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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오의 세기
20세기는 왜 피로 물들었는가
니얼 퍼거슨지음 l 이현주 지음 l 민음사
이 원수들 어딨느냐? 캐풀렛! 몬테규!
하늘이 당신들의 기쁨을 사랑으로 죽였으니
당신들의 미움에 어떤 천벌을 내렸는지 보라.
-셰이스피어, <로미오와 줄리엣> 5말 3장
허공 높은 곳의 소리는 무엇인가요?
한숨 같은 어머니의 속삭임
갈라진 땅 위에서 비틀거리는
끝없는 평원 위의 두건을 맨 떼 지은 군중은 누구입니까?
추락하는 탑
예루살렘과 아테네와 알렉산드리아
비엔나와 런던
허상
- T. S. 엘리엇 <황무지> 5부
<서론>
- 죽음의 세기, 사람들은 종종 희생자들을 ‘외국인’이나 ‘인간 이하의 사람들’로 치부하며 살육의 정당성을 주장한다. 조직화 된(뒤에서 말하는 통치 방법) 대규모 폭력행위인 인종학살(정치적 학살)이 급격한 진보(화폐가치 변동성을 감안하면 1500~1870년에 전 세계 성장률은 50% 정도지만 1870~1990년 사이에 6.5배 증가, 즉 성장률이 3배 높다.)를 달성한 20세기에 빈발한 원인은 무엇일까?, 그토록 많은 인간이 죽어(그림 1-1, 29p) 간 이유, 학살 행위(인종 말살)의 동기는 무엇일까? 그리고 서양 세계((제국: 민족국가), 즉 영국, 독일, 프랑스, 러시아, 미국)는 진정 20세기에 벌어진 100년간의 전쟁에서 승리자였는가? 흔히 20세기의 대혼돈을 보통 대공항-파시즘-전쟁의 발발로 설명하는데, 이런 인과 관계로는 유달리 잔혹했던 20세기 폭력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다. 그래서 그 원인을 통치 방법에서 찾아볼 것이다. 그 기저에는 깊은 인종 갈등, 급성장하는 경제환경 속에서의 불안과 긴장감이 그리고 기존 제국의 쇠락이 있었다. 그 와중에 부상한 미국.
2차 세계대전의 잔혹함을 일으킨 인종 갈등은 식량과 번식을 위해 자원을 빼앗으려는 인간이 품고 있는 본능이다. 핵심은 갈등에 있어서 ‘증오(불편함-혐오-증오)’가 간단한 감정이 아니라 점이다. 반감과 호감이 뒤섞인 변덕스러운 양면성이 반복해서 나타나는데, 필자는 1904년부터 1953년까지를 ‘증오의 시기’라고 부름으로써, 인간의 감정 가운데 가장 위험한 감정의 복잡성에 관심을 불러일으키고자 한다. (47p)
- 유전자 풀, 인간 게놈 연구 결과, 인종 간 차이는 외모의 차이일 뿐, 생물학적 구조는 같다. 따라서 인간은 기원이 같으며 외양의 편차는 집단이 살아가면서 환경조건에 따라 신체적으로 상당히 달라졌음을 의미할 뿐인데, 20세기 내내 인간은 신체적으로 서로 다른 인종이 별개의 종인 양 생각하고 행동하면서 일부 집단을 ‘인간 이하’로 분류했다. 20세기의 최악의 전쟁들이 바로 이런 타자를 자신과 다른, 존재 이하라고 생각하는 사고방식을 가진 자들 때문에 일어났다.-괴링이 말한 ‘위대한 인종 전쟁(청소)’-히틀러의 오른팔(총사령관, 나치 제국 원수)과 왼팔 힘러(학살을 진두지휘))
인간은 정착하면서 공동체 규모가 커지면서 농부, 전사, 사제, 지배자 등으로 분업(계층분화)이 이루어졌다. 멀리 있는 문명과도 교역을 통해 우호적 관계를 이루었으나, 선사시대 때와 마찬가지의 동기로(즉, 식량과 번식을 위해 자원을 빼앗으려는 인간이 품고 있는 본능이) 잔혹한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중요한 원인(기본원인)이다.
- 이주와 울타리, 민족성은 가정과 학교, 종교 사원에서 주입된 언어, 관습, 종교적 의식의 결합물이다. 자발적일 수도, 강제로 이루어질 수도 있다. 공격받기 쉬운 소수민족(1차 세계대전 이전에 오스만 제국 내의 아르메니아인이나 2차 세계대전 이전 중동부 유럽 유대인)은 경제적인 힘에 앞서 정치적 힘(공식적이든 비공식적이든 그들을 대표할 정치인)이 더 필요하다. 그러나 한 민족이 권리나 재산, 존재 이유를 박탈당할 운명이라면,아무리 잘 무장해도 역부족이기도 하다.
1920년대 동화가 상당히 진행되었던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 에스토니아, 헝가리, 폴란드 일부 지역, 루마니아, 러시아의 경우에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 1940년대 최악의 민족 갈등(표 1-1)이 발생한 지역이다.
- 인종의 밈, 1492년 스페인에서의 유대인을 추방(알람브라 칙령: 이슬람 세력의 자산 뺏기)했을 때의 신앙을 명분은 삼았으나 실은 핏줄 문제였다.
1785년 스웨덴의 식물학자 칼 폰 린네는 『자연의 체계』에서 인간을 네 종류(아메리카인, 아시아인, 아프리카인)로 나누고 인종 등급을 유럽인을 맨 위에 놓고, 아메리카인(성마르고 고집 세며 느긋하고 자유롭다.), 아시아인(모질고 오만하며 열망이 크다), 그리고 아프리카인(교활하고 느리며 어리석다)을 배치했다. 특히 아프리카인은 유럽인의 변덕에 의해 통치되었다. 놀랍게도 이러한 사고방식(백인우월의식)은 미국 혁명(독립혁명, 1775년에서 1783년까지)이 일어날 즈음에 이미 널리 퍼져있었다. 논쟁 대상은 인종별 차이가 공동의 기원설과 아니면 다원발생설의 주장에 대한 것일 뿐, 등급의 순위는 확고했다. 훗날 영국의 프랜시스 골턴도 『유전되는 천재』(1869)에서 인종별 지능을 열여섯 단계로 나누면서 고대 아테네인을 맨 위에,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을 맨 아래 놓았다(48p)
세습원칙, 예전 사람들은 권력과 특권, 재산은 물론이고, 그에 따르는 사회적 의무(빈곤 구제) 또한 상속된다고 믿었다. 그러다가 18, 19세기에 새로운 정치가들이 세습되는 특권 체계를 타파할 것을 요구하며 민주주의자는 인간이 법 앞에 평등한다(프랑스 인권선언문은 ‘모든 사람은 법 앞에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났다고.’라고 말한다/대한민국헌법 제 11조다 - 「① 모든 국민은 법 앞에서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 ② 사회적 특수계급제도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어떠한 형태로도 이를 창설할 수 없다)고 주장, 자유주의자는 권력이 세습되면 안 되며 지도자는 민중이 선택해야 한다고 주장, 사회주의자는 부가 재력 있는 가문들에 의해 독점되지 않고 개인의 필요에 따라 재분배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을 때, 인종주의자들은 세습원칙이 모든 인간 활동에 적용(인간 등급)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종 이론가들은 피부색과 골상뿐 아니라 지능과 적성, 성격, 심지어는 도덕성과 범죄 성향까지도 세대에서 세대로 유전된다고 주장했다. 이는 근대의 또 다른 역설(제도의 진보 정신의 퇴보)이었다. 관직과 소유권 세속원칙이 사라지면서 대신에 인종적 유산(아리아인종이 최상위 종이라는)이자 특징을 물려받을 수 있었다.
1774년 에드워드 롱은 『자메이카의 역사』에서 유럽인들이 너무 쉽게 온갖 종류의 관능적인 즐거움에 빠져 흑인 여자나 황인종 여자를 얻으려고 애쓰고 그 과정에서 혼혈이 태어난다고 지적했다. 프랑스의 인종주의자 아르튀르 콩트 고비노는 『인종 불평등』(1853~1855)에서 아리아인(백인)이 가장 우수하고 늘 그랬듯이 역사의 모든 위대한 업적을 세웠다고 주장했다. 다른 인종과 결혼을 한 아리아인 때문에 혈통이 흐트러졌을 때 문명이 쇠퇴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고비노가 보기에 흑인종과 황인종이 우수한 백인종 선망은 당연했다. 고비노는 백인의 본질은 남자답고 황인종과 흑인종은 여자답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런 아이들이 계속 태어나 혈통이 흐려질수록 혼란은 증가한다. 그러다 그런 사람들이 너무 많아져서 균형이 완전히 무너지는 상태가 된다. 그들은 인종 무질서를 나타내는 끔찍한 실례일 뿐이다.”라고 했다.(경멸(혐오와 분노의 혼합)의 대상화)
이러한 ‘인종 무질서’에 대한 반감(경멸)이 극단적인 형태를 띠면 차별, 분리, 박해, 추방으로 나타났고 결국엔 인종청소가 시도 되었다. 나치의 ‘홀로코스트’ 사건을 오랜 세월 동안 역사 속에서 인종 차별이 존속되었다는 사실(역사적으로 축적된 혐오)을 부인하고, 특이한 이례적인 ‘홀로코스트’로 간주하는 듯하다. 그러나 이 책의 중심 가정은 20세기 중반에 나타난 독일의 반유대주의가 (보편적인 현상은 결코 아니더라도) 일반적인 현상(증오)의 극단적인 사례였다는 것이다. (히틀러나 나치의 이론가들은 유대인 조직적으로 독일 민족의 피를 더럽히려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전혀 새로운 것이 없는 얘기다. 그러한 생각의 차별과 추방뿐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조직적인 대량학살의 근거가 되었다는 사실 또한 전혀 특이할 게 없다.)
홀로코스트로 사건에서 두드러진 점은 인종 절멸이 아니라, 산업화를 이루고 교양있는 사회의 모든 자원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정권이(통치) 그 일을 추진했다는 사실이다.(50p) 반유대주의는 제3국(히틀러 제국)의 세계관 기초를 이루었고 그 관점은 인간 생물학 특유의 개념인 밈(아리아인종 우월주의 공유)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 (밈(meme)은 한 사람이나 집단에게서 다른 지성으로 생각 혹은 믿음이 전달될 때 전달되는 모방 가능한 사회적 단위를 총칭한다. 밈은 1976년,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에서 문화의 진화를 설명할 때 처음 등장한 용어이다. 유전자가 자가복제를 통해 생물학적 정보를 전달하듯이, 밈은 모방을 거쳐 뇌에서 뇌로 개인의 생각과 신념을 전달한다. 밈학은 1990년대에 밈을 다윈적 모델로 설명하려는 시도와 함께 등장하였다. 밈은 현재 다양한 사회 현상과 문화를 설명하는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다./‘밈’이라는 단어는 리처드 도킨스의 베스트 셀러인 〈이기적 유전자〉(1976)에서 유래되었다. 밈은 복제된 것이라는 그리스 단어 'mimema'에서 나온 'mimeme'을, 유전자(gene)와 유사한 한 음절 단어로 만들어서 '밈'이라는 단어를 만들어냈다) **
20세기가 시작될 무렵 밈(전염된 증오; 반유대주의(인종청소))은 복제되어, 이미 전 세계적으로 아주 멀리 떨어진 지역에까지 전달되었다. 19세기 후반, 반유대주의가 없다는 이유로 유럽 유대인에게 이상적인 이주지가 되었던 아르헨티나에서도 1900년대 초반에 후안 알시나와 아르투로 레이날 오코노르 같은 작가가 유대인들이 아르헨티나 문화에 치명적인 위협을 가하고 있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 피의 국경, 대규모 인종 갈등이 남미보다 중동부 유럽에서 더 많이 발생한 이유. 19세기 이전 중동부 유럽 지역은 왕조 제국들에 의해 분할된 상태였고, 이질적인 이주 집단들은 언어(모국어/일상어)가 다르고 종교(신교도/카톨릭교도/유대교)가 달랐어도 경작하며 자기 지역에 충성심을 갖고 멀리 제국의 군주에게도 충성을 다하며 살았다. 그러나 1800년 이후 민족국가가 이상적인 정치 조직으로 등장하면서 집단들의 배치는 무너지기 시작했다. 민족국가 모델은 집단들의 복잡한 현실과 동질적인 정치 조직이라는 이상과 괴리가 매우 컸다.
이론적으로는 신생 국가에서 이질적인 인종 집단들이 새로운 공동의 정체성에 자신들의 차이를 묻어 버리거나 동등한 집단 간의 연방 형태로 권력을 공유하는 데 찬성할 수 있다. 그러나 다수 집단이 단독으로 또는 주도적인 위치에서 국가와 국가의 자산을 소유할 가능성이 큰 것으로 드러났다. 1940년대에 대량학살이 자행된 지역들이 여러 민족이 정착해 살고 있던 지역들과 정확히 일치한다. (상당수의 나치 지도자가 1871년 당시 국외 거주 독일인이었음이 우연 아니다)
- 변동과 불평분자들, 극단적인 폭력 사태(인종 갈등)가 왜 특정 시기에 집중되었을까?, 경제적 변동과 관련 있었다. 생산량과 소득의 급격한 성장도 후퇴만큼이나 불안을 조성한다. 변동성, 즉 호황과 불황의 빈도와 진폭의 크기에 따라 사회적, 정치적 긴장과 압박감이 강해진다.
1941년 이전에는 각국 정부의 활동(치안, 사법, 공공재 공급 등의 활동)은 시작 단계였다. 재화와 자본, 노동의 국제적인 이동은 상당히 자유로웠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기와 그 이후에 분위기는 급격히 바뀌었다. 정부의 역할이 확대되었고 고정환율제(금본위제)가 무너졌다. 재화, 노동력, 자본을 가장 효율적으로 배분하려는 국제 시장과 고용수준을 유지하거나 높이고 농산물 가격을 안정시키면서 소득과 부의 분배체계를 바꾸려는 정부 활동 중에 보호관세, 적자 재정, 강압적인 징세, 변동 환율제 등, 양차 세계대전 사이에 복지국가와 계획경제 체제에서 실시된 여러 실험은 의도하지 않았을지라도 경제변동(인플레이션과 디플레이션, 성장과 위축)을 촉진하는 결과를 낳았다.
경제의 급격한 변동은 사회 갈등이 증가하는 경향이 크다. 실재 농수산물 가격하락은 부분적인 요인일 뿐, 일반적으로 주가 급등과 급락 같은 금융자본의 격렬한 변동이 20세기 사회 정치적 양극화에 더 큰 영향을 미쳤다.
- 제국 국가, 20세기의 충돌을 이해하려면 배경에 있는 제국을 살펴보아야 한다. 1900년 당시, 세계를 지배했던 다민족 거대 제국의 쇠퇴와 몰락이 그런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이다(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현재의 러시아 연방/그레이트브리트과 아일랜드 연합 왕국, 대영제국/ 1850년대와 1860년대에 탄생한 이탈리아는 피에몬테 제국/ 1871년의 독일은 프로이센 제국/오늘날의 인도는 무굴제국과 영국령 인도 제국의 후계자/ 중화 인민 공화국/미국조차도 ‘제국주의적 공화국’이라고 할 수 있다.)
제국은 제국으로 인해 가능해지는 규모의 경제 때문에 중요하다. ① 제국은 식민지의 자원(세금 징수, 국채 모집)을 마음껏 활용할 수 있었다(핵심 기능). 제국의 깃발 아래 다민족 군대가 전쟁을 수행한 것이다. ② 국경선과 완충 지대를 차지하려고 충돌이 더 커졌다. 발트해, 발칸 반도, 흑해로 이어지는 삼각지는 엔촐레른, 합스부르크, 로마노프, 오스만 왕가의 영토가 만나는 지점으로 네 개의 거대 제국의 지각판이 만나는 단층선이었다. 또한 석유가 20세기의 주요 연료로 등장하면서 페르시아만도 그러했다. ③ 국제적 상업망 통합의 성쇠는 제국의 경제적 제약과 기회 또한 제국의 확장 시기와 방향뿐만 아니라 존속기간과 식민지 시대 이후의 성격을 결정할 수도 있다. ④ 전쟁은 제국의 제국이 막 형성될 때와 몰락할 때 충돌이 특히 자주 발생.
지난 세기, 70여 제국의 넓이와 수명은 다 다르다(신성로마제국 800년부터 1806년까지/중국의 명 왕조-500년/압바스 왕조-500년/오스만 제국-대략 500년/합스브르크와 로마노프 제국-가각 300년/무굴 제국-현제이 이르기까지 200년/이집트의 암루크 왕조와 레프시아의 사파비 왕조-대략 200년) 흥망성쇠의 궤적도 다 다르다. 반면 20세기에 탄생한 신생 제국은 상대적으로 오래가지 못했다(볼셰비키 소련 연방-70년/중화 인민 공화국-아직 소련 연방의 기간에 못미침/비스마르크의 독일 제국-47년/일본의 식민제국-40년/아돌프 히틀러의 제3국-12년 제국의 면모를 갖춘 시기는 6년으로 20세기 제국들은 단명했다.) 때문에 파괴와 살상에서 더 비범한 능력을 발휘했는데, 유례없이 중앙 집권적인 권력과 경제 통제, 사회적 동질성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이들은 19세기에 국가를 세운 조상으로부터 획일성에 대한 무한한 욕구를 물려받았다. 하여 과거의 제국보다 더 제국에 가까웠다. 무력을 사용해서 종교적 법적 제한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새로운 계층 구조를 만드는 데 집착했고 무엇보다 잔인함을 미덕으로 삼았다. 제국의 목적을 위해서 본국, 해외 가리지 않고 국민을 공격했다.
히틀러는 신세대 황제 지망자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이는 20세기 대격변기의 진원지가 새로운 제국 국가의 주변과 정확히 일치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
- 서양의 몰락, 1900년 당시 서양 세계가 동양의 대부분 직역(영국-인도/네덜란드-동인도/프랑스-인도차이나/미국-필리핀/러시아-만주 전쟁)을 지배할 수 있었던 이유는 과학 지식을 생산과 파괴에 체계적으로 적용했기 때문이다. 역사가들은 1900년대 제국주의적 착취 때문에 동양이 퇴보했다고 생각했다. 이는 대부분 착각이다. 유럽은 동양의 제국들이 쇠미했기에 지배할 수 있었다. 따라서 1900년 당시(중동부 유럽의 충돌이 커질 때) 서양의 지배 범위가 어느 정도였는지 헤아려야만 20세기를 올바르게 서술할 수 있다.
일본을 선두로 아시아 국가들이 스스로 또는 유럽에 의해 근대화 즉, 경제, 군사, 법률 체계를 취하게 되었고 소득 격차 또한 줄어들고 있었다. 지난 1500년 이후 4세기 무너졌던 동서양의 균형이 회복이 이루어지고 있는 거대한 변화였다. 아시아 제국은 경제, 군사, 법률 체계, 민주주의, 자유, 평등, 인종, 이 모든 개념은 서양에서 취한 것들이다.
당시 서양의 지배는 서양의 승리가 아니라 위기다.
동양은 단순히 서양화를 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근대화를 했다. 동양인의 눈에 비친 제국주의의 모습은 단순 모방할 가치가 없었다. 물론, 전쟁이 없었다면 방향 전환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서양 열강은 아시아 국민과 자원에 대한 지배를 단념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여러 면에서 볼 때 마지막 유럽 제국이 아시아에서 무너진 시기는 1991년 소련 연방의 해체 이후였다. 그런 의미에서 2차 세계대전이 결정적인 전화점으로 작용함에 따라 20세기가 서양의 승리가 아닌 몰락이라고 보는 시각이 타당하게 느껴진다. 서양이 1900년 당시 누렸던 위세를 다시는 되찾을 수 없다는 점, 동양이 균형 회복 과정에서 그 요소들을 서양의 사상과 제도로부터 취했다는 점, 등에서 서양은 몰락한 것이었다.
- 50년 전쟁, 동화와 통합에 대한 잠재적 ①불안, ②밈 확산, 국경지대의 ③가연성, ④경제변동, 다민족 ⑤제국과 제국 간의 양보 없는 다툼, ⑥서양 지배의 몰락을 알린 격변(충돌), 이 모든 것이 책에서 상세히 설명할 주제들이다.
그 중심에 있는 2차 세계대전은 1939년 시작된 폴란드와 나치 독일, 소련 간에 벌어진 유럽 전쟁이었을 뿐이다. 영국과 프랑스는 1940년이 돼서야 싸움에 뛰어들었고 그로 인해 독일은 서유럽에서 순식간에 승리를 거두었다. 이 모든 사건은 일본이 아시아에서 일으킨 전쟁과 아무런 연관이 없었다. 일본은 중국을 상대로 (1931년 사태가 전쟁이 아니라면) 1937년 전쟁을 시작했다 1942년 중반에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 제국을 상대로 벌인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 중간에 중국, 스페인, 발칸 반도, 우크라이나, 폴란드 등지에서 내전이 일어났다.
한국전쟁은 미국 주도의 연합군과 공산주의 중국의 개입으로 두 강대국 간 정쟁으로 확대되었다. 따라서 이후 두 열강은 대리인을 앞세워 여기저기에서 전쟁을 벌였다. 충돌 무대는 중동부 유럽과 만주, 한국에서 라틴아메리카와 인도차이나, 사하라 사막 이남 아프리카로 옮겨 갔다. 따라서 조직화 된 충돌이 세계 전쟁이 점점 거세지고 있었다고 할 수도 있다.
1989년 혁명(1980년대 말부터 1990년 초까지 발생한 혁명의 물결의 일부로 동유럽과 기타 지역의 공산정권을 붕괴시키게 된 결과를 낳았다. 대표적인 사례-베를린 장벽 붕괴)이나 1979년 혁명(이란 이슬람 혁명 또는 이란 혁명은 1979년 이란에서 발생한 혁명으로 입헌 군주제인 팔라비 왕조가 무너지고 이슬람 종교 지도자가 최고 권력을 가지는 정치체제로 변화되는 결과를 낳은 사건이다 (사실상 신정 체제), 소련 제국의 붕괴로 냉전기에 잠잠했던 민족 갈등이 발칸 반도 주위로 재연되었다. 이는 ‘역사의 종언’이기 보다는 반복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필자는 세계 전쟁을 1904년과 1953년 사이에 위치 시키기로 했다. 50년간의 전쟁이 끝난 뒤에는 ‘긴 평화’가 찾아오는 대신, 필자가 제3세계(제2차 세계 대전의 종전 이후로 사용되고 있다. 몇몇 경우에서는 냉전이나 테러와의 전쟁 같은 제한전에 대한 은유로 사용)의 전쟁이라 부른 전쟁이 이어졌다. 역사가들은 언제나 깨끗한 종결을 원하지만 대도시의 황폐한 모습을 보기 두려워하면서도 갈망하는 한, 전쟁의 연대표의 경계선을 무시하고 재발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