으로 밤이었던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자신을 낮추시고 종이 되심으로, 그리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예수님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셨으며, 잃어버린 사람들과 잃어버린 세계를 값주고 구속하셨다. 히브리서 2장 8절은 “우리가 만물이 아직 인간에게 복종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있다. 여전히 홍수가 나고 지진이 있고 재앙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을 본다(9절)!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위하여 죽으셨다는 사실은 그가 재림하실 어느 날,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가 영화롭게 된 이 땅을 통치하게 될 것이라는 확신을 준다. 우리는 오늘날 영적으로 주님과 함께 통치한다(롬 5:17/롬 5:21 참조). 또한 주님의 왕국에서 육신적으로 그의 통치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계 1:6/계 20:4 참조). 십자가 위에서 이루신 그리스도의 사역은 다만 아담의 죄를 풀어주어 본래의 아담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만이 아니라 훨씬 더한 것을 준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를 그리스도와 같이 만든다! 로마서 5장 9-21절에서 “더욱“이라는 말이 반복되는 것을 눈여겨 보자. 3. 실천적인 생활 찬양-만일 다윗이 자기의 지위와 승리로 인하여 하나님께 찬양할 이유를 가지고 있었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 주님을 찬양하여야 할 것인가!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야 했던 우리는 어떤 사람들인가? 우리는 어떤 사람이기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고 하늘로 우리를 데리고 올라가시는 것인가? 지위-이 시는 인간의 존엄성을 드높인다. 5절은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지으셨다“라고 읽어야 한다. 인간은 분명히 하나님의 피조물중에서 가장 뛰어난 것임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현대의 가르침은 인간을 동물로 낮춘다. 이는 하나님의 형상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세계는 혼란하다. 야고보서 3장 9절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음을 기억할 때 보다 나은 대우를 할 수 있음을 상기시킨다. 우리가 내적으로 대단히 불안하고, 심히 잔인하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폐위시키고 인간을 저하시켰으면서도 왜 혼란 가운데 있는지 의아해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피조물로서의 책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또한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러한 형상 가운데서 새로워진 성도로서의 책임도 잊어서는 안된다(골 3:9-10/롬 8:29 참조). 능력-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다스릴 권세를 주셨다. 이 말은 우리가 왕으로서 통치한다는 뜻이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다스리며(롬 5:17), 죄와 유혹을 이기고 승리를 얻는다. 우리는 죽음도 다스리며(고전 15:54-57), 죽음은 더이상 우리를 다스리지 못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 땅에 세울 주님의 왕국에서 통치하게 될 것이다. 그 때에 우리가 섬겨야 할 위치는 오늘 여기서의 생활과 충성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마 25:14-30/눅 19:12-17 참조). 약속-이 시는 하나님께서 피조물에게 마음을 쓰고 계심을 명백히 밝힌다. 또한 히브리서 2장 6-9절에 나오는 해석은 그리스도께서 어느 날 피조 세계를죄의 속박에서 구원해 주실 것을 시사한다(롬 8:18-24 참조).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보며 그와 같이 될 때 “우리 몸이 구속될 것“도 포함해서 하는 말이다(롬 8:23/요일 3:1-3/빌 3:20-21 참조).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늘날 보좌에 계시다는 사실은 어느 날 모든 피조 세계가 구속을 받을 것에 대한 증거이다. 얼마나 영광스러운 약속인가! 물론 시편 8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에게만 적용된다. 불신자는 “하나님의 지으신 것“을 찬양할지 모르나(3절), 구원받은 사람들은 “그의 팔“의 능력을 경험하였다.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사 53:1). 하나님은 자기의 손가락으로 우주를 창조하실 수 있으셨다. 그런데 그 우주를 구원하기 위해서는 그의 팔을 뻗쳐야 하셨다! 하나님이 이 땅에 찾아오셔서 구원을 베푸신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눅 19:44 참조). 그러나 어느 날 하나님은 심판 가운데 이 땅을 찾아오실 것이다! 당신은 그리스도를 당신의 구주로 영접하였는가? 당신은 그분이 당신의 생활을 다스리시도록 허락하고 있는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