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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점] 치시마(千島) 낙엽송(2)
“어서 와요. 숲은 어때요?”
나쓰에는 기타하라를 보자 친밀한 미소를 띠었다.
“여러 가지 종류의 소나무 숲이 죽 연이어 있어 ㅏㅁ으로 신기하더군요.”
기타하라가 약간 어리광이 섞인 어조로 말하는 것을 요코는 놓치지 않고 들었다.
“마음에 들었다면 나중에 호두나무 숲이나 물푸레나무 숲도 안내해 줄게요.”
나쓰에의 표정은 무척 밝았다.
“그래요? 어머니께서 직접 안내해 주신다면 더욱 고맙고 말고요.”
도오루가 말하자,
“어머니께서요?…….그러시면 너무 죄송스러워서 어떡하죠?”
하고 기타하라는 예의 겸연쩍은 표정으로 나쓰에를 바라보았다. 그 표정에는 소년과 같은 순진성과 청년다운 감미로움이 감돌고 있었다.
“아녜요. 이곳에 있는 동안만이라도 어머니라고 생각하고 응석을 부려도 괜찮아요.”
나쓰에는 정답게 말하고 부엌에서 찬 우유를 가지고 들어왔다.
‘오빠가 엽서를 보냈을 때는 이쪽 사정도 묻지 않고 멋대로라며 난처한 듯이 말하더니. 어찌된 일인지 오늘은 기분이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시네.’
요코는 기타하라를 정답게 대해 주는 나쓰에를 고맙게 생각해야 할 터인데도 웬일인지 고마워할 수가 없었다.
저녁 식사가 끝나자 도오루가 말했다.
“시내에 나가 볼까? 자네는 아사히가와에 처음 왔잖아…..”
“그럼 안내해 줘. 요코 씨도 같이 가지 않을래요?”
“물론 가야지, 요코는 자네의 안내역을 맡아야 하니까.”
도오루가 말했다. 그러자 나쓰에가,
“요코, 집 좀 봐 줘. 엄마는 잠시 물건 사러 나갔다 와야 하니까. 괜찮겠지?”
하고 도오루와 요코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아버지가 곧 돌아오실 텐데요, 뭐.”
“아버지는 오늘밤엔 아홉 시쯤에나 돌아오신댔어.”
나쓰에의 목소리는 들떠 있었다. 기타하라와도오루가 탄 차를 배웅하면서 요코는 나쓰에의 태도가 마음에 걸렸다. 불쾌하다기보다는 좀더 깊숙이 마음속에 엉키는 착잡한 감정이었다. 그것은 소녀 특유의 민감한 감수성이 작용한 것인지도 몰랐다.
요코는 문에 기대어 서서히 저물어 가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까마귀가 숲에서 요란하게 울고 있었다. 멀리 서쪽 하늘에 노랗고 가느다란 조각 구름이 떠 있었다.
누군가 저런 구름을 기요히메(淸姬, 도성사의 전설의 여주인공)의 허리띠라고 표현한 것이 생각났다.
요코는 한참 동안 그 구름을 바라보다가 집안으로 들어와 목욕물을 데웠다.
아무도 없는 집에서 타오르는 불길을 바라보는 것은 역시 쓸쓸하고 적막한 일이었다.
기타하라를 위해 시로가스리(흰 바탕에 검은색 혹은 푸른색의 가느다란 줄무늬가 들어 있는 천)를 사온 나쓰에는 이튿날 하루 만에 재빨리 옷을 만들어 냈다. 아직 한 번도 입지 않은 도오루의 욕의가 있는데도 일부러 새로 천을 떠다가 옷을 만든 것을 요코는 이상하게 생각했다.
기타하라가 집에 온 지 2,3일이 지난 어느 날 오후, 요코는 친구네 집에 놀러 갔다. 돌아와 보니 기타하라가 나쓰에의 어깨를 두 손으로 주무르고 있고, 도오루는 바로 옆에서 잠들어 있었다. 기타하라는 요코를 보자 겸연쩍은 듯이 빙그레 웃었으나 어깨를 주무르던 손을 멈추지 않았다.
나쓰에는 요코를 흘낏 쳐다보고 나서 기타하라에게,
“아, 시원해라. 이제 됐어요.”
하고 멋쩍은 듯이 웃었다. 기타하라가 진지한 얼굴로,
“좀더 해드릴게요.”
하고 계속 주무르자,
“정말 고마워요.”
하고 나쓰에는 어깨에 놓은 기타하라의 손에 자신의 손을 포갰다.
“그러세요? 솜씨가 서툴러서 죄송해요.”
키타하라는 이렇게 말하고 곧 도오루의 옆으로 가서 아무렇게나 앉았다.
“요코 씨, 꽤 늦으셨네요.”
기타하라가 요코에게 말을 걸었다. 요코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쓰에가 기타하라의 손에 자기 손을 포갠 것이 요코의 마음에 걸렸다.
“전 말이죠, 어머니의 어깨를 주물러 드린 경험이 없거든요. 어렸을 때 돌아가셨으니까요. 그래서 ‘어머니의 어깨를 주물러 줍시다’라는 노래를 들으면 어렸을 때부터 언제나 쓸쓸한 생각이 들어 눈물을 찔끔거리곤 했어요. 오늘은 덕분에 효도하는 흉내라도 내게 되어 무척 기쁘군요.”
기타하라는 정말 기쁜 얼굴이었다.
나쓰에와 요코가 마주보며 고개를 끄덕였을 때 그때까지 잠들어 있는 줄 알았던 도오루가,
“거 참 잘됐어.”
하고 돌아누웠다.
문득 기타하라와 요코의 시선이 마주쳤다.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을 도오루는 말없이 보고 있었다.
“이제 그만 일어나.”
기타하라가 말하자 도오루는 일어나 앉았다.
“기타하라 씨, 숲속에 가 볼까요? 어깨를 주물러 준 답례로 호두나무 숲으로 안내해 줄게요.”
나쓰에가 말했다. 요코는 나쓰에의 입술이 여느 때보다 더욱 붉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시로가스리로 만든 옷을 걸친 기타하라와 푸른색 욕의 차림의 나쓰에가 숲속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도오루와 요코는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요코.”
“응.”
도오루는 잠자코 있었다.
“왜, 오빠?”
“내일 기타하라하고 셋이서 소운쿄에 갔다 올까?”
“응. 근데 엄마는?”
“어머니한테는 아버지가 계셔.”
도오루는 내뱉듯이 말했다.
“난 안 갈 거야.”
요코는 도오루를 쳐다보았다.
“안 가다니, 왜?”
도오루는 요코를 바라보았다.
“난 싫어.”
“싫다니 왜?”
“왜라니……? 아무 데도 가고 싶지 않아.”
“기타하라가 싫어, 요코?”
도오루는 요코가 싫다고 말해 주었으면 했다. 그는 요코의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된 후로 그녀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사람은 자기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요즘은 그 생각이 바뀌었다.
‘요코는 우리 집에서는 아무래도 살기 불편할 거야. 만일 나와 결혼한 후에 자신의 출생에 대해 알게 되면 자신은 사랑을 받아 온 게 아니라 동정을 받아 왔다고 오해할 테지. 자기 아버지가 남편의 여동생을 죽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결혼 생활을 계속할 수가 없을 거야.’
도오루는 이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진심으로 요코를 사랑하고 있었다. 호적상의 문제는 가사 재판소에 이의를 제기하여 고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소년 시절부터 요코와 결혼하겠다고 생각해 온 그 마음엔 거짓이 없었다. 그러나 나이를 먹어 감에 따라 그는 요코의 입장을 알게 되었다.
‘요코는 나하고 절대 결혼할 수 없는 몸이야.’
도오루는 이 사실을 자기 자신에게 억지로 납득시켰다. 기타하라와는 같은 방에서 지내고 있었기 때문에 도오루는 누구보다도 그를 잘 알고 있었다. 머리가 좋고 성격도 밝고 깨끗했다. 동정심도 많고 용기도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요코와 결혼할 수 없다면 기타하라에게 요코를 맡기자.’
도오루는 청년다운 이런 성급한 마음에서 기타하라를 아사히가와로 초대했던 것이다.
그래서 기타하라와 요코가 가까워지기를 바라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렇지 않기를 원하기도 했다. 조금이라도 기타하라와 요코가 친밀한 듯한 모습을 보면 도오루는 괴로워서 어쩔 줄 몰랐다.
‘요코만 행복하게 되면 그만이야. 나는 한평생 결혼 같은 것은 하지 않을 거야. 오직 요코가 행복하게 되기만을 빌면서 살아가야지.’
도오루는 자기 스스로에게 이런 결심을 늘 들려주곤 했다.
“기타하라가 싫어?”
이렇게 요코에게 물으면서도 도오루는 마음이 심란했다.
“싫지는 않아. 싫어질 정도로 사귀지도 않았으니까.”
“그렇다면 같이 가도 좋잖아?”
“하지만 기타하라 씨와 교제해야 할 이유도 없잖아, 오빠?”
도오루는 기뻐서 소리라도 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그는 말없이 요코를 바라보았다.
“기타하라는 참 좋은 놈인데.”
‘엄마의 마음에 들다니, 난 그런 사람은 싫어.’
요코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러면서 그녀는 자신의 처지가 쓸쓸하게 생각되어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그녀는 이런 자신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숲 쪽에서 기타하라와 나쓰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점심 식사를 마친 다음 요코는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그릇을 닦으면서도 요코는 기타하라가 지금 어느 방에 있는지 알아맞힐 수 있었다.
‘드디어 내일 기타하라 씨는 돌아가는구나.’
요코는 깨끗이 닦은 그릇을 소쿠리에 담은 다음 다시 그 위에 물을 끼얹고 있었다.
“미안하지만 물 좀 주세요.”
기타하라가 부엌으로 들어오며 말했다.
“네.”
요코는 컵에 물을 따라 내밀었다. 그것을 받으려면 기타하라의 손이 요코의 손가락에 닿았다. 요코는 움찔했다. 이상한 감각이 몸을 스쳐갔다.
기타하라는 컵을 손에 든 채 말없이 요코를 바라보고 있었다. 요코는 재빨리 등을 돌리고 다시 그릇을 닦기 시작했다. 마른 행주로 힘주어 그릇을 박박 문질렀다. 그러나 요코의 온 신경은 기타하라에게 쏠려 있었다. 이윽고 그릇을 다 닦았다. 아직 기타하라는 요코의 등뒤에 그대로 서 있는 것 같았다. 요코는 용기를 내어 뒤를 돌아보았다.
기타하라는 여전히 물이 들어 있는 컵을 손에 든 채 서 있었다.
‘왜 물을 마시지 않으세요?’
요코는 이렇게 묻고 싶었다. 그러나 기타하라에 대해서는 평소의 요코처럼 될 수가 없었다.
요코는 다시 등을 돌리고는 방금 사용한 행주를 소독용 냄비에 넣고 가스에 불을 붙였다.
“요코 씨.”
기타하라가 불렀다.
요코는 말없이 가스의 파란 불꽃을 바라보고 있었다.
‘왜요, 기타하라 씨?’
요코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드디어 내일은 작별이군요.’
이렇게 가볍게 말하고도 싶었다.
‘어째서 나는 이렇게 이상해졌을까?’
요코는 불꽃에서 눈길을 돌리지 않았다.
“요코 씨, 강에 가 보지 않을래요?”
기타하라는 그제야 물을 쭉 들이켰다. 그때 나쓰에가 부엌으로 들어왔다.
“기타하라 씨, 산책하러 가지 않을래요?”
나쓰에가 말했다. 기타하라는 요코를 바라보았다. 기타하라가 내려놓은 컵을 닦던 요코는 두 사람의 옆을 스쳐서 재빨리 자기 방으로 갔다.
‘질색이야. 나는 왜 이렇게 바보 같은지 몰라. 좀더 솔직해야 하는데.’
요코는 자기 방에 오자마자 곧 후회했다.
‘요코는 바보. 좀더 생각한 대로 행동해야 하는 거야.’
요코는 다시 부엌으로 갔다. 기타하라와 나쓰에는 벌써 보이지 않았다. 행주를 삶은 냄비에서 김이 무럭무럭 피어올랐다. 요코는 기타하라가 마신 컵에 물을 다라 마셨다.
도오루와 요코는 기타하라와 함께 집에 묵는 마지막 날 저녁 식사를 다카사고다이에서 할 예정이었다. 세 사람이 출발하려고 할 때 나쓰에가 자기도 함께 가겠다고 했다.
“아버지가 곧 돌아오실 텐데요.”
도오루가 말하자, 나쓰에는 이렇게 대꾸했다.
“아버지는 오늘밤에도 아홉 시가 넘어야 돌아오실 거야. 그러니 오늘 저녁엔 모두들 기타하라 씨의 송별회를 하도록 하자.”
나쓰에는 기타하라 생각만 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만일 아버지가 일찍 돌아오시면 어떡해요? 전화라도 걸어두는 게 좋을 텐데요?”
“걱정 마, 요즘은 날마다 바쁘신 모양이니까.”
나쓰에의 말에 요코는 게이조가 가엾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거 곤란한데요. 쓰지구치의 어머님에게 이렇게 융숭한 대접을 받게 되니 돌아갈 생각이 싹 사라지려고 하는군요.”
“그러니까 여름방학 내내 묵고 가라고 하잖아요?”
아들과 같은 또래의 청년에 대한 말씨가 아니었다. 그러나 도오루는 여기까지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어머니인 나쓰에가 자기 또래의 기타하라에게 마음이 끌리고 있다는 것은 도오루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도오루 자신이 이성으로 느끼는 대상은 으레 연하의 여자로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도오루는 그 나름대로 기타하라를 융숭하게 대접하는 나쓰에의 마음을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요코에게 마음이 끌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어머니는 결혼이라도 하게 되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어. 어머니는 기타하라의 환심을 사서 요코를 기타하라에게 떠맡기려고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것은 도오루가 원하던 일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쓸쓸한 일이기도 했다.
‘어쩌면 요코는 기타하라와 맺어질지도 모른다. 어머니는 요코를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집안을 위해 열심히 기타하라의 환심을 사려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자 기타하라에 대한 나쓰에의 태도에 도오루는 이따금 화가 나기도 했다.
다카사고다이는 쓰지구치 집 맞은편 강 건너의 산허리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곳에는 레스트하우스와 타워가 있었다. 레스트하우스 앞에서 차가 멎자,
“훌륭한 전망이야.”
하고 기타하라가 눈을 가늘게 떴다.
아사히가와 거리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멀리 저녁 햇살을 받은 오유키 산의 연이은 봉우리들이 보랏빛으로 물들어 무척 아름답게 보였다. 그 오른쪽에 도카치 연봉이 병풍을 둘러쳐 놓은 것처럼 죽 이어져 있었다.
“전망이 기막힌 곳이죠?”
나쓰에가 기타하라 곁에 바짝 다가서며 말했다.
“아사히가와는 제법 큰 도시군요.”
“가미가와 분지가 큰 탓이지. 주위가 온통 산 아냐? 그래서 저 산 아래까지가 아사히가와처럼 보이는 거야. 차를 타고 한 바퀴 돌아보면 밭이 한없이 연이어져 있어 굉장히 넓은 분지라는 걸 알 수 있어.”
펄프 공장에서 피어오르는 흰 연기까지도 무척 아름다워 보였다.
“저 숲이 쓰지구치네 집 옆에 있는 시험림이군요.”
기타하라가 손으로 가리키자 나쓰에가 방긋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레스트하우스에 들어가 징기스칸 요리를 시켜 맛있게 먹고 있을 즈음 아사히가와 거리의 가로등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나쓰에도 이날 밤에는 맥주를 마셨다.
“징기스칸 요리는 맛이 좋군요.”
기타하라가 요코를 보면서 말했다. 요코는 말없이 미소를 지었다. 나쓰에는 기타하라를 위해 고기를 구워 주기도 하고 맥주를 따라 주기도 했다.
“어머니, 저도 아들이에요. 기타하라에게 어머니를 빼앗긴 것 같아 좀 질투가 나는데…..”
도오루는 약간 취한 것 같았다. 이렇게 말하는 도오루도 아까부터 요코에게 주스를 따라 주기도 하고 야채나 고기를 부지런히 구워 주기도 했다.
“나는 쓰지구치처럼 여동생을 애틋하게 생각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어. 나도 여동생을 무척 귀여워하지만 쓰지구치한테는 절대 못 따라가. 남매라기보다는 애인 같아요.”
기타하라는 마지막 말을 나쓰에한테 했다. 나쓰에는 갑자기 표정이 굳어졌다. 그러나 곧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사이가 좋았어요.”
하고 눈웃음을 쳤다.
요코는 고깃덩어리에서 스며 나와 흘러내리는 기름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기름이 떨어져 때때로 불이 약해지면서 불꽃이 가물거렸다. 기름이 타는 바람에 연기가 서서히 피어나 방안에 가득 찼다.
“요코는 특별히 멋진 여동생이야.”
도오루는 술이 거나해지자 쾌활하게 말했다.
“자, 기타하라 씨, 다 구워졌어요.”
나쓰에는 기타하라의 접시에 고기를 덜어 주었다. 피망과 양파도 접시에 나눠주었다. 요코는 나쓰에가 기타하라에게 친절을 베푸는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고만 있었다.
식사가 끝나자 네 사람은 밖으로 나왔다. 도오루는 차를 부르기 위해 전화를 허러 가고 나쓰에도 볼일이 있다며 잠깐 자리를 떴다.
요코는 하늘을 쳐다보았다. 별이 하늘 가득 반짝이고 있었다. 요코는 별이 이렇게 많은가 하고 새삼스럽게 놀랐다. 언제나 숲 근처에 살고 있어 별을 예사로 보아 왔기 때문에 미쳐 몰랐던 사실이었다. 요코는 그런 사실을 깨닫자 왠지 마음이 쓸쓸해졌다.
‘하늘의 절반밖에 보지 못하고 살아왔다니…..’
언제나 자신은 무슨 일이나 절반 이하밖에 보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 절반도 보지 못하는,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라고 요코는 생각했다.
“요코 씨!”
갑자기 절박한 기타하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요코는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저……..”
머뭇거리는 듯한 기타하라의 눈이 요코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어싿.
“편지를 보내도 괜찮을까요?”
요코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기타하라는 겸연쩍은 듯이 히죽 웃어 보였다. 요코의 가슴에는,
“편지를 보내도 괜찮을까요?”
라는 기타하라의 말이 끊임없이 울려 퍼졌다.
최근 일주일 동안 게이조는 줄곧 늦게까지 일을 한 탓인지 약간 피곤했다.
상태가 좋지 않은 환자가 있으면 게이조는 당직 의사에게 맡기고 그냥 집으로 돌아올 수가 없었다. 좀더 많은 환자들을 다른 의사에게 맡겨야 그들도 일하는 보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은 그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어물어물하는 사이에 귀가 시간이 늦어지곤 했다. 그도 이런 자신이 싫었다. 그것은 책임감이 강한 것과는 다르며, 무엇보다 소심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오늘은 마치 무슨 결단이라도 내린 듯이 정각 다섯 시에 병원에서 나왔다. 그러지 않으면 또다시 어물어물하다가 늦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오랜만에 아직 해가 지지 않은 밝은 거리를 천천히 걸었다.
“쓰지구치 병원의 원장이 버스를 타고 나릴 수야 없지.”
하고 사람들이 말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게이조는 병원 차는 왕진이나 병원 일이 있을 때 외에는 절대로 타지 않았다. 그는 새벽녘부터 밤늦게까지 혹사당하는 운전기사를 측은하게 여겼다. 그는 아무 데서나 자유롭게 탈 수 있는 버스나 택시 쪽이 편했다. 기분에 따라서는 걷기도 했다. 운전면허를 딴 도오루가 차를 갖기를 원했으나, 게이조는 사주지 않았다. 그는 직접 차를 모든 것을 싫어했으며, 아직 대학생인 도오루에게 차를 사 주는 것은 성급한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게이조는 기타하라를 생각하면서 걷고 있었다. 기타하라가 온 후로 집안에 활기가 넘치는 것 같았다. 그런데 기타하라가 집에 온 그 무렵부터 게이조는 일에 쫒겨야 했다. 그래서 오늘은 천천히 저녁이라고 함께 먹으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그는 도중에 요코를 위해 초콜릿을 살 마음을 먹었다. 가게가 두 집 나란히 있었다. 게이조는 별로 장사가 잘 될 것 같지 않은 조그마한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그 가게는 포장지도 촌스럽고 주인의 포장 솜씨도 서툴렀다. 게이조가 백 엔짜리 초콜릿을 다섯 개 샀더니 가게 여주인은 애처로울 정도로 좋아했다. 게이조는 자신의 사소한 쇼핑이 가게 운영에 큰 도움이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 마음이 무겁기도하고 한편으로는 좋은 일을 했다는 기분도 들었다.
가게에서 나오자 몸이 좀 피곤한 듯하여 택시를 잡았다. 집에 도착하여 현관문을 열려고 했더니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다. 창고에 걸려 있는 열쇠로 문을 열고 뒷문으로 들어가보니 테이블 위에 편지가 놓여 있었다.
‘기타하라 씨의 송별회를 다카사고다이의 레스트하우스에서 하기로 했어요. 마음이 내키면 그리로 오세요.’
‘전화로 미리 연락이라도 해줬어야 하지 않은가?’
최근 일주일 동안 줄곧 늦게 퇴근했다고 해서 오늘도 늦으리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 않나 하고 게이조는 생각했다.
‘기타하라의 송별회는 도오루와 요코에게 맡겨 두면 좋지 않은가. 굳이 자기까지 집을 비우고 가지 않아도 될텐데.’
나쓰에의 한 옥타브 높아진 감정 변화를 게이조는 직접 들여다 본 것 같았다.
기타하라에게 욕의를 만들어 줬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나, 이제 와서 갑자기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여름 내내 묵을 손님이 아니라면 욕의를 새로 만들어 줄 필요까진 없었을텐데.’
게이조는 냉장고 안에서 맥주 한 병을 꺼냈다. 그러나 안주가 될 만한 것이 어디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요코를 주려고 사 온 초콜릿을 안주 삼아 마시기 시작했다.
‘나쓰에를 마흔이 넘은 여자로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누구나 서른 안팎으로밖에 보지 않는다. 스물두세 살의 학생이라면 별로 큰 나이 차이를 느끼지 않을 것이다.’
나쓰에는 마흔을 넘기자 성격이 조금 변한 것 같았다. 아니, 변했다기보다는 부부 생활에 적극성을 띠게 되었다고 말하는 편이 정확할 것이다.
어쩐지 게이조는 불안했다.
‘무라이와의 전력도 있고…..’
게이조는 금세 맥주 한 병을 비웠다. 두 번째 병을 냉장고에서 꺼냈을 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쓰코였다.
“현관문 좀 열어줘요.”
아직 밖은 훤했다.
게이조가 허겁지겁 뛰어나와 현관문을 열자,
“아니, 어떻게 된 거예요? 창문으로 들여다보니까 선생님의 얼굴색이 마치 부인에게 버림받아 기가 죽은 듯이 보이니 말이에요.”
하고 다쓰코는 서슴지 않고 말했다.
“허, 그래요?”
게이조는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요코도 집에 없어요?”
“모두들 도오루 친구의 송별횐가 뭔가 가서……”
다쓰코는 게이조를 보고 장난스럽게 웃으면서 말했다.
“역시 그래서 기가 죽으셨군요. 이 다쓰코가 술친구가 되어 드릴 테니 이제 그만 힘내세요.”
다쓰코는 재빨리 부엌으로 가더니 맥주와 컵, 치즈와 버터 땅콩 등을 갖고 왔다.
“버터 땅콩은 어디 있었어요?”
게이조가 놀란 표정을 지어 보이자,
“나쓰에는 결혼한 후로 깡통은 반드시 한 장소에 놓아두거든요. 전 이 집에 현금이 어디 있고 저금 통장이 어디 있는지도 다 알고 있는 걸요.”
하고 다쓰코는 명랑하게 말하고 나서,
“참, 맞아요. 방금 오다보니 4조의 헤이와거리에서 제가 탄 차 앞을 무라이 씨가 지나가는 거예요. 부인과 애를 데리고 말이에요.”
하고 덧붙였다.
무라이는 설 이외에는 쓰지구치 집을 찾아오는 일이 없었다. 사키코와 별탈 없이 잘 살고 있는 것 같았다.
“무라이 씨도 최근 얼마 동안은 다카기 씨를 만나지 못했다고 하더군요. 어떻게 지내는지 모르겠어요.”
“아, 다카기는 개업한 후로는 아사히가와엔 거의 오지 않아요.”
“병원은 잘 되나 보죠?”
“작년엔 세금을 2백 50만 엔이나 냈다니 보통이 아니지요. 다카기는 장삿속이 어두운 줄 알았더니 다시 봐야겠어요.”
게이조는 이제야 맥주맛이 났다.
오늘밤의 다쓰코는 나쓰에보다 훨씬 싱싱하고 젊어 보인다고 생각했다.
“건강 우량아는 요즘은 전혀 얼굴을 볼 수 없네요. 어떻게 된 거죠?”
다쓰코가 말했다.
“건강 우량아요? 아, 요코 말이군요. 아닌게아니라 그 애는 건강하고 발육도 좋아요. 잘 있어요.”
요새 요코의 키가 더 큰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게이조는 말했다.
“잘 있다니 반갑지만 6월경부터 웬일인지 우리 집에 발을 뚝 끊어 버렸어요.”
다쓰코는 게이조의 컵에 맥주를 따르며 말했다.
“그래요? 웬일일까요?”
게이조는 어쩐지 마음이 걸렸다. 요코는 다쓰코의 집에 일주일에 한번쯤은 으레 찾아가는 줄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고등학교에 들어가더니 갑자기 어른이 되었나 봐요.”
“하긴 그럴지도 모르지요. 댁에는 많은 남자들이 모여든다니까…….”
게이조는 나쓰에가 요코의 발을 묶어 놓았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요코가 다쓰코의 집을 멀리하게 된 것은 이젠 그럴 만한 나이가 되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다쓰코는 웬일인지 아무 말 없이 혼자서 맥주를 따라 마시고 있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아무것도 아녜요.”
다쓰코는 창 밖을 멍하니 내다보았다. 그녀는 정면보다 옆얼굴이 아름답다고 게이조는 생각했다.
‘다쓰코 씨도 아기를 낳은 적이 있었단 말인가?’
이렇게 생각하자 다쓰코가 이상하게 여자로 느껴졌다. 다쓰코가 갑자기 게이조를 쳐다보았다. 게이조는 약간 당황한 듯 눈을 감았다.
“요코는 대학에 보내지 않을 작정이세요?”
다쓰코가 말했다.
“대학에요?”
게이조는 요코의 진학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고등학교를 마치면 바로 결혼을 시킬 참이었다. 게이조에게 두려운 것은 역시 도오루가 요코를 아내로 삼는 것이었다.
“네. 성적도 좋다지요? 우리 집에 자주 드나드는 누마다라는 사회 선생이 있어요. 요코가 다니는 학교 ㅅ너생이지요. 2학기부터 취업반과 진학반으로 나누기 위해 진로를 조사해 봤더니 요코는 취업반에 들어가 있더래요.”
“취업반에요?”
게이조는 취직을 시킬 생각도 없었다.
“누마다 씨가 아까워하더군요. 사회 시간에도 요코는 무척 예리한 질문을 한대요. 누마다 씨는 꼭 대학에 갔으면 하더군요.”
게이조는 잠자코 있었다. 하루 속히 결혼시켜 이 집에서 내보내고 싶다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화내지 말고 들어 주세요. 전 요코를 대학에 보내고 싶어요. 어차피 언젠가는 결혼시켜야 할 테니까 마음을 넓게 갖고 지금부터 저한테 맡겨 주셨으면 해요. 지금까지 애써 키워서 저한테 주기는 아깝겠지만 말이에요.”
다쓰코의 뜻밖의 제안에 게이조는 갑자기 뭐라고 대답해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게이조가 잠자코 있는 것을 보고 다쓰코는 말을 이었다.
“역시 무리한 주문이었군요. 사실 그런 좋은 아이를 달라는 쪽이 염치없는 거지요. 전 재산이라야 별로 많지는 않지만 그 애한테라면 다 줘도 아깝지 않을 거 같아요. 그리고 좋아하는 공부를 실컷 하게 해줘서 마음껏 뻗어 나가게 했으면 싶어요.”
‘다쓰코 씨에게 요코를 주어 버리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게이조는 약간 마음이 움직였다. 집에 두기보다는 다쓰코에게 맡기는 편이 요코에게도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선생님 댁에는 돈이 썩어나도록 많이 있으니 대학은 말할 것도 없고 프랑스나 영국으로 유학까지 보낼 수도 있겠지요. 따라서 섣불리 제가 나설 계제가 아니라는 것은 백 번 알지만 그 애가 진학하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그만 불쑥 이런 생각을 해 본 거예요.”
“아니, 오히려 우리 쪽이 잘못이지요. 전 날마다 일에 쫓기다 보니 요코를 대학에 보낸다는 것은 미처 생각지도 못했으니까요.”
“요코는 가고 싶다고 하지 않던가요?”
“나쓰에한테는 뭐라고 얘기했겠죠.”
“제가 괜한 얘기를 꺼냈나 봐요. 하지만 앞으로 무슨 일로든 저한테 주신다면 언제라도 기꺼이 받아들이겠어요.”
다쓰코는 이렇게 말하고 나서 차를 불러 집으로 돌아갔다.
게이조는 어쩐지 오늘밤에는 나쓰에와 얼굴을 마주치기 싫어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다. 이불 속에서 그는 요코를 정말 다쓰코에게 보내 가능하면 도오루에게서 멀리 떨어뜨려 놓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적당한 기회에 나쓰에와 의논해 봐야겠다고 생각하는 사이에 연일 쌓인 피로 탓인지 게이조는 깊이 잠들어 버렸다.
집에 돌아온 도오루와 기타하라의 웃음소리에 잠을 깨어 시계를 보니 아직 아홉 시 전이었다. 이때 방문이 소리 없이 열리고 나쓰에가 들어왔다. 게이조는 눈을 감은 채 잠자코 있었다. 나쓰에는 잠시 방을 들여다보고는 곧 거실로 가버렸다.
간간이 나쓰에의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게이조는 화가 치밀었다. 기타하라가 겸연쩍게 웃는 얼굴이 눈앞에 떠올랐다. 어쩐지 나쓰에가 기타하라의 옆에 바싹 다가앉아 얘기를 하고 있을 것 같았다. 기타하라의 체온이 나쓰에에게 전해져서 때때로 두 사람이 얼굴을 마주 바라보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잠이 완전히 달아나 버렸다.
이윽고 복도에서 나직한 발소리가 들려오더니 다음엔 억센 남자의 발소리가 들렸다. 게이조는 온몸의 신경을 두 귀에 집중시켰다.
“정말 편지할게요. 잘 자요, 요코 씨!”
기타하라의 나직한 목소리였다. 기타하라는 곧 이층으로 올라갔다.
‘나쓰에는 아니군!’
게이조는 어둠 속에서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자신의 질투가 우스꽝스럽게 여겨졌다.
‘기타하라와 요코로군.
게이조는 도오루의 얼굴을 눈앞에 그려보았다.
기타하라가 돌아간 지 사흘째 되는 날이었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도오루는 자기 방에 올라가 카로사의 <아름다운 유혹의 시절>을 번역하고 있었다. 도오루는 중학교 때부터 게이조의 도움을 받아 독일어 공부를 해왔다. 그래서 대학에 들어간 지 2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도오루의 독일어 실력은 상당한 수준에 달해 있었다.
번역을 하다 지친 도오루는 창가에 가서 밖을 내다보았다.
‘집이 꽤 많이 들어섰구나.’
도오루가 어렸을 때만 해도 집 근처는 드넓은 감자밭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시험림 근처까지 빨강, 파랑, 초록색 지붕의 집들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그래도 아직 옥수수밭이나 감자밭이 군데군데 보이는 것은 반가운 일이었다.
문득 창 아래를 내려다보니 뜻밖에도 요코가 뜰에서 풀을 뽑고 있는 것이 보였다. 흰 손수건으로 머리를 싸매고 뜨거운 햇볕 아래 쪼그리고 앉아 열심히 풀을 뽑고 있었다. 남이 보고 있다는 것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는 요코의 모습을 바라보니 도오루는 왜 그런지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요코는 흰 블라우스에 검은 반바지를 입고 있었다. 요코는 짧은 반바지를 입는 걸 싫어했지만 몸을 움직이기에 편해 일할 때에는 언제나 그것을 입었다.
도오루는 몇 해 후에 자신의 아내가 되어 지금과 마찬가지로 뿔을 뽑고 있을 요코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한가로운 일요일 한 때, 의사가 된 자신의 아내인 요코가 일하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건 단념해야지.’
요코를 아내로 맞아들이려면 서로 남이라는 사실을 알려야 한다. 그렇게 되면 요코는 자기가 누구의 딸이라는 것을 알게 될지도 모른다.
‘우리 둘은 친남매로 일생을 보내야 한다.’
도오루는 요코가 이미 자신이 얻어온 아이인 줄 알고 있다는 것을 미처 몰랐다. 요코의 모습에서는 조금도 그런 낌새를 알아챌 수 없었던 것이다.
‘기타하라에게도 요코의 출생을 알려서는 안 된다.’
기타하라에게 사실을 털어놓고 요코를 부탁할 생각을 했던 도오루였다. 도오루는 그런 자신의 어리석은 생각을 알아차리고 몸을 떨었다.
‘알고 있는 사람은 아버지와 어머니, 나, 그리고 삿포로의 다카기 아저씨 뿐이다. 설마 이 비밀이 새어 나갈 리는……하지만 어쩌면 어머니의 입을 통해 새어 나갈지도 모른다.’
도오루는 아무것도 모르고 열심히 풀을 뽑고 있는 요코가 가엾어서 견딜 수 없었다. 요코를 부르려고 했을 때 우체부의 빤간 자전거가 집 앞에 멈춰 섰다.
요코가 손에 묻은 흙을 털고는 편지를 받아 들었다. 우체부가 사라지자 요코는 그 중에서 한 통의 편지를 발견하고 급히 봉투를 뜯었다. 그러더니 무슨 생각에서인지 반바지의 커다란 앞 호주머니에 그것을 쑤셔 넣고 숲쪽으로 걸어갔다. 숲속에서 천천히 읽으려는 모양이었다.
‘기타하라가 보낸 편지구나.’
갑자기 도오루는 가슴이 갑갑해 왔다.
“요코!”
도오루는 엉겁결에 창 밖으로 상반신을 내밀고 소리쳤다.
“왜?”
요코가 돌아보았다.
“편지 왔니?”
“미안. 오빠에게도 왔어.”
요코는 이렇게 말하고 나서 곧 이층으로 뛰어 올라왔다. 봉투를 뜯지 않은 것은 나쓰에와 도오루에게 보낸 기타하라의 편지였다.
“기타하라가 너한테도 편지를 보냈어?”
요코는 얼굴을 붉히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요코는 벌써 기타하라를 사랑하고 있나?’
도오루는 허전한 생각이 들었다.
‘좋아, 그건 잘된 거야. 요코는 내 진짜 여동생이니까.’
도오루는 기타하라에게서 온 편지를 책상 위에 얹어 놓은 채 아무렇지도 않게 번역하던 노트를 폈다.
요코는 말없이 계단을 내려가 세면장에서 손을 씻었다. 손을 씻는 김에 얼굴도 씻고 반바지를 회색 플레어스커트로 바꿔 입었다.
“기타하라가 너한테도 편지를 보냈어?”
하고 도오루가 물었을 때 갑자기 기타하라의 편지가 소중하게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무심코 흙이 묻은 손으로 기타하라의 편지를 읽으려고 했던 것이 자기가 생각하기에도 이상했다. 요코는 자기 방에 들어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간이의자에 걸터앉았다. 그러다 곧 흰 레이스를 떠서 씌운 방석이 깔린 책상 앞에 똑바로 앉아 기타하라의 편지를 꺼냈다. 그리고 아까 손으로 찢었던 봉투를 가위로 얌전히 잘랐다.
오른쪽으로 약간 비껴 올려 쓴 딱딱한 글씨가 가득 쓰여 있었다.
쓰지구치 요코 씨
멀리 시레토고(知床) 반도가 아득이 바라보이는 샤리의 바닷가에 와 있어요. 속돌(輕石)이 뒹굴고 있는 곳이지요. 해마다 오는 곳이지만 속돌이 이렇게 많다는 것은 금년에 처음 알았어요. 오늘 아침 이 바닷가에 웬 젊은 여자가 파도에 밀려왔어요. 죽으려고 바다에 뛰어들었는데 파도가 그녀를 바닷가로 밀어 올린 겁니다. 기절해 바닷가에 쓰러져 있던 그 여자는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지요.
죽으려고 해도 죽을 수 없는 경우가 잇다는 것이 저에게는 의미심장하게 와 닿았습니다. 그야말로 문자 그대로 죽으려고 했던 인간의 의지도 무엇인가의 의지에 의해 훼방을 받았다는 사실을 엄숙하게 받아들였지요. 단지 우연이라고만 잘라 말할 수 없는 어떤 커다란 존재의 뜻이 거기 깃들여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사람이 죽임을 당했을 때보다 더 엄숙한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오랫동안 요코 씨의 집에 머물러 있었던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1962년 7월 기타하라 구니오
편지는 이것으로 끝이었다. 한 중 정도 종이가 찢어지도록 글자를 지워버린 흔적이 남아 있었다. 요코는 그 지워진 글자 위를 손가락으로 몇 번이나 만져 보았다. 그녀는 웬일인지 자신에 대한 감정이 조금도 나타나 있지 않은 이 편지에 몹시 마음이 끌렸다.
요코는 기타하라의 편지를 다시 읽어 보았다.
‘어떤 커다란 존재의 뜻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신을 가리키는 것일까?’
어린 요코에게 ‘신’이라는 존재는 막연한 것이었다. 신에 대해서는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신을 믿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자신이 약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기타하라의 편지를 읽고 ‘커다란 존재의 뜻’이라는 말에 공감을 느꼈다. 다른 사람이 쓴 것이라면 그냥 스쳐 버렸을지도 모르는 말이었다.
‘내가 이 집에 얹혀 살게 된 것도 커다란 존재의 뜻일까?’
요코는 누가 자기를 이 집에 데리고 왔는지 알고 싶었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나를 이 집에 보낸 것은 누구일까?’
요코는 아버지 아니면 어머니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갓난아기인 자기를 보고 이 집에 데려온 것은 게이조였는지 나쓰에였는지 알고 싶었다.
‘기타하라 씨처럼 생각한다면 내가 이 집에 오게 된 것은 내 친아버지나 친어머니의 뜻도 아니고 게이조와 나쓰에의 뜻도 아닌, 그러니까 그것들을 초월한 어떤 존재의 뜻이라고 보아야 할까?’
요코는 ‘운명’이라는 말을 생각해 냈다. 그러나 기타하라가 말하는 ‘커다란 존재의 뜻’은 운명과는 좀 다를 것 같았다.
‘어떻게 다를까? 기타하라 씨가 본 그 여자는 죽고 싶은데도 죽지 못하고 목숨을 건지게 되었다. 정말 이 세상에는 인간의 의지를 초월한 더욱 커다란 의지가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그것은 운명이라는 것과는 다른 것 같다. 그렇다면 어떻게 다를까?’
요코는 좀더 깊이 생각해 보고 싶었다. 그때 복도에서 발소리가 들리더니 나쓰에가 얼굴을 디밀었다.
“요코, 기타하라 씨한테서 편지가 왔다지?”
“네.”
“어디서 보낸 건데?”
나쓰에는 요코 옆에 와서 앉았다.
“샤리에서요.”
“어머, 엄마한테는 기타미(北見)에서 보냈던데. 겐세이(原生) 화원은 꽃이 피는 게 좀 늦다고 씌어 있더구나.”
나쓰에는 요코의 무릎 위에 놓인 기타하라의 편지를 보았다.
“기타미는 좋은 곳인가 보죠?”
요코는 편지를 봉투에 넣으면서 말했다.
“그게 기타하라 씨의 편지니?”
“네.”
“뭐라고 씌어 있던?”
“샤리 바닷가에 어떤 여자가 파도에 밀려왔대요.”
“자살인가 보지?”
“네, 하지만 기절했을 뿐 목숨은 건졌대요.”
“어머, 그래? 어디 좀 읽어봐도 될까?”
요코는 말없이 기타하라의 편지를 나쓰에에게 건네 주었다. 나쓰에는 편지를 받아 들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 편지는 끝내 요코의 손에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